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21:17:16

정언신


<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중종 ~ 광해군
{{{#!wiki style="margin: 0 -10px -6px; min-height: calc(1.5em + 6px)"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좌의정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제65대

김수동
제66대

박원종
제67대

류순정
제68대

성희안
제69대

송질
제70대

정광필
제71대

김응기
제72대

신용개
제73대

안당
제74대

남곤
제75대

이유청
제76대

정광필
제77대

심정
제78대

이행
제79대

장순손
제80대

한효원
제81대

김근사
제82대

김안로
제83대

윤은보
제84대

류부
제85대

홍언필
{{{#!wiki style="margin: -16px -11px"
제85대

홍언필
제86대

윤인경
제87대

류관
}}}
제88대

성세창
제89대

이기
제90대

홍언필
제91대

윤인경
제92대

황헌
제93대

심연원
제94대

상진
제95대

윤개
제96대

안현
제97대

이준경
제98대

심통원
제99대

이명
제100대

권철
제101대

홍섬
제102대

박순
제103대

이탁
제104대

박순
제105대

홍섬
제106대

노수신
제107대

김귀영
제108대

정유길
제109대

노수신
제110대

정유길
제111대

류전
제112대

이산해
제113대

정철
제114대

류성룡
제115대

최흥원
제116대

윤두수
제117대

유홍
제118대

김응남
제119대

윤두수
제120대

이원익
제121대

이덕형
제122대

이항복
제123대

정탁
제124대

이원익
제125대

이항복
제126대

이헌국
제127대

김명원
제128대

윤승훈
제129대

류영경
제130대

기자헌
제131대

심희수
제132대

허욱
제133대

기자헌
제134대

이항복
제135대

이덕형
제136대

이항복
제137대

정인홍
제138대

한효순
제139대

박승종
제140대

박홍구
<colbgcolor=#c00d45,#94153e> 역대 정승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역대 영의정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우의정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제78대

박원종
제79대

류순정
제80대

성희안
제81대

송질
제82대

정광필
제83대

김응기
제84대

신용개
제85대

안당
제86대

김전
제87대

이유청
제88대

권균
제89대

심정
제90대

이행
제91대

장순손
제92대

한효원
제93대

김근사
제94대

김안로
제95대

윤은보
제96대

류부
제97대

홍언필
제98대

김극성
제99대

윤인경
{{{#!wiki style="margin: -16px -11px"
제99대

윤인경
제100대

류관
제101대

성세창
}}}
제102대

이기
제103대

정순붕
제104대

황헌
제105대

심연원
제106대

상진
제107대

윤개
제108대

윤원형
제109대

안현
제110대

이준경
제111대

심통원
제112대

이명
제113대

권철
제114대

민기
제115대

홍섬
제116대

이탁
제117대

박순
제118대

노수신
제119대

강사상
제120대

정유길
제121대

김귀영
제122대

정지연
제123대

정유길
제124대

노수신
제125대

정유길
제126대

류전
제127대

이산해
제128대

정언신
제129대

정철
제130대

심수경
제131대

류성룡
제132대

이양원
제133대

윤두수
제134대

유홍
제135대

김응남
제136대

정탁
제137대

이원익
제138대

이덕형
제139대

이항복
제140대

이헌국
제141대

이항복
제142대

이헌국
제143대

김명원
제144대

윤승훈
제145대

류영경
제146대

기자헌
제147대

심희수
제148대

허욱
제149대

한응인
제150대

심희수
제151대

이항복
제152·153대

정인홍
제154대

정창연
제155대

정인홍
제156대

한효순
제157대

민몽룡
제158대

박승종
제159대

박홍구
제160대

조정
<colbgcolor=#c00d45,#94153e> 역대 정승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역대 영의정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

동인
東人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사림파
선조
(1575 ~ 1591)
서경덕 조식 이황 허엽 신중엄
정언신 최영경 정개청 김우옹 김효원
정여립 허봉
온건파 강경파
김성일 류성룡 정인홍 이산해 이발
우성전 이원익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허성 이덕형
남인 북인
조선의 붕당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 ||
<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정언신
鄭彦信
출생 1527년(중종 22)
전라도 전주부
사망 1591년(선조 24)
함경도 갑산도호부
본관 동래 정씨
입부(立夫)
나암(懶庵)
부모 부친 - 정진(鄭振)
모친 - 허확(許確)의 딸 양천 허씨[1]
형제자매 5남 3녀 중 5남
부인 신례(申禮)의 딸 평산 신씨[2]

1. 개요2. 생애
2.1. 전반2.2. 정여립의 난과 최후
3. 여담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문관, 유학자우의정,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는 등 공도 세웠으나 정여립과 친척(9촌)이었으며, 그와 서신을 주고 받았던 탓에 기축옥사 당시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2. 생애

2.1. 전반

전주 지역의 명문가 출신으로 부친은 영의정에 추증된 정진(鄭振)이며, 조부는 좌찬성에 추증된 정홍손(鄭洪孫)이다. 친형 정언지(鄭彦智) 또한 이조 참판을 지냈다.[3]

