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15 19:24:52

쌍령 전투

쌍령 전투
雙嶺 戰鬪
파일:539f4fffb984083907d48334a271dac0.jpg
명칭 한국어: 쌍령 전투(雙嶺 戰鬪)
날짜 1637년 1월 28일 (인조 15년 정축년 1월 3일)
장소 경기도 광주부 쌍령(현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결과 경상도 근왕군 동원 실패와 남한산성의 구원 실패로 인한 청군의 결과적 승리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민영
파일:조선 어기.svg 허완
파일:조선 어기.svg 선세강 [1]
파일:조선 어기.svg 윤여임
파일:조선 어기.svg 손종로
파일:조선 어기.svg 백선남
파일:조선 어기.svg 김충선[2]
파일:청나라 국기.svg 아이신기오로 요토
파일:청나라 국기.svg 실투 [3]
파일:청나라 국기.svg 악다귀[4]
병력
2,000명 이상 추정[5] 3,000명 추정[6]
피해 규모
전사자 불명[7] 피해 규모 불명

1. 개요2. 쌍령 전투의 전개
2.1. 조선측의 기록2.2. 청측의 기록
3. 쌍령 전투 당시 조선군과 청군의 병력 규모 추정
3.1. 조선군의 병력 규모 추정3.2. 청군의 병력 규모 추정
4. 쌍령 전투에 대한 평가
4.1. 4만 병력 패퇴설? (청군 300기설?)4.2. 지휘관 무능설?4.3. 지휘부의 분열4.4. 병력 공백, 빈약한 훈련도, 장교진, 동원 지속력
5. 기타

1. 개요

병자호란 때 있었던 대규모 전투.

조선군이 실투를 사살하는 등 크게 분전하기는 했으나, 진영이 붕괴되고 지휘부의 궤멸로 인해 경상도 근왕군 동원에 실패했다.

2. 쌍령 전투의 전개

2.1. 조선측의 기록

○ 좌병사 허완(許完)은 나이가 늙어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우병사 민영(閔栐)과 군사 4만을 합하여 고개를 넘어가는데 척후병을 파견하지 아니하여 막연히 적의 사정을 알지 못하였다. 광주(廣州)쌍령(雙嶺)에 이르러 민영은 오른편 산등성이에 진을 치고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쳤는데 정포수(精砲手)를 뽑아서 모두 가운데에 두어 굳게 스스로를 호위하고 중등과 하등 포수는 밖에 몰아놓고 다만 화약을 사람마다 각각 2냥씩 나눠주었다. 초관(哨官)이택(李擇)이 정포 천총 이기영(李起榮)을 불러서 말하기를, “외면이 지탱하지 못하면 가운데가 홀로 지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완이 듣고 말하기를, “1등 포수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1월 3일 이른 아침에 적의 선봉 33명이 목방패(木防牌)를 가지고 남산 상봉(上峯)에서 줄지어 전진해 오니, 아군이 나가 맞이하여 한 번 싸워 용감하고 건장한 적병이 탄환에 맞아 죽고 탔던 말이 뛰어서 진중에 들어가니 적이 두려워서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포수가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이미 다 떨어졌으므로 포수들은 화약을 더 달라고 연달아 소리치고 또 정포수를 더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적이 이 말을 알아듣고 다시 재촉하여 앞으로 나와 목책(木柵) 가까이 왔다. 안동 영장(安東營將)선약해(宣若海)가 홀로 적의 칼날을 당하여 손수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목방패에 맞았고 화살은 이미 다 되니 신지(信地)에 우뚝 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적병이 목책 안으로 쳐들어오니 중견포수는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졌다. 허완이 겁을 집어먹어 말을 타지 못하자 3번이나 부축하여 말에 태웠으나 번번이 떨어져서 밟혀 죽었다. 군졸이 붕궤되어 쓰러진 시체가 목책과 가지런히 쌓여 있으니 적병이 짧은 무기로 함부로 찍었다.

또 우진에 닥쳐오므로 민영이 진을 정돈하고 기다리다가 포환을 일제히 발사하니 맞은 자가 바로 죽었다. 적이 감히 핍박하지 못하므로 승전할 기세가 있었으나, 화약을 또한 단지 2냥씩만 주었기 때문에 다시 화약을 나누어주느라 급히 서두르다가 화승(火繩)이 화약에 떨어져서 화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감분수령(監分守令) 2원과 군병이 타죽고 진중이 크게 동요되었다. 적이 이때를 틈타서 총돌격하니 마침내 전군이 전멸되고 민영도 죽었다. 적이 양진을 깨뜨리고 나자 죽은 자의 옷을 벗기고 또 불을 놓아 태우고 갔다. 처음에 선약해가 남산 위에 진을 옮기자고 세 번 청하였으나 민완이 끝내 듣지 않아서 마침내 적 3백여 기병에게 좌우 양진이 격파되었다고 한다. ○ 감사 심연(沈演)이 화완이 도망쳐 살아 있다고 치계하였기 때문에 증지과 사제(賜祭)의 은전이 민영에게 미치고 허완에게는 미치지 않았는데, 허완의 아들 장()이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한 연후에 증제(贈祭)하였다.
- 연려실기술

기존 조선측 기록은 대부분 연려실기술에 의존하여 기록의 정확성이 의심스럽다. 연려실기술이 야사집이기 때문에 당대 다른 기록과 정황상 말이 안되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래는 조선측의 기록만을 정리 한 것이다.

1637년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소집된 경상도 속오군 4만명, 다만 경상도 속오군만이 참가한 것은 아니고, 전투가 벌어지기 전 구원을 위해 북상했다가 험천 전투에서 패배하고 물러난 충청도 속오군이 합류해 싸웠다. 공식 편제대로라면 경상도 속오군은 총 22,448명, 1628년에 경상감사가 인조에게 보고한 병력은 24,000명이었다. 지휘관은 경상 우병사 민영과 경상 좌병사 허완이었으며 군사들 중 일부는 조총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속오군은 동원되는 대로 그대로 북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집결중이던 병력이 1월 3일 아침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기병 위주로 구성된 청의 병력과 조우하였다. 이 병력 숫자는 후술하겠지만 기록의 정확성이 의심되며 학계에서는 근거없는 주장으로 취급한다.

