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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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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Adams | ウィリアム・アダムス
파일:external/vignette4.wikia.nocookie.net/William_Adams_Portrait.jpg
세례일 1564년 9월 24일[1]
잉글랜드 왕국 켄트 길링엄
사망 1620년 6월 16일 (향년 54~55세)
에도 막부 규슈 나가사키 히라도
국적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종교 성공회
일본명 미우라 안진(三浦按針)
형제 남동생 토머스 애덤스
배우자 메리 힌(1589~1613)
일본인[2](1613~1620)
자녀 2남 2녀
장남 존 애덤스[A]
장녀 딜리버런스 애덤스[A]
차남 조셉 애덤스[B]
차녀 수잔나 애덤스[B]

1. 개요2. 생애
2.1. 항해사가 되기까지2.2. 항해를 시작하다2.3. 일본행2.4. 일본에서의 생활
2.4.1.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만나게 되다2.4.2. 배를 건조하다2.4.3. 가톨릭의 개종 시도2.4.4. 사무라이가 되다2.4.5. 네덜란드와의 외교2.4.6. 잉글랜드와의 외교2.4.7. 잉글랜드 상관을 도와주다2.4.8. 북서항로를 계획하다2.4.9. 이에야스 사후
2.5. 사후
3. 평가4. 대중 매체에서5.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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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항해사로서 최초로 일본에 도달한 잉글랜드인. 에도 막부의 외교 고문. 서양인 사무라이로 알려진 인물로 일본 이름은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다.[7]

2. 생애

2.1. 항해사가 되기까지

잉글랜드 왕국 켄트의 어촌 마을인 길링엄에서 태어나 12살 때부터 런던 근처의 라임하우스에서 자랐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소리나는 대로 철자를 썼으며, 니컬러스 디긴스의 제자로 들어가 항해조선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선박 건조보다 항해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을 이나 바다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하며, 1588년에 견습생 과정을 마치면서 잉글랜드 해군에 입대했다.

아르마다 해전이 일어날 때, 리처드 더필드 호를 지휘하여 잉글랜드 함대에 보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르마다 해전이 끝나고 서너 달 후에 메리 힌과 스테프니 마을의 세인트던스턴 교회에서 결혼했다. 결혼한 이후 런던 바르바리 상인조합에 취직하여 10년간 북아프리카의 해안을 항해하면서 잉글랜드 양모들을 거래하고 다녔으며, 그 와중인 35살 때 로테르담에서 인도 제도의 향로제도에 파견할 대규모 선단을 비밀리에 조직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2.2. 항해를 시작하다

1598년 봄에 티머시 소턴이나 동생인 토머스 등 12명의 모험가와 함께 로테르담으로 가서 그 선단에 지원하여 호프(희망), 헤로프(신념), 리프데(사랑), 트루브(신의), 블라이데 보드스호프(기쁨의 전령사) 등 5척이 마련되자 호프의 항해사로 채용되었으며, 6월 말에 항해를 시작하여 리프데 호로 옮긴 이후에 식량이 부족하게 되면서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프라야 섬의 포르투갈인들과 싸우게 되었다.

프라야 섬을 떠나 서아프리카의 적도 기니 해안에서 아나본 섬으로 향하다가 케이프 로페스에 상륙하여 그 섬에서 원시 부족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떠나 아나본 섬에 도착했으며, 1599년 1월 2일에 출항하여 3월 말에 남아메리카에 도착한다. 그러나 마젤란 해협에서 혹독한 겨울 폭풍에 시달리거나 5월 초에는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9월에는 태평양으로 향하다가 거센 폭풍우로 함대들이 흩어지게 되자 사전에 선장이 계획한 대로 집결 장소인 페루 해안으로 향하기로 한다.[8]

페루 해안으로 향하기 전에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모카와 산타마리아 앞 바다의 군도에 잠시 기항했다가 1599년 11월에 ‘고운 모래가 쌓인 만’에 정박했지만 원주민들과 충돌했다가 교섭을 통해 식량을 얻었다. 그러나 또다시 벌어진 원주민과의 충돌로 동생인 토머스를 잃었으며, 충돌이 벌어지고 있을 때 보트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2.3. 일본행

모카 섬을 떠나 산타마리아 섬에 도착했다가 호프 호를 만났으며, 에스파냐의 해안 경비병 2명이 리프데 호에게 다가와 배의 행선지를 질문하거나 수색한 후에 해안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다른 선원들과 함께 그 2명을 붙잡았다. 그 2명에게 식량을 제공받는다는 조건으로 해안으로 보내주겠다고 하면서 식량을 제공받게 되어 항해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간부 회의에 참석하여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최대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여행을 모색한 끝에 일본으로 향하게 되었다.

