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23:21:22

이순신/용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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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례3. 표준 영정 관련 논란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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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는 단아했으며, 항상 몸과 마음을 닦아 선비와 같았다.
서애 류성룡 《징비록》
현재 널리 알려진 이순신의 영정은 모두 상상화로, 류성룡징비록에서 쓴 '용모가 단아하고 정갈하였다.(容貌雅飭)'는 묘사에 근거하여 그 이미지대로 그려져 정부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순신 장군 뿐만 아니라 다른 장수들의 초상화가 내려져왔으나 일제의 훼손 또는 해외반출 도난 등으로 행방이 묘연해졌다.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_id=201405261800001 그러다보니 이러한 고증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류성룡의 이순신 묘사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무골이었음이 분명한[1] 김덕령에게도 같은 묘사를 한 것으로 미루어 저 표현이 실제 용모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애초에 지적인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 무형적 평가를 내리는 상투적 표현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홍우원, 남파집, 백호집과 같이 1600년 경에 쓰인 서적에서 한결같이 이순신의 용모를 무인답게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세기 이후에 그려진 영정들은 지나칠 정도로 선비처럼 그렸다고 비판받는다.

이순신의 사위의 배다른 동생인 윤휴는 이순신의 가솔들로부터 그의 용모를 전해들었는데 모두 이순신의 용모를 남성적인 무인의 모습으로 전하고 있다. 보다 후대의 사람인 홍우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을 팔척 장신[2]에 팔도 길어 힘도 세고, 제비턱과 용의 수염과 범의 눈썹에 제후의 상이라고 기록한 바 있다.

다만, 윤휴와 홍우원은 이순신 사후에 출생한 인물들이라 얼마나 근거를 가지고 말했는지, 전공에 비례하여 미화하지는 않았는지가 불분명하다. 체격이 평균치를 벗어나면 크든지 작든지 기록에 남기기 마련인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유성룡을 비롯하여 동시대인들이 체격에 대해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고 상투적인 표현에 그친 것은 이순신의 체격이 평균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이순신의 용모에 대한 가장 자세한 묘사는 아래에 나오는 고상안이 남긴 것이다. 고상안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를 지은 문신으로, 1576년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했을 때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4년에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보고 그의 외모에 대해 자신의 문집인 태촌집(泰村集)에 적었다.

2. 사례

파일:나무위키 올릴 충무공 이순신 구군복 초상화.jpg
파일:external/kookbang.dema.mil.kr/42891.jpg
정형모, 1978년. 충청남도 아산시 신정호에 있는 동상.
1999년에 탄신 400주년 기념을 위해 세워졌다.[3]
경상남도 통영시 제승당에 있는 구군복 차림의 영정.
단 실제 얼굴이 아닌 상상화다.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5112701246_0.jpg
파일:attachment/이순신_장군상(광화문).jpg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에서 세워진 동상.
활을 든 이순신의 동상으로서는 처음 세워진 동상이다.[4][5]
세종대로 사거리(광화문광장)에 있는 동상.
1968년에 세워졌다.[6][7]
파일:external/www.ksilbo.co.kr/556180_234540_453.jpg
파일:₩100.jpg
2016년 8월 통영시에 설치된 '병선마당' 조형물.[8] 대한민국 원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其言論術智 固是撥亂之才 而容不豐厚 相又褰唇 私心以爲非福將也
그 언론과 지모는 실로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생김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않고 관상도 입술이 뒤집혀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복있는 장수가 아닌 듯했다.
고상안의 《태촌집》
公長軀精勇 赤髭髥膽氣人也
공은 체구가 크고 용맹이 뛰어나며 붉은 수염에 담력 있는 사람이었다.
윤휴의 《백호전서》
파일:이순신 영정(조선시대).jpg
조선시대에 그려진 충무공의 영정,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기사

