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22:55:39

김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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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충익공(忠翼公)
김좌근
金左根
출생 1797년(정조 21)
사망 1869년(고종 6)
재임기간 제233대 영의정
1853년 4월 3일 ~ 1859년 2월 14일
(음력 철종 4년 2월 25일 ~ 철종 10년 1월 12일)
제235대 영의정
1861년 12월 2일 ~ 1862년 5월 17일
(음력 철종 12년 11월 1일 ~ 철종 13년 4월 19일)
제237대 영의정
1863년 10월 20일 ~ 1864년 5월 23일
(음력 철종 14년 9월 8일 ~ 고종 1년 4월 18일)
시호 충익(忠翼)
본관 신 안동 김씨[1]
경은(景隱)
하옥(荷屋)
부모 부친 -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
모친 -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 청송 심씨(1766 ~ 1828)
부인 정실 - 해평 윤씨 윤치승(尹致升)의 딸
첩실 - 나주부인(羅州夫人) 양씨(梁氏)
자녀 (양자) - 김병기(金炳冀, 1818 ~ 1875)[2]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
4.1. 드라마4.2. 영화4.3. 웹툰4.4.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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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권신이자 세도정치의 마지막 집권자로 안동 김씨가 주도하는 세도정치의 중추였던 김조순의 3남이며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의 동생이다.

신 안동 김씨의 수장으로서 헌종, 철종 시기 세도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다. 아호는 하옥(荷屋). 그래서 이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하옥 대감(荷屋大監)'이라고 하면 이 사람을 일컫는다.

2. 생애

1825년 순조가 김조순의 회갑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6품직에 제수했는데 자기 실력이 아니라 아버지 빽으로 벼슬을 받은 것을 본인도 부끄럽게 여겼는지 순조 시대에는 이렇다 할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3] 과거도 뒤늦게 급제했는데 이 때가 헌종 4년인 1838년으로 그의 나이 42세였다.[4] 하지만 그 뒤부터 폭풍 승진을 했다. 벼슬길을 시작한지 4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부교리, 규장각 직각, 이조참의, 이조참판 등을 거친 끝에 오늘날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공조판서와 이조판서까지 오르게 된다.