1599년 11월 말에 출항을 다시 시작하여 항해 도중에 하와이를 상륙[9]하거나 태평양 항해 도중에 함께 항해하던 호프 호가 침몰되는 것을 보게 되었으며, 항해하기로 한 일본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북서쪽으로 추정되는 곳으로만 항해하여 우나 콜로나 섬에 도착했지만 황폐한 섬이라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1600년 4월 12일에 분고에서 약간 떨어진 곳인 육지를 발견했지만 리프테 호를 발견한 일본인들이 배에 오르면서 그들에게 붙잡혔으며, 리프테 호의 도착을 보고받은 우스키의 성주인 오타 카즈요시가 흥미를 보이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된다.

이후 그가 탄 리프테 호의 항해는 1601년에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세계일주를 완수한 모험가인 올리베르 반 노르트를 통해 로테르담에 알려지게 되었다.

2.4. 일본에서의 생활

2.4.1.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만나게 되다

카즈요시가 소형 배를 제공하면서 육지에 상륙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가톨릭 수도회예수회개신교인 네덜란드 소속의 배를 이교도라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가사키봉행테라자와 히로타카에게 이들을 해적으로 몰아 처형할 것을 추천했다.

히로타카가 애덤스 일행의 목적을 알고 싶어하자 대표로 나서서 이를 설명할 때 예수회 선교사통역을 맡아 내용을 조작했지만 히로타카가 사형을 주저하고 상급 기관에 자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알렸는데, 실권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시에 따라 일행은 오사카로 압송된다.

5월 12일에 이에야스를 만나 자신들의 고향인 잉글랜드가 지구 반대편에 있다는 것과 자신들의 항해 목적에 대해 설명하게 된다. 또한 "장로교성공회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잉글랜드가, 가톨릭을 믿는 에스파냐포르투갈과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까지 이에야스에게 설명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애덤스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10] 그 와중에 예수회가 다시 감옥에 있던 애덤스 일행을 죽이도록 획책했으나, 이에야스가 애덤스를 마음에 꽤 들어했기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 이에야스는 다시 애덤스와 만나, 잉글랜드에 대한 것, 천국에 대한 것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이에야스는 일행을 석방했으나 오사카의 안전한 집에 머물게 하였고 6주 동안 일본을 떠나는 것을 금지시켰다.

6주 동안 연금되었다가 이에야스의 부름을 받았으며,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청하여 생필품을 사서 리프데 호의 화물칸을 채우면서 한 달을 보내다가 배를 에도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와중에 몰래 잉글랜드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위해 뱃짐을 팔아서 이에야스의 수행원들에게 거액의 돈을 뇌물로 줬으며, 수 주일이 걸려서 에도 항구에 도착한다.

2.4.2. 배를 건조하다

이에야스는 그 때 세키가하라 전투로 리프데 호를 신경쓸 틈이 없었기 때문에 애덤스 일행은 충분히 일본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배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결국 선장인 애덤스는 이에야스가 준 돈에서 남은 돈을 배에서의 신분에 따라 나누면서 서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여 일본에서 출항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11]

이후 애덤스는 이에야스에게서 "필리핀 제도나 멕시코까지 항해할 수 있는 서양식 갤리온 상선을 만들라"는 명을 받았는데 조선술의 기초적인 것밖에 모르는 자신의 문제점을 설명하면서 사양했다. 하지만 명을 받들 수 밖에 없었고 어떻게든 기초 지식을 쥐어짜내서 일본 최초의 조선용 도크를 만든 후 거기서 약 80톤급의 배를 건조하였다. 다행히 이에야스는 매우 만족해 했고 원할 경우 궁성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면서 항상 자신의 가까운 곳에 머물라고 하였다. 1607년에 이에야스가 배를 한 척 더 만들라고 명령하자 약 120톤 정도인 좀 더 큰 갤리온을 건조하였다. 이 배는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총독인 로드리고 데 비베로가 에스파냐로 귀환하다가 난파당해 일본으로 표류한 후 이에야스로부터 빌려 사게 되면서 부에나벤투라 호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태평양의 위험한 항로들을 무사히 견뎌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에스파냐가 일본에 감사를 표하고 정식으로 교류를 제안해오자 애덤스는 이에야스의 완전한 신임을 얻게 되었고 정기적으로 초대를 받으면서 이에야스한테 선물이나 연금을 하사받았으며 매일 은화 70닢 정도와 2파운드가 넘는 쌀을 받았다고 한다.

