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3:44:54

허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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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 ~ 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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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씨 5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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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
許篈| Heo 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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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의 묘
출생 1551년 7월 28일
(명종 6년, 음력 1551년 6월 25일)[참조]
조선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허엽 별장
(現 대한민국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475-3)
사망 1588년
(선조 21년, 음력 1588년)
(향년 37세)
조선 강원도 금강산김화현 생창역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북한) 금강산김화군 생창역)
병사 (황달폐렴으로 요절함)
묘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산61
학력 미암 유희춘의 문하
증광시 생원시 급제 (1568년)
춘당대시 병과 급제 (음력 1572년 3월 10일)
직업 관료, 외교관, 시인, 문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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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양천(陽川)[2]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공훈 없음
최종
관등
창원부사
(昌原府使)
봉(篈)
숙미(叔美)
하곡(荷谷)
종교 유교 (성리학), 도교, 불교[3]
붕당 [[동인(조선)|{{{#!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15B; font-size: .8em"
작품 《하곡집(荷谷集)》
《하곡수어(荷谷粹語)》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
부모 부 - 허엽(許曄, 1517 ~ 1580)
전모 - 한이정(韓二貞, 1515 ~ ?)[4]
친모 - 강릉 김씨 김광철(金光轍)의 딸
형제
자매
이복 누나 - 허묵석(許墨石, 1544 ~ ?)[5]
이복 누나 - 허대정(許大貞, 1546 ~ ?)[6][7]
이복 형 - 허성(許筬, 1548 ~ 1612)
친여동생 -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 ~ 1589)
친남동생 - 허균(許筠, 1569 ~ 1618)
배우자 전주 이씨
자녀 장남: 허채 (許寀, 1576 - ?)
차남: 허친 (許親, 1583 - 1618)
3남: 허안 (許?, ? - ?)
장녀: 김극건의 처, 양천 허씨 (? - ?)
경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 개요2. 가족3. 생애
3.1. 생애 초기3.2. 관직 생활3.3. 최후
4. 평가5. 작품6. 기타7.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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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관료, 외교관, 시인, 문장가.

동인서인의 첫 대립 이후 아버지를 따라서 동인이 되었으며, 동인의 선봉장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율곡 이이를 탄핵하고 함경남도 갑산군에 유배되었다. 이후 정치를 그만 하고 방랑 생활로 남은 여생을 보내다 요절했다.

2. 가족

동인의 실세인 허엽의 아들로, 아버지 허엽, 이복형 허성, 동복여동생 허난설헌, 동복남동생 허균과 함께 허씨 5문장으로 불렸다.

동복동생들과 친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허난설헌과 허균이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우도록 권한 사람이 허봉이다. 남동생 허균이 15살일 때, "15살 어린아이의 필봉이 늠름하다"라고 칭찬한 적이 있었다.[출처1] 그리고 허균의 스승인 사명당류성룡은 허봉의 친구이다. 허봉과의 친분을 통해서 허균이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여동생 허난설헌이 8살 때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짓고 선비들 사이에서 신동으로 유명해지자, 여동생과 시를 주고받으면서 좋은 시집이나 붓이 있으면 여동생에게 주며 응원했다.[출처2]

그래서인지 1582년 허균은 허봉을 형님#이라 부르면서 손곡 이달과 함께 극진하게 모셨으며, 1583년 허봉이 함경남도 갑산군에 유배되었을 때 허난설헌은 <오라버니 하곡께>라는 시를 지어 "산과 물이 가로막혀 소식도 뜸하니 그지없는 이 시름을 풀 길이 없네요."라며 오빠를 그리워했다.[출처3]

숙인 전주 이씨 이우빈(李禹賓)의 딸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허채, 차남은 허친, 3남은 허안, 장녀는 김극건(金克鍵)의 처이다.

