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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시대의 성공한 반정
무인정사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인조반정
仁祖反正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1623년 3월 12일 (음력)[1]
장소 조선 한성부 창덕궁 및 인근
원인 광해군의 폭정 (봉산옥사, 계축옥사 등)
광해군의 對-후금간 중립외교
교전 세력 <rowcolor=#C00D45,white> 조선 조정
(진압군)
능양군 세력
(반란군)
주요 인물
지휘관

광해군 (국왕)
지휘관

능양군
신경진 (효성령별장)[2]
김류 (거의대장)
참가자

이이첨[3]
정인홍[4]
유희분[5] † 등
참가자

이서[6]
이귀[7]
김자점[8]
최명길[9]
구굉[10]
이괄[11]
병력 불명 2,000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진압 실패
- 광해군 폐위 및 인조 즉위
- 중립외교 철폐 및 친명배금 노선 강화
영향 정묘호란, 병자호란후금의 연이은 침공
1. 개요2. 반정의 시작3. 반정의 진행4. 반정의 결과5. 반정의 영향6. 인조반정을 다룬 미디어들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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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상(인조)이 의병을 일으켜서 왕대비(인목왕후)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雲宮)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로 내쫓고 이이첨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해 1번째 기사
인조반정()은 조선의 4대 반정(쿠데타)의 하나로, 1623년 4월 11일(광해군 15년 음력 3월 12일) 서인 반정 세력이 광해군대북 세력을 축출하고 왕의 조카인 능양군 이종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 및 추대한(인조) 사건이다. 계해년에 일어나서 계해반정 또는 계해정사(癸亥靖社)라고도 한다. 주도자는 왕이 되는 능양군과 흔히 4대장으로 일컬어지는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최명길이다.[12]

핵심 인물들이 정2품 정도였던 중종반정[13]과 비교하면, 인조반정은 그보다 낮은 종3품 관직자들이 주도하였다. 인조반정의 4대장들이 현직이거나 직전에 지냈던 관직들은 모두 종3품 부사직이었다.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동생인 중종이 반정이 일어난 것을 알지도 못했으나 신하들에게 추대되어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위세가 높아 왕의 본처인 단경왕후 신씨는 왕비 책봉도 되었고, 중종 본인이 조강지처임을 내세웠음에도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압박받아 결국 폐위되었다. 반면 능양군은 모의 과정에서 김류의 집에 찾아가기도 하고 심기원이 군사를 모을 비용을 대고, 거사 일에는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왕이 거처하던 창덕궁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양군 또한 처음에는 차기 군왕 복수 후보자 중 한 명이었을 뿐 신하들이 선택한 사람이었다. 반정 추진 과정에서 선조의 부마 박미[14]는 능양군에 대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기도 했다.[15] 그래도 인조는 훗날 그를 포용하며 이는 신하가 임금을 택한 때의 일이니 어찌 개의칠 것이냐고 하고 혜민서 제조로 등용하였다. 또한 인조실록의 첫 번째 기사에서도 이서, 신경진이 김류와 함께 '추대의 계책'을 세웠다고 하였으며, 즉위 교서에서도 신하들의 추대를 받은 것임을 밝힌다.[16]
"나는 덕이 부족하여 선왕이 남기신 가르침을 받들어 삼가 울타리의 거처를 지키며 일생을 마치려 하였지만, 다행히 충성스럽고 의로운 두세 신하가 종묘·사직이 위험에 빠져 망하려고 하는 것을 걱정하고 사람의 떳떳한 도리가 무너져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대의를 분발하고 내란을 안정시켜 자전(慈殿)의 위호를 바로잡은 후 이어 덕이 모자란 나를 추대하기를 원하였다. 나는 아래로 여러 사람의 뜻에 밀리고 위로 대비의 뜻을 받드니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진 것과 같은데 그 어찌 감당하겠는가."
인조실록 1년 3월 기사조

연산군 때는 내각을 구성하던 신하들마저 연산군에게 등을 돌리고 반정파에 붙었으며 반정파도 이를 선선히 응낙했다. 반면 인조반정은 왕의 지지 기반인 대북 전체가 타 정파의 공공의 적이 된 판이라 이들 전부를 타깃으로 삼았고, 상당수 북인을 제거했다. 북인 중에서 특히 대북의 중심을 이루는 사람들이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에서 싹쓸이되었지만, 소북이나 경기 일대의 대북 학맥은 주류학파가 된 서인과 남인에 비교할 수 없어도 살아 있었다. 오히려 북인 계열들은 이후 원래 같은 동인이었던 남인에 통합되어서 활동했다.