2.4.3. 가톨릭의 개종 시도

예수회에서는 애덤스가 쇼군인 이에야스에게 총애받자 애덤스 일행을 살해하는 것은 위험이 컸기에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1605년에 주앙 후드리그시(João Rodrigues Tçuzu, 1561 ~ 1634)가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설득하자, 애덤스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가 아닌 성공회 신자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오히려 개신교 교리를 설파했다. 또한 선원들과 함께 상선을 타고 잉글랜드로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예수회의 제의도 역시 거절했다.

프란치스코회에서는 후안 데 마드리드 신부가 애덤스 일행을 개종시키기 위해 기적을 보여주겠다면서 에도에서 가까운 우라가 만에서 물 위를 걷는 것을 시도했다가 익사할 뻔 했고, 이를 지켜보던 애덤스 일행이 구출해주었다. 마드리드가 "당신이 믿었다면 기적을 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변명하자 애덤스는 "내가 믿었어도 당신은 그 일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 말했고, 마드리드 신부는 망신살이 뻗쳐 일본을 떠났다고 한다.

결국 예수회프란치스코회는 애덤스를 개종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본의 여러 지역에 퍼진 연락망을 통해 나가사키로 모든 소식을 신속히 전하여 애덤스와 그 일행들의 소재와 움직임을 파악하며 그들이 혹시 개신교를 전파하고 다니는지 감시하였다.

이후 예수회는 1609년에 포르투갈의 상선인 노사 센호라 데 그라사(은총의 성모 마리아) 호의 선장인 앙드레 페소아와 재물을 욕심내 이를 검사하려는 나가사키의 촌장이 대립한 사건으로 몰락하게 되었으며, 이 결과로 한 때 이에야스가 애덤스와 함께 궁정고문으로 두고 있었던 예수회의 신부인 주앙 후드리그시가 일본에서 추방되었다. 결정적으로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1567 ~ 1612)가 자신의 영지 경계를 확장하는 문서를 위조하기 위해 궁성에 있는 기독교도를 믿는 신하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사건이 일어나자 1614년 1월에 이에야스는 마침내 기독교 금지령을 내리게 된다.

애덤스는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가톨릭이 몰락할 거라 생각하여 에스파냐의 신부에게 "에스파냐의 왕은 3년 내에 일본에 한 사람의 신부도 보내지 못할 것"이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2.4.4. 사무라이가 되다

이에야스에게 기하학과 수학 등을 가르치면서 일본 바깥 세상에 대해 조언했다고 하며, 애덤스는 궁중에서의 역할을 통해 영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바라면서 이에야스에게 간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에야스는 애덤스를 달래고 정착시키기 위해서 미우라 반도의 헤미에 있는 저택이 딸린 방대한 교외 영지와 농노를 하사했으며, 250석의 하타모토에 임명되어 사무라이의 신분으로 칼을 허리에 찰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하타모토가 되자 애덤스는 일본식 복장을 착용했으며, 그의 영지와 항해사라는 것을 따서 일본 이름인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으로 불렸다. 이후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2.4.5. 네덜란드와의 외교

히라도 섬에 네덜란드 상선 2척이 상륙했는데, 동인도 회사의 직원인 자크 스펙스라는 상인이 교역 기지인 상관을 설립하는 임무를 띄고 일본으로 왔는데, 애덤스가 스펙스에게 도움을 주어 이에야스를 알현하게 했다. 이에야스가 교역을 희망을 표하면서 네덜란드의 통치자인 마우리스 공작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했지만 네덜란드는 일본에 보낼 여분의 상선이 없었으며, 스펙스는 이에야스가 교역권을 철회할까 염려돼서 다시 이에야스를 만나기를 청하여 1611년 2월에 애덤스가 스펙스에게 알현을 할 수 있도록 하면서 처신하는 법을 알려준다.