이 무렵은 김좌근의 누나인 순원왕후가 어린 헌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시기였는데 순원왕후는 오빠인 김유근이나 6촌 김홍근 등을 대표로 하는 친정 형제들의 자문에 의지하여 수렴청정을 펼쳤고 김좌근 역시 순원왕후의 자문역을 맡아서 중용된 것이다. 그러다가 형 김유근은 헌종 재위 중에 중풍에 걸려 2년 후 죽을 때까지 자리를 보전하게 되었고 김유근 대신 6촌형인 김홍근이 뒤를 이어 실세로 자리잡나 싶더니 김유근이 1840년에 죽고 김홍근도 2년 뒤인 1842년에 죽게 되면서 그 뒤를 이어 (신) 안동 김씨 세력의 리더가 되었다. 젊은 시절이야 어쨌든 꽤 운이 좋은 남자.[5] 아버지 김조순이 전면에서는 겸손하게 처신했으면서도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정국을 움직였다면 형 김유근도 그랬지만 김좌근 역시 전면에 나서서 정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반대파들을 숙청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그러다가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고 헌종이 장성하면서 외척들인 (신)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세력이 아닌 사람들을 5군영 대장에서 배제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요직의 인사에도 (신)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세력을 배제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김흥근을 탄핵하는 신하에게 힘을 실어주며 (신) 안동 김씨에게 쫓겨난 이들을 재등용하는 등 (신) 안동 김씨를 제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위기를 맞는 듯 했으나 헌종이 일찍 죽는 바람에 위기를 넘겼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순원왕후가 다시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김좌근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철종의 왕비철인왕후도 (신) 안동 김씨에서 나오게 되면서[6] 김좌근은 가문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철저히 숙청하고 영의정을 3회나 역임하여 권력을 독식했다. 이어서 조정의 요직까지 (신) 안동 김씨 일문들이 거의 독식하게 되면서 조선의 정치판은 완전히 막장이 되고 만다. 이 때가 그의 전성기로 김좌근의 집은 눈도장을 찍으려고 벼슬 청탁을 꾀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매관매직까지 공공연히 행해지고는 했다. 그의 세도기에는 국가 경제와 민생이 파탄나 삼정의 문란으로 각지에서 민란이 많이 일어났고 조선은 국가 막장 테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김좌근은 민생에는 그리 관심이 없고 권력의 유지에만 집착했으며 삼정의 문란을 개정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인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총재관이 되기도 했으나 사실 삼정의 문란 최대 수혜자가 바로 자신의 가문[7]이었던만큼 김좌근이나 그 세력이 이를 개혁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야사에 의하면 김좌근에게는 나주 출신의 기생 첩인 양씨가 있었다. 김좌근이 이 을 총애했던 나머지 당시 벼슬을 원한 사람들은 김좌근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양씨에게 청탁하기도 했고 양씨의 마음에 들면 그녀가 김좌근에게 잘 말해줘서 벼슬을 할 확률이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별명은 '나주 출신 정승'이라는 의미의 '나합(羅閤)'이었다. 당시 세도가나 정승들을 부를 때 그 사람의 성이나 사는 곳에 ~합(閤)이라는 호칭[8]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9] 나합은 배짱도 대단했는지 김좌근이 나합에게 "세상 사람들이 왜 그대를 나합이라 부르는지 아는가?"라고 묻자 나합은 "나주 조개(蛤, 조개 합)라는 뜻이지요"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무슨 의미인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야사 중에는 훗날 권력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이 괘씸죄로 양씨에게 "감히 기생 출신인 주제에 정승이나 쓰는 나합 호칭을 사용해?"라고 꾸짖자 저 대답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70세가 다 되어서 다음 세대인 김병학, 김병국, 김병기[10] 등이 새로운 권력의 핵심으로 슬슬 떠오르는 상황에서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그와 안동 김씨의 절대 권력은 뺏었지만 명예는 빼앗지 않았는데 심지어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인 안석과 궤장을 하사받기도 했다. 말년에 명예직만 맡으면서 권세는 많이 꺾이기는 했지만 조정 원로로 대접은 다 받은 셈. 신정왕후 조씨의 명으로 고종을 모시러 온 신하이기도 했으니 권력에서는 물리더라도 명예는 챙겨줬어야 할 것이다. 김좌근은 영의정에서 물러난 후에도 <철종실록>의 총재관을 맡았고 말년에는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영삼군부사, 영돈녕부사를 맡았으며 영돈녕부사인 상태에서 죽었다. 뒷세대인 김병학, 김병기, 김병국도 조정의 요직을 맡아 흥선대원군의 개혁을 뒷받침했고 흥선대원군 역시 김좌근을 나쁘지 않게 대접했으며 김좌근이 죽자 그 묘비명을 직접 써 주기도 했다. 결국 전체적으로 평가하면 나라를 제대로 망치고 누릴 것은 다 누리고 간 간신. 정말 평생에 걸쳐 운이 좋은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행장이나 묘비명 등에는 "공명정대했다", "도량이 넓었다" 등의 찬평을 받고 있고 <고종실록>의 김좌근 졸기에서 고종은 교지[11]에서 '바른 몸가짐과 공평한 지조를 갖추었다'고 평했는데 이런거야 원래 립서비스로 해 주는 표현이고 실제로는 김좌근의 행위가 조선에 결과적으로 악영향만 끼쳤다. 특히 이런 립서비스들과는 달리 정작 누나인 순원왕후는 김좌근에 대해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흠이 있다"고 꼬집은 바 있다. 자기 누나에게도 "남 말 안듣는다"고 까인 사람을 공명정대했다고 찬평해 준 것을 보면 위화감이 심하다. 립서비스를 해 준 사람 중 1명이 바로 흥선대원군이라는게 아이러니다.

