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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몽인 柳夢寅 | |||
류몽인 영정[1] | |||
출생 | 1559년 (명종 14년, 음력 1559년) | ||
조선 경기도 가평군 추정 (現 대한민국 경기도 가평군)[2] | |||
사망 | 1623년 8월 30일 (인조 1년, 음력 1623년 8월 5일) (향년 64세) | ||
조선 한성부 (現 대한민국 서울) | |||
사형 (참수형)[3] | |||
복권 | 1794년 6월 9일 (정조 18년, 음력 1794년 5월 12일)[4] | ||
조선 한성부 (現 대한민국 서울) | |||
국가원수가 관작을 회복함 | |||
묘소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산80 | ||
학력 | 성혼의 문하 (1559년과 1582년 사이) 식년시 진사 급제 (음력 1582년 2월 28일) 문과 증광시 갑과 장원 (음력 1589년 5월) | ||
직업 | 관료, 문학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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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조선 | ||
공훈 | 위성공신 3등 (衛聖功臣 三等, 1613)[5] | ||
최종 관등 | 이조 판서 (吏曹 判書)[6] | ||
시호 | 의정(義貞) | ||
휘 | 몽인(夢寅) | ||
자 | 응문(應文) | ||
호 | 어우당(於于堂), 간재(艮齋), 묵호자(默好子) | ||
종교 | 유교 (성리학), 불교 | ||
붕당 | [[대북|{{{#!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1; font-size: .8em" | ||
작품 | 《어우야담(於于野譚)》 《어우집(於于集)》[7] | ||
부모 | 부: 류탱 (柳樘, 1500년대 - ?) 모: 민의(閔禕)의 딸 (1500년대 - ?) | ||
배우자 | 신식(申栻)의 딸 (? - ?) | ||
자녀 | 장남: 류약 (柳瀹, ? - 1623) 차남: 류륜 (柳淪, ? - ?) | ||
경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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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관료, 문학가.호는 어우당(於于堂), 간재(艮齋), 묵호자(默好子)이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고려 말 공민왕 대에 정승을 지낸 시중 류탁(1311-1371)의 직계 후손으로 1559년 경기도 가평군에서 태어났다. #1559년과 1582년 사이 성혼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그러나 성혼의 교훈을 거역하다 파문당했고, 1598년 성혼이 죽은 이후 한때 스승이었던 성혼을 모욕하는 글을 써서 비난을 받았다. #
1582년 음력 2월 28일 식년시(式年試) 시험을 한성부에서 보고 합격했으며, 진사시 2등에서 15위로 급제했다. #
1589년 음력 5월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에 1위로 장원 급제했다. #
2.2. 관직 생활
1592년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으로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글을 가르쳤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하였으며, 광해군의 분조를 호종했다. 이후 1613년 광해군의 분조를 호종한 공으로 위성공신교서를 받고 위성공신 3등이 되었다. #그 뒤 시강원 필선, 함경도 순무 어사, 군자정, 사간원 헌납, 장령, 사헌부 집의, 홍문관 부교리, 시독관, 홍문관 응교, 홍문관 전한, 시강원 보덕, 경기도 암행어사, 사섬시 부정, 홍문관 부응교, 시강관, 참찬관, 동부승지, 우부승지, 병조 참의, 병조 참지, 좌승지, 상호군, 상이 문학, 장령, 우승지, 도승지, 남원부사, 예조 참판, 황해 감사, 좌윤, 대사간, 부제학, 의금부 당상, 동지사, 동지의금부사, 이조 참판을 지냈다.
1603년에는 경기도로 암행 어사로 파견되어서 전 이천 부사(利川 府使) 신응구(申應榘)가 쌀 70여 석을 백성들에게 거두고 숨긴 것을 조정에 보고했다. #
계축옥사 이후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지지하는 대북 세력과 대립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623년 인조반정 시점에는 거처를 자주 옮겨서 정확히 어디 사는지 모를 정도였다.
