|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 #000 20%, #000 80%, #000000);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초대 | 제2대 | 제3대 |
| 모문룡 | 황룡 | 심세괴 |
| <colbgcolor=#000><colcolor=#fff> 모문룡 毛文龍 | ᠮᠠᠣ ᠸᡝᠨ ᠯᡠᠩ[1] | |
| | |
| 본명 | 모백룡(毛伯龍) |
| 출생 | 1576년 2월 10일 |
| 명나라 저장성 항저우 전당강 충효항 | |
| 사망 | 1629년 7월 24일 (향년 53세) |
| 부모 | 아버지 모위(毛偉), 어머니 침씨(沈氏) |
| 정실 | 장씨(張氏) |
| 재임 | 제1대 동강진 총병관 |
| 1622년 ~ 1629년 7월 24일 | |
1. 개요
| [특별전] 삼국의 앓던 이, 명나라 장수 모문룡 | |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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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모문룡/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 평가
今則徒享富貴,無意進取。識者皆憂其終不利於中原,而為我國之深患
(모문룡은) 요즘 부귀만 탐할 뿐, 나가 싸울 의지는 하나도 없습니다. 식자라면 누구나 그가 결국 명나라에 무익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조선)에도 우환이 될 것이라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원년 윤10월 25일, 정구의 평가
(모문룡은) 요즘 부귀만 탐할 뿐, 나가 싸울 의지는 하나도 없습니다. 식자라면 누구나 그가 결국 명나라에 무익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조선)에도 우환이 될 것이라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원년 윤10월 25일, 정구의 평가
鴨錄江頭建鼓旗, 間關百戰壯軍威
압록강변에 깃발과 북을 걸고, 산해관 바깥의 백전에서 위세를 떨치었네
전겸익(명나라 예부상서)
압록강변에 깃발과 북을 걸고, 산해관 바깥의 백전에서 위세를 떨치었네
전겸익(명나라 예부상서)
현대뿐만 아니라 위와 같이 모문룡은 당대에도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인물이었다. 모문룡이 무시 못 할 군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과장하거나 여론 플레이에 매우 능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명나라 말기 예부상서를 지낸 전겸익 같은 경우는 모문룡을 높이 평가했지만, 병부상서를 지내며 모문룡의 상관을 역임한 원가립[2] 같은 경우는 모문룡을 수만냥과 수만명력으로 고작 그 정도밖에 못하느냐고 질책할 정도였다. 이런 모문룡에 대한 평가는 원가립의 뒤를 이어 병부상서를 역임한 원숭환에게도 이어지며, 결국 원숭환은 모문룡을 숭정제의 재가도 받지 않고 처형하여 이후 자신의 몰락 원인이 되었다.
모문룡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조선에선 조선왕조실록에 부정적인 내용을 실었고 이에 한국에서는 모문룡이 평안도 지방에서 끼친 피해 때문에 전공은 전혀 없다는 주장이 웹을 중심으로 퍼져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당대에도 모문룡을 높이 평가한 자들이 많았고, 명말청초부터 원숭환의 모문룡 처형이 결국 가도를 중심으로 한 명나라의 대후금전선의 일각을 무너뜨려 명나라가 망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단 모문룡이 조선에 큰 피해를 끼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당장 평안도 일대에서 모강도(...)라고 불렸다. 상국의 장군이 아닌 일개 해적 취급을 당한 셈이고 실제로 그의 가도 패거리는 해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도가 싹 털리고 명나라 유민이고 병졸이고 죄다 몰살시켜 버린 뒤 조선에서 전혀 이에 대해 동정여론이 없던 이유도 가도하면 이가 갈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선은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적극 참전하여 가도를 문자 그대로 갈아 엎어버렸다.