고상안과 같은 동시대 인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면 이순신의 얼굴은 부드럽고 인자해 보이는 지금의 표준 영정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상안이 '얼굴에 살이 없어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고 입술이 두껍다.'는 평가를 내린 것으로 보면 오히려 매섭게 생긴 군인다운 얼굴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9] 그리고 저 위의 조선시대에 그려진 충무공 영정의 경우에는 제3공화국 때 주로 그려진 영정과 달리 무장의 이미지가 강함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의 인물이 착용한 투구와 갑옷이 조선에서 사용하지 않고 명나라에서 사용한 양식이라는 점 때문에 원래 명나라 장수의 초상화에 후대에 누가 이순신의 이름을 써넣은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또한 현충사 소장 영정에 나와 있는 관복의 흉배는 위에 호랑이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앉아 있고 아래에는 파도무늬가 들어 있는데, 이건 문헌에도 없고 유물도 없다. 당시 이순신은 무관 2품으로서 호랑이 한 마리와 구름무늬로 된 흉배가 달린 관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고증이 정확하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순신의 품계는 단순히 '무관 2품'이 아니라, 정2품 상계 정헌대부였다. 정2품은 문·무관 구별 없이 주는 품계였고, 벼슬로 치면 6조 판서에 버금가는 자리다. 또한 이순신은 사후 최종적으로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이자, 의정부 영의정에 봉해졌으므로, 단순히 무관 2품에 해당하는 관복으로 그리는 것이 오히려 고증에 맞지 않다. 어차피 이순신은 생전에 영정에 나온 것과 같은 관복을 입은 적이 없었다. 영정의 관복은 어디까지나 이순신 사후 추증된 의정부 영의정의 벼슬을 염두에 두고 그려진 것이다.

