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14 01:40:29

전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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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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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경과
2.1. 안덕원 전투2.2. 전주성 전투

1. 개요


1592년 임진왜란, 일본군은 대대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순식간에 한양을 점거하고 임진강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 여세를 몰아 평양을 함락하였다. 이에 선조는 가산을 거쳐 정주로, 정주를 거쳐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국가적인 큰 위기인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명나라의 1차 구원병마저 평양을 공격하다가 패주했다.

이렇듯 총체적 난국에 직면해 있던 조선 회생은 다름 아닌 전라도에서 싹트고 있었다. 그 당시 이순신이 거제 앞바다에서 이억기 등과 함께 거제 앞바다와 견내량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다만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경상우도를 통과하여 전라도의 중심지였던 전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김제 군수 정담과 해남 현감 변웅정, 나주 판관 이복남 등이 옹령에 주둔하면서 전주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2. 경과

2.1. 안덕원 전투

웅치 전투 이후 날이 밝은 뒤 왜군은 조선군의 시체로 덮인 언덕을 넘어 전주로 향했다. 남은 조선군을 이끈 이복남은 군사를 수습해 전주 동쪽 10리에 위치한 안덕원[1]에 방어선을 쳐 재차 왜군을 맞았다. 때마침 귀환 명령을 받고 북상한 황진의 군사가 지친 왜군의 좌측면을 타격해 간신히 왜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린 조선군은 이광의 지시를 받은 전주부윤 권수(權燧)와 수성장 이정란(李廷鸞) 지휘하에 전주부성에 들어가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2.2. 전주성 전투

그 다음 날, 일본군은 전주에 당도했다. 이에 전주 관원들은 도망치려고도 했으나 전주부성에 들어와서 스스로 수성장이 된 이정란이 재차 관원들과 백성들을 단속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며 방어에 나섰다. 정암진에서 곽재우에게 일격을 당한 채로 웅치 전투에서 다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마지막 여력을 짜낸 안덕원 전투에서 저지당한 안고쿠지 군은 공세종말점에 다다랐고 퇴각했다.

전주 공략에 실패한 왜군은 진안에 머무르다 7월 17일 금산으로 물러났다. 왜군도 조선군의 분전에 감명을 받았는지 퇴각하는 길에 조선군의 시신을 모아 조 조선국 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비석을 세워주어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고 한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남원성이 함락되고 일본군이 다시 전주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조선군이 이미 전주성을 비우고 후퇴해서 전투 없이 점령했다.

[1] 오늘날 전주시 산정동과 금상동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