2.3. 최후
1623년 7월, 광해군의 복귀를 꾀하려 한다는 무고로 인하여, 양주(楊州) 서산(西山)에서 체포되었으며, 한달 후 8월, 역모죄로 아들 류약(柳瀹)과 함께 참수형을 당했다. 아래는 인조가 왕으로 즉위한 이후 한성부 조정에서 국문을 받을 때 류몽인과 국문을 맡은 정승과의 대화이다.국문을 맡은 정승: “너는 어찌하여 역적모의를 했으며, 또 왜 망명하였느냐?”
류몽인: “광해가 망하게 되리라는 것은 부인이나 어린 아이도 다 아는 일이고, 새 임금의 거룩한 덕은 천한 종들도 아는 일인데 내가 어찌 성군(聖君)을 버리고 못난 임금을 복위시킬 뜻이 있겠소. 또 나는 망명한 것이 아니고, 서산에 갔던 것뿐이오.”
국문을 맡은 정승: “네가 서산에 갔었다는 말은 나도 알아듣겠다.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면 백이(伯夷)ㆍ숙제(叔齊)는 서산에 들어갔겠느냐?”
류몽인: “내가 전에 ‘상부사(孀婦詞)’를 지어서 내 뜻을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죄가 된다면 죽어도 할 말이 없소.”
(아래는 류몽인이 외워 고한 '상부사'이다.)
70세 늙은 과부 / 七十老孀婦
단정히 빈 방을 지키고 있네 / 端居守空壼
옆 사람 시집가라 권하는데 / 傍人勸之嫁
남자 얼굴이 무궁화꽃처럼 잘 생겼다네 / 善男顔如槿
여사의 시를 자주 익혀 외워서 / 慣誦女史詩
임사의 교훈을 조금은 알고 있으니 / 稍知妊姸訓
흰 머리에 젊은 태도 꾸민다면/白首作春容
어찌 연지분이 부끄럽지 않으랴/寧不愧脂粉
ㅡ 《연려실기술》 "류몽인(柳夢寅)의 옥사"에서 묘사된 류몽인의 최후 #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여러 대신들이 류몽인을 살려주자고 주장했지만 여러 훈신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된다고 하여 죽였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는 류몽인을 살리려는 정승과 죽이려는 훈신의 이름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서유방이 지은 류몽인의 시장에 의하면 이원익이 류몽인을 의롭다고 생각하여 살려줄려고 했고 김류가 류몽인의 처형을 주장했다고 한다. #류몽인: “광해가 망하게 되리라는 것은 부인이나 어린 아이도 다 아는 일이고, 새 임금의 거룩한 덕은 천한 종들도 아는 일인데 내가 어찌 성군(聖君)을 버리고 못난 임금을 복위시킬 뜻이 있겠소. 또 나는 망명한 것이 아니고, 서산에 갔던 것뿐이오.”
국문을 맡은 정승: “네가 서산에 갔었다는 말은 나도 알아듣겠다.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면 백이(伯夷)ㆍ숙제(叔齊)는 서산에 들어갔겠느냐?”
류몽인: “내가 전에 ‘상부사(孀婦詞)’를 지어서 내 뜻을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죄가 된다면 죽어도 할 말이 없소.”
(아래는 류몽인이 외워 고한 '상부사'이다.)
