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1:21:26

이귀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정사공신(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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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역대 종묘 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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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문종 하연
세조 권람, 한확, 한명회
예종 박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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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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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조 이종성, 민백상
정조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순조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남연군, 조만영
문조 남공철, 김로, 조병구
헌종 이상황, 조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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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순종 송근수, 이완용, 서정순
: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동배향)
: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서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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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역대 집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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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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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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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한정후겸 외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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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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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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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등)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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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남인, 소론,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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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여흥 민씨
(+ 온건 개화파)
고종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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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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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사대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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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
李貴
파일:이귀 초상.jpg
<colbgcolor=#94153e> 이름 이귀(李貴)
옥여(玉汝)
묵재(默齋)
본관 연안 이씨(延安)[1]
출생 1557년
한성부
사망 1633년
부모 부친 - 이정화(李廷華)
모친 - 안동 권씨 권용(權鎔)의 딸
부인 인동 장씨 - 장민(張旻)의 딸
자녀 5남 4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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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이시백(李時白, 1581 ~ 1660)
차남 - 이시담(李時聃)
3남 - 이시방(李時昉, 1594 ~ 1660)
장녀 - 이여순(李女順)[2][3]
서자 - 이시응(李時應)
서자 - 이시형(李時衡)
1. 개요2. 생애3. 기타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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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이이성혼의 문하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항복류성룡을 따라 종군하였다. 광해군 시절 능양군, 김류, 최명길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모의하여 거사를 성사시킨 덕분에 반정 1등 공신에 올랐으며 인조반정의 대표 인사로 꼽힌다.

이귀의 아들로는 이시백과 이시담(李時聃)[4], 이시방, 이시응[庶], 이시형[庶]이 있고 딸로는 이여순[7]을 포함해 4명이 있다. 형인 이시백은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 활약하여 효종영의정이 되었고 동생인 이시방도 학업에 열중하여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시백과 이시방 형제는 김육대동법 확대에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하기도 했다.

2. 생애

세종세조의 신임을 얻었던 연성부원군 이석형의 6세손으로 이정화와 권용의 딸 안동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지만 어머니 권씨 부인의 혹독한 훈육으로 어릴 때부터 성정이 올곧고 청렴하며 한번 자신의 사람이 되면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끝까지 편을 드는 등 강단이 있기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선조 대에 이귀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스승인 이이성혼을 강력히 변론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헛소리라는 등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이귀를 시기하던 대신들이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항복이덕형은 이귀를 옹호하였고 이귀가 경제적으로 힘들 때도 녹봉을 덜어서 도와주었다고 한다.[8]

결국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대비하지 못한 선조가 평양으로 파천하러 갈 시기에 이귀는 서울에서 강릉참봉(康陵參奉,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소재)으로 있었는데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한 후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했다. 류성룡 휘하에서 종군했는데 <선조실록>에 류성룡이 선조에게 "장성현감(長城縣監) 이귀는 신이 그의 사람됨을 몰랐었는데 지난번 비로소 만나보니 취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근래 살펴보건대 군사를 훈련시켜 진법(陣法)을 익히게 하고 굳게 지킬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매우 훌륭합니다"라며 이귀를 칭찬하는 기록이 있다. 이어 이덕형과 이항복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으로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한 후 이천으로 가서 분조 활동을 하고 있던 세자 광해군을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는 등 이 때까지만 해도 광해군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적이지만 광해군이 총애하는 정인홍을 풀어주자고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이첨의 일파를 처형한 이유로 체포된 최기를 마중나간 일 때문에 1616년 해주 옥사에 연관되어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되었고[9] 1619년 풀려나와 1622년 평산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 신경진(申景禛), 최명길, 김자점 및 두 아들 이시백, 이시방 등과 함께 반정을 준비하였다. 반정에 성공하기 위해 훈련대장 이흥립을 회유하기 위해 이흥립의 사위 장신을 이흥립에게 보냈는데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이귀가 반정에 참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흥립이 반정에 참여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인조반정 직전에는 역모를 꾸민다는 혐의를 받자[10]"날 모함하는 놈들하고 대질을 시켜달라"며 정면돌파하기도 했다. 60이 넘은 늙은 나이에 인조반정에 직접 가담하였으며 특히 대호랑이 특수부대인 착호갑사를 이끌고 와서 계획이 비교적 허술했던 반정 성공에 앞장섰다. 허목의 기언과 정두경의 동명집의 기록에 따르면 죽천 이덕형이 능양군에게 절을 하기를 거부하자 반정군 중 어느 한명이 죽천 이덕형을 죽일려고 했는데 김류와 함께 이덕형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서는 반정군 무사가 윤지경을 죽일려고 하자 윤지경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한다. 이이첨을 처형할 때 직접 심문하기도 하였는데 이이첨이 "대감은 나의 마음을 알 것"이라며 "제가 허균같은 놈들이 대비마마를 해치려는거 지킨 충신인거 아십니까?"[11][12][13]라고 살려달라고 하자 "지금까지 네 졸개들 앞장세워 악행을 저질렀던게 오늘 이 말하려고 그런거였냐. 그럼 폐모는 누구의 뜻이었냐?"라고 비웃었다. 인조반정 후 1등 공신으로 추대되었다.

