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17 16:07:00

탄금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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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전투(彈琴臺之戰)
시기 1592년 음력 4월 28일(양력 6월 7일)
장소 조선 충청도 충주 달천 평야 및 탄금대
원인 상주 전투 이후, 왜군의 북진.
교전국 조선 파일:1280px-Flag_of_the_King_of_Joseon_(fringeless).svg.png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지휘관 도순변사 신립
조방장 변기†
종사관 김여물†
충주 목사 이종장†
이일
박안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7%AB%8B%E8%8A%B1%E5%AE%B6%E5%BE%A1%E5%AE%9A%E7%B4%8B%E3%80%8C%E7%A5%87%E5%9C%92%E5%AE%88%E3%80%8D.jpg 고니시 유키나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42px-So_clan_mon2.svg.png 소 요시토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Matura_mitu_Hosi.svg.png 마츠우라 시게노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Arima_Mokkou.svg.png 아리마 하루노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Arima_Mokkou.svg.png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병력 8,000명 ~ 16,000 명 18,000여 명
피해 최고 지휘관 전사
지휘부 및 방어군 궤멸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충주 함락.
영향 조선, 수도 방어 포기. 선조의 몽진.
1. 개요2. 양측의 군세3. 전투 이전4. 전투 경과5. 조선 정규군의 토붕와해6. 전투의 영향7. 왜 탄금대인가?
7.1. 기병 활용설7.2. 배수진 활용설7.3. 불가피설7.4. 고립 방지 및 전선 유지설7.5. 조령 무용론7.6. 신립의 자질 부족설
8. 여담9. 대중 매체10. 전설

1. 개요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음력 4월 28일(양력 6월 7일)에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일본군과 탄금대(충청북도 충주)에서 싸운 전투. 임진왜란 개전 이후 최초의 대규모 야전이며, 이 전투의 패배로 조선 조정은 몽진[1] 을 결심한다.

이름은 탄금대 전투지만 실상 전투는 중반까지 충주천 이남 달천 평야에서 벌어졌다. 전투 후반에 신립이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 했기에 그 임팩트 탓인지 탄금대 전투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탓에 전투가 처음부터 끝까지 탄금대 인근에서만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패전인데도 불구하고 주목 받는 이유는 임진왜란 기간을 통틀어 보기 드물게 조선군이 큰 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야전이었던 데다가, 일정한 패턴의 공방을 주고 받는 공성전, 수성전과 달리 진법이 승부를 결정지었던 야전이기 때문. 사실상 한일 전쟁사에 드문 정규군의 대규모 회전이다. 게다가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는 신립과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결이었으며 기병 vs 보병이라는 양측의 전혀 다른 병종 구성도 묘미다. 주력 무기 또한 활 대 조총으로 서로 달랐다. 여러모로 전쟁사적 관점에서는 흥미로운 점이 많다.

2. 양측의 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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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의 주력이었던 기마병. 조선 초기까지 제법 있었던 근접 기병의 비율이 상당히 줄어 이때의 기병은 대부분 궁기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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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뎃포 아시가루(조총병).

조총 자체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군도 알던 무기이지만, 조총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해 손에 꼽을수 있을정도의 수량만이 극소수 사용되었을 뿐이였으며 전국 시대를 거치며 정교하게 정립된 왜군의 조총 운용법은 조선군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2][3][4] 특히나 탄금대 전투의 경우 초반에 일본군이 승기를 잡게 된 결정적 요인은 조총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의 경우 처음 일본에서 끌고 온 병력 18,700명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 상륙 후 거친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에서 입은 고니시 군의 피해는 경미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18,000명 안팎의 병력을 유지했을 것이다.

조선군의 경우 의견이 갈리는 편인데 8,000명 설과 16,000명 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신립이 서울을 출발 할때 데리고 있던 직속 병력[5]류성룡에게 인계받은 무사, 장정들을 합쳐 8,000여 명,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모집한 병력이 8,000여 명으로 도합 16,000명이라는 것과 단순히 충청도 일대 병력 8000명이 전부이고 도성에서는 극소수의 병력밖에 데리고 오지 못했다는 주장이 팽팽하다. 선조 수정 실록과 징비록의 기록이 상이해서 어느 쪽 기록을 더 신뢰하냐에 따라 군세가 달라진다. 그러나 유성룡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징비록 초본과 후손들이 군왕에 대한 서술 태도 등을 문제로 보아 수정한듯이 보이는 간본 간의 서술 차이가 심해(군세의 서술도 차이가 있다) 징비록의 탄금대 기사 기록은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 애초에 징비록 초본에는 도성에서 이끌고 가는 군사, 이른바 경군의 병력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등의 문제점이 있어, 수정 실록의 도성의 재관, 무사, 외사의 서류, 한량인으로 활 잘쏘는 자 수천 및 장사 8천, 방읍병 8천, 즉 16000명 이상이라는 서술이 신빙성을 얻는다.

조선에 중앙군이 이 정도가 있었을 리가 있느냐 하는 사람도 있으나, 임진왜란 이전에 류성룡이 조선 중앙군이 보병과 기병을 합쳐 약 4만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 것이 선조 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저 병력 파견 기록들을 보면 '도성의 무사' 나 '경군'으로 판별해 말하고 있어 신뢰도가 낮은 기록은 아니다. 즉, 충분히 한판 해볼 만한 병력 규모였다고 할 수 있다. 질이 문제겠지만, 기병 비율이 높고 정예병이 포함되어 있었던 걸로 보이며 완벽한 배수진이 아니었던 탄금대에서 적에게 밀리는 와중에도 반나절간 버텼던 걸 생각하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오합지졸은 아니었다.

원래 신립의 관직상 경군을 끌고 내려갈 수는 없으나 이때에는 특례로써 병력의 상당수를 차출할 수 있었다. 수정 실록에 따르면 경군 8천여, 징비록에는 류성룡이 한성 주변에서 8천여[6]를 모집했다가 이를 넘겼다고 하고 있고, 정만록에는 경군 1만여를 차출해 신립에게 붙여줬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하지만 선조 실록에는 이런 명시적인 기록이 없으며 징비록에도 정작 전투시에는 충주에서 8천여를 모았다고 하고 있고 나중 선조가 전쟁 지도 과정을 반성할 때도 신립군을 극히 소수로 다수의 적에게 무모하게 싸웠다고 하고 있어 아주 명확한 것은 아니다.

3. 전투 이전

북상하는 일본군을 저지하라는 명을 받고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것은 4월 26일, 김여물이 지형이 험한 조령[7]에서 싸우기를 권했지만 신립은 기병을 활용할 수 있는 평원에서 싸워야 한다며 탄금대 남쪽 달천 평야 일대를 전장으로 삼을 결심을 굳힌다.[8] 신립이 내려오기 전에 사전에 파견되었던 조방장 변기가 조령에서 고지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상주에서 패한 이일도 변기에게 합류했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일부 병력을 조령에 남겨놓아 지연전을 벌이면서 충청도와 강원도의 군사들을 제승방략으로 집결시켜서 군세를 더 키우고 훈련도를 높일 방법도 있었고, 신립 주변의 제장들도 고지전을 요청했지만 신립은 전혀 듣지 않았다. 결국 변기와 이일의 군사까지 조령을 버리고 신립의 본진에 합류하게 되었고 조선군은 달천을 등지고 배수진을 쳤다. 하지만 달천 평야는 기마대가 기동력을 발휘하기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주변에는 논이 많았고 강변 인근에는 갈대밭이 우거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거의 습지에 가까운 질척질척한 상태였다고 보면 된다. 28일에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단월강 북단에 있는 단월역(현재 건국대 글로컬 캠퍼스 인근)에 진입한다. 고니시는 즉시 군을 나누어 자신의 본대는 중앙을 맡아 계속 진군하였고, 소 요시토시의 좌군은 달천 강변을 따라 서쪽으로, 마츠우라 시게노부의 우군은 산자락을 타고 동쪽으로 조심스럽게 이동시킨다. 또한 아리마 하루노부 등이 이끄는 병력은 별동대를 맡아 뒤를 따르고 있었다.

4. 전투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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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돌입시의 포진. 조선군 기마대는 고니시의 본대를 포위하려는 형태로 반월진을 갖췄으나 고니시는 좌군과 우군을 양쪽으로 은밀히 넓게 벌려 놓고 있었다.

진형을 보면 딱 감히 잡히겠지만, 고전적인 우익-중앙-양익 형태의 진형이 아니라, 서유럽에서 자주 볼법한 기병 돌격 위주 진형이다. 반면 왜군의 진형은 양익에 둘 기병이 없다는 것을 배면 매우 간단한 고전 진법을 따르고 있다. 신립의 전장 선택은 강을 통한 기동 차단을 고려한 정석적인 선택이었으나, 상대를 포위하기에는 상대의 병력이 너무 많고, 정면 돌파하기에는 창기병의 부재로 인해 충격력이 극히 부족하다는 점에서 현명한 선택이 아니았다. 물론, 단순히 생각없는 배수진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 옆에 충주성이 있다. 문제는 그 충주성에서 출격해 나올만한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결국 걍 병력이 없다는 게 문제

반면, 왜군은 수적 위세를 이용한 정석적인 양익 베치를 통해 기병 우회기동에 대비하고 있었다. 산지에 숨은 마츠라의 병력은 충주성에서 주둔군 기습 출격하여 포위를 시도할 가능성도 염두한 듯하다. 충주성에서 조선군이 출격해 나온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고지에 자리잡은 마츠라 병력이 이를 붙잡을 수 있고, 기병 우회 시도가 있을 경우 즉시 내려와서 차단이 가능한 상태. 기병 우회를 막다가 충주성에서 출격한 병력에 포위당할 우려는 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출격한 병력이 고지까지 공격해 들어가기는 무리다. 엄연히 왜군도 배수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라, 조선군에게 밀릴 경우 심히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왜군 본대 뒤쪽에 대기중인 예비대가 마츠라가 있던 고지로 올라가 농성하면 완전한 섬멸은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 결국, 지형적으로 왜군이 손해보는 상황이 아니었고, 충주성의 존재는 그리 큰 의미를 두기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충주성에는 딱히 출격에 동원가능한 주둔군이라 할게 있지도 않았다.

