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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문충공(文忠公) 김종수 金鍾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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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28년 3월 18일 (음력 영조 4년 2월 8일) |
사망 | 1799년 2월 11일 (향년 70세) (음력 정조 23년 1월 7일) |
시호 | 문충(文忠) |
본관 | 청풍 김씨 |
자 | 정부(定夫) |
호 | 몽오(夢梧), 진솔(眞率) |
붕당 | 노론 (청명당, 벽파) |
부모 | 부친 - 김치만(金致萬, 1697 ~ 1753) 모친 - 풍산 홍씨 홍석보(洪錫輔)[1]의 딸 |
형제자매 | 형 - 김종후(金鍾厚, 1721 ~ 1780) 누이 - 홍익필(洪益弼)의 처 누이 - 한용화(韓用和)[2]의 처 |
부인 | 해평 윤씨1730 ~ 1792) |
자녀 | 장남 - 김약연(金躍淵, 요절) 장녀 - 서유수(徐裕壽)의 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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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영조, 정조 시기 문관.진사를 지낸 김치만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풍산 홍씨 홍석보의 딸이다. 김종수의 외조부 홍석보는 혜경궁 홍씨의 조부 홍현보의 형으로, 김종수는 혜경궁 홍씨의 6촌 오빠가 된다.[3]
영조 시절에는 노론 계파인 청명당의 지도자로서 세손(후일의 정조)를 제거하려는 척족 세력과 대립하고 세손을 보호했으며, 그 공으로 정조 시절에는 정조의 최측근인 동덕회의 일원[4]으로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노론 내 소수파이지만 당의 영수가 되고 좌의정까지 오른다.
2. 생애
어릴 적에는 형과 함께 중인 계층 출신의 시인 정래교와 김창협의 제자이자 민진원의 조카인 민우수에게 학문을 배웠다. 형 김종후는 주로 학자로 알려졌으며 관직에 나아갔다 홍국영이 탄핵될 때 홍국영과 붙어먹었다는 참소를 듣고 탄핵되었으나 정조의 보호로 무사했고, 이후 노론 낙론 계통의 산림이 되었다.[5] 김종수 역시 정치적인 것과는 별개로 학문적으로는 온건한 낙론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1750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766년 음서로 출사하였다. 1768년 과거에 급제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과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1795년에 치사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노론의 핵심 가문인 명문 청풍 김씨 가문의 일원. 영조 시절 집권당이었던 노론은 다양한 분파로 또 나뉘어지는데, 같은 가문 내에서도 김종수의 조부의 사촌형제인 김상로,[6] 김약로[7] 등은 사도세자 및 세손(후일의 정조)와 대립한 반면, 조부의 다른 사촌인 김재로,[8] 그 아들인 김치인,[9] 그리고 김종수 등은 청명당에 가담하여 세손을 지지하였다.
노론 청명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그의 형 김종후가 재야 산림의 역할을 했기에 재야 노론 산림 세력과도 가까웠다. 17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 홍문관 부수찬 등을 거쳤으며, 특히 세손시강원의 관원으로 정조를 가르쳤는데, 이때 그는 정조에게 임금이자 스승이자 아버지가 될 것(군사부)와 개인의 비극은 개인의 비극으로, 공적인 것은 공적인 것으로 구분할 것, 또한 그 연장선으로 외척의 정치참여를 배제할 것을 정조에게 강조하였다. 청명당의 일원으로서 당시 정치를 어지렵히던 홍인한, 정후겸 등의 척신 세력을 비판하였으나, 당폐를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1772년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정조 즉위 후 중용되었다. 영조 말엽 정치를 어지렵혔던 척신 세력인 홍인한, 정후겸 등을 벌 줄 것을 정조 즉위 직후에 상소하여 관철시켰고, 평소 가깝게 지낸 김귀주[10] 축출 및 정조 등극의 일등 공신이나 지나친 권력욕으로 정치를 어지럽히던 홍국영 제거에도 앞장서면서 정조의 통치가 자리잡을 수 있게 뒷받침하였다.[11]
이후 정조 치세에서 노론이 벽파와 시파로 분화되자 노론 벽파의 수장이 되었다. 청명당은 애시당초 의리와 명분을 강조하였는데,[12] 이러한 연장선에서 대부분의 노론 청명당 출신들은 서명선으로 대표되는 소론, 채제공으로 대표되는 남인, 그리고 정조의 탕평론에 동조한 노론 시파나 탕평파와 달리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고 다른 정파에 배타적인 노론 벽파가 되었다. 정조 연간 김종수가 이끄는 노론 벽파는 탕평책 뿐만 아니라 정조의 숙원이었던 사도세자 신원에 끝까지 반대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조 치세 내내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조정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다. 벽파의 수장이었던 김종수 역시 정조가 각별히 총애한 채제공 등과 격렬하게 대립하면서도 관직은 계속 올라서,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까지 역임한다.