허친과 허채는 허균 옥사 사건 당시 공초했는데, 그들은 이렇게 진술했다.
지난 계미년에 신의 아비 허봉이 갑산(甲山)에 유배를 갔었습니다. 그러다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허균과 그의 누이 김성립(金誠立)의 처가 한마음으로 신의 아비를 할머니에게 이간질하여, 신의 어미와 신의 아비로 하여금 3년간을 각각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신의 아비가 죽으면서 비록 신의 할머니에게 감히 원망을 돌리지는 못했으나, 신의 형제는 허균을 하늘에 이르도록 원망하여 원수와 같이 보았으며, 허균도 신의 형제를 역시 그렇게 보았습니다.
즉 "허균 일가와 연을 끊고 살았다"고 진술한 것이다. # 공초 당시 한 말로 보았을 때, 허봉 일가와 허균과 허난설헌은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611년 허균이 함열[11]에 있을 때 허봉의 장남 허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허봉 사후에 허채가 "함열 현감 한회일이 허균을 잘 대해주지 않는다"고 한성부의 지인들에게 말해서 허균이 조카 허채에게 "고맙긴 한데 너무 지나쳤다"고 지적한 것을 보면, 허봉의 자식들이 작은아버지 허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 연을 끊고 살았다고 보기에는 허봉 사후 편지를 보내는 관계가 그렇게 보이지 않으므로, 위의 '허난설헌이 허균과 함께 이간질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수 있다. 허봉 사후 허채는 하곡공파(荷谷公) 판도좌랑공 10세손(봉)파로 가문을 이어가고, 허안은 평사공파(評事公) 판도좌랑공 11세손(안)파로 가문을 이어갔다. # 그러나 차남 허친은 연루되어서 1618년 당시 연좌되었다. # #

3. 생애

3.1. 생애 초기

강릉부(江陵府)는 옛 명주(溟州) 땅인데, 산수의 아름답기가 조선[東方]에서 제일이다. 산천이 정기를 모아가지고 있어 이인(異人)이 가끔 나온다. 국초(國初)의 함동원(咸東原)의 사업이 역사에 실려 있고, 참판 최치운(崔致雲) 부자의 문장과 절개가 또한 동원(東原)만 못지 않다. 매월당(梅月堂)[12]은 천고에 동떨어지게 뛰어났으니, 온 천하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찾아볼 수 없으며,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城) 또한 뛰어난 행실로 일컬어지고, 중종조의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과 최간재(崔艮齋)의 문장이 세상에 유명하다. 요즘 이율곡(李栗谷) 또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 중씨(仲氏)[13]와 난설헌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았다 할 수 있다.
ㅡ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학산초담 #
위 허균의 저서 <학산초담>에서 알 수 있듯이, 허봉과 허난설헌은 강릉부에서 태어났다. 허봉은 7살부터 글을 짓는 데 재능이 있었으며, 10살에는 경전과 역사를 배웠고, 시를 매우 잘 썼다한다. 또한 암기력이 뛰어나서, 책을 한번 읽으면 내용을 까먹지 않았다.[출처4]

미암 유희춘의 문하에서 한문학과 성리학을 수학했으며, 1568년 증광시 생원시에 합격인원 100명 중 1위로 급제했다.#

1572년 3월 10월 춘당대시 병과에서 합격인원 15명 중 3위로 급재했다.#

3.2. 관직 생활

문과에 급제한 이후 승문원 부정자, 예문관 검열을 맡았다. 이후 선조의 신임을 받아서, 휴가를 받고 두모포 독서당에서 송나라 시와 당나라 시를 읽고 몸에 익히면서 시간을 보냈다.

1574년 예조좌랑을 제수받고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생신을 축하하러 가는 사신을 동행해서 서장관 일을 했다. 이 무렵 명나라의 선비들과 만나 시를 주고받았다. 당시 중국 여행을 <하곡조천기>에 기록했다. 조선 조정에 돌아간 후 홍문관 수찬이 되었으며, 1576년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 1577년 의정부 사인과 홍문관 응교로 승진했다. 1578년에는 함경도 순무어사가 되어 함경도 국경을 살피고 조정에 돌아왔다. 이렇게 선조의 신임을 받는 신하였지만, 1577년 사건으로 선조의 눈 밖에 났다.