70세 늙은 과부 / 七十老孀婦
단정히 빈 방을 지키고 있네 / 端居守空壼
옆 사람 시집가라 권하는데 / 傍人勸之嫁
남자 얼굴이 무궁화꽃처럼 잘 생겼다네 / 善男顔如槿
여사의 시를 자주 익혀 외워서 / 慣誦女史詩
임사의 교훈을 조금은 알고 있으니 / 稍知妊姸訓
흰 머리에 젊은 태도 꾸민다면/白首作春容
어찌 연지분이 부끄럽지 않으랴/寧不愧脂粉
ㅡ 《연려실기술》 "류몽인(柳夢寅)의 옥사"에서 묘사된 류몽인의 최후 #
2.4. 명예회복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란 오직 그 처지에서 목숨을 바칠 뿐 임금의 명암으로써 절의를 달리하지 않는 것이 떳떳한 도(道)입니다. 이번에 류몽인이 벌을 받은 것은 그 죄가 진하(陳賀)의 반열에 참석하지 않고 시를 읊어 올린 데 있는데, 그 시의 인용어가 비록 불륜(不倫)하기는 하나 자신의 결심을 드러낸 것일 뿐 애당초 분의(分義)를 벗어난 말이 없고 보면, 당시에 극형에 처한 것은 대개 인심을 진정시키고 후환을 방지하자는 뜻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ㅡ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40권, 정조 18년 5월 12일 무술 1번째기사. #
사후 정조에 의해 복권되었으며, 이조 참판으로 추증되었으며, 홍양의 운곡사(雲谷祠)와 고산(高山)의 삼현영당(三賢影堂)에 제향되었다. #ㅡ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40권, 정조 18년 5월 12일 무술 1번째기사. #
3. 평가
당색으로는 대북에 속하나, 인조반정 때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가 추진한 인목대비의 폐모론에 거리를 두어,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중북의 대표적인 인물로 분류되었다. 붕당 자체에 회의적이어 서인, 남인, 북인들과 당파를 초월한 사귐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인조 2년 이귀가 인조에게 류몽인이 백이(伯夷)에 관한 설을 주창하자 학식이 있는 사람까지도 따라서 화답하였다고 한다. 광해군에 대한 의로움과 절개를 당대 사람들에게 인정 받은 것이다.4. 허균과의 관계
류몽인은 저서 <어우야담>에서 허균이 어렸을 때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고 말했으며, 허균처럼 자신도 "문장을 무척 좋아해서" 평생토록 허균을 직접 방문한 적이 없는 것을 아쉬워 했다. 어우야담에 의하면 허균은 류몽인의 시를 보고 "앞사람의 모범을 모방하지 않았는데 이는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평가했다. 허균이 류몽인의 독창성을 고평가한 것을 보고 류몽인이 허균을 좋게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직접 방문한 적은 없지만 시를 보여주는 등 서로 교류한 적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불교를 믿었던 것처럼 류몽인도 김시습의 친불교 사상을 수용하면서 불교를 믿게 되었으므로 사상적으로 통했을 것으로 보인다.
5. 작품
저서로는 《어우야담(於于野譚)》과 《어우집(於于集)》[8]이 있으며, 생전 전서, 예서, 해서, 초서 등 다양하게 다작 활동을 했다 한다. #만종재본에 정리된 《어우야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1 인륜편: 효열·충의·덕의(德義)·은둔·혼인·처첩·기상(氣相)·붕우·노비·배우(俳優)·창기(娼妓)
권2 종교편: 선도·승려·서교(西敎)·무격(巫覡)·몽(夢)·영혼·귀신·속기(俗忌)·풍수·천명(天命)
권3 학예편: 문예·식감(識鑑)·의식·교양·음악·사어(射御)·서화·의약·기예·점후(占候)·복서(卜筮)·박혁(博奕)
권4 사회편: 과거·구관(求官)·부귀·치부·내구(耐久)·음덕(陰德)·붕당(朋黨)·무망(誣罔)·고풍(古風)·외임(外任)·용력(勇力)·처사(處事)·구변(口辯)·오기(傲忌)·교학(驕虐)·욕심·재앙·생활고·도적·해학
권5 만물편: 천지·초목·인류·금수·인개(鱗介)·고물(古物) #
류몽인은 국어와 역사시간에 나오는‘어우야담’을 쓴 문인이다. 조선시대에 괴이하여 이성적으로 설명이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인 ‘괴력난신(怪力亂神)’을 기록하는 것은 국가 지배사상이었던 유교에 어긋났다. 그래서 공식적인 기록에는 귀신이나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를 남길 수 없어 몰래 숨기듯 적어 놓은 것들이 많았다.