다만 그가 원숭환이나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하는 일부 역덕들의 주장처럼 군사적 잉여였다는 주장은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 애당초 조선 입장에서는 날강도 같은 자가 맞지만, 후금과 청은 모문룡을 매우 경계했고, 이 때문에 정묘호란도 조선 깊숙이 왔다가 그냥 가도의 명군에게 보급이 끊길까 봐 두려워 서둘러 강화를 맺고 철수했다. 모문룡이 처형되자 숭덕제는 이를 기뻐하여 부하 장수들과 거나한 연회를 열었다고 하며, 이렇게 가도에서 모문룡이 사라진 이후에는 숭덕제는 거침없이 친정을 하여 조선 수뇌부를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애초에 조선한테 민폐였는지 아닌지는 모문룡의 능력을 따질 때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며 모문룡 사후 모문룡의 부하들이 이후 청나라로 투항해 남명을 완전히 박살내고 번왕에 봉해진 것을 보면, 그의 군사적인 업적과 능력이 전무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3.1. 긍정적 평가
중국에서는 당대에도 부패한 장군 혹은 오랑캐를 막아내던 명장이라고 의견이 갈렸으며, 현대에도 대략 비슷한 설로로 나뉘어 있다.[3]모문룡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모문룡이 후금의 배후에서 견제하며 청군의 산해관 병력을 요동 반도로 분산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후금의 배후를 견제해서 후금이 대명 전선에 올인하지 못하도록 일정 역할을 했기 때문에 명나라의 대후금 전선의 압력을 덜게 하였다. 이 때문에 후금은 산해관 공략을 일단 유보하고 조선부터 치게 된다.
이렇게 보면 모문룡이 정묘호란 때 싸우지 않았던 이유도 군사력을 보존하고 청을 견제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을 선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4]
모문룡과 명나라 조정은 바다를 두고 먼 거리를 유지했고 명나라 조정의 재정난으로 제대로 된 지원을 받기 힘듬에도 불구하고 1만 명에 달하는 해군과 수백 척의 군함을 유지하는 비용이 필요했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조선에 식량을 요구하거나 약탈을 하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었다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한다.[5]
모문룡이 청나라와 진행한 밀무역은 그 밀무역의 수익으로 군비를 충당할 경우 조선에 요구하는 군비 지원이나 약탈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추가로 만성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청나라에게도 식량을 판매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산해관 방면을 넘어 식량을 약탈할 동기와 필요성을 억제하는 순기능이 있었을 수 있다.
또한 그 부하들 중 상당수가 변방의 해적이나 부랑인 출신이기는 하지만[6], 이들은 군사적 재능이나 지휘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런 모문룡의 부하들은 모문룡 사후 후금에 귀순하여 후금의 선봉장이 되었고, 결국 이들의 손에 이자성군과 남명이 멸망한다. 즉 모문룡의 부하들이 전투를 피하기는 했지만 전투력 자체가 낮은 편은 결코 아니었다는 걸 의미하고 작정하고 싸워야 할 때가 되면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전력이 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7]
처음 모뮨룡이 이끌던 부하는 100-200명 정도 남짓이었는데 이를 1만 명이 넘는 규모로 키우고 유지한 것도 모문룡에 대해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가 이끌던 부대는 지상전 병력도 있었으나 주력은 수군이었기 때문에 해군 사령관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동강진 병력은 애초 함대가 주 구성원이었으며 함대에 딸린 일종의 해병대, 즉 해군 육전대와 같은 지상전 병력인 기병, 보병, 포병 등이 같이 있었다.
그 외에도 모문룡이 비록 부패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사업 수완이 뛰어났고 상업을 적극적으로 이끌어서 명나라와 조선 간의 사무역을 촉진시켰다는 관점도 있다. 그리고 이런 사업수당으로 벌어들인 자금의 상당 부분은 동강진의 군사력에 쓰였고, 이것은 후금을 긴장시켰다.
동강진 - 조선 간의 무역으로 인하여 동강진만 일방적으로 수혜를 본 것은 아니었다. 양자 간의 무역은 조선에게도 일정 부분 도움을 주었다. 동강진에 대한 지원 및 거래가 한창이던 1625년, 조선은 기근으로 인하여 양곡 부족 사태를 겪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했던 등주에서 양곡을 매수하였는데, 이때 곡물을 구매하기 위하여 동강진과의 무역을 통해 확보했던 은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무역 사례는 아니지만 같은 해, 인조 책봉을 위한 詔使의 접대를 위해 동강진에서 은을 빌린 다음, 현물로 상환을 한 적도 있었다. 또한, 당시 화약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던 염초를 얻기 위해 동강진과 무역을 한 사례도 있었으며, 동강진으로 들어온 상당한 물량의 염초가 조선으로 밀매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8]
모문룡의 처형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모문룡을 죽인 것이 왜 원숭환의 패착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9]
모문룡 처형 이후 청나라에 투항한 모문룡의 부하들이 결과적으로 청의 화포 역량 발전에 영향을 끼쳤고[10] 막강한 수군을 이끌고 투항하여 청이 갑자기 해군력에서도 명과 맞설 수 있게 되었으며, 모문룡의 부하들이었던 경중명, 상가희 등은 뒷날 청나라 번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모문룡 처형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원숭환의 화포를 쓴 수성 전략은 적군이 강한 공성포로 맞서면 쓸모없었으니 심각한 문제였다.
