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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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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건의 발단3. 사건의 전개4. 사건의 끝5. 평가와 의의6. 여담

1. 개요

광해군 4년(1612년)에 벌어진 옥사, 김직재의 옥이라고도 한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별것도 아닌 일을 억지로 대형 옥사로 확대시킨 사건이다.

2. 사건의 발단

사건은 1612년 2월 7일, 황해도 봉산군에서 김제세(金濟世)라는 이가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중화군의 병가(兵家) 출신으로, 어릴 때 승려가 되어 글자를 조금 배웠고, 환속한 뒤에는 군보(軍保)에 소속되었는데 군역을 지기 싫어 봉산으로 도망친 자였다.[1] 그러고도 모자라 군역을 면제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해서 훈도의 직첩을 만들어 봉산군을 거쳐 중화군으로 보내려 했는데,[2] 봉산군수 신율(申慄)이 이를 먼저 뜯어본 것이다. 김제세는 환속한 지 얼마 안 되어 관가의 규례에 어두웠기 때문에, 그가 위조한 직첩은 공문서의 양식도 지키지 않은 엉터리 문서였다.[3] 당연히 바로 발각되었고, 신율은 직첩을 전달한 자를 잡아 직첩을 위조한 자를 알아내고, 바로 군사를 풀어 김경립(=김제세)를 체포하고 위조한 어보와 병조인(兵曹印)도 찾아내었다.

이에 신율이 김제세를 불러다가 증거로 초료장 제시를 요구하였으나 제시한 초료장도 개판 5분전이라서 동생 김익진(金翼辰)을 핑계대었고 신율이 김제세와 김익진을 모두 잡아다가 곤장을 쳤는데 김제세는 7~8대를, 김익진은 10대의 매를 사정없이 맞았다. 신율이 '화적질한 일을 공초하였다'라고 나중에 광해군에게 고한 것을 보면 신율은 역시나 김제세를 도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두들겨맞은 두 사람이 "장차 큰 일을 할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다."라고 수상쩍은 말을 하면서 일이 커진다. 그러더니 김백함(金百緘)[4]을 수괴로 하는 역모조직에 가담했다고 고변을 한다. 그리고 그 조직이 팔도에 모두 대장,별장을 둔 거대 조직이라고 밝혔다.

이런 뜬금없고 황당한 고변은 당시 봉산군수가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의 봉산군수는 바로 신율, 이미 선조 28년에 연줄로 벼슬을 얻은 '아직 입에 젖내나는 어린 자제'라고 탄핵당해 체차당한 전력이 있었고, 선조 30년에도 승무원 저작으로 일하다가 근무기강이 개판이라서 파직된 적이 있었다. 광해군 1년 때도 임천군수로 일하면서 일은 하지 않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파직된 적이 있었다. 남이 지은 글로 과거에 급제해 동류들 사이에서는 왕따 신세였지만 출세의 야심이 대단해서 평소 좀도둑을 잡아도 혹독한 고문으로 중범죄자로 만들곤 하던 인물이었다. 광해군 4년 1월 26일, 도적을 잡은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나 실록에선 "그러나 신율은 양민(良民)을 강제로 겁주어 자복받고, 잔혹하게 형벌을 사용해 온 경내에 그 독(毒)이 퍼졌다."라고 그를 깠다.

어쨌든 이런 역모 고변에 신율은 김제세의 동생도 잡아왔고 김제세의 동생은 김백함이 총대장이라는 등 좀 자세히 진술하는데, 문제는 다시 물으니까 딴 사람이 나오는 등 계속 내용이 오락가락한다.[5] 이에 신율은 사적으로 유팽석을 만나 상의했고, "그래도 역모 고변이니 위에 보고해야 할 것 같다"는 유팽석의 말에 신율이 진짜로 보고를 했다.

물론 별것도 아닌 내용인지라 황해병사, 황해감사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조정에 보고(2월 13일)했다.[6] 황해병사 유공량(柳公亮)과 황해감사 윤훤(尹暄)은 "그의 꾸며대는 말이 괴이하여 다시 국문을 가한즉 말이 혼란하여 믿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장계하였다. 2월 17일, 윤훤은 별도의 장계롤 또 올려 "앞뒤로 말을 바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풍병이 들었거나 정신나간 사람은 아닌 듯한데, 형제가 같은 말로 공초를 하였으니, 매우 의심스럽습니다."라고 김제세를 믿을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유공량 역시 "신이 봉산군에 달려가서 감사 윤훤과 함께 직접 그 진위를 살피고 범죄 사실을 다시 심문하여 전일의 공초를 가지고 힐문하니 대개 앞뒤가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모든 역모를 꾀한 사실을 마치 심상한 보통 이야기 하듯 하고 두서 없고 혼란한 말들을 많이 하였습니다."라고 같은날 장계했다.

