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석 궤장 (보물 제930호) 1668년 현종이 원로대신인 이경석에게 내린 의자와 지팡이 |
1. 개요
궤장(几杖)은 군주가 70세 이상의 신하에게 하사하는 최고의 예우이다. 궤(几)는 안석(安席)으로 앉아서 국정을 돌볼 수 있도록 만든 편안한 의자, 장(杖)은 노인들이 다니기 편하게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말한다. 조회를 할 때는 당연히 계속 서 있어야 하고 몸이 불편하다 해서 자리에 앉거나 지팡이를 쓸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아주 극진한 예였다.문제가 자신의 사촌형 오나라왕 유비(劉濞)가 늙고 병들자 궤장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사기》와 《한서》에 있다. 고려에서는 이거[1]가 고종에게 궤장을 하사받고 근무하던 중 사망했다. 궤장을 하사하는 제도는 조선 초기에는 잠시 중단되었다가, 세종조에 들어서 예조에서 육전에 따라 궤장을 노신에게 주는 제도를 시행할 것을 청함에 따라 성석린에게 궤장을 하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다시 부활하였다.
2. 실제
실제로는동아시아에서는 '치사(致仕)'라고 하여 나이가 많은 신하는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예법으로 여겼는데, 대략 70세를 기준으로 했다. "OOO이/가 궤장을 하사받았다." 라는 기록은, 바로 군주가 해당 인물은 치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예외를 선언했거나, 이미 치사한 관료를 재등용했다는 의미이다. 사실 치사는 강제력이 있는 법규는 아니었으나, 궤장을 받지 않았음에도 치사를 하지 않고 버티면 간관들의 탄핵 표적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노욕으로 취급받아 세간의 조롱을 받게 되었다. 고려 무신집권기 때 이광정이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치사를 않고 버티고 있었다가, 명종의 노골적인 조롱을 듣고 마지못해 은퇴하게 되었는데, 이 기록을 두고 이광정의 당시 나이가 70세를 넘은 것으로 추정할 정도이다.
공신이 아니라도 받을 수 있었지만 하지만 궤장을 아무에게나 하사하는 건 아니라서 궤장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영광이었다. 궤장을 하사받으면 이를 기념하는 연회를 크게 여는 것을 넘어, 아예 궤장을 하사받는 장면과 기념 연회를 그림으로 그려 남겼을 정도였다.
3. 대중매체에서
무인시대에서 나이가 70에 가까운 시점에 집권한 정중부의 행적과 연관이 깊은 아이템(?)이다. 명종과 공예태후는 정중부가 곧 치사를 해야하는 상황임을 두고 무인 집권기가 끝날 거라 여기고,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 또한 아버지의 권력을 승계받아 정권을 차지할 생각만 하게 된다. 물론 정중부는 이런 상황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는데, 조 환관의 조언을 통해 궤장을 받으면 치사를 안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명종을 압박하여 끝내 궤장을 받아낸다. 하지만 이후 정중부가 은퇴해야 자신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정균은 조 환관을 채찍질하는 등 정중부와 갈등을 빚게 되고, 결국 정중부는 정균이 보는 앞에서 지팡이를 부러뜨려 자신이 노욕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균이 조정에서 자리를 보다 굳힐 수 있을 때까지 방패막이가 되려 했음을 밝힌다. 정균도 자신이 어리석었다며 정중부에게 사죄하는데, 이 장면은 나름 명장면. 얼마 뒤 경대승이 거병했을 당시 정중부는 궤장을 잃어버려서 허겁지겁 궤장을 찾는 꿈을 꿨는데, 정중부 정권의 붕괴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이후 최충헌 역시 궤장을 받은 뒤 왕씨 성을 받았으니 이제 나는 최충헌이 아니라 왕충헌이라며 좋아하며,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의 꿈에서 궤장이 없어지자 크게 놀라서 찾으러 다니며 결국 발견했을 때는 무척이나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이미 세상을 떠난 최충수와 박진재가 찾아와 자신을 비웃는 모습을 본다. 깨어난 뒤에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직접 고종을 찾아가 문하시중 직을 사직하고 왕씨 성 또한 반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