그의 묘는 경기도 이천에 있었으며 김좌근의 묘에도 사연이 있는데 이천에 김좌근 고택이라는 유적이 있다. 이 고택 뒷산이 바로 (신) 안동 김씨 일문의 선산으로 양자인 김병기도 죽은 뒤 김좌근의 묘 근처에 묻혔었다. 그런데 그 묘가 쥐도 새도 모르게 이장이 되었는지 원래 묘가 있던 자리에는 묘가 없어지고 묘에 세워져 있던 묘비나 석물만이 김좌근 고택 마당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 후 2009년에 김좌근 고택과 그 주변 들을 (신) 안동 김씨 문중서울대학교에 기증했고 서울대학교에 의해 (신) 안동 김씨 일문의 묘역 복원을 마쳐서 김좌근 묘는 김좌근 고택 뒷산에 있다. 그래서 오늘날 김좌근 고택은 서울대학교가 관리하고 있고 김좌근 묘역에서 발견된 석물들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주변에 세워져 있다.

3. 여담

  • 야사사극 등에서는 주로 상갓집 개 시절[12]의 대원군에게 굴욕을 주다가 대원군이 집권하자 데꿀멍하고 복수를 당하는 인물로 나온다.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김좌근이 교자를 타고 가다가 흥선군이 술값을 달라고 구걸을 하자 엽전을 땅바닥에 던져주고 제 갈 길을 갔다는 일화가 있다. 이 때 흥선군 뿐만 아니라 김좌근 주변에 있던 종자들까지 그 엽전을 주우려고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 흥선군이 김좌근을 찾아갔을 때 이러한 일화가 있다. 김좌근이 애첩인 나합 양씨와 함께 있었는데, 본래 그녀가 기생인지라 당시 양반들이 아무리 청탁을 하더라도 나합에게는 절을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흥선군은 스스럼없이 나합에게 큰절을 하며 "형수님"이라고 부르며 존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합도 흥선군을 좋게 보았고 김좌근도 조카인 김병국, 김문근에게 흥선군을 후히 대하도록 했고 이들도 시키는대로 했는데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만이 흥선군을 경솔한 사람으로 보고 흥선군을 예의를 갖추어 대우하지 않았다고 한다.
  • 나합 양씨의 경우 극도의 사치스러운 행적을 묘사한 야사들이 몇 개 존재한다. 강의 물고기들에게 적선을 한다며 쌀밥을 몇 가마니나 해서 강에 뿌린다거나 하는 식이다.[13] 그런데 특이하게도 고향으로 전해진 나주에서는 평가가 썩 나쁘지는 않다. 야사에 따르면 나주에 기근이 들자 양씨가 김좌근에게 요청해서 구휼미를 풀어 나주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 그 때문인지 나주에는 유일하게 김좌근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는 사실 먼 친척 김영근의 아들로 김좌근이 후사를 잇기 위해 김병기를 양자로 두었다.
  •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는 184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48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고 1849년 철종 즉위 후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853년 총융사, 훈련대장, 이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62년(철종 13)에는 판돈령부사가 되었다. 그 뒤 의정부좌찬성으로 있을 때 1863년 12월 철종이 사망하자 대왕대비 조씨와 후계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갈등하였으며, 흥선대원군 집권 후에는 광주부유수로 좌천되었다.