그런데...

3. 사건의 전개

광해군은 즉시 궁궐 수비를 강화하고 추국을 개시, 옥사가 시작된다. 팔도 대장으로 거론된 김백함은 잡혀와서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지만 곤장 14대를 맞고는 마음에 안 들던 50명을 끌어들였다. 각 도 대장의 이름 등 진술이 다들 따로 놀았건만 어쨌든 역모 혐의를 인정한 자는 즉각 형이 집행되기에 김백함, 김직재, 황보신 등은 모두 처형되었다.[7] 아무튼 이런식의 진술로 굴비 엮듯 줄줄이 잡혀왔고 광해군은 매일같이 친국을 이어갔다. 당시 판의금부사였던 박동량은 옥사에 많은 사람이 연루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당시 대사헌이던 이이첨과 대북 일색이던 대간들의 탄핵으로 실패한 뒤 판의금부사 자리를 내놔야 했고 새로운 판의금부사에는 당시 병조판서 박승종이 임명된다.

한편 신율은 유팽석을 꼬드겨 사건이 잘 해결되면 우리 둘 다 일등공신이 되겠지만, 지금 유팽석과 비슷한 이름이 나와 곧 체포될 텐데, 내가 말한 대로만 대답하면 풀려나는건 물론 공신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진짜로 유팽석은 체포되었고, 국문에서 신율이 시킨 대로 말하긴 했는데 내용이 문제였다. 유팽석은 3년 전 심원사에서 공부할 적에[8] 우연히 두명의 중이 불온한 말을 나누는걸 들었다며 황혁, 정경세, 정인홍, 김직재, 유영경의 자제 등의 이름을 뱉어냈다. 그런데 유영경은 탁소북[9]의 영수, 정인홍은 대북의 영수인지라 선조 41년에만[10] 해도 서로 물고 뜯던 사이였다. 이런 원수같은 둘이 같이 역모를 꾀했다는 헛소리를 광해군은 거의 다 믿어 정인홍 등 확실히 믿는 이들만 빼고 죄다 끌고오게 했다. 결국 황혁은 형장을 맞다 죽었고 정경세는 삭탈관직되었고 유팽석은 의금부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병이 위중해져서 광해군이 살려내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보고가 올라온 것이 이미 늦은 상태였기 때문에 별 손도 못 쓰고 죽어버렸다.[11]

사건 물렁하게 대했다고 유공량은 석고대죄해야 했으며 윤훤은 윤두수의 아들이었는데 이일로 삭탈관직까지 당했다. 그러다가 광해군 6년에 용서받고 경주부윤에, 광해군 9년에 경상감사에 임명된다.

4. 사건의 끝

여튼 이런식으로 사건은 커지고 커져 많은 사람들이 끌려나오고 고문으로 죽었고 심지어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끌려나와 고문당했다. 보통은 남편/아버지가 승복하면 처나 첩등은 국문하지 않고 종으로 삼는게 법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이때는 그딴 거 없었다. 결국 옥사는 7개월에 걸쳐 340명이 체포되고,[12] 100개의 가문이 파멸되고서야 종결된다.

한편 이 옥사가 끝나갈 즈음 한 유생이 이딴 일이 일어난건 류영경을 제대로 벌주지 않아서이니[13] 추형[14]하고 존호를 높이고 공신을 책봉할 것을 주장했다.정인홍 이름도 나왔는데? 이 일을 주도한 게 대북인 만큼 대북을 어필하려는 생각이었는데 대간들이 이에 동조해 유영경의 추형, 존호 올리기, 공신 녹훈이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고 결국 모두 받아들여져 유영경과 그 심복들은 부관능지되고 광해군은 존호를 받았으며 공신도 책봉된다.(광해군 5년 3월 12일)[15]

이 과정에서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심희수 등을 비롯한 서인남인 세력들은 이 옥사를 기세가 상당히 약화되었고, 그 대신에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이었던 기자헌, 유몽인,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이 옥사를 주도해 나가며, 정국에서 우위를 둘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옥사를 주도한 대북은 서인, 남인 세력을 공격하는 정치적 사건으로 알려지지 않기 위해 서인과 남인 인물들까지 포함시키는 4개의 공신 책봉을 하면서, 대북은 절대로 옥사로 통해 서인과 남인을 몰아내지 않음을 입장으로 밝혔다.

