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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산 허균의 특징을 다루는 문서이다.2. 외모
허균 표준영정. (동강 권오창 화백 작, 2014년) |
"허균은 천지간의 한 괴물입니다... 어찌 이 일개의 괴이한 도깨비 같은 놈을 용납하여, 제 멋대로 야유하며 변덕부림을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까. 더구나 허균이 일생 동안 한 행위는 오만 가지 죄악이 구비하였습니다. 풍기를 문란케 하고 행실을 더럽게 하여 다시 사람의 도리라곤 없고, 요망한 일을 일으키고 참언을 만드는 것이 그의 특기인데, 이것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입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0년 4월, 조선 관료의 말. #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0년 4월, 조선 관료의 말. #
"허균은 사람이 아니다. 생김새 또한 좋지 않으니 필시 여우, 뱀, 쥐 등의 정령일 것이다."
신흠, <어우야담>
허균은 생전 허균을 싫어한 사람들에게 "천지간의 한 괴물, 도깨비, 여우, 뱀, 쥐 등의 정령" 등 사람이 아닌 생명체로 불렸다. 허균의 누나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의 이종사촌 신흠은 허균과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음에 도 불구하고 "생김새가 좋지 않다"라고 말하는 등 폄하했다. 정작 허균은 신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저서 <성수시화>에서 "신흠이 청량함은 미치지 못하나 농후함은 낫다"고 평했다. 신흠, <어우야담>
계축옥사 이후 허균이 이이첨 밑에서 일하던 시절 명나라 사신이 조선의 통역들에게 허균의 외모에 대해 말한 것이 있다. 여기서 명나라 사신은 허균을 "뭔가에 묶여 있는 늙은 여우"라고 묘사했으며 이이첨은 "가을바람에 울고 있는 계집"이라고 묘사했다.
“이이첨과 허균은 너희 나라의 귀한 신하인데, 이이첨은 가을바람에 울고 있는 계집의 상이며, 허균은 늙은 여우가 묶이어 있는 상이며, 그 밖의 재상도 모두 좋지 않으며, 여러 관원들 중에는 살기를 띠고 있는 자가 매우 많으니, 너희 나라가 어찌 무사할 수 있겠느냐.”
명나라의 사신, <공사견문> #
명나라의 사신, <공사견문> #
허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은 허균을 다르게 묘사했다.
"허균은 총명하고 재기가 두드러지게 뛰어났다."
유몽인, <어우야담>
유몽인, <어우야담>
"허균의 글은 아름답고도 기이해서 즐겨 읽을 만한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드물게 있는 것이다... 그 맑고도 미묘함을 따르기 어려운 것이다. 그가 나옹(懶翁) 이정(李楨)에게 준 편지에 동산(東山)을 그리는데 그 배치를 설명한 것이 역력히 신묘(神妙)한 경지에 들어갔으니 매우 기이한 필치이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제51권 이목구심서 4(耳目口心書四) #
허균의 외모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것은 아니지만, 위의 유몽인과 이덕무의 글을 보면 외모에서 총명함이나 재주가 뛰어난 것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제51권 이목구심서 4(耳目口心書四) #
허균이 1600년 편지에서 옛 친구 임수정에게 자신의 외모를 직접 묘사한 적이 있다.
"나는 아직 마흔도 채 되지 않았는데 머리가 벌써 이처럼 되었으니, 만약 좀더 지난다면 어떤 모양이 될는지 알 수 없구려..."
허균이 쓴 편지.[출처1]
1600년이면 허균이 31세일 때이다. 즉 젊었을 때부터 새치가 많았거나 탈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쓴 편지.[출처1]
"해마다 병든 이 몸 사행 길에 서 있으니,
세월 따라 제멋대로 구레나룻 텁석하네.
앙상한 뼈뿐인 몸이나마 편히 늙는다면,
눈이 나빠 글 읽기 어려움이 한이 되네."