인조 즉위 직후에는 판서직에 올랐다. 반정 직후 김류와의 반목으로 좌천된 이괄을 옹호하는 입장이었지만 이괄의 난으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물론 본인은 이괄이 역모를 꾀했다는 말에 이괄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오히려 김류가 이괄의 편을 들었다. 한편 이귀는 김류와 같이 북인 처벌 문제를 담당하면서 광해군 시기에 정책에 반대해서 파작되거나 유배를 갔던, 남이공, 김산국 등 광해군 반대파 북인을 살렸지만 반대로 북인 정권 시절, 실력자였거나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측근세력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다시 성장해 서인남인 권력을 견제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냉혹하게 처벌했다. 이때 이이첨, 한찬남, 류희분,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 실력자들이 목숨을 잃었다.[14]

중북의 영수 류몽인은 광해군의 복귀를 꾀하려 한다는 무고를 받아 아들 류약과 함께 처형 당했고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기자헌을 포함 한 북인 정치범 38명이 옥에 가둬져 있었다. 조정에서 이들의 처벌에 대해 여러 논의가 오갔는데 이귀는 국문을 통해 조사한 뒤 유배와 처형을 가르자고 주장했고, 김류는 국문없이 바로 처형 할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괄의 반군이 우세하고 정부군이 열세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인조와 삼정승은 김류의 의견을 채택해서 북인 38명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이들 38명의 죽음은 억울했기에 인조 5년인 1627년에 기자헌을 포함한 몇몇 북인 정치범들이 이귀 이원익등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이런 무자비한 숙청에 분노한 북인들이 박홍구와 임취정 유효립등을 중심으로광해군을 복위 시키거나 태상왕으로 복권시키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거사를 세우다가 발각이 되어서 처형되었다. 이 결과로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박승종, 류몽인, 정인홍 박홍구와 같은 북인 영수들의 죽음과 끊임없는 반역시도로 인해, 북인은 대북소북을 가리지 않고 완전히 멸망했다. 이후에 북인은 남이공김신국이 이끌다가 남인으로 흡수되었다.

