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4-10 01:44:00

마테오 리치

1. 이탈리아선교사
1.1. 초기 생애
1.1.1. 중국 선교1.1.2. 천주실의
2. 이탈리아의 유로비트 제작자

1. 이탈리아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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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eo Ricci

한문명 利瑪竇(이마두)
1552년 10월 6일 ~ 1610년 5월 11일

1.1. 초기 생애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 선교사. 1552년 10월 6일 이탈리아의 마체라타에서 태어났다. 이후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예수회에 입회하여 예수회 신학교에서 천문, 역법, 수학, 과학, 기계 제작 등을 배웠으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못다 이룬 중국 선교의 꿈을 품고 중국으로 떠났다.

1.1.1. 중국 선교

1577년 로마를 출발해 인도를 거쳐 중국 광둥 성 자오칭(肇慶)에 들어온 마테오 리치는 6년간 그곳에 머물며 중국어와 중국의 문화, 유교불교의 경전을 공부했다. 이는 나중에 사대부들과 교류하는데 있어 큰 메리트였는데, 유교 경전에 박식한 외국인은 중국인들이 보기에 호감을 사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보이는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사고가 유연했으며 중국인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1598년에 베이징에 들어갔다가 쫒겨났으나 1601년에 자금성에서 만력제를 접견하였다. 명나라의 만력제는 마테오 리치가 헌상한 자명종 및 다양한 기계에 관심을 보였다. 마테오 리치는 해박한 유교 지식을 바탕으로 사대부들과도 교류하였으며, 이후 중국에 성당을 짓고 선교에 나섰다.

당시 예수회는 황제가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가진 중국에서 효과적으로 선교하려면 먼저 황제를 개종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과학적 지식을 매력으로 삼아 황제에게 접근했다. 만일 황제 및 사대부가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면 자연히 일반 백성들도 따라서 개종하리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마테오 리치는 황제 및 황제를 보필하는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마테오 리치뿐만 아니라 예수회 자체가 신앙인 엘리트 집단을 만드는 걸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한 것도 있는데, 예수회가 포교한 주요 나라마다 예수회가 만든 여러 학교를 창설해서 우수한 학자들을 양성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마침 마테오 리치는 구태소(瞿太素)라는 지체 높은 명문가의 자제와 안면을 텄다. 리치는 그에게 수학, 과학과 같은 서양의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자연스레 교류하였고, 구태소는 마테오 리치의 인품과 학식에 매료되어 다른 사대부들에게도 그를 알렸다. 그렇게 마테오 리치는 예부시랑(차관) 섭향고(葉向高)와도 친분을 쌓는 등 사대부들 사이에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사대부 출신 신자로 서광계(徐光啓)와 이지조(李之藻)가 있는데 이들은 서양의 과학기술서를 번역하고 대포와 같은 서양 무기를 들여오기도 하였다.

한편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 지인/신자들을 통해 중국에서는 역법이 매우 중요하단 사실을 깨닫고, 예수회 본부에 편지를 보내 천문과 역법 및 계산에 정통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파견된 이가 아담 샬이다.

이후 황족인 건안왕(建安王)과도 교류하면서 중국 선교를 위한 저술활동을 벌여 가톨릭의 교리를 요약, 정리한 책인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서양 철학자들의 명언 및 사상을 정리한 <교우론(交友論)> 등의 책을 저술했다.

이후 1610년에 베이징에서 사망했으며 만력제는 선교사 및 사대부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인근에 묘지를 정해 묻어주도록 했다.

서양 학문을 한문으로 능히 번역하고 각종 학문에 능했다는 면에서 엄청난 능력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중국인들에게는 '이자'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이는 마테오 리치가 한자로는 이마두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공자, 맹자처럼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서양 학자다. 이를 통해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어떠한 취급을 받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여담으로 현대 중국은 중국 공산당 때문에 종교탄압이 일어나고 있는지라 마테오 리치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나마 간섭이 덜한 홍콩마카오에는 꾸준한 포교 덕분에 신자들이 좀 되는 편이며, 중국 본토도 지하교회 세력들이 있다고 전해진다.

1.1.2. 천주실의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유교 경전을 인용하면서 선교를 벌였고, 불교를 공박하여 천주교의 우위를 알리는 한편, 유교에 대해서는 관대한 태도를 취해 제사와 같은 유교 행사도 교리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인정하여 예수회가 중국에서 포교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조상제사 문제는 이후 70여년 넘게 이것이 미신적 요소를 분리할 수 없는 조상숭배인지, 용인가능한 수준의 조상에 대한 공경일 뿐인지 신학자들간의 논란이 극심했으며, 결국 조상숭배, 미신적 요소를 분리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교황청의 결정에 의해 18세기 초 부터는 200여년간 동아시아권에서 조상제사를 금지하게 된다. 이 때문에 청나라 시기의 가톨릭 박해와 조선에서의 여러 가톨릭 박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현대에 들어 1939년 이후의 현대 교황청에서는 이제는 과거와 달리 조상제사에서 조상숭배적 가치관이 많이 옅어졌다고 판단하고, 단순한 가문의 전통의 선에서 '천주교에서 인가한 양식'으로 신주같은 유교적 요소를 뺀 조상제사를 치르는 것은 조건부로 허용해주고 있다.

한편, 마테오 리치는 그리스도교의 신을 한자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는 중국어의 어떤 단어도 기독교의 신 개념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마테오 리치는 오랜 고민 끝에 유교 경전에 나오는 천주상제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이 선택은 풍응경(馮應京)이 ‘천주실의(天主實義)’ 서문에 썼듯이 리치가 ‘이중화중(以中化中)’의 태도, 중국을 빌려 중국을 변화시키는 유연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마테오 리치의 사후 40년 동안 중국인 가톨릭 신자 수는 1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마테오 리치의 글은 조선에도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한문으로 번역한 <기하원본>을 저술하여 조선에 전해졌고, 저서 <천주실의> 역시 조선에도 널리 퍼져, 천주교가 자연스레 전해지는 가교가 되었다. 유학자들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성호 이익은 <천주실의>를 읽고 천주교를 불교와 같은 허망한 종교라 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얻을 것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 때문에 이후 이익의 제자들은 천주교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공서파와 종교로 신봉하게 되는 신서파로 나뉘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사람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천과 상제 개념을 천주와 함께 사용했는데, 이에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에서는 말이 되냐고 반발했고 교황청에서는 이들의 말을 받아들여서 천주 이외의 호칭을 금했다.

하지만 그건 100년이 지난 뒤고 당대에는 이러한 선교 방식이 더 효율적이었음에는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조선 신학자들은 마테오 리치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정하상 바오로가 쓴 상재상서에서 당대 조선인들이 상제/천을 천주와 동일시했으며 혼용해 사용하는 것으로 신앙을 설파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현대 한국 가톨릭에서는 '천주'라는 호칭을 쓰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하느님'이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2. 이탈리아의 유로비트 제작자

Matteo Rizzi

유로비트 레이블 델타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곡 스타일은 그의 곡들을 메들리로 만든 리믹스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