스펙스가 이에야스를 알현했을때 몰루카에 대한 것, 보르네오의 교역, 북부 유럽에서 찾아낸 제품, 네덜란드에 있는 것 등을 이에야스에게 얘기하자 이에야스가 좋아했는데, 알현이 끝나자 애덤스가 개인 접견실로 불려가서 이에야스가 네덜란드산 선물을 보면서 네덜란드의 도착과 물건에 대해 묻자 네덜란드에서 오는 상선에 아름다운 물건이 많이 실려있을 것이라 했다.

애덤스가 중재하여 네덜란드인에게 교역권이 주어졌으며, 이 때문에 대규모 에스파냐 사절단이 네덜란드인들과 애덤스를 추방해달라는 요청과 일본의 해안선 측량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에 도착한다. 해안선 측량을 하는 것은 수락했지만 에스파냐에서 파견한 대사인 세바스티안 비치아노가 매우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네덜란드인들을 추방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야스가 자문하자 애덤스는 에스파냐가 세계 정복을 위해 수도자들을 통해 개종시키면서 교두보를 마련한다거나 침략 군대의 상륙 지점을 찾는데만 혈안이 되어있다면서 영국 군주라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얘기했다. 네덜란드와 외교를 하는 과정에서 애덤스는 1611년에 일부러 네덜란드에서 자신이 가족에게 보내는 서신을 전하지 않았으며, 상인들이 애덤스가 전하는 일본 정보와 영국은 거의 10년 동안 동인도제도까지 항해하거나 1603년에 자바에 상주기지를 설립했다는 사실 등 일부러 숨기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이에야스에게 선처를 부탁한 일로 포르투갈의 산안토니오 호를 나포했는데, 이 배는 나가사키로 향했지만 일본 교역 허가증을 갖고 있지 않아서 네덜란드가 그 배를 나포한 것은 합법적이었다. 이에야스가 처리를 고심하여 양 쪽을 궁성에 오도록 했다가 애덤스가 네덜란드인을 대표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에야스는 네덜란드인들이 배, 화물, 선원들을 붙잡아도 된다는 허락을 했다.

2.4.6. 잉글랜드와의 외교

잉글랜드의 존 새리스가 일본에 잉글랜드 상관 설립을 하기 위해 클로브 호로 항해하여 1613년 6월 10일에 히라도 만에 도착하자 히라도 번의 실권자인 마츠우라 시게노부(松浦鎮信, 1549 ~ 1614)를 통해 애덤스에 대해 듣게 되자 새리스가 시게노부에게 애덤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며, 1613년 7월 말에 애덤스는 새리스를 만나게 되었다.

애덤스는 새리스에게 도움을 주어 잉글랜드와 일본이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클로브 호의 선원들에 대한 태도로 현지 주민의 경계심을 산 것 때문에 충고를 했지만 오히려 오해를 샀으며, 1613년 8월에 애덤스는 새리스 선장을 비롯하여 잉글랜드인들과 함께 히라도를 떠나면서 이에야스가 있는 시즈오카까지 안내하면서 궁성 내의 예법 준수에 대해 알려줬다. 새리스가 이를 무시하면서 일본의 조신들 앞에서 무례한 태도를 했지만 외교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2.4.7. 잉글랜드 상관을 도와주다

잉글랜드의 배가 온 것을 계기로 이에야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자 클로브 호에 승선하여 영국에 가려고 했지만 새리스가 히라도에 거주하는 자신의 동업자인 야스에몬을 비난하는 태도와 수중에 가져갈 수 있는 돈이 별로 없는 것 때문에 잉글랜드로 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 대신 새리스가 동인도 회사의 일본 중개상에 대한 제의에는 수락하여 1613년 11월 24일에 2년을 기한으로 하는 동인도 회사의 직원이 되었다.

새리스가 돌아가자 애덤스는 새리스가 상관 운영을 맡긴 리처드 콕스(Richard Cocks, 1566 ~ 1624) 에게 현지 상인을 소개하거나 상관의 창고, 숙소를 지을 수 있도록 했으며, "일본 다이묘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충고하는 등 히라도에 정착할 수 있도록 했지만 애덤스는 이들이 환락가를 찾는 등 방탕한 행동을 하자 이들의 잔치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콕스가 매일 잔치를 벌이는 방탕한 행위를 계속하면서 상관이 파산할 것으로 보이자 "교역에 집중하라"면서 충고했으며, 1614년 봄에 상관 사람들이 각자의 지역을 항해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