ㅡ 《을병조천록》 느낌이 있어서 지음[2]
허균이 1615년과 1616년 사이 명나라에 갔을 때 쓴 시이다. 40대 후반부터 글을 자주 읽어서 눈이 나빠지고 제대로 밥을 챙겨먹기 힘들었는지 뼈가 앙상하고, 구레나룻을 많이 길러서 텁석해진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뼈가 앙상해졌다는 부분은 명나라 생활이 안 맞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세월 따라 제멋대로 구레나룻 텁석하네.
앙상한 뼈뿐인 몸이나마 편히 늙는다면,
눈이 나빠 글 읽기 어려움이 한이 되네."
ㅡ 《을병조천록》 느낌이 있어서 지음[2]
허균 관련 다큐멘터리 "KBS 역사스페셜 –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 허균"에서 허균의 친아들 허굉의 직계 후손 허성엽이 출연했는데, 허균의 외모는 허성엽과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46:42 참조. #
즉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새치가 많거나 탈모가 있었으며, 구레나룻이 더부룩하게 나있으며, 글을 자주 읽어서 눈이 좋지 않았으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여우상 얼굴의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성격
3.1. 마이페이스
허균은 허엽 일가의 막내였던터라 귀여움을 받아 방종하게 자랐는데, 이런 성향은 그의 성격의 근간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면 마이페이스 속성 보유자였던 셈인데, 이러한 사실은 생전 본인도 시인했다. 허균은 스스로를 이렇게 묘사했다."저는 일찍이 엄한 훈계를 받지 못하고, 그래서 제멋대로 방탕하게 굴며, 저도 모르게 경박한데 빠지고 말았습니다."
허균이 쓴 편지. #
허균이 쓴 편지. #
허균의 이런 성격을 보여주는 글이 있는데 허균이 작곡한 노래 <성옹송(惺翁頌)>이다.
온 세상이 허겁지겁 다 가는 길을 / 擧世之趨
옹만은 안 따르고 / 翁則不奔
남들은 고생으로 여기는 것을 / 人以爲苦
옹만은 달갑게 여긴다면 / 翁獨欣欣
마음은 편안하고 정신은 깨끗하고 / 心安神精
못나 터지고 고루하지만 / 庸陋之取
정기는 뭉쳐서 단단하다네 / 精聚氣完
어리석고 무식하니 / 愚無識故
형벌 받는다 해도 두려움 없고 / 遭刑不怖
좌천된다 해도 슬퍼도 않네 / 遭貶不悲
헐뜯건 꾸짖건 내버려 두고 / 任毁任詈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만 / 愉愉怡怡
제 스스로 송을 짓지 않으면 / 非自爲頌
뉘 있어 그대를 기릴 것인가 / 孰能頌汝
성옹이 그 누군가 / 惺翁爲誰
허균 단보 바로 그일세 / 許筠端甫
ㅡ 《성소부부고》 제14권 / 문부 11 ○ 송(頌) 성옹송(惺翁頌) #
옹만은 안 따르고 / 翁則不奔
남들은 고생으로 여기는 것을 / 人以爲苦
옹만은 달갑게 여긴다면 / 翁獨欣欣
마음은 편안하고 정신은 깨끗하고 / 心安神精
못나 터지고 고루하지만 / 庸陋之取
정기는 뭉쳐서 단단하다네 / 精聚氣完
어리석고 무식하니 / 愚無識故
형벌 받는다 해도 두려움 없고 / 遭刑不怖
좌천된다 해도 슬퍼도 않네 / 遭貶不悲
헐뜯건 꾸짖건 내버려 두고 / 任毁任詈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만 / 愉愉怡怡
제 스스로 송을 짓지 않으면 / 非自爲頌
뉘 있어 그대를 기릴 것인가 / 孰能頌汝
성옹이 그 누군가 / 惺翁爲誰
허균 단보 바로 그일세 / 許筠端甫
ㅡ 《성소부부고》 제14권 / 문부 11 ○ 송(頌) 성옹송(惺翁頌) #
3.2. 책벌레
허균은 책벌레였다. <한정록>에서 허균은 이렇게 말했다....비루하지만 젊어서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호(嗜好)로 삼아 이상한 책을 많이 모아서 매양 기쁜 마음으로 자제(子弟)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보지 못했던 책을 읽을 때에는 마치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이미 읽은 책을 볼 때에는 마치 옛친구를 만난 것 같다. 나의 천성은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즐거워하나 언행(言行)에 허물이 있을까 저어되니, 이 책들이나 의지해 문을 걸고 늙으리라.”
