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17 15:00:43

충주 탄금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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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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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탄금대 전투
忠州 彈琴臺 戰鬪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f0ad73> 시기 1592년 (선조 25년) 6월 7일
(1592년 음력 4월 28일)[1]
장소

조선 충청도 충주 달천 평야 및 탄금대
원인 상주 전투 이후, 일본군의 북진.
교전국 <rowcolor=black> 일본
(공세)
조선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나카무스비기온마모리.svg 고니시 유키나가
파일:소 가몬(전).svg 소 요시토시
파일:마츠라 가몬.svg 마츠라 시게노부
파일:아리마 가몬.svg 아리마 하루노부
파일:아리마 가몬(검정).svg 오무라 요시아키
파일:고토 가몬.svg 고토 스미하루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신립 (도순변사)
파일:조선 어기.svg 변기 (조방장)
파일:조선 어기.svg 김여물[2] (종사관)
파일:조선 어기.svg 이종장[3] (충주 목사)
파일:조선 어기.svg 이일 (순변사)
파일:조선 어기.svg 박안민
병력 일본군: 18,000명 조선군: 8,000명 혹은 16,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군 궤멸
결과 일본의 대승
영향 * 조선 중앙군 정예병 전멸 및 고위 지휘관 신립 전사
* 수도 마지막 방어선 충주 함락

* 조선군, 수도 방어 포기
* 선조의 몽진

1. 개요2. 양측의 군세3. 전투 이전4. 전투 경과5. 전투의 영향6. 왜 탄금대인가?
6.1. 기병 활용설6.2. 배수진 활용설6.3. 불가피설6.4. 훈련 부족설6.5. 고립 방지 및 전선 유지설
6.5.1. 반론 : 적은 전선 유지를 안 하는가?6.5.2. 재반론
6.6. 조령 무용론6.7. 퇴각 실패설
7. 전장 선택 이외의 문제
7.1. 반론
8. 이여송의 촌평9. 여담10. 대중 매체11. 전설

1. 개요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음력 4월 28일(양력 6월 7일)에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일본군과 탄금대(충청북도 충주)에서 싸운 전투. 임진왜란 개전 이후 최초의 대규모 야전이며 이 전투의 패배로 조선 조정은 몽진[4]을 결심했다.

이름은 탄금대 전투지만 실상 전투는 중반까지 충주천 이남 달천 평야에서 벌어졌다. 전투 후반에 신립이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했기에 그 임팩트 탓인지 탄금대 전투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탓에 전투가 처음부터 끝까지 탄금대 인근에서만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역사적인 패전이라는 점 외에도 주목받을 이유는 많다.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는 신립과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결이었으며 기병 vs 보병이라는 양측의 전혀 다른 병종 구성도 묘미다. 주력 무기 또한 활 대 조총으로 서로 달랐다. 여러 모로 전쟁사적 관점에서는 흥미로운 점이 많다.

2. 양측의 군세

파일:탄금대전투.png

조총 자체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군도 알던 무기이지만 조총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수량만이 사용되었을 뿐이였으며 전국 시대를 거치며 정교하게 정립된 일본군의 조총 운용법은 조선군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5][6][7] 특히나 탄금대 전투의 경우 초반에 일본군이 승기를 잡게 된 결정적 요인은 조총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의 경우 처음 일본에서 끌고 온 병력 18,700명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것 같다. 조선에 상륙 후 거친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에서 입은 고니시 군의 피해는 경미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병력 18,000명 안팎을 유지했을 것이다.

조선군의 경우 의견이 갈려서 이 문서에서조차 8,000명설과 16,000명설이 팽팽히 맞선다. 신립이 서울을 출발할 때 데리고 있던 직속 병력[8]류성룡에게 인계받은 무사, 장정들을 합쳐 8,000여 명,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모집한 병력이 8,000여 명으로 도합 16,000명이라는 것과 단순히 충청도 일대 병력 8,000명이 전부이고 도성에서는 극소수의 병력밖에 데리고 오지 못했다는 주장이 팽팽하다. 선조수정실록과 징비록의 기록이 상이해서 어느 쪽 기록을 더 신뢰하냐에 따라 군세가 달라진다.

16,000명설은 유성룡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징비록 초본과 후손들이 군왕에 대한 서술 태도 등을 문제로 보아 수정한 듯이 보이는 간본 간의 서술 차이가 심해(군세의 서술도 차이가 있다) 징비록의 탄금대 기사 기록은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 애초에 징비록 초본에는 도성에서 이끌고 가는 군사, 이른바 경군의 병력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등의 문제점이 있어 수정실록의 도성의 재관, 무사, 외사의 서류, 한량인으로 활 잘쏘는 자[9] 수천 및 장사 8,000, 방읍병 8,000, 즉 16,000명 이상이라는 서술이 신빙성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원래 신립의 관직상 경군을 끌고 내려갈 수는 없으나 이때에는 특례로서 중앙군을 차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숫자가 200명을 넘진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징비록에는 서울에서 비장 80명을 선발해 신립에게 넘겼고 신립이 충주에서 모은 병력이 8,000명이라고 하였으며 수정실록에도 거의 똑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애집의 자문에서도 이일이 데려간 군관이 50명, 신립이 데려간 군관이 80명이라고 되어 있으니 의문의 여지도 없는 편이다. 정만록에는 경군 10,000여 명을 차출해 신립에게 붙여줬다는 기록이 존재하지만 선조실록에는 이런 명시적인 기록이 없으며 징비록에도 정작 전투시에는 충주에서 8천여를 모았다고 하고 있고 나중에 선조가 전쟁 지도 과정을 반성할 때도 신립이 극히 소수로 다수의 적에게 무모하게 싸웠다고 하고 있어 아주 명확한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류성룡이 조선 중앙군이 보병과 기병을 합쳐 약 40,000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한 적 있는데, 이 류성룡이 말한 '중앙군 40,000명'은 지방에서 올라온 상번군이었다. 세조가 군제를 바꾸면서 지방군을 좀 더 잘 다스리기 위해 지방군을 상경시켜 일정한 기간 동안 오위로서 복무하게 했다. 더군다가 저 40,000명이 전부 복무하는 게 아니라 8번씩 나누어 교대로 상번을 하게 했다. 이들은 보병 16,000명, 기병 24,000명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각 8번씩 한 번에 보병 2,000명 기병 3,000명이 복무했다고 한다.

지방군이 아닌 중앙군은 갑사, 내금위, 별시위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약 7,800명 정도가 복무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400명은 왕을 호위하는 금군으로 직접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병사는 약 7,400명 정도였다. 8,000명 설을 주장하는 측은 당시 한양을 수성하던 이양원이 최소한 7천 명이 필요하다고 가져갔고 각 지방에 파견한 장군들에게 최소한의 군사는 나눠져야 했으니 실제로 끌고 간 군사는 적을 수밖에 없다. 이에 관해 윤일영 전 군사학과 교수는 신립군을 대략 4,000명으로 보고 기마병 또한 1,000명을 넘지 못했다고 추측한다.

간혹 인구가 많으니 그냥 아무나 잡아서 군사로 만든다거나 수포대립제에서 면제된 사람을 군대로 보내면 된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건 당시 조선 군대를 이해하지 못한 발언이다. 당시 조선군은 복무 때 쓰는 무기나 기타 장비류를 국가에서 지급하지 않고 전부 자비로 구매해야 하다보니 이로 인한 근무자의 부담이 컸다. 이를 돕기 위해 정병에게는 정병을 돕는 보인을 3명씩 부쳤다. 현대에도 전투병력 뒤에 지원병과 여럿이 달라붙음을 생각하면 된다. 무기도 지불 못하는 상관에서 무조건 징병하기란 조선판 국민방위군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또한 김여물의 발언, "삼도의 군사가 모이지 않으니 패배할 수 밖에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충청도 군사가 모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충주와 청주에는 군대 약 4,000명이 있었고 민인백이 이종장에게 군사를 넘길때 '모든 군사들이 제 때 모였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듯하다.[10]

3. 전투 이전

북상하는 일본군을 저지하라는 명을 받고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것은 4월 26일. 김여물이 지형이 험한 조령에서 싸우기를 권했지만 신립은 기병을 활용할 수 있는 평원에서 싸워야 한다며 탄금대 남쪽 달천 평야 일대를 전장으로 삼을 결심을 굳힌다. 이일과 김여물이 강조한 조령이 바로 문경새재인데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지리상으로 천연의 요새로 불릴만큼 산세가 험하여 방어진으로 삼기에 최적인 곳이다. 반면 신립이 택한 달천 평야 일대는 길이 좁고 논밭이 펼쳐져 있는데다 장애물이 많아 신립이 믿고 있던 기병의 기동에 매우 불편한 지형이었다. 달천 평야가 기병 운용에 불편했다는 기술은 탄금대 전투에 참전했다 생환한 신흠의 상촌집, 류성룡이 최종적으로 다듬은 간본 징비록, 신립의 전기인 도순변사신공전 같이 서로 성향이 다른 조선측 기록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전장 선정은 가장 큰 패착이 되고 말았다.

신립이 내려오기 전에 사전에 파견되었던 조방장 변기가 조령에서 고지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상주에서 패한 이일도 변기에게 합류했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일부 병력을 험한 산길에 남겨놓아 지연전을 벌이면서 충청도와 강원도의 군사들을 제승방략으로 집결시켜서 군세를 더 키우고 일본군의 전력을 보다 상세히 파악하는 방법도 있었고 신립 주변의 제장들도 고지전을 요청했지만 신립은 전혀 듣지 않았다.

조령에만 집중하고 탄금대와 조령 사이 지형을 살펴보지 않으면 간과하기 쉬운데 조령을 넘어 탄금대까지 가는 길도 상당히 험하다. 조령에서 탄금대(충주 달천) 사이는 35㎞에 달하고 거기에는 연풍현(延豊縣)이 있었는데 여기는 중부내륙고속도로 개통 전까지도 접근할 도로가 없는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 육지 안의 섬이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직접 지나가보면 북상주IC부터 미친듯이 고도가 올라가기 시작해서 문경휴게소 일대부터 도로 밑으로 구름이 깔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문경휴게소에서 문경새재IC를 지나면 문경새재터널 - 연풍터널 - 장연터널을 지나고, 그 뒤로도 추점터널 - 조곡터널 - 매현2터널 - 매현1터널 - 탄용터널 - 두정터널 - 장고개터널 - 만정터널을 지나서 요도천을 건너는 중원대교까지 지나가야 겨우 충주시에 진입한다. 문경새재부터 충주까지 터널만 11개에 분지천, 쌍천, 오가천, 달천, 요도천 등 하천 5개를 건너야 한다.

고속도로 같은 게 없는 당시 연풍면 지역에 신립이 대항군을 짱박고 지연전을 했더라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 탄금대보다 더 좋은 곳에서 회전을 할 수도 있었다. 조령을 넘으면 괴산(연풍면)이 나오고, 연풍면을 지나야 대안보(안부역)가 나오고 거기서 돌고개를 넘으면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 수안보를 지나 올라가면 충주 남쪽 10리 지점에 단월역이 나온다. 대안보는 조령과 하늘재에서 이어진 길이 만나는 지점으로 영남대로를 끼고 있는만큼 조선 시대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는데 하늘재와 조령에서 이어진 길이 만난다는 부분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곳 지형도 충분한 험지로 매복 장소가 여럿 있었다. 대안보와 수안보를 지나 단월역으로 접근하는 길목엔 강변을 낀 잔도까지 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신립은 조령만 지키지 않은 게 아니다. 조령에서 대안보~단월역까지 이어지는 방어에 용이한 길목과 매복 지점, 단월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잔도까지 전부 방기한 채 평지에서 결전을 벌였다. 다시 말해 문경에서 연풍, 괴산, 대소원, 충주로 들어오는 모든 길목을 텅 비워버렸다는 얘기다.

일본측 기록인 서정일기의 기술까지 감안하면 신립의 본진은 산에 있었다. 충주 북쪽 소나무 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달천 평야로 나아가 일본군을 상대했다. 달천 평야는 기마대가 기동력을 발휘하기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주변에는 논이 많았고 강변 인근에는 갈대밭이 우거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거의 습지에 가까운 질척질척한 상태였다.
28일. 적이 민가의 집에 불을 질렀다. 그런 뒤에야 우리 군사들이 적이 이미 영(嶺)을 넘어온 것을 알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간담이 떨어지지 아니한 이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적의 무리가 큰 길을 따라 산을 두루 내려오는데 칼이 햇빛에 번득 빛났다. 신립이 군사를 모아 나아가서 탄금대(彈琴臺) 앞에 진을 쳤다. 탄금대는 두 물 사이에 있는데 그 물은 이름이 달천(㺚川)이었다. 군사가 모두 물을 등지고 진을 쳤다.
신경, 재조번방지
4월 28일 새벽까지 문경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28일 인각(3~5시)에 문경을 출발해 조령을 넘어 진각(7~9시)에 안보[11]를 통과, 오각(11~13시)에 충주에 도착해 월강 북단에 있는 단월역(현재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인근)에 이르렀다. 6시간에서 최대 10시간에 걸쳐 좁고 험한 비포장 산길을 행군해 체력 소모가 상당했을 법 하지만 고니시는 침착하게 군을 나누어 자신의 본대는 중앙을 맡아 계속 진군하였고 소 요시토시의 좌군은 달천 강변을 따라 서쪽으로, 마츠우라 시게노부의 우군은 산자락을 타고 동쪽으로 조심스럽게 이동시킨다. 또한 아리마 하루노부 등이 이끄는 병력은 별동대를 맡아 뒤를 따르고 있었다. 조선군은 조령~충주 사이 험로를 모두 비워놓았고 신립이 정찰나간 군관을 참한 다음 후속 조치를 실시하지 않아 일본군의 접근을 까맣게 모르다 갑작스럽게 교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4. 전투 경과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20150326213324.jpg

전투 돌입 시의 포진. 조선군 기마대는 고니시의 본대를 포위하려는 형태로 반월진을 갖췄으나 고니시는 좌군과 우군을 양쪽으로 은밀히 넓게 벌려 놓고 있었다.

