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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웅포 해전 熊浦 海戰 | ||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 1593년 (선조 26년) 3월 12일 ~ 4월 7일 (1593년 음력 2월 10일 ~ 3월 6일) | |
장소 | 조선 경상도 웅천 | |
원인 | 일본군의 재정비 및 웅포 연안 전진 기지 구축 | |
교전국 | <rowcolor=black> 조선 (공세) 승 | 일본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이순신 (충무공) 원균 이억기 | 지휘관 와키자카 야스하루 쵸소카베 치카우지 †[1] 구와나 치카카츠 † 하타 치카시 |
병력 | 조선 전선: 181척 - 판옥선: 89척 - 전라좌수영: 42척 - 전라우수영: 40척[2] - 경상우수영: 7척 - 거북선: 3척 의병/승병: 1,700명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전함 1척 침몰[3] | 전함 51척 침몰 사상자: 2,500명 |
결과 | 조선의 승리 | |
영향 | * 일본 - 명 강화 협상 입지 약화 * 일본군의 한양 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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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웅포해전 전개도[4] |
임진왜란 당시 1593년(선조 26년, 계사년) 2월 10일 ~ 3월 6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웅포 일대에서 벌인 전투. 이순신이 벌인 가장 최장기 전투로, 1개월 3일이나 진행되었다. 이순신이 벌인 최초의 상륙전이 포함되며, 이외 6~8회의 해전도 전부 승리했다.
2. 전개
2.1. 배경
1592년 5월~9월(음력 기준 서술)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다수의 해전에서 일본 수군 380여척을 격파했으나 여전히 350여척이 남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력한 지원 아래 일본군은 빠르게 복구되었다.1593년 1월 9일, 4차 평양성 전투가 조명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자 전선은 임진강 이남까지 급격하게 남하하기 시작했다.
1593년 2월 초 시점, 일본군은 부산포에 500척 규모의 함대를 재건했다. 또한 부산포로 가는 해상 길목을 틀어막는 웅포에 전선 115척과 병력 1만 6천명의 전진기지를 설치했다. 웅천읍성 앞 웅포는 폭 600m 중 진입가능 폭은 200m에 불과하고 길이 1.5km인 협곡의 만이라 판옥선들이 가로로 늘어져 공격할 수 없고 깊게 들어올 수만 있는 곳이었다. 또한 좌우에 높은 남산(웅포왜성도 건설), 백석산(오늘날 흰돌메공원)이 있어 들어오는 적을 조총 사격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또한 '도자기 전쟁'이었던만큼, 인근에 웅천 도요지가 있던 점도 이 곳을 거점으로 삼은 이유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웅포의 적군을 무시하고 부산포를 공격하면 뒤에서 또는 후퇴 시 협공 내지 기습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 웅포를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1월 말 ~ 2월 초, 선조가 선전관 채진과 안세걸, 5일 동안 2차례나 보내, "명나라 군대가 평양의 적을 소탕한 그 뒤를 이어 바다 길로 도망치는 적을 차단하여 요격하라"고 명령했다. 「한 척의 배도 돌려보내지 말라」(片帆不退)는 강력한 왕의 지시였다. 하지만 당장은 일기가 불순하여, 맑은 날을 기다렸다.
2.2. 출전 (1월 30일 ~ 2월 9일)
2월 6일,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가 정오에 판옥선 42척으로 출전하여, 남해도 남단 미조목을 거쳐 사량도에서 1박했다.2월 7일, 거제도 견내량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 함대 판옥선 7척과 합류하였다.
2월 8일, 정오에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가 도착해 40척 미만의 판옥선과 합류하여, 총 89척의 연합함대를 구성했다. 연합함대는 오후에 견내량을 통과해, 저녁 늦게 칠천도의 외줄포[5]에 당도했다.
2월 9일, 일기 불순으로 해상 기동이 불가능해 계속 유박하며 작전 계획을 검토했다.
2.3. 해상전 (2월 10일 ~ 2월 20일)
2월 10일, (1차 전투) 조선 수군은 웅포 앞 송도 서쪽에 결진 대기했다. 조선 수군이 가볍고 빠른 배 몇 척으로 '별안간' 웅포로 들이닥치자, 일본 수군은 황급히 이를 추격해 나왔다. 하지만 송도 뒤 본대 쪽까지 으슥하게 들어가자 더는 유인되지 않고 돌아갔다.이번엔 전선을 대열을 나누어 일제히 진격해 진입해보았다. 좌우측 남산/백석산의 일본군은 깃발을 많이 벌려 꽂고, 철환을 빗발치듯 쏘아댔다. 이에 조선 수군은 총통과 화살을 우뢰와 같은 기세로 응수했다. 이러기를 하루에 2~3차례 하자 양측 산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2월 12일, (2차 전투) 똑같이 하루 3차례 포격을 하고 돌아왔으나 일본 수군이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험한 설비가 의심스러워 포구 안쪽까지 깊이 들어가지 못 했고, 육지로 상륙전을 할 준비도 되지 않아 분개한 마음을 가진채, 칠천도로 돌아가서 재정비하기로 했다.