물론, 조선군은 엄연히 성을 같이 끼고 있는 상황이기에, 여의치 않으면 그냥 예비대로 저지하고 그대로 방어선을 다시 만들 수도 있기에[9], 신립의 병력 배치가 별로 현명하지 못하였긴 해도, 지형에서 손해볼게 없는 것은 마찮가지인 상황이다. 하지만, 신립 본대 뒤편 예비대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부족한 병력, 이미 3방향에서 돌파되는 전선이라는 무리한 조건 하에서 어떻게든 북진을 막기 위해 기병 돌격을 통한 방진 파쇄를 도박수로 두고, 충주성을 보험삼았다 볼 수 있으나, 보병 예비대가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정말 문제.
  • 1차 돌격 : 고니시 유키나가의 본대에서 선봉 병력을 전진 시키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에 신립은 기마대 1천을 돌격시켰다. 기병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한 일본군 선봉은 곧 후퇴하였고 고니시는 단월역 방면으로 다소 물러났다. 이때까지도 조선군은 강변과 산자락에 매복한 소 요시토시의 좌군과 마츠우라 시게노부의 우군을 인식하지 못했다. 바로 정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본대 7천[10]이 적군의 전부라고 생각했고, 조선군 기마대는 고니시의 본대를 포위 섬멸하려는 형태로 보병은 놔둔채 기병으로만 다시금 2차 돌격을 감행한다. 이것이 가장 큰 실책인데 그 이유는 뒷 문장에 후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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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 돌격 : 소 요시토시의 좌군과 마츠우라 시게노부의 우군이 양쪽에서 접근해 조선군 기마대를 조이며 조총 사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1차 돌격 때와는 달리 이때 조선군은 상당히 고전을 한다. 전날 비가 왔었고 달천 평야는 대부분 논과 밭이 었기에 탄금대는 기병을 운용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다. 당연히 기병의 기동력이 떨어졌고 당시 조총의 유효 사거리는 길어봐야 50M 였지만 쇠뇌보다도 기병 저지력이 훨씬 뛰어났다. 특히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조총은 장창병의 호위를 받으며 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기병이 돌격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설사 기병이 진형을 무너뜨린다 해도 막대한 피해를 입게될 것이 뻔하였다. 당시 조선 측의 자료에 의하면, 신립의 기병은 중기병 돌격을 의미하는 치돌(馳突)이 아닌 치사(馳射)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치사란 궁기병의 돌격 사격을 의미한다. 조선 초기의 기병 편제에는 충격 기병 역할을 하는 중기병이 고루 편제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비용과 무반의 인사고과를 에 치중시키게 되면서 기병들도 자연스레 경장 궁기병이 중심이 되기 시작하였다. 왜란 직후에 편찬된 무예제보에서는 "무과 시험장에선 쓰이지만 그 방도가 상세히 갖추어지지 않아 창과 칼이 버려진 무기가 된 지 이미 오래다"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조선의 기병은 일본군의 장창진을 뚫을 최소한의 돌격력 조차 없었고 기병을 따로 돌격 시키게 되면 기동성이 느린 보병과는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므로 사실상 각개격파 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결국 조선군 기마대는 곧 후퇴하게 된다. 조선 각궁의 유효 사거리는 100M로 조총에 비하면 거의 2배 가량 차이가 났으며 연사력 또한 압도적이었는데, [11] 기병만으로 돌격을 하는 대신 보병을 전진시켜 모루로 삼고 조선과 일본의 보병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기병으로 측면을 공격 했다면 이렇게 참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립은 진을 뒤로 물려 다시금 3차 돌격을 준비 하지만 이미 승기는 일본군 쪽으로 기울었고 이렇게 전투가 한창일 때, 아리마 등이 이끄는 별동대가 방비가 허술한 충주성을 순식간에 점령해 버린다. 신립이 당황해서 충주성으로 가려고 했지만 이미 손 쓸 도리가 없었다.
  • 3차 돌격 : 결국 고니시의 본대를 향해 3차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일본군의 장창 대형과 조총 사격, 노다치 / 우치카타나 / 타치를 든 도보 무사들의 맹공 등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는다. 3차에 치뤄진 기병의 돌격 역시 궁기병의 돌격 사격 위주로 이루어졌으며, 궁기병의 마상 궁시의 유효 사거리가 짧다는 걸 감안하면 사실상 기병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일본군 조총병대와 화살과 총탄을 일대일로 교환한 것으로 보인다. 궁기병으로 유명했던 몽골군도 전력의 5분의 2는 중기병으로 편제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으로 이러한 병과의 불균형으로 인한 문제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드러나는데, 사르후 전투에서 조총병 중심의 조선군이 임진왜란때의 일본군의 입장으로, 왜란의 조선군 입장인 궁기병 중심의 후금군을 상대로 하는 사실상의 정반대의 입장에서 교전하게 되나 왜란때와 마찬가지로 병과 불균형이라는 똑같은 문제로 패하게 된다. 명군과 본디 합류하려 했던 계획이 꼬이는등 여러가지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조선은 임진왜란 직후에나 전훈에 따른 근접전의 중요성과 신무기 총병을 호위하는 보조 근접병과의 중요성을 복기 하였을뿐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근접병과는 도외시 되기 시작했고 총병을 호위할 병과 육성에 미진해지게 되며, 임진왜란의 교훈은 총병 뿐이고 왜군에게서 얻을 교훈은 총병뿐이라는듯 총병육성에만 두각을 나타냈고 이는 사르후전투 당시 윤방한번 제대로 못하고 총병이 기마대에 그대로 쓸려버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5. 조선 정규군의 토붕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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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 : 여러분 잠시만 지나갈게요.

승기를 잡은 고니시는 좌군, 우군과 함께 포위 진형을 유지 하며 무서운 기세로 밀고 올라오면서, 대군은 와해되었고 전투는 그것으로 끝나게 된다. 신립은 충주천 북쪽의 탄금대로 몰려 김여물과 함께 남은 전력을 이끌고 최후의 결사 항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만회하긴 역부족. 이일을 비롯한 일부 병력이 간신히 빠져 나갔지만 신립은 손수 활을 쏘고 칼을 휘둘러 왜군 수십 명을 죽이고 자결했다.

전투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신립 군은 전멸하였다.[12][13] 반면 고니시 군의 경우, 전투 직후 곧바로 한양을 향해 쾌속 진군을 시작한 것으로 미루어 손실이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으로서는 (비록 패전이라 할지라도) 고니시 뿐 아니라 왜군 전체의 예봉을 꺾어, 한양 방어의 시간을 벌겠다는 최소한의 전략적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한 참담한 결과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패해도 너무 쉽게 패했다는 것(...).

한편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가토 기요마사의 군 또한 근처에 있었는데 전투 현장을 우회해서 지나갔는지 아니면 뒤에서 관망했는지는 불확실 하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가토는 고니시가 전투하는 것을 보고 고니시 군대의 용맹에 감탄을 보냈다고 하며 자신도 전장의 명예를 원해 고니시에게 전장 참여를 요청했지만 고니시가 거절했다고 한다[14].

6. 전투의 영향

탄금대 전투의 패배와 명장으로 칭송받던 신립의 죽음은 조선 조정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고[15]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에게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까지는 일본군의 진격에도 불구하고 신립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믿음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까지 절망적이지는 않았으나 제승방략으로 대표되는 당시 방위 체제의 근본적인 허점이 제대로 찔린 결과 중차대한 전투가 패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공포에 휩싸인 선조는 명나라로 망명할 뜻을 밝히고 조정은 그런 선조를 말리기는 하나 한양을 포기하고 의주까지 몽진한다.

그 외에도 해당 전투에서 패한 소식이 점차 알려지고 뒤이어 조정에서도 파천의 뜻이 기정 사실화 되면서 그로 인한 혼란과 공포의 여파로 인해 한양 뿐 아니라 지방에 상주하고 있던 관료들, 장수들 까지도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

7. 왜 탄금대인가?

신립이 왜 방어에 유리한 문경새재를 버리고, 탄금대를 결전지로 선택했는지는 임진왜란 이후로 끊임없이 제기되던 떡밥이다. 신립이 직접 말한 것을 포함해서 논란이 다분하며, 옹호론과 반박론이 서로 치고받고 있는 상황이다.

7.1. 기병 활용설

신립이 직접 한 말이고, 현재까지 알려진 신립이 탄금대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립이 전장으로 선택한 탄금대는 논과 밭 등의 장애물이 많아서 기병의 기동력을 활용하는 데 제약이 많은 곳이었다.이 말대로라면 신립은 탄금대를 전장으로 택하면서도 주변 지형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신립은 도성에서 모아서 내려간 기병 중심의 8000 병력을 핵심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때문에 기병 활용에 제약이 있는 산지(조령)보다는 기병을 활용할 공간이 나오는 벌판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신립은 후방의 가토 병력도 놓치면 안되기에 전면의 고니시 병력을 서둘러 격파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 주축인 기병술을 활용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적들을 서둘러 제압하라는 조선 정부로부터의 압박도 이런 결정에 한 몫을 했다. 제대로 운용되는 기병술은 몇 시간 만에 동수 이상의 보병진을 격파하는게 가능하다. 이는 시간적인 여유에 쫓기는 신립의 선택에 어느 정도 타당성을 보태기는 한다.

하지만 조선의 기병은 궁기병이 주력을 차지했다. 물론 그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가진 세계최강의 몽골제국의 경우는 산지에서 궁기병으로 후퇴 매복 전술을 활용하며 적의 보병과 보급 부대를 학살하기도 하였다[16][17]
하지만 충격력이 강한 중기병과 달리 궁기병은 범용성은 높지만 평지에서의 돌격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조선 전기에는 중기병과 궁기병의 비율이 1:1까지도 갔었지만 세조 때를 기점으로 궁술이 다른 무예보다 훨씬 강조되고 유지가 까다로운 중기병[18]이 감소하여 조선군 기병 전체의 충격력이 약화됐다. 또한 조선은 개국 이래로 여진이나 왜구 토벌에 힘썼을 뿐 타 국가와 사단급 이상의 전투를 한 적이 없었기에, 실전에서의 운용이나 훈련 내용을 보면 중기병 역시 여진족과의 비정규전에서 1대1로 싸우는 상황만을 상정한 것으로 보이며, 정규전에서 기병 돌격으로 보병 대열을 무너뜨리는 개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그나마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던 니탕개의 난을 통해 조선이 선택한 것은 기병 돌격이 아닌 승자총통을 활용한 화력전이었다.

