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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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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전 조선에서3. 사후 조선에서4. 현대 한국에서
4.1. 학계에서
4.1.1. 이가원의 견해 (1980)4.1.2. 허경진의 견해 (2002)4.1.3. 이이화의 견해 (1980, 2014)
4.2. 그 외 견해
5. 중국에서
5.1. 오명제의 견해 (1598)5.2. 주지번의 견해 (1611)

[clearfix]

1. 개요

교산 허균의 평가를 다루는 문서이다.

2. 생전 조선에서

허씨 5문장의 일원으로서 시와 문장에 재능이 있어서 조선의 문인들이 좋은 평을 했다. 동시대 인물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허균이 어렸을 때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허균처럼 자신도 "문장을 무척 좋아해서" 평생토록 허균을 직접 방문한 적이 없는 것을 아쉬워 했다. 어우야담에 의하면 허균은 유몽인의 시를 보고 "앞사람의 모범을 모방하지 않았는데 이는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평가했다.[1] 허균이 유몽인의 독창성을 고평가한 것을 보고 유몽인이 허균을 좋게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사상 문서에서 보여진 허균의 다양한 사상들을 믿고 배우려 하는 모습은 다른 동시대 인물들에게는 부정적으로 보인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불교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사헌부는 이렇게 평가했다.
삼척 부사(三陟府使) 허균(許筠)은 유가(儒家)의 아들로 그 부형이 종사하던 것과는 반대로 불교를 숭신(崇信)하여 불경을 외며 평소에도 치의(緇衣)를 입고 부처에게 절을 하였고, 수령이 되었을 때에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재(齎)를 열어 반승(飯僧)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으며, 심지어 중국 사신이 나왔을 때에는 방자하게 선담(禪談) 불어(佛語)를 하며 부처를 좋아하는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중국 사신의 눈을 현혹시켰으니, 매우 해괴하고 놀랍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아 사습(士習)을 바로 잡으소서.
<조선왕조실록>#
허균은 관직 생활 당시 불교를 믿는다고 탄핵을 받았는데 이는 율곡 이이김시습이 직간접적으로 불교와 인연이 있어 반대파에 공박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비슷했다. 이런 점이 당대 인사들에게 허균이 공격당하는 이유가 되었는데 선조는 "원래 글쟁이들이 불경을 두루 섭렵한다는데 그러다 그렇게 된거겠지. 뭘 괜히 그러냐?"며 두둔했다.[2]

인격적으로도 썩 훌륭치 않은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여럿 있는데 삼사의 탄핵도 6번이나 받았으며[3] 중앙 요직으로 올라가기 전까지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할 일을 내팽개치고 탱자탱자 놀았다는 기록도 있다.

3. 사후 조선에서

허균은 천지간의 한 괴물입니다... 그 몸뚱이를 수레에 찢어 죽여도 오히려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인데... 폐출이 어떠한 의론이며 반란이 어떠한 죄상인데, 그가 감히 도당을 모아 이해로 유혹하여 대론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당당한 국가로서 어찌 이 일개의 괴이한 도깨비 같은 놈을 용납하여, 제 멋대로 야유하며 변덕부림을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까. 더구나 허균이 일생 동안 한 행위는 오만 가지 죄악이 구비하였습니다. 풍기를 문란케 하고 행실을 더럽게 하여 다시 사람의 도리라곤 없고, 요망한 일을 일으키고 참언을 만드는 것이 그의 특기인데, 이것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입니다. 대질하여 변명하게 되기 전에 유생들을 사주하여 소장을 올려 요동(遼東)으로 가기를 감히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속셈이 어디에 있는지 훤하여 불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0년 4월, 조선 관료의 평가. #
허균은 역모 혐의로 처형당했으므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허균의 제자였던 택당 이식은 허균은 <수호전>을 좋아했고 홍길동전을 썼기 때문에 "농아보다도 더 심한 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라고 평가했다. #

다만 허균의 작품 <성소부부고>의 발문을 쓴 허균의 외손 이필진은 허균이 폐모살제의 선봉장이 된 이유에 대해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에 끼어든 것은 본심이 아니었고 간흉(奸凶·이이첨)의 꾐에 빠진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외조부 허균을 변호했다.