2월 17일, 선조가 1월 29일에 보낸 선전관 이춘영이 칠천도에 도착해 "적들이 돌아가는 길목에 빨리 나가서 도망치는 적을 몰살하라"는 유지를 내렸다. 이순신은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에게 두 차례나 공문을 보내어 웅천의 적을 수륙병진으로 협공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선조에게 아뢰었다. 김성일은 "명나라 군사를 대접하는 일에 경황이 없고 또 남아 있는 군사도 없으므로 첨지 곽재우를 시켜 먼저 창원을 무찌른 다음에 웅천으로 진격하라고 하였다"고 답했으며, 곽재우도 이 시점에 경황이 없어 수륙병진이 곤란하다고 전해왔다고 선전관에게 밝혔다.[6]
2월 18일, (3차 전투) 사도첨사 김완을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여도만호, 녹도가장, 좌우별도장 및 좌우 돌격장 등을 거느리고 송도에 복병하게 한 후 여러 전선을 포구로 돌진시켜 왜선이 나오게 유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왜선 10여 척이 뒤따라 나왔다. 좌별도장 주부 이설과 좌돌격구선장 주부 이언량 등이 도망가는 왜선 3척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 배에 타고 있던 100여명을 사살했다. 금빛 투구에 붉은 갑옷을 입은 왜장이 탄 배가 급히 돌아가며 피령전(승자총통)도 맞았는데, 끝내 이 배는 포획하지 못 했다. 조선 수군이 이 날 일본 전선 총 5척을 분멸시켰다.
2월 19일, 서풍이 크게 불어 배가 출격하지 못 했다.
2월 20일, (4차 전투) 이 날도 전투가 시작될 즈음에 갑자기 큰 바람이 불었다. 전선들이 서로 충돌하여 파손되어서 배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이순신은 즉시 호각을 불고 초요기를 세워 전투를 중지시키고 퇴각했다. 전라좌수영 전선 네 척이 크게 파손되기는 처음이었다.
2월 21일, 강풍에 비까지 내렸다.
2.4. 상륙전 (2월 22일)
2월 22일, (5차 전투) 이순신은 조선 육군의 수륙병진이 어려운 이상, 수군 단독으로 대규모 상륙작전을 결심한다.오전 상륙전
- 새벽까진 동풍이 심하게 불었으나, 오전에 바람이 그쳤다.
- 오전에 이순신이 장수들을 모아 작전회의를 했다. "적들이 항전하려 하지 않고, 우리 육군은 뒤를 함께 쳐 주지 않아서 달리 섬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적의 전상자가 많고 기세도 꺾였으며, 웅포 내에 험한 설비도 없는 것 같아 전선 7~8척은 출입할 만하다"고 의논했다.
- 오전에 3도 수군 중에서 가볍고 흠없는 배들 13척을 웅포로 밀어넣어 그 절반 가량 숫자의 왜선을 깨뜨리고 많이 사살하고 나와, 일본군의 시선을 웅포로 우선 모으게 했다. 그 직후 전선 10척에 1,700명의 의병/승병을 나누어 태워, 동쪽의 남양리[7]에 1,100명을, 서쪽의 600명을 제포에 무사히 상륙시키고 진을 치기 시작했다.
- 조선군의 추가 상륙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포위된 형국이 된 일본군은 더는 가만 있지 못 하고 제포성[8]과 백석산진지를 나와 해안의 조선군과 싸우기 시작했다.