또한 보병이 궁기병을 격파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할 수만 있다면) 물가 등으로 몰아서 기동할 공간을 빼앗는 것이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대제가 궁기병 중심의 마자르족을 격파할 때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사요 강 전투가 이것과 유사하게 진행되었다. 천하의 몽골군도 배수진을 친 상태에서 헝가리 군과 교전한 결과, 몽골군 특유의 기동전이 봉쇄되어 하마터면 패배할 뻔 했다. 흔히 몽골군의 유럽 원정이 낙승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요 강 전투는 몽골군의 전열이 분쇄될 뻔 하여 바투가 직접 친위대를 이끌고 돌격해야 했고 바투의 참모진과 친위대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그래도 결국 수부타이가 별동대로 도강에 성공하여 헝가리 군의 배후를 찌르면서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다. 따라서 궁기병을 데리고 배수진을 친 것은 스스로의 공간을 없앤 치명적인 패착이라고 할 만하다. 맘루크와의 전투에서도 몽골군은 육박전을 강요받아 패배했으며 경장 궁기병으로 백병전을 벌이는 일은 권장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만일, 신립이 궁기병을 제대로 활용했더라면 적어도 정부의 의도대로 왜군의 전진을 막을 수는 있었다. 궁기병들을 이용해 야간에 적의 본진을 기습할 수도 있었고, 수송로를 공격해 적을 괴롭힐 수도 있었으며 지원군이 오는 경로를 탐색하거나 오는 것조차 방해할 수 있었다. 또한, 굳이 말을 타지 않아도 화살은 쏠 줄 아니 하다못해 궁기병을 보병으로 전환시킨 후 충주성에서 농성을 했으면 고니시라도 고전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고 굳이 평지에서 싸우면서 궁기병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으면 궁기병과 보병들을 따로 배치하여, 보병들을 이용해 적의 시선을 돌려 궁기병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해야 했었다.

종합하자면, 이 주장은 맨 아래의 신립 자질 부족설과 연계된다. 군사적 역량이 매우 떨어지는 인물이어서 그저 용맹히 싸워 이기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정면 대결을 택했다는 것이다.

사실 궁기병의 화살 발사 사거리는 보병이 땅 위에서 쏘는것보다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사거리가 짧다는 조총도 사실은 유효사거리는 궁시와 비등 했고, 조선의 각종 교리를 보면 되려 조총의 사거리를 더 높게 쳤는데, 궁기병의 마상 사격의 사거리는 그 보다 짧을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감안할때 신립이 설사 몽골군이나 기타 마상 궁술로 이름을 날렸던 유목민족의 궁기병처럼 능숙하게 병력을 운용했다 하더라도 조총의 사거리 안에서 사격전을 벌여야 했는데, 상대가 냉병기로만 무장한 병력이면 지금까지 유목민족이 그래왔듯 전술에 따라 능숙하게 상대가 가능할 수 도 있었으나 문제는 사거리 안에서는 압도적인 제압 능력을 가진 조총이 상대였다는 것이다. 비록 18세기의 전열보병 시대의 일이긴 하지만, 머스킷을 든 전열보병에게 달려든 몽골 기병의 직계후손인 중앙아시아 유목민 궁기병들도 이런식으로 쓸려나갔다. 러시아 제국의 확장과정에서 그러했고, 나폴레옹프랑스 제국 근위대 또한 몽골의 후손이라 할 수있는 바시키르 기병을 상대로 별다른 희생도 내지 않은채 물리치기도 했다. 비록 중세적인 광경에 마치 반자이 돌격을 보는 미군 마냥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피해는 별로 없었으며 '동방의 큐피드','등에 때','세상에서 가장 위험하지 않은 군대'라는 조롱을 하기도 했다. #

7.2. 배수진 활용설

이것도 신립이 직접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발언도 논란의 여지가 다분한 게, 훈련도가 낮은 병사들은 엄폐물이 없는 곳에서 적병과 마주칠 경우의 공포감에 더 쉽게 무너지며 오히려 산악 지형과 같이 지형의 이점이 있는 곳에서 상대적으로 더 잘 싸울 수 있고, 장거리 투사 무기에 우위를 가지는 조선군이 백병전에 강점을 가지는 왜군에 대응하기 좋은 지형은 평야가 아닌 산악 지형임이 당연하고 실제 전훈도 그렇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에서 권율과 황진, 정담 등이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저지한 웅치 전투, 이치 전투에선 숫적으로 압도적인 열세였던 조선군이 고갯길을 활용해 적을 저지해냈다. 물론 낮은 숙련도와 사기 문제는 남아있어 권율이 총지휘관 신분에 직접 선두에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도망치거나 전투를 회피하는 병사들의 목을 치며 엄청나게 고생했다. 그러나 같은 병사들이 용인 전투에서 보인 모습과 비교하면 상대적인 우위는 분명하다. 즉, 훈련도가 낮으니까 불리한 진영인 배수진에 몰아넣어서 정신력을 끌어내는 게 아니라, 보다 유리한 지형에서 싸워서 낮은 훈련도를 보충하는 게 올바른 병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립은 조정의 허락을 받아 저자에서 강제 징병을 하고 원래는 체찰사 류성룡이 끌고 가기로 되어있던 군대까지 넘겨받는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해 서울에서 8천(수정 실록) ~ 1만(정만록)가량 모아 남하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도성의 무사' , 즉 왕실의 친위대인 갑사까지 이 부대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즉, 적보다 수도 적었고 지역 농민이 구성원이었던 권율보다 군대의 질이 낮았다고 단언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는 엄폐물이 있는 곳이 더 유리하다." 는 전술적인 상식이 "그러므로 신립이 병사들의 사기 때문에 탄금대를 택한 것은 아니다." 라는 주장으로 직결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분명 그런 상식이 옳기는 한데, 신립이 그걸 알고 있었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신립은 그런 상식을 모르는 채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답시고 탄금대를 택했으며 그것은 약속된 패배의 길이 되고 말았다" 는 주장 역시 논리적으로 이상한 것은 없으며, 이럴 경우 이 주장은 하단의 '자질 부족설'을 뒷받침하는 것도 가능해지게 된다.

실제 배수진의 정석적인 운용은 다소 질이 낮은 보병으로 배수진을 쳐 적의 주력을 유인, 버티는 사이에 기동력을 갖춘 별동대로 적의 종심을 타격하는 데 있다. 한신이 배수진을 사용한 정형 전투가 바로 그 예이다. 즉 신립이 배수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탄금대 전투에서 기병은 저 위치가 아니라 충주성 등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측후면을 후려패며 등장해야 했지만 신립은 전투 내내 보병대 활용이 거의 없었고 그냥 기병으로 닥돌만 시전했을 뿐이다[19]. 전쟁터에서 그 정도로 구른 양반이 병서 조금만 읽어도 나오는 그 정도 상식도 몰랐다면, 분명 자질이 좋은 장수였다고 하기에는 힘들다. 특히 조선 시대에 장수로 밥 벌어먹으려면 병서 깨나 파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심각한 문제.

7.3. 불가피설

말 그대로 탄금대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주장이지만,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신빙성이 없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것은 26일, 일본군이 조령을 통과해 탄금대에 돌입한 것은 28일로 이틀 정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탄금대 전투의 시간대가 조선 측 기록에서 조금씩 다르긴 하나 전투를 직접 지켜본 신흠의 상촌집과 일본 측 기록을 교차검증하면 왜군의 조령 돌파와 탄금대 전투는 모두 28일에 일어났다. 조선군은 이날 아침 조령을 통과하는 일본군의 무기가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를 파악한 다음 탄금대에 진을 쳤다고 한다. 일본 측의 기록을 따르면 새벽에 출발해서 오전에 조령을 통과, 오후에 탄금대로 돌입한다.

여기에 경상 좌방어사 변기가 신립이 오기 전에 조령에 배치되어 방어 준비를 하다가 신립의 명에 따라 철수했음을 생각하면 조령을 방어할 시간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 측 기록을 따라가면 이일과 김여물같은 휘하 장수들이 조령에 진을 치자는 건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립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앞서 언급된 병력의 저질화와 관련된다는 견해도 있다. 낮은 훈련도로는 조령에 진을 친다 하더라고 제때에 맞춰서 고속으로 진격하는 적을 상대할 정도의 준비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신립은 기병으로 밀어붙이면 된다고 했을 뿐 신립 본인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병력이 준비할 틈이 없었다해도 미리 전개되어있던 변기의 병력을 철수시킬 이유는 없다. 험한 지형에 의지해 조금이라도 적에게 타격을 주거나 진격을 지체시킨다면 조선군에게 실이 될 게 없기 때문이다. 전라도 쪽 병력이 신립에게 합류하기 위해 이동 중에 탄금대 전투가 끝나 돌아갔음을 감안하면 시간을 끈다고 신립에게 불리할 게 없었다.

또한, 적이 아직 오고 있더라면 위에 말한대로 궁기병을 최대한 활용을 했어야했다. 궁기병은 기동력이 빠르기에 일본군이 오고 있는 길을 정확하게 안다면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의 전진속도와 사기까지 저하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 충주성과 탄금대에서 여러가지 방어시설물을 만들면 되는데 신립이 그냥 그 사이 기병의 돌진만 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너무 여유를 부린 것도 한 몫한다. 밑의 자질부족설에도 연관이 되어있다.

7.4. 고립 방지 및 전선 유지설

일본군의 진격로는 조령 한 군데가 아닌 2군인 가토 기요마사의 진격로와 3군인 구로다 나가마사의 진격로가 달랐으며[20], 3도순변사인 신립의 지위는 단순한 야전 사령관이 아닌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전군을 통솔하는 위치였고, 신립의 임무가 수군이고 육군이고 모두 총동원해서 고착 방어가 아닌 섬멸이므로 다른 일본군 부대가 우회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립이 조령에 붙들려 있으면 다른 일본군 부대에 의해 서울까지 그대로 뚫리고 본인도 포위돼서 전멸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21][22]

자질 부족 문제가 아니라면 신립의 행동을 설명하는 그나마 가장 타당한 이유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신립은 기존에 조령에 배치된 병력까지 모두 끌어모아 결전을 시도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신립군은 일본군과 한양 사이에 존재하는 조선의 유일한 야전군이며, 일본군의 급속 진격에 헝클어진 남도 일대의 지상군을 수습할 권한과 역량이 있는 유일한 지휘부이다. 유일한 야전군이란 점이 중요하다. 신립이 어느 한쪽 길에서 방어전을 편다고 해도 다른 길로 한성에 일본군이 들이닥치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단기 결전 시도 자체는 타당성을 지닌다.

전략 전술의 한국사(이상훈 교수 저)에서는 탄금대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고 해석한다. 현재의 탄금대는 퇴적이 많이 진행되어 충주 시내와 육지로 이어져 있지만 식민지 시대에만 해도 충주 시가지와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육계도(모래 둔덕으로 육지와 연결된 섬)였으며, 퇴적이 많이 진행되지 않았을 임란 당시에는 한쪽 길로만 진입이 가능한 지역이었으리라고 추정하였다. 탄금대 자체는 일본군이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지만 충주는 달랐다. 일본군이 한양까지 가기 위해서는 중간 중간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점령해 나아가야 했는데, 충주도 그 주요 도시 중의 하나였다. 충주를 점령하지 않고서는 소백산맥 이북의 진군이 어려워지므로 충주를 점령하지 못하게 견제할 수 있는 요혜지로 의미가 있다는 것.