결과적으로 반정을 통한 인조의 집권은 실질적인 조선 제2왕조의 창건으로 평가된다. 당파로만 보아도 한 붕당의 씨를 말려버리고 한 붕당의 절대 우위를 만들었고, 왕통으로 보아도 이후 조선의 모든 국왕은 인조의 후손이기도 하다. 이른바 조선 전기와 후기 왕가를 나누는 실제적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성공 가능성이 낮은 도박이 성공한 케이스이지만, 동시에 반정 직후부터 카운터 쿠데타(이괄의 난)가 일어났음은 물론 사대와 민생이라는 명분도 부실하게 되었다는 미묘한 평가를 받은 사건이기도 하다.[17]

2. 반정의 시작

소성왕대비(인목왕후) 김씨의 유폐를 계기로 불만 세력의 저변이 넓혀지고, 5년 간 쟁점을 차지했던 외교 노선 문제는 마지막 1년에 이르러 국가 행정을 마비시켰다. 명나라의 징병칙서 거절 및 후금과의 배후교섭 등으로 대표되는 광해군의 친금에 가까운 외교노선은 대비 폐위와 달리 그 논쟁에 있어서 지지하는 상소가 단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신료들은 왕명을 무시하거나, 출근을 거부하면서 행정 체계가 마비되고 있던 것이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광해군 말기 2~3년간, 부세 부담과 강제 노역의 압박 속에서 농민경제가 총제적인 붕괴에 들어서게 된다.[18]

반정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620년, 왕의 옥사에 대한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불만 세력이 조금씩 등장한다. 이 중에서 능양군의 외삼촌인 구굉은 친구 이서와 조카인 구인후, 신경진, 최명길 등을 은밀히 포섭해 거사를 모의했다. 구굉은 그 후 많은 병력을 수하에 둔 장만을 끌어들여 거사를 행하려 했으나 장만은 위험하다고 여겨 구굉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고 결국 거사는 수포로 돌아갔다.[19]

처음 시작은 구굉, 이서 등이 주도했으나, 반정에 실질적인 공을 세운 주도자는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으로 이들은 반정 성공 후 모두 반정공신(反正公臣) 목록에 올랐다. 반정 직전 황해도 평산 부사였던 이귀는 호랑이 1마리를 잡아 그 가죽을 광해군에게 진상한 뒤, 이렇게 주청한다.
호환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나, 경계 지역을 넘어서 쫓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착호갑사[20]경기도, 황해도 일대에도 파견 가능하게 해주십시오.

왕이 이를 허락하자, 사전에 모의한 장단 부사 이서의 군대와 합류해 이 병력이 반정 당일 주력이 된다. 이 와중에 이귀가 작당해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이귀는 무고하다는 상소를 올리며 역으로 고변자와 대질 심문하자고 버텼다. 대북 일당이 이귀의 탄핵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했다.

1623년 음력 3월 12일 밤, 반정 실행 직전 이이반이 배신해 김신국박승종에게 반정 사실을 일러바쳤다.[21][22] 하지만 연이은 고변으로 감각이 무뎌진 왕은 후궁들과 연회에 빠져 그 대처를 소홀히 했다.[23][24] 반정군도 고변 사실을 들은 대장 김류가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나 어찌저찌 결국 궐에 입성하였고 인조반정은 성공하였다.