1577년 선조가 친할머니인 창빈 안씨[15]의 사당을 궁궐 안에 봉안하려고 하자, 허봉은 아래와 같이 반대했다.
명칭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하지 못하게 되어 백성이 손발을 둘 데가 없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대원군묘(大院君廟)를 일컬어 가묘(家廟)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명칭입니까? 국가에 어찌 가묘가 있을 수 있습니까? 단지 대원군묘라고 하든지 사친묘(私親廟)라고 하든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안빈(安嬪)을 아조(我祖)라고 일컬으시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비록 대원군이 계시더라도 적(嫡)에 압존(壓尊)되어 감히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인데, 더구나 전하께서는 대통(大統)을 입승(入承)하셨으니, 어떻게 감히 아조라고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원군은 제후(諸侯)의 별자(別子)로 백세의 불천묘(不遷廟)가 되지마는, 안빈은 모(妾母)이므로 다만 사실(私室)에서 제사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지, 시조묘(始祖廟)에는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ㅡ 《선조실록》 허봉의 상소 #
허봉이 선조 앞에서 선조의 친할머니를 이라고 부르고 난 후, 선조는 허봉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1582년 여동생 허난설헌의 둘째 자식이자 조카인 김희윤요절하자 묘비명을 지었다. 조카 희윤을 귀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희윤의 아버지 성립은 나의 매부요.
할아버지 瞻(첨)이 나의 벗이로다.
눈물을 흘리면서 쓰는 비문.
맑고 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哭)에 부치노라.
ㅡ 《희윤의 묘비》#

1583년 허봉은 경기도 순무어사가 되어서 수원에서 군기가 정돈되지 못했으므로 부사 한응을 파면하길 청했고, 책임자 병조판서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
이이가 갑자기 높은 자리에 승진하여 나라의 중한 책임을 맡았으니, 마땅히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마음을 다하여 직무를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군사 행정의 중한 일을 아뢰지도 않은 채 먼저 시행했고, 내병조까지 들어왔다가도 끝내 임금의 명을 받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병권을 마음대로 행사하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는 대간을 업신여기고 공론을 매우 가볍게 여겼으니, 파직시키기를 청합니다.
ㅡ 허봉의 율곡 이이 탄핵 상소 [출처5]
이후 허봉은 창원 부사로 제수되었으며, 허봉의 동료들이자 동인 인물들인 대사간 송응개와 승지 박근원이 호응해서 상소했다. 선조는 율곡 이이를 신임했고, 이전 친할머니 창빈 안씨 관련 건으로 허봉을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허봉과 허봉의 동료들을 "간교한 무리들"이라고 부르고 허봉을 함경남도 갑산군으로 귀양보냈다.# 이후 율곡 이이가 "허봉은 경망하고 일을 좋아하지만 간사한 사람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선조에게 "너그러운 처분"을 청했지만, 선조는 율곡이 죽을 때까지 허봉을 유배지에서 보내게 했다.[출처6] 허봉은 유배지에서 이태백의 시집을 읽으면서 "인간 세계로 귀양 온 신선"처럼 살았으며, 함경감사 권극지가 그를 정성껏 후하게 대접했다. 그래서 사헌부가 "권극지가 귀양 온 죄인과 친하게 지낸다"면서 탄핵한 적이 있었다.[출처7]

3.3. 최후

전 부사 허봉(許篈)이 금강산을 유람하러 갔다가, 도중에 금화역(金化驛)에서 죽었다.
ㅡ 《조선왕조실록》 허봉의 졸기 #
1585년 허엽의 고향 친구 노수신이 "허봉에게 너그러운 용서를 내려달라"고 말하자, 선조는 허봉을 석방했으나 한성부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했다.[출처9] 이후 석방된 허봉은 친구 사명당과 함께 불교의 교리를 이야기하면서 불교에 심취했다. 1588년 가을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가장 높은 비로봉을 구경하고 대명암에서 지냈다. 그러나 젊었을 때부터 술을 많이 마셔서 황달에 걸렸고, 차가운 것을 많이 먹어서 폐렴에 걸렸다. 들것에 실려서 강원도 금화현 생창역에 갔지만 숨을 거두었다.