남아있는 사료를 바탕으로 전투를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낙양에서 온 장군이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충주부 북쪽 반리쯤 되는 소나무 산에 진을 쳤다. 관군이 기치를 들고 말을 달려 공격하니 소나무 산에 진치고 있던 조선군이 패주했다. 종의지와 소서행장 군의 병사들이 이를 추격하여 목을 벤 것이 3천여 급이고 포로로 한 것이 수백명이었다. 대장 신입석(신립의 오기)이 사망했다.
덴케이, 서정일기, 4월 27일(조선력 4월 28일) 기록
4월 26일 충주(忠州)에 도착했을 때 병력이 겨우 수천 명밖에 안 되었는데 이 군사로 단월역(丹月驛) 근방의 언덕에 진을 쳤다. (중략) 28일에 적이 민가를 불태운 뒤에야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왔다는 것을 우리 군사가 알고는 간담이 떨어지도록 모두 경악하며 두려워하였다. 이윽고 바라보니 왜적들이 조령의 큰 길을 통해 산을 뒤덮으며 내려오는데 칼빛이 번쩍번쩍하였다. 신립이 군사들을 지휘하여 차례로 진격시켰으나 마을 길이 비좁은데다 논밭이 많아 말을 치달리기에 불편하여 머뭇거릴 즈음에 적이 우리 군사의 좌측으로 돌아 나와 동쪽과 서쪽에서 끼고 공격해 오는 바람에 우리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적에게 난도질을 당한 결과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군자(軍資)와 군기(軍器)가 일시에 모두 결단나고 말았다.
신흠, 상촌집, 여러 장사들이 왜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諸將士難初陷敗志)
그 지역은 촌락의 거리가 좁고 좌우에 논이 많아서 물과 풀이 섞여서 말을 달리기에 불편하였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적이 우리 군사의 좌우를 포위해 나오는데 세력이 풍우(風雨)와 같았다.
신경, 재조번방지
조선측과 일본측 참전자들은 공통적으로 조선군이 고지에 진을 쳤다고 적었다. 조령을 버린 점과 논밭과 장애물이 많아 기병을 운용하기 불편했다는 기록이 강조되어 조선군이 아예 평지에 진을 친 채 적을 맞았다고 오인하기 쉬우나 신립의 본진은 탄금대 우측 산자락에 있었고 전투 당일 조령을 넘어온 일본군이 민가에 방화를 저지른 후에야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기병들이 평지로 나가 적진에 돌격했다. 조선군이 기병 위주로 전투에 나선 점은 상촌집에 남은 신립 본인의 증언과 신립전기, 프로이스의 일본사가 공통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러니까 신립은 일본의 좌우익은 감안하지 못하고 중앙의 고니시군만 신경 쓰며, 보병은 후방에 둔 채 기병대만 장애물인 논밭이 많아 기동에 불리한 평지로 돌격시켜 일본군을 포위하려 했다는 점이다.[12][13] 이렇게 장애물이 많게 되면 기병들은 평야에 쫙 펼쳐져서 적을 덮치는 스웜 형태의 기동을 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개의 좁은 길을 따라 종렬로 길게 늘어지는 형태의 기동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밀집은 조총병들의 표적이 되기에 딱이다. 게다가 그 날은 전투 도중 비가 와서[14] 기병으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신립은 기병을 고집했다.

27일 일본군이 조령을 넘었다는 군관의 보고를 받은 신립은 직접 정찰에 나서 일본군이 아직 조령을 넘지 않았음을 알고는 허위 보고했다며 군관을 참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조령을 넘지 않았다는 장계를 올린 다음 추가 정찰은 하지 않아 일본군의 진격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상주 전투의 이일이야 거느린 군사가 기초적인 제식 훈련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오합지졸들이라 정찰을 보낼 상황이 아니었지만 중앙군이 다수 포함된 신립군이 과연 척후를 추가적으로 보내지 못할 상황이었을까? 조령부터 단월역까지 이어지는 험지를 모두 포기하여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지도 않았고 정찰 미비로 적군을 바로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로 전투에 돌입해서는 회전에 필수적인 기병과 보병의 연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아무튼 신립은 고전적인 좌중우 삼군 형태의 진형이 아니라 기병 돌격 위주 진형을 꾸렸다. 반면 일본군은 양익에 기병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간단하면서도 검증된 고전 진법을 따랐다.

신립의 전장 선택은 얼핏 강을 통한 기동 차단을 고려한 정석으로 보이나 포위하기에는 상대의 병력이 너무 많고, 정면 돌파하자니 조선 전기에도 충격력을 활용한 돌격 전술을 사용한 기록이 없는 조선 기병 특성상 충격력이 부족했으며, 강 때문에 신립이 그렇게 강조한 기병의 기동이 제한받았다. 도순변사신공전에서 조선군 기병대의 돌격을 중기병 돌격을 의미하는 치돌(馳突)이 아닌 치사(馳射)를 했다고 기록했다. 치사란 궁기병의 승마 사격을 의미한다. 궁기병이 정비된 보병 방진에 유효한 타격을 입히려면 기동력을 활용한 측후방 타격이 필요한데 후방과 우측면으로 강이 흐르고 논밭이 많아 우회 타격이 극도로 제한받아 조총 사격을 온몸으로 받아가며 정면 돌격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동쪽의 충주성은 수비 병력도 없고 적을 막을 방어 시설도 여의치 않는 폐성이나 마찬가지로 조선군에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여기에서 조령과 탄금대라는 전장 선정 문제를 따지기 전에 우선해야 될 문제점, 신립의 참담한 야전 지휘 능력이 드러난다.

일본군은 소 요시토시의 좌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중군, 마츠우라 시게노부의 우군으로 나뉘어 정석적인 양익 배치를 통해 적의 우회 기동에 대비하고 한편 돌격해온 조선군을 포위 섬멸하려 했다. 산지에 숨은 마츠라의 병력은 충주성에서 주둔군이 기습 출격하여 포위를 시도할 가능성도 염두에 둔 듯하다. 충주성에서 조선군이 출격해 나온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고지에 자리잡은 마츠라 병력이 이를 붙잡을 수 있고 기병 우회 시도가 있을 경우 즉시 차단이 가능했다. 기병 우회를 저지하다 충주성에서 출격한 병력에 협공당할 우려는 있으나 일본군 본대 뒤쪽에 대기중인 예비대가 마츠라가 있던 고지로 올라가 농성하면 완전한 구축은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 결국 지형적으로 일본군이 손해보는 상황이 아니었고 설사 충주성에 조선군 병력이 따로 있었더라도 그 존재는 그리 큰 의미를 두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제론 주둔군이 있지도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선군의 돌격이 3차례 걸쳐 이뤄졌다거나, 상세한 전투 묘사를 담은 사료는 아직 발표된 바 없다. 돌격한 조선 기병의 숫자까지 상세히 적은 임진전란사의 기술은 저자조차 명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조일 양측 기록을 종합해 정리하면 이렇다.

북쪽 산지에 진영을 꾸린 조선군은 기병을 전진시켜 달 모양의 진형을 펼쳐서 고니시의 중군을 포위 섬멸하려 했다. 정확한 횟수는 불명이나 조선군의 기병 돌격이 이뤄졌고 일본군의 정확한 의도와 좌우군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전황이 전개 될수록 기병에게 극히 불리해져 일본의 좌우군이 양쪽에서 역으로 포위해 조총 사격을 퍼부었다. 조선군 좌익 방면으로 먼저 공세가 시작되었고 이내 좌우에서 동시에 협공을 가해 중군과 함께 밀고 들어오자 결국 조선군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와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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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같이 지나가는 가토는 신경쓰지 말자[15]

신립은 충주천 북쪽 탄금대로 몰려 김여물과 함께 남은 전력을 이끌고 최후의 결사 항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만회하긴 역부족. 결국 이일을 비롯한 일부 병력이 간신히 빠져나갔지만 김여물은 전사하고 신립도 손수 활을 쏘고 칼을 휘둘러 일본군 수십 명을 죽였으나 중과부적이 되자 자결했다.

일본군은 수급 3천 급과 포로 100여 명을 획득했다. 보병 위주인 일본군은 추격섬멸능력이 떨어져 산줄기를 타고 동쪽으로 빠져나간 병력이나 물에 익숙해 수영으로 빠져나간 병력이 적게 잡으면 수백, 많이 잡으면 천 명 이상 있었겠지만 패잔병을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반면 고니시 군의 경우 전투 직후 곧바로 한양을 향해 쾌속 진군을 시작한 것으로 미루어 손실이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은 고니시뿐 아니라 일본군 전체의 예봉을 꺾어 한양 방어의 시간을 벌겠다는 최소한의 전략적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했다.

한편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가토 기요마사의 군 또한 근처에 있었는데 전투 현장을 우회해서 지나갔는지 아니면 뒤에서 관망했는지는 불확실하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가토는 고니시가 전투하는 모습을 보고 고니시 군대의 용맹에 감탄을 보냈다고 하며 자신도 전장의 명예를 원해 고니시에게 전장 참여를 요청했지만 고니시가 거절했다고 한다.

5. 전투의 영향

탄금대 전투의 패배와 명장으로 칭송받던 신립의 죽음은 조선 조정을 충격으로 몰아넣었고[16]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에게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까지는 일본군의 진격에도 불구하고 신립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믿음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까지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승방략으로 대표되는 당시 방위 체제의 근본적인 허점이 제대로 찔린 결과 중차대한 전투가 너무 쉽게 끝나고 말았다. 공포에 휩싸인 선조는 명나라로 망명하겠노라 하였고, 조정은 그런 선조를 말리기는 하나 한양을 포기하고 의주까지 몽진하였다.

그 외에도 해당 전투에서 패한 소식이 점차 알려지고 뒤이어 조정에서도 파천의 뜻이 기정사실화되면서 그로 인한 혼란과 공포의 여파로 인해 한양뿐 아니라 지방에 상주하고 있던 관료들, 장수, 백성들까지도 크게 동요하였다.

6. 왜 탄금대인가?

이 문단을 읽기 전에 주의할 점은, 군사적 판단은 한 가지 요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군사작전은 기본적으로 아래 모든 요소는 물론 아래에 적히지 않은 사소한 요소들까지 전부 고려되며, 아래의 설명들 역시 그중 무엇이 가장 결정적이었는지를 추측하는 것일 뿐, 이것 하나만이 원인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접근법이다.[17]

일단 신립이 막아야 했던 군대는 조령을 넘던 고니시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죽령을 넘던 가토군과 추풍령을 넘던 구로다군까지 모두 막아야 했던 입장이었으며, 이 중 하나라도 막아내지 못하면 결국 한양을 포기해야 했던 건 똑같다.

그리고 신립의 인성이나 당대 백성들 사이에서의 평가, 기병대장 시절 성향 등의 요소는 신립의 전술적 역량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지 S. 패튼의 사례만 봐도 성격이 아무리 더러워도 오히려 그 성질머리로 부하들이 잘 싸울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 김홍집이 맞아죽은 사례만 봐도 백성들이 무슨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신 같은 존재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보직이 달라지면 그 보직에 걸맞게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는 건 원래 당연한 것이다. 기병대장에 임명되면 기병대장에 걸맞게 저돌적으로 행동하고, 총사령관에 임명되면 총사령관에 걸맞게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군인의 기본이다.[18] 다만 그 전술적 역량이 총사령관에 걸맞는 급이었냐는 게 논쟁의 핵심일 뿐이다.

탄금대 전투의 허망한 결과에 관해서 호사가들이 계속 미련을 갖는 부분이 '최소한 시간이라도 벌어줬어야 되는 거 아니냐?'인데 애초에 신립의 임무는 시간 지연이 아닌 섬멸이었다. 이순신 또한 상륙작전을 피하고 해전만 고집한다며 처형당할 뻔했다는 걸 감안하면 왜적 격멸 임무 띠고 내려간 신립이 방어전을 포기한 게 이상한 건 아니다.

당대에도 신립이 탄금대에서 싸운 이유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현대에도 대체 왜 탄금대를 전장으로 삼은 건지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이 되는 이유가, 당시 기록 간에도 말이 전부 다른 데다가 신립이 주둔지를 몇 번이나 옮기면서 끊임없이 전략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신립도 초반엔 분명히 조령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바꿨는지 굳이 하산했고, 기존에 조령을 지키던 병력마저 전부 데려오면서까지 조령을 비워놨다. 그 이후엔 충주성을 주둔지로 삼았다가 충주성까지 비우고 달천평야로 나 왔다가 참패했다. 괜히 임진왜란 최고 미스터리라 불리는 게 아니다.[19]

6.1. 기병 활용설

신립이 직접 한 말이고 당대 기록에서 확인되는 유일한 이유이다.
신립이 왜적의 정세가 어떤가를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은 경오년(1570년, 선조 3년)과 을묘년의 그것과는 견줄 게 아니며 또 북쪽 오랑캐 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십시오."
난중잡록
일단 일본군과 먼저 맞붙어본 이일은 왜군의 군세를 볼 때 이전의 적과는 전혀 다르며, 또 이미 고모산성[20]이 왜군 손에 떨어진 시점에서 뭘 해도 승산이 없으니 그냥 한양으로 퇴각하는 게 베스트인 것 같다고 주장한 것 같은데, 한양 퇴각론은 이미 신립이 주장했다가 (이유는 불명이지만) 묵살된 적이 있는 만큼 이일의 조언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여물의 경우 현재 주둔지인 조령이라도 지켜야 된다고 간청했으나, 신립은 이마저도 그저 '우린 기병이고 적은 보병이니 평야에서 싸우면 이기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만 일축하며 오직 자기 주장만을 밀어붙였다.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할 때 적보다 적은 병력을 거느리고 무예와 과감함을 발휘해 전과를 올렸던 경험에 고무되어 수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회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서도 똑같은 전략만을 고집한 것이다.[21][22]

즉 사료상의 신립은 먼저 일본군을 상대한 지휘관에게 이전의 도적떼와 다르다는 조언을 받고 자기가 청해서 데려온 부관도 이에 동조했음에도 무시하고 그렇다고 일부 병력을 인근의 험지에 파견해 적의 실태를 파악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상대는 왜구일 뿐이라고 믿으며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에 불리한 병력을 회전에 몰아넣었다가 와해시켰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조선 기병은 산악 지형에서도 충분히 활약이 가능했고, 기병대장 출신인 신립 또한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기병 하나 때문에 산지에서 내려왔다는 주장에는 의구심이 든다.

