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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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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인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저술한 한국 최초의 야담집. 총 5권 1책으로 인륜, 종교, 학예, 사회, 만물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2. 저자 유몽인에 대해

유몽인이라는 인물은 무난하게 소개되기도 하고, 정반대로 극도로 까는 사료도 있어서 교차검증하여 평가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 일단 어우야담에 실린 유몽인 본인의 모습은 딱 먹물 좀 먹은 선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유몽인은 훗날 정조때 복권, 이조판서에 추증된다. 유몽인의 누이는 어깨너머로 사서삼경을 독파한 재녀로, 홍민이라는 사람에게 시집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게 바로 영의정을 지낸 홍서봉이다. 홍서봉은 최명길에 가려져서 그렇지 병자호란때 화의를 주도하고 실무를 도맡았으며, 소현세자와 그의 자손들을 보호한 인물이다. 인조반정에 참여해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냈는데 정작 외삼촌 유몽인이 역모에 몰려죽었지만 손을 쓰지 못했다.

3. 내용

조선 후기에 성행한 야담류의 효시이며 풍자적인 내용과 문체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초중기 및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설화들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다.

유몽인은 광해군과 사이가 틀어져 낙향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총신으로 여겨져 인조반정 직후 고변을 당해 아들과 함께 사형당했다. 그 때문에 어우야담을 정리하지 못해서 온전한 판본은 없고, 30여 종에 이르는 판본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은 1964년 이제현의 후손 유제한(柳濟漢)이 어우야담을 처음으로 정리해 다섯 권으로 인쇄해서 출판한 만종재본이다.

특히 유몽인 본인이 임진왜란을 경험한 세대이기 때문에 전란 속에서 고통을 받은 일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쓰여져 있다.
"천축天竺 서쪽에 구라파가 있고, 그곳에는 하늘을 섬기는 도道가 하나 있다. 그 교는 유교도 아니요 불교도 아니요 도교도 아닌 별난 교이다. 모든 마음가짐이나 행동을 하늘을 어기지 말라 하고, 천존天尊의 상象을 만들어 놓고 받들어 모신다. 석가노자를 배척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유교를 원수처럼 여긴다. 우리의 도를 많이 인용하여 말하면서도 큰 근본에서는 현격하게 다르다. 석가의 윤회설도 배척하며 천당지옥이 있다고 한다. 또 그 풍속은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평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는 군자를 뽑하서 교황敎皇이라고 이름한다. 교황은 천주의 가르침을 퍼뜨리며 세습으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그 무리들 가운데에서 가장 현명한 자를 택하여 교황으로 세운다. 그는 사사로운 가정의 생활이 없이 오로지 그 몸을 공무에만 맡기는 것이다. 자식은 물론 없고 억조창생을 모두 자식이라고 한다.
그들의 글회회교回回敎그것과 매우 닮아서 왼쪽으로부터 나가고, 글자횡서橫書로 쓰게 되어 있으며, 그것을 성현의 말이라고 한다. 그 무리 가운데 천문성상天文星象에 정통한 '이마두'라는 자가 있다. 그는 태어나기는 구라파에서 났으며, 서역 8만 리를 주유하며 10여 년간 천금의 재산을 모았다가 그것을 다 버리고 중국에 들어와서 여러 경서들을 모두 섭렵하고 성현의 글도 읽고하여 계묘년에 이르러 책을 쓰니, 모두 상하권으로 여덟 편編이 되었다. 모두 천주교의 가르침을 썼는데, 그 끝 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한나라 애제哀帝 원수元壽 2년, 동지가 지난 사흘 뒤그 나라동정녀가 강림하여 남자와 교접이 없이 아이를 배고 낳으니 사내아이라, 이름은 예수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는 세상을 구제하면서 몸소 서역의 신인神人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사신을 파견했더니 사신은 반도 채 못 가서 인도로부터 불경을 얻어 가지고 와서 그것이 성교聖敎라고 잘못 전해진 일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마두라는 자는 이인異人이다.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천하의 지도를 그렸고, 여러 나라의 말을 알아 중국에 와서는 포교를 했다. 그 포교의 행각은 동남의 여러 오랑캐 나라에도 미치어 존신尊信하는 바가 되었다. 전자에 왜장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도 이 도를 운위했고, 허균許筠이 중국에 들어가서 그 지도와 교지敎旨 12장章을 갖고 돌아왔으나, 모두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임을 면치 못했다."[1]
- 유몽인 저, 『어우야담』, 제13장 「서교西敎」에서.