숙종 시기 1695년 문인 박태순이 허균의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을 간행하면서 허균의 재능을 높이 보고 칭찬했다. 박태순은 서문에서 "허균의 <국조시산>과 저술들은 허균이 피주(被誅)된 뒤에 거의 인멸되기에 이르렀다. 혹 호사가(好事家) 가운데 수록하여 둔 자가 있어도 밖으로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아 빛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사람은 폐(廢)할지언정 그 소집(所集)은 폐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또 많지 않은 우리 나라 시선집 가운데도 가장 뛰어난 이 선집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어, 널리 제본(諸本)을 구하고 증정(證正)을 가하여 여러 권으로 찬집, 간행한다.”고 말했으며 이로 인해 1699년 전라도관찰사 재직시 전라도 유생들에게 찍혀서 비판을 받고 경기도 장단부사로 좌천되었다. #

4. 현대 한국에서

현대적 관점으로 허균의 업적을 평가하면 동시대 인물들에 비해 자유분방하고 사회비판적이며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교류했던 것과 허균이 최초로 천주교를 국내에 들여온 인물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일부 학자들은 유교 사상에 의지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면서 다른 사상들을 믿은 점을 보고 허균과 이지를 비교하기도 했으며 이는 이가원 교수와 허경진 교수의 견해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허균의 호민론은 1980년 이이화 교수가 연재한 <허균의 생각>에서 문제가 되어서 신군부가 이이화 교수의 허균 관련 작품을 금서로 지정한 적이 있을 정도로 사회비판적이었다고 평가된다. 이전에는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지만 허균의 저서 <성소부부고>, <도문대작> <을병조천록>, <한정록>, <국조시산> 등이 번역되면서 학계에서 허균의 행적과 사상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이후 허균의 자유분방하고 사회비판적인 면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천주교 12단(端)이라는 책을 들여옴으로써 천주교 전파의 기초를 마련한 것이 높이 평가된다. 하지만 정작 허균 본인이 천주교 신자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평소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허균이 1610년 중국에서 책을 수천여 권 들여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 천주교 책도 같이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4] 허균이 최초의 천주교 신자라 하지만 실제 허균이 크게 심취했던건 불교도교로 동복 형 허봉의 친구 사명대사와도 친분이 있었고 그가 탄핵된 주된 이유가 불자였다는 점이며 1618년 옥사로 죽기 전 명나라의 도교 사상을 정리한 <한정록>을 간행한 점이다. 하지만 허균이 쓴 <을병조천록>을 토대로 해서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최강현 교수가 천주교 신자였다고 주장한 견해가 있는데 자세한 것은 허균 문서의 사상 참조.

4.1. 학계에서

4.1.1. 이가원의 견해 (1980)

"허균의 사상과 행위도 역시 이지와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닮았으니, 자못 기이한 일이다. 이제 크게 비슷한 점만 대략 들어본다면, 그들이 유가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인한 점이 같고, 불교의 설을 몹시 좋아한 점이 같다. 농민으로 의병을 일으킨 진승을 격찬한 점이 같고, 여성의 재가와 성의 해방을 주장한 점이 같으며, 소설문학을 비평한 점이 같다. <수호전>을 몹시 좋아한 점이 같고, <세설신어>에 주를 보완한 점이 같다. 시와 문장을 지으면서 앞사람들의 글투를 답습하지 않은 점이 같고, 자기 키만큼 책을 지은 것도 같다. 그들이 처한 시대도 같고, 유교반도라고 비난받은 점도 같다. 감옥에 갇혀서 목숨을 마친 것도 같고, 그들의 책이 훼금된 것도 같다.