이상훈 교수의 주장은 "탄금대는 삼면이 강과 호수로 둘러싸여 있어 동쪽의 진입로만 막으면 됐고, 봄철에 서풍이 강하게 불어 조선의 원거리 발사 무기에 유리했"으며, "또 가파른 조령에서는 조선의 주력인 기병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웠고, 왜군에 의해 후방이 차단돼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던 만큼 탄금대가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조선군이 일본군을 격파할 전력을 보유하고 있을 때에나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넘길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나름 정예였고 규모까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며(최대 1만 6천) 기병의 비율이 절반이 넘어가는 조선군의 특성까지 고려하면 고니시 군과 신립 군의 전력은 최소 엇비슷한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애초에 일본군과 싸워본 경험이 없고, 여진을 상대로 치사 전술(궁기병이 돌진하며 활을 쏘는 전술)로 전과를 올려왔던 신립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아군의 전력이 압도적이라고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굳이 신립의 입장이 아닐지라도 일본군이 우월한 전력이었다는 주장은 전투의 결과에서 유추한 결과론적 입장에 가깝다.
일본군이 조총 부대인 걸 몰라서 그랬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일본군 내에서 조총의 비율은 결코 높지 않았고, 제국주의 시대 수준의 병종적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병기적 우위는 결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사실 이 시대 조총은 활보다 훈련 기간이 짧아서 애용되었을 뿐이지 딱히 활에 비해 우월한 점이 있는것도 아니았다. 하나 있다면 갑옷을 활보다 잘 뚫는다는 건데, 조선군이 딱히 서양 기사들처럼 중장갑으로 떡칠한 병력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집단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장점 역시 임진왜란에서는 생각보다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총의 장점은 관통력 뿐이고 조선에선 활과 비교해 별 차이 없는 장점이라는 말은 동북아에서의 갑옷과 조총의 위치를 너무 간과한것으로, 비록 동북아가 서양의 플레이트 아머 수준의 갑옷에는 이르지 못한건 사실이지만 동양의 갑옷도 화살에 대한 충분한 방호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비단 갑옷이 아니다 하더라도 방패나 하다 못해 차일같은 간단한 방어책만 있어도 활의 살상력은 극히 저하되었다. 실록에도 갑옷입은 여진족 상대로 화살이 통하지 않았다거나, 삼포왜란 당시 중무장한 왜구 장수에게 활을 수십발 쏴도 개의치 않아 한다거나, 군기시에서 실험을 했는데 갑옷을 뚫지 못했다거나 갑옷, 심지어 지갑과 같은 경량 갑옷이라도 있으면 활에 대해서 방호력을 지닐수 있다 하는 기록들이 나오며 태조가 아지발도를 저격한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 쌍령 전투 당시 조총대의 사격으로 후퇴했다 다시 전진하는 청군을 보며 혼란에 빠진 조총수들 대신에 화살 수십방을 쐈던 선세강도 나무 방패 하나 때문에 청군을 결국 저지시키지 못했다.
만약 조총수들이 윤방을 할 수 있었다면 나무 방패건 뭐건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활이 경장갑으로 무장한 적을 상대로는 총과 마찬가지로 유효한것이 사실이나, 유효 사거리내에서 총의 관통 능력과 살상력, 그리고 제압능력은 상대가 경장갑이건 중장갑이건 뭐건 활이 비겨 낼것이 아니었으며 조총 전래 이후에 이것만 있으면 항우건 뭐건 한방에 죽인다며 병과 불균형 문제가 터질정도로 조총을 도배하던 '활의나라' 조선은 물론이고 명나라나 청나라까지 주력으로 받아들이며 편제 했던것이 과장된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동북아에서의 전장환경에서 총과 활의 살상력이 도긴개긴으로 나타났다면, 그렇게 열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을것이며 병기의 메인스트림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총이 가지는 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위력에 대한 찬사는 당장 우리 실록을 위시한 기록에 수없이 등장한다.

이일 등 일본군과 교전 경험이 있는 장수들은 신립의 작전이 무모하다고 지적했으나 탄금대 전투 이전에 조선과 일본은 사단 규모 부대의 야전을 치른 적이 없다.

또한, 이쪽이 비교적 합리적인 이유이긴 한데 문제는 정작 신립 자신이 이런 말을 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성립되려면 신립이 왜군 1군, 2군, 3군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한데, 당시 조선의 조정과 장수들이 이러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는지 매우 불확실하다. 조선 측 어느 기록을 봐도 신립이나 다른 장수들이 당장 눈 앞에 있는 고니시 군 이외에는 신경 쓴 흔적이 없다. 신립에게 이 같은 복안이 있다면 반대 주장에 대해서 상기의 이유를 들어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게 마땅하지만 딱히 반박이 없다.

따라서 왜 1군, 2군, 3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면, 애초에 다른 진격 루트의 적에 대한 추가 요격 시도는 명백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신립도 인지했을 수밖에 없다. 조령을 넘어오는 고니시의 1군은 신립 군과 거의 동수지만, 고니시의 바로 뒤에서는 그와 비슷한 규모의 가토 군이 역시 조령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충주에서 상대할 왜군이 조선군보다 우월한 전력이라는 사실은 결과론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립은
  • 1군과 2군을 합쳐 3만 6천에 달하는 적을 자신이 가진 최대 1만 6천의 병력으로 1일 ~ 2일만에 요격해내고
  • 여기서 소모된 병력을 보충, 재편성할 새도 없이 내달려 추풍령을 넘어오는 적을 저지한다

는 몽상 수준의 전략을 구상했다는 소리가 된다. 신립이 상대했던 여진족들, 특히 다수의 경기병으로 공격해왔다가 금방 패퇴한 니탕개의 난 같은 사례를 감안하면 이러한 전략이 몽상은 아니었다고 항변할수도 있겠으나, 애초에 약탈이 목표로 접근전을 회피하는 부족 단위의 여진과 국가 단위로 본격적인 정복 전쟁에 나선 일본군은 병제, 전술, 기타 모든 것이 완전히 달랐다. 특히 왜 3군에 대한 요격까지 염두에 두었다면 신립 군의 목표는 절대로 구축이 될 수 없고 반드시 충주 방면의 적을 격멸시켜야만 하는데, 신립 스스로도 보병 전력에 대해서 크게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도저히 앞뒤가 안 맞는 일이다. 여기에 중기병도 갖추지 못한 신립의 조선군으로 단병 접전에 능한 일본군을 상대로 이런 전략을 짜는 것 자체가 부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경상도 전역에서 수차례 전투가 벌어졌고 신립 군에는 상주에서 일본군과 정면으로 교전해본 이일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의 성향을 파악할 틈이 없었다는 변명은 성립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는 어디까지나 1군, 2군, 3군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을 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신립은 27일에 적이 단월역에 들어와 이일과 목사 이종장이 이끈 척후가 차단당한 상황에서 친한 군관이 어찌어찌 이를 보고하자마자 대뜸 목부터 베어버리고[23] 적이 아직 상주에 있다는 장계를 올려보낼 정도의 막장 행보를 보였다.[24] 전장의 안개 운운하기 전에 제대로 된 전장정보 수집조차 하지 않은, 이른바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이었다.

어쨌든 이렇다고 해도 최선의 방책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결국 구로다 군의 북상 루트도 크게 멀지 않았고 고니시와 가토는 같은 날 공통적으로 조령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조령의 지형은 소수의 병력으로도 방어가 가능하니 적의 우회가 걱정된다면 병력을 분산시켜 다른 길목을 막는 방법도 있었다. 추풍령까진 무리지만 죽령 정도는 충분히 방어군 배치가 가능했고 휘하엔 군사적 식견이 뛰어난 김여물과 왜군과 야전을 벌여본 이일도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리는 있지만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우회론자들이 쉽게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방어측 뿐만 아니라 공격측 역시 전선의 유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조령에서 왜 1, 2군이 막혀있는데 3군만이 홀로 추풍령을 돌파해 유유자적 북상한다면 당연히 측면이 위험해지고 진격속도를 조정할 수밖에 없다. 위의 각주에서 한국전쟁을 사례로 들어 고립방지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반대로 그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도 춘천전투로 중부전선의 진격에 차질이 생기자 쾌조의 진격을 멈추고 하릴없이 한강 건너편만 바라봐야 했으며 UN군 역시 무질서한 북진 끝에 전선 곳곳이 뚫려 청천강 전투1.4 후퇴라는 대참사를 맞이했다. 오히려 신립은 충격력은 약하지만 기동성은 확실한 자신의 기병을 동원하여 적의 우회를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기본적인 정보수집조차 게을리한 결과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없는 병력을 가지고 상대의 병력 규모 및 진격로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이 도박과도 같은 일전 하나에 모든 가능성을 날려먹고 말았다[25].

정리하자면 신립의 전술은 위에 나온 반론에 비하면 정당성이 없었었다. 그만큼 대군을 끌고 왔으면 적의 진군을 보건데 1, 2, 3군을 상대할 거면 적어도 충주성에서 농성해 적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다른 성에 연락해 궁기병과 지원군으로 하여금 적을 충주성에서 토벌하거나 진주성 전투처럼 행동했었다면 더 최고의 전략일텐데도 이 사람의 의도가 거의 자질이 의심될 정도로 고립 방지 및 전선 유지설은 아직 의견이 많다.