4. 대중매체

4.1. 드라마

세도정치의 중심 인물 중 1명이고, 흥선대원군 초반까지 살았던 인물이기에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빠짐없이 나왔다. 차이가 있다면, 2000년대 초반까지는 실존 인물로서 고증에 맞춘 반면, 이후로는 모티브를 따왔을 뿐 고증과는 확연하게 다르게 그려졌다.
파일:풍운 김좌근.png 파일:김좌근.jpg 파일:명성황후 김좌근.jpg 파일:닥터진 김병희.jpg
《풍운》 《대원군》 《명성황후》 《닥터 진》
파일:김좌영.jpg 파일:바람과 구름과 비 김좌근.png 파일:12382070296(0).jpg
《조선 총잡이》 《바람과 구름과 비》 《철인왕후》
  • 1975년 TBC 드라마 '임금님의 첫사랑'에서는 배우 이순재()했다.
  • 1982년 KBS 드라마 《풍운》에서는 배우 장민호[14]가 연기했다. 흥선대원군(: 이순재)[15]을 견제하면서도 때로는 은근슬쩍 도와주는 능수능란하게 완급 조절을 잘하는 노회한 정치가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16]에서는 배우 정욱이 연기했다. 정사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오는데 정치적 식견이 뛰어나 흥선대원군(: 임동진)이 파락호로 지낼 때 미치광이 또는 상갓집 개라며 다른 안동 김씨들이 방심할 때도 유일하게 믿지 않았으며 고종 즉위 이후에는 흥선대원군에 대항하자는 주변 인물들의 말에 숨죽이고 조용히 있으라고 한다. 백성들이 힘들어하니 경복궁 중건을 반대한다면서 흥선대원군에게 자신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한다. 세상을 떠날 때 유언도 남기고 집에서 누워 조용히 숨을 거둔다.
  • 2001년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배우 송재호가 연기했다. 흥선대원군(: 유동근)이 집권한 뒤라 노쇠한 대신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집권 전 흥선대원군에게 엽전을 땅바닥에 던져주는 일화도 재연하고 있으나 흥선대원군 집권 후에는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하인들에게 자신의 하인이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집에서 술자리를 같이 하다가 별안간 흥선대원군이 음식을 뱉으며 "님들 나 독살하려 함?"이라고 묻자 아들인 김병기(: 정성모)가 흥선대원군이 뱉은 음식을 게걸스럽게 주워먹는 일화도 나온다. 전체적으로 흥선대원군에게 몸을 숙이면서 약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가문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노회한 정치인으로 그려진다.
  • 2012년 MBC 드라마 《닥터 진》에서는 배우 김응수()했다. 김병희 캐릭터는 철종 말 안동 김씨 세력의 수장이라는 점에서 김좌근을 모티브로 한 듯하지만 작중의 김병희는 김좌근보다 더 포스가 강력하다. 흥선대원군(: 이범수)이 집권하자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과 달리 여기서는 흥선대원군 집권 후에도 매우 건재했었다. 물론 김좌근은 흥선대원군 집권 후에도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지만 김병희는 흥선대원군과 대립 끝에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이 큰 차이.
  • 2014년 KBS 드라마 《조선 총잡이》에서는 배우 최종원이 연기했다. 김좌영 캐릭터 역시 김좌근을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김좌영과 김좌근은 안동 김씨의 거두로서 세도 정치의 중심축을 담당했다. 그러나 김좌근과 큰 차이가 있다면 김좌영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점이다.
  • 2020년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는 배우 차광수가 연기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백성을 아끼는 마음도 없지만 사람보는 눈만큼은 날카롭고 정치적 수완이 대단해 새로운 왕이 집권한 뒤에도 별 탈 없이 공존한다. 남자 주인공 천중(: 박시후)의 집안을 몰락시키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신묘한 능력을 지닌 봉련(: 고성희)을 인질로 삼는다.
  • 2020년 tvN 드라마 《철인왕후》에서는 배우 김태우가 연기했다. 본래 실제 김좌근을 연기한 것이었으나 풍양 조씨 문중의 항의로 이름만 딴 가상의 인물로 바뀌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4.2. 영화

파일:고산자김좌근.jpg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김좌근
* 2016년 개봉한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는 배우 남경읍이 연기했다.
파일:명당김좌근.jpg
《명당》의 김좌근
* 2018년 개봉한 영화 《명당》에서는 배우 백윤식이 연기했다. 순조 때부터 조선을 좌지우지한 피도 눈물도 없는 권신으로 나오며 왕릉 위에 자신의 조상들을 매장하는 역적질이 드러났음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신을 잡으러 온 에게 아랫것을 대하듯이 반말로 협박하는 등 실제 역사를 훨씬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세도를 자랑한다. 고종 때까지 천수를 누렸다가 세상을 떠난 실제 역사와 달리 왕이 되려는 욕심에 빠진 아들 김병기에게 교살당하는 등 실제 역사와 여러모로 큰 차이를 보인다.

