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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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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鄭運)
1543년(중종 38)~1592년(선조 25) (향년 49세)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ruby(如君忠義, ruby=여 군 충 의)], [ruby(古今罕聞, ruby=고 금 한 문)], [ruby(爲國忘身, ruby=위 국 망 신)], [ruby(有死猶生, ruby=유 사 유 생)]
그대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었으니, 나라를 위해 던진 그 몸은 죽었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다.
[ruby(人生必有死, ruby=인 생 필 유 사)], [ruby(死生必有命, ruby=사 생 필 유 명)], [ruby(爲人一死, ruby=위 인 일 사)], [ruby(固不足惜, ruby=고 부 족 석)], [ruby(君獨可傷者, ruby=군 독 가 상 자)]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삶은 하늘에 달렸으니, 사람으로서 한번 죽음에 아쉬워 할 이유가 없으나, 오직 그대에 관련해서는 마음이 아프도다.
- 이순신이 정운의 영전에 올린 제문인 제증참판정운문(祭贈參判鄭運文) 중에서
경상도의 바다는 우리 조선의 바다가 아니란 말입니까?![1]
- 경상도로 출정을 고민하는 이순신에게 한 조언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창진(昌辰). 시호는 충장(忠壯).

2. 생애

1543년(중종 38) 전라도 영암군 옥천종면 대산리(현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2]에서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종9품)과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정7품)을 지낸 정응정(鄭應禎)[3]의 아들로 태어났다.#

28세 되던 1570년(선조 3년)에 식년시 무과에 병과 20위로 급제한 뒤 훈련원 봉사, 금갑도 수군권관(金甲島水軍權管), 거산찰방(居山察訪)을 거쳐 웅천 현감 등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이후 제주판관(濟州判官) 때 목사(牧使)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가 1591년(선조 24년) 녹도(鹿島) 만호가 되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 장군과 갈등을 빚는 역할로 나왔다가 점점 감화되어 장군을 따르는 것처럼 나오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게 각색된 것이다. 실제로는 어영담과 함께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 부임 이후 가장 신뢰하고 의지했던 참모 중 한사람이었다. 사실 나이도 이순신보다 2살이나 형이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 이순신 장군은 휘하 부대 순시를 나선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꼼꼼하고 치밀하게 순시했던 것도 있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곳이 많아 몇몇 장수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 중 정운이 만호로 있던 녹도진을 가장 먼저 찾았는데 난중일기에서도 칭찬할 만큼 전쟁 준비 상태가 완벽했다.

정운이 이렇게 완벽했던 이유는 임진왜란 발발 5년 전 1587년 왜선 20척이 출몰해 손죽도를 점거한 일명 '손죽도 사건' 때문이었다.[4]

사건 발생 이후 조정에서는 전라도 해안 지방 방어책을 강구하는데 이때 정운이 임명돼 완벽한 태세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만큼 뛰어난 장수였으며 상기된 것처럼 이순신과 성품도 비슷했다. 그런 정운은 이순신의 심중을 가장 잘 헤아렸고 이순신 장군 역시 직급은 본인보다 낮지만 군 선배[5]인 그를 가장 신뢰하고 의지했다. 부대 순시 동안 정운과 자주 술자리를 가지면서 더 돈독해졌다. 이때부터 전라좌수영에서는 정운은 송희립과 더불어 좌(左)정운 우(右)희립라고 불릴 정도로 이순신 장군이 신임하는 장수였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첫 해전인 옥포 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조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함대를 기다리며 출전을 망설이자 정운이 단독 면담을 요청했다. 정운이 기회를 놓치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진언을 하자 이순신 장군은 곧장 출전을 결심한다. 이순신 장군 첫 출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옥포 해전에서 정운은 후부장, 즉 함대 맨 뒤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른 전투선이 감히 왜군을 공격하지 못하자 정운이 군사들을 독려해 선봉장으로 나서 2척의 왜선을 침몰시키는 전공을 세운다.

이후에도 선봉장이 되어 당포 해전, 한산도 대첩 등 여러 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한산도 대첩에서 큰 전공을 세우는데 적선 대선 2척 격침 및 3명의 목을 베고 2명의 포로까지 구출해냈다. 이로써 정운은 조선수군의 핵심 장수가 된다. 그러나 부산포 해전에서 적을 추격하던 도중 적탄에 맞아 즉사하였으며 사후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대조총에 맞아 몸을 관통당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27년 4월 17일 을축조에 “이순신(李舜臣) 진중의 정운(鄭雲)이라는 사람이 그 대포를 맞고 죽었는데 참나무 방패 3개를 관통하고도 쌀 2석을 또 뚫고 지나 정운의 몸을 관통한 다음 선장(船藏)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은 손죽도 사건 때 전사한 이대원의 사당인 쌍충사에 정운도 함께 모실 것을 조정에 건의해 제향하게 되었다(영암의 충절사(忠節祠)에도 모셔져 있다). 그의 전사는 이후 전라좌수군의 정신전력을 강화시키는 데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또 개요에서 볼 수 있듯이 이순신 장군은 직접 제문을 지어 그를 추모했다. 당시 시대상 사령관이 휘하 장수를 위해 사당에 제향을 건의하거나 직접 제문을 쓰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정운을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6]