7.5. 조령 무용론

위의 전선 유지설과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이론. 역사학자 이희진이 주장하고 있는데, 근거가 부족한데다 소수설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조령에만 길이 있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충주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었다. 특히 죽령이나 계립령(하늘재)는 그리 멀지도 않는 거리에 있었는데 계립령은 비록 고갯길이라고는 하나 삼국 시대부터 내려온 군사적 요충지였다. 태종 때 새재길이 열리며 그 비중이 축소되었다곤 하나 왜군이 모를 리 없는 곳. 게다가 고니시가 위치한 문경새재는 여러 곳으로 통하는 나들목 같은 곳으로 여차하면 이화령 - 괴산으로 충주를 거치지 않고 넘어갈 위험이 있었다. 단순히 조령만 막기에는 조선 측에 큰 위험 부담이 있었다는 것이 조령 무용론의 주장이다. 만약 신립이 조령을 막고 일본군이 조령으로 쳐들어온다고 해도 일본군이 다른 길로 우회해버리면 조령은 포위가 되는 형국이 된다.[26] 방어에는 유리할지 몰라도 여러모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

허나 이와같이 각개 격파나 우회를 염려했다는 주장 자체가 조령, 죽령, 하늘재, 이화령 같은 이곳 고개길들에 대한 정찰이나 답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주장이다. 이 주변 샛길들은 모두 일렬로 행군하지 않으면 통과도 힘든 첩첩산중 외길이며 이틀이나 여유가 있었고 조령을 비롯한 고갯길들은 모두 적은 병력으로 방어가 가능한 만큼 천혜의 요새였다. 신립의 군대는 적게 잡아도 8천이며 많게는 1만 6천까지 추정한다. 추풍령까진 무리라도 거리상 가까운 죽령이나 계립령(하늘재) 등을 포함해 모든 기동로와 우회로에 방어 병력을 배치하고도 남을 숫자였다. 또한 문경 새재를 지나도 충주까진 계속 산길이 이어진다. 그 산길 다 버리고 (원래 있던 변기의 병력까지 빼버리고) 중기병도 아닌 궁기병으로 논과 밭, 그리고 기병이 기동하기 힘든 물가인 탄금대에 진을 쳤다. 기병대를 이끌고 물가에 진을 치고 논과 밭을 끼고 싸웠다는 것 자체가 병법에 문외한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또한 신립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사단급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싸워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병법에 통달한 사람도 아니었고, 이때까지의 전적은 개인의 무력과 소수 궁기병을 이끌고 만들어낸 전적들이었기에 이런 세세한 사항까지 염려했을 리도 없고 그럴 만한 그릇도 되지 않았다. 탄금대에서 일본군이 우회하여 충주성을 점령할 것조차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조령에서 일본군의 우회를 예상했을 리는 더욱더 만무하다. 왜군의 우회 가능성에 그렇게 신경을 쓴 사람이 왜군이 충주성에 근접했다고 보고한 군관을 왜 죽여버렸을까? 또한 일본군의 고니시와 가토는 산길이어서 매복의 위험이 있는 조령을 우회하기는커녕 조령을 통과하여 충주에 도달했다. 신립을 지원하러 오고 있던 전라도 지방병은 신립 군이 너무 빨리 궤멸되는 바람에 합류도 못했다. 조령에서 싸웠다면 예비 병력은 알아서 충원되게 되어 있었다.[27]

하지만 조령을 방어 기지로 삼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는 포위되어도 구원해 줄 예비군[28] 둘째는 충분한 물자였다. 하지만 이 패배로 그런 예비군은 사실상 날아가 버렸고 신립의 입장에선 유일한 야전군인 자신이 혹여 포위라도 되면 더 이상 남아있는 조선군은 없게 되고 한양까지 위급해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또 군대를 나누어 각 길을 막는다 할지라도 물자가 부족한 마당에 쪼개어진 군대가 연속해서 각개격파 될 위험이 있었다. 결국 신립은 포위의 위험성이 있는 조령보다는 포위 섬멸이 가능한 달천 평야를 택했고 이 도박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는 게 이희진의 주장이다.

7.6. 신립의 자질 부족설

대부분 사람들조차도 인정할 정도로 북방에서 화려한 전공을 세우고 조선 최고의 무장으로 우대받은 신립이지만 실상 지휘관으로서 능력은 죽을 때까지 검증된 바 없었다. 일단 명성에 비해 기록도 적고 제승방략조선왕조실록에서 보여지는 신립의 전공은 철저히 신립 개인의 무예와 용맹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그의 지휘 능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은 없다. 신립의 무명을 있게 한 1583년 니탕개의 난 토벌 기록조차 그렇다.

1583년 초 안원보 전투에선 도망병 1명을 참수하고 혼란에 빠진 군사들을 재정비하긴 했으나 여진족의 약탈 자체를 막진 못했다. 이해 봄에 벌어진 경원진 전투에선 백마를 탄 적장을 한 방에 사살해 적을 물러가게 했으나 그외에는 죽을 힘을 대해 싸웠다는 대목 뿐이다. 신립이 가장 빛났던 전투는 역시 봄에 벌어진 훈융진 전투인데 여진 기병 1만에게 포위된 아군을 구하기 위해 적진에 뛰어들어 추장 1명을 사살하고 후퇴하는 여진족을 추적해 70명을 사살했다. 문제는 기록상 신립이 천하의 명궁에 기마술이 대단했다는 건 알 수 있어도 전술적인 능력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여름에 치뤄진 종성진 전투에선 여진 기병 주력이 이미 철수한 상황에서 구원병으로 도착해 적 2명을 참수한 게 전부다.

탄금대 전투에서도 강물에 뛰어들기 전까지 김여물과 함께 적 수십 명을 쳐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정말 싸움은 엄청 잘했던 거 같지만 전략 전술적 역량은 전혀 검증된 바 없다. 전근대 동양 전쟁 기록이 동시기 서양에 비해 축약이 심해 '몇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어디를 쳐서 크게 승리했다' 식의 기록이 전부라 기록만으로 신립의 역량을 알 수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신립은 예외다. 이일이 정리한 제승방략에서 신립의 대여진 전투를 전훈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경도 북방의 진보와 주둔 병력, 편제, 지형지물들을 모두 상세히 적은 이 책은 후대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를 비롯한 전투 수십개를 당시 동양 기준으로 상당히 상세히 기록했다.[29] 오늘날 우리가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에 대해서 한눈에 알 수 있는 것도 이 기록 덕분인데 그건 참조하면서 신립의 기록은 간략해서 믿을 수 없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신립은 이일이 상세하게 남겨준 덕분에 사료유실이 극심했던 임진왜란기 지휘관중에 난중일기, 임진장초, 장계별책이 남아 있는 이순신 다음으로 기록이 풍부한 지휘관이다. 신립의 전술이나 성향을 살피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패전하고 죽은 지휘관은 아군이 전멸해 기록이 제대로 남지 못한 경우도 많은데 신립은 마지막 전투인 탄금대 전투 기록도 상당히 풍부하다. 고니시가 세키가하라에서 몰락해 그의 가문에 남아있던 임진왜란 참전기록이 유실되는 와중에도 일본측 기록인 서정일기가 남았고 전투 참전자로 조선군이 무너지는건 직접 보았을 신흠이 빠져나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기록에서 신립은 일신의 용맹 외의 전술적 역량을 보여준 바 없다.

니탕개의 난 때 준동한 여진족은 규모는 상당했지만 어디까지나 약탈을 위해 움직였다. 최대 1만 ~ 2만 정도로 뭉쳐 소규모로 분산 배치된 조선군의 방어 진지를 공격해 무너뜨리고 약탈을 자행한 후 돌아갔다. 약탈을 하지 못해도 조선군 지원 병력이 도착하거나 조선군의 저항이 완강하면 큰 고민없이 물러났다. 즉, 내부 통일을 이뤄 국가 단위로 성장한 누르하치 시절과 비교하면 수준이 현격히 낮았다.

무예 이외의 다른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는 기록도 없는데 성격은 또 굉장히 거칠고 오만했다. 신립이 난폭하고 아랫사람을 함부로 다룬 것은 징비록, 상촌집, 기재사초, 난중잡록, 계갑일록 등 여러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선조 수정 실록에선 탄금대 전투를 앞두고 왜군이 조령을 넘었다고 보고한 군관을 미친 소리 한다며 죽여버렸다는 기록도 나온다. 정식 보고 절차도 없이 동네방네 왜군이 온다 퍼뜨리던 농민을 하루 기다려 처형한 이일은 어쨌든 그 농민이 장담한 하루의 시간 동안은 기다려 주었고 당시 이일 군이 처한 열악한 상황과 엄격한 전근대 군법을 감안하면 있을 법한 일이지만 신립에게 죽은 군관은 정식으로 보고 절차를 거쳤음이 분명하기에 어떻게 변호할 여지가 없다. 또한 그는 왜군을 대놓고 얕잡아 보았고 군 경력으로 선배이자 상주에서 왜군의 전술과 규모를 파악했던 이일의 조언을 대놓고 무시했다. 이일이 북도 제승방략을 정리한 인물이자 신립처럼 여진 기병과의 전투에서 무명을 쌓은 인물이란 점을 고려하면 그의 말은 결코 무시해도 되는 게 아니었다.

이일은 북도 제승방략을 체계화하며 군사 이론가로서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고 왜란 당시에도 왜군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었거나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적을 맞았다. 이에 반해 신립은 할 수 있는 최대의 지원을 받아 병력도 비교적 충실했고 조령이란 험지를 방어 거점으로 활용할 시간이 이틀이나 주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일에게서 왜군의 전투 방식에 대한 정보까진 전해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모든 이점을 무시했다. 험준한 조령을 포기하고 기병을 운용하기 힘든 탄금대를 회전 장소로 골랐고 이일과 김여물의 조언도 무시했다. 전투 직전 왜군의 동향에 대해 보고한 장교를 보고 내용이 마음에 안 든다고 죽여버린 데서 알 수 있듯 신립은 용맹하긴 하나 이성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군대가 한양과 왜군 사이의 유일한 야전군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이 얼마나 신중치 못한 행동이었는지는 말 할 필요도 없다.

종합해보면 신립은 일신의 무예 외에 제대로 된 지휘 능력을 보여줬다는 기록은 신립을 호의적으로 적은 사료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으며 인격 면에선 안하무인에, 부하들에겐 막되먹은 상관이었다. 여기에 왕의 사돈 (당시까지 계승이 유력하던 신성군의 장인)이 된 데다가 상방검까지 받자 눈에 보이는 게 없어졌다고 하면 왜군을 깔보고 탄금대를 선택한 이유와도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조선 시대 내내 지속된 신립에 대한 비판은 실전을 모르는 유생들의 입놀림이 아니었다. 당시는 철도, 고속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남과 서울을 오갈 때 자연스럽게 조령의 험준한 고갯길을 직접 체험해야 했다. 이 험한 고갯길을 넘어가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탄금대보다 조령 고갯길이 방어하기 훨씬 좋은 지형이라는 건 몸으로도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다. 위에서 충주가 요충지라 했는데 신립은 충주성조차 버렸다.[30] 반면 이보다 3개월여 뒤에 벌어진 이치 전투에서는 험한 지형요건을 활용하여 연대급도 안 되는 병력으로 사단급 병력의 침공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으니 어느쪽이 더 가치있는 행위인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신립이 탄금대에 진을 친 것을 다른 쪽으로 해석한다면 탄금대 자체를 선택한 이유는 당연히 기병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의미를 가지며 또한 적이 한양으로 도달하는 시간을 늦추기만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애시당초 신립이 탄금대 전투를 앞두고 의기양양해 일본군의 전력 자체를 무시 내지 충분히 야전에서 돌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가정한다면 전라도 방면의 근왕군 또한 생각의 범위 내에 있었을 것이고, 탄금대에서의 전투를 어떻게든 승리로 이끌고 나서 전라도 근왕군과 합세한 이후를 상정한 작전이었을 가능성도 매우 적으나 있을 수 있다. 즉 신립이 탄금대 전투를 어떻게든 이기고 나서 전라도 근왕군과 합세 이후 도달하는 일본군[31]을 상대하거나 하는 전략을 세운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첫째로 전라도 근왕군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으며, 둘째로 자신이 직접 거느린 보병마저도 아무 기대없이 활용을 포기하고 기병에만 의지해버린 위인이 전라군의 북상을 알았다고 한들 유의미한 전력으로 계산을 했을지도 의문이다.