이러한 몇 가지를 보면, 허균과 이지 두 사람의 평생은 크게 같으며 조금만 다르다. 이 점이 바로 나 이가원이 '허균은 한국의 이지이다'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ㅡ 이가원 <유교반도 허균> pp. 104 허경진 옮김 (1980).
1980년 중국 중앙연구원이 주최한 국제한학회의에 초청받은 연민 이가원 교수가 한문으로 발표한 논문 <허균의 사상과 문학>에서 나온 견해이다.

2000년 방영된 다큐멘터리 <KBS 역사스페셜 –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 허균>에 의하면 이가원은 8.15 광복 직후부터 허균을 연구한 단국대 석좌교수이며, 허균을 "유교반도"라고 평가하면서 "그 사회가 너무 유교적으로 지나치게 구속된 그런 사회에 염증이 나서 벗어나자고 했으므로 그 (조선시대) 당시 반유교인 것"이라고 말했다. #

이후 2000년 허경진 교수가 이가원 교수의 논문을 번역하면서 <유교반도 허균>으로 제목을 바꿔서 출판했다. 이가원 교수는 허균과 이지를 비교해서 두 인물의 일생과 행적이 비슷한 점이 많다고 평가했다.

4.1.2. 허경진의 견해 (2002)

"...사회마다 그들 나름대로 약속된 규칙이 있다. 그 사회의 구성원은 그 규칙을 지켜야만 사회의 일원으로서 충돌 없이 살 수 있다. 조선 사회의 규칙은 유교의 경전이었다. 그런데 허균은 이 규칙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많이 했다. 그도 이러한 것들을 모두 배워서 알긴 했지만 꼭 지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앞서서 시대를 살았던 것이 죄라면 죄일 것이다.

...남들이 다 지키는 조선 사회의 규칙을 그가 깨뜨렸다고 해서 유학자들은 그를 비난했지만, 이 규칙을 깨뜨려야만 혁명가나 선각자가 될 수 있다. 어느 시대에나 그러한 몇몇 사람이 결국은 시대를 앞서 이끌어나갔던 것이다.

...왕조실록, 특히 <광해군일기>에 실린 그에 대한 기록은 비난투성이이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꾸민 느낌이다. 그가 새로운 벼슬을 하거나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관의 기록 밑에는 반드시 작은 글씨의 주가 덧붙여 그를 헐뜯고 있다. 이는 <광해군일기>의 편찬자들이 그와 당파적으로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이며, 더구나 인조반정 뒤에 엮은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기록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오늘에 와서 허균을 역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허균이 젊었던 시절에 너무 자유분방하게 살았기에 세상이 그를 버렸지만 그도 나름대로 세상을 바꿔보려고 노력했다. 귀양 가기 이전의 그와 이후의 그는 너무나도 달랐다. 세상을 보는 그의 눈이 달라졌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자신이 세상에 맞지 않자, 자기를 세상에 맞게 고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기에 맞도록 고치려고 했다.

...허균은 때를 잘못 만났기에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르지 못한 이무기였다."
ㅡ 허경진 <허균평전> 돌베개 발행, pp. 379 ~ 383 (2002).
2002년 <허균평전>에서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 허경진은 허균을 "때를 잘못 만났기에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르지 못한 이무기"로 평가했으며, 허균의 저서들을 토대로 광해군 시기 귀양 가기 전과 귀양 이후의 모습과 행적이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4.1.3. 이이화의 견해 (1980, 2014)

"허균은 「호민론」에서 호민의 성격을 밝히고 있다. 그는 한 사회나 나라의 여러 모순과 부조리와 부패세력을 없애려면 반드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고, 잠자는 민중을 이끌고 나가는 지도자를 ‘호민’이라 했다.

역사 기록을 보니 허균은 역적, 나쁜 놈이고 그 당시에도 나쁜 이미지였다. 불쌍한 사람 도와주자, 양반사회 깨자, 신분 철폐하자, 이런 주장을 했으니까. 거기에 매료됐고 푹 빠졌다. 허균의 문집이 굉장히 어렵다. 왜 어려우냐 하면 허균의 독서량이 많으니까. 제자백가를 다 읽은 사람이다. 나도 그 속으로 들어가야지. 당시 유명한 한문학자를 다 찾아다녔다. 그분들도 처음 볼 때는 해석이 잘 안 된다. 그렇지만 달려들었다. 허균의 글은 짧은데도 핵심을 찌른다. 시대의 아픈 곳, 고쳐야 할 곳을 찔렀다. 놀랐다. 촌철살인이다...