1615년 11월에 동인도회사의 계약이 끝났지만 소방목의 조달을 위해 시암을 항해하는 등 애덤스는 잉글랜드 상관을 계속 도와주어 1616년에는 재정 파탄을 모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11월에 애덤스는 시어드벤처호를 이끌어 시암을 항해하려고 출발했지만 뇌우로 배가 손상되자 류큐 제도로 향했지만 선원들끼리 서로 싸움을 벌이면서 오히려 류큐의 반감을 사 손해를 입었다. 잉글랜드 상관의 나가사키 대리인이 나가사키의 포르투갈 당국과 마찰을 일으키자 이들은 잉글랜드인을 돕는 반역 행위와 가톨릭 신앙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콕스가 나가사키 촌장에게 석방을 요구했지만 소용없었으며, 콕스는 애덤스를 통해 쇼군과 논의하라고 간청하자 이에야스에게 이를 설명하면서 석방할 수 있도록 하여 애덤스는 이에야스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잉글랜드 상관의 통역사인 존 고레자노에게 애덤스의 일본인 친구인 야스에몬이 욕을 먹자 야스에몬이 고레자노에게 "히라도를 떠나라"고 한 적이 있는데, 애덤스는 야스에몬을 변호하면서 콕스에게 "고레자노를 고용하면 잉글랜드의 평판에 해를 끼친다"고 했다. 네덜란드인들도 애덤스의 편을 들어주면서 콕스가 네덜란드인들보다 잉글랜드인들과 친하다고 배신을 느끼는 등 오해를 했지만 14개월 이후에는 고레자노에게 책임이 있음을 인정했다.

2.4.8. 북서항로를 계획하다

잉글랜드 상관이 한창 히라도에 정착할 때 이에야스가 맡긴 사업에 몰두했는데, 지리학과 천문학 등 항해 지식에 뛰어나서 예수회의 디에고 카르발로가 위대한 기술자이자 수학자라고 묘사했다. 이에야스가 비공식적인 지도 제작자로 임명하자 지구의를 만들어 이에야스에게 일본 국토와 왕국의 위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으며, 러시아 북부를 가로지르는 북서항로에 대해 설명했다.

이에 이에야스가 항로 개척을 위한 항해를 계획하는 임무를 맡기자 이를 연구했지만 오사카 전투에 대한 처리 때문에 무산되었으며, 1616년 7월 17일에 이에야스가 사망하면서 결국 북서 항로에 대한 항해는 끝내 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가 사망한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소방목의 조달을 위한 시암 항해에서 일본으로 돌아왔다.

2.4.9. 이에야스 사후

새로운 쇼군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축하인사와 동시에 선물을 바치기 위해 콕스, 윌리엄 이튼과 선원들 몇 명과 함께 에도로 향했으며, 9월 1일에 히데타다에게 궁성에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히데타다를 만나기 전에 애덤스는 콕스에게 예법을 지키도록 충고하면서 히데타다를 알현하여 이에야스가 줬던 정크선의 통행권에 대한 특권을 받으려고 했지만 즉시 허락은 받지 못했다.

이에야스와는 달리 히데타다가 개신교와 가톨릭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콕스가 다르다고 설명하면서 "가톨릭인들을 죽이라"고 하자 히데타다가 "기독교인들을 숨겨주는 자는 모두 처형하겠다"는 칙령을 발표했으며, 애덤스는 아내가 기독교인들을 숨겨주는 소문이 돌아서 교역특권을 받지 못했다. 애덤스는 매일 교역특권을 얻기 위해 방문했지만 매일 새로운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특권을 받을 수 없었으며, 그 대신 히데타다에게서 북쪽에 금광과 은광이 풍부한 섬을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 섬을 정복하기 위해 "길 안내를 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애덤스는 동인도회사의 일 때문에 거절하면서도 섬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로 약조한다.