무엇보다 신립이 명성을 떨친 함경북도 지역은 함경산맥으로 대표되는 험준한 산악지형이며[23], 야인여진의 터전이던 북간도, 연해주 일대 역시 산악지형이 대부분이다. 또한 신립은 평소 기마돌격에 능했고, 이는 곧 야습을 즐겨 썼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기습하기 최적의 장소인 조령을 버렸다는 건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또한 신립군의 경우 정예기병 100명, 한량 출신 급조기병 1000명, 나머지 하삼도 출신 보병 7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한량'들이란 평소 활터에서 145m 활쏘기만 수련한 사람들을 뜻하며 이 탓에 기병인데도 (일반적으로 궁기병 하면 생각하는) 좁은 공간에서 빠르게 쏴대며 휘젓는 그런 식의 운용이 불가능했다.[24]

결국 말 타고 거짓퇴각하며 쫓아오는 적에게 멀찍이서 화살을 퍼붓는 식의 운용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병력 데리고 강과 산에 둘러싸여 교전거리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애매한 평야[25]에서 움직일 바엔 그냥 말을 포기하고 험준한 산맥에 짱박혀 화살만 퍼붓는 쪽이 백만배는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뜻이다.

즉 신립은 자신의 장기인 기습도, 활솜씨도 모두 포기해 가면서까지 오직 정예기병 100명에게만 전부 몰아주기 위해서 회전보다 산악전이 훨씬 유리한 나머지 8000명까지 죄다 산에서 끌고 나왔다는 이상한 결론이 도출된다.[26]

6.2. 배수진 활용설

이것도 신립이 직접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발언도 논란의 여지가 다분한 게 훈련도가 낮은 병사들은 엄폐물이 없는 곳에서 적병과 마주칠 경우의 공포감에 더 쉽게 무너지며 오히려 산악 지형과 같이 지형의 이점이 있는 곳에서 상대적으로 더 잘 싸울 수 있고 장거리 투사 무기에 우위를 가지는 조선군이 백병전에 강점을 가지는 일본군에 대응하기 좋은 지형은 평야가 아닌 산악 지형임이 당연하고 실제 전훈도 그렇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에서 권율과 황진, 정담 등이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저지한 웅치 전투, 이치 전투에선 숫적으로 압도적인 열세였던 조선군이 고갯길을 활용해 적을 저지해냈다. 물론 낮은 숙련도와 사기 문제는 남아있어 권율이 총지휘관 신분에 직접 선두에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도망치거나 전투를 회피하는 병사들의 목을 치며 엄청나게 고생했다. 그러나 같은 병사들이 용인 전투에서 보인 모습과 비교하면 상대적인 우위는 분명하다. 즉 훈련도가 낮으니까 불리한 진영인 배수진에 몰아넣어서 정신력을 끌어내는 게 아니라 보다 유리한 지형에서 싸워서 낮은 훈련도를 보충하는 게 올바른 병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립은 조정의 허락을 받아 저자에서 강제 징병을 하고 원래는 체찰사 류성룡이 끌고 가기로 되어있던 군대까지 넘겨받는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해 서울에서 8천(수정 실록)~1만(정만록) 가량 모아 남하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도성의 무사', 즉 왕실의 친위대인 갑사까지 이 부대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즉 적보다 수도 적었고 지역 농민이 구성원이었던 권율보다 군대의 질이 낮았다고 단언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는 엄폐물이 있는 곳이 더 유리하다'는 전술적인 상식이 '그러므로 신립이 병사들의 사기 때문에 탄금대를 택한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직결될 수는 없다. 분명 그런 상식이 옳기는 한데 신립이 그걸 알았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배수진이란 그냥 병력을 구석에 배치하는 게 아니라 구석에 몰린 (체 하는) 보병으로 적의 주력을 유인, 버티는 사이에 기동력을 갖춘 별동대로 적의 종심을 타격하는 데 있다. 배수진을 최초로 활용한 것으로 알려진 정형 전투가 바로 그 예이다. 즉 신립이 배수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탄금대 전투에서 기병은 저 위치가 아니라 남한강 북단이나 충주성 등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측후면을 후려패며 등장해야 했지만 신립은 전투 내내 보병대 활용이 거의 없었고 그냥 궁기병으로 닥돌만 시전했을 뿐이다.[27]

애초에 승마한 상태에서 활을 쏘면 명중률이 낮아지기 때문에 정면으로 돌격을 하면 근접전을 강제로 할 수밖에 없다. 전쟁터에서 그 정도로 구른 양반이 병서 조금만 읽어도 나오는 그 정도 상식도 몰랐다면 분명 자질이 좋은 장수였다고 하기에는 힘들다. 특히 조선 시대에 장수로 밥 벌어먹으려면 병서 꽤나 파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다만 위와 같은 발상은 조선 시대 궁기병 전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한 생각인데, 당시 궁기병은 충격기병처럼 활용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즉, 제1진이 적진의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돌격하면서 그 가속력을 실어 사격하고 빠지면 그 뒤를 2진이 똑같이 돌격과 사격을 거듭하는 식으로 충격을 가해 적진형이 무너지게 하는 방법 역시 궁기병의 대보병 전술이었다. 이 사실을 모른다면 궁기병은 게임에서 나오는 것마냥 치고 빠지는 전술 밖에 없다는 상기한 무식한 발상에 도달하는 것이며, 왜 한반도 및 중국 왕조가 기병 중에서도 가장 양성하기 까다로운 궁기병에 그토록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신립이 이 발언을 했다는 주장도 신뢰도가 떨어진다. 선조수정실록이나 상촌집 등의 당대 기록에 남은 신립의 발언은 '이 곳에서는 기마병을 이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싸워야 한다'는 발언뿐이다. 배수진에 관한 이야기는 후대의 일로 송시열이 신립의 묘비에 적은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후 배수진이 조령 대신 탄금대에 간 이유를 잘 설명했다고 생각했는지 정약용을 포함한 많은 문인들이 배수진 설을 택하였고 그 결과 '탄금대 전투=배수진'이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전장 지형을 살펴보면 탄금대는 배수진보다는 상대의 우회 기동을 방지하는 지형에 더 가깝다. 당대에 제일 유명한 전술이 배수진이니 사람들에게 그냥 그렇게 보였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6.3. 불가피설

말 그대로 탄금대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신립군은 평야에서 전투를 벌이더라도 그 전에 조령이나 그 뒤의 단월역 같은 지형을 활용해 적의 예봉을 꺾거나 진격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것은 26일, 일본군이 조령을 통과해 탄금대에 돌입한 것은 28일로 이틀 정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탄금대 전투의 시간대가 조선측 기록에서 조금씩 다르긴 하나 전투를 직접 지켜본 신흠의 상촌집과 일본측 기록을 교차 검증하면 일본군의 조령 돌파와 탄금대 전투는 모두 28일에 일어났다. 결국 신립이 뭔가 효율적인 계책을 짜낼 시간은 있었다는 의미다.

조선군은 이날 아침 조령을 통과하는 일본군의 무기가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를 파악한 다음 탄금대에 진을 쳤다. 일본측의 기록을 따르면 새벽에 출발해서 오전에 조령을 통과, 오후에 탄금대로 돌입했다. 급박한 전황 때문에 조선측에서 일본군의 진군을 적은 기록들은 징비록과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은 날짜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뭉그러뜨려 놓았고 난중잡록은 26일 신립이 충주에 도착해 27일 전투. 재조번방지는 26일 도착해 28일 전투, 국조보감은 신립의 충주 도착시점은 생략하고 27일 일본군이 조령을 넘어 28일 전투하는 식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심지어 신립과 김여물의 행장기류에서도 일본군의 진군, 조령 통과 시점에 대해선 적지 않았다. 조선 기록들은 상촌집을 제외하면 전투 발발 날짜 외엔 잘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측 기록 한두 개 긁어 와서 일본군이 이미 통과해서 방어선을 펼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면 함정에 빠지기 쉽다.

조선측 참전자인 신흠은 26일에 단월역에 진을 치고 28일날 적을 맞아 싸웠다고 적었으며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일본측은 4월 25일(일본측 날짜론 4월 24일) 이일을 패퇴시키고, 4월 28일(일본측 날짜론 4월 27일) 새벽에 문경에서 출발해 조령을 넘어 아침에 조령과 수안보 사이에 있는 대안보를 통과, 점심 나절에 신립군과 마주쳤다. 신립 본인이 일본군이 목격되지 않자 보고한 군관을 참했다는 기록까지 감안하면 일부 정찰 부대를 제외한 본대는 28일 통과가 확실하다.

또한 조령을 포기해도 지형은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었다. 조령을 막지 않은 것만이 쟁점이 아니다. 조령을 지난다고 평탄한 지형이 나오진 않기 때문이다. 포장 도로 닦아놓은 지금 기준으로나 조령만 통과하면 될 거 같지 조선시대 기준으론 조령을 지나 신립이 진을 친 곳까지 가는 사이의 길도 험지다. 조령을 넘으면 대안보(안부역)가 나오고 거기서 돌고개를 넘으면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를 거쳐 북상하면 충주 남쪽 10리 지점인 단월역이다. 대안보는 조령과 하늘재에서 이어진 길이 만나는 지점으로 영남대로를 끼고 있는만큼 조선시대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는데 하늘재와 조령에서 이어진 길이 만난다는 부분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곳 지형도 충분한 험지로 방어자 입장에서 활용할 매복 장소가 널려있었다. 그리고 대안보와 수안보를 지나 단월역으로 접근하는 길목엔 강변을 낀 잔도까지 있다. 이쪽은 신립군 바로 코앞에 있으니 절대 시간 없었다는 핑계는 댈 수 없다.

그러니까 신립은 조령만 지키지 않은 게 아니다. 궁병 몰빵 조선군[28] 입장에서 가장 효과적인 매복-원거리 기습이라는 훌륭한 대안을 십분 수행할 수 있는 조령~대안보~단월역 코스의 험지와 단월역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에 있는 잔도까지 전부 방어 포기하고 내버려둔 채 '충격력이 떨어지는 궁기병'과 '그냥 병풍 취급한 보병대' 전체를 평지에 끌어모았다. 끌어모아놓고 지휘나 똑바로 했으면 모르겠는데 결국 저 귀중한 보병은 모루고 뭐고 아무런 역할도 없이 끝까지 병풍 노릇만 하다가 속절없이 학살당하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물론 상주 전투에서 조선군 병사들이 보여준 한심한 궁시 실력을 생각하면 신립 휘하 보병들이라고 일당백의 신궁들이었을 리는 없지만 적어도 창칼 근접전을 기대하는 것보다야 백배 현실적이었다. 여기에 경상좌방어사 변기가 신립이 오기 전에 조령에 배치되어 방어 준비를 하다가 신립의 명에 따라 철수했음을 생각하면 그 지형들을 전부 방치해야 할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측 기록에도 이일과 김여물같은 휘하 장수들이 험한 지형을 활용하자는 건의를 분명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립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 신립은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어째서 조령에 들어가거나 단월역에 진을 치는 선택을 안했는가? 이것은 왜군의 기동이 신립의 상상 이상으로 빨랐던 탓이 컸다. 신립은 왜군이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조령같은 지형을 넘으려면 최소한 이틀은 걸릴 것이라고 보고[29] 단월역에 진을 치고 여유있게 돌아가는 전황을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 이상으로 왜군의 기동은 빨랐고, 전황을 알아보라고 보낸 척후는 이미 왜군이 조령을 넘었다는 믿기 힘든 소식을 전한 것이다. 신립은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척후를 진중에 유언비어를 퍼뜨렸단 죄목으로 죽였고, 왜군이 아직 상주에 있다는 생각을 고수했다.[30] 죽인 척후의 보고가 맞았음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고, 그 시점에는 조선군의 입장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31] 결국 충주성-탄금대 일대에서 결전을 치른 것은 내몰리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신립이 처음에 주둔하고 있던 단월역조차 포기한 이유는 역시 보급이 문제였을 가능성이 크다. 축척이 큰 지도상으로 보기에 조령~대안보~단월역~충주성에 이르는 코스는 가까워 보이지만 당시 도로사정으로는 그조차도 짐을 지고 올라가기엔 쉬운 길이 아니었다. 험지는 적에게도 문제지만 아군에게도 문제였던 것이다. 사단급 규모의 군대를 며칠간 험지에서 운용하기 위해서는 보급이 필수이다. 더군다나 왜군의 북상을 저지한다고 급하게 몸만 꾸려서 내려온 신립군은 반드시 인근 행정구역의 협조를 받아 백성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러한 보급을 하기에는 당시 충주 및 인근의 인구는 많지 못했고, 따라서 며칠 동안 험지에 주둔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신립이 파악하고 있는 고니시 휘하의 왜군 규모로도[32] 자신들보다 더 많은 줄을 인지하긴 했으므로 보급도 안 되는데 험지에 대군을 두는 선택은 악수라고 보았던 듯하다. 결국 있는 험지는 대부분 포기하고 몰리듯이 평야에 진을 치게 되었는데, 상술한 이유를 댄다 하더라도 신립의 배치는 문제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잘 활용할 수도 있었던 지형상의 요건들을 다 포기하고 벌판에서 궁기병에 의지해 싸우는 고전적인 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분명 신립이 여러 험지들을 포기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타당했는지,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6.4. 훈련 부족설

북방 출신 기병들을 제외한 병사들이 오합지졸이거나 편제된지 너무 짧은 시간만이 지나 제대로 된 군대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설. 조선측의 상당수 기록에 사견의 개입이나 왜곡, 혹은 지나친 단순화가 가해졌다는 전제가 있어야 논리전개가 되기 때문에 꽤 반발이 있다.