허균은 간단히 말하면, 인간을 사랑한 사람이다. 차별 없는 세상, 약자가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인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다. 사상적으로 한 틀에 박힌 게 아니라. 넓게 봤다. 그런 면에서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익한 부분이 많다."
이이화 “허균은 인본주의자, 자유주의자" 예스 인터뷰 (2014). #
허균을 연구한 역사학자 이이화는 1980년 허균의 사상 호민론 등을 다룬 책 <허균의 생각>을 출판했는데 신군부에게 찍혀서 <허균의 생각> 초판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이후 2014년 이이화가 개정판을 출판했다.

4.2. 그 외 견해

전형적인 말이 실제를 못 따라간 인물이라는 평가가 있다. 문장가와 사상가로서는 뛰어났으나 계축옥사 이후 이이첨에게 이용당하다가 죽은 점을 보고 정치가와 관료로서는 하찮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처세로 논하자면 입으로는 급진적인 말을 하지만 막상 위험해지니 권신에게 영합하다 그 권신의 희생양으로 죽은 인물로 보고 있다. 이 견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허균 문서의 최후에 대한 논란 참조.

5. 중국에서

5.1. 오명제의 견해 (1598)

...허균(許筠)이 ...영민해서 시를 한 번 보면 잊지 않아, 동방의 시를 수백 편이나 외워 주었다."
ㅡ 《조선시선》 서문 #
1598년 명나라의 문인 오명제는 허균의 집에서 허균이 외워 준 시를 바탕으로 시선집 <조선시선>을 집필했으며, 허난설헌의 시 58수와 허균의 시 15수를 시선집에 포함했다. 오명제는 허균을 보고 "영민하다"고 평가했다.

5.2. 주지번의 견해 (1611)

난우(蘭嵎) 주지번 태사(朱太史)가 《부부고(覆瓿藁)》라는 4부(部)로 된 책 1질을 가지고 와서 나와 다음과 같은 말들이 오갔었다.
“내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조선에 가서 그 나라의 많은 관신사(冠紳士)들과 추종했습니다. 그 중에서 허씨(許氏) 집안이 그 장점을 독차지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 허균의 문집입니다. 그의 문(文)은 우여 완량(紆餘婉亮)하여 감주(弇州)의 만년의 작품과 같고, 그의 시는 창달 섬려(鬯達贍麗)하여 화천(華泉)의 청치(淸致)가 있으므로, 나는 그윽이 기뻐하여 그 전집(全集)을 구했던바, 금년에 비로소 1질을 서울에서 보내와 저리(邸吏)가 전달한 것입니다..."
ㅡ 《성소부부고》 서 #
1611년 명나라의 문인 주지번은 허균의 <성소부부고>의 초고를 읽고 허균의 재능을 칭찬했다.


[1] 허균이 누나 허난설헌의 시 표절 논란의 원인으로 지목된 적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 평가는 왠지 의미심장하다.[2]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불교가 맨 처음 들어왔을 때 불교는 도교의 별파나 방술의 일종 정도로 인식되었다. 이런 인식을 타개하기 위해 승려들은 불경을 한자로 번역하는 사업을 통해 불교 교리 전파에 힘썼는데 불경들의 문학성이 실로 대단하여 식자층의 인기를 끌어 중국에서 불교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이러니 글쟁이들이라면 불경을 1번 읽어본다는 말이 나온 것.[3] 다만 그 중에는 서자들과 어울려 놀기를 즐긴다는 등 현대의 기준으로는 흠결이 되지 않는 탄핵도 있다.[4] JTBC 사건반장에서 허균이 "최초의 천주교 신자"라고 말했는데 잘 모르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이 영상이 왜곡이 좀 심한게 허난설헌을 여동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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