이 속오군 들은 제대로 동원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매우 부적절한 지형에서 대량의 팔기와 마주쳐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속오군을 동원중이던 지휘관들이 죄다 몰살당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하지만 자세한 전투 양상에 대한 기록이 부실하여 실제 어떤 식으로 전개가 되었는지 아직도 불분명한 점이 많다. 기록만을 근거로 하면, 급히 동원되어 집결하면서 각기 다른 방향에서 북상하던 병력이 다발적으로 갑자기 쌍령에서 청군과 만나 싸운 만큼 전투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므로, 이 때문에 조선군이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쌍령 전투 이후 무려 150년 뒤에 저술된 야사집인 연려실기술 등에 따르면 전투 당시 청나라군의 선봉 33명이 나무 방패를 들고 돌격해왔는데, 총포 사격으로 청군은 100보 떨어진 지점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포수들이 공명심에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떨어지고 만다. 그 덕분에 화약을 더 달라고 소리치고 경포수를 더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청군이 낌새를 알아채고 다시 돌격하여 목책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안동의 영장 선세강이 직접 지휘하여 화살 30여 발을 쏘았지만 나무 방패에 맞고 나중에는 화살이 다 떨어지자 결국 적의 칼에 사망하고 만다. 청군이 목책 안으로 들어오자 중견포수는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졌고 허완은 겁을 집어먹고 3번이나 말에서 떨어진 끝에 도망치던 아군에게 밟혀 죽었다고 되어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허완은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 출병을 할때 눈물을 흘렸고, 그 주변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며 통곡을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허완은 후술하겠지만 오랜 경력을 가지고 능력을 인정받은 장수라 연려실기술의 이 묘사는 부정확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단, 연려실기술의 묘사가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수 차례 격전 후에 생긴 PTSD로 인한 심각한 우울증일 수도 있다. 이는 현대의 군인들도 흔히 겪는 일이고, 노령으로 인한 다른 신경정신과 질환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실록의 기록에선 분명 허완이 분전하다가 스스로 패배의 책임을 지고 목을 찔러 자결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비국에서 허완을 추증하기를 청하다 다른 설에선 청군의 칼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토대로 계속 상황을 복원해보면, 지휘관의 전사로 좌군은 완전히 무너지기에 이른다. 그나마 평지였기 때문인지 다수가 도망치는 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지휘부가 전멸하여 부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당시 오른쪽의 민영이 지휘하는 군은 그나마 허완 부대에 비해 군기가 잡혀 있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급된 10발의 탄약을 모두 소모한 탓에 다시 화약을 나누어주느라 급히 서두르다가 화승(火繩)이 화약에 떨어져서 화약이 모두 폭발하는 바람에 결국 감분수령(監分守令) 2원과 군병이 타죽고 진중이 크게 동요되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때 팔기군 300기가 공격을 감행하자 전의를 상실한 조선군은 그대로 붕괴됐고, 진을 친 곳도 후퇴에 불리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 부대는 확실하게 전멸을 당했다고 한다. 한편 경기도 여주 부근에 주둔하던 경상감사 심연은 쌍령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자 전의를 잃고 조령으로 후퇴한다.

연려실기술에 기술된 탄약 10발은 남급본 병자일기 + 병자록의 기록에 따르면 정확히 탄약 2냥이었다고 한다. 현재 자동 소총으로 10발이면 연사 시 1초, 2초요 단발 조준 사격으로도 몇분 안되어 다 쓰기에 적은 양으로 느껴지지만 전근대 총으로는 제일 빠른게 20초에 한발이었고 적이 다가오기를 충분히 기다려서 쏘면 이후 또 쏠 기회가 많지 않기에 10발도 적은 수라고 할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 서양도 12사도(총기)라고 부르는 12발의 장전통을 가지고 다녔는데 한 전투에서 12발을 다 사용할 경우 매우 격렬한 전투를 했다고 평가하였으니 전장식 소총에서 10발은 그다지 적은 보급은 아니다.

이렇게 청군이 조선군의 전열을 붕괴시키고 나머지 병력으로 전과확대전을 벌였기에 조선군의 지휘부는 완전히 소멸했다. 용인 전투 때와 달리 험천(險川)·쌍령(雙嶺)·강도(江都)에서 전사한 자들이 도합 2,600여 명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70,000명의 병력 중 1,000명이 전사한 용인 전투 때보다 훨씬 큰 피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는 생환했으나 용인 전투 때와 달리 지휘부가 전멸한 상황이라 수습되지 못하고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경상도 근왕군은 건재했으나 이 패배를 접하고 사기가 꺾여 반격을 하지 못하고 조령에서 대기해야 했고, 이후 인조가 항복하게 된다.

2.2. 청측의 기록

그런데 청 태종 문황제실록에 따르면 조선측의 기록과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들이 나온다.