류몽인 또한 공식 기록인 어우야담에는 괴력난신에 대해 쓸 수 없어 『묵호고(默好稿)』라는 책에 따로이 기록을 남겼다. 류몽인은 1621년 자기 집에 붙은 첩 귀신 ‘애귀(愛鬼)’가 일으킨 화(禍)에 대해 묵호고에 류몽인의 첩 귀신, ‘애귀(愛鬼) 이야기’라는 글에서 무려 32쪽에 걸쳐 상세히 기록했다. 1618년 류몽인의 아내 신씨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폐병을 앓다가 죽었는데 집안사람들이 당시 유명한 무당 복동을 찾아가 물어본 결과 류몽인의 첩 ‘오애개’가 신씨의 침실 밖에 사람의 해골과 저주하는 글귀를 묻어 놓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애개를 심문한 결과 사실임이 드러나 류몽인은 종들을 시켜 애개를 독살하여 죽였다. 이에 애개는 죽은 이튿날부터 귀신이 돼 집으로 들어앉아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종과 가축들까지 죽어 나가게 했다고 한다. 이에 류몽인이 불교에서 죽은 자를 심판한다는 염라대왕(閻魔大王) 등 열 명의 저승 왕(冥府十王)들에게 애귀를 잡아가 달라고 상소를 쓰고 글을 태워 저승으로 보내자 비로소 애귀가 떨어져 나갔다는 내용이다. #
그러나 류몽인은 염라대왕조차 감동시키는 자신의 글재주로 애귀를 물리쳤다고 생각했지만 불과 2년후에 역적으로 몰려 아들 류약(柳瀹)과 함께 목이 잘려죽는 참수형을 당하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역사적 사건이라 더욱 오싹해지는 류몽인과 그의 첩 '애귀'이야기, 정말 애첩의 귀신이 류몽인을 죽인것인지 아니면 귀신도 물리쳤다고 자랑했던 글재주가 그를 죽인것인가?
이에 대한 의문이 있지만, 귀신을 배제하고 현실적으로 보자면, 류몽인은 광해군의 조정 내 지지 세력 북인의 실세 중 한명이었으며, 인조반정 직후 왕이 된 인조와 인조를 옹립한 서인은 광해군의 조정 세력이 다시는 재기할 수 없게 씨를 말릴 의도가 있었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으로 인조의 조정에 의해 숙청당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지나친 북인 숙청으로 인해 인조 재위 내내 북인 잔당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류몽인도 인조 재위 시기 흔히 자주 일어났던 북인 잔당의 반란에 연루되었을 뿐이었다.
6. 기타
- 이순신에게 호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류몽인은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임실현감 이몽상과 무장현감 이충길, 영암군수 김성헌, 낙안군수 신호를 파면해 내치고 순천부사 권준[9]은 "탐관오리의 으뜸"이라고 조정에 보고하면서 담양군수 이경로나 나주목사 이순용, 장성현감 이귀[10], 창평현감 백유항 등에 대해서는 그들의 과오는 덮어놓은 채 상을 요청했다거나, 그리고 수군을 친척 가운데서 뽑는 것과 장정 넷 가운데 둘을 전장에 내보내는 안에 대해서 비난한 적이 있었다. 난중일기 갑오(1594년)일기 2월 16일자에 이 이야기를 언급한다.
이렇게 혹독하게 비판을 해놨다. 이 당시 관점에서 진회는 간신, 악비는 충신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인데 이순신은 류몽인을 진회에 비유한 것이다.
다만 이순신의 비판은 좀 걸러야 할 부분이 있는데, 이순신은 인물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까다로워서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 분명히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인사들도 호되게 비판했다. 물론 이순신 본인에겐 가장 혹독했다.
[1] 경기도 가평군의 류몽인의 묘소에 있는 영정이다.[2]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경기도 가평군에 류몽인, 부인, 그리고 아들 류약의 묘소가 있고 고흥 류씨 후손들이 대대로 관리하고 있으므로 류몽인의 출신 지역으로 보고 있다. #[3]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베어죽였다한다. #[4] 링크 참조 #[5] 링크 참조. #[6] 사후 정조 시기 추증됨[7] 1832년 후손 류금과 류영무가 간행했다.[8] 1832년 후손 류금과 류영무가 간행했다.[9]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순신 장군이 아꼈던 장수이기도 하다. 불멸의 이순신에도 나오는 인물이다.[10] 인조반정의 공신 그 이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