모문룡이 죽은 후 가도를 이어받았던 진계성은 그의 부하인 유흥치에게 죽고, 유흥치는 다시 등주와 조선을 약탈하고 다녀서 조선 조정에서는 군사를 보내 가도를 토벌하려고 하기도 했다. 결국 유흥치는 후금에 투항하려다가 부하인 심세괴에게 죽었는데, 만약 유흥치가 이 당시 후금에 투항했다면 후금은 가도의 수군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모문룡의 다른 부하들인 공유덕과 경중명은 그 이전에 모문룡이 원숭환에게 죽을 때 등주로 도망가 손원화의 밑으로 들어갔는데, 이들은 이후 반란을 일으켰다가 나중에 등주의 병력을 이끌고 그대로 후금에 투항해 버린다. 이런 것들을 보면 모문룡이 생전에 했던 패악질이나 줄타기와는 별개로 요동에서 그의 전략적인 위치나 부하들을 통제하는 능력 자체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모문룡은 현대뿐만 아니라 당대 명나라 유신들 사이에서도 극단적으로 인물평이 엇갈리는 사람이었지만, 그 부하들의 면면을 보면 모문룡이 일부 역덕들의 주장처럼 전혀 군사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잉여라고 보기는 힘들다. 청나라의 산해관 입관 이후 남명을 진압하여 멸망시킨 것은 오삼계를 제외하면 모두 모문룡의 부하들이었다. 청나라의 장강 이남 장악은 오삼계를 제외하면 이들 모문룡의 부하들[11]의 활약으로 가능했으며, 모문룡이 잉여였다면 그 부하들들도 전혀 군사적으로 무능했어야 하지만, 그 부하들은 남명과 정성공군 격파라는 군사적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공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청조에서도 그 세 명을 번왕으로 봉한 것이다.
일부 역덕들은 모문룡의 조선왕조에 대한 패악질을 강조하면서 군사적 잉여였다고 주장하지만, 애당초 명나라 본토와 단절되었기 때문에, 해상보급이 쉽지도 않은 데다가 생산력이 부족한 가도에 주둔하면서 1~2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려면 해적질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는 명나라가 망한 후 모문룡과 비슷하게 대만에 주둔하면서 중국 남부를 세력권으로 두고 청나라를 습격했던 정성공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성공도 한때 현재의 저장성, 장쑤성, 푸젠성 등의 화동 일대 해안지방을 모두 자신의 세력권으로 넣었으나, 정성공과는 달리 부하들은 명실부흥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망이 더 강했다. 대만은 가도보다 훨씬 넓고, 농지도 훨씬 많은데도 정성공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하들의 해적질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중국 남부의 백성들은 처음에는 복명을 외치던 정성공을 지지했지만 해적질 때문에 민심이반이 일어났고, 그 결과 멸망했다.
모문룡의 부하들은 그의 사후 다롄시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으며, 이 비석은 높이가 3미터에 달하며 현재도 전해진다. 모문룡의 고향인 항저우에도 그의 무덤이 있다.
3.2. 부정적 평가
모문룡의 군공이 어느 정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상당히 뻥튀기 하거나 다른 사람의 공을 자기 것처럼 가로채는 데 능했음은 여러모로 확인이 된다. 그를 출세가도로 이끈 진강대첩부터 과연 모문룡의 공인지 아니면 그의 상관이었던 왕화정의 공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으며, 이후에도 그가 활약했던 여러 전장에서 비슷한 논란이 계속 있었다. 또한 조선 백성을 학살하고 그 수급을 마치 전장터에서 적을 죽인 공처럼 꾸미기도 했다. 그의 상관이었던 병부상서 왕가립과 원숭환 모두 모문룡을 "실제 군공은 별거 없다"고 평가절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또한 청나라 건륭제나 강희제 시절 자신들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명나라의 충신들에게는 시호를 내리거나 벼슬을 추증했지만[12], 모문룡에게는 그 어떤 시호도 내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대부터 모문룡의 평판이 매우 안 좋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명사에서도 모문룡의 행적은 원숭환전에 딸려서 알 수 있고, 독립된 열전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였다.