이에 죽창(竹窓) 아래에서 옛날에 들은 바를 기억해 ‘독서십육관(讀書十六觀)’을 만들었으니, 이는 불교 정토종(淨土宗)의 경전(經典)에 《십육관경(十六觀經)》이 있는 것을 따른 것이다. 《미공비급(眉公祕笈)》 광함(廣函)
ㅡ 《성소부부고》 한정록 제12권 정업(靜業) #
실제로 허균은 1604년 중국에서 구입한 책들을 보관하려고 강릉의 경포호수 옆 허엽 가옥 근처 별장 건물을 "호서장서각"이라 이름 짓고 책 1만권을 보관해서 강릉 향교의 교생과 유림들이 책을 빌리고 읽을 수 있도록 했다. 현재 호서장서각 건물은 현 허난설헌 생가 근처에 터만 있다. 현재 이 호서장서각은 조선시대 최초의 사설 도서관으로 여겨진다. “나는 보지 못했던 책을 읽을 때에는 마치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이미 읽은 책을 볼 때에는 마치 옛친구를 만난 것 같다. 나의 천성은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즐거워하나 언행(言行)에 허물이 있을까 저어되니, 이 책들이나 의지해 문을 걸고 늙으리라.”
이에 죽창(竹窓) 아래에서 옛날에 들은 바를 기억해 ‘독서십육관(讀書十六觀)’을 만들었으니, 이는 불교 정토종(淨土宗)의 경전(經典)에 《십육관경(十六觀經)》이 있는 것을 따른 것이다. 《미공비급(眉公祕笈)》 광함(廣函)
ㅡ 《성소부부고》 한정록 제12권 정업(靜業) #
3.3. 미식가
조선 전국의 다양한 맛있는 음식들을 먹는 것을 좋아했으며, 1611년 조선의 토산품과 변미를 소개한 책 <도문대작>을 간행하기도 했다.우리집은 가난하기는 했지만 선친이 생존해 계실 적에는 사방에서 나는 별미를 예물로 바치는 자가 많아서 나는 어릴 때 온갖 진귀한 음식을 고루 먹을 수 있었다. 커서는 잘사는 집에 장가들어서 산해진미를 다 맛볼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병화를 피해 북쪽으로 갔다가 강릉으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기이한 해산물을 골고루 맛보았고 벼슬길에 나선 뒤로는 남북으로 전전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별미를 모두 먹어볼 수 있었다.
먹는 것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이다. 더구나 먹는 것은 생명에 관계되는 것이다. 선현들이, 먹는 것을 바치는 자를 천하게 여겼지만, 그것은 먹는 것만을 탐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지적한 것이지 어떻게 먹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것이겠는가.
ㅡ 《성소부부고》 도문대작 인(屠門大嚼引) #
저서 도문대작에서 허균은 자신의 미식가적인 기질은 천성이자 본능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허균의 말에 의하면 친부 허엽이 살아 있을 때는 가문이 평소 검소했지만 사방에서 예물을 받아서 진귀한 음식을 먹을 기회가 많았으며, 커서는 부인의 가문이 부유해서 산해진미를 맛볼 기회가 많았다 한다. 임진왜란 때 병화를 피해 북쪽으로 갔다가 강릉으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기이한 해산물을 골고루 맛보았고 벼슬길에 나선 뒤로는 남북으로 전전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별미를 모두 먹어볼 수 있었다.
먹는 것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이다. 더구나 먹는 것은 생명에 관계되는 것이다. 선현들이, 먹는 것을 바치는 자를 천하게 여겼지만, 그것은 먹는 것만을 탐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지적한 것이지 어떻게 먹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것이겠는가.