조선군의 입장에선 (학계의 추정치를 따르자면) 약 8,000명의 병력들이 어떻게든 산 넘고 물 건너 집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선봉부대로서 어느 정도 모인 약 2,000명의 선발병력들이 방어전을 펼치다가 청군의 팔기(기병대) 돌격에 결국 무너져서 일방적으로 궤멸당한 참패였다고 하나, 청측 기록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그 2,000명의 선봉부대 앞에 최정예 기병대로 돌격을 펼친 청의 팔기들이 졸전 끝에 간신히 승리했으나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 측이 대군으로 덤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수가 부상하고 죽거나 적전도주를 한 장교들을 처벌할 정도였으니, 조선의 대군이 참패했다며 자국을 비하하고 있는 연려실기술의 기록이 야사인만큼 근거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 확인된다. 당사자인 청 측의 기록에 기반해 볼 때, 조선군 포수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상대로 매우 분전한 셈이다.
계해년 먼저 조선을 정벌했을 때의 일이다. 그 국왕을 포위했을 당시 외부에서 원병이 도착하여, 도로이 버일러[8] 요토가 병사를 이끌어 실투, 악다귀가 요토의 명을 받들고 매 니루(牛彔)에서 호군 1명,과 매 기(구사)에서 호군교 1명씩[9]을 받아 언덕 위에 가 주둔했는데, 실투와 악다귀가 적에게 나아가 싸우니 악다귀가 상처를 입고 먼저 돌아왔으며 실투는 부대를 이끌고 적병을 쳐 패배시킨 뒤 언덕 위에 섰다. 이에 요토가 사람을 보내 명을 내려 회군하도록 고하자 실투가 명에 따라 부대와 함께 퇴각하였으나 그 후군을 맡던 중 상처를 입어 낙마하여 사망하였다. 실투와 동행하던 니루 부대원으로 고마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말에서 내려 말하기를, "장군께서 돌아가셨다. 어찌 시신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하였다. 본대 구사의 국구 아시다르한 니루 휘하의 호군교인 부당커러가 이를 듣고는 소리 높여 병사들을 막아 세우고 실투의 시신을 수습하라는 명령, 또한 본 구사 바얀 니루 휘하의 순다리, 오묵투 니루 소속 사무하투, 샤오사이 니루 소속 커피다 3명을 베라는 명령을 각각 내렸다. 그러나 부당커러는 시신을 탈취할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군을 이끌고 버일러가 있는 군영까지 이르렀는데, 군사들이 적병에게 진격하는데도 부당커러는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석교하를 건너 본영에 이르러 부당커러는 채찍질 100대와 귀,코를 꿰뚫는 형벌, 호군들도 채찍 100대와 귀, 코를 꿰뚫는 형벌, 그리고 순다리, 사무하투, 커피단 등 3명은 이미 부당커러가 불렀는데 명을 받들지 않은 것이므로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며, 또한 호군교 다다이 니루 휘하의 니칸, 수르투 니루 휘하 소속 퉁쟈샨, 어미나 니루 소속 허터 등도 사형으로 논죄함이 마땅하다고 상주했다.
께서는 순다리, 사무하투, 커피단, 호군교 니칸, 퉁쟈샨, 허터 등 6인은 죽음을 면하고 채찍질 1백 대와 귀, 코를 꿰뚫는 형벌로 감하도록 명하셨고, 부당커러 등 적을 앞에 두고 나아가지 않은 자들은 귀와 코를 꿰뚫는 형벌을 면하고 채찍질 1백 대로 감하도록 하셨다.
태종 문황제 실록 숭덕 2년(1637년) 윤4월 25일 기사

청측의 기록은 수수께끼 투성이다. 조선측의 기록에서는 악다귀의 1차 돌격으로 조선군이 패닉에 빠지면서 그대로 몰살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정작 청측 기록에서는 악다귀의 야심찬 1차 돌격은 처참하게 실패하였고, 되려 지휘관인 악다귀가 부상을 입고 본진으로 패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2차 돌격에서 실투가 조선군을 무찔러 언덕 위에 포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요토가 승리한 실투 측에 회군령을 내렸고, 청의 팔기들은 그대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이 와중에서 퇴각 중 후군(殿)을 담당하던 실투마저 조선의 공격에 중상을 입고 낙마해서 그대로 전사해버렸고, 팔기들은 지휘 체계가 무너져 완전한 혼란 상태에 빠졌다. 부하 고마이가 "장수(실투)의 시신을 버리고 갈 수 없다"며 이들을 저지하자, 호군교 부당커러가 도망치던 팔기 3명을 붙잡아 처형할 것, 실투의 시신을 찾을 것을 명령하였는데, 청군이 너무나 심한 혼란에 빠져 즉결처분 명령도 실행되지 않았고, 조선군의 반격을 계속 받은 끝에 결국 부당커러도 실투의 시신 회수를 포기하고 그대로 본영을 향해 퇴각해버렸다. 직후 다른 팔기들이 전진해 조선군에 맞섰는데, 이때 부당커러는 진격을 거부했을 정도로 공포증에 빠져 있던 모양이다.

결국 이 추태 때문에 청측의 법관은 부당커러와 부하 바야라 병력 총 41명에게 채찍형과 귀와 코를 뚫는 형벌을 선고하였고 장교의 명을 거부한 병졸 순다리, 사무하투, 커피다의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또한 호군교 니칸, 퉁쟈산, 카타도 장수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이후 홍타이지는 이들의 사형을 모두 면하게 해주고는 대신에 부당커러와 바야라 41명은 채찍형을, 니칸, 퉁쟈산, 카타, 순다리, 사무하투, 커피다에게도 사형에서 1등급 감하여 귀, 코를 꿰는 형과 채찍질만을 선고하였다.