- 해안 전투를 이순신은 "의승병들은 창을 빗겨 들고, 칼을 휘두르며, 활과 총으로 하루 종일 돌격하여 무수한 적을 맞혔으며, 비록 적의 목을 벤 것은 없어도 우리 군졸은 부상당한 사람이 없었다"고 평했다.[9]
오후 정보전
- 전투 후 귀환해보니, 사도첨사 김완이 웅천 수군 이준연과 그 양녀 매염영대 등 5명의 조선인을 구해 왔다. 문초해보니 "왜인중 중상자가 많고, 조선 수군과의 전투로 두목장수도 전사했습니다. 지난 1월 말부터 소굴에 전염병도 돌고 있습니다. 이에 죽은 자는 화장하고 있습니다"라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 이를 듣고 다수의 장수들이 날카로운 기질을 내며 "바다와 육지에서 승리를 거둘 때가 이 날이다"라며 좌도의 발포통선장 이응개, 우도의 가리포통선장 이경집 등이 돌연 다투어 돌진하여 적선을 깨뜨렸으나, 돌아나올 무렵에 두 배가 서로 부닥쳐 방패가 흩어지는 바람에, 산에서 쏟아지는 철환을 피하려 한쪽으로 선원들이 쏠리면서 배 한 척이 뒤집어버리고 말았다. 안에 있던 이들은 헤엄쳐 육지로 도망갔다. 배 한 척이 아쉬운 마당에 손실되었으니, 이순신이 두 선장을 엄히 문책했다.
- 한편 전라좌도의 경상우도의 복병선장들이 합심해 이 날 왜인 2명을 붙잡기도 했는데 "일본국에서 3월 안에 전군이 퇴각하라는 군령이 내려졌는데, 위로 올라간 이들이 아직 내려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려 하지 않자 목을 베었다.
2.5. 해상전 (2월 28일 ~ 3월 10일)
2월 28일, (6차 전투) 웅포에 또다시 공격을 가했다. 포환과 시석을 이전보다 훨씬 많이 쏘았고, 비격진천뢰도 날렸다. 이번엔 안골포와 낙동강 하구 일대까지 정찰한 뒤, 칠천도의 외줄포로 물러서 부대를 재정비했다.3월 4일, (X차 전투) 저도(거제도)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 8척을 분멸했다. 3월 4~5일의 기록은 일본 측에만 있다. 정황상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이 자신들이 나올 걸 생각지 못 했으리라 여겨 야간 기습을 하려 한 듯 하나, 조선 수군이 사주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아 아무 피해를 입지 않고 오히려 기습 온 일본 수군을 모두 격퇴했고, 일본 수군이 반성의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3월 5일, (X차 전투) 저도(거제도)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 17척을 분멸했다.
3월 6일, (7차 전투) 마지막으로 웅포에 공격을 가했다. 21척이나 분멸했다.
3월 10일, 복귀했다. 수륙병진공격을 더 이상 기대할 수도 없고, 4만명이나 달하는 농민들의 파종 시기가 늦지 않아야 하며, 1개월이 넘는 작전으로 장병들의 피로가 극에 달했고, 웅천성에서의 전염병이 조선군에도 퍼졌으며, 군수 지원 보급품도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더 이상 적의 영향권 내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
3. 평가
3.1. 행주대첩 승리에 기여
권율이 3천 명의 의병을 전라도로부터 동원하여 상경할 수 있었고, 충청 수사 정걸이 판옥선에다 화살과 쌀을 싣고 한강 하류에 갖다 대어 행주 산성의 전투원들에게 추진 보급할 수 있도록 보장한 것 역시 이순신의 전라도 해역 제해권 확보 덕분이었다. 애초에 당시 조선 육군 물자의 3할에서 5할은 이순신이 공급하고 있었다(...).3.2. 일본군의 끝없는 서진
부산포 해전 이후 5개월간 다시 재건해 온 일본 수군의 해상전진기지 겸 육상전초기지가 반신불수로 쑥대밭이 났다. 하지만 조선수군이 단독으로 상륙할 수 없음을 확실히 알게 된 일본은 이후에도 꾸역꾸역 가덕도/고성/거제도까지 왜성들을 촘촘히 쌓아 조선 수군의 활동반경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은 도저히 견내량 동쪽으로 활동반경을 갖기 어려워졌고, 일본은 원활하게 본국과 보급과 상륙이 가능해졌다.3.3. 명-일 교섭에 영향
양측의 강화협상에서 조선이 불리한 조건들을 일본이 일방적으로 관철하지 못 하는 역할을 했다.웅천 해전이 진행 중이던 1593년 2월 27일 서울에 모인 일본 장수 15명은 논의 끝에 다음 사항을 결정했다.
① 식량이 부족하므로 부산까지 철수한다.
② 부산에 가서 도요토미에게 건의하여 본국 철수 여부를 결정한다.
② 부산에 가서 도요토미에게 건의하여 본국 철수 여부를 결정한다.