위에도 있지만 원숭환은 모문룡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당치도 않은 얕은 재주와 작은 그릇밖에 안 되는 모문룡이 해도(海島)를 근거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내가 최고다.’라고 하는가 하면, 이젠 용무가 없다는 듯이 국법을 집어 던지면서 ‘누가 나를 어떻게 하랴.’ 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 밑빠진 독에 물 퍼붓 듯 향궤(餉饋)를 공급해 주었습니다만, 그가 실제로 견제한 일이 뭐가 있었습니까. 개진(開鎭)했다고 하는 10년 동안 요동 땅을 한 치라도 회복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속이면서 그가 보여준 것이라곤 그저 많은 관원을 자신의 사유물화한 사실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를 사로잡고 금백(金帛)을 약탈하여 대낮에 국중(國中)에서 강도질을 하는 한편, 항복해 온 오랑캐를 죽이고 난민(亂民)을 살육한 것으로 날마다 사마(司馬)에게 공을 보고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끝없이 으스대고 요구하면서 동노(東奴)를 큰 이익 챙길 좋은 보물덩이로 삼고, 아무 때고 토색질하고자 조선땅에 외부(外府)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조정만 무시할 뿐 아니라 속국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염려되었습니다. 이미 요지 부동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으니, 어찌 반역자의 주벌을 늦출 수 있었겠습니까.
설사 위의 긍정적인 면을 모두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모문룡이 조선에서 부린 행패는 그야말로 극악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정묘호란 내내 가도에 처박혀 있다가 다 끝나고 나서 부하들을 보내 청군은 건드리지 않고 청군에 의해 변발로 머리를 깎은 애먼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목을 베어다가 명나라 조정에 청군의 목이랍시고 바쳤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 수가 1만에 달했다고 한다. 더구나 조선 서해안가를 중심으로 무역하다가 기분 내키면 약탈을 저지르고 조운선이나 지방 관아를 공격하여 관곡도 털었던지라 평안도 사람들은 모문룡을 모강도라 부르며 청나라 군대보다도 더 무서워할 지경이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도 모문룡은 계륵과 같은 존재였음은 분명하다. 제거하자니 그가 운영하는 가도의 전략적 가치가 너무 높고 가만 두자니 그의 비행이나 폐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군자금 모금을 명목으로 자국을 약탈하는 모문룡을 좋게 보았을 리 없다.[13] 조선왕조실록에서 모문룡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4. 대중매체
- 홍콩의 소설가 김용이 쓴 소설 《녹정기》(1969~1972)에서는 황태후 행세를 하는 신룡교 교주 모동주의 아버지로 나온다. 물론 작중 시점은 모문룡이 이미 사망한 시점이기 때문에 등장 없이 언급만 있다.