3. 반정의 진행


능양군의 600~700명의 병력을 필두로 장단의 이서 군, 이천의 이중로 군이 속속 합류했다. 그러나 반정 직전 포섭한 이이반[25]이라는 인물이 어찌된 셈인지 내막을 고변해 반정 세력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났고 특히 대장을 맡기로 한 김류가 집에 틀어막혀 두문불출하자 이에 급한 대로 무관인 이괄을 대장으로 창의문으로 진군했다.[26] 게다가 이미 이들과 내통한 훈련대장 이흥립(박승종의 사돈)이 창의문을 내어주어 별다른 저항 없이 궁궐을 접수했다. 반정군은 도끼로 돈화문을 부수고 궁궐에 돌입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다.[27] 반정군에게 붙잡혀 온 죽천 이덕형(李德泂)과 윤지경은 처음에는 인조에게 절을 하기를 거부했지만 반정이라는 사실을 듣고 나서야 인조에게 절을 했으며 인조에게 광해군을 죽이지 말것을 부탁했기에 이덕형과 윤지경의 충직함에 사람들이 감탄 했다고 한다.
승지 이덕형·정립이 배알하였다. 【군인이 두 사람을 잡아 왔는데, 상의 좌우 사람이 절을 하게 하니, 덕형이 말하기를 "무슨 사건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절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김류 등이 거의(擧義)한 사실에 대해서 말해 주자, 덕형이 정립과 함께 두번 절을 하였다. 보덕 윤지경(尹知敬)은 입직하여 담벽 속에 숨어 있다가 잡혀 왔는데 역시 절을 하지 않으려 하자, 신경유가 칼을 뽑아 베려고 하였다. 이에 상이 급히 말리고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사건의 내용을 말해 주게 하자 지경도 절하였다. 】
광해군일기[중초본]187권, 광해 15년 3월 13일 계묘 2번째기사 1623년)
이때 덕형이 도승지로서 대궐 안에 있었는데,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연이어 인조에게 청하여 “전 임금을 살려주소서. 전 임금을 살려주소서.” 하니 눈물이 쏟아져 흐르고 흐느낌이 심하여 말소리조차 이룰 수가 없었다. 후에 또 스스로 청하기를, “전 임금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죄를 지닌 채 그 전 벼슬에 그대로 있는 것은 맑은 조정에 큰 누가 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마음은 반정하던 날에 내가 이미 알았으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뒷날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덕형의 충의는 내가 반정하던 날 알았노라.” 하였다. 보덕 윤지경(尹知敬)이 분주히 내전으로 들어가 광해를 찾았으나 보지 못하고, 불빛 속에서 중궁 유씨(柳氏)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땅에 엎드려 청하기를, “원컨대 세자를 따라 빠져나가서 일을 도모하소서.” 하였다. 일설에는 문이 닫혀 안에서도 모두 숨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창졸간에 무사에게 끌려가게 되었는데 무사가 칼을 들어 치려 하는 것을 이귀가 보고 급히 말렸다. 이끌고 인조를 뵙게 하니, 꼿꼿이 서서 절하지 않고 말하기를, “밤중에 군사를 일으킨 사람이 누구이기에 내가 가벼이 무릎을 꿇겠소.” 하였다. 김류가 말하기를, “능양군이 부득이 종묘사직을 위하여 이 일을 일으킨 것이오.” 하니, “그러면 어찌하여 궁실을 태웠소?” 하였다. 김류가 말하기를, “군사가 실화하여 탄 것이지, 일부러 불놓은 것은 아니오.” 하였다. 또 묻기를, “전 임금은 어떻게 처우할 것이오?” 하니 “죽이지 않는 것으로 대우할 것이오.” 하니 지경이 바로 내려서서 절하였다. 《일월록》
연려실기술 제23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반정이 성공하자, 서궁에 유폐 중이던 대비는 혹시 자신을 해하려는 음모가 아닌가 싶어 궐문을 걸어 잠갔다. 반정의 수뇌부들이 와서 왕을 폐했으니 문을 열어도 된다고 청했음에도 무시했으나 능양군이 직접 와서 설명하고 나서야 믿고 자신이 이 날을 보기 위해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나갔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반정 세력을 지지하여 명분을 실어준다. 왕은 야밤의 기습에 제대로 대처해 볼 겨를조차 없이 궁궐을 탈출해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했으나, 얼마 안 가 밀고자 때문에 붙잡혔고, 결국 폐위된 뒤 유배되었다.

옥새를 내리기 전에 대비가 왕과 왕세자의 목을 베어 살점을 씹기 전에는 책봉이고 나발이고 없다고 버텨서 잠시 소동이 있었으나, 애시당초 능양군 일행은 대비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반정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하들이 임금을 폐한 예는 있어도 주륙(誅戮)한 예는 없다고 잘라 말했고, 대비가 그러면 이이첨, 류희분이라도 자기 손으로 처단해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했으나 즉위 후에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권력이 없던 대비는 결국 옥새를 내려준다.[28]

4. 반정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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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3월 13일 인조에 의해 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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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이 성공한 직후부터 즉시 북인 제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정인홍[29]과 이이첨을 비롯한 폐모론에 적극적이었던 대북의 핵심 요인 대부분이 사형을 당했고, 200여 명에 달하는 그 추종자도 유배에 처해졌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당시에는 북인 내에도 이이첨처럼 강경한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온건한 이들(소북파)도 다수 있었다.