그리하여 그 후 3월에 서울에 왔던 도요토미의 특사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선 현지 주둔군 장수들의 의견을 수렴한 건의문을 갖고 귀국하기에 이른다.
① 병사들에게 잡곡밥을 먹이면 4월 11일까지는 견딜 수 있다.
② 서울까지 식량 추진이 불가능하다.
③ 전라도를 치는 일은 신중한 계획이 필요하다.
④ 전라도와 경상도를 치고 난 다음 해안가에 튼튼한 성을 쌓을 것이다.
② 서울까지 식량 추진이 불가능하다.
③ 전라도를 치는 일은 신중한 계획이 필요하다.
④ 전라도와 경상도를 치고 난 다음 해안가에 튼튼한 성을 쌓을 것이다.
이리하여 강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다음 사항이 비밀리에 합의됨으로써 명나라는 조정과 수군에게 공격 중지 지시를 하달하게 된다.
① 일본군은 부산 방면으로 철수하되, 명군과 조선군이 도중에 공격 못하도록 보장한다. 일본군도 도중에 약탈과 살인을 하지 않는다.
② 일본군은 서울 철수와 동시에 두 왕자를 돌려보낸다.
③ 일본군은 4월 18일 서울을 떠난다
② 일본군은 서울 철수와 동시에 두 왕자를 돌려보낸다.
③ 일본군은 4월 18일 서울을 떠난다
이 정도의 강화 교섭이라도 성사시킬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이 이순신이 그동안 이룩한 수군의 전과 덕분이었다.
3.4. 책 조일전쟁의 오류
백지원의 조일전쟁은 웅포 해전 당시 조선 수군 1척이 무리하게 진입했다가 나오며 뒤집혔고, 그 배에 있던 수군 병사들이 육지로 올라가 도망친 것을 "참사"라 하고, 나아가 이를 과장해 "패전"이라고까지 주장한다.해당 내용은 이순신의 장계에 실제로 있는 내용이며 참사도 맞긴 하다. 하지만 일본 수군이 입은 피해가 더 크며, 조선 수군의 철수는 단순히 파종 시기가 다가왔기 때문이므로 '패전'이라고 해석하긴 어렵다. 웅포의 수복 외를 모두 '패배'로 가정한다면, 그것은 책임을 물 수 없다. 이순신은 해군 제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으며, 육군 측에 요청도 2차례나 했다. 또한 당시엔 수군통제사가 육군(해병대, 상륙부대)을 멋대로 기르는 것은 월권이었기에, 상륙작전은 승/의병 즉 '자원병'의 형태를 띄었다.
결정적으로 조일전쟁에서는 정유년 초 이순신이 파직당하기 직전의 부산포 출동에 대하여 원균이 통제사가 되고 올린 장계 내용을 웅포 해전에서의 상황이라고 적기도 한다. 즉, 사료 인용 자체가 잘못된 책이다.
4. 관련 문서
[1]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조카, 쵸소카베 모토치카 대신으로 참전하였으며 교전 기간 중 병사하였다고 한다.[2] 다만 이순신의 기록에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가 40척이 채 되지않는 판옥선을 이끌고 합류했다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미루어 볼 때 89척은 수치가 과장된 것이라 짐작된다.[3] 이순신의 장계에 의하면 4척이 강풍에 의해 서로 부딪쳐 파손되었으며, 1척은 전공을 무리하게 세우려다 뒤집혔다.[4] 현재는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의 '웅동지구'로 해당 해안이 간척되어 있다.[5] 위치가 불명이다. 견내량 전투, 칠천량 전투가 발생했던, 칠천도와 거제도 사이의 내해 지역으로 추정된다.[6] 김성일은 류성룡과 함께 남인을 대표해 이순신과 정치적으로 가까운데다, 임진왜란 직후에 다름아닌 바로 이 웅천을 지키던 사람이다. 따라서 겁을 먹었거나 핑계를 댄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임을 이순신에게 알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직후인 3월 중에 병으로 갑자기 죽게 되었다. 후술하듯, 1월말부터 경남 일대에 돌던 전염병이 원인일 수 있다.[7]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안골포'라고 썼으나, 안골포는 멀리 있다. 백석산에 붙은 포구는 남양리 포구다.[8] 벽돌까진 아니고 목책 수준이다. 기존엔 출입 선박 관리 용도였으나, 이 경우엔 일본군의 조선군 방어기지로 쓰이게 되었다.[9] 벤 목조차 못 가져왔다는 것은 전투가 치열했으며, 곧바로 타고 온 배를 타고 철수했음을 짐작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