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9 15:40:31

김여물

金汝岉
1548년(명종 3년) ~ 1592년(선조 25년)

1. 개요2. 생애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인조반정 공신인 김류의 아버지 및 김경징의 할아버지.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자(披裘子) 또는 외암(畏菴), 시호는 장의(壯毅).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어느 정도의 지략과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던 듯하며 류성룡신립 역시 재주를 인정하였다고 한다.

2. 생애

1548년 황해도 평산도호부(현 황해북도 평산군)에서 찰방(察訪:종6품)을 지낸 아버지 김훈(金壎)과 어머니 신천 강씨(信川 康氏) 강의(康顗)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김여흘(金汝屹)과 아래로 동생 김여율(金汝㟳)이 있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 생원시에 3등 3위로 입격하였고 1577년(선조 10) 알성시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병조낭관(兵曹郞官), 충주도사(忠州都事)를 지내다가 의주 목사(義州牧使:정3품)로 있던 1591년 정철의 부하로 몰려 파직되어 투옥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의 명을 받고 신립 밑의 종사관으로 충주 방어에 나섰다. 조령의 문경새재를 이용하여 방어하자는 김여물의 건의를 신립이 묵살하는 대신 어리석은 계책을 세우자 필패할 것을 예견하고 아들에게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라는 유서를 쓰는 한편 가족들을 피난시켰다고 한다.[1] 그의 예상대로 신립군은 탄금대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김여물 역시 남한강에 투신 자결하였다.[2] 사후 아들인 김류가 인조대의 권신이 된 덕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 신립이 김여물의 건의를 묵살한 것은 사실이지만 뒷 이야기는 말도 안되는 소리다. 원래 전투를 앞둔 군인은 유서를 쓰며 가족도 당연히 대피시킨다. 신립과 전략회의 한 이후는 커녕 조정에서 출발하기도 전에 하는게 정상이다.[2] 일본측 기록인 회본태합기에서는 최후가 조금 다른데, 그 기록에 의하면 "내가 김여물이다" 하고 크게 소리친 후 그대로 전장에 닥돌해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뚜렷하게 일본측 기록에 이름이 남았을 정도로 분전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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