이후에 권세는 오래 못가 인조반정 4년만에 인헌왕후[15]에 대한 예송논쟁에 휘말려 탄핵을 받아 사직했고[16] 정묘호란 때에는 최명길과 더불어 후금에 대한 칭신을 발빠르게 거론하며 주화를 주장하였다.[17] 그 외에도 이귀는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인조는 "경의 식견은 실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이 많소."라고 칭찬하며 좋아했다.[18] 다만 생전에는 인조에게 신임받지 못했는데 왕 면전에서 큰소리를 내거나 욕을 하며 김류에게 말싸움을 걸고 심지어 공개석상에서 정승이 자기 견해에 반대했다고 목을 베어버리고 싶다고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19] <조선왕조실록> 인조 3년(1625) 3월 25일 네 번째 기사에서 사신은 이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논한다.
사신은 논한다. 이귀는 지조가 단정하지 못하고 언어가 법도가 없어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젊어서 사숙(私淑)한 기초가 있어서 그의 뜻이 이러한 것이다. 또 임금을 친애하고 국사를 근심하여 뭇사람의 비방도 피하지 않고,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였던바, 충분(忠憤) 한 가지만은 그와 비교될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다시 사람들이 이귀를 잡군자(雜君子)라고 하였다. 경연에 입시했을 적에 저촉되거나 거슬리는 말이 많아도 상이 죄주지 않았고, 진신(搢紳)들에게 욕설하기를 거리낌 없이 해도 사람들이 성내지 않았다. 매일같이 차자를 올리고 상소하였으나 말을 써 주지 않았고, 국가 일을 도모하고자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나 한갖 수고로울 뿐 도움이 없었다. 평생의 행사가 대부분 이와 같았다.
[史臣曰: "李貴志操不端, 言語無章, 以此取笑於世人, 而少有私淑之地, 故其意如此。 且愛君憂國, 不避衆謗, 有懷必達, 忠憤一節, 罕有其比, 故當時之人, 號李貴爲雜君子云。 入侍經筵, 言多觸忤, 而上不以爲罪, 詆辱搢紳, 無所顧忌, 而人不以爲怒。 陳箚抗疏, 無日無之, 而言不見用, 竭誠殫情, 欲濟國事, 而徒勞無益。 平生行事, 類如是矣。"]

3. 기타

  • 성격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단점을 단점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가령 "공을 보면 마음의 병이 있는 것 같소"('그 성격 좀 고치시오'를 최대한 점잖게 돌려 표현한 거다.)라고 지적한 사람에게 "그 말이 맞다며 자신에게는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의 병이 있으니 나같은 사람이 더 있다면 나라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강했나 하면 대북 천하 시절이었던 광해군 시기에 올린 상소에 본인이 나라를 위해 힘쓴것도 광해군을 위한 충성심도 정인홍을 능가한다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신의 소 가운데 의병에 대해 말한 것이 다섯입니다 3.이천의 토적(土賊) 세력을 신이 계책을 써서 평정하고 또, 군사 1백여 명을 모집하여 왕세자를 길에 나가 맞았으니, 전쟁에 종사한 지 10여 년 동안 신이 전후 나랏일에 힘쓴 것이, 인홍이 향병을 모집하여 가야산에 들어가 자신을 보호하는 계책을 삼았던 것보다 못하지 않았다. 