요약하자면 신립은 서울에서 모은 병사들의 훈련도나 결집력, 군기 등이 산악 지형에서 분산되어 전투를 벌이면 와해될 위험이 매우 높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판단했으며 이에 따라 병사 통제가 용이한 지형(평야나 지나치게 울창하지 않은 고지, 가능하다면 요새)에서 전투를 벌이고자 했다는 것이다. 김여물의 건의와 신립의 거부는 기록 그대로가 아니라 전후에 훨씬 많은 논의가 있었으며 김여물조차도 이 병사들로 흩어져서 산악전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령의 지형으로 얻는 이점이 더 많다고 판단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신립이 원래 원했던 전장이 탄금대가 아니고 원본 선조실록에 나온 대로 단월역에서 싸우려고 했다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역시 고지 앞 평야가 진창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전술적 의미가 있는 포진이 된다. 그 뒤 단월역에서 패했든 다른 사고가 있었든 간에 탄금대로 밀려나서 그 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고 그 전투가 탄금대 전투로 알려졌다는 것. 이에 따르면 배수진 따위는 신립의 안중에 없었고 그냥 전투 경과에 따라 하필 그런 모양새가 된 것이다.

전투 경과나 관련 인물들의 판단 근거가 적당히 합리적으로 설명되지만 당대 조선측의 기록의 상당수가 사견의 개입이나 왜곡, 지나친 단순화가 가해졌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반발이 큰 편이다. 또한 신립과 징집병 간의 상호 신뢰 문제 또한 징집병이 좀 오합지졸이라 하더라도 당대 최고의 영웅으로 이름을 날린 신립이라는 존재가 왔음에도 뭔가 해보지도 않고 적전도주를 할 만큼이었는지, 또한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인들이 북방에서 데려온 정예병과 부관들마저 신뢰할 수 없었을 리는 없다는 점[34] 등이 문제로 꼽힌다.

이 주장에 따르면 다른 지역의 지방군들이 고지대에서 적을 막아낸 것과 신립이 이 지역의 고지를 포기한 것은 일대일 비교가 불가능하며 이를 근거로 신립을 비난하는 것은 부당한 폄하이다. 병사, 부사관, 하급 장군이 해당 지역 출신인 것은 물론 지방 유지까지 포함되어 해당 지방의 지형을 아는 이들이 군데군데 섞여있는 경우와 병력이 통째로 타 지방에서 내려온 경우가 다른 것, 전근대 사회에서 '동향'이 가지는 의미와 이에 따른 수평적 신뢰 문제, 지방 유지의 통제력과 수직적 신뢰 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비판이라는 것이다.[35]

6.5. 고립 방지 및 전선 유지설

일본군의 진격로는 조령 한 군데가 아닌 2군인 가토 기요마사의 진격로와 3군인 구로다 나가마사의 진격로가 달랐으며[36] 3도순변사인 신립의 지위는 단순한 야전 사령관이 아닌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전군을 통솔하는 위치였고 신립의 임무가 수군이고 육군이고 모두 총동원해서 고착 방어가 아닌 섬멸이므로 다른 일본군 부대가 우회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립이 조령에 붙들려 있으면 다른 일본군 부대에 의해 서울까지 그대로 뚫리고 본인도 포위돼서 전멸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신립은 기존에 조령에 배치된 병력까지 모두 끌어모아 결전을 시도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신립군은 일본군과 한양 사이에 존재하는 조선의 유일한 야전군이며 일본군의 급속 진격에 헝클어진 남도 일대의 지상군을 수습할 권한과 역량이 있는 유일한 지휘부이다. 유일한 야전군이란 점이 중요하다. 신립이 어느 한쪽 길에서 방어전을 편다고 해도 다른 길로 한성에 일본군이 들이닥치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단기 결전 시도 자체는 타당성을 지닌다.

《전략 전술의 한국사(이상훈 교수 저)》에서는 탄금대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고 해석한다. 현재의 탄금대는 퇴적이 많이 진행되어 충주 시내와 육지로 이어져 있지만 식민지 시대에만 해도 충주 시가지와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육계도(모래 둔덕으로 육지와 연결된 섬)였으며 퇴적이 많이 진행되지 않았을 임란 당시에는 한쪽 길로만 진입이 가능한 지역이었으리라고 추정하였다. 탄금대 자체는 일본군이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지만 충주는 달랐다. 일본군이 한양까지 가기 위해서는 중간중간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점령해 나아가야 했는데 충주도 그 주요 도시 중의 하나였다. 충주를 점령하지 않고서는 소백산맥 이북의 진군이 어려워지므로 충주를 점령하지 못하게 견제할 수 있는 요혜지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훈의 주장은 "탄금대는 삼면이 강과 호수로 둘러싸여 있어 동쪽의 진입로만 막으면 됐고 봄철에 서풍이 강하게 불어 조선의 원거리 발사 무기에 유리"했으며 "또 가파른 조령에서는 조선의 주력인 기병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웠고 일본군에 의해 후방이 차단돼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던만큼 탄금대가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37]

조선군이 일본군을 격파할 전력을 보유하고 있을 때에나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넘길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나름 정예였고 규모까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며(최대 1만 6천) 기병의 비율이 절반이 넘어가는 조선군의 특성까지 고려하면 고니시 군과 신립 군의 전력은 최소 엇비슷한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애초에 일본군과 싸워본 경험이 없고 여진을 상대로 치사 전술(궁기병이 돌진하며 활을 쏘는 전술)로 전과를 올려왔던 신립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아군의 전력이 압도적이라고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굳이 신립의 입장이 아닐지라도 일본군이 우월한 전력이었다는 주장은 전투의 결과에서 유추한 결과론적 입장에 가깝다.

일본군이 조총 부대인 걸 몰라서 그랬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일본군 내에서 조총의 비율은 크게 높지 않았고 제국주의 시대 수준의 병종적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병기적 우위는 결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사실 이 시대 조총은 활보다 훈련 기간이 짧아서 애용되었을 뿐이지 딱히 활에 비해 우월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 있다면 갑옷을 활보다 잘 뚫는다는 건데 조선군이 딱히 서양 기사들처럼 중장갑으로 떡칠한 병력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집단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장점 역시 임진왜란에서는 생각보다 큰 차이는 없었다.[38]

이일 등 일본군과 교전 경험이 있는 장수들은 신립의 작전이 무모하다고 지적했으나 탄금대 전투 이전에 조선과 일본은 사단 규모 부대의 야전을 치른 적이 없다.

문제는 이 쪽이 얼핏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당대인들의 증언은 무시했고 정작 신립 자신이 이런 말을 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이 주장이 성립되려면 신립이 일본군 1군·2군·3군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했다는 전제가 필요한데, 당시 조선의 조정과 장수들이 이러한 정보를 알았다는 사료적 근거는 없다. 조선 측 어느 기록을 봐도 신립이나 다른 장수들이 당장 눈 앞에 있는 고니시 군 이외에는 신경쓴 흔적이 없고, '신립은 정찰을 제대로 하지 않아 일본군이 조령을 언제 넘었는지조차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신립에게 이같은 복안이 있다면 반대 주장 에 대해서 상기의 이유를 들어 논리적으로 반박하면 그만인데, 신립은 기병으로 밀어버리면 된다고만 했지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

신립이 일본 1군·2군·3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치면 애초에 다른 진격 루트의 적에 대한 추가 요격 시도는 명백히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하늘재·조령을 넘어오는 고니시의 1군은 신립 군과 거의 동수지만 고니시의 바로 뒤에서는 그와 비슷한 규모의 가토 군이 역시 조령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에서 검토했듯이 실제로 신립군이 1만 6천으로 고니시 군과 동수일 가능성도 낮고 애초부터 고니시 군보다는 적은 병력일 가능성이 높게 제기된다. 즉 충주에서 상대할 일본군이 조선군보다 우월한 전력이라는 사실은 결과론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립은 '1군과 2군을 합쳐 3만 6천에 달하는 적을 자신이 가진 최대 1만여 병력으로 1~2일 만에 요격해내고 여기서 소모된 병력을 보충·재편성할 새도 없이 내달려 추풍령으로 진군하는 적을 저지한다'는 몽상 수준의 전략을 구상했다는 소리가 된다. 신립이 상대했던 여진족들, 특히 다수의 경기병으로 공격해왔다가 금방 패퇴한 니탕개의 난 같은 사례를 감안하면 이러한 전략이 몽상은 아니었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으나 애초에 약탈을 목표로 접근전을 회피하는 부족 단위의 여진과 국가 단위로 본격적인 정복 전쟁에 나선 일본군은 병제·전술, 기타 모든 것이 완전히 달랐다. 신립이 일본군의 진로와 규모를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바다 건너 넘어온 수만 대군이 도적떼인 줄 알았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을묘왜변도 규모도 7천 가량이었다.

특히 일본 제3군에 대한 요격까지 염두에 두었다면 신립 군의 목표는 절대로 구축이 될 수 없고 반드시 충주 방면 적의 격멸이어야 한다. 그런데 신립 스스로도 보병 전력에 대해서 크게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도저히 앞뒤가 안 맞는다. 여기에 중기병 전력이 없는 신립군이 조총을 보유하고 단병 접전에 능한 일본군을 상대로 이런 전략을 짜는 것 자체가 부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경상도 전역에서 수 차례 전투가 벌어졌고 신립 군에는 상주에서 일본군과 정면으로 교전해본 이일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기존 왜구와 완전히 다른 군대라는 사실을 파악할 틈이 없었다는 변명은 성립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1군·2군·3군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을 때의 이야기. 신립이 고니시 군 외의 부대를 신경쓴 기록이 없다. 신립 옹호론자들은 반박하는 사료를 내놓지 못한 채 말을 돌리고만 있다. 신립의 적정 파악에 대한 기록은 27일 친한 군관이 적이 조령을 넘었다고 보고하자 자신이 다시 나가 정찰하고 적이 보이지 않자 허위 보고를 이유로 참했다는 기록이 끝이다. 신립은 일본군이 조령을 넘지 않았다고 장계를 올렸을 뿐 척후를 다수 운용하거나 일부 병력을 차출해 탐색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6.5.1. 반론 : 적은 전선 유지를 안 하는가?

당연한 얘기지만 전선의 유지는 방어 측뿐만 아니라 공격 측에게도 역시 중요하다. 조령에서 일본 1·2군이 막혀 있는데 3군만이 홀로 추풍령을 돌파해 유유자적 북상한다면 당연히 측면이 위험해지고 진격 속도를 조정할 수 밖에 없다.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도 춘천전투로 중부 전선의 진격에 차질이 생기자 쾌조의 진격을 멈추고 하릴없이 한강 건너편만 바라봐야 했으며 UN군 역시 무질서한 북진 끝에 전선 곳곳이 뚫려 청천강 전투1.4 후퇴라는 대참사를 맞이했다.

오히려 신립은 충격력은 약하지만 기동성은 확실한 자신의 기병을 동원하여 적의 우회를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상대의 병력 규모 및 진격로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이 도박과도 같은 일전 하나에 모든 가능성을 날려먹고 말았다.[39]

6.5.2. 재반론

다만 '공격측의 전선 유지 중요도'를 이 케이스에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현대의 연구동향에 의하면, 임진왜란 개전 당시의 일본군은 전선 유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빠르게 진격만 했다고 한다.[40] 일본군의 비정상적인 진군 속도는 명백히 자신들이 무리하게 진군해도 진군하는 대로 전선을 밀어낼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고, 이는 조선군이 무슨 대응을 하며 나올지 훤히 꿰뚫어 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수비 측 뿐만 아니라) 공격 측에서도 전선 유지를 똑같이 고려해야 되는 건 서로 군사적으로 제대로 체계가 갖춰진 군대들 간의 전쟁일 때 얘기이고, 이 당시 조선의 군사체계는 허점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은 노골적으로 측면 노출 따위는 완전히 무시한 채 진군할 수 있었다.

6.6. 조령 무용론

위의 전선 유지설과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이론. 이희진이 주장하고 있는데 근거가 부족하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조령에만 길이 있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충주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었다. 계립령(하늘재)과 이화령은 조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는데 계립령은 비록 고갯길이라고는 하나 삼국 시대부터 내려온 군사적 요충지였다. 게다가 고니시가 위치한 문경새재는 여러 곳으로 통하는 나들목 같은 곳으로 여차하면 이화령 - 괴산으로 충주를 거치지 않고 넘어갈 위험이 있었다. 단순히 조령만 막기에는 조선 측에 큰 위험 부담이 있었다는 것이 조령 무용론의 주장이다. 만약 신립이 조령을 막고 일본군이 조령으로 쳐들어온다고 해도 일본군이 다른 길로 우회해버리면 조령은 포위가 되는 형국이 된다.[41] 방어에는 유리할 지 몰라도 여러모로 불리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허나 이와 같이 각개 격파나 우회를 염려했다는 주장은 조령, 하늘재, 이화령 같은 영남대로 전면의 고개길의 험준함을 과소 평가하고 조선군의 방어 체계를 무시하면서 오직 신립에게만 집착하고 있다. 그냥 당시 지도 분석과 현지 답사를 제대로 안 했고 조정에서 파견한 다른 경장들의 활동에 무지하다는 소리다.