그러나 얼마 못가 계축옥사가 터지고 기자헌, 유몽인,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은 영창대군을 지켜내거나 폐모론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서인과 남인을 몰아내면서 대북이 정권을 독차지하는 양상으로 변했다. 이러한 상황을 거치는 동안에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이 이끄는 소북은 옥사에 소극적으로 동조하며 대북이 서인과 남인들을 몰아낼때, 그저 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16]

5. 평가와 의의

보면 알겠지만 정말 별거 아닌 사건이었다. 물론 명색이 역모 고변을 가볍게 처리할 순 없으니 왕인 광해군까지 도달한 거 자체는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의 일. 옥사의 원인이 된 김제세 형제의 진술이 오락가락하는가 하면 각 도 대장의 이름도 엇갈리고, 유팽석은 서로 원수지간인 류영경정인홍이 손을 잡고 역모를 꾀했다는 등 말도 안되는 소리를 떠벌리고, 여기에 기축옥사보다도 심한 사태가 벌어졌다. 기축옥사 때도 이발의 어머니와 이발의 자식이 형장을 맞다 죽긴 했지만 그건 그들뿐이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고문으로 죽은 아이의 시체를 나르는 사람 두명이 "정여립의 옥사 때도 이정도까진 아니었다", "마치 연산 시절을 보는 것 같다" 라고 디스했다. 더 큰 문제는 광해군이 진술이란 진술은 하나도 의심하지 않고 다 믿어버린 것. 본래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는 기회는 이때다! 하고 여러가지 이유로 자기 마음에 안드는 사람을 역모 가담자로 불어서 죽여버릴 수 있고 그래서 거짓 진술을 했을 시 반좌율에 의해서 사형도 처해지는데 광해군은 그걸 고려하지 않았다.

이미 임해군의 옥사에서 이 점을 간파했던 기자헌, 이이첨, 유몽인이 이끌었던 대북은 별것도 아닌 사건에 과다하게 반응하며 옥사 정국을 주도, 광해군의 신임을 샀다. 이후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 봉산옥사는 그 사건들의 시작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허위 고변이 판을 쳤고 그 허위 고변을 계기로 대북은 계속 성장해갔다.[17]

6. 여담

  • 이 사건을 일으킨 주범인 신율은 군수에서 순식간에 1등공신, 영풍군(永豊君)으로 봉군되어 판서급이 되었지만 그 영화를 오래 누리지 못했다. 광해 5년(1613년) 9월 19일 신율은 아버지 신순일이 현령으로 있는 강서(江西)에 가서 내외에 잔치를 베풀어 부모를 대접했다. 그런데 술이 한차례 돌기 전에 갑자기 도망친 닭이 천막 안으로 날아와 신율의 연회상을 뒤집어버렸고, 신율은 얼굴빛이 바뀌어 벌떡 일어나 병풍 밖으로 나갔는데 갑자기 자빠져 죽었다. 봉산옥사 당시 큰 피해를 입은 양서(兩西)[18]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통쾌해 했으며, 흉악한 일을 한 업보라 여겼다고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기록했다.
  • 이 옥사로 만들어진 공신들이 형난공신(亨難功臣) 인데, 인조반정 이후 취소되었고 이 사건을 일으킨 신율 이외에 나머지 사람들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20세기 후반에 형난공신 (3등공신) 윤중삼 초상이 세상에 나오면서[19] 그 실체가 알려졌다. 골수 서인으로 알려졌던 이항복, 이덕형도 이 옥사에 협조해서 형난 2등공신을 받아 먹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들의 충정에 큰 상처가 났다.[20]
  • 한편 형벌을 모면해보겠다고 궤변을 늘어놓은 김제세는 죽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으며 그를 심문한 조정관료들도 "유인해서 말을 하도록 하면 반드시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을 무고해서 끌어대고, 그 변환하는 꼬락서니를 물어보면 문득 혼미하여 기억할 수 없다 하고 또 무서워서 그렇게 공초했다고 칭하니, 비록 반복하여 힐문한다 하더라도 실정을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광해군에게 아뢰는 등(광해 4년 5월 7일 경자 6번째기사) 그의 정체를 곧 간파하였다. 급기야 광해군 4년 5월 10일, 의금부에서 목을 매어 죽으려다가 동료 죄수가 알아서 죽지 못하고 계속 심문을 받다가 7월 17일에 철물교 앞길에서 처형되었다. 이보다 앞선 4월 1일, 김제세의 아버지 김국량(金國良)도 못난 아들 때문에 처형된다.