이래서 그가 김면(金沔)에게 나무람을 듣게 된 것이다 5.인홍의 의병이 또한 적병을 토벌한 공로가 있다면, 신이 전후에 다소나마 나랏일에 분주하여 약간의 공효가 잇는 것과 같은 것도 또한 인홍에게는 족히 부끄러울 것이 없다. (이하 생략) 인홍이 무신년(1608, 광해군 원년)에 소를 올린 공으로 바야흐로 성명의 신임을 받는데, 만약 인홍을 반역으로 무함하면 성명께서 비록 전일과 같이 용서하려 하더라도 되지 않을 것이라 하고 드디어 마음대로 무함하여 신을 천 길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니, 전하의 마음을 은밀히 시험하여 협제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신이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바친 것이 또한 인홍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변란 초두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위하여 노력한 것을 감히 다시 번거롭게 아뢰지는 못하오나 다만, 역적을 친 것으로써 말하더라도, 인홍은 여립(汝立)을 옹호하다가 마침내 사판에서 삭적되고 신은 여립을 배척하여 조정에 발들여 놓지 못하게 했으니, 이는 그 앞을 내다봄이 이미 신에 미치지 못한 것이므로, 이 두 가지에 인홍과 누가 낫습니까? 또 인홍은 한번 소를 올려 유영경을 배척한 것으로써 자기의 공을 삼는데, 신은 영경을 면대하여 허물을 논하여 그 악독한 기세를 꺾고 그 화를 일으킬 마음을 소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 선왕조에 소를 올려 그 속이고 아첨하는 죄를 통렬히 배척하였고, 일찍이 전하 앞에 면대하던 날에 영경이 율법을 어긴 죄를 다스리기를 청했으니, 만약 신의 말이 그 당시에 시행되었더라면 인홍의 무신년 상소는 절로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신의 공은 비유하자면 그 근원을 막은 것이요, 인홍의 공은 그 말단을 막은 것이니, 이 두 가지에 인홍과 누가 낫습니까? 역적 진(珒)이 패하기 전에 신은 빨리 선처하자는 계책으로써 임금을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주선하였고, 인홍은 역적 진이 이미 패한 후에야 한갓 그의 목숨을 보전해 주자는 자를 공격함으로써 자기의 공을 삼았으니, 이 두 가지에 인홍과 누가 낫습니까? 영경이 일찍이 정사 자리에서 신의 이름을 ‘귀(鬼)’ 자로 불렀는데 이제 박재가 또 그 말을 이어받아 심지어 ‘괴귀(怪鬼)’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옛날 선정 조헌(趙憲)이 시사(時事)를 근심하고 세상을 분개하여 누차 소장을 올리니, 당시 사람들이 ‘괴귀’라고 불렀는데, 그 뒤 왜적이 침입하여 승여(乘輿)가 파천하게 되니, 전일 벼슬에 있으며 국록을 먹던 자들은 거개 임금을 저버리고 산중으로 도망갔으나, 괴귀라 이르던 조헌은 홀로 팔을 걷어붙이고 왜적과 대항하다가 마침내 칼날에 쓰러져, 그 충성은 백일을 꿰뚫고 의리는 추상같이 늠름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신이 조헌과 같은 칭호를 얻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 혼정편록 8(混定編錄八)