다음은 정운의 영전에 올린 제문인 제증참판정운문을 현대식으로 의역해서 해석한 내용이다.
어허,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사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천명이 있나니
사람으로 태어나 한번 죽는 것은 진실로 아까울 것이 없건마는 오직 그대 죽음에 마음이 아픈 까닭은
나라가 불행하여 섬 오랑캐 쳐들어와 영남의 여러 성이 바람 앞에 무너지자
몰아치는 그들 앞에 어디고 거침없어 우리 한양 하루 저녁 적의 소굴 이루도다.
천리 관서로 님의 수레 옮기시고 북쪽 하늘 바라보면[7] 간담이 찢기건만
슬프도다 둔한 재주 적을 칠 길 없을 적에 그대 함께 의논하자 해를 보듯 밝았도다.[8]
계획을 세우고서 배를 이어 나갈 적에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 나가더니
왜적들 수백 명이 일격에 피 흘리며 검은 연기 근심 구름 동쪽 하늘[9] 덮었도다.
네 번이나 이긴 싸움 그 누구 공로던가. 종사를 회복함도 기약할 만하였건만
어찌 뜻했으랴, 하늘이 무심하여 적탄에 맞을 줄을, 저 푸른 하늘이여 알지 못할 일이로다.
돌아올 제 다시 싸워 원수 갚자 맹세터니 날은 어둡고 바람조차 고르지 않아 소원을 못 이루매
평생 분통함이 이보다 더할쏘냐. 여기까지 쓰는 나도 살을 에듯 아프도다.
믿는 이 그대뿐인데 이제는 어이할꼬. 진중의 모든 장수 원통하게도 여기거니와
그 재주 다 못 펴고 덕은 높되 지위 낮고 나라는 불행하고 군사 백성 복이 없어
그대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건만 나라 위해 던진 그 몸 죽어도 살았도다.
슬프다 이 세상에 이제 누가 내 속 알아주랴. 극진한 정성으로 술 한 잔 바치노라.
어허 슬프도다.

3. 여담

  • 정운이 전사한 부산포 해전 승전일을 부산시민의 날인 10월5일(음력 9월1일)로 정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 조선 장수들 중 검에 검명을 새겼다고 전해지는 몇 안되는 장수인데 그가 검에 새긴 글자는 다름아닌 정충보국(貞忠報國)이다.