이렇듯 청군 장수와 휘하 팔기 등 도합 수십명이 비겁 행위와 상관 시신 수습 명령 위반 등을 이유로 엄중히 처벌받았다는 것이 청측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종합해보면 청나라의 정예 기병 중 친위대만 가려 뽑은 바야라에서 추가적으로 인원을 가려 뽑아내서 돌격대를 선발해 맡겼는데 자신들보다 훨씬 적은 수인 조선군 부대의 공격 앞에 2번이나 패주하고 장수가 죽어 겁에 질린 것이다. 즉, 청실록에서 보이는 전투의 경과를 정리하자면 1번은 패주하고, 1번은 승리했으나 퇴각 중 공격당해 참패했다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청측의 기록에는 이상한 점이 아주 많은데, 특히 승리해 유리한 거점을 차지한 실투에게 요토가 퇴각을 명한 것, 실투가 중도에 낙마해 전사했고, 용감하게 그의 시신 수습을 천명한 청의 최정예 부대가 시신이 수습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버티지 못하고) 빤스런을 쳤다는 기록은 쌍령 전투를 더 미스터리하게 만든다. 이러한 혼란상은 근왕군의 결집을 막기 위해 미리 북상 경로를 차단하려 준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전투 양상이 매우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대규모의 적 병력이 집결되는 와중에 팔기 기병들을 몇천 단위로 쪼개서 산 중 길목마다 파견한 것을 보면 청군 입장에서도 어지간히 상황이 긴박했을 수 있다.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리는 순간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패배가 되므로 장기전으로 갈 수록 불리한 청군 입장에서는 속오군의 출격 소식은 매우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때문에 쌍령을 비롯해 당시 청군이 근왕군의 북상을 차단하기 위해 배치된 위치들은 하나같이 기병 전투에는 매우 부적합하나 관측에 적합한 산지들이었고, 이 와중에 돌격대는 기병대로 구성된 바야라에서 선발되었기에, 전투가 예상대로 잘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청실록에 전투가 치러진 곳의 지형이 수 차례나 언덕 위(岡上)로 강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병대 중심의 청 측에게 산지인 전장이 대단히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긴 듯. 불리했던 전투 조건이나 도저히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던 청군의 혼란상을 감안한 것인지는 모르나, 청 태종은 적전도주와 전투 거부라는 중죄를 저지른 호군교들을 처형하라는 상주가 올라오자 처벌을 1등급 감해 죽음만은 면하게 해 주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들을 참조.

토탈워 마이너 갤러리-쌍령전투의 기묘함

역사 카페 부흥-병자호란 청실록 47부

3. 쌍령 전투 당시 조선군과 청군의 병력 규모 추정

3.1. 조선군의 병력 규모 추정

24분 50초부터 쌍령 전투 당시 조선군의 병력 규모에 관한 자세한 설명들이 나온다.

위 영상에서 임용한 교수는 장부상 병력 40,000에 실제 급하게 소집된 군대는 8,000명이고 이중 쌍령에 실제로 집결하여 청군과 싸운 선발대는 2,000명이라고 주장했다.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의 병력 수도 전체 병력이라기보다는 돌격전을 펼친 기병들만의 수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며. 전체 병력 면에선 오히려 조선군이 청군보다도 더 적었을 공산이 크다. 또한 임용한 교수는 학계에서도 '조선군 4만명설'은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취급한다고 설명하였다.

쌍령 전투에서 과연 조선군은 40,000명이었는가에 대한 고찰

병자호란 쌍령 전투는 정말 300대 4만이 싸워 진 전투인가(2)-전투의 전개
단행본 수준으로 병자호란을 정밀하게 재구성한 유재성 선생의 ‘병자호란사’(1986)에서는 쌍령전투에 수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지만 당시 경상도 총병력을 8,000명으로 간주한후 좌우병사의 선봉부대를 2,000명, 경상관찰사 심연의 본진 병력 규모를 6,000명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참전 조선군 40,000명명을 기준으로 전투를 바라보는 관점과는 기본 뼈대에서 부터 차이가 나는 것이다. 출처

현대 사학계에서는 쌍령 전투에 참전한 조선군 병력 수가 3만~4만명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있으나. 이는 근거가 희박하다.다고 한다. 그 근거는 아래와 같다.

임진왜란 용인전투 당시 동원된 3도 근왕군의 규모가 현대 추정 5만명으로, 3개의 도의 속오군이 모여야 이 정도의 병력이 구성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경상도의 인구가 다른 도 보다 특별히 많은 것 도 아닌데다 용인전투에 모인 3도 근왕군은 전라, 충청, 경상 3도로 여기도 경상도 출신 병력이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왜란 후의 조선의 인구가 왜란 전보다 적었음을 감안하면, 호란때의 속오군의 규모가 더 큼은 정황상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다른 도에서 동원된 근왕군 병력 수를 보면 대개 7,000~8,000명 정도로, 유독 경상도에서만 다른 지역의 몇 배에 달하는 병력이 동원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강도(江都)의 서리(書吏) 한여종(韓汝宗)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와서 말을 전하였다.

"도원수와 부원수는 아직 해서 산성(海西山城)에 있습니다. 적병이 잇따라 오므로 도원수가 황해 감사와 함께 병사를 보내어 요격하여서 동선(洞仙)에서 깨트렸습니다. 경상 병사 민영(閔栐)은 어영군(御營軍) 8천과 본도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23일에 충주(忠州) 수교(水橋)에 도착하였습니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30일 경자 5번째기사

이와 관련해 당시 실제 병력 수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인조실록》을 보면 “경상 병사 민영이 어영군 8,000과 본도 병마를 이끌고 23일에 충주 수교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확인된다. 그런데 3~4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설명하면서 ‘어영군 8,000명과 본도 병마’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또한 《숙종실록》을 보면 정언(正言) 김홍복(金洪福)이 “험천(險川)의 전쟁에서 사졸(士卒)로서 죽은 자가 쌍령에 못지않고[險川之役 士卒死者 不下於雙嶺]……”라고 임금에게 아뢴 내용이 확인된다. 이는 수사적 성격이 강한 문장이지만, 충청도 근왕병들이 패배한 험천 전투에서의 전사자가 쌍령 전투의 전사자와 그렇게 큰 격차가 난다고 인식하지는 않는 인상이다. 이를 바탕으로 추측해 보면 실제 동원된 경상도 근왕군의 수 역시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8,000명을 웃도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여겨지는 바이다. 게다가 후방에 머무르며 쌍령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경상도 관찰사 심연의 병력과 강행군을 하는 과정에서 낙오되었을 병력도 감안해야 하므로, 실제 쌍령 전투에 투입된 조선군 숫자는 수천 명 수준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출처