내용 중에는 천주교에 대한 설명도 들어 있다. 정확히는 중국에 온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에 대해 설명하면서 함께 천주교에 대해 설명한 것. 천주교의 교리와 교황 제도에 대해 설명하며, 조선의 유불선(유교, 불교, 도교)과의 비교한 평가도 있다. 물론 유몽인 본인이 성리학자인 관계로 천주교에 대해선 비판적인 논조가 강하다. 후대의 이익이 천주실의를 소개한 이후로 당대 학자들이 천주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공격과 옹호를 했는데, 유몽인이 어우야담에서 쓴 천주교 비판은 이런 논의의 선두주자 격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에 대한 일화도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다음과 같다.
"만력萬曆 임진, 계사년 사이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한산도에 군진을 치고 있었다. 그 아들 역시 종군하여 충청도에 이르러 왜적과 만나 싸움이 벌어졌다. 단숨에 서너 놈 왜적의 목을 베고, 이어 적을 쫓아 말을 달리던 중 한 무리의 왜적들이 초가집에 감복해 있다가 불시에 습격했다. 이리하여 순신의 아들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러나 순신은 이러한 소식을 알 까닭이 없었다.
뒤에 충청도 방어사가 왜적 열세 명을 잡아 산 채로 한산도에 보냈다. 그날 밤에 순신이 잠에서 놀라 깨어나 비로소 아들이 죽은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런데 곧이어서 부음이 날아들었다. 순신은 잡혀 온 왜적을 끌어내어 물었다.
"어느 날쯤에 너희들은 충청도 어느 곳에서 붉고 흰 준마를 탄 사람을 만난 일이 있느냐? 너희들이 그 사람을 죽이고 말을 빼앗았을 터인즉, 말은 어디 있느냐? 말을 찾고자 한다."
순신이 이렇게 타이르자, 그 가운데에서 한 놈의 왜병이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어떤 날 한 소년이 붉고 흰 얼룩말을 타고 우리를 추격하였습죠. 소년이 아군 서너 명을 죽였으므로 우리는 초가집에 잠복해 있다가 불시에 소년을 습격했고, 말은 빼앗아 우리 장수에게 바쳤습니다."
다른 왜적 놈들에게 물어도 모두 그렇다는 대답이었다. 순신은 애통해 마지 않았다. 왜놈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참수당했다. 그러고는 초혼제를 올려서 아들에게 이 일을 말해 주었다."[2]
- 유몽인 저, 『어우야담』, 제16장 「영혼靈魂」에서.

이 일화는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도 각색되었다. 다만 이순신의 아들로서 왜병에게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면은 한산도가 아닌 명량 해전 이후에 죽었기에 시간대가 맞지 않다. 여담으로 이순신 본인은 유몽인을 별로 안 좋게 평가했다. 유몽인이 암행어사로 남쪽을 돌아다니면서 관리들을 심사하는데 임실현감 이몽상과 무장현감 이충길, 영암군수 김성헌, 낙안군수 신호를 파면해 내치고 순천부사 권준[3]은 "탐관오리의 으뜸"이라고 조정에 보고하면서 담양군수 이경로나 나주목사 이순용, 장성현감 이귀, 창평현감 백유항 등에 대해서는 그들의 과오는 덮어놓은 채 상을 요청했다거나, 그리고 수군을 친척 가운데서 뽑는 것과 장정 넷 가운데 둘을 전장에 내보내는 안에 대해서 비난한 적이 있었다. 난중일기 갑오(1594년)일기 2월 16일자에 이 이야기를 언급한다.
"국가의 위급한 난리는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에만 몰두해 남쪽의 헛소리에만 귀기울였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악비)한테 한 짓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혹독하게 비판을 해놨다. 이 당시 관점에서 진회는 간신, 악비는 충신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인데 이순신은 유몽인을 진회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충무공의 인물 비판은 좀 걸러들어야 할 것이, 그 능력과 애국심을 누구도 의심치 않는 사명대사조차도 땡중이라고 까내리신 분이 충무공이다. 충무공 본인을 기준으로 삼다 보니 그 기준을 충족할만한 인물이 별로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몽인 본인은 어우야담에서 다들 충신으로 추앙하는 남송문천상을 왜 원나라에 사로잡힌 후 애산 전투에서 송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즉시 자결하지 않고 옥중에서 5년이나 더 구차한 목숨을 이어갔냐고 비판하는 글을 적었다.

조선 후기 문신 장유가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사실과 다른 것이 많다고 저서 '계곡집(谿谷集)'에서 비판한 적이 있다.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지었는데, 민간의 비속한 일들을 많이 기록하면서 그 사이에 시화(詩話)나 국조(國祖)의 고사(故事)도 언급하였다.

그런데 내가 우연히 한 권을 얻어서 들춰보았더니, 그 글이 매우 속될 뿐더러 기록 자체도 사실과 다른 곳이 눈에 많이 띄었다. 예컨대 박원종(朴元宗)이 36세에 영상(領相)이 되었다고 한 것이나, 홍유손(洪裕孫)이 90세에 아들을 낳았다고 한 것, 그리고 김수온(金守溫)이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고 한 것들은 모두가 오류를 범한 것이다.
ㅡ 《계곡집》 계곡만필 제1권 / [만필(漫筆)] #
또한 백두산에서 털북숭이 거대 괴물을 봤다는 만주사람의 이야기를 신립 장군이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돌베개에서 만종재본을 비롯한 30여 종의 이본을 대조하고 번역해서 완역본을 출판했다. 만종재본에 수록되지 않은 39화가 수록되었다.

필사본이 국립중앙도서관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1] 유몽인, 이희준 저, 이민수 역, 『어우야담·계서야담』, 서울, 사단법인 올재, 2022, p.71-72.[2] 유몽인, 이희준 저, 이민수 역, 앞의 책, p.78-79.[3]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순신 장군이 아꼈던 장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