4. 대중매체

  • 1962년 개봉한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최성호가 연기했다.
황세득: (방으로 들어오는 정운을 데리고 들어오며) 장군.
이억기: 자넨...
정운: 녹도 만호 정운이라 하오이다.
이억기: 자네가 이 밤중에 어인 일인가?
정운: 장군께 바치고 싶은 것이 있어 왔습니다. (쥐고 있던 칼을 이억기 앞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는다.) 검명을 정충보국이라 새겨넣고 무관으로 임관하는 그날부터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이억기: 정충보국이라... 악비로군. 전장에 나아가면 악비 같이 물러서지 않겠다... 과시, 전라좌수군 최고 돌격장의 검명답구만. 헌데, 이 칼을 나한테 바치겠다는 것은 나의 휘하가 되고 싶다는 뜻인가?
정운: 그 칼로 왜적을 베어주십시오. 그 청을 하기 위해 찾아뵀습니다. 장군께서 출전을 미루고 계신 연유가 뭡니까? 혹, 제 상관이 동료의 공이나 탐하는 무뢰배같은 자라 여겨 그리 하신 겝니까? 허면 그는 장군의 판단이 틀렸습니다. 지난 전투에서 저는 제 직속상관이신 좌수사 영감의 명을 거역했습니다. 물론 원 장군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였죠. 해서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장수로서의 감당할 수 없는 치욕조차 감내해야 했습니다. 허나, 제 상관을 원망치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제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만약 원 장군의 뜻대로 싸웠다면은 우리 조선 수군의 전력은 큰 손실을 봤을 겁니다. 좌수사는 그리 영악한 자가 못됩니다. 전공 때문에 남을 음해할 만큼의 욕심을 그는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단 하나 욕심을 내는 게 있습니다.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절대 물러설 마음 같은 건 갖지도 못합니다. 자신의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그는 그것을 지키려 하겠지요. 그게 뭔줄 아십니까? 바로... 이 나라 조선의 안위입니다. 정충보국하는 그 마음만은 내려놓지 않습니다. 장군, 의심치 마시고 지지하고 지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충보국하는 그 마음이 어찌 제 상관이신 좌수사 영감만의 몫이겠습니까?
― 《불멸의 이순신》 68회 중, 이억기를 찾아간 정운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안승훈이 연기했다. 인물의 성격이 심각하게 왜곡되었는데 작중 한정[11]으로 맹장인 원균을 닮는 것이 목표인 인물로 이순신이 정읍 현감이었던 시절부터 생포한 일본인 첩자를 처리하는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원균이 파직된 전라좌수사 자리에 이순신이 부임하자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극력 반발했으며 진중을 한 바퀴 순시한 이순신이 권준과 자신을 제외한 제장들 전원을 압송하여 태형을 가하자 다시금 크게 반발했다.[12] 이후로도 전라좌수영의 피를 토하는 듯한 극악의 선상 적응 훈련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육상전을 벌일 것을 주장했으나 전에 포로로 잡혀있던 일본군 첩자들과 녹도군 가운데 정예들이 벌인 경합에서 녹도군이 완패하자 이렇다 할 반박을 하지 못했다.[13] 47회에서는 정운이 화통군에서 잠시 화포 사격을 지도해본 경험이 있어서 화포의 훈련과 운용을 맡았는데 병졸들이 순서를 까먹자 상의 탈의를 시키고 화포를 어깨에 짊어진 상태에서 해안 구보와 장전 순서 암기를 시켰고 49회에서는 시간을 제대로 못 맞춘 군사들에게 곤장을 때렸다. 이것 때문인지 "병졸 1명이 화약 폭발 사고로 사망해도 훈련을 재개한다"는 말에 격분한 포수들이 무기를 탈취하고 집단 탈영을 감행했다가 결국 주동자 2명이 참형당해 군문에 목이 걸리게 되었고 나머지는 곤장 80대를 맞았다. 이후로도 옥포 해전에서 "원거리에서 포격을 가한다"는 이순신의 방침을 무시하고 돌격을 지시하는 원균을 따랐다가 곤장을 맞기도 하는 등 이순신과 계속해서 마찰을 빚으나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군이 승리를 거듭하고 원균 휘하 경상우수군은 패전을 거듭하면서 점차 이순신에게 기우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결정적으로 그려진 것이 이순신을 치료해주는 모습이었으며 사천 해전 직후 이미 총탄을 맞은 이순신을 치료할 때에도 이순신을 생각하는 정운의 마음에 권준을 비롯한 모든 무장들이 놀라워한다. 사천 해전 이후의 전투에서 전라우수영의 지원을 받기 위해 이억기를 설득하는데에 크게 기여하며 이 때의 대사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진심이 잘 드러난다. 정운 이후로도 권준, 입부 이순신도 전라우수영에 다녀가는데 이 때 정운이 이억기한테 무장에게 있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검을 바치고 갔다는 사실을 권준이 알고 놀랍다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당포 해전 후 전라우수군이 지원 출정을 왔을 때 이억기한테서 검은 돌려받는다. 하지만 부산포 해전에서 전라좌수군의 장수들 중 가장 먼저 퇴장하게 된다. 전투에서 경상우수군 기함이 함선에 문제가 생겨 해류를 버티지 못하고 일본군의 사정거리로 계속 빨려들어가자 녹도군이 구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녹도군 판옥선의 선체 위에 일본군의 폭탄이 날아오자 부하들을 밀치고 자신이 폭탄을 끌어안고 폭발한 것이었다.[14] 정운이 전사한 후 시신이 운구될 때 이순신이 직접 지은 제증참판정운문의 일부가 인용되는데 정운이 생전에 혁혁한 전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그를 공신록에도 올리지 않았음에 의문을 제기했다.[15]
녹도 만호 정운.
정충보국(貞忠報國)이란 검명이 말해주듯, 전장에 나가면 물러섬이 없던 인물이다.
옥포에서 한산, 그가 전사한 부산 해전에 이르기까지 그 세운 전공이 혁혁했으니,
가히 전란을 극복하는데 앞장선 1등 공신이라 할 만했다.