다만 이순신이 활동한 16세기에는 관복의 목 부위가 깊게 파이지 않았고 소매가 현재의 영정처럼 지나치게 넓지도 않았다는 점은 지적할 만 하다. 또한 족대(발판)와 바닥 문양이 당대 양식과도 달랐다. 종합적으로 보면 현재 널리 알려진 영정 속의 이순신 복식은 3세기 뒤인 19세기 양식이며 정면을 바라보는 구도 또한 17세기 후반부터 볼 수 있는 영정의 화법을 따르고 있다. 숙종 이전까지의 관복 초상화는 우측면으로 몸을 살짝 튼 구도로 그려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10]
파일:external/dimg.donga.com/6919071.1.jpg
권오창의 등 뒤로 미완의 역사적 사실에 보다 가깝게 그리는 충무공 영정이 보인다.
현재 국가표준영정 7점을 그린 전통인물화가이자 복식전문가인 권오창이 자료를 수집하면서 충무공 국가표준영정의 잘못된 점들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며 개인적으로 충무공 영정 작업을 틈틈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용모에 대해서는 그 역시 무장답지 않게 너무 선비처럼 그려졌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이상 용모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넘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16세기 당시의 충무공 초상화가 일제강점기전후로 훼손및 불법반출등으로 인해 남아 있지 않고, 현충사를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에 모셔진 충무공 영정의 얼굴이 다 제각각인 상황에서 얼굴에 집착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에서다. 그 대신 권오창은 영정 속에 나타난 복식(服飾), 즉 옷과 그 장식품에 주목한다. 얼굴이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복식은 시대별로 특징이 다르고, 충실하게 고증하면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파일:20130924_1044_A66a.jpg
증정 중등조선역사에 등장한 이순신 초상
2013년 <증정 중등조선역사>라는 책자에서 이순신의 생전에 그렸다고 알려진 초상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11]# 잘 살펴보면 눈썹이나 눈매, 수염 등 전반적인 스타일이 완전한 무골로 묘사한 이 항목 위쪽의 영정과 꽤나 일치한다. 이 눈썹과 수염, 눈매는 좀 후에 그려진 영정들과도 상당히 비슷하다. 하긴 막강한 군법을 통해 병졸을 다스렸던 인물이 인자한 인상이면 좀 이상하다. 그래도 무골로 묘사한 영정들도 무인치곤 꽤나 선비와 같은 느낌이 들어가있는 걸 보면 류성룡의 묘사가 마냥 형식적인 건 아니었던 듯.
파일:external/dkilbo.com/14464426550916.jpg
좌측이 새로 교체된 이순신상, 우측이 철거된 기존 이순신상.
국회 사무처는 2015년 11월 2일 의사당 본관 정문 안쪽에 설치돼 있던 기존의 이순신 장군 석상을 교체하고 제막식을 거행했다. 기존 석상은 김경승 작가의 작품으로 1973년 정부가 중앙청에 설치한 후 1990년 국회로 이전해온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석상의 장검이 조선 시대 검보다 길어 일본 무사의 검에 더 가깝고, 갑옷도 중국 장수의 옷과 더 비슷하다는 지적이 줄곧 제기되며 논란이 일어왔다. 하지만 이것이 어불성설이라는 의견도 크다. 일단 석상의 검 길이가 일본도보다 길진 않다. 그리고 이순신이 사용하던 검자체가 길이가 긴 것은 7척이 넘는다. 중국 갑옷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조선 시대 무인들의 영정을 보고 만든 것이다. 이에 따라 국회는 용모, 조각, 무구, 복식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약 1년 간의 고증을 거쳐 새 이순신상을 제작했다. 얼굴의 경우 문화체육관광부의 표준 영정을 기준으로 제작했으며 투구도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복식도 임진왜란 당시에 충실하게 바꿨다. 이순신이 왼 손에 쥔 칼도 예전 석상은 ‘수양용 장검’을 ‘실전용 쌍룡검’으로 교체했다. 칼을 쥔 손가락의 모양도 ‘일본식’이었기 때문에 ‘조선식 파지’로 바꿨다. 하지만 현존하는 이순신의 장검은 엄연히 실전에 사용가능한 도검이며 수양용이라 한것도 현대의 검도에만 익숙해서 이렇게 긴 검은 사용 못한다고 지레짐작한 이들이 추측해서 한 말에 불과하다.[12] 또한 실전용이라고 수식어를 붙여놓은 쌍룡검은 정말로 이순신이 사용한 도검인지 실체가 명확하지 않기에 현재 유물로 남아있는 장검을 무시하고 실체가 불분명한 도검을 대신 적용한것은 오히려 올바른 것을 그르게 바꿔놓은 꼴이 된다. #
파일:external/www.poporu.co.kr/26091375110a7dec1c8f908dcf8063d6_1475700644_4615.jpg
파일:김세랑이순신.jpg
모형 전문지 취미가의 편집장 출신인 피규어 아티스트 김세랑이 만든 이순신 장군의 12인치 피규어다. 주로 어느 정도 덕 있고 온화한 외모로 그려졌던 기존의 얼굴들과 달리 보는 것만으로도 지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눈매와 인상, 포스가 인상적이라는 평이다. 얼굴에 살이 없어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입술이 두툼했다는 고상안의 기록 및 이순신의 후손 이봉상 장군 초상화를 참고하여 고증하였으며, 고초를 겪어 각종 고질병이 있었으며 나라의 위기에 근심하는, 깐깐하고 나이가 많은 수병 장군을 모티브로 하였다고 한다.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뙤악볕에서 병사들을 직접 훈련시키고 배 위에서 전투에 임하였다는 점도 고려하였다.[13] 다만, 더 후대에 나온 구군복인 복식으로 제작한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세종, 세조 어진 추정복원 작업으로 잘 알려진 청강문화산업대학 안태성 교수도 이순신 장군의 외모를 추정했는데, 역시 고상안의 기록, 이봉상 초상화 등을 참고한 결과 위의 김세랑 작가가 고증한 외모와 매우 흡사한 복원도가 나왔다. 관련 기사
파일:엘리자베스키스 이순신.jpg
좌측부터 표준영정, 1932년 이상범의 이순신 초상,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조선 장수' 초상.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일제강점기에 그린 ‘무인(武人) 초상화’의 주인공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라는 주장이 2019년도에 나왔다. 영국 화가가 당시 존재했던 이순신 초상화를 본 후 이를 화폭에 옮겨 그렸다는 것이다. 또한 이상범이 그린 영정[14]도 그 초상화와 구도가 같다. 기사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실제 용모가 아니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상범이 20세기 초에 그린 상상 초상화를 모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 기사
파일:금수작가 이순신2.jpg
역사 전문 일러스트레이터 금수 최민준 작가가 임용한의 책 표지로 그린 이순신으로 고상안의 기록 등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3. 표준 영정 관련 논란

파일:이순신 정부표준영정.png
표준 영정
현재 이순신의 표준영정은 1953년 장우성이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작가가 친일 논란이 있으며 복장도 19세기의 것이라 고증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고증 오류는 인정하지만 표준영정 해제 시 사회적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로 표준영정으로 유지되어 왔으나 2020년 6월 정부에서 이 지적을 받아들여 표준영정을 해제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후 새 표준영정이 제작될 가능성과, 표준영정 제도 자체를 재검토 할 가능성도 있다.#

4. 기타

파일:오십환 뒤.jpg
1958년 8월 15일 발행된 50환권.
한 면은 독립문이고 한 면은 이순신 동상과[15] 거북선이다.#
파일:₩500 앞.jpg
1972년부터 1982년까지 사용된 500원 지폐의 이순신.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일화로 유명하다.