유희분과 소북 출신에 폐모론을 반대했으니 반정공신들과 죽천 이덕형 등이 살려주자고 주장했지만 그 청을 거절하고 처형했는데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능창군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형 능양군이 가산을 털어 유희분에게 뇌물로 바치면서 동생을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유희분은 돈만 받아먹고는 들은체 만체 했으며 능양군이 자신을 만나려고 하자 취했다는 핑계를 그 광경을 본 조국필이 왕손이 동생을 살리키 위해 10리 길을 찾아왔는데 그 정상이 가련한데도 왜 만나보지 않느냐고 설득했는데도 무시했다고 한다.
일찍이 능창군 인조의 동생 의 옥사가 일어나니 인조가 살리려고 백방으로 도모하였는데, 희분의 사랑하는 첩이 기회를 타서 뇌물을 한없이 요구하므로 인조가 가산을 기울여도 오히려 그 욕심을 채우기에 부족하였다. 희분이 일찍이 그 매부 조국필(趙國弼)의 강정(江亭) 연회에 갔는데, 인조가 뒤따라가서 희분을 보려고 하였으나, 희분이 취했다고 핑계하고 보지 않았다. 국필이 말하기를, “왕손이 그 동생을 살리기 위하여 10리 길을 찾아왔으니, 그 정상이 또한 가련하다. 그대는 왜 만나보지 않는가.” 하였으나, 희분이 듣지 않았다. 이때에 조정의 신하 중에 희분이 폐모론(廢母論)을 찬성하지 않았다고 하며 살려주려는 이가 있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삼창(三昌)의 죄가 어찌 다름이 있으랴.” 하였다. 《공사견문》
연려실기술 제23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결국 능창군이 유배지에서 자살한 것을 빌미로 유희분과 유희발을 처형시켰다고 한다.[30]

이후에 중북 유몽인이 광해군 복위를 꾀하고 있다는 무고를 받아 처형당하고, 이괄의 난, 박홍구의 역모 사건을 거치면서 광해군 시절에 폐모론에 대해 온건 세력이며 북인 내에 권력 실세였던 유몽인, 기자헌, 박홍구가 연루되어 처형되었고 북인의 세력들 중에서 광해군 시절, 북인 내의 실력자와 측근 세력들은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박승종도 역시, 이전부터 인조와 악연이 있었으니 대북 이이첨과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인조의 아우 능창군이 얽힌 신경희의 옥사를 부풀렸던 추관이 바로 박승종이다. 최고 원인제공자인 왕은 죽일 수 없고 그 다음이 박승종이었고 인조는 반정공신들 의사가 어떻든 동생의 원수들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나마 박승종은 저항을 멈추고 자결한 덕분에 둘째 아들과 형제들의 목숨은 보전할수 있었다.

그리고 소북과 중북의 실무관료들, 김신국, 윤휘, 이경전, 정온, 남이공 등은 김류 줄타고 살아남아 주요 관직을 전전했다.

한편 왕의 부인 중전 류씨와 세자 부부 등 가족들 또한 폐서인되어 유배에 처해졌으며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이유 없이 죽여버린 건 아니고, 폐세자가 유배지를 탈출하려다가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폐세자 내외는 이로 인해 자결하였으며, 폐비도 화병으로 죽게 된다.

삼촌을 죽이면 폐모살제라는 명분이 흐려지기에 왕은 음식과 의복을 보태주고 광해군이 보고 싶어한 궁녀를 보내주기도 하는 등 어느 정도 신경을 써 주었고, 광해군은 환갑 넘게 천수를 누렸다.

반정의 주역인 이귀, 김류, 이서, 신경진[31]을 위시로 한 사대장과 최명길, 장유, 심기원, 이시백, 이시방,[32] 김자점 등 33명은 정사공신으로 신 정권의 요직을 차지했고 마침내 서인이 득세하게 되었으며 반정을 방조했던 남인들도 남인 원로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2등 공신에 봉해진 이괄은 자신이 1등 공신이 아니라는데 불만을 품고, 핵심 공신 김류와 척을 지며 처신을 엉망으로 하다가 역모에 연루되어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반정 직후 앞뒤 사정을 모르는 명나라는 이를 그닥 환영하지 않았다. 왕이 뭘 잘못했기에 폐위됐냐는 비난과 왜군을 끌어들여 왕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다고. 나중에 모문룡의 추천으로 22개월만에 명나라의 승인을 얻었고, 때문에 이후 모문룡이 평안북도 철산군 가도에 눌러앉아 벌이는 행패를 제어하기 힘들어 고생했다. 청나라의 침공의 주요 명분 중 하나가 가도의 모문룡이다. 이괄의 난 당시 이괄에게 더 호의적이어서 조정에서 모문룡을 설득하는 데 비상이 걸렸던 적도 있다. 정충신이 이괄이 가도와 손을 잡으면 필승이라고 추정했을 정도였다.