조령이 그나마 통과하기 편한 길이고 다른 샛길들은 모두 일렬로 행군하지 않으면 통과도 힘든 첩첩산중 외길이다. 하늘재와 이화령은 조선 시대에 들어 사용빈도가 크게 떨어졌는데 그 말인즉슨 조선 시대 도로 사정을 감안해도 특히나 좁고 정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1만 이상의 대군이 치중 물자까지 끌고 기동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당대 조선인의 지리 관념을 감안하면 외국인인 고니시 군이 즉시 파악하고 있었을 통로도 아니고 조령과 거리가 멀지 않아서 조령과 별도로 병력 배치가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길이 워낙 좁으니 병력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조령 외에 대군이 기동할 수 있는 길목은 보다 먼 서쪽의 추풍령과 동쪽의 죽령인데, 추풍령은 방어사 조경이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지원군과 함께 5월 3일까지 버티다 전라도 지원병이 근왕을 위해 빠져버리면서 구로다 군에게 무너졌고, 죽령 방면은 방어사 유극량이 진 치고 지키는 동안 죽령을 넘어 경상좌로 고을 병력을 배속받은 경상좌방어사 성응길이 가토와의 섣부른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지속적인 견제와 안동 풍산에 진입한 선발대를 안동 석전꾼들을 징발해 물리치는 기지를 발휘해 결국 몸이 달은 가토가 죽령을 포기하고 조령으로 우회하게 만들었다. 죽령은 신립처럼 무식하게 들이받는 일 없이 성공적으로 견제해 3일 가량의 시간을 더 벌어주었고, 추풍령은 왕이 위험하다는 소리에 지원 병력 빠져서 무너진 건데 근왕 때문에 지원 병력을 빠지게 만든 원인이 바로 탄금대에서 패해 조령-충주 라인이 뚫려서 왕이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차 타고 다니는 현대에나 우회하면 간단할 듯이 보이지, 교통과 수레 발달이 낙후된 조선에선 우회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문경새재를 지나도 충주까진 계속 산길이 이어지기 때문에 박진이 밀양 황산 잔도에서 당한 것같은 산악 우회기동은 조령 주위에선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산길 다 버리고(덤으로 원래 있던 변기의 병력까지 빼버리고) 중기병도 아닌 궁기병으로 논과 밭, 그리고 기병이 기동하기 힘든 물가인 탄금대에 진을 쳤다. 기병대를 이끌고 물가에 진을 치고 논과 밭을 끼고 싸웠다는 것 자체가 병법에 문외한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더욱이 탄금대에서 일본군이 우회하여 충주성을 점령할 것조차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조령에서 일본군의 우회를 예상했을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일본군의 우회 가능성에 그렇게 신경을 쓴 사람이 일본군이 충주성에 근접했다고 따로 보고한 군관을 왜 죽여버렸을까? 또한 일본군의 고니시와 가토는 산길이어서 매복의 위험이 있는 조령을 우회하기는커녕 신속한 한양 점령을 위해 조령을 통과하여 충주에 도달했다.

무엇보다 조령에서 막아야 했다는 주장은 신립이 전군을 조령에 때려박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조정은 신립, 이일과 별도로 방어사 변기(조령), 조경(추풍령), 유극량(죽령), 성응길(경상좌로) 등을 내려보냈다. 상주에서 패한 이일과 변기가 조령에서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그들에게 병력 충원을 해주면 되고 크게 패한 직후인 그들이 못미덥다면 자기 병력 일부로 넘겨받아 수행하면 된다. 전술했듯 조령을 지나서도 매복 가능한 험준한 지형이 계속 이어지니 조령이 아슬아슬하면 그곳을 활용할 수 있다. 기병만 있는 것도 아니고 기병이 하마 전투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탄금대에서 싸우기로 작정했더라도 산길에서 매복을 통한 견제, 탐색을 시행해 보는 건 상식적인 범주다.

목책을 겹겹이 쌓아서 경상도에서 벌어주지 못한 시간을 하루라도 더 벌어서 조정이 대비할 시간을 줘야 하는데 탄금대 전투 한 번에 병력을 다 날려버려서 전혀 그러지 못했다.

6.7. 퇴각 실패설

위의 모든 신립에 대한 인식과 정반대되는 기록이 하나 존재한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이 구절을 알고 있으나 신립에 관한 다른 기록들과 정면으로 대치되기에 어떻게 처리할지 골칫거리인 구절로 취급되어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 편이다.
당시 외방의 군사는 모이지 않고 도성에는 전후하여 대부분의 장정들이 거의 징발되었으므로 도원수(김명원) 역시 군사가 없었다. 상주에서 (이일이) 패배한 보고가 이르고 신립(申砬) 또한 비밀히 아뢰기를 ‘적의 기세가 매우 드세니 도성으로 후퇴하여 지키도록 하소서.’ 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수정 실록 25년 4월 14일(계묘) 10번째 기사. 기사

조경남이 전쟁 중 자신이 접한 모든 기록과 증언을 모아 저술한 난중잡록과 이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수정실록에는 신립이 이일의 패배 소식에 "적의 기세가 강하니 후퇴해 한양에서 지키도록 하자"는 장계를 올렸다는 기사가 있다. 이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신립이 일본군을 그리 만만하게 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42]

만약 '비밀히 아뢰었다'는 문구에 의미를 크게 둔다면, 군사작전이므로 기밀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 + 사기유지를 위해 대외적으로는 자신만만한 모습을 연출했으나 실질적으로 군사적 결단을 위한 왕과의 대면에서는 후퇴 판단이 옳다는 의사를 전달했다는 추측은 가능하다. 아무리 실록이라도 군사기밀까지 전부 적는 것은 무리이고, 특히나 사료 유실로 인한 두찬이 심했던 선조실록이므로 원본 실록에는 없고 수정실록에만 있는 것도 가능은 하다.

이에 따르면 신립은 애초에 충주 근처에서 일전을 벌여 섬멸하는 것도, 조령을 막아 지키는 것도 최초 구상이 아니었으며, 한양 근처 방어를 주장했지만 누구에게든 간에 거부되어 충주로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 추정을 따른다면 조정이 신립에게 구체적으로 섬멸을 지시한게 아닌데도 신립이 일전을 택한 이유를 일부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한양 도성이 전투를 벌이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게 당시에도 상식이었다는 문제는 남는다.[43] 역사학자 임용한은 진짜 한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읍 근처의 성, 아마 수원이나 오산 쯤에서 막자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7. 전장 선택 이외의 문제

신립은 분명 조령~충주 사이 산길을 전부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신립은 탄금대에서도 전투지휘가 엉망이었다. 적에게 어느 정도 유의미한 피해를 입혔다면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겠지" 정도로 끝났을 지도 모른다.

물론 신립도 문경새재에서 농성하는 걸 고려를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수비전도 단점들이 존재하는데 문경새재에서 농성하면 적들도 바보가 이니니 성 주위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하거나 투석기, 토성을 쌓거나 땅을 파서 강물로 침수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기병 지휘에 좋다면서 선정한 전장인 달천변의 사주 지형은 서쪽의 강과 논밭, 좁은 진격로와 각종 장애물 때문에 기병의 기동을 극히 제한시켰고 바로 앞에 보이는 고니시의 중군에만 집중하느라 충주성 방면으로 우회하는 일본군은 전혀 신경쓰지 못했으며 수적으로 더 많았던 보병대는 후방에 처져 있고 기동력을 제한당한 기병대만 홀로 적진에 돌격하다 일거에 밀려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회전에서 기본인 보병과 기병의 연계가 전혀 이뤄지지 못했고 충주성에 방어 병력도 변변한 시설도 없음을 모르지 않았을 사람이 역시 우선적으로 대비해야 할 적의 우회기동 여부도 무시했다. 즉 전장 선정 문제를 제쳐놓고 당일의 전투양상만 살펴봐도 문제가 많았다는 얘기다.

7.1. 반론

다만 이에 대해선 애초에 달천평야에서조차 싸우려던 게 아니었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임용한 박사의 가설에 따르면 신립이 김여물에게 '살고자 하는가?'라고 물은 것이나 신립 특유의 무모한 성향을 토대로 추정컨대 병사들이 달천강을 건너는 동안 신립 본인은 충성스런 부하들과 함께 시간을 끌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44][45][46]

즉 진흙탕에서 기병 돌격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단 얘기다. 결국은 시간 끄는 것마저 실패하긴 했지만 말이다.

쉽게 말해서 신립군은 분명히 퇴각을 위해 강을 건너고 있었던 것인데, 뒤에서 쫓아온 적에게 꼬리가 밟혀 강에서 그대로 학살당한 것이라 보는 주장이다.

8. 이여송의 촌평

그 뒤 명나라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이 조령을 지나다 탄식하기를 ‘이와 같은 형세가 있는데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 총병은 지모가 없다고 말할 만하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1592) 4월 14일 기사
명나라 구원군으로 온 이여송이 "조령과 같은 천혜의 험지를 지키지 않다니 신 총병은 참으로 꾀가 없는 장수로다."라며 신립의 오판을 비웃었다는 기록이 있다.[47]

신립을 까는 근거 중 하나로 쓰이는 구절이지만 이여송은 앞뒤 다 짤라먹은 단편적인 정보만을 전달받은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또한 조선 조정에서 명나라에 보고할 때 아예 잘못된 정보를 보고한 것이라 보는 관점도 있다.
"조선국 배신(陪臣) 원임 의정부 영의정 정철(鄭澈), 영중추부사 심수경(沈守慶), 의정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등은 진정서(陳情書)를 삼가 바칩니다."
(중략)
"이일이 흩어진 군졸을 거두어 조령(鳥嶺)으로 물러가 지키려 하였는데, 신립(申砬)이 순변사(巡邊使)로서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이일을 맞아 충주에서 함께 지켰습니다. 적이 정탐하여 방비가 없음을 알고 밤새 재를 넘어 곧바로 나아가 성을 에워쌌습니다. 신립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죽게 되자, 우리 군사는 적에게 밀려 모두 금탄(金灘)에 빠지니, 강물이 흐르지 못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1593) 11월 14일 기사
이 전투가 벌어진 다음 해, 류성룡선조에게 명나라 사신과 무슨 대화를 했던 것인지를 말하는 부분이다.

보다시피 류성룡은 명나라에 '신립군이 충주성에서 싸웠다'고 보고했는데, 이게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48] 이여송 입장에선 천혜의 요새인 조령을 버려 놓은 주제에 (공격전도 아닌) 굳이 방어전 하겠답시고 충주성[49]에 들어갔다고 하면 어이없어할 법도 하다.

하지만 적의 우회 병력까지 모아 결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하면 잘 좀 싸우지 그랬냐며 혀만 끌끌 차는 정도에서 끝났을 것이다.

9. 여담

파일:Battle of Pavia Royal Armouries Museum Leeds Yorkshire.jpg
  • 신립이 당시만 해도 조선에서 가장 풍부한 전투 경험을 지닌 제일가는 맹장이었고 당시 국운을 걸었던 최후의 전면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일전에서 제대로 된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병력까지 전멸시킨 너무나 충격적인 전투였기에 신립의 행동이 너무나 이해가 안 된 조선 시대에는 신립이 귀신에 홀려 탄금대에 진을 쳤다[51]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조선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립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증거라 하겠다.
  • 관련 사료는 많지만 그 내용의 상당수가 탈영병들의 변명, 조정 대신들의 책임전가, 근거 없는 낭설 등이 대부분인지라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등 교차검증이 전혀 되지 않아 당시 정황을 파악하는 데 있어 큰 방해가 된다.
    1. '조령에 아무도 없자 일본군이 함정인가 싶어 당황해서 박수까지 치며 지나갔다.'[52], '일본군이 조령을 지키지 않은 조선군 장수의 판단을 비웃었다'[53] 등의 썰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애시당초에 일본 기록엔 등장하지도 않거니와[54] 그걸 누가 들은 거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임용한 박사는 '일본군의 그런 세세한 동태까지 파악할 정도였으면 우리가 이기지 않았을까?'라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2. 신립이 조총을 무시했다는 징비록의 기록도 신뢰하기 어려운데, 징비록에 의하면 이때 일본군 조총의 위험성을 경고한 건 류성룡 본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분명 징비록 초반에선 류성룡이 '일본이 쳐들어오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호언장담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럼 류성룡은 일본이 쳐들어올 일은 절대 없을 것이지만 일본의 조총은 조심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그림이 나온다.[55]
    3. 조선 측 기록에는 김여물이 남한강에 투신했다 되어 있지만 일본 측 기록인 회본태합기와 프로이스 일본사에선 김여물이 생포 후 본인의 의사로 처형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연려실기술에선 이일이 패주해 와서 적이 강하다고 외치는 걸 본 신립이 '도망친 패장 주제에 우리 부대 사기까지 떨구려는 거냐'며 죽여버리겠다고 노발대발했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선조수정실록과 상촌집에는 오히려 이일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죽겠다 말하니 신립이 위로하며 갑옷까지 입혀준 뒤 같이 싸우자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5. 연려실기술에선 이일이 신립을 만나자마자 '이제 와서 험한 곳에 주둔하긴 늦었으니 차라리 한양으로 퇴각하자'고 건의했다고 되어 있으나, 난중잡록에는 '김여물산길을 지켜야 한다는 이일의 의견에 동조했다'는 정반대의 기록이 나온다. 이 두 기록을 취합하면, 이일은 조령에서 진 잘만 치고 있던 신립에게 산에서 나오자고 했다가 막상 하산하려니까 다시 조령을 지키자고 했다는 괴상한 결론이 도출된다.[56]
    6. 선조실록에는 '신립군이 처음엔 단월역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교전 과정에서 점점 탄금대 쪽으로 밀려났다'는 기록과 '신립과 이일이 충주성에서 싸우다가 패색이 짙어지자 탄금대 쪽으로 퇴각했다'[57]는 납득하기 어려운 기록이 공존하고 있다. 반면 선조수정실록에선 처음부터 탄금대에 진을 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선조수정실록의 또다른 기록마냥 신립이 한양으로 퇴각할 계획이었으면 탄금대가 아닌 단월역 쪽에 진을 쳤어야 맞다.
  • 많은 사람들이 조령을 지키는 선택을 했을 시 임진왜란의 운명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 일본군이 대기병 전술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는 이상 많아야 3천 명에 불과한, 그것도 중기병도 아닌 경기병이었던 기병대는 승리하더라도 반드시 어느 정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경우 바로 뒤에 따라온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2만 3천 명에 패전하는 것은 확정이었다. 물러나기도 불가능함이 확실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2군은 바로 탄금대 전투가 벌어지는 그 시점에 충주성을 우회하여 북상했다. 즉 시간이 너무 짧다. 결국 이러나 저러나 신립 군이 퇴각을 하지 못한 이상 몰살은 확정적이었다.
  • 정유재란 당시에 일어난 직산 전투와는 적잖은 공통점이 있는 전투로 당시 임진, 정유란 초기 단계에 각각 부산진 전투와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임진왜란), 남원 전투(정유재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압도적인 기세로 북상하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적 목표를 가진 전투라는 점, 평야 지대에서 (아군이) 다수의 기병대를 운용하여 벌인 일대 회전이라는 점 등이 같다 하겠다.