ㅡ 《성소부부고》 도문대작 인(屠門大嚼引) #
특히 고향 강릉의 음식 방풍죽을 설명할 때 “사기그릇에 담아 따뜻할 때 먹는데 달콤한 향기가 입에 가득해 3일 동안 가시지 않는다. 세속에서는 참으로 상품의 진미”라고 상세하게 설명해서 읽는 사람들에게 당장 먹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
3.4. 그림 애호가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그림을 의뢰하는 것을 좋아했다. 누나 허난설헌이 그림을 잘 그린 것을 보고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허난설헌의 그림은 작품 참조.특히 불화, 산수화, 그리고 인물화에 재능이 있었던 나옹 이정(懶翁 李楨, 1578 ~ 1607)과 친한 관계였다. 나옹 이정에게 동산(東山) 그림을 의뢰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은 허균이 이정에게 동산의 배치를 설명한 글이다.
“큰 비단 한 폭과 노란색 푸른색 등의 각종 물감을 아울러 집의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서경(西京 평양)으로 보내오니, 부디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려 주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는 집을 그린 다음, 온갖 꽃과 긴 대나무 1천 그루를 심고, 그 복판에 남향의 정자를 짓고 그 앞뜰을 넓혀서 석죽(石竹)과 >금선화(金線花)를 심고 괴석(怪石)과 고분(古盆)을 벌여 놓으며, 동편의 안방에는 장막을 걷은 사이로 도서 1천 권을 진열한 것이 보이게 하고, 구리병에는 작미(雀尾)를 꽂고 산 모양을 아로새긴 술그릇을 상 위에 올려놓은 모습을 그리시오.
그리고 서편으로 난 창문을 열어젖히고, 작은아씨는 나물국을 끓이고 손수 단술을 걸러 선로(仙爐)에 붓고, 나는 마루 복판에 깔아놓은 요 위에 기대고 누워서 책을 보고, 그대는 아무개와 같이 좌우에 앉아 담소하는 모습을 그리시오.
우리는 모두들 건을 쓰고 실로 짠 신을 신고 도복 차림에 띠는 두르지 않았소. 거기다 한 줄기 향연(香煙)은 발 밖에서 날아들고, 두 마리 학(鶴)이 돌이끼를 쪼고 있고, 산동(山童)이 비를 들고 낙화(落花)를 쓰는 모습을 그리시오. 실제로 이렇다면 인생의 즐거움은 이에서 더할 수 없는 것이리다.”
ㅡ <청장관전서> 제51권 이목구심서 4(耳目口心書四) #
허균이 묘사한 동산의 그림이 현재까지 전해지는지는 알 수 없다. 허균이 소유한 물건들 대부분은 허균이 역적으로 죽을 때 태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이자 작가인 허균과 동양화가 이정이 같이 합작을 하는 모습이 현대 학자들에게 흥미로웠는지 허균과 이정의 문예창작에 대해 논문이 만들어진 적이 있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는 집을 그린 다음, 온갖 꽃과 긴 대나무 1천 그루를 심고, 그 복판에 남향의 정자를 짓고 그 앞뜰을 넓혀서 석죽(石竹)과 >금선화(金線花)를 심고 괴석(怪石)과 고분(古盆)을 벌여 놓으며, 동편의 안방에는 장막을 걷은 사이로 도서 1천 권을 진열한 것이 보이게 하고, 구리병에는 작미(雀尾)를 꽂고 산 모양을 아로새긴 술그릇을 상 위에 올려놓은 모습을 그리시오.
그리고 서편으로 난 창문을 열어젖히고, 작은아씨는 나물국을 끓이고 손수 단술을 걸러 선로(仙爐)에 붓고, 나는 마루 복판에 깔아놓은 요 위에 기대고 누워서 책을 보고, 그대는 아무개와 같이 좌우에 앉아 담소하는 모습을 그리시오.
우리는 모두들 건을 쓰고 실로 짠 신을 신고 도복 차림에 띠는 두르지 않았소. 거기다 한 줄기 향연(香煙)은 발 밖에서 날아들고, 두 마리 학(鶴)이 돌이끼를 쪼고 있고, 산동(山童)이 비를 들고 낙화(落花)를 쓰는 모습을 그리시오. 실제로 이렇다면 인생의 즐거움은 이에서 더할 수 없는 것이리다.”
