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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61년(세조 7) |
사망 | 1513년 9월 6일[A] (향년 51 ~ 52세) (음력 중종 8년 7월 27일) |
재임기간 | 제52대 영의정 |
1513년 5월 16일[2] ~ 9월 6일[A] (음력 중종 8년 4월 2일 ~ 7월 27일) | |
봉호 |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
시호 | 충정(忠定) |
본관 | 창녕 성씨 |
자 | 우옹 |
호 | 인재 |
부모 | 부친 - 성찬(成瓚) 모친 - 덕천군[4]의 장녀 |
형제자매 | 3남 4녀 중 차남 형 - 성희증(成希曾) 남동생 - 성희옹(成希雍) 남매 - 조원윤(趙元倫)의 처 영천 이씨 이제손(李悌孫)의 처 남원 윤씨 윤형(尹衡)의 처 평산 신씨 신수린(申壽麟)의 처 |
부인 | 풍양 조씨 - 조익상(趙益祥)의 딸 |
자녀 | 1남 2녀 장남 - 성율(成瑮, 1498 ~ ?) 장녀 - 안동 권씨 권영(權詠)의 처 차녀 - 평창 이씨 이희명(李希明)[5]의 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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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2. 생애
고조부인 성사달은 고려 때의 인물로 홍건적을 격퇴하고 김용의 난을 제압하는데 공을 세워 공신에 임명되고 창산 부원군에 봉해졌다. 증조부의 이름은 성부, 조부는 성효연, 부친은 성찬이며 모친은 정종의 아들 덕천군의 딸이다. 어머니가 성희안을 낳을 때 꿈 속에서 노인이 지팡이를 내밀며 '이것을 짚어라. 너의 집안에 복록이 흥창하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1485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경연에 참여하여 성종의 눈에 들었다. 연산군 때에는 종2품인 이조참판 자리까지 올랐으나 연산군이 신하들에게 시를 써서 바치게 했을 때 풍자적인 내용의 시를 올려 연산군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종9품 부사용으로 좌천당하였다. 이후 성희안은 박원종, 류순정 등과 모의하여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끌어내리고 중종을 즉위시키는데 1등 공신이 됨으로서 박원종, 류순정과 함께 3대장(三大將) 혹은 3훈(三勳)이라 불리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의 자리에 서게 된다. 중종이 즉위한 후 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의 벼슬을 거쳤으며 박원종과 류순정이 죽은 뒤인 중종 8년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하고 그해 사망하였다.
3. 평가
중종실록에 기록된 3훈의 졸기 중 사관의 평가가 가장 후한 것이 성희안의 졸기이다. 삼대장 중 유일하게 연산군에게 쓴소리를 하다가 보복을 당한 경험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점수를 잘 받은 것도 있겠지만, 뒷날 명재상으로 평가받게 되는 정광필이 아직 그러한 명성을 얻기 전 거의 어거지를 쓰다시피 해서 순서를 뛰어넘어 정광필을 정승으로 끌어올린 것이 나중에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뛰어났다고 회자되었기 때문이다.4. 대중매체
- 1985년 조선왕조 오백년 풍란에서는 나영진이 연기했다.
- 1995년 장녹수에서는 한정국이 연기했다.
- 1996년 조광조에서는 신종섭이 연기했다.
- 1998년 왕과 비에서는 신동일이 연기했다.
- 2001년 여인천하에서는 허현호가 연기했다.
- 2003년 대장금에서는 홍민우가 연기했다.
- 2005년 왕의 남자에서는 윤주상이 연기했다.
- 2007년 왕과 나에서는 맹봉학이 연기했다.
- 2017년 7일의 왕비에서는 이화룡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