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5-22 11:50:03

변씨(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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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이회, 차남 이예, 삼남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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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변씨
卞氏
생몰년도 1515년경 ~ 1597년 4월 11일
출생지 조선 충청도 아산현
(현재 대한민국 충청남도 아산시)
사망지 조선 충청도 태안군 안흥량
(현재 대한민국 태안군 안흥항)
아버지 변수림(卞守琳)
남편 이정(李貞)
자녀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 이순신(李舜臣), 이우신(李禹臣), 성명 미상의 딸

1. 개요2. 생애3. 사후

1. 개요

조선 중기의 양반 여성. 충무공 이순신의 어머니이다.

2. 생애

1515년경 조선 충청도 아산현에서 변수림의 딸로 태어났다.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한양 건천동 부근에 살던 이정(李貞)과 혼인해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신(臣)을 돌림자로 중국 고대의 성인인 복희, 제요, 제순, 대우 임금의 이름을 차례대로 붙여 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이라고 지었다.

사실 그녀가 속한 초계 변씨 집안은 이순신의 친가인 덕수 이씨 집안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순신의 5대조인 이변이 통신사, 전주, 경찰, 경주 부윤을 역임한 변효문(卞孝文, 1396~1461)과 교유한 것을 시작으로, 이순신의 증조부인 이거는 겸도총관을 역임한 변감의 딸과 결혼했고, 조부인 이백록은 홍문관 정자를 역임했으나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샤사된 변형량의 딸과 결혼했다. 그 외에도 이순신의 성명이 알려지지 않은 누이도 변기(卞騏)와 결혼했으며, 이순신의 숙부 이현도 초계 변씨와 결혼했다.

파일:초계변씨 별급문기.jpg

결혼 생활 초기에는 한양에서 가정을 꾸렸지만, 남편이 벼슬에 오르지 못하면서 가세가 기울자 가솔을 이끌고 고향인 아산으로 이사했다. 1576년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자 이를 축하하고자 이순신과 그 형제들에게 토지와 노비를 나누어줬고 이를 별급문기(別給文記)로 정리했다. 별급문기에 나오는 종은 총 22명으로, 충청도(은진)와 전라도(영광, 흥양, 전주, 광주, 남원), 평안도(영변), 황해도(평산) 등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또한 별급문기에서는 전국 각지에 있는 상당량의 토지도 언급되었다.

이 문서로 볼 때, 이순신의 외가는 아산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노비와 토지가 있었으며, 어머니에게 땅이 있었다는 사실은 외가 초계 변씨 집안이 상당한 재력가였다는 점, 당시 여자에게도 집안의 재산이나 유산이 잘 나눠졌다는 점, 결혼하고 나서도 부인의 재산이 온전히 지켜진 점 등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584년 집에 화재가 나서 소실되었다가 1588년 다시 작성했다는 기록이 추가로 기재되었다.

1583년 남편 이정이 사망했고, 두 아들 이희신과 이요신은 각각 1587년과 1580년에 벼슬을 얻지 못한 채 비교적 일찍 죽었다.[1] 이리하여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 된 이순신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매우 극진했다. 그는 난중일기에서 어머니를 칭할 때, 어머니를 뜻하는 '모(母)'라는 한자 대신 천지(天只: 하늘 천/다만 지)라는 표현으로 칭했다. 이는 시경의 '모야천지(母也天只)', 즉 '어머니는 하늘이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어머니를 하늘처럼 극진히 생각하겠다는 이순신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어머니에 대해 118번 이상 언급하며 그녀의 안위를 항상 걱정했고, 명절에 어머니를 뵙지 못하는 회한을 절절히 기록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 수군을 상대로 맞서 한국 역사에 길이남을 대활약을 선보였다. 이때 이순신의 외종형제인 변존서(卞存緖, 1561~?)는 전라좌수영 대솔군관(帶率軍官)으로 복무하면서 옥포 해전에서 돌격장 이언량, 전봉사 김효성과 함께 일본 대선 1척을 쳐부쉈으며, 이후에도 여러 해전에서 활약해 이순신으로부터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역전하였다."라는 호평을 받았다. 또한 이순신의 외조카인 변유현(卞有憲, 1564~?)은 1591년 무과에 급제한 뒤 1593년부터 한산도에서 본영을 왕래하며 적에 관한 동향을 보고했다.

이렇듯 아들과 친가 식구 및 친척들이 전장에서 활약하는 동안, 변씨는 아산 본가에 거주하면서 이순신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냈다. 그러던 1593년 5월 말에서 6월 중순 경, 전라좌수영 인근 고음내(古音川)[2]로 이거했다. 고음내는 창원 정씨 세거지였는데, 정씨 문중이 이순신 일가의 거처로 삼고자 마을의 상당 부분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이순신의 아내 방수진, 장남 이회, 차남 이예, 3남 이면, 조카 이완, 이봉, 이해, 이분, 그리고 집안의 노비들과 함께 수년 간 거처로 삼았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1594년 1월 12일, 변씨는 아침밥을 먹은 후 문안 인사를 하고 떠나는 아들 이순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거라."