광해군 재위기간 내내 이어진 거대한 궁궐 공사는 중단되고, 세금이 덜어지면서 민생은 분명 이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영정법, 대동법, 호패법 등 각종 제도개혁은 광해군 때에 토목공사와 수탈로 손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많은 시행착오와 지난한 실무 인재 육성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인조반정의 공신들의 흥망은 다양했다. 다소 과격한 성품이었던 이귀는 이후 10년 동안 왕의 총애를 못 입다가, 그나마 막판에 왕의 친부 정원대원군의 추숭(원종)[* 인조는 선조와 소성대비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지만 왕이 자신은 정원군의 아들로서 즉위한 것으로 하기 위하여 '원종(元宗)'이라는 묘호까지 올렸다. 대원군은 왕이 되지 못한 왕의 친부에게 올리던 것이니 상관없지만, 묘호는 왕이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정원군은 왕이 될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심지어 선조도 자신의 부친인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숭한 것에서 그쳤다. 이는 유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일이기에 대다수의 관료들이 반대하였는데, 왕은 이를 밀어붙였고, 결국 통과시켰다.

본인은 만족했을지 모르지만 이후 소현세자가 급사하고, 차자인 효종이 뒤를 잇게 되면서 발생하는 예송논쟁의 단초를 제공하였다.[33]에 찬성해 신임을 얻었지만 그 1년 뒤 사망하고[34]

김류는 처음엔 이귀와 대비되어 일찍이 정승에도 올랐지만[35] 추숭과 민회빈 강씨 사사에 반대해 왕의 노여움을 샀고 아들의 사형을 청하는 신하들의 행보에까지 합류해야 했다.[36]

김자점은 군사 부분에 밝은 신무관료로서 어영청을 정비해 중앙군 강화에 공을 세웠지만 인조 말년에 봉림대군(효종)이 세자가 되는 것과 강빈 사사에 찬성해 권세를 누리다 효종 때 산당에 의해 힘을 잃고 결국 '김자점의 옥사'로 인해 아들들과 함께 역률이 적용되어 거열형을 받는다.

심기원은 인조 때 왕이 아꼈음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 이후 나라가 잘못 돌아간다며 세자를 옹립하려다가 포기하고 회은군을 세우려다가 걸려서 복주된다. 최명길 또한 두번의 호란으로 척화파에게 공격받고 횡의 문제로 인해 한동안 청의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사안을 해결해 귀국한 뒤에는 소현세자 가계를 정리하고 봉림대군으로 후사를 바꾸는 조치로 인해 마음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구굉, 구인후, 이서, 신경진은 무신 출신이라 상대적으로 권세가 덜했던 이들이다. 하지만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 반정 이후 서인계 무장은 훗날 5군영이 되는 군벌을 조직해 실권을 행사했다. 구굉과 구인후는 능성 구씨, 신경진은 평산 신씨로 원래 조선 최고의 명문 무가 출신이었고[37] 왕의 인척이기도 했다.[38]

구굉은 능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판의금부사, 오위도총관, 병조판서, 훈련대장, 총융대장 등을 역임했다. 스스로 왕 앞에서 일국의 병권이 모두 자신에게 모였다고 말할 정도로 위세가 높았다. 구인후는 구굉 생전에는 반정 현장에 있던 구굉만 못했지만 심기원의 옥사 이후로 능천부원군, 좌의정까지 오른다. 시호는 충무공. 능성 구씨 일가의 군부 장악력은 정조 대 구선복이 몰락하고 장용영을 신설할때까지 지속되었다. 신경진은 훈련대장과 각 판서에 삼정승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효령대군의 후손 이서 역시 완풍군에 봉작되었다.