조경남이 전쟁 중 자신이 접한 모든 기록과 증언을 모아 저술한 난중잡록과 이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수정 실록에는 신립이 이일의 패배 소식에 "적의 기세가 강하니 후퇴해 한양에서 지키도록 하소서."라는 장계를 올렸다는 기사가 있는데 탄금대 전투 생존자인 신흠의 상촌집을 비롯해 거의 모든 조선 측 사료에서 신립은 전투 의지 만만에 적을 얕보고 있기에 신빙성이 부족하다. 해당 기록이 실린 난중잡록에서조차 탄금대 전투 직전의 신립 묘사는 왜군의 기세가 강하다며 경계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이 기사를 믿는다면 신립은 기세 좋게 자원해서 대군을 이끌고 왔다가 알아서 꼬리를 내렸으며 적의 기세가 강함을 알고도 적은 수로 적을 막을 수 있는 조령을 포기한 채 제대로 된 농성전이 불가능한 한양에 방어진을 치자고 제안한 엄청나게 무능한 인간이 된다.[32]
당시 외방의 군사는 모이지 않고 도성에는 전후하여 대부분의 장정들이 거의 징발되었으므로 도원수(김명원(金命元)을 말한다) 역시 군사가 없었다. 상주에서 (이일이) 패배한 보고가 이르고 신립(申砬) 또한 비밀히 아뢰기를 ‘적의 기세가 매우 드세니 도성으로 후퇴하여 지키도록 하소서.’ 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수정 실록 25년 4월 14일(계묘) 10번째 기사. 기사

결국에는 신립의 자질 부족설이 거의 타당할 정도이며 무관인데도 병법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것이 의심이 갈 정도로 학계에서도 여러가지 논란이 많을 정도다.

위에 나와있는 기병활용설, 배수진설, 불가피설과 신립이 세운 진을 보면 정상적으로 군인으로서 신분을 가진 사람들조차 납득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충주성은 천혜의 요새이자 정부에서 많이 지원해준 병력, 거기다 궁기병들과 각종 화포 등까지 고려한다면 충분히 적을 저지할 수 있었다. 보병을 성안으로 들여보내거나 전면전으로 적의 시선을 끄는 사이에 궁기병으로 적의 측후면을 노리고, 그 사이에 지원군을 기다리거나 혹은 적이 오기도 전에 궁기병으로 게릴라전으로 펼쳐서 적을 먼저 지치게 만든 뒤에 적을 맞이했더라면 전면전으로도 이길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학계에서나 일반 역사덕후들 사이에서도 정황상 신립의 자질부족설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진다.오죽하면 명나라 이여송도 비판했을 정도이니(...)

8. 여담

  •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고위 장수 1명이 생포되었는데 스스로 죽기를 원하여 죽게 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일은 달아났고 신립과 김여물은 투신했으므로 이종장이나 이희립일 가능성이 높다. 의외로 김여물일 가능성도 있다. 회본태합기에서는 김여물이 피칠갑을 하고 도끼를 휘두르면서 "김여물이 여기 있다!"라고 외치면서 왜군 8명, 9명을 베고 말에서 끌어내려져 참수되었다고 한다. 김여물이 투신했다는 조선과는 기록이 상충되는 내용이다.
  • 이형석 장군의 《임진전란사》에서는 신립이 기병 돌격을 세 차례 하여 여러 번 일본군을 물리쳤다고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는 불확실하다. 단지 여러 차례 돌격을 시도하다가 번번이 실패했다는 점만이 여러 1차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참조할 만한 글.
  • 신립의 행동이 너무나 이해가 안 된 탓에 조선시대에는 '신립귀신에 홀렸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임진록의 어떤 판본에서는 신립이 이전에 죽인 자의 원혼이 양민으로 가장하여 신립에게 거짓 정보를 고한 탓에 탄금대를 결전장으로 택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온다. 또 어느 야담(野談)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한다. 신립을 사모하던 처녀가 집에 불을 지르고 분신 자살한 후 원혼이 되어 따라다니는 것을, 장인인 권율이 유리병에 봉인해 호신부(護身符)로 지니고 다니라고 주었다. 그러나 결전 직전의 작전 회의 중 이 유리병의 마개가 뽑히며 "탄금대로, 탄금대로." 하고 원혼의 목소리가 울렸는데, 신립이 이를 하늘의 뜻으로 오해하여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쳐 장렬히 전사했다는 이야기다. (이우혁왜란종결자도 이 쪽이다). 조령을 지키는 관문인 문경새재가 있는 경상북도 문경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토착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임진왜란 종전 이후 나온 소설 달천몽유록에선 많은 군졸을 개죽음시킨 졸장 신립을 명장이랍시고 기린다며 귀신들이 한탄하는 묘사까지 나올 정도였다. 조선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립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증거라 하겠다.
  • 2015년에 드라마 징비록이 방영된 영향인지 탄금대 전투에 시비를 거는 국까들이 많아지고 징비록 갤에서도 난리를 폈다. 심지어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탄금대 전투 문서가 반달당하기까지 했다. 링크나 정황으로 봐서 반달의 장본인은 책사풍후임이 확실시되고 있다. 탄금대 전투에 가열차게 시비를 거는 역갤러라면 특히 책사풍후가 두드러지기 때문. 탄금대 전투의 패배가 뼈아프긴 하지만 8천이 맞건 1만 6천이 맞건 비록 정예 기병부대이긴 했어도 여러 정황상 조선 측이 불리했던 전쟁은 맞다고 봐야 한다. 조선군 수를 8만(;;;)으로 뻥튀기하는 주장은 순 헛소리니 믿지 말자.
  • 정유재란 당시에 일어난 직산 전투와는 적잖은 공통점이 있는 전투로, 당시 임진, 정유란 초기 단계에 각각 부산진 전투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 (임진왜란), 남원성 전투 (정유재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압도적인 기세로 북상하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적 목표를 가진 전투라는 점, 평야 지대에서 (아군이) 다수의 기병대를 운용하여 벌인 일대 회전이라는 점 등이 같다 하겠다. 차이점이라면 아군으로서 전투의 주체가 각각 신립의 조선군과 해생의 명나라 군대라는 점과 무엇보다 신립은 왜군의 북상 저지라는 목적 달성에 실패하였고, 해생은 성공했다는 점이다.

9. 대중 매체

전쟁 초, 조선군 최정예 부대의 괴멸과 함께 보병과 기병, 조총과 활이라는 세기의 대결답게 중요하게 다룬다.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는 12화에 나온다. 신립이 원래 조령을 방어하려고 했는데 탈영병이 많아서 달아날 곳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어쩔수없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는 설정을 사용했다. 소 요시토시가 부상입은 포로들을 풀어주어서 포로들이 퍼뜨린 소문이 공포로 변하며 신립 수하의 병사들이 대거 탈영하고 그래서 어쩔수 없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직접적인 전투장면은 안 나오고 현소가 궤멸된 조선군의 시체를 보며 불경을 읊조리는 장면만 나오고, 홀로 남은 신립(김영인 분)은 절벽끝에서 오열하면서 배에 스스로 칼을 꽂은채 비장하게 자결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9.1.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

출정식부터 신립의 투구가 땅에 떨어지는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는 징비록의 기록이 소개된다.

이동 중에는 제승방략 체제의 문제 등으로 하루에 100여명씩 도망병이 발생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나레이터 겸 사회자인 신승수 감독이 한 조선군 보조 출연자를 붙잡고 '수염은 왜 이따위로 붙였어?' 등으로 갈구자 보조 출연자가 '나 안 할래요!' 하고 툴툴거리며 가버리는 제4의 벽 묘사가 포인트.

결국 신립은 조령을 포기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기병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전투 당일, 하필이면 기병에게 불리한 비가 내렸다. 왜군은 오다 노부나가가 개발한 3단 철포 사격 방식을 이 전투에서 채용해 말 그대로 기병들을 도륙했다. 기존의 사극에서 조총을 마치 현대의 소총 사격하듯 막 사격하는 방식이 아니라 탄약을 장전하고 심지를 꽂은 후 불을 붙이는, 사극에서는 추노 정도에서야 보여준 정식으로 조총 사격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내용은 왜군들이 조선 기병을 사냥하는 것이라서 그런지 낙마하는 기병 장수들만 주구장창 나온다.

이 컷의 엔딩은 신립을 포함한 조선 기병들의 시체가 금강에 둥둥 떠 있는 장면인데 이 때 조선 기병들이 흘린 피로 탄금대 강물의 색깔이 갈색에 가까운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 이제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이 전사했다. 이제 우리의 앞을 막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 자 북쪽으로 진격하자. 북진!"이라고 외치며 행군을 시작한다. 그리고 선조는 신립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망친다.

9.2. 불멸의 이순신

소 요시토시 : (조령이 텅 비었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듣고) "다시 가서 제대로 살펴! 그같은 천혜의 요새를 버릴 바보 멍청이가 어디 있단 말이냐?"
(장면이 바뀌자마자)
신립 : "조령은, 버린다."
탄금대 전투는 57화 중반부터 다루어진다. 김여물을 포함하여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마군이 보병보다 더 큰 우위에 있음을 상기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전투를 치를 것을 결정하고 이를 반대하는 부하 장수에게 명령 불복종으로 곤장형을 내린다. 그래도 밤새 혼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곤장맞은 그 부하 장수에게 와서 병사의 절반이 오합지졸이란 점과 함께 배수의 진을 치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승리가 아니면 죽음만이 있을뿐이야.”라고 신립이 언급하는데 최후에 대한 복선이었다.

신립이 조령을 버렸다는 소식에 고니시는 이제 한양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좋아하고 신립군과 대치한다.

돌격하는 일본군 선봉대를 활로 무찌른 후 100보 앞까지만 진격하란 명을 받고 돌격하는 두 번째 일본군 부대를 향해 기병대가 나선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기병을 끌어내기 위한 유인책이었다.