일단 이귀가 저 상소를 올린 이유가 이귀의 딸 이예순이 남편 김자겸의 친구 오언관하고 간음을 해 정절을 잃었다며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본인과 딸을 변호하기 위해 올린 상소이긴 하지만 굳이 정인홍을 저격하면서 본인이 정인홍 보다 낫다고 주장했는데 정인홍이 광해군 시절에 가지고 있던 위세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참고로 광해군은 의외로 이귀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광해군 일기의 기록을 보면 저 상소를 받고나서 품계를 가선(嘉善)으로 올리라는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 동문이었던 조헌을 상당히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에게 조헌은 괴귀라고 불렸는데 본인도 같은 칭호를 받아 다행이라며 자부심을 보였고 인조에게도 본인을 가리켜 자신이 오늘날의 조헌이며 이원익보다 낫다고 주장하였다.
  • 현실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 이이의 제자이며 유생이었던 인물이면서 "류성룡이 대간을 폐지시켜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자신 역시 류성룡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며 "말 많은 대간 따위 콱 폐지하는게 낫다"고까지 했다.
  • 만주족의 발흥을 경계해 병서인 이충정공 비어방략을 지었고, 남한산성 정비 책임자인 이서를 지지해 수어청을 창설하게 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그만큼이라도 버텼던 것은 이귀의 선견지명 덕이라는 평을 얻었다.
  • 아들들도 청렴하여 훗날 장남 이시백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차남 이시방은 공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역임했다. 두 형제 모두 김육의 대동법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이시방은 대동법 시행의 실무자 중 1명이었다. 대동법은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는데 이는 토지를 바탕으로 세금을 걷기 때문에 탐관오리들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역사의 기록에는 이귀의 평이 나쁘게 쓰인 면이 많은 편이다. 그 예로 임진왜란 당시 장성현감을 지낼 때 김덕령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20] 그 과정에서 김덕령을 아끼는 천진한 마음으로 '김덕령 최강 전설'을 지어내었는데 과장이 너무 심했다. 하지만 인터넷상의 인식과는 달리 선조는 이몽학의 난 이전까지 전공없이 말만 무성한 김덕령을 못 미더워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이귀의 말을 듣고 대간들로부터 보호하고 지원해줬다.
  • 인조 재위기에 김류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는데 공신 책봉을 논할 때부터 서로 삿대질하고 싸웠다고 하니 상당히 오랫동안 갈등했다. 서로 비교해보자면 분야별로 대충 이렇다. 서인 장악력에서는 이귀가 한 수 위였는데 이이의 제자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이귀가 서인 내에서는 입지가 좋았고 그래서 김류는 소북과 남인을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으려고 했다. 직책은 김류가 앞섰는데 김류는 일찍 정승에도 오르고 영의정도 해보았지만 이귀는 죽을 때까지 정승이 되어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신임 역시도 김류가 앞섰는데 이귀의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인조가 멀리했고 이귀는 서인에 상당히 치우친 태도를 보였으며 마침 인조는 붕당을 혐오하는 임금이었다. 이러니 김류가 더 총애를 받아 빨리 출세하고 높은 관직에 오를 수 밖에 없다.[21] 김류는 말년에는 인조에게 미운털이 박혔는데 인조 10년의 추숭 반대에 이어 인조 말년의 강빈 사사에 반대했기 때문. 그 직전에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는데 찬성했는데도 말이다. 