9월에 애덤스는 교역특권을 허가받은 직후에 영지인 헤미를 방문했으며, 히데타다가 히라도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 잉글랜드의 배를 대는 것이 금지되자 콕스, 이든과 함께 에도로 돌아갔다. 콕스가 히데타다를 설득을 시도했지만 히라도에만 거래를 행하라는 것을 바꿀 수 없었으며, 타협으로 부속 상관의 물건을 계약금액보다 낮은 가격에 팔기로 했다. 그렇지만 애덤스는 히데타다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애덤스만은 예외로 다른 지역에서도 거래를 할 수 있으며, 히데타다가 하타모토의 직위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1617년에 애덤스는 1614년 봄에 코친차이나로 향한 템페스트 피콕, 월터 카워턴 등을 찾기 위해 잉글랜드 상관에게 수색대를 제안했으며, 3월에 코친차이나로 항해하여 두 사람 모두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서 히라도로 돌아간다. 영지인 헤미로 돌아갔다가 코친차이나와 통킹으로 항해했다가 열대성 질병에 걸렸으며,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전쟁으로 관계가 악화되면서 네덜란드의 배가 반탐에서 잉글랜드의 배를 침몰하는 일이 일어나자 스펙스에게 고용되어 히데타다와 네덜란드의 관계 개선을 위해 네덜란드 사절단과 함께 궁정에 알현했다.

또한 잉글랜드 상관에서 궁정에 탄원서를 제출하려고 하자 콕스를 궁정에 알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동행하면서 이 와중에 이에야스의 무덤에 들어가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하지만 히데타다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와의 무역 분쟁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알현하지 못했다. 애덤스는 질병으로 몸이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1616년 8월에 네덜란드의 배인 앙헬호가 영국인 포로들을 이끌면서 히라도에 입항하자 2번에 걸쳐 앙헬호에 잠입하여 처음에는 잉글랜드인 윌리엄 고든, 마이클 페인, 2번째는 웨일스인 휴 윌리엄스를 구출하였으며, 네덜란드의 배에서 포로를 돌려달라고 항의하면서 히라도에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충돌하게 되었다.

1620년 5월 16일에 자신이 사망할 것을 직감하면서 콕스와 이튼을 불러 영지의 주요 부분을 둘로 나누어 반은 잉글랜드의 가족에게, 나머지 반은 일본에서 낳은 자녀들에게 주기로 하고 일본의 친구들과 잉글랜드인들에게도 선물을 남겼다.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를 상대로 외교하면서 네덜란드인처럼 행동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유언으로 네덜란드인 친구들에게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2.5. 사후

그가 사망한 이후 4년 동안 교전하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포르투갈, 에스파냐의 함대를 만날 경우 그들을 공격하는 동맹을 맺게 되자 잉글랜드 상관은 네덜란드 상관과 화해가 되었지만 콕스 일행들이 히라도에서 싸움질과 주색잡기 행동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자바에 잭스 일행의 행동에 대한 것이 전해지면서 방위협의회의 잉글랜드 대표인 리처드 퍼슬랜드가 동인도회사의 이미지 쇄신을 위한 행동을 하면서 잉글랜드 상관의 콕스 일행들을 자바에서 소환하라고 명령했다.

콕스 일행들이 이를 불복했다가 퍼슬랜드가 황소 호를 통해 조지프 코크람을 보내서 잉글랜드 상관을 폐쇄시켰으며, 1623년 12월 22일에 콕스 일행은 일본에서 떠났지만 무사히 잉글랜드로 돌아간 사람은 윌리엄 이튼뿐이었다. 애덤스의 아들인 조지프 애덤스는 쇼군인 히데타다가 궁성으로 불러 아버지인 애덤스가 받은 영지와 특권을 모두 이어받았으며, 콕스 일행들이 떠난 직후에는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쇼군이 되어 쇄국 정책을 실시, 네덜란드인을 제외한 서양인들을 모두 일본에서 쫓아냈다.

애덤스(미우라 안진)의 묘는 현재에도 남아 있어 일본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 위치해 있는 츠카야마 공원에 가면 그의 부부묘를 찾아볼 수 있다. 이 곳에서 가장 가까운 철도역은 케이큐 전철안진즈카역(安針塚駅)[12]이며, 역에서 약 1km정도 떨어져 있다. 애덤스의 에도 저택이 있던 곳은 그의 이름을 따 안진쵸(安針町)라는 거리 이름으로 남아 있었으나, 1932년 제도부흥계획(帝都復興計画)에 따라 다른 구역으로 편입되어 소멸되었다.[13]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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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시 안진 기념 공원에 있는 윌리엄 애덤스 동상[14]

우연히 일본에 흘러들어와 쇼군의 측근과 영주까지 되는 입지전적인 활약을 보인 인물로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평가가 높은 인물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비슷한 인물로 박연을 들 수 있다. 물론 박연은 임금의 최측근인 조정의 관료가 되지는 못했지만 훈련도감에서 화승총의 개량과 화포제작에 힘을 쏟았고 청나라에서 귀화한 청군들을 묶은 외인부대의 지휘관을 맡기도 하였다.[15] 나중에 비슷하게 표류해 조선에 들어온 헨드릭 하멜 일행에게 도움을 줬다는 점에서 애덤스와 비슷한 인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둘 다 탈출을 하려다 실패한 뒤 체념하고 현지 여자와 결혼한 점도 비슷하다.