기병들은 곧 늪을 만났고 말들이 늪에 빠지면서 기병은 조총의 표적이 되어 허무하게 리타이어. 이를 본 신립은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돌격하나 이들 역시 조총 사격으로 괴멸당한다. 이어진 일본군의 총 공격으로 나머지 조선군도 이내 무너진다.

신립은 생포하려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강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으로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며, 신립을 생포하라고 명을 내린 고니시가 소 요시토시에게 "조선의 명장을 사무라이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라는 대사를 내밷는다. 마지막 신립의 최후와 피로 물든 전장을 보여주는 장면은 비장한 느낌을 주는 ost와 더불어 연출적으로도 굉장히 비장미가 넘치게 다루어졌다.

9.3. 징비록(드라마)


드라마에 대한 평가를 크게 후퇴시킨 최악의 묘사 중 하나. 괜찮은 퀄리티를 유지하며 시청자들의 기대를 받고 있던 징비록은 탄금대 전투 씬을 기점으로 이전의 평가를 회복하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무능한 주제에 이름만 높은 졸장 취급받던 신립을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재해석해보고자 이런저런 시도를 했지만, 결국 그 재해석이 실제 역사의 영역까지 건드려 역사왜곡을 일으킨데다 연출의 부실함까지 겹쳐 폭망해버린 케이스다.

징비록(드라마)에서 14화의 말미와 15화에 걸쳐 다룬다. 14화 말미에서 상주에서 패한 이일은 신립에 합류하며 조령에서 충주로 진을 옮긴 이유를 묻는다. 이에 신립은 처음엔 조령에서 진을 쳤으나 상주의 패전 소식을 접하고 충주로 진을 옮겼다고 한다.

이런 결정에 대해서 이일이 조총의 위력을 말했지만 신립은 활이 가지고 있는 사거리의 우위와 조총의 장전 시간을 지적하며 승산이 충분하다고 반박한다. 이에 이일은 장전 시간을 상회하는 일본군의 전술 운용을 언급하면서 조령으로 다시 진을 옮기자고 권유한다. 이에 신립의 부장인 김여물도 이일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신립은 거기에 추가적으로 남하하면서 모은 지방군의 열악한 훈련 상태, 다시 조령으로 진군할 시의 시간적 문제, 적이 조령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 한양으로 반드시 거치는 길목인 탄금대에서의 야전 결전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가히 설명충 스피드왜건의 수준이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군과 일본군은 탄금대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이에 맞서는 고니시는 이제야 제대로 된 전투를 한다며 좋아하면서 병력을 나눠 중앙과 좌우에서 협공을 하기로 한다. 한편, 신립은 이를 예상하며 말의 간격을 최대한 벌려 조총 사격으로 날라오는 총탄을 최대한 피하며 전진한 뒤 조총의 유효 사거리 밖에서 화살을 쏘아 적의 전열을 더욱 분산시켜 공격을 한다는 계획과 함께 일본군의 기세를 꺾고 조선 전체의 사기 향상을 위해 한 바탕 결전이 필요하다며 탄금대를 전장으로 정한 이유를 추가로 말하고 패전을 할지라도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 한강 방어선 정비의 시간을 벌 수 있다고 한다.[33] 마침내 전투가 시작되고 고니시 군이 돌격하기 시작하자 기병들과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고니시 군을 향해 돌격한다. 그러나 측면에 대기하던 요시토시 군의 조총 사격이 시작되었고...

그 다음 장면은 조선군이 전멸하고 신립과 김여물만 남아 강변 절벽으로 몰린 장면이다. 뜬금 전멸. 수십 명의 일본군들을 베어버리던 신립은 자신을 지켜보는 고니시를 향해 정정당당하게 장수들끼리 싸우자고 하지만 고니시는 아무 말 없이 비웃기만 하며 조총대에 사격을 명한다. 결국 신립과 김여물은 조총이 발사되기 직전 절벽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평가를 하자면 불멸의 이순신 이후 10년 만에 임진왜란을 다룬다는 대하 드라마로서의 이름값이 아까운 총체적 난국 묘사 열심히 연기했을 배우들만 고생이다. 다소 불안하긴 했지만 일정 수준을 이어가던 드라마의 평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결정적인 장면으로 임진왜란의 전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전투인데도, 퀄리티나 고증이나 모두 엉망이다.

징비록에서의 전투 묘사는 불멸의 이순신에 비해 매우 빈약하였다. 들판에 모인 양측 병사들의 규모는 잘 묘사되었는데, 비장한 돌격을 시작하며 다음 장면이 곧바로 전멸 장면이니(…). 사실 2회 앞서 묘사된 부산진 전투의 연출[34]이 매우 훌륭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탄금대 전투에 시청자들이 거는 기대가 은근히 컸기에 실망감이 더 커진 면도 있다. 물론 <불멸의 이순신>에 비해 반의 반도 안 되는 예산(110여 억 원)이 제일 큰 한계였지만[35],각 전투별 퀄리티 배분을 못 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실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역사 왜곡 문제에 있다. 전투 직후의 전장을 비추면서, 나레이션을 통해 탄금대 전투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고니시 군의 절반이 죽거나 다쳤다는 설명을 넣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고니시("이기긴 했으나 손실이 너무 컸어.")와 가토(고니시 군의 손실을 비웃는다)의 대사를 통해 이를 확인해 주기까지 한다. 무비판적으로 시청할 경우 낚이기 쉬운 연출이다.

나레이션을 통해 고니시의 군이 탄금대 전투를 통해 많은 손실이 있었기에 한양까지 진군한 후 주저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고대 ~ 현대를 막론하고 부대원의 30% 이상이 사상자가 되어 버리면 그 부대는 전멸이다.[36] 하물며 나레이션대로 사상자가 태반에 이르렀다면 고니시 군은 충주에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고니시와 가토의 한양 쟁탈 속도전 같은 정치적 배경 이전에, 물리적으로 더 이상의 진군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의 고니시 군은 탄금대 전투 직후 쾌속 진군을 개시하였고, 이는 탄금대 전투에서의 손실이 경미하거나 거의 없었음을 의미한다. 참고로 고니시 군의 병력이 처음의 절반 이하인 8000여 명으로 줄어드는 건 그 다음 해인 1593년, 조명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에서 쫓겨 난 후의 이야기이다.

또한 신립이 적의 병력이 우리보다 더 우세하니 병력을 나눌 것이고 그게 우리한테 유리할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실제 역사상의 전투에서는 적이 병력을 나눈 것을 몰랐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신립이 대패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적 본대를 상대하던 중 갑툭튀한 일본 좌우군의 조총 연사다. 징비록의 신립은 적이 철포를 가지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고 적의 본대가 나뉘었을 거라고 돌아가는 모든 전황을 상세히 다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발리는 격. 또한 탄금대에서 네 차례에 걸쳐 일본군의 돌격을 모두 격퇴했다는 내용도 실제 기록상으로는 없다.

무엇보다 압권은 이 작품의 제목이 자그마치 징비록이라는 것. 신립에 대해서 일관적으로 부정적이었던 류성룡의 시각과 기록과는 전혀 다른 탄금대 전투를 창조해버렸다. 차라리 그대로 불멸의 이순신 묘사를 복붙했다면 최근의 시각을 반영하진 않았어도 적어도 징비록의 취지에는 확연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14화의 막바지에 고니시의 일본군 제 1군과 신립의 조선군이 대치하는 장면에서 징비록의 오프닝 ost가 거의 풀버전으로 나온다.