    차이점이라면 신립군은 거의 냉병기 위주의 보병과 경기병으로만 편제되어 있었지만 해생군은 화포와 중기병 위주였고, 대규모 병력끼리의 결전이었던 탄금대 전투와는 달리 직산 전투는 선발대끼리의 간보기에 가까웠다. 또한 이순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던 해생과는 달리 신립은 고스란히 혼자서 일본군을 섬멸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1:1 비교가 어려운 감이 없잖아 있다.

    기병으로 크게 패하고 전멸한 전투라는 점에서 벽제관 전투와도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이쪽 역시 지휘관 능지 이슈가 있었다.[58] 차이점이라면 확실히 일본군보다 열세였던 신립군과는 달리 이여송의 북군은 일본군의 2배 가까이 되는 병력이었고, 또 적에게 유의미한 타격조차 주지 못하고 꼬라박은 탄금대 전투와는 달리 벽제관 전투는 일본군의 피해도 상당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10. 대중 매체

후술할 징비록의 사례만 봐도 알겠지만, 현재 학계의 연구동향을 그대로 묘사하면 일단 스토리가 굉장히 재미가 없어지고, 결사항전의 맹장이라는 신립의 캐릭터성도 희미해져서 그냥 개성없는 설명충 캐릭터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그냥 배수진 치느라 그랬다고 대충 퉁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다만 상술했듯 여러 가설 중 배수진 활용설이 가장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게 문제다.

10.1.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 12화에 나온다. 상술한 가설 중 전형적인 '배수진 활용설'을 채택했다.

신립이 원래 조령을 방어하려고 했는데 탈영병이 많아서 달아날 곳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는 설정을 사용했다. 소 요시토시가 부상입은 포로들을 풀어주어서 포로들이 퍼뜨린 소문이 공포로 변하며 신립 수하의 병사들이 대거 탈영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만 기병은커녕 말이 단 1필도 안 나오고 죄다 웬 보병만 죄다 등장하는데, 실제 역사에서 신립의 100인 철기대가 전투에 돌입하자마자 죄다 산화돼 버리는 바람에 보병들만 남아서 우왕좌왕했던 걸 차용한 듯하다.

전투에서 신립이 패배하자 병사들이 "어차피 패한 전투 뭐하러 싸우시는 거요? 장군님은 한강으로 후퇴를 명령해 주십시오"라 말하자 신립은 그 병사를 죽였다. 그러자 다른 병사가 "어차피 패한 전투다. 살고 싶으면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면서 도망가자 병사들이 죄다 도망갔다. 이렇게 조선군은 궤멸하고 현소가 궤멸된 조선군의 시체를 보며 불경을 읊조리는 장면이 나오며 홀로 남은 신립(김영인 분)은 절벽끝에서 오열하면서 배에 스스로 칼을 꽂은 채 비장하게 자결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10.2.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

상술한 가설 중 전형적인 '배수진 활용설'을 채택했다.

출정식부터 신립의 투구가 땅에 떨어지는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는 징비록의 기록이 소개된다.

이동 중에는 제승방략 체제의 문제 등으로 하루에 100여 명씩 도망병이 발생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나레이터 겸 사회자인 신승수 감독이 한 조선군 보조출연자를 붙잡고 '수염은 왜 이따위로 붙였어?' 등으로 갈구자 보조출연자가 '나 안 할래요!' 하고 툴툴거리며 가버리는 제4의 벽 묘사가 포인트.[60]

결국 신립은 조령을 포기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기병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전투 당일, 하필이면 기병에게 불리한 비가 내렸다. 일본군은 오다 노부나가가 개발한 3단 철포 사격 방식을 이 전투에서 채용해 말 그대로 기병들을 도륙했다. 기존의 사극에서 조총을 마치 현대의 소총 사격하듯 막 사격하는 방식이 아니라 탄약을 장전하고 심지를 꽂은 후 불을 붙이는, 사극에서는 추노 정도에서야 보여준 정식으로 조총 사격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내용은 일본군들이 조선 기병을 사냥하는 것이라서 그런지 낙마하는 기병 장수들만 주야장천 나온다. 게다가 저예산이라 그런지 장소 섭외를 못해서 어디 계곡같은 협소한 지역에서 촬영해 모양이 좀 빠진다.

이 컷의 엔딩은 신립을 포함한 조선 기병들의 시체가 금강에 둥둥 떠 있는 장면인데 이 때 조선 기병들이 흘린 피로 탄금대 강물의 색깔이 갈색에 가까운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 이제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이 전사했다. 이제 우리의 앞을 막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 자 북쪽으로 진격하자. 북진!"이라고 외치며 행군을 시작한다. 그리고 선조는 신립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망친다.

여담이지만 기병 역을 맡은 배우들이 단체로 격구를 수련하기라도 한 건지 말타고 칼 휘두르는 솜씨가 한 두 번 연습해본 짬밥이 아니다. 그 외에도 그놈의 불멸의 이순신 패션[61]만 빼면 탄금대 전투에 대한 묘사는 이 문서에 등재된 대중 매체들 중에선 그나마 고증이 가장 정확한 편이다.

10.3. 불멸의 이순신

소 요시토시: (조령이 텅 비었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듣고) 다시 가서 제대로 살펴! 그 같은 천혜의 요새를 버릴 바보 멍청이가 어디 있단 말이냐?

(장면이 바뀌자마자)

신립: 조령은, 버린다.
57화 중반부터 다루어진다. 수군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답게 이치 전투와 함께 잠깐 지나가듯 묘사되는 전투 중 하나이며[62], 상술한 가설 중 전형적인 '배수진 활용설'을 채택했다.

김여물을 포함하여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벌판에서 기병이 보병보다 더 큰 우위에 있음을 상기시키며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전투를 치를 것을 결정한다. 이에 조방장 변기[63]가 이를 끝까지 반대하자 명령 불복종으로 곤장을 치면서까지 탄금대행을 고집하는데, 그날 밤에 변기를 따로 불러 아군 절반이 오합지졸이라 조금이라도 살 길을 줬다간 전부 도망갈 것이라 여겨 배수의 진을 쳤다고 설명한다. “승리가 아니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야”라고 결의를 다졌는데, 결국 최후에 대한 복선이 되고 말았다. 신립이 조령을 버렸다는 소식에 고니시는 이제 한양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며 좋아하고 다음 날 탄금대에서 조선군과 대치한다.

허허벌판에서 대치하는 양군. 조선군이 돌격해오는 일본군 선봉대를 애기살 난사와 화전으로 격파하자 고니시는 2번째 부대를 100보 앞까지 전진시켜 주력인 신립의 기병대를 끌어내기로 결정한다.[64] 이를 본 신립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 일본군 부대를 향해 기병 돌격을 감행하지만, 기병들이 늪지대에 잘못 들어가 발이 묶이고 만다. 조선군 선봉대는 곧 조총에 벌집이 되었고 당황한 신립은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돌격하나 이들 역시 조총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는다.

기병대가 궤멸된 조선군은 일본군의 총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고, 적에게 포위된 신립은 패배했음을 깨닫게 된다. 고니시는 크게 기뻐하면서 신립을 생포하라는 명을 내리고 태합에게 진상해 "조선의 명장을 사무라이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라는 포스 넘치는 대사를 치며 일본 장군 특유의 사악한 웃음을 터뜨린다.

상기한 요시토시의 '바보 멍청이' 드립 후 1초만에 신립이 바로 바보 멍청이로 전락하는 것도 그렇고 신립을 좀 모자란 지휘관으로 표현했다. 전투에서도 늪지에 발이 묶였는데 띨빵한 표정으로 "물러서지 마라~"만 떠들거나 "물러서면 내 칼에 죽을 것이다"고 엄포를 놓기 무섭게 돌격하는 아군이 조총에 몰살당하는 등 신립을 마구 깐다. 그러나 막판에는 쌍칼을 들고 일본군에 맞서 원맨쇼를 벌이다가 강으로 달려가 최후를 맞이하며 마지막만큼은 비극적인 브금과 함께 굉장히 비장미가 넘치게 넘어갔다.

한편 포졸이 기병이랍시고 말을 타고 있다. 원래 포졸복은 평시 보병 병사 옷으로 전투에 투입된 군졸은 다른 옷을 입었으며, 특히나 기병은 그 자체로 정예병이기 때문에 더욱 든든하게 무장했다. 자세한 사항은 포졸복 참조.

다만 신립군 기병의 절대다수가 급조된 한량 출신임을 감안하면 의외로 엄심갑 같은 가벼운 무장을 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10.4. 징비록(드라마)

[kakaotv(300049725)]
[kakaotv(300049726)]

상술한 가설 중 전형적인 '고립 방지 및 전선 유지설'을 채택했다.

드라마에 대한 평가를 크게 후퇴시킨 에피소드 중 하나이며 괜찮은 퀄리티를 유지하며 시청자들의 기대를 받고 있던 징비록은 탄금대 전투 씬을 기점으로 이전의 평가를 회복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최악의 패배인 탄금대 전투를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재해석해보고자 이런저런 시도를 했지만 결국 그 재해석이 실제 역사의 영역까지 건드려 역사 왜곡을 일으킨데다 연출의 부실함까지 겹쳐 폭망해버린 케이스다.

징비록(드라마)에서 14화의 말미와 15화에 걸쳐 다룬다. 14화 말미에서 상주에서 패한 이일은 신립에 합류하며 조령에서 충주로 진을 옮긴 이유를 묻는다. 이에 신립은 처음엔 조령에서 진을 쳤으나 상주의 패전 소식을 접하고 충주로 진을 옮겼다고 한다.

이런 결정에 대해서 이일이 조총의 위력을 말했지만 신립은 활이 가지고 있는 사거리의 우위와 조총의 장전 시간을 지적하며 승산이 충분하다고 반박한다. 이에 이일은 장전 시간을 상회하는 일본군의 전술 운용을 언급하면서 조령으로 다시 진을 옮기자고 권유한다. 이에 신립의 부장인 김여물도 이일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신립은 거기에 추가적으로 남하하면서 모은 지방군의 열악한 훈련 상태, 다시 조령으로 진군할 시의 시간적 문제, 적이 조령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 한양으로 반드시 거치는 길목인 탄금대에서의 야전 결전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군과 일본군은 탄금대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이에 맞서는 고니시는 이제야 제대로 된 전투를 한다며 좋아하면서 병력을 나눠 중앙과 좌우에서 협공을 하기로 한다. 한편 신립은 이를 예상하며 말의 간격을 최대한 벌려 조총 사격으로 날라오는 총탄을 최대한 피하며 전진한 뒤 조총의 유효 사거리 밖에서 화살을 쏘아 적의 전열을 더욱 분산시켜 공격을 한다는 계획과 함께 일본군의 기세를 꺾고 조선 전체의 사기 향상을 위해 한 바탕 결전이 필요하다며 탄금대를 전장으로 정한 이유를 추가로 말하고 패전을 할지라도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 한강 방어선 정비의 시간을 벌 수 있다고 한다.[65] 마침내 전투가 시작되고 고니시 군이 돌격하기 시작하자 기병들과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고니시 군을 향해 돌격한다.

그러나 측면에 대기하던 요시토시 군의 조총 사격이 시작되었고 그 다음 장면은 조선군이 전멸하고 신립과 김여물만 남아 강변 절벽으로 몰린 장면이다. 일본군 수십 명을 베어버리던 신립은 자신을 지켜보는 고니시를 향해 정정당당하게 장수들끼리 싸우자고 하지만, 고니시는 아무 말 없이 비웃기만 하며 조총대에 사격을 명한다. 결국 신립과 김여물은 조총이 발사되기 직전 절벽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문제는 연출이 대단히 조악해서 조약돌 2개가 퐁당 빠지는 것처럼 묘사되었다는 점.

전투 묘사 역시 불멸의 이순신에 비해 매우 빈약하였다. 들판에 모인 양측 병사들의 규모는 잘 묘사되었는데 비장한 돌격을 시작하며 다음 장면이 곧바로 전멸 장면이다. 사실 2회 앞서 묘사된 부산진 전투의 연출[66]이 매우 훌륭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탄금대 전투에 시청자들이 거는 기대가 은근히 컸기에 실망감이 더 커진 면도 있다. 물론 <불멸의 이순신>에 비해 반의 반도 안 되는 예산(110여 억 원)이 제일 큰 한계였지만[67] 각 전투별 퀄리티 배분을 못 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실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역사 왜곡 문제에 있다. 전투 직후의 전장을 비추면서 내레이션을 통해 탄금대 전투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고니시 군의 절반이 죽거나 다쳤다는 설명을 넣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고니시("이기긴 했으나 희생이 너무 컸어.")와 가토(고니시 군의 손실을 비웃는다.)[68]의 대사를 통해 이를 확인해 주기까지 한다. 무비판적으로 시청할 경우 낚이기 쉬운 연출이다.