5. 반정의 영향

내(인조)가 즉위한 이래 일찍이 한 번의 사개(使介)도 왕래시키지 않았다. 그러자 정묘년 봄에 그들 적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 변방에 기습하였다.
인조실록 28권, 숭정 6년1월 29일 2번째 기사
인조반정 직후 집권층은 모문룡과 명 사신 맹양지(孟養志)에게 광해군을 비난하면서 인조 정권은 명에게 동심협력을 할 것을 피력하였다. 왕은 광해군은 끝끝내 수락하지 않은 모문룡의 둔전 및 염전 요구를 허락하여, 그의 신뢰를 얻고자 하였으며, 도성 방어책과 '친정'을 논의하면서 여론에 힘입어 어영사(御營使)를 발족하고 자신이 3군을 모두 거느리고 친정하겠다는 유지를 내려 친정 계획을 공식화했다.

한편으로는 광해군대 진행되던 물밑 외교를 중단했다. 즉, 반정 직후에는 역관, 차관의 파견 자체를 중단했으며, 후금이 월경할 경우 간과종사(干戈從事)하고, 후금의 교섭을 요구해오면 신중히 대응하면서 모문룡 측과 정보 공유를 지침으로 삼았다.

물밑 외교의 단절로, 광해군 대 여진인 쇄환은 중단되고, 반정 이후 포획한 여진인들은 가도의 동강진이나 국내의 도서 지역에 구류했다. 그러나 모문룡은 구실을 갖춘 동맹이 아니었고, 교섭을 단절하여 후금의 정보를 알 수 없었던 조선은 정묘호란병자호란에 무력하게 당하고 현실과 빨리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39]

인조반정 이후 몇년 만에 발발한 정묘호란 과정에서 인조를 필두로 한 집권층이 접전 자체를 회피하여 일관되게 화친을 추진한 것에 대한 반발로 척화론이 득세하였으며, 후금의 요구에 대한 반동으로 더욱 강렬해져 ‘화친이 아니라 항복’이라며 인조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거나, 이귀, 이서, 최명길 등을 참수하자는 극단적인 요구까지 제기되었다.[40]

결국 인조 정권은 후금과 강화를 맺음으로써 인조반정 교서의 명분 중 43%를 차지한 배명(背明)의 명분을 상실하였으며, 그것은 광해군보다 더 명을 져버린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41] 이러한 영향 속에 1627년 9월 강원도 횡성군에 은거한 이인거가 화친에 분개하여 '창의중흥대장'을 자칭하며, 주화 인사들을 처단하고 의주로 나아가 후금을 막겠다고 군사를 모았다가 발각되었다.[42] 거기다가 왕은 역적의 고변만으로 끊임없이 역모의 추대자로 거론됐던 인성군을 자진시켜 반정의 양대 명분 중 하나였던 폐모살제에 대한 비판까지 무색하게 했다.

병자호란 이후 한양으로 환궁한 인조는 인성군의 관작을 회복시켜 폐모에 관한 명분을 지키고자 하였으며,[43] 배명 대신 폐모의 명분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호란 이후 편찬된 거의 모든 문헌에서 반정의 명분을 광해군의 폐모에 집중시키고, 배명 행위는 거론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효의 가치는 어떠한 경우에도 범할 수 없다는 명제가 절대 가치로 굳어지고, 성리학적 종법에 따른 가족과 가문을 극단적으로 중시하는 분위기에 추동력을 제공했다.[44]