10. 전설

곤지암과 관련된 곤지암의 회자되는 전설로는 나중에 살아남은 병사들이 물에서 신립을 건져내자 신립의 두 눈은 부릅뜬 상태에다가, 두 주먹을 꽉 쥐고 호령할듯한 기세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성심이 죽어서도 나타난 것이다. 나중에 신립을 장사를 지내게 되자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에 묻혔는데, 이곳에 묘가 생기자 말이 못 움직여서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야만 했다. 언젠가 한 지나가던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 말이 못 움직이자 선비는 "아무리 장군의 원통함이 크다 할지라도 무고한 행인들을 불편하게 함은 온당치 못하다."고 호통을 치자 뇌성벽력과 함께 바위 위에 벼락이 내리쳐 바위 윗부분이 없어지고 그 옆에 큰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그 후로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 바위가 훗날 곤지암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남.[2] 그도 그럴것이 기관총이 나오기 이전의 총기는 사격할 때에 한해서 수십미터로 길이가 늘어나는 창과 다름 없었다. 애초에 총기가 등장하게 된 이유 부터가 풀 플레이트라는 사기템으로 무장한 중기병들을 격퇴시킬 수단이 없어지다 시피해서, 단순 기병 때려박기로 장창 방진을 박살내는 황당한 짓이 가능해젔기 때문이었고, 그 해답으로 나온 총기는 결국 "더욱 크고 아름 다운 장창" 죽창을 만드는 대신 총알로 그걸 대신한 물건이었다. 이런 이유로 총검을 통해 총기 자체가 근접무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근접보병들이 총병들을 보호해야했던 것이다. 강선총이 나온 이후에도 전열 싸움이 된 것 또한 결국, 진형 없는 보병은 기병에게 썰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고. 궁극적으로 기병 vs. 방진 구도를 깨버린건 기관총이라는 치트키였다. 이곳 저곳에 약탈하러 찌르고 들어오는 북방 유목민들과 씨름 하며 기동전을 해야했던 조선에게는 총기가 쓸만할 물건이 못 되었던 것.[3] 기병 만들 돈은 있는대 왜 총병은 못 키우는지 의문이 들기 쉬운대, 2중 전선을 항시 끼고 있던 동로마만 봐도 보병은 오히려 공격용이었다. 공격전의 필요성이 줄어들었을 뿐더러, 북방에 유목민들이 깔린 조선 입장에서 기병으로 유목민들 요격하고 다니는 것 만으로도 괴로운 부담이었다.[4] 동로마의 주력은 기병이었고, 테마군도 타그마군도 주력이 기병이었으나, 테마군의 기병은 본질이 좁아진 종심을 지키기 위한 기동 방어용 병력이었고, 타그마타의 기병은 정예 충격군이었기에, 결국 전쟁의 주축은 여전히 보병이었다. 엘리트 끼리 다 해결했던 서유럽 쪽과 달리 동방에선 그게 먹히지 않았기에. (물론, 플레이트 아머는 치트키급 사기템이었기에, 이걸 쓰고 다니기 곤란한 동방에서 뛸때는 동로마 양식 갑주를 입다가도, 서방에서 뛸때는 바로 플레이트로 바꿔입는 용병들도 있었다.)[5] 궁궐과 수도를 지키던 정예 오위 병력을 포함한 경군.[6] 근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징비록에는 서울에서 비장 80명을 선발해 신립에게 넘겼고, 신립이 충주에서 모은 병력이 8천이라고 되어 있으며 8천 명은 수정 실록의 내용이다. 서애집의 자문에서도 이일이 데려간 군관이 50명, 신립이 데려간 군관이 80명이라고 되어 있으니 의문의 여지도 없는 편. 심지어 니탕개의 난에서도 선조 실록은 용사 80명을 보냈다고 하고 수정 실록은 8천 명을 보냈다고 하니 두 기록 사이에 차이가 크다. 과연 80(八十)이 8천(八千)의 오기인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부분. 오히려 수정 실록의 기록이 오독일지도 모른다.[7] 현재는 문경새재로 불리는데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지리상으로 천연의 요새로 불릴만큼 산세가 험하여 방어진으로 삼기에 최적이었다.[8] 이점이 탄금대 전투의 가장 큰 패착이 되고말았다.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할때 기병의 위력을 새삼 알았던 신립은 기병을 고집한 것이 가장 큰 실수가 된 셈이다.[9] 가토 기요미사의 후속 부대가 고니시 유키나가군 뒤쪽에서 오고 있었기에 조선군의 농성이 간단치는 않겠지만, 강과 산으로 막힌 지형에 입구는 충주성이 떡 하니 틀어막는 지역에서 공방전을 벌이는게 결코 쉬운게 아니다..[10] 프로이스에 따르면 부산과 동래에서 100명 전사, 400명 부상으로 5백 가량이 줄어 있었다.[11] 그러나 최대 사거리와 최대 사거리에서의 명중률은 활이 뛰어날지 모르나, 최대 사거리에서의 살상력을 보장할 수 없었는데다 살상력이 보장되는 유효 사거리는 당시 총과 활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으며 조선군도 활과 총을 비슷한 거리에서 발사했다. 특히나 유효 사거리 내에서의 관통력과 제압 능력은 총이 월등을 넘어 압도적인 수준이었기에 단순히 사거리만으로 우위를 설명하기는 어려운데다, 월등한 발사속도 또한 100파운드급의 장력을 가진 전투용 활을 끊임 없이 발사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기에 생각하는것 처럼 쉬운것도 아니었고 일방적인 우위로 설명하기도 힘든면이 있다. 당장 활의 나라 조선조차 왜란 후 병과를 조총으로 통일시키다시피 했으며 150미터에 이르는 사거리는 무과시험장이나 활터에서 유엽전이나 목전등의 비전투용 화살로 안정된 환경에서나 쏠 수 있었지 전장에서 전투용 화살로 낼 수 있는 사거리가 아니며 그까지 도달한다 하더라도 살상력은 심대히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12] 전멸의 개념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 이것이 절대로 전원 전사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군에서는 부대가 전투 능력을 상실했을 때, 전멸이라고 표현한다. 현대전에선 단위 전투력의 20% ~ 30% 손실 구간을 전멸로 취급한다.[13] 육전에서는 전사자가 수전처럼 가라앉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전사자 수는 승리한 쪽에서 취한 수급으로 쉽게 계산할수 있다. 이 경우 조선군의 전사자 수는 서정일기, 회본태합기에서 고니시가 취한 조선군의 수급은 3천여급이라고 기록이 일치하기에 조선군의 사망자수는 3천여명이라고 추정할수 있다.[14] 정황상 그 둘의 관계를 보면 고니시가 아마 수급에 대한 욕심과 자기가 해놓은 다 된 밥에 고니시가 숟가락을 좀 올리고 싶다는 요청으로 들릴 수 있어서 그냥 그대로 자기가 싸우겠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미 이긴 전투나 다름이 없었으니(...)[15] 탄금대에서 전멸한 조선군 기병대가 정예 병력이었던 경군(京軍)이었다는 점도 한 몫 했다.[16] 조선 뿐만 아니라 한민족 국가들 역시 궁기병을 활용한 후퇴 매복전술을 자주 활용했고, 성과도 쏠쏠히 보았다. 야간 기습에는 더욱 효과를 발휘하는데 창기병보다 궁기병이 야간에 적들이 시야가 확보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멀리서 쏘아대면 적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궁기병은 기습전에 확실히 빛을 발한다.[17] 물론, 몽골군 또한 기병의 상당한 비율은 중기병이었다.[18] 중기병은 말에 입히는 갑옷 비용도 높고, 말들이 근접전을 하면서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니 빨리 죽을 수 밖에 없다. 거기다 중기병이든 창기병이든 근접전을 통해 포위되면 빨리 죽기 마련이고 말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려는 본능이 발동해 듣지 않으면 답이 없다.[19] 이 주장대로라면 서양사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자주 쓰던 망치와 모루전술과 같은 맥락과 속한다. 배수진의 보병들이 모루로 적을 묶어 두었다가 기병대들이 배후를 치면서 망치와 같은 역할을 했다면 적어도 승리할 수 있었다. 타당성도 있는 것이 기병은 돌격할 수 있는 것은 중기병이고, 궁기병은 근접전을 최대한 피하면서 원거리로 적을 농락하거나 지원 사격으로 쓰였기에 만일 이 전술을 택했다면 적어도 전술적인 면에서 고평가 받았을 것이나 문제는 그가 기병을 최전방에 세운 것이 화근(...)[20] 중간 목적지는 서울이였으나 상륙 날짜와 여기로 가는 루트는 저마다 달랐다. 구로다 군의 상륙지는 김해였다.[21] 게다가 이 시기의 조령은 방어 시설이 제대로 완비되지 않은 상태라 식량이나 식수같은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수단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22] 이렇게 한 곳이 빨리 뚫렸을 경우의 약점이 6.25 전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강원도 방면의 국군 6사단은 춘천-홍천지역으로 남침하는 북한군을 비교적 수월하게 막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는 등 서부전선의 상황이 개막장이라 강원도 방면에 있던 부대들까지 포위 + 전멸을 막기 위해 남쪽으로 후퇴한다. 그래도 UN군이 파견되기까지의 시간은 벌어주었다.[23] 심지어 이 군관은 친한 사이인 것은 둘째치고 남들 몰래 조용히 보고를 올린 것이었음에도 이랬다.[24] "신립과 친한 군관이 적이 벌써 조령을 넘었다고 몰래 보고하자, 신립은 망령된 말이라고 하여 참하였다. 그리고는 장계를 올려 적이 상주를 아직 떠나지 않았다고 하고, 군사를 인솔하여 탄금대(彈琴臺)에 나가 주둔하여 배수진을 쳤는데, 앞에 논이 많아 실제로 말을 달리기에는 불편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16번째기사.[25] 고대에나 현대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적에 대한 정보와 진격로이기에 야전병들과 탐색병들에 대한 위치가 가장 중요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불패 신화도 이 야전병들과 탐색병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만일 야전병과 탐색병이 제대로 일을 안 하면 곤장을 때렸다는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듯이 괜히 이순신의 불패 신화가 이순신 본인에게만 나온 것이 아니었었다. 정찰병이나 탐색 및 야전병의 활약도 있었기에 전략을 짤 수 있었던 것.[26] 이렇게 패한 전례가 있긴하다. 밀양 부사 박진이 황산 잔도를 방어할 때 왜군은 병력을 분산해 한 쪽이 박진 군과 정면에서 싸우고 다른 쪽은 산을 우회해 박진 군의 후방을 쳐 와해시켰다.[27] 다만 전라도 지방병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사전에 신립이 알았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28] 이는 전라도에서 징집되어 지원이 오는 지원 병력이 있었다. 다만, 신립이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다수설이다.[29] 전투별 차이는 있는데 선조 이전에 벌어진, 상당히 오래된 전투도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당대에 벌어지지 않은 전투는 당연히 세밀함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30] 다만 충주성 역시 쉽게 포위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탄금대보다 최적이 아니라는 시각은 엄존한다. 이상훈 교수의 경우 충주성의 경우 포위될 수 있는 반면, 탄금대는 후방의 수로를 통해 지속적으로 지원군 + 근왕군이 올 수 있으므로 장기간 주둔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신흠의 상촌집 기록을 포함해 거의 모든 기록에서 신립은 전투 의지 만방에 지구전을 고려한 기색이 없으며, 북방에서 활약할 때도 개인의 용맹을 활용해 돌격했지 지구전이나 다른 군략을 구사한 적이 없다.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신립의 탄금대 고집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주려는 정도로 볼 일이며,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신립이 이런 것들을 고려했을 가능성이 적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긴 하다.[31] 가토는 고니시와 거의 동일한 시간대로 진군하고 있었으니 논외. 물론 고니시를 격파했다고해도 가토가 거의 동일한 시간대로 진군 중이었으니 고니시를 이겼다고해도 가토가 남아 있는 형국이다. 신립이 일본군의 진군 자체를 파악함에 있어서 아예 가토를 놓친 것이 아닌가 심히 의심되는 부분.[32] 농담이 아니라,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자기가 통제사가 되면 부산으로 출병하겠다며 큰소리 쳐놓고 나중에는 육군이 가덕도와 안골포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한 원균과 똑같은 소리다.[33] 이게 말인지 막걸린지 모를 이야기다. 정예 병력의 다수를 이끌고 내려간 중앙군의 장수가 승리를 위한 작전 계획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패전부터 염두에 둔 작전 계획을 제시한 게 첫째 문제이고, 둘째는 문경새제를 막더라도 다른 곳이 뚫리면 한양이 위험하기에 결전에 임해 적의 격파를 해야 한다고 했던(일종의 각개격파의 개념에 가깝다) 전의 이야기와 상충되는 이야기이다.[34]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일선의 병사들까지 세심하게 다룬 디테일, 조총 사격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조선군을 비추는 긴박한 앵글과 저속 촬영 기법, 그리고 정발 장군 이하 부산진성 관민들의 눈물겨운 처절한 저항까지 고루 비춘 에피소드였다.[35] 다만 불멸 역시 육전보단 해전 묘사에 더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육지에서의 전투는 해상에서의 전투에 비해 좀 설렁설렁 넘기는 분위기가 있었고 스케일도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얘기를 들었다.당연히 예산도 해전에 비해서는 좀 덜 들어갔을 것이다.그리고 징비록은 방영 시간 50분에 50부작으로 방영 시간 50분인 104부작이던 불멸의 이순신 절반 분량밖에 안 된다.[36] 단순히 30%가 줄어든 이상으로, 부대의 인적 / 물적 손실 정비를 위해 나머지 70%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부대 정비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부대는 당연히 행군 / 전투 등 모든 전술 행동이 불가능한 전력 외 이탈 부대가 되며, 그래서 '전멸'이라고 분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