그래도 신립의 수은갑이 처음으로 묘사되었고 실제 충주까지 가서 찍기까지 하는 등 여러 참신한 시도를 한 구석이 엿보이기도 한다.

내레이션을 통해 고니시의 군이 탄금대 전투를 통해 많은 손실이 있었기에 한양까지 진군한 후 주저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고대 ~ 현대를 막론하고 부대원의 30%가 손실됐다면 해당 부대는 일선에서 빠져서 즉각적인 재편성과 전투력 복원을 실시해야 한다. 하물며 내레이션대로 사상자가 태반에 이르렀다면 고니시 군은 충주에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고니시와 가토의 한양 쟁탈 속도전 같은 정치적 배경 이전에 물리적으로 더 이상의 진군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의 고니시 군은 탄금대 전투 직후 쾌속 진군을 개시하였고 이는 탄금대 전투에서의 손실이 경미하거나 거의 없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전투 내용도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서의 묘사처럼 일본군이 신립의 부대를 일방적으로 학살한 게 정확하다. 이 정도로 신립이 심각하게 완패했기 때문에 선조 임금이 몽진을 택한 것이다. 일국의 국왕이, 종묘를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 자체가, 어지간한 패배로는 가당치도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니시 군의 병력이 처음의 절반 이하인 8천여 명으로 줄어드는 건 그 다음 해인 1593년, 조명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에서 쫓겨난 후의 이야기이다..

여담이지만 14화의 막바지에 고니시의 일본군 제 1군과 신립의 조선군이 대치하는 장면에서 징비록의 오프닝 ost가 거의 풀버전으로 나온다.