이순신은 한국 화폐에 나타난 유일한 무인이다. 시간적으로만 따진다면 이순신은 이승만을 제외한 역대 모델 중 데뷔가 가장 빨랐다. 분신인 거북선은 1953년 10환, 100환,1000환권에, 이순신 동상은 1958년 50환권에 처음 모습을 보였다.

지금까지 이순신과 거북선이 우리 화폐에 나온 것은 10차례(지폐·동전 포함)나 된다. 1970년 발행한 첫 기념주화에도 이순신(100원화)과 거북선(5000원화)이 각각 등장한다.

# 일반적으로 1973년에 나온 500원 지폐를 예로 들며 박정희 군부정권의 정치적 배경 하에서 등장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실제 첫 등장시기가 1958년 이승만 정권 때이기 때문에 이전부터 많은 대중성을 확보해 자연스레 등장했다는 설이 더 타당하다. ##
파일:일본이 그린 이순신.jpg
1854년 출판사 금행당에서 간행한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의 삽화.
에도 시대의 일본에서 그려진 이순신.

[1] 그의 초상을 본 가토 기요마사참으로 장군의 용모라고 감탄했다고 한다.[2] 곧이곧대로 환산하면 240cm의 비현실적인 장신이지만 당시의 도량형, 출토된 유물, 키가 6척이라는 또 다른 기록 등을 감안하면 170cm에서 180cm사이의 키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오차 범위가 매우 크지만 최소 170cm은 넘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조선시대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1cm, 적국인 일본의 남성 평균신장은 154cm였다. 만약 이순신이 170cm의 키를 가졌다고 가정하여 한국 남성 평균 신장이 173cm로 성장한 현재로 치면 182cm 정도의 위상을 가진 장신이며 왜군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큰, 말 그대로 거한으로 보였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는 동시대의 서양권 국가의 평균 신장도 160 중후반대에 머물던 시절이다.[3] 문화관광부로부터 표준 동상으로 인정받았으며, 높이 8.45m의 단일 동상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4] 이 사진에서는 잘 안보이지만 뒤쪽에서 보면 화살통에 일반적인 화살 외에도 편전통아에 올바른 환도패용까지 묘사되어 있다. 동상 자문위원 중에 충무공 전문가 이민웅 박사와 무예24기보존회 최형국 박사가 참여한 결과.[5] 멀리서 찍어서 잘 안보이지만, 활을 거꾸로 쥔 게 아니라, 활을 활통에 넣은 모습이다.[6] 2008년경에 한 번 보수공사를 한 적이 있었다.[7] 이영훈이 작사, 작곡하고 이문세가 부른 1989년 노래 <장군의 동상>은 바로 이 동상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곡이다. 그리고 가상매체에서 이순신 동상이 나오는 장면에선 주로 이 동상을 모티브로 사용했다.[8] 중앙에 이순신 장군 외에 다른 장수들, 수군들의 모습도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재현되었는데 그동안 잘 재현되지 않던 첨주 투구와 찰갑을 입은 수군 군관의 모습도 있다.[9] 실제로 그의 5대손인 이봉상의 초상화를 보면 광대뼈가 나오고 입술이 두툼한 편이다.[10] 다만, 숙종시대 이후로도 거의 대부분의 어진,영정은 좌측면상이었고 고종시기에 이르러서야 정면상의 초상화들이 많이 제작된다.[11] 이 초상화는 여수 충민사에 걸려있던 초상화이다. 현재 이 영정은 일제 강점기 이후 모습이 사라졌고 지금 걸려진 충민사의 영정은 장우성의 그림이 걸려 있다.[12] 차라리 이순신이 총지휘관의 신분이라 실전에서 도검을 쓸 일이 없다고 하면 합당한 논거가 되지만 검이 길다고 못쓴다고 단정한건 도검에 대해 무지한 생각일 뿐이다.[13] 실제로 해군 간부들의 액면가는 동년배 육군이나 공군보다도 훨씬 나가 보인다. 40대도 안 되어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들이 부지기수일 정도다.[14] 1932년작, 1969년 도난당해 현재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15] 1952년 진해 북원로타리에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동상이다. 동상 제막에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주요 인사도 참여하였다. 이 동상에 제를 드리는 것이 계기가 되어 진해군항제가 생겨났다고 한다. 또 이것과 더불어 1953년 통영 남망산 동상과 1955년 부산 용두산공원 동상이 이미 광화문 동상보다 10여년 일찍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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