능력 부분은 알려진 바로는 김류가 한 수 위로 추정되는데 김류는 그나마 행정 관료로서는 나름대로 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22] 이귀는 이런저런 의견은 잘 냈는데 인조가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아서 실제 능력은 알 수 없으며 능력이 있어도 신뢰를 받고 중용되어야 가능한데 이귀는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달리 보면 방패의 관계이기도 한데 이귀는 큰 의견을 잘 내놓는 창이라면 김류는 신중하지만 보수적이고 행정 업무를 잘 하는 방패라 볼 수 있을 듯. 그렇기에 상호 보완적이 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자식들 문제는 이귀가 나았는데 이귀의 두 아들은 둘 다 잘나갔고 특히 이시백의 경우 김자점과 더불어 인조가 죽으면서 효종에게 잘 예우하라고 한 신하였다.[23] 반대로 김류는 아들 김경징병자호란 때 거하게 터뜨렸다가 사약먹고 손자 김진표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자결을 강요했으며[24] 김진표는 그다지 출세하지 못해 공조참의까지만 했다. 이시백만 해도 아버지가 해보지 못한 영의정이 되었는데 말이다.
  • 죽천 이덕형의 죽창한화의 기록에 따르면 한음 이덕형 박경신 윤군섬등과 함께 점쟁이에게 점을 봤는데 점쟁이가 이귀가 제일 출세 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점쟁이의 말 처럼 되었다는 재미 있는 일화가 존재한다.
연평(延平) 이귀(李貴)의 자는 옥여(玉汝)로서 기위(奇偉)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기절(氣節)이 활달하여 용감히 말하고 거리낌이 없었으며, 조그만 절조에 얽매이지 않았다. 일찍이 한음(漢陰) 이상국 덕형(李相國德馨)ㆍ박공 경신(朴公慶新)ㆍ윤군섬(尹君暹)과 한 마을에서 글동무로 공부했다. 어느 날 한 곳에 모여 점장이 이인명(李麟命)에게 운명을 물었다. 인명은 말하기를, “이공(李公)이 제일이요 한음(漢陰)이 그 다음이며, 그 나머지도 역시 과거에 급제는 하지만 모두 보통 운명들입니다.” 했다. 이공은 애써 과거 공부에 노력하지 않았으므로 재명(才名)이 가장 쳐졌다. 박공 경신이 나이도 가장 젊고 기세도 가장 날카로와서 이 말을 듣더니, 갑자기 놀라 일어나 손뻑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옥여(玉汝)를 제일이라고 하다니! 무슨 놈의 인명(麟命)이란 말이냐? 너는 점치는 것을 그만 두어라.”했다. 뒤에 한음(漢陰)은 벼슬이 영상에 올랐으나 나이 겨우 53세에 졸했고, 박공은 가선(嘉善)으로 감사(監司)가 되어 나이 60세가 지났고, 윤공(尹公)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서 나이 겨우 40세에 전진(戰陣)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가선(嘉善)에 이르렀고 나라의 큰 운수를 도와서 정사(靖社)의 원훈(元勳)이 되었다. 그리고 양전(兩銓)의 판서를 거쳐 지위가 부원군에 이르는 등 풍운(風雲)을 잘 만나 공명(功名)이 혁연하였고 나이 77세로서 졸했다. 두 아들도 군(君)에 봉했는데 한 아들은 통정(通政)이 되었고, 자손들이 번성하여 높은 벼슬아치가 문중에 가득하였다. 참으로 세상에 드문 큰 운명이었으니, 연평(延平)이 매양 박공의 일을 말하면서 웃었다. - 죽창한화(竹窓閑話))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0A_0010_000_0010_2002_017_XML
  • 이정귀가 율곡 이이의 행장을 짓자 자신이 스승인 이이를 위해 변호했던 일을 행장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이귀의 부탁을 들은 이정귀는 이귀의 행동이 훌륭하기는 하지만 선생의 행장에 기록해 넣으면 글이 지루하게 될 것이니 그대의 행장에 넣는 것이 마땅하다고 거절당했는데 그 말을 들은 이항복이 월사의 문장의 정밀함은 이것만 거론해도 알 수 있다라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월사가 일찍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행장을 지었는데, 연평(延平) 이공(李公 이귀(李貴))이 공에게 청하며 말하기를,
“나는 율곡 선생의 문인이고, 계미년(1583, 선조16)에 율곡 선생이 무함을 당한 일에 대해 내가 상소한 적이 있었으니, 이 일은 선생의 행장에 넣어야 할 것이네.”하니, 월사가 말하기를,“이 일이 훌륭하기는 하지만 선생의 행장에 기록해 넣는다면 글이 지루하게 될 것입니다. 그대의 행장에 넣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하였다. 백사(白沙) 이 상공(李相公)이 그 말을 듣고 “월사 문장의 정밀함은 이것만 거론해도 알 수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2A_0760_010_0010_2016_009_XML