6. 인조반정을 다룬 미디어들

조선시대의 다른 세 쿠데타인 무인정사, 계유정난, 중종반정에 비해 묘하게 현대 매체에서 덜 다뤄지는 사건이다. 인조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인조 대 자체가 치욕스러운 시대라는 대중적 인식도 있고 그나마 병자호란과 이후의 인조 후반기가 주된 배경이 되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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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1] 광해군 15년. 양력으로는 1623년 4월 11일이다.[2] 거사 계획이 들통나는 바람에 좌천된 탓에, 직접 참여하진 못했다.[3] 예조판서 겸 대제학[4] 대북 세력의 영수. 전 영의정.[5] 병조판서[6] 장단부사 겸 경기방어사[7] 평산부사[8] 전 병조좌랑[9] 전 병조좌랑[10] 능양군의 외삼촌. 무인으로 반정 초기 멤버이다. 반정 당일 능양군을 모시고 있었다.[11] 평안병사 겸 부원수[12] 1등 공신 중에서도 격이 다른 다섯이다. 반정의 성공 이후 정사공신의 선정 과정에서 인조와 친견하여 대화하는 사람은 나이와 명망이 있던 '4명 + 최명길' 다섯 신하이다.실록 링크[13] 박원종은 정2품 지중추부사이며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외척이였고, 성희안은 종2품 이조참판을 지내고 실직에서는 물러난 상태(한편 성희안도 박원종만큼이 아닐 뿐 정종의 아들 덕천군의 외손자라 왕실과 혈연관계가 있었다), 신윤무는 종3품 부정이었다. 게다가 이 당시는 뚜렷한 당파같은 것도 없었고 세력을 초월해서 연산군의 폭정을 버티지 못하고 무언가 해야한다는 기조가 있었기에 임사홍, 신수근 같은 이들을 제외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연산군 조정 내에 임관했던 대다수 신료들이 반정 당일 우르르 몰려서 합류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래서 참가자들 면면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지는 고위직 원로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데 대표적으로 중종반정의 최선임자이자 최고위직이였던 영의정 유순이 있다.[14] 금양위, 정안옹주의 남편, 박지원의 현조부[15] 더군다나 인조는 부인인 정안옹주의 조카로 박미에게는 처조카가 된다.[16] 참고 - 오수창, 반정, 조선시대 군주 축출의 논리와 성격[17] 물론 이후로 무리한 궁궐 공사가 중단되고 세금과 부역이 감소하고 대동법이 확대되는 등 민생 면에서는 나아지긴 했다.[18] 김성우(2015), "광해군 치세 3기(1618~1623) 국가 재정 수요의 급증과 농민 경제의 붕괴", 《대구사학》 118; 계승범(2021), 《모후의 반역》, p. 299~300.[19] 신경진은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전 병조판서 신립의 장자로 동생들과 함께 반정을 주도적으로 계획했음에도 사전에 누설되어 효성령별장으로 쫓겨나 반정 당시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고, 발언권이 줄어들어 매부였던 이대엽(이이첨의 장남)을 살리지 못해 그가 죽는 걸 눈뜨고 봐야만 했다. 그나마 신경진은 무신임에도 정승자리에 올랐고 같이 반정을 꾀한 구굉, 구인후 일가와 함께 조선 후기까지 무반 명문집안으로 자리잡아 군권을 휘어잡았다.[20] 호랑이 사냥을 위한 특수부대[21] 어느 야사에는 이렇게 나온다. 원래 거사 일은 열흘 뒤인 3월 22일이었는데 마침 당대의 점술 대가인 김치에게 반정의 성공 여부를 점치러 간 심기원은 그날 거사하면 실패할 것이라는 점괘를 듣고 만다. 이에 놀란 심기원이 방도를 묻자 김치는 열흘 앞당겨 12일에 거사하면 비록 고변자가 있어 초반에는 고생할지라도 결국에는 성공한다는 점괘를 주었다. 반정 세력들은 반신반의하며 12일을 거사 날짜로 잡았다. 한편 김치는 원래 이이첨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였는데 점괘를 봐준 공로로 목숨을 부지하고 승진한다.[22] 야사는 야사일 뿐 거사 날짜와 시간을 잡은 것은 최명길이다. 도성 내부의 연회와 평소 광해군의 연회에서의 모습, 당일 근무자를 파악한 후 정한 것이다.[23] 이귀와 김자점은 사돈 관계였다. 정확히는 이귀의 서녀와 김자점의 동생이 결혼했는데, 김자점의 동생은 몸이 약해 일찍 죽고 과부가 된 이귀의 딸은 궁중에 무수리로 들어 갔다가 김개시의 총애를 받는다. 김자점은 그녀를 사전에 포섭해 김개시한테 엄청난 뇌물을 먹인 덕에 왕의 눈귀를 막는 공을 세웠다.