여러 이유로 문제를 일으켜 지탄을 받고 파직당하기도 수 차례였는데, 수어사로 있을 때 사소한 일로 병조판서와 다투어 눈총을 산 바 있고, 우의정으로 있을 때는 하급 무장들을 줄로 묶어 도성 밖까지 끌고 갔다가 지탄을 받기도 했다.[14] 정조가 사도세자 묘에 행차했다 주저앉아 오열한 일을 가지고 상소했다가 정조의 분노를 사 위리안치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정조가 '내가 그를 죽을 뻔한 죄에서 구해준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고도 곧 다시 재등용되었는데, 이는 노론 내 원칙론자이자 벽파의 영수라는 지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정조의 신뢰가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노론 벽파의 수장으로서 노론 시파, 소론, 특히 남인과 격렬하게 대립했지만, 그나마 강경파의 지도자인 심환지에 비하면 온건한 편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채제공과는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지만 채제공이 입안한 정책들은 사안에 따라 찬성해 주었다. 또한 말년에는 정조의 입장을 상당부분 이해하고 기존의 강경한 입장에서 한발 물러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1799년(정조 23)에 죽었는데, 그가 죽고 열흘 뒤에는 정조의 탕평이 완전히 끝났음을 확인이라도 하듯 채제공도 그 뒤를 따랐다. 공교롭게도 1년 뒤에는 정조도 그들을 따라가듯 승하했다. 유언호, 김조순과 함께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사후에 8자 흉언 사건으로 노론 벽파가 몰락하면서 역적으로 낙인찍혀 관작을 추탈당하고 출향되었지만,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권되었다.
3. 여담
- 후대의 독립운동가 우사 김규식에게는 종고조부가 된다.
4. 대중매체
- 2007년 MBC 드라마 <이산>에 등장하는 장태우(이재용 분)는 김종수를 모델로 한 캐릭터다. 작중에서는 올곧은 인품의 보수주의자로 등장하는데, 노론의 좌장격 인물이라는 점과 홍국영과 대립하는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은 확실히 김종수에게서 따 온 부분. 다만 김종수는 정조의 세손 시절 스승이라서 정조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는 점에 비해 작중에서 비교적 늦게 등장하고, 장태우에 비해 역사 속 김종수는 일종의 트러블메이커 기질이 있었다는 게 차이점.
- 2007년 채널CGV(현 OCN Movies) 드라마 <정조암살미스터리 - 8일>에서 김기현 씨가 맡아서 매우 진중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드라마가 이덕일 사관 형태의 조선인지라 철저한 정조의 정적으로만 나온다. 물론 초반에 잠깐 정조의 등극을 돕는 역할을 하긴 한다.
[1] 홍봉한, 홍인한의 큰아버지.[2] 영의정 한용구의 큰형이자 영의정 남공철의 장인이다.[3] 하지만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김종수를 홍국영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는 식으로 묘사한다.[4] 나머지 세 명은 홍국영, 노론(정조 연간에는 노론 시파) 정민시, 소론 서명선. 과욕을 부리다가 제거된 홍국영을 제외하면 나머지 셋은 정조 시대에도 중용되었다.[5] 다만 순조 시기 김종수가 역적으로 몰려 추탈되면서 그 역시 같이 역적으로 몰려 추탈되었고, 시파가 편찬한 실록 졸기에는 홍국영과 붙어먹었다는 등 아주 나쁜 평이 적혀있다. 심지어 옛날에 편찬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실록의 졸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매우 나쁘게 평가했지만 지금은 당연히 이딴 식으로는 평가하지 않는다.[6] 정조는 후일 영조가 '너의 아비를 죽이게 한 것은 아무래도 김상로다. 그자야 말로 바로 너의 원수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했고, 세상을 떠난 후 정조가 즉위하자 관직을 추탈당한다.[7]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에 들를 때 그의 묘소가 있는 곳을 지나가면서 불쾌해하며 얼굴을 가렸다 한다.[8] 영조 대에 영의정을 세 번 지냈다.[9] 영조 및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영의정을 세 번 지냈다.[10] 김귀주 입장에서는 억울한게, 사실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는 영조 말엽 척신 홍봉한 등을 공격하면서 세손 보호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그런 김귀주를 중용하기는 커녕 김종수를 내세워 정치 무대에서 제거해 버린다. 김귀주가 새로운 척신이 될 것을 우려해서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영조 말엽 가문이 총출동하여 세손을 지지했던 정순왕후 입장에서는 명백한 배신이었고, 정조 연간 내내 정조와 정순왕후가 대립하는 배경이 된다.[11] 김귀주, 홍국영 제거는 사실상 정조 대신 총대를 맨 것으로 보여진다.[12] 청명당이 영조 말엽 세손을 지지한 것 역시 의리와 명분에 의거하였을 때 왕가의 정통 후계자가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지극히 합당했기 때문이었다.[13] 영조가 직접 사도세자 신원은 있을 수 없다고 세손에게 명했고 세손이 이에 동의했기 때문에, 의리를 강조한 노론 벽파는 확실한 명분을 쥐고 있었다. 거기다가 사도세자 신원이 이루어질 시 임오화변 당시 집권당이었던 노론에게 책임을 묻게 되면 숙종, 경종식 환국이 다시 일어나 노론이 일망타진될 수 있기 때문에, 노론 벽파는 필사적으로 사도세자 신원을 반대했다.[14] 정승 정도면 국무총리 급이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대법원장이 하사관들을 줄로 묶어 서울 밖까지 끌고 갔다고 생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