다만 일본이 애덤스를 외국과의 외교와 교류에 중심적인 인물로 써먹을 수 있었던데 비해 조선은 외교적으로 박연을 활용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후대에서는 아쉬워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본의 입장에선 일본에 체류한 외국인들의 조상격인 인물로 기록될 수 있겠다.

4. 대중 매체에서

그의 일대기는 국내에서도 "사무라이 윌리엄"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다.

제임스 클라벨의 소설 "쇼군"의 모티브이다. 서양인의 관점에서 본 일본 문화가 흥미롭기도 해서 미니시리즈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고증오류와 오리엔탈리즘풍의 인종차별에 저자가 중증의 옐로우 피버 환자이지만 재미있기는 한지 당시 베스트 셀러였다고 한다. 2024년, 디즈니 플러스이 소설을 기반으로 드라마를 제작해 발매했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서는 죽을 때 360년뒤까지 니혼바시에 있는 집을 팔지 말라고 한다.

만화 천하제일에서 모리 테루모토의 후원을 받아 검술시합에 출전한다. 더크댄스[16]라는 검술을 사용한다. 첫 등장 때 폭우가 내리는 한밤에 모리가의 임시 저택 지붕에 발가벗고 한손으로 물구나무 서는 기행을 선보였다. 그리고 일본 여자를 보고는 이 나라가 마음에 든다며 천만의 자손의 씨를 뿌리겠다고 선언한다. 본래 잉글랜드 켄트 주 출신으로 결투시합의 대가였던 어머니로부터 더크를 물려 받았다. 이후 그가 탄 배가 일본에 표류하였고, 자신을 잡으러 온 모리가 병사 수십명을 살해하다가 모리 테루모토에게 스카웃 되었다. 검술시합의 상대는 야규 무네노리로 시합 장소인 오다 노부나가의 거대한 배 천뢰선에서 싸운다. 초반에는 춤추는 듯한 모습으로 무네노리를 현혹하고[17] 이후 바인딩을 기본으로 한 더크댄스로 무네노리에 상처를 입힌다. 하지만 결국 무네노리에게 상대가 되지 못하고 끔찍하게 난도질 당해 죽는다.

4.1.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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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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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전국입지전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미우라 안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
혁신에서는 W. 애덤스로 등장했다가 이벤트를 통해 미우라 안진으로 개명하고 무장으로 등장함.

태합입지전 5 dx에서도 등장. 야스케와 마찬가지로 이벤트를 통해 등장한다.[18] 서양인이기 때문에 동양인일 것을 요구하는 일부 엔딩을 볼 수 없다. 무력과 매력이 좀 높고 나머지는 50대이지만 기능은 능력치를 못 살려 딱 상인에 적합하게(산술, 수군4레벨에 변설 3레벨) 되어 있다.

4.2. 인왕

코에이 테크모가 제작한 게임 인왕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센코쿠 시대의 혼란이 가속화되며 유계의 요괴 등의 마물들이 현세에 강림하게 되어 생지옥이 된 일본 규슈 지방에 도착하자마자 불한당들과 요괴들을 쳐부수고 인신매매선에서 죽은 원령들의 집합체인 원령귀마저 토벌하는 엄청난 활약을 벌이고, 그의 활약을 본 핫토리 한조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데려가며 본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왕 2에서도 1편 종료 이후 시점을 배경으로 하는 최후반부 메인 퀘스트에서 등장.

더 위쳐 시리즈의 주인공인 리비아의 게롤트와 매우 닮은 꼴이고 둘 다 하는 것이 괴물 죽이는 일이라 서양 팬덤에서는 게롤트 동생으로 취급하고 있다. 덤으로 원조 와패니즈란 드립도 종종 보인다.