[24] 한편으로는 광해군의 총애 받는 후궁 소용 임씨에게도 김자점과 심기원이 뇌물을 바쳤고 청탁의 대가로 임씨가 이귀와 김자점을 두둔해 주었다 반정 성공후 고변 당시 임씨가 이귀와 김자점을 두둔해 준 공이 있다며 광해군의 다른 후궁들인 홍씨 허씨 권씨 원씨들이 중도 부처 된 것하고 달리 임씨는 유일하게 광해군을 모시게 되었지만 뇌물을 받아서 이귀와 김자점을 두둔해 준 것 뿐이지 반정에 가담한 것은 아닌지라 훗날 유효립의 난때 동참해 광해군 복위를 꾀하였다 유효립의 난이 실패하자 자살을 시도 했지만 죽지 않았고 국문을 받던 도중 임씨는 사망하였다.[25] 참고로 이 사람은 세종의 단명한 아들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다시 말해 왕가의 종실 출신이다. 결국 고변한 대가로 반정 직후 처형된다.[26] 고변이 들어오자 김류는 겁을 먹고 집에 숨어있었다. 이괄을 임시 대장으로 삼고 심기원과 원두표가 부리나케 달려가 김류를 가까스로 끌고 왔다.[27] 창덕궁은 이때 불에 타 전소되었고, 인조는 이괄의 난 이전까지 창경궁을 주로 사용했다.[28] 물론 그 후에 이이첨, 류희분은 대비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처단됐다. 특히 이이첨은 아들들까지 목이 달아났다.[29] 당시 80 넘은 나이였는데, 그 나이로 처형까지 당한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사사로 끝난다.[30] 다만 속잡록과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유희발의 당파는 형이 속한 당파인 소북이 아니라 대북이었기 때문에 형제 간에 서로 사이가 나빴다고한다.[31]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의 아들이다. 공교롭게도 또다른 주모자인 김류는 탄금대 전투 당시 신립의 부장이었던 김여물의 아들. 구굉과 함께 가장 먼저 반정을 준비한 인조의 최측근들로 반정 이후에도 중용받았다.[32] 이 두 사람은 이귀의 아들들로 현종 때까지 살아 대동법 관철 등에 기여했다. 또한 최명길~김자점은 한 스승 밑에서 공부한 친구 관계다. 그 스승은 이항복.[33] 유학, 특히 성리학은 눈으로 보이는 예(禮)를 바로 세우는데에 아주 민감한데, 모범이 되어야할 왕실이 몇번이나 이를 어겼다. 여기에 조선 예학의 중심을 자처하던 송시열의 존재는 상황을 헬게이트로 가게 만들 요소였다.[34] 그래도 이귀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의 아들 이시백, 이시방은 왕의 총애를 꽤 받아서, 왕이 죽으며 효종에게 김자점과 더불어 잘 예우하라는 분부를 내린 게 이시백이었다. 효종 때도 꽤 나아가기도 했고 명문가가 되기도 했다. 특히 이시백의 경우 왕이 죽으면서 효종에게 잘 예우하라는 두 사람중 하나이기도 했다.(다른 하나는 김자점, 하지만 김자점은 자폭을 터뜨려 거열형을 당했다.)[35] 이귀는 한평생 앉아보지 못했다.[36] 호란 당시 김경징은 아버지의 추천을 받아 강도검찰사가 되었고, 동시에 왕족 일가를 지키는 임무까지 함께 받았다. 그러나 그는 왕실 인사들을 제대로 챙기지 않은 죄목으로(원손은 강빈이 내관들에게 맡겨 배에 태워 충청도로 도피시켰지만 나머지는 전부 사로잡혔다.) 처형되었다.[37] 이순신을 배출한 덕수 이씨도 조선 후기 3대 무가로 꼽는 사람이 있으나, 덕수 이씨가 무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이순신 이후의 일이라 다른 두 가문에 비해 역사가 훨씬 짧았고, 영조 이후에 빛을 보기 시작해 고종대 무과급제자를 대거 배출했다.[38] 인헌왕후로 추존된 왕의 어머니가 능성 구씨라 구굉이 왕의 외삼촌, 구인후가 인조의 외사촌이자 구굉의 조카이다. 왕의 외할머니 평산부부인 신씨가 신립의 여동생이며 신경진은 신립의 아들이니 왕에겐 외당숙이 된다. 아들들을 당대 명문 무가와 짝지은 것은 어머니 인빈 김씨의 수완으로 김씨는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신성군이 사망해 가망이 없어지자 다시 세자에게 조카딸을 시집보내고 정치적으로 세자를 지원하는데 힘 쓰는 정치력을 발휘했었다.[39]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269~303.[40]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316~328; 계승범(2021), 《모후의 반역》, p. 319.[41] 계승범(2021), 《모후의 반역》, p. 307~318.[42] 한성주(2017), "정묘호란 직후 ‘李仁居의 난’ 연구", 《서울과 역사》 96.[43] 한성주(2017), "정묘호란 직후 ‘李仁居의 난’ 연구", 《서울과 역사》 96, p. 154~155.[44] 계승범(2021), 《모후의 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