[1] 도망친 김제세의 군역은 중화군에 있는 부모친척들이 대신 부담해야 했다.[2] 이미 군역을 피해 도망친 자라서 직접 중화군에 서류를 전달하지 못했다.[3] 이조의 하비(下批)를 예조의 하비라고 적질 않나, 예조 참지라는 없는 관직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위조한 도장도 획이 어긋나 있었다.[4] 김백함은 김직재의 아들인데, 공교롭게도 신율의 사촌 동서로, 신율은 자기도 이 고변을 처음에 듣고는 두려웠다고 주장했다.[5] 당연한게 제대로 된 얘기라면 이렇게 오락가락할 리가 없다. 즉 없는 얘기를 허위로 꾸며내다보니 내용이 계속 바뀌는 것.[6] 일단 좀 이상하지만 명색이 역모 고변인 만큼 그냥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7] 이때 김백함은 "나라가 내게 속았다!" 라고 외치고 죽었다. 그가 허위진술을 한 것과 동시에 이 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보여주는 사례. 당시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광해군 5년 4월 25일에 박승종이 이 사건을 문제삼으며 "이는 대체로 그가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끌어 넣어 국맥(國脈)을 손상시킨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의 옥사(獄事)는 충분히 상세하게 살펴서 파급시키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고했고 광해군도 "역적을 국문할 때에는 엄히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러다 보면 국맥을 실제로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어느 정도 동의를 표했으나 다 알다시피 광해군 치세 내내 옥사는 끊이지 않았다.[8] 유생들에게 절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상사금지령이 있었지만 실효는 별로 없었다.[9] 당이라고도 한다.[10] 봉산옥사 약 3~4년전.[11] 참고로 황혁과 정경세는 신율과 원수진 일이 있었다.[12] 광해 4년 4월 17일자 기사[13] 유영경은 자결 명령을 받고 죽었다.[14] 벌을 더하는것.[15] 규모가 상당한데 네가지 종류로 종류가 많은 영향이지만 숫자도 많아 위성공신(왜란 때 분조, 무군사를 따라다닌 이들) 80명 익사공신(임해군의 옥사를 처리한 이들) 48명 정운공신(정인홍의 상소에 기여한 이들) 11명 형난공신(봉산옥사를 처리한 이들) 24명으로 총합 160여명이었다.[16] 참고로 재위 후반 이이첨이 폐모론에 반대한 기자헌과 유몽인을 몰어내고 그 대신에 류희분, 박승종와 같이 정권에 참여시키도록 하였는데, 이때 이이첨과 같이 3창이라 불리게 되었다.(광부원군 이이첨, 문부원군 류희분, 밀부원군 박승종이다. 이때 공신이 될때 받은 시호를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소북이 사실상 방관 내지, 소극적 동조였던 셈이다. 본래 류희분, 박승종도 사실상 폐모에 반대했었지만......[17] 봉산옥사 이후로 조선 정치에도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영의정과 좌의정은 아직까지는 서인, 남인, 소북 등 야당들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 때 이후로 우의정은 여당인 대북세력에게 넘어간다.[18] 평안도황해도를 뜻한다.[19] 대개 반정 이후 공신이 취소되면 초상화와 녹권(목록)도 불태워지지만, 윤중삼은 인조반정 이전에 죽어서 자손들이 그것들을 숨긴 탓에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 이후 형난 3등공신 유숙의 초상화도 공개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20] 물론 이들이 정말 협조의 댓가로 공신을 먹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원래 공신이라는게 원칙대로 봉해지는게 아니기 때문, 예를 들어 을사사화 이후 봉해진 위사공신 중에는 이언적이 있는데 그는 무려 2등공신에 봉해졌고 계유정난 이후 봉해진 정난공신 중에는 성삼문이 3등공신에 있다. 즉 단순히 공신에 봉해졌다고 그 사람의 행적을 엿볼 수는 없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했는지까지 봐야 한다. 그리고 이덕형과 이항복이 골수 서인이라는 서술도 틀렸다. 물론 이항복의 제자들은 서인쪽으로 당색이 강하기는 했지만 본인이 그렇게까지 골수 서인 성향을 보인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