그렇다면 쌍령 전투에서 허완과 민영이 지휘한 군사가 3~4만 명이라는 이야기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는 전국에 근왕군을 보내라고 전교하였는데,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근왕군은 사실상 남한산성 근처까지 오지 못하였다. 병력의 일부라도 남한산성 부근까지 진출하여 전투를 수행한 근왕군은 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4개 지역 근왕군뿐인데, 한 도의 근왕군 숫자가 8,000명 가량이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남한산성에서 전투를 벌인 4개 지역의 근왕군 수를 모두 합치면 3만 명을 웃돌게 된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당시 가장 대표적인 패전이라 할 수 있는 쌍령 전투에서 이 병력 전부가 전몰된 것처럼 오도되어 사람들 사이에 퍼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는 《하담파적록》에서 쌍령 전투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를 한데 묶어서 쌍령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서술한 점을 통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3~4만 명이 실제로 동원된 숫자가 아니라 '동원되었어야 할 숫자'였을 가능성이다. 근왕병의 동원은 대단히 짧은 기간 동안 급하게 이루어졌기에 그 과정에서 군적에 따른 병력 동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전후 책임을 두려워한 각 지역의 수령 등 관련자들이 자신이 동원한 병력 수를 부풀려서 주장했을 수도 있다. 출처

3.2. 청군의 병력 규모 추정

쌍령전투 당시 화약 지급량과 전투경과

쌍령전투가 벌어진 1월 3일에 해당하는 청태종실록 권33 숭덕2년 1월3일조에 보면 "패륵 岳託이 전라도 심총병과 충청도 이총병의 군대를 격파했다"고 나온다. 1월3일은 우리측 기록에서 쌍령전투가 발발한 날이므로 이 자료의 전라총병은 경상총병의 오류로 보이고 심총병이 바로 경상 감사 심연을 지칭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청태종실록 해당 날짜에 청군 병력 규모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패륵은 대충 6,000~7,500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하는 지휘관이므로 패륵 악탁(요토, 岳託)이 쌍령전투에 지휘한 청군의 병력 규모도 그 정도 수준(수천명)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구체적인 병력 수치는 추가적인 사료를 확인해 봐야할 것이다. 출처 (출처 링크도 깨지고 내용도 틀렸음)[10]

남급본 <병자일기> 를 보면 조선군이 쌍령에 도착한 시점부터 청군 척후가 조선군을 둘러 쌌는데 아군이 이를 몰랐다고 되어 있다. (賊之斥候已環於我軍而不知也) 척후가 이미 조선군을 둘러쌀 정도면 척후만도 상당한 병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쌍령전투에서 묘사된 상황 정도의 대규모 압사 사고를 일으킬 정도라면 조선군이 포위되었다고 착각할 정도의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조선군이 포위되었다고 느낄 정도의 병력이라면 적어도 수천 명 이상의 청군이 이 전투에 참가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훗날 허완의 사망 당시 상황을 <승정원일기> 가 묘사하면서 청군 수천 기 운운하는 기록이 남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위와 같은 출처로 역시 링크 깨짐)

당사자인 청측의 기록에서는 『황조문헌통고』에 '(청 태종이) 숭덕 원년(1636년) 12월에 요토 등으로 하여금 3,000명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는 기록과 이후 병력 증원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점과 요토의 양홍기 병력이 갑병 1천명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실제 청군의 병력 수는 3,000명 이하다.

당시 청군 병력을 추정해보자면 두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1. 요토가 이끄는 양홍기 갑병 1천명에 쿠툴러 500명 등 1500명.
청나라는 기본적으로 팔기제로 군을 움직였는데, 원래는 1개 니루에 장정 300명[11], 25개 니루가 1기(구사)였던 것을 홍타이지가 1개 니루에 장정 200명, 30개 니루가 1기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병자호란을 위해 각 니루마다 기병 15명, 보병 10명, 호군[12] 7명씩 각 32명의 갑병을 차출하여 참전토록 하였다.
그러면 1개 니루에는 32명 * 30개 니루 하여 960명인데, 문제는 실제로 요토가 기주로 있는 양홍기에는 몇개 니루가 있냐는 것이다.
누르하치 시절 양홍기에는 26개 니루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홍타이지 황제로 바뀐 병자호란 때는 자료 없음.
그래서 대충 표준이겠거니... 하고 30개 니루로 계산하면 갑병은 960명이다.
여기에 갑병 2명당 1명 꼴로 그들을 수종하여 전쟁터에서 허드렛일을 밭았던, 만주어로 쿠툴러(kutule, 從僕․厮卒)라고 부르는 하인들이 있다. 이들이 단순 계산으로 500명이다. 즉 합계 1,500명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다만 실제로 양홍기에 니루가 몇개 소속된지 모르고, 이와 별도로 '포오이 니루'라고 하여 요토의 하인들로 구성된 니루가 참전했을 수도 있다. 황족들의 하인들로 구성된 포오이 니루는 총 64개로 이중 몇개가 병자호란에 참전했는지는 불명. 일부 황족이 본토 방어를 위해 만주에 남았기 때문이다. 포오이 니루 역시 1개 니루당 32명의 갑병을 차출했다.

2. 청군 3차 선봉대 갑병 1600명의 일부와 쿠툴러 800명의 일부
청측의 기록에서는 『황조문헌통고』에 '(청 태종이) 숭덕 원년(1636년) 12월에 요토 등으로 하여금 3,000명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위에서 언급하였다.
당시 청군은 320~330개 니루가 있었는데(포오이 니루 64개 제외) 기동성을 위해 니루당 1명씩 차출하고 전봉대신 '로오사'를 대장 삼고 길잡이 역으로 호부승정 마부대를 임명하여 1차 선봉대 삼았다. - 병력 300명
그리고 예친왕 도도와 버이서(패자) 쇼토, 버이서 니칸에게 니루당 호군 3명씩 차출하여 2차 선봉대를 만들어 다음날 한양을 향해 출격 시켰다. - 병력 1천명.
뒤이어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버이러(패륵) 요토, 초품1등공 양구리에게 니루당 5명씩 차출하여 3차 선봉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왜 『황조문헌통고』에는 3천명이라고 나왔냐면 1,2차 선봉대는 기동성을 위해 쿠툴러를 나두고 갑병들만 달려갔기 때문에 요토의 3차 선봉대가 그들의 쿠툴러까지 다 데려갔기 때문이다.
즉 3차 선봉대는 320~330개 니루에서 5명씩 차출한 갑병 약 1600명과 1~3차 선봉대의 쿠툴러 1400명으로 구성된 것이다.
한양에 도착한 다음 1~2차 선봉대 소속 쿠툴러들은 자기 주인을 찾아갔을 테니 요토-양구리에게 남아 있는 병력은 갑병 1600명과 자신들의 쿠툴러 800명이다. 그런데 전라도 근왕군을 상대로한 광교산 전투는 요토와 양구리가 둘 다 참전 했지만, 경상도 근왕군을 상대로한 쌍령 전투는 요토만 참전한 기록이 확인되니 그보다는 적을 것이다. 대충 반띵하면 1천2백명?