ㅡ <청장관전서> 제51권 이목구심서 4(耳目口心書四) #
3.5. 고독한 나그네
사 년에 세 번이나 여길 왔는데
슬프고 즐거움은 일에 따라서
떠나거나 머물거나 모두 나그네
얼굴이랑 귀밑은 하마 옹인걸
변새가 어두우니 물안개 검고
밤이 기니 촛불은 눈물 붉어라
남은 꿈 깨어지니 쓸쓸한 고독
싸늘한 새벽 바람 주렴을 뚫네
ㅡ 《성소부부고》 의주(義州) #
슬프고 즐거움은 일에 따라서
떠나거나 머물거나 모두 나그네
얼굴이랑 귀밑은 하마 옹인걸
변새가 어두우니 물안개 검고
밤이 기니 촛불은 눈물 붉어라
남은 꿈 깨어지니 쓸쓸한 고독
싸늘한 새벽 바람 주렴을 뚫네
ㅡ 《성소부부고》 의주(義州) #
텅 빈 우주 알알이 부서져 가라앉아
외로운 삶의 세월 이미 캄캄 어두워져
섬돌에 서리 엉겨 나막신에 묻어나고,
창가로 달빛이 찬 이불로 스며드네.
잔병덩이 이 사람은 아직도 묻지 못해
시 짓기 어려워서 밤중까지 신음하네.
외로이 앉은 자세 쓸쓸하고 조용하니,
벼슬을 그만 두고 또 놀고픈 마음이네.
ㅡ 《을병조천록》 즉사(卽事)[3]
외로운 삶의 세월 이미 캄캄 어두워져
섬돌에 서리 엉겨 나막신에 묻어나고,
창가로 달빛이 찬 이불로 스며드네.
잔병덩이 이 사람은 아직도 묻지 못해
시 짓기 어려워서 밤중까지 신음하네.
외로이 앉은 자세 쓸쓸하고 조용하니,
벼슬을 그만 두고 또 놀고픈 마음이네.
ㅡ 《을병조천록》 즉사(卽事)[3]
고금(古今)에 문장(文章)으로서 수미(首尾)가 없는 것은 오직 《장자(莊子)》와 《이소경(離騷經)》 두 가지뿐이다. 대개 굴원(屈原)ㆍ장주(莊周)는 모두 슬픔과 즐거움[哀樂]이 남보다 지나친 자들이다. 슬픔은 음적(陰的)인 것을 방조하므로 《이소경》은 고독하고 침잠(沈潛)하여 깊숙이 내려가는 감정이고, 즐거움은 양적(陽的)인 것을 방조하므로 《장자》는 자유분방하고 가볍게 위로 상승하는 감정이다. 슬픔과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웃고 우는 것이 절제가 없고, 웃고 우는 것이 극에 달하면 언어가 절제가 없다. 《미공십부집》
ㅡ 《성소부부고》 한정록 제12권 정업(靜業) #
ㅡ 《성소부부고》 한정록 제12권 정업(靜業) #
허균은 오랜 기간 동안 고독으로 고생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여러 저서에서 자신을 "고독한 나그네"라고 자주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시점 허균이 친한 가족 허엽, 친모 강릉 김씨[4], 형제자매 허성, 허봉, 허난설헌, 강변칠우와 손곡 이달, 사명당 등 허균과 친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강변칠우와 친한 것 때문에 강변칠우가 역모 혐의로 죽은 1613년 이후 연루되지 않기 위해 과거 시험 동기 이이첨과 함께 조정에서 폐모살제의 선봉장이 되었지만, 허균의 외손 이필진의 말에 의하면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에 끼어든 것은 본심이 아니었으므로" 자신과 맞지도 않는 관직 생활을 하느라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615년과 1616년 사이 허균이 쓴 <을병조천록>에서는 허균이 자신의 삶이 "캄캄 어두워진 외로운 삶"이었다고 자책하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여러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