이순신은 이날 일기에 "두 세 번 타이르시는데 조금도 이별을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라고 밝혔다.

이순신은 이후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노모를 뵙기 위해 일찍 배를 타고 문안을 드리러 왔는데, 1594년 1월 11일자 일기에서는 "어머니가 기운이 많이 떨어져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니 그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1596년 10월 3일, 이순신은 어머니를 여수 본영으로 모셔와서 종일 즐겁게 해드렸고, 10월 9일에 다시 어머니를 찾아와 하루 종일 곁을 지킨 뒤 이튿날 하직을 고하고 한산도로 떠났다. 이것이 이순신과 어머니 변씨의 마지막 상봉이었다.

1597년 3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넘어가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는 조정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변씨는 크게 놀라 아들을 면회하러 가기로 했다. <통제사이충무공유사>에 따르면, 그녀는 4월 9일 여수에서 배를 타고 아산으로 향했다. 이때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는지, 을 함께 가져갔다고 한다. 그녀는 태안군 안흥량에 정박한 뒤 4월 11일 안흥량에서 아산으로 배를 타고 가려고 했지만 풍랑을 만나 표류했는데, 당시 83세의 고령이었던 변씨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배 위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4월 1일 석방된 뒤 백의종군하러 남하 중이던 이순신은 4월 13일 종 순화로부터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매우 애통해 했다. 그는 이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알렸다. 뛰쳐나가 가슴을 두들기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하다. 즉시 갯바위로 달려나가니 이미 배가 와 있었다. 이 애통함을 글로 다 적을 수 없다.

이순신은 4월 16일 갯바위(현재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에서 배를 끌어다 중방포(현 중방리)에 옮겨 정박하고, 영구를 상여에 싣고 육로를 통해 본가로 돌아와 빈소를 차렸다. 이때 이순신의 아들들과 조카들, 그리고 변존서와 변유현도 빈소에 참여했다. 그러나 4월 17일 금부도사의 서리 이수영이 공주로부터 와서 어서 임지로 떠나야 한다고 재촉했다. 이순신은 아버지 이정이 사망했을 때는 삼년상을 치렀지만, 어머니 변씨가 사망했을 때는 백의종군 중이라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바로 떠나야 했다. 이에 이순신은 4월 19일자 일기에서 극도로 비통한 감정을 드러냈다.
竭忠於國而罪已至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했으나 죄가 이미 미쳤고
欲孝於親而親亦亡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자 했으나 부모마저 돌아가셨네.
天地安如吾之事乎
세상에 어찌 나 같은 사람이 있으랴?
不如 早死也
속히 죽느니만 못하다.

이순신은 다음 일기에서 꿈에서 죽은 두 형(이희신, 이요신)이 나타나 함께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장례도 함께하지 못했다며 애통해해서 서로 붙들고 통곡했다고 밝혔다.

3. 사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섬멸된 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압도적인 숫자로 몰아붙이던 일본 수군을 상대로 기적적인 대승을 거둔 뒤 조선 수군 재건 사업에 착수하는 동시에 어머니의 상을 치렀다. 그러던 1597년 12월, 조선의 국왕 선조는 이순신이 상중이라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여 그에게 고기를 하사했다. 이에 이순신은 일기에 "비통, 비통하다"라고 적었는데, 정조 대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서는 왕이 내린 선물을 비통하다고 한 표현이 불경해서 그대로 옮길 수 없다고 판단해 “감동, 감동이다”라고 수정했다.

파일:이정과 변씨의 묘.jpg

변씨는 사후 현재 아산에 마련된 남편 이정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 1598년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뒤 그녀 옆에 안장되었다. 1614년 이순신의 묘소가 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으로 이장되었을 때, 변씨와 이순신의 아내 방수진의 유해 역시 함께 옮겨졌다.

2013년, 여수시는 변씨가 5년간 살았던 웅천동 송현마을에 위치한 집터를 여수시 문화유산 1호로 지정하고 <이충무공 자당기거지>로 이름지었으며, 그 주변 일대를 '자당공원'으로 꾸몄다. 그리고 2014년과 2015년에 본채, 사랑채, 사주문, 협문, 담장을 건축했다. 또한 태안군은 근흥면 정죽리에 근흥면 정죽리에 '충무공 이순신 어머니 초계 변씨의 안흥량(安興梁) 해상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했다.
[1] 이우신은 참봉 벼슬을 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언제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역시 일찍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 현재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