4.3. 웹툰

  • 네이버 웹툰 《한섬세대》에서는 흥선군에게 경종을 울린다며 명복을 죽일 것을 지시하는 노인이 잠깐 나오는데 얼굴이 완전히 나오지는 않는다. 작중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지만 명복이가 납치되기 전에 "하옥 대감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난다"는 식의 대사를 흥선군에게 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정황상 이 노인이 김좌근일 가능성이 높다.

4.4. 소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주인공인 귀남이 철종의 양자 자격으로 차기 왕위를 확보하는 바람에 현실보다 일찍 실권을 잃는다. 그나마 흥선대원군의 근왕파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는 박규수의 배려로 인해 패가망신은 면했지만 이 충격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뜬다. 사망한 이후에도 명문가에 대한 공격에 시범타로 휘말려서 명예가 잔뜩 깎였으며 안동 김문 내에서도 그 사람은 비판받아도 싸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1] 서윤공파(庶尹公派)-문정공파(文正公派)[2] 8촌 김영근(金泳根)의 아들[3] 원래 조선의 관료 사회에서는 공신 혜택이나 음서제를 통해 관직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식으로 과거를 통해 들어온 관리들로부터 업신여김이나 따돌림을 당하고는 했다. 초년기의 한명회가 대표적인 예. 안동 김씨가 당대 최강의 권력자 집안이었지만 적어도 김조순이 살아있을 때는 나름대로 능력 위주로 집안을 관리했다.[4] 1817년생인 외조카(누이의 아들) 남병철(南秉哲)보다 1년 늦게 급제했다고 하면 체감이 확 느껴질 것이다.[5] 김좌근보다 앞서 정식으로 과거를 치르고 정계에 진출한[17] 1살 많은 김흥근[18]도 있었으나 헌종 말년에 탄핵을 당해 잠시 정계에 이탈해서 김좌근만한 유명세는 없다. 훗날 김흥근이 머물던 별장을 흥선대원군이 꾀를 써 뺐었는데 인왕산에 위치한 석파정이다.[6] 철인왕후 김씨는 안동 김씨의 핵심 인물인 김문근의 딸이다. 김문근은 이 뚱뚱해서 '포물부원군(包物府院君)'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7] 수령들이 백성들에게 수탈한 세금이 바로 (신) 안동 김씨에게 바치는 뇌물 등으로 쓰이고는 했기 때문이다.[8] 합하라는 경칭과 같은 의미[9] 황희가 정승이면 '황합', 장동에 사는 정승은 '장합' 이런 식.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칭한 태합이 이런 호칭이다.[10] 본인의 양자. 젊을 적에 흥선대원군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준 보답으로 흥선대원군 집권 후에도 잘나갔다[11] 당시는 흥선대원군 섭정기였으므로 고종 본인보다는 흥선대원군의 생각이 더 들어갔을 것이다.[12] 주로 이 시대의 일화는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영향이 크기도 하고, 야사나 카더라 식으로 전하므로 곧대로 믿을 수는 없으며 대원군의 '상갓집 개' 시절 일화나 운현궁의 봄 등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일화들은 주로 1890년대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흥선대원군약전>(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이라는 책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단 이 책 역시 정사가 아니라 야담들을 수집해 놓은 책이란 걸 염두에 두자. 김좌근이 엽전 던지는 일화나 흥선군이 나합에게 절을 올렸다는 일화도 이 책에 있다.[13] 이런 야사는 조선 전기 윤원형의 첩으로 극도의 사치를 부린 정난정에게도 있다.[14] 한국연극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노인이 된 이진석 역을 맡았다. 2012년 11월 2일 별세.[15] 나중에 국회의원을 지냈다.[16] 1986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남한산성>에서는 김좌근의 8대조 김상헌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