허나, 군왕 선조는 그를 공신록에도 올리지 않았다.
의주 몽진 길을 대행했다는 이유만으로 공신이 된 내관이 스물 네 명에 이르렀던 것을 볼 때,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사는 오늘날까지 그의 충심을 기억하고 있다.[16]
  •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배우 조순창이 연기했다. 이순신의 훌륭한 부관 역할을 하였으며 부산포 해전은 출전 장면과 해전 후의 장면만 묘사되어서 정운의 죽음에 대해 이순신이 슬퍼하는 장면만 나왔다.
  • 이순신 3부작
    • 2022년 김한민 감독의 <한산: 용의 출현>에서 배우 김재영이 연기했다. 작중에서는 이순신보다 젊게 나오며, 스님으로 위장하여 잠입, 거북선의 설계도를 훔쳐 달아나려한 와키자카 사헤에를 상대하며 그를 집어던지는 등 엄청난 괴력을 보여주며 큰 임팩트를 남겼다. 실제로 학익진도를 짤 때 이순신이 정운을 가장 무예가 뛰어난 장수라 언급한다. 해당 작품 후반에 실제 정운이 전사하는 부산포 해전이 묘사되나, 정운이 전사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 후속작인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도 김재영이 연기, 특별 출연으로 등장한다. 정운은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해 노량 해전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이순신이 전사자 명단을 보며 회상하는 장면, 노량 해전 후반부에 이순신이 보는 허상으로 등장한다.


[1] 자신이 관할이 아닌 경상도에 출현한 왜구들의 보고를 받고 좌수사인 본인이 우수사의 관할지역에 파병하는것이 맞는가 하며 고민하던 이순신은, 정운의 이 말을 듣고 '그대 말이 옳다'고 판단한 후 바로 출정했다. 나중에 정운이 전사한 후 작성한 정운문에서도 이 부분을 훌륭한 판단이라 언급하며 칭찬했을 정도로 정운의 대표적인 조언이라 하겠다.[2] 하동 정씨 집성촌이다.[3]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원로배우 이대로가 연기하였는데 여기서 이대로의 몇 안되는 오열 연기를 볼 수 있다.[4] 1587년 1월 고토와 히라도의 왜구들이 손죽도를 침공해왔을때, 녹도 만호였던 이대원(李大源)이 전라좌수사였던 심암(沈巖)에게 미처 보고하지 않고 출진해 왜구 몇명의 수급을 벤다. 이에 심암은 이대원이 전공을 독차지했다고 시기하여, 피로에 지친 병사 100명만 거느리게 하여 왜구와 싸우도록 한다. 이에 이대원은 날이 밝으면 싸우겠다고 했으나 심암은 기어이 출진시켰고 결국 이대원은 전사한다. 이대원은 죽기 전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저고리에다 혈서를 쓴 후 이를 하인에게 주어 이것을 장례하도록 부탁한다.[5] 이순신은 1545년생이고 1576년 무과에 급제했으므로, 정운의 나이가 2살 많고 임관은 6년이나 빠르다.[6] 자기 스스로에게조차 비판적이었던 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다른 인물을 칭찬하는 것은 정말 몇 되지 않는데 그중 한명인 자신의 부하가 전사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7] 선조의 몽진[8] 상단에 작성된 경상도로 출정할 것을 조언한 일을 언급한 것이다.[9] 당시 왜군이 점령했던 부산포를 뜻한다.[10] 209급 잠수함[11] 이 드라마 최대 문제점 중 하나로 꼽히는게 바로 원균의 미화라 원균이 미화된 상태로 드라마를 만들려니 주변 인물도 함께 왜곡이 되어 버린 것.[12] 극 중에서 태형을 받을만한 잘못을 저질렀음이 묘사되기는 하며 벌을 면한 권준의 경우 이순신이 크게 칭찬하는 장면도 있다. 문제는 순시를 나와서 졸병들과 장기만 두고 돌아가 물먹은 정운의 경우였다.[13] 이렇듯 신임 좌수사와 마찰을 빚는 과정에서 정운을 주목하는 경우도 있으나 성격이 괄괄한지라 표현이 과격해서 그렇지 동료 제장들을 선동한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육상전을 벌이자는 의견도 혼자서 내놓은 것이 아니었으며 입부 이순신 같은 경우 한 술 더 떠서 "푸른 철릭이 붉은 철릭을 어떻게 찍어누르느냐"는 김완의 말에 "곤룡포라면 찍어누르고 남는다"라고 답하기도 했다.[14] 이 때 일본군이 날린 폭탄이 비격진천뢰인데 일본군이 쓰는 대포 자체가 조선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이라고 작중에서 묘사되므로 작중 흐름상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15] 엄밀히 말하면 선조 재위 막바지인 선조 38년에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추록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피난길을 호송했다는 이유로 내관들도 공신이 된 판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워 놓은 인물들을 뽑아야 할 선무공신에 원균도 어거지로 넣어 놓고 정운 정도의 유공자를 빼 놓은 건 빼도박도 못할 선조의 실책.[16] 그리고 자막을 통해 그가 전사한 날을 부산시민의 날로 지정하여 기리고 있고 그의 이름이 대한민국 해군에서 취역한 잠수함 함명으로 채택되어 운용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