무쌍 스타즈에서 마지막 캐릭터로 공개되었다. 영상으로 볼 때 무기는 태도, 수호령은 원래 수호령인 시얼샤를 쓰는듯 하다. 2:1 상황만 되어도 전투가 힘들어지는 원작과 달리 무쌍 시리즈답게 공격 한 번에 수십 명씩 한 번에 날려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모션 중 가장 압권은 원작에서 못하던 점프를[19] 한다는 것. 이에 팬들은 "점프를 할 줄 알면서 그동안 왜 안 했냐"는 원망을 토하는 중. 다른 캐릭터들과 마찬가지로 보이스가 포함되어 있다. 다만 영어로 말한다는 걸 감안해서 대사는 괄호 안에 든 것으로 표시된다. 담당 성우는 벤 필(BEN PEEL)

4.3. 대항해시대 시리즈

나가사키의 도시 NPC 및 벵갈만의 잉글랜드 국적 해상 NPC로 등장한다. 애덤스가 타고 온 리프데 호는 게임에선 동아시아행 길드 정기선인 리푸테 호로 구현되었다.
레드젬 5000개로 해금할 수 있는 제독 중 한 명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산 부에나벤투라 호가 19티어 선박으로 등장하며, 연대기 진행 중 한 척을 받을 수 있다. 배의 성능은 나쁘지 않지만, 대형 조운선의 존재 탓에 19티어 중에는 다소 애매하다고 평가받는다.

5. 같이보기




[1] 길링엄의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날로 출생일은 미상이다.[2] 일본인 아내가 도카이도에서 짐말을 교체하는 업무인 도로 관리 책임을 맡았던 마고메 카게유(馬込勘解由)의 딸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1888년 『요코스카 신보(横須賀新報)』와 1892년 스가누마 사다카제의 『일본 상업사(日本商業史)』에서 처음 등장하며, 일본인 아내의 이름이 오유키(雪)라는 이야기는 1973년 이시이 치로의 소설 『바다의 사무라이(海のサムライ)』 의 영어 본역본 『푸른 눈의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青い目のサムライ三浦按針)』를 통해 잘못 퍼진 것으로 사료상 일본인 아내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A] 메리 힌과의 자녀.[A] [B] 일본인 아내와의 자녀.[B] [7] 안진은 도선사라는 뜻이다.[8] 그러나 페루 해안으로 집결하기 전에 5척 중에서 블라이데 보드스호프 호는 표류하다가 에스파냐의 선박에게 나포되었으며, 헤로프 호는 항해를 포기하기로 결정하여 로테르담으로 떠났다. 트루브 호는 서인도제도로 향하여 향로제도에 도착하자마자 포르투갈인들의 공격을 받아 나포되었다.[9] 리프테 호가 자신들이 상륙한 섬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으며, 1822년에 윌리엄 엘리스가 하와이를 발견한 쿡 선장보다 오래 전에 보트를 탄 선원들이 동쪽 해안으로부터 온 적이 있었다는 얘기를 통해 추정된 것이다.[10] 이때 일본의 감옥이 워낙 열악했던터라 애덤스는 "일본 감옥에 갇혔던 일이 악몽이었다"고 회고록에 서술할 정도다.[11] 애덤스와 함께 항해한 사람들 중에서 얀 요스텐 판 로덴스타인(Jan Joosten van Lodensteyn, 1556 ~ 1623), 멜키오르 판 산트보르트(Melchior van Santvoort ,1570 – 1641) 두 사람만이 일본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애덤스만큼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12] 역명 자체가 '안진의 묘'라는 뜻이다.[13] 현재의 니혼바시무로마치 1정목(日本橋室町一丁目), 니혼바시혼마치(日本橋本町一丁目) 1정목에 해당한다.#[14] 일본 최초의 서양식 범선을 건조한 것을 기념한 공원이다.[15]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박연은 동인도회사 사략선의 부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해적이었기 때문에 무기 다루는 것에 익숙했던 것이다.[16] 다크가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전통검인 더크.[17] 실제로는 파도로 인한 배의 흔들림을 재는 것이었다.[18] 단, 야스케는 혼노지의 변 이벤트 이전에 이벤트 발생으로 오다가에 들어오기 때문인지 1584년, 1598년 시나리오에서 직접 플레이가 가능하나, 미우라 안진은 역사상 태평의 장 이후인 1601년에 도쿠가와 가문으로 들어오기때문에 사실 시나리오에선 직접 플레이가 불가능하고, 가상시나리오인 몽환의 장에서만 플레이할 수 있다.[19] 그것도 2중 점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