다만 쌍령 전투의 청측 자료를 보면 요토가 부하장수 '실투'와 '악다귀'에게 니루당 호군 1명씩, 구사(기)당 호군교 1명씩 차출해서 먼저 언덕에 주둔시켰다고 한다. 쿠툴러를 포함하면 대충 500명쯤 되니 쌍령전투 때 청군은 최소 500명이상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1번의 추정처럼 양홍기 1천5백명 전체가 함께 싸우는 것 보다는 2번 처럼 니루당 몇명씩 차출해 싸우는 방식이 자주보인다. 며칠 후 있던 강화도 공격 때도 청군은 니루당 인원을 할당하여 강화도로 보내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4. 쌍령 전투에 대한 평가

4.1. 4만 병력 패퇴설? (청군 300기설?)

이 전투가 유명해진 이유는 쌍령 전투 이후 무려 150년 뒤에 저술된 야사집인 연려실기술에서 40,000명에 달하는 조선군이 고작 300기의 청나라 기병에게 패퇴 한국사에 손꼽히는 패전으로 알려졌기 때문인데, 이는 근거가 희박하다 .임용한 박사는 40,000명에 달한다는 조선군은 실제로는 장부상 병력 4만에 실제 급하게 소집된 군대는 8,000명이고 이중 쌍령에 집결한 선발대가 2천이라 설명 했다. 또한 청나라 기병 300명이 당시 전투에 참여한 모든 청군의 숫자라고 단정할 근거도 매우 희박하며, 실제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의 전체 병력 수는 300명이 아닌 약 3,000명~7,500여명 정도로 추정이 된다. 심지어 당대 실록의 기록에서도 민영이 이끄는 조선군 부대와 교전한 청나라 팔기군의 숫자가 300기라고 기록되어 있지가 않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5일 을묘 1번째기사,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6일 병신 2번째기사) 즉, 청군 300기 설은 막상 당대 실록에서나 청나라 측의 기록들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기록이다.

우선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을 지휘했던 장수는 『청사고』와 『청태종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요토로 추정되는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성해응도 그의 문집인 『풍천록』에서, 쌍령 전투 당시를 '至如同時雙嶺之戰 虜帥岳託乃以三十三人'라 서술하여 적의 사령관을 요토와 33인의 장수로 책정한 바가 있다. 요토는 거의 바닥에 가까운 우리 나라에서의 인지도와는 달리 누르하치의 사실상 장남[13]다이샨의 장남, 즉 누르하치의 손자로 청 태종 홍타이지를 황제로 옹립시켜준 실력자이자 당시 팔기군 중 한 부대인 양홍기의 기주였으며, 훗날 그의 후손은 대대로 양홍기 기주를 세습하는 철모자왕작을 물려받았다. 당시 팔기의 기군 하나 당 책정된 병사가 만주 팔기의 경우 7,500명이 상한이라는 점, 『황조문헌통고』에 '(청 태종이) 숭덕 원년(1636년) 12월에 요토 등으로 하여금 3,000명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는 기록과 이후 병력 증원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점을 고려해보면 쌍령 전투 당시 요토가 이끈 병력은 3,000명은 넘겨도 최대치인 7,500명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요토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철군할 때 후방 부대를 통솔하는 임무를 맡게된다.

또한, 지휘관이 요토 말고 1명 더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화 전투에서 지휘를 했던 유림이 훗날 병자호란이 끝나고 쌍령 전투에 참전한 군관에게 그놈들 지휘관이 누구길래 우리 조선군은 왜 패퇴한 것이냐? 라고 물어보았는데, 그 군관은 "오곽사라는 자와 황족인 아이신기오로 요토입니다." 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그래서 요토 말고 오곽사라는 장수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4]

실제로 승정원일기에는 허완의 아들 허장이 자신의 아버지가 도망쳤다는 사실에 대해 당시의 전투 상황을 술회하며 올린 상소가 기재되어 있는데, '날이 밝자 적기 수백이 진 앞까지 쳐올라왔는데, 이어 수천의 적기가 산성으로부터 엄습해오니, 바야흐로 산위에서 총탄과 화살이 서로 오고갔습니다.' 라며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이 수천 명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신재호(필명) 씨 또한 이러한 논지의 주장을 펼친 바 있으며, 우리나라의 국방 전사 편찬 위원회에서 나온 『병자호란사』도 비록 근거가 되는 사료들은 일일이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쌍령 전투에 6,000명의 청군이 참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 허완의 반대편 진영에 주둔했던 민영을 사령관으로 하는 조선 병사들이 불과 팔기군 300기의 돌격에 허무하게 전열이 무너졌다는 내용 부터가 실록이 아닌 쌍령 전투로 부터 150년 뒤에 저술된 야사집인 연려실기술에서만 나오는 기록이다. 한번 더 언급하지만, 당대 실록의 기록에서도 청측의 기록에서도 민영을 무너뜨린 청군이 불과 팔기 300기였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애초에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허완과 민영은 각각 집결한 조선군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쌍령 고개 양쪽에 진을 쳤는데, 그 중 민영이 이끌고 있던 수천 병졸들이 민영의 군 진영 내에서 다시 화약을 보충하려고 급히 서두르다가 그만 화승(火繩)이 화약에 떨어져서 화약이 모두 폭발하는 바람에 결국 감분수령(監分守令) 2원과 군병이 타죽고 진중이 크게 동요하는 틈을 타서 팔기군 300명이 그 틈을 노리고 돌격하여 허무하게 전멸하였다고 하는데 심지어 이러한 폭발 사고에 대한 기록 자체도 연려실기술에서 나오는 기록이지 당대 실록이나 청측의 기록들에서는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다.