1566년 명종 21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1년에는 전라도 도사를 지내고 이후에는 사헌부에서 경력을 쌓다가 1579년 경기도관찰사로 임명된다. 1582년 여진족 니탕개니탕개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선조는 정언신을 우참찬으로 승진시키며 함경도 도순찰사를 겸직시키며 정언신에게 니탕개의 난을 진압할 것을 명했다. 이에 정언신은 신립, 이일, 이순신, 김시민, 이억기 등의 장수들을 이끌고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으며,[4]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병사를 주둔시켰다. 선조는 난을 진압한 정언신을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했다. 1587년 병조판서를 거쳐 1588년에는 우참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1589년에는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2.2. 정여립의 난과 최후

1589년 9촌 친척인 정여립이 모반 혐의를 받게 된다. 처음에는 정언신은 이를 조사하는 위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사헌부사간원에서 정언신이 정여립의 구촌(九寸) 즉 인척지간 임을 지적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또한 정언신이 "역모를 고변한 자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며 여러 대신들과의 자리에서 한 발언이 선조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여립과 주고받은 서신들이 발견되어 삭탈 관작되고 옥에 갇히었다. 그렇게 정언신은 우의정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는데, 정언신이 삭탈되자 무인(武人)들이 한숨짓고 개탄하였다며, 정언신이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무인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점도 훗날 화근이 될 수 있다며 문제가 되었다. 당장 정언신과 정여립이 주고받은 서신을 없앤 이응표도 무신이였다. 결국 사헌부에서 정언신에 대하여 역적을 두둔하고 옥사를 지연시켰다는 죄목으로 유배형에 처할 것을 청하니 선조가 그렇게 하라 명하였다.[5] 사실 이 정도에 그친 것도 선조의 엄청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이 때의 일화가 한 가지 있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선전관 이응표가 정언신의 이름이 들어간 서신을 모두 제거하고 이를 정언신에게 알렸다. 이를 믿은 정언신은 선조에게 정여립과 서신을 주고 받은 적이 없음을 주장했지만, '宗老信(종가의 큰어른 언신)'이 처음에는 누구인지 알지 못하다가 '종로(宗老)'가 '정언신' 임이 밝혀지자 문제가 커졌다. 무신이던 이응표가 당시 문인들이 멋부려서 자신을 칭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일어난 일. 이에 격노한 선조가 "내가 눈도 없는 줄 아느냐?"라고 정언신에게 그의 이름이 나온 서찰을 무러 19장이나 보여주면서 추궁했다.[6]

이렇게 해서 억울한 누명을 당한 정언신은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유배지인 갑산에서 사망한다. 같은 시기에 김우옹, 이발,백유양, 정개청, 최영경 등도 유배를 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래도 정언신은 삼정승을 지내고, 10년 후에(1599년) 선조에 의해 복권도 되었지만, 그 외 다른 사람들은 삼정승은커녕, 의정부의 찬성이나 참찬이라는 벼슬까지 못 받으면서 선조의 의심을 받고 갑자기 권간으로 지목을 당해 유배나 죽음을 당해야 했으니 누명에 의한 억울함이 더 심했다.

흥미로운 점은 문제의 이응표는 처벌받았단 기록이 없으며 이후 경상우수사, 전라우수사를 역임하면서 임진왜란 중에 종군했다. 전후에도 경상좌수사, 통제사를 지냈다.

3. 여담

  • 이항복은 정언신이 사망하자 몰래 찾아가 관 속에 만언시(挽人詩)를 지어 넣어 애도의 뜻을 표했고, 선조도 그의 죽음을 후회하고 사후 복권을 시켜주었다.
  • 군사적 재능은 확실히 뛰어났는지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 황정욱은 "정언신이 있었으면 왜적에 이렇게 짓밟히지는 않았을 것."라고 탄식했으며, 류성룡징비록에서 임란 시기에 그가 없음을 아쉬워했다.
  • 비록 정언신은 억울하게 얽혀 죽었지만, 완전히 집안 자체가 풍비박산이 난 이발과는 다르게 복권되어 손자 정세규가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자손대에까지 피해가 크진 않았다.
  • 전주시 덕진구에 그의 이름을 딴 '정언신로'라는 도로명이 있다.

4. 대중매체


[1] 순평군의 외고손녀. #[2] 정선공주의 외5대손.#[3] 형 정언지 역시 정언신과 마찬가지로 정여립의 난에 엮여 고초를 겪었다. 다만 정언지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한성부 좌판윤으로 복관되었다.[4] 이 때 함께했던 장수들은 임진왜란 때도 명성을 떨치게 된다. 참고로 이순신의 경우는 정언신이 선조에게 직접 유능한 장수로 추천하기도 했다.[5] 이 때 정언신이 추천했던 이순신도 옥에 찾아온 일로 인해서 정읍현감으로 좌천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나마 좌천에서 그친 것을 특혜로도 본다.[6] 이 내용은 선조수정실록에만 나오고 선조실록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