5. 기타
- 모문룡이 마오쩌둥의 조상이라서 모문룡이 현대에 높이 평가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마오쩌둥의 집안은 후난성 토박이 성씨인 샤오산(韶山) 마오(毛)씨이며 집안 내력은 대대로 농민이었다. 또한 마오쩌둥의 출생지는 후난성의 중심지인 창사이다. 모문룡의 원적은 후난성에서 북쪽으로 수백km를 가야 닿는 산시성이며 출생지는 마오쩌둥의 고향 샤오산에서 양쯔강을 따라 1000km 더 가야 닿는 저장성 항저우 출신이다. 더구나 모문룡의 집안은 농민이 아니라 원래는 상인 이후에는 향신계급이었다. 아버지 모위는 돈으로 사기는 했지만 생원이었으며, 항주에서 자라나던 모문룡의 아들 모옥(毛鈺)[14]은 명나라가 망하기 직전 원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었고, 향신계급으로 일생을 마쳤다.[15] 설령 만에 하나 모문룡이 마오쩌둥의 일가 사람이라고 해도 마오쩌둥은 아버지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봉건제를 경멸했으며, 숭정제 때 랴오닝성 단둥시에 세워졌던 모문룡비가 마오쩌둥이 주도했던 문화대혁명 때 박살 나서 마오쩌둥이 사망한 이후인 1979년에 재건할 정도였다.# 도리어 마오쩌둥은 모문룡을 죽인 원숭환을 존경해서 베이징에 있던 원숭환의 묘소가 도시계획상 철거위기에 처하자 마오쩌둥이 직접 지시해서 보존했을 정도였다. #[16]
- 예전 교과서를 보면 모문룡의 명군이라는 이름으로 모문룡이 마치 명군을 이끌고 조선을 도우러 온 것처럼 묘사한 것도 없지는 않은데 행적을 보면 알겠지만 조선에게 도움을 준 건 하나도 없고 한 거라고는 가도에 주둔하여 민폐를 끼친 것뿐이지 좋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즉, 애초에 묘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1] 만주어식 표기다. 발음은 Mao Wen Lung(마오원룽). 출처는 만문노당(건륭제 당시 만문원당을 다듬고 조금 수정해서 편찬한 사서.)이다. 현대 중국어 발음도 마오원룽이다.[2] 이 사람은 처음에는 모문룡을 굉장히 높이 평가했다.[3] 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인 것이 잘못인가 글 / 주가웅[4] 실제 전투를 해서 병력을 소진시키거나 땅을 획득하지는 못하지만 모문룡을 막기 위해 상당수 군사를 방어에 투입하는 과정에서 산해관으로 보내지는 병력들의 수가 감소하고 산해관 전투가 명군에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후금은 병사 개개인은 강하지만 인구수가 적었기 때문에 이렇게 병사들을 붙잡고 있어도 후금이 받는 피해는 크다.[5] 물론 조선 입장에서는 아무리 이런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좋게 보긴 힘들고 상당 금액을 착복해 자신의 부정축재에 사용한 것도 좋게보긴 어렵다.[6] 사실 이것은 모문룡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 항상 보이는 현상이다. 중국은 중앙권력이 약화되면 지방의 비적이나 유협집단, 호족들이 군벌이 되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이는 한고조나 그 주위인물들, 유관장, 주원장도 이런 부류였고, 20세기 들어서 중화민국 시절의 군벌들도 상당수가 이런 자들이었다.[7] 특히 해군 전력은 청군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기 때문에 모문룡이 거느리는 1만의 해군은 단순 1만 명의 병력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8] 출처: 명청교체기 동강진의 위상과 경제적 기반, 서원익.[9] 원숭환은 모문룡을 처형한 후 모문룡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직접 관리하지 못한 것에서도 2번째 패착이 있다 볼 수 있다. 원숭환이 정말 모문룡을 처형해야 할 상황에서 처형하더라도 해군이나 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직접 자기 관할로 넣고 모문룡의 측근들을 회유하거나 또는 완전히 제거하고 자신의 부하들을 배치했어야 했다.[10] 청나라는 조총, 홍이포, 불랑기포 등 화약 무기와 막강한 수군을 거저 얻게 되었다. 그것으로 병자호란에서 강화도를 쉽게 공략할 수 있었고 이후 명나라와의 화력전에서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게 되었다.[11] 상가희, 경중명, 공유덕[12] 그리하여 원숭환 뿐만 아니라 청군이나 이자성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손전정, 노상승도 모두 청나라에서 시호를 받았다.[13] 애초에 조선을 두 번의 호란에 시달리게 만든 장본인이 모문룡이다.[14] 생몰년도 : 1621년 ~ ?년[15] 이후 모문룡의 부하들이었던 번왕들이 모옥을 찾아와 청나라의 출사를 권유했지만, 모옥은 거절하고 야인으로 지냈다. 모문룡이 간신배라는 일부 주장에도 불구하고 모문룡의 아들은 명나라에 끝까지 충성을 바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숭환의 아들 원문필은 역적으로 몰린 아버지 때문에 후금으로 귀순, 청나라의 장수로 활약했다.[16] 물론 이 묘도 문혁당시 홍위병에 의해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