4.2. 지휘관 무능설?

잘 훈련되지 않고 머릿수만 불린 병사, 급히 출진하느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물자, 무능한 장수들의 형편없는 지휘와 갑작스레 일어난 화약 폭발이 낳은 총체적 비극이란 인식이 있으나, 막상 연려실기술에서의 악평과는 달리 지휘관이었던 허완은 사람 보는 눈이 매우 깐깐한 그 이순신 장군에게도 능력을 인정받고[15] 유성룡에게도 천거를 받아 여진족을 상대로 승전한 경험도 있던 베테랑 장수였었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일부 인용한다고 하더라도 허완이 3번 낙마했단 사실 자체가 부대가 붕괴되는 상황에도 지휘권을 유지하기 위해 낙마를 했음에도 말에 세번씩이나 다시 탔단 이야기로도 해석 될 수 있으며 조총수들은 탄약과 화약을 부족하게 보급받은 것도 아닌데, 그 마저도 모두 소모했다. 이는 전투 소모가 그만큼 극심했다는 반증이다. 훈련도가 낮은 병력이 통제되지 않는 사격을 했다 하더라도, 장전 속도를 고려하면 전투 소요 시간 자체가 매우 길었다는 것이며, 이는 단시간에 와해된 병력이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속오군은 사실상 향토 예비군으로 훈련도가 낮았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조선군이 이를 몰랐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속오군을 이용한 전술은 이미 여러모로 연구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조선의 주적이나 다름 없었던 여진의 전술에 대비한 전술 체계도 잡혀 있긴 했다. 때문에 이걸 조선군 지휘관들이 몰랐고 훈련도를 감안하지 않은 작전을 세웠다가 무너진 것으로 지휘관의 무능으로 설명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승전이었던 광교산 전투김화 전투도 속오군이 주축이 되어 이긴 전투였고, 훈련 수준이 낮지만 그래도 전의가 남아 있는 속오군을 어떻게든 추스려 그나마 사상자가 최소화되고 방어가 용이한 전장에 배치하고 지휘관이 적극적으로 지휘를 하니 비록 전투 직후 탄약이고 뭐고 다 떨어져 퇴각해야 했지만 우세한 청군을 적어도 한 번 막아낼 수는 있었다.

쌍령 전투 또한 연려실기술을 참조 하더라도 허완이 야지에서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청 기병대와 접전을 벌였다고 할 수는 없다. 조선군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나, 군영을 꾸리고 목책을 쌓는 등 전투에대한 대비는 분명히 했다. 광교산 전투김화 전투의 기록을 보면 조선군의 일반적인 작계는 요충지에 방어진지를 쌓고 방어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런 전장에서는 기병이 기동술의 이점을 쉽게 가질 수 없고 유럽의 전열보병 같은 화려한 일제사격술이 없더라도 병사들의 심리적 위축을 막을 수 있기에 훈련도가 낮아도 충분히 싸울 수 있다. 이 조차 허완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건 허완이 실제로 무능했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다.

무었보다 허완에 대한 연려실기술의 기록이 의심스럽다. 쌍령 전투의 가장 큰 패인은 연려실기술의 서술이 전부 다 사실이라고 가정 할 경우 허완의 무능한 지휘 탓인데 문제는 허완에 대한 연려실기술의 기록과 실제 당대 난중일기와 실록의 기록이 서로 극과 극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쌍령전투로 부터 150년 뒤에 저술된 연려실기술에서는 허완이 겁쟁이라서 "허완이 겁을 집어먹어 말을 타지 못하자 3번이나 부축하여 말에 태웠으나 번번이 떨어져서 밟혀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 "좌병사 허완(許完)은 나이가 늙어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라고 온통 악평으로만 적혀 있지만
비국이 아뢰기를,

"허완(許完)이 쌍령(雙嶺)의 싸움에서 군사가 패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당초에 경상 감사의 장계에 행방불명이라고 했기 때문에, 포상하는 은전을 민영(閔栐)에게만 내렸습니다. 지금 본도에서 조사해 아뢴 말에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민영의 예에 따라 포상하고 추증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비국에서 허완을 추증하기를 청하다

막상 실록에서는 허완이 분전하다가 스스로 패배의 책임을 지고 목을 찔러 자결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내용상 연려실기술의 기록과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2,000여 명의 속오군이라면 청군 병력과 비교해서 3분의 1이 되지 않는데다 훈련도도 낮았으므로, 도경유의 책임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청군에게 피해를 얼마나 주느냐가 관건이지 부대의 전멸을 면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점을 볼 때 실제 상황은 대충 이렇게 추정할 수 있다.
  • 조선군의 병력 자체는 청군보다 열세였음.
  • 급한 진격으로 부대는 충분히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였음.
  • 청군이 기병대를 중심으로 허완의 부대를 급습.
  • 조선군은 목책 등으로 방어하며 분전 했으나, 다수의 사상자를 냄, 사태를 수습하던 지휘부가 전멸당하자 퇴각.
  • 민영의 부대는 퇴각이 불가능해지자 끝까지 저항하다가 사실상 전멸.
그리고 청사에서 기록된, 전투 후반 지휘관조차 전사할 만큼의 갑작스런 청군의 큰 피해는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된 민영의 조선군이 도주를 포기하고 끝까지 저항하자 이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속출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당시 동아시아 군대에서 상관의 죽음을 부하가 막지 못하거나 전사한 상관의 시신을 버리고 달아난 죄는 기본적으로 참수가 원칙이었다. 척계광의 원앙진의 경우에도 부대장이 죽으면 부대원 모두가 사형당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인용한 조선군도 부대장이 전사하고 이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상관을 보호했음이 명백하게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 직속 수하 군관들을 처형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 태종이 상관의 전사를 막지 못한 건 물론이고 시신조차 버리고 도망간 군인들 전원에게 사형을 면하고 죄가 덜한 다수는 태형으로 끝내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이유도 생각보다 병력의 희생이 커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4.3. 지휘부의 분열