4. 관련 문서



[1] 소부감판사공파.[2] 김자점의 형 김자겸(金自兼)의 처.[3] 남편 김자겸이 요절해 비구니가 되었다. 법명은 예순(禮順).[4] 이시담은 이귀의 셋째 형인 이자(李資)에게 입양되었다.[庶] 서자(庶子)[庶] [7] 김자점의 형과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일찍 졸하여 예순비구니가 되었고, 광해군조에 비구니 신분으로 궁을 자주 드나들어 아버지 이귀의 반정을 도왔다.[8] 젊은 시절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해서인지 아전이 탐욕스러운 이유는 부모와 처자식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니 아전들에게 녹봉을 넉넉하게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9] 공교롭게도 이귀가 귀양을 간 이천은 이귀가 세자 시절의 광해군을 도와 민심을 수습한 곳이다.[10] 광해군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명(李溟)이 평산에 순찰하러 오자 이귀가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경우 군사를 일으켜 바로잡아 구제할 뜻을 언급하는 바람에 들통났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이귀가 사람됨이 치밀하지 못하여 일이 자주 발각되었다고 한다.[11] 대감이라는 호칭은 정2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쓰는 호칭인데 이때 이귀의 직책은 종2품 이조참판이라 대감 소리 들은 위치는 아니었다 이이첨이 이귀에게 아첨을 한 셈이다[12] <연려실기술>에서는 유순익을 통하여 "대감의 말을 듣고 힘껏 폐론(廢論)을 멈추게 하였으니 대비께서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다 내 힘이오. 그런데 어찌 특별히 용서하지 않고 죽이는 것이오"라고 말한 걸로 나온다.[13] <연려실기술>과 <인조실록> 이귀의 비명에 의하면 이귀가 한교를 이이첨에게 보내 이이첨이 폐모론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게 설득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혼정평록>의 기록에 의하면 기축옥사로 이이첨과 이창후가 유적에서 삭제되자 이창후가 이귀에게 자신의 사정에 대해 설명하니 이귀가 처음에는 이창후에게 "너는 선비가 아니라고 책망했지만 힘을 다해 주선하겠다"며 구면(具𡩄)에게 가서 "이이첨과 이창후가 때를 맞추어 회문(回文)을 내지 않았다" 하여 갑자기 역적을 구해내려 했다는 를 씌웠으니 이로 인하여 마침내 망극한 지경에 이른다면 그대들은 앞으로 선비들의 논의에 죄를 얻을 것이니 우리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해 구면이 즉시 편지를 동료에게 내어 정거(停擧)가 해제되었다고 한다. 아마 이 때의 인연들 때문에 이귀에게 살려달라고 빌 생각을 한 걸로 보인다.[14] 참고로 또다른 북인 실력자였던 박승종은 광해군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아들 박자흥과 함께 자결했다.[15] 인조의 어머니이자 정원군의 부인으로 흔히 '계운궁 구씨(啓運宮 具氏)'로 일컬어진다. 죽었을 때는 아직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숭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계운궁'이라고 불렸다가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숭되고 난 뒤에 '인헌왕후'라고 시호가 올려졌다. 정원군은 광해군 시절에 죽었으나 부인은 아들이 쿠데타로 집권하는 것을 보았고 부대부인으로 격상되었으나 이 때 죽었다.[16] 이 때 인조는 아들로서 3년상을 치르려고 했는데 다들 태클을 걸었을 때 이귀만 옹호했다.[17] 둘이서 "굳이 해야 한다면 칭신도 가능하지 않을까요?"라고 했는데 고려 때도 송나라금나라를 함께 섬겼었다고 근거를 댔다.[18] 인조는 이 일로 이귀를 재상으로 승진시키려 했으나 그 전에 사망했다. 그래서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19] 이 때 이귀의 공격을 받았던 정승은 상촌 신흠이다. 사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귀는 이 일이 있기 전에도 "베어버리겠다."는 소리를 달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인조가 직접 "이귀가 남인 정경세와 최현에게도 베어버리겠다."고 한 적이 있음을 고백할 정도.(무려 이 때는 인조를 인견한 자리였다. 그러니까 왕 앞에서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말한 셈.) 당색이 같았던 신흠에게조차 이랬다. 다만 윤방의 옹호에 의하면 진짜 목을 벨 생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추고나 파직과 같은 가벼운 벌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귀의 성격이 다혈질이라 화를 못참고 말이 막나간 것에 불과한 듯 하다.[20] 김덕령은 1592년 고경명 막하에서 의병으로 종군하다 낙향하고 1593년 독자적인 의병을 일으켰다. 참조[21] 이점은 이귀 본인도 알고있어서 자신이 인조에게 아부하였다면 부귀를 이루었고 진작에 정승의 자리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인조를 디스하였다 인조실록 9권, 인조 3년 7월 12일 무오 1번째기사https://sillok.history.go.kr/id/kpa_10307012_001[22] 실제로도 인조반정 이전에 김류가 많은 직책을 거쳤으며 인조반정의 공신들은 대부분 유생 신분이거나 해서 공신임에도 바로 고위직을 받은게 아니라 종6품을 받고 고속 승진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 와중에서도 이귀, 김류, 최명길은 이조와 병조의 판서, 좌랑 등을 맡으며 인사권을 쥐었는데 3명이 그나마 벼슬을 해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제일 여러 직책을 거친건 김류인데 최명길도 이전까지 가장 위로 올라간 직위가 좌랑이었고 이귀는 아예 군수만 전전했기 때문.[23] 김자점은 미운털이 박힌데다가 잘못을 저질러 결국 역적이 되었지만 이시백은 끝까지 잘나갔다.[24]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