11. 전설

탄금대 전투 후 살아남은 병사들이 물에서 신립을 건져내자 신립의 두 눈은 부릅뜬 상태에다가 두 주먹을 꽉 쥐고 호령할 듯한 기세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성심이 죽어서도 나타난 것이다. 나중에 신립을 장사를 지내게 되자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에 묻혔는데 이곳에 묘가 생기자 말이 못 움직여서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야만 했다. 언젠가 한 지나가던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 말이 못 움직이자 선비는 "아무리 장군의 원통함이 크다 할지라도 무고한 행인들을 불편하게 함은 온당치 못하다."고 호통을 치자 뇌성벽력과 함께 바위 위에 벼락이 내리쳐 바위 윗부분이 없어지고 그 옆에 큰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그 후로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 바위가 훗날 곤지암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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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일본 역법 기준 4월 27일[2] 인조반정의 공신 김류의 아버지다.[3] 명목상으로는 충주목사였으나 전투 직전까지 선천군수를 역임했다. 전임 충주목사 민인백은 순수 문관 출신이라 군재에 밝지 않아 못 미더웠는지 조정에서는 무관 이종장으로 하여금 신립을 보좌하기 위해 조방장을 겸해 급히 충주목사에 임명했다. 즉 이종장은 부임지 충주의 지리나 형세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작전수립 과정에서 별다른 발언권을 제시하지 못했다. 교전 중 자신의 아들 이희립과 함께 전사했다.[4]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났다.[5] 그도 그럴 것이 기관총이 나오기 이전의 총기는 사격할 때에 한해서 수십 미터로 길이가 늘어나는 창과 다름없었다. 애초에 총기가 등장하게 된 이유부터가 풀 플레이트라는 사기템으로 무장한 중기병들을 격퇴시킬 수단이 없어지다시피해서 단순 기병 때려박기로 장창 방진을 박살내는 황당한 짓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고 그 해답으로 나온 총기는 결국 "더욱 큰 장창"을 만드는 대신 총알로 그걸 대신한 물건이었다. 이런 이유로 총검을 통해 총기 자체가 근접무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근접 보병들이 총병들을 보호해야 했던 것이다. 강선총이 나온 이후에도 전열 싸움이 된 것 또한 결국 진형 없는 보병은 기병에게 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고. 궁극적으로 기병 vs. 방진 구도를 깨버린 건 기관총이라는 치트키였다. 이곳저곳에 약탈하러 찌르고 들어오는 북방 유목민들과 씨름하며 기동전을 해야 했던 조선에게는 총기가 쓸 만한 물건이 못 되었던 것이다.[6] 기병 만들 돈은 있는데 왜 총병은 못 키우는지 의문이 들기 쉬운데 2중 전선을 항시 끼고 있던 동로마만 봐도 보병은 오히려 공격용이었다. 공격전의 필요성이 줄어들었을 뿐더러 북방에 유목민들이 깔린 조선 입장에서 기병으로 유목민들을 요격하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부담이었다. 게다가 당대 조선에서는 화약이 귀해서 비축분도 항상 부족했다.[7] 동로마의 주력은 기병이었고 테마 군도 타그마 군도 주력이 기병이었으나 테마 군의 기병은 본질이 좁아진 종심을 지키기 위한 기동 방어용 병력이었고 타그마타의 기병은 정예 충격군이었기에 결국 전쟁의 주축은 여전히 보병이었다. 엘리트끼리 다 해결했던 서유럽 쪽과 달리 동방에선 그게 먹히지 않았다.[8] 궁궐과 수도를 지키던 정예 오위 병력을 포함한 경군.[9] 선조는 비상 시국을 대비해 예비군을 뽑았는데 주로 하급관료나 궁궐의 중인 중 활을 잘 쏘는 사람(약 2천 명), 무사(군대에서 일정 이상 근무하면 관직을 얻나 아직 관직을 못 얻은 사람들)나 재관(하급 무관), 한량(무과에 합격했으나 관직이 없음)을 모아 정군(약 2,000명)으로 삼았다.[10] 탄금대 전투 시 신립 군의 병력 수<논문>에서 발췌[11] 조령과 충주 사이에 비슷한 지명이 2곳 있는데 오늘날 온천으로 알려진 수안보나 안부역/안보역 부근의 대안보 일대. 두 곳 중 한 곳으로 보인다.[12] 이런 병력 배치는 그야말로 자멸 그 자체이다. 기병의 장점은 사람의 주력으로 구사가 불가능한 빠른 기동력과 높은 시점에서 내려치는 강격에서 나오는 참격, 그리고 궁기병인 경우에는 거리를 유지하며 사격을 할 수 있는 점인데.. 기동력이 떨어지는 지형에서 기병대를 굴리면 당연히 기동력이 대폭 떨어지기 때문에 기병대를 굳이 쓴 이유가 사라진 셈이며 게다가 현대전의 전차와 같은 기계와 달리 말들은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에 기동력이 대폭 떨어지는 지대에 가면 당황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게다가 좁고 장애물이 많은 곳이라면 보통 보병을 쓰는 것이 정석인데 신립은 일본군의 포위 섬멸만을 바라봐서 그런지 지형지물에 대한 고려가 없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13] 나중에 이렇게 대책없이 기병(기갑)만 투입한 행위를 제1차 체첸 전쟁보리스 옐친이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서 했다가 병력을 말아먹은 바 있다.[14]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불멸의 이순신에서 이 날 날씨가 비가 왔다는 것을 묘사했다.[15] 재차 말하지만 위 그림에 묘사한 조선군 돌격 횟수나 숫자는 근거가 없다. 그냥 조선군이 수차례 기병 돌격을 했고 이를 성공적으로 저지한 일본군이 좌중우에서 밀어붙여 섬멸했다는 큰 줄기만 맞다.[16] 탄금대에서 전멸한 조선군 기병대가 정예 병력이었던 경군(京軍)이었다는 점도 한 몫 했다.[17]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후술할 가설이 모두 맞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18] 지략가의 대명사 이순신도 녹둔도 만호 시절엔 말타고 여진족 도륙내는 전형적인 맹장형이었고, 제1차 진주성 전투로 이름을 떨친 김시민 또한 원래는 공격전에서 강점을 보이던 장수였다.[19] 신립이 이름만 있는 장군이라면 바보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당대 명장 그뿐만 아니라 맹장 그 자체인 사람이고 전투를 수 없이 경험한 인물이기에 더욱 이해 못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에? 라고 그 당시에도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다. 여러 내용을 종합하면 신립은 계속 진지를 바꾸어야 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고 최소 전투 당시 상황과 적의 작전을 오판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조령이 아니라 적의 이동과 상황을 오판했다는 것 이다.[20] 일본의 1, 2, 3군이 쪼개지기 전 마지막 방어선.[21] 이 문제는 여말선초부터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 對 왜구 교리를 살펴봐야 한다. 북방 여진족이나 왜구와의 한정적인 소규모 교전 경험만을 기억한 조선군은 지형, 숫적 열세조차 무시하는 (궁)기병·공세 만능주의가 심각했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전투가 탄금대 전투와 함경도에서 가토 기요마사 군과 한극함의 기병대 사이에 벌어진 해정창 전투로, 해정창 전투에선 창고 뒤에 단단히 엄폐하고 있는 다수의 조총병들을 상대로 막무가내로 궁기병대를 돌격시켰다가 아군을 궤멸시켰고 탄금대 전투에선 논밭과 장애물이 많은 곳에서 단단한 방진을 구축한 일본군 정면으로 궁기병대를 돌격시켜 훨씬 큰 규모로 참패했다.[22] 고려 말 왜구의 침입부터 조선 중기 왜변의 교전 양상을 살펴보면 해전 위주의 이전보다 지상전, 특히 기병전의 비중이 커져와 대 왜구전 주력 병종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성계의 가장 큰 전공인 황산 대첩의 선봉에 선 군대가 고려인과 여진인들로 구성된 기병부대 가별초였고 최영과 이성계 등이 수 차례 격전 끝에 도출해낸 정답도 '1차로 바다에서 수군으로 막고 상륙 병력은 기동력이 우수한 기병으로 친다'였다. 중종대 삼포왜란, 명종대 을묘왜변도 지상전에서 승부가 갈렸다. 을묘왜변 때 활약한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는 소수의 정예 돌격대로 말을 타고 적진에 돌격해 개인 전술로 싸워 공을 세웠다. 또한 고려말부터 이어진 조선군의 대 왜구 전술 자체가 지상전, 기병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으며 사실상 남조의 군대였던 고려말 왜구의 준동이 대마도 정벌로 막을 내리고 조직화되지 않은 약탈만 이어지게 되면서 기병이나 석전군 같은 소수의 정예 병력을 활용해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23] 멀리 갈 것 없이 신립이 복무했던 온성군 역시 두만강 연안을 제외하면 면적의 대부분이 기본 해발 100m가 넘는 고지대로 구성되어 있다.[24] 기병전의 문제를 지적할 때 탄금대의 뻘밭과 궁기병의 충격력 부족을 흔히들 거론하지만 조선군이 이런 대규모 회전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대규모 기동훈련인 대열(大閱)과 강무(講武)는 조선 전기에도 연 단위로 행해지던 훈련이었다. 대열(大閱)은 군사들이 진법 훈련을 한 후 왕이 이들을 사열하는 훈련이고 강무는 왕이 특정 지역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간 다음 그곳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실질적인 기동 훈련인데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니 비용 소요도 높고 농사일을 하던 백성들을 끌어모아야 하고 사냥(기동 훈련)을 겸할 경우 해당 지역은 낟알이 여물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조기 추수에 들어가서 백성들의 그 해 농사에 큰 지장을 주기 때문에 민폐가 심했다. 특히 사냥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연산군이 강무를 핑계로 수시로 사냥에 나가 논밭을 망가뜨리고 백성들의 집을 빼앗은 탓에 연산군 이후의 왕들은 연산군의 재래 소리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냥을 자제해야 했다. 이로 인해 선조 시대 조선군은 수성전·사격전 역량이나 소수 정예 위주의 각개전투 기술은 꾸준히 배양했지만 대규모 기동전 역량은 전무한 상태였다. 조선 전기의 창기병들도 여진족과의 비정규전에서 1대1로 싸우는 상황만을 상정한 것으로 보이며 정규전에서 기병 돌격으로 보병 대열을 무너뜨리는 개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료는 없다. 이러니 탄금대가 기병 운용에 아주 유리한 지형이었다고 해도 승리에 필수적인(그리고 실전에서 전혀 이뤄지지 못한) 기병-보병간의 연계와 일본군의 우회 기동에 대한 대비가 되었을지 의문이다. 기병 저지력을 충실히 갖춘 보병이 조총으로 화망을 펼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병자호란 때 김화 전투가 잘 보여준 바 있다.[25] 스웜 전술은 계속해서 퇴각하며 적을 유인할 수 있는 광활한 전장이 필수이다. 그러나 달천평야의 경우 달천강에 발이 묶여 기병들이 제대로 퇴각조차 하지 못했다.[26] 이 탓에 기병이니까 평야에서 싸워야 된다 운운은 그냥 블러핑이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27] 이 주장대로라면 서양사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자주 쓰던 망치와 모루 전술과 같은 맥락과 속한다. 배수진의 보병들이 모루로 적을 묶어 두었다가 기병대들이 배후를 치면서 망치와 같은 역할을 했다면 적어도 승리할 수 있었다. 타당성도 있는 것이 기병은 돌격할 수 있는 것은 중기병이고, 궁기병은 근접전을 최대한 피하면서 원거리로 적을 농락하거나 지원 사격으로 쓰였기에 만일 이 전술을 택했다면 적어도 전술적인 면에서 고평가를 받았을 것이나, 그가 기병을 대놓고 최전방에 세운 것이 화근이었다.[28] 단 신립이 데려간 보병 중에는 궁병이 다수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쏠 줄 아는 사람정도는 있었겠지만 병종 편제는 되어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29] 이 계산대로면 왜군이 조령을 넘어오는 시간은 4월 29~30일 이다.[30] 이는 당시 대규모 전쟁 경험이 부족한 조선군의 척후능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온갖 경험으로 무장된 왜군의 경우 조선군과 비교했을 때 척후의 타이밍 및 적 척후 차단 기술 등 중요한 기술에 있어서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만약에 여러 척후에게서 동시 다발적으로 보고가 들어 온다던가, 교리로써 확립된 제대로 된 보고를 들었다던가 했다면 신립도 척후의 보고를 믿었을 것이다.[31] 남은 차선은 더 후방에서 싸우는 것 정도이고 실제로 신립은 그것을 상소하기도 했다.[32] 실제로는 신립이 파악한 수 보다 더 많은 왜군이 북상 중이었다.[33] 즉 이 주장에 따르면 아래의 조령 무용론과 그에 대한 반박도 전부 전제부터 틀렸다. 조령을 막는다는 의미는 정말 조령만 막는다는 의미가 아닌 그 주변의 작은 산길을 전부 분산해서 차단한다는 의미인 것이다.[34] 이들을 신뢰할 수 있으면 이들이 분산된 병력을 통제하면 되기 때문이다.[35] 이런 문제가 있는데 왜 훈련 부족을 핵심으로 꼽냐면, 원래 중앙군의 존재의의가 위와 같은 향토 병력의 우세를 덮어버릴 수 있을 만큼 훈련과 병기관리, 물자, 지휘능력, 병력구성의 균형 등에서 우세한 '완편 부대'이기 때문이다. 중앙군이라면 마땅히 높은 훈련도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는 원인은 중앙군이 중앙군답지 못하게 훈련이 부족한 상태로 긴급소집된 급조 부대라는 점이 기본 원인이라는 것이다.[36] 중간 목적지는 서울이였으나 상륙 날짜와 여기로 가는 루트는 저마다 달랐다. 고니시는 조령, 가토는 죽령을 넘으려다 조령으로 선회, 구로다는 김해를 거쳐 추풍령을 통과하는 길을 잡았다.[37] 사실 이 주장은 일본군의 다른 부대에 의해 후방이 차단될 가능성보다는 그냥 눈앞의 고니시 부대의 우회기동에 의해 후방이 차단될 가능성, 또한 그걸 감지하기 힘들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이다.[38] 다만 총의 장점은 관통력뿐이고 조선에선 활과 비교해 별 차이 없는 장점이라는 말은 동북아에서의 갑옷과 조총의 위치를 너무 간과한 것으로 비록 동북아가 서양의 플레이트 아머 수준의 갑옷에는 이르지 못한건 사실이지만 동양의 갑옷도 화살에 대한 충분한 방호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갑옷이 아니다 하더라도 방패나 하다 못해 차일(가리개) 같은 간단한 방어책만 있어도 활의 살상력은 극히 저하되었다. 실록에도 갑옷입은 여진족 상대로 화살이 통하지 않았다거나 삼포왜란 당시 중무장한 왜구 장수에게 활을 수십 발 쏴도 개의치 않는다거나, 군기시에서 실험을 했는데 갑옷을 뚫지 못했다거나 갑옷, 심지어 지갑(갑옷)과 같은 경량 갑옷이라도 있으면 활에 대해서 방호력을 지닐 수 있다 하는 기록들이 나온다. 태조 이성계가 아지발도를 저격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 쌍령 전투 당시 조총대의 사격으로 후퇴했다가 다시 전진하는 청군을 보며 혼란에 빠진 조총수들 대신에 화살 수십 방을 쐈던 선세강도 나무 방패 하나 때문에 청군을 결국 저지하지 못했다. 만약 조총수들이 윤방을 할 수 있었다면 나무 방패건 뭐건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활이 경장갑으로 무장한 적을 상대로는 총과 마찬가지로 유효한 것이 사실이나 유효 사거리 내에서 총의 관통 능력과 살상력, 그리고 제압 능력은 상대가 경장갑이건 중장갑이건 뭐건 활이 비겨낼 것이 아니었으며 조총 전래 이후에 이것만 있으면 항우건 뭐건 한 방에 죽인다며 병과 불균형 문제가 터질 정도로 조총을 도배하던 '활의 나라' 조선은 물론이고 명나라나 청나라까지 주력으로 받아들이며 편제했던 것이 과장이 아니었다. 애초에 동북아에서의 전장 환경에서 총과 활의 살상력이 도긴개긴으로 나타났다면 그렇게 열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며 병기의 메인스트림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총이 가지는 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위력에 대한 찬사는 당장 우리 실록을 위시한 기록에 수없이 등장한다.[39] 고대에나 현대에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적에 대한 정보와 진격로이기에 야전병들과 탐색병들에 대한 위치가 가장 중요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불패 신화도 이 야전병들과 탐색병들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만일 야전병과 탐색병이 제대로 일을 안 하면 곤장을 때렸다고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순신의 불패 신화가 이순신 본인에게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정찰병이나 탐색 및 야전병의 활약도 있었기에 전략을 짤 수 있었던 것이다.[40] 경상도를 넘겨준 이일과 충청도를 넘겨준 신립을 무작정 비난만 할 순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애시당초에 대여진 군사교리뿐 아니라 빠른 기동력의 군대를 급파된 사령관이 현장에서 급조된 징집병들만 데리고 뭘 어떻게 막아야 됐다는 말인가.[41] 이렇게 패한 전례가 있다. 밀양 부사 박진이 황산 잔도를 방어할 때 일본군은 병력을 분산해 한 쪽이 박진 군과 정면에서 싸우고 다른 쪽은 산을 우회해 박진 군의 후방을 쳐 와해시켰다.[42] 사실 이쪽이 앞뒤가 더 맞는 감도 없잖아 있는데, 신립이 이일의 조언을 무시할 정도로 오만한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이일을 보자마자 참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러나 오히려 이일에게 갑옷을 입혀주고 지휘부에 합석시키는 등 융숭하게 대접해 주며 왜군에 대한 정보를 알려달라라고 부탁했던 것을 보면 '이 순변사가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정도면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43] 물론 이건 조령과 충주성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조령은 방어용으론 우수했지만 보급이 사실상 불가능한 환경이었고, 당시의 충주성은 한양 도성보다도 더 조악한 수준이었다. 차라리 한양은 보급이라도 확실히 기대할 법 하다.[44] 이렇게 생각하면 굳이 달천평야에서 보병을 후방에 배치하고 기병과의 간격을 넓게 벌리는 이상한 배치를 한 것도 납득이 간다.[45] 프로이스 일본사에 의하면 탄금대 전투 당시 조선군 병력 중 대부분은 비겁했지만 일부 병사들은 매우 용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신립의 100인 철기대를 제외하면 전부 도주 중이었음을 추정케 한다.[46] 또한 이일의 경우 도주한 게 아닌, 신립이 일부러 (장계를 올려 달라고) 한양으로 올려 보낸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일은 (통념과는 달리) 도망치려고 벌거벗은 게 아니라 강을 건너기 위해 갑옷을 벗어던진 거란 얘기가 된다.[47] 근데 참 얄궂게도 이 이후로 이여송 또한 벽제관에서의 오판으로 참패한 뒤 사실상 리타이어하게 된다. 물론 이여송은 조선군이 싼 똥을 치우다가 본인도 실수한 것이기에 나름 억울한 부분도 있겠지만, 어쨌든 남의 죽음을 두고 꾀가 없니 운운하며 비웃다가 똑같이 판단미스로 참패했으니 좀 모양이 빠지는 것도 사실. 그 외에도 이여송은 이일, 김경로, 이시언 등을 고문관 취급하면서 노발대발하다가도 막상 본인이 져서 도망칠 땐 류성룡에게 온갖 변명만 늘어놓는 등 남에게 는 누구보다도 엄격하면서 자신에겐 한없이 관대했던 옹졸한 구석이 있는 장수였다.[48] 학계에선 달천평야에서 싸웠을 거라 보는 게 대부분이다.[49] 임진왜란 시기에 파병된 명군들이 조선에 와서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조선의 성은 무슨 담장이냐?'이다. 특히 내륙에 있는 성일수록 더 심했는데, 조선이 부산진 전투, 다대포진성 전투, 동래성 전투에선 엄청나게 분전하다 내륙에서부턴 미드오픈 수준으로 털린 이유도 이것이다. 프로이스 일본사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50] 당시 프랑스군은 화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처럼 대포위주로 군대를 구성해서 공성전을 하거나 기병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51] 임진록의 어떤 판본에서는 신립이 이전에 죽인 자의 원혼이 양민으로 가장하여 신립에게 거짓 정보를 고한 탓에 탄금대를 결전장으로 택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온다. 또 어느 야담(野談)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한다. 신립을 사모하던 처녀가 집에 불을 지르고 분신 자살한 후 원혼이 되어 따라다니는 것을 장인인 권율이 유리병에 봉인해 호신부(護身符)로 지니고 다니라고 주었다. 그러나 결전 직전의 작전 회의 중 이 유리병의 마개가 뽑히며 "탄금대로, 탄금대로." 하고 원혼의 목소리가 울렸는데 신립이 이를 하늘의 뜻으로 오해하여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쳐 장렬히 전사했다는 이야기다(이우혁왜란종결자도 이 쪽이다.). 조령을 지키는 관문인 문경새재가 있는 경상북도 문경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토착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52] 징비록의 기록.[53] 후술할 불멸의 이순신에서 차용한 야사.[54] 의외로 일본 측 기록인 회본태합기나 프로이스 일본사에선 소백산맥의 험준한 지형에 대한 언급이 없다. 서정일기에도 문경을 지났다고만 언급할 뿐 그 외의 추가 기록은 없다. 조령을 무슨 조선 최후의 희망이나 비대칭전력 취급하던 조선 측 입장과는 달리, 의외로 일본 측 입장에선 그냥 지들 전국시대에도 흔히 건너던 그 정도 고개였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55] 더욱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당시 일본에서 조총을 가져와서 소개한 건 다름아닌 황윤길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라던 주장에 비관적이던 류성룡이 정작 황윤길이 가져온 조총에는 뜬금없이 꽂혀서 조총위협론을 펴는 모습이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다.[56] 사실 탄금대 전투 당시 이일 관련 기록들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은데, 왜적과 직접 싸워본 장수가 정보랍시고 가져온 게 고작 '적은 매우 강하다'와 같은 세살배기 어린애도 알 법한 당연한 정보일 리가 없다. 특히 이일은 제승방략을 완성할 정도로 병법에 통달한 지장이었던 만큼 적의 병력 숫자나 진격로, 진격 속도 등을 파악한 채 보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최소한 왜군의 조총은 화망을 짜고 교차사격하는 식이라 위협적이라는 점이나 왜적의 창이 조선군의 창보다 훨씬 길다는 점 등의 기본적인 특이사항 정도는 당연히 보고했어야 맞다. 하지만 사료에선 이런 내용들이 전부 누락된 걸 보아 신립군 지휘부에서의 논의 또한 생략된 부분이 많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57] 정확힌 류성룡이 명나라에 보고한 내용.[58] 다만 벽제관 전투는 유인전술에 말려든 거라 탄금대 전투와는 조금 다른 케이스긴 하다. 오히려 신립의 동생인 신할이 사고를 친 임진강 전투와 더 비슷한 케이스라 봐야 맞다.[59] https://youtu.be/PJZdlzkgsGg?feature=shared[60] 92년판 영상 36분경 93년 재방영판 1부에서 25분 2초부터 나온다. 감독이 야. 이놈아. 진군중 대열을 이탈하면 어떡하냐? 라는 말과 함께 수염으로 딴지를 걸자 이에 빡친 보조출연자가 모자를 집어던지고 화살통을 내리더니 아 참~ 증말! 나 오늘 못하겠네요. 라고 말한다. 해당 출연자가 사라지자 감독은 시선을 시청자쪽으로 돌리더니 '지금 보셨다시피 이처럼 하루에 이탈하는 병사가 무려 백여명이 넘었다.'라고 하면서 자막과 함께 친절하게 해설한다.[61] 장수는 두석린갑, 병사는 포졸복+당파.[62] 이 드라마에서 그나마 비중 있게 묘사되는 육전은 제1차 진주성 전투밖에 없다.[63] 드라마에서 전투전 신립과 여러 장수들의 회의신에서 유일하게 등장인물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64] 사위인 소 요시토시가 적의 화력이 예상 외로 막강하다며 주저했지만 고니시의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는 명령에 부대를 전진시킨다.[65] 이게 말인지 막걸린지 모를 이야기다. 정예 병력의 다수를 이끌고 내려간 중앙군의 장수가 승리를 위한 작전 계획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패전부터 염두에 둔 작전 계획을 제시한 게 첫째 문제이고 둘째는 문경새재를 막더라도 다른 곳이 뚫리면 한양이 위험하기에 결전에 임해 적의 격파를 해야 한다고 했던(일종의 각개격파의 개념에 가깝다) 전의 이야기와 상충되는 이야기이다.[66]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일선의 병사들까지 세심하게 다룬 디테일, 조총 사격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조선군을 비추는 긴박한 앵글과 저속 촬영 기법, 그리고 정발 장군 이하 부산진성 관민들의 눈물겨운 처절한 저항까지 고루 비춘 에피소드였다.[67] 다만 불멸 역시 육전보단 해전 묘사에 더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육지에서의 전투는 해상에서의 전투에 비해 좀 설렁설렁 넘기는 분위기가 있었고 스케일도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연히 예산도 해전에 비해서는 좀 덜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징비록은 방영 시간 50분에 50부작으로 방영 시간 50분인 104부작이던 불멸의 이순신 절반 분량밖에 안 된다.[68] 절반이 넘는 손실의 승리 태합전하께서 기뻐하실 걸세.라고 가토가 언급한다. 물론 작중에서 고니시는 사야가의 투항을 언급하며 가토의 발언을 반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