4. 평가

앞뒤 가리지 않는 성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직 생활 당시 동인의 선봉장으로 활동했으며 왕인 선조가 신임하는 인물이라 해도 과감하게 비판하고 선조의 친할머니인 창빈 안씨를 "첩"이라고 부르는 등 과격하게 말하는 것을 마다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관직 생활을 오래 하지 못하고 선조한테 찍혀서 오래동안 유배지에서 지내고 한성부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 당하는 등 안 좋은 경험을 많이 했다.

남동생 허균과 마찬가지로 유교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믿는 사람들과 교류했으며 유배 생활을 하면서 불교와 도교를 믿었다.

5. 작품

저서로는 《하곡집(荷谷集)》, 《하곡수어(荷谷粹語)》,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가 있다.

6. 기타

  • 관직 생활 당시 을 잘 마시기로 유명했다. 홍문관에 있을 당시 선조가 홍문관 관료들에게 경전과 역사를 강연하게 하면서 술을 많이 권해서 취하게 만들었는데, 허봉은 "술을 마시면 큰 잔을 기울여서 거꾸로 뒤집어가며 마셨다" 한다. 두모포 독서당에서 노구솥이 하나 있었는데, 이 솥은 닷 되의 술을 담을 만한 크기였다. 이 솥에 꽉 채운 술을 한번에 다 마시면 그 사람의 이름을 솥에 새겼다. 예전에는 김천령이라는 사람의 이름만 새겨져 있었는데, 허봉이 홍문관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 허봉의 이름이 새겨졌다.[출처8]
  • 류성룡의 친구였다. 허봉과 류성룡은 나이차가 9년되는데 친구이다. 이후 류성룡은 허봉의 동복 동생 허균의 스승이 되었으며 난설헌시집의 발문을 써주었다. #
  • 김성립허난설헌의 둘째 자식 김희윤의 묘비명을 지었다. 묘비에 의하면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金瞻, 1542 - 1584)은 자신의 친구라한다. 위 류성룡과의 사이도 그렇고 김첨과 나이차가 9년 있는데도 친한 친구사이인 걸 보면 이항복이덕형처럼 나이차와 상관 없이 친구사이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 허봉의 작품 중 하나인 책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 2권의 하책에 동복 동생 허균의 1616년 작품 <을병조천록>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무슨 이유로 허봉의 작품에 허균의 작품이 묶여 있었는지는 불명이다.[21] 이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을병조천록>을 번역하고 2005년 출판했다.

7. 대중매체에서

  • 1993년과 1994년 사이 방영된 초롱이의 옛날여행 한국위인전 홍길동전과 허균에서 허봉이 허성과 함께 "당대의 명문장가로 벼슬을 했다"고 언급하면서 등장했다. #


[참조] #[2] 21대손이다.[3] 함경남도 갑산군에 유배된 이후, 도교불교를 더욱 믿게 되었다.[4] 한숙창(韓叔昌)의 딸이자 임영대군의 외증손녀.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이름이 남아 있다. 한이정[5]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이름이 나와 있다. 허묵석[6]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이름이 남아 있다. 허대정[7] 우성전(禹性傳)의 처.[출처1] 허경진 지음, 허균 평전 46쪽[출처2] 허경진 지음, 허균 평전 58쪽[출처3] 허경진 옮김, 허난설헌 시집 34쪽[11] 오늘날의 전라북도 익산시[12] 김시습(金時習)의 호[13] 허봉의 이명이다.[출처4] 허경진 지음, 허균 평전 44쪽[15] 중종후궁. 선조의 법적 할머니(적조모)는 중종왕비장경왕후문정왕후였다. (중종의 첫 왕비 단경왕후는 폐위되었다가 영조 때 복위되었다.)[출처5] 허경진 지음, 허균 평전 48쪽, 49쪽[출처6] 허경진 지음, 허균 평전 51쪽[출처7] 허경진 지음, 허균 평전 53쪽[출처9] 허경진 지음, 허균 평전 52, 53쪽[출처8] 허경진 지음, 허균 평전 46쪽[21] 허균이 역모 혐의로 죽고 난 후 허균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인멸되었으므로 허균이 죽기 전에 작품 일부를 형의 문집에 묶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