허목이 지은 문집인 기언에 실린 허완의 비명과 1790년에 간행된 조선 후기대 학자인 황경원의 시문집 강한집에 실린 최진립의 전에 따르면 원래 조선군은 쌍령에 도착하면 진을 쳐서 아침밥을 먹은 후에 다시 행군할 계획이었으나, 경상도 관찰사 심연의 종사관으로 있던 도경유가 날이 밝기도 전에 무조건 진군을 재촉한 것으로 나온다.

허완의 만류에도 도경유는 듣지않고 이에 반대한 경상우병사의 군관 박충겸의 목을 베며 진군을 독촉했다고 한다. 결국 조선군은 급하게 진군하느라 휴식이나 준비는 커녕 집결조차 끝나지 않은 상태로 청군과 조우하게 되었고 이것은 고위 지휘관들이 고작 2천여명의 병력을 가지고 동수의 정예 팔기를 상대로 기병 돌격을 당하는 황당한 참사로 이어진 것이다. 이건 사실상 지휘부가 자기 소속 병력도 없이 적을 향해 어택땅을 꼬라박은 것과 다름 없는 상황이다.

실록에 실린 기록으로 보아 도경유가 진군을 재촉한 것은 자신의 상관이었던 심연의 지시를 받고 벌인 만행으로 보인다. 조선군 항목에도 나오듯이 조선시대에는 관찰사와 병마사의 위계가 명확하지 않다보니 명령체계가 제대로 정리가 안되어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남한산성의 상황도 급박하긴 했으니,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4.4. 병력 공백, 빈약한 훈련도, 장교진, 동원 지속력

양성과 유지에 많은 수고가 필요한 정예 병력을 비교적 소수로 유지하면서 소모전을 유지하면서 정예병력의 조직력으로 상대를 깨부수는 방식은 대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하기 힘든 많은 나라에서 현대까지도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의 군사 운용은 총기의 등장 이후로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으며 최후로는 "대규모 징병"이라는 군사 동원 체계로 발전하여 빅토리아 시대 말에 이르면 누가 동원을 더 빨리 끝내느냐에서 승패가 바로 갈릴 지경이 된다.

문제는, 당시 조선군은 누구를 근왕군으로 징집하느냐만 치밀하게 준비되어있었을 뿐, 그들을 어떻게 빠르게 동원하고 어떻게 전선 병력에 편성하여 보충하느냐에대한 방법론은 전근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와중[16], 기존의 기존의 동원체계가 가졌던 치명적인 약점은 전혀 개선되지 못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동원된 농민 징집병을 활용하기 위한 교리도 미미한데다, 농민 징집 동원이 가지는 근본적 약점인 저열한 훈련도를 보완할 수단도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극동 지역에서는 사격전과 근접전 모두가 강대강으로 치열하게 붙어가며 쉴 틈 없이 교리가 발달되어온 것이 아니라, 총이라는 강력한 신규 무기를 요령껏 잘 써먹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고, 이것은 총기를 제일 적극적으로 도입한 선두주자인 일본에서조차 마찬가지였으며 기존 군사 교리가 붕괴되고 전열보병 교리가 완전히 정착하는 때는 외세가 상륙하여 서양 교관들에게 훈련된 병사들이 나오면서 부터였다.[17]

조선군의 편제는 제대로된 훈련을 받은 정규군인 훈련도감병력을 중심으로 잦은 충돌로 높은 실전 경험을 축적한 북방군이 사실상의 주력부대였다. 농민병에 불과한 속오군은 부족한 전투력을 조직력과 총으로 보완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보조하고 머릿수를 채우는 역할에 머물렀기에 속오군의 전투 교리도, 현장 지휘관들의 용병술도 그 정도 까지였다.

제승방략의 처참한 실패는 조선조차도 "농민 동원" 의존을 포기하고 "전문 무장병"을 중심으로하는 군사 동원 체계로 향하게 만들었으며 북방군은 그 산물이다.[18] 그런데, 이 숙련된 북방 병력들은 이괄의 난 때 소멸하여 조선군에 대규모 공백이 발생, 이전 시대의 농민 징집병 동원으로 후퇴하는 참사가 일어나게 된다. 남은 병력은 지휘관의 오판으로 상당수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전문 무장병들의 공백이 발생하자, 농민 동병인 속오군에 지휘력 공백이 발생하였다.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민병대에게 조직력을 기대하는 일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머릿수에서 나오는 압박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매일 투탁거리며 싸워대기 일쑤였던 서양에서마저도 농민 중심의 징집병들은 전장의 중요한 요소였다. "좋은 책략은 머릿수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훈련도가 낮은 병력이라도 전장에서는 충분한 전술적 이점을 제공할 수 있는 요소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총기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미 "창"이 지나가던 개똥이도 대충 앞으로 콕콕 쑤시면 되는 간단한 무기로써 어중이떠중이들도 고기방패 노릇은 할 수 있게 하였고, 따라서 이 "어중이 떠중이"들의 미칠듯한 머릿수는 절대로 무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전열의 머릿수를 체워줌으로써 극도로 중무장된 전문 병력들에게 자유로운 기동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냉병기 시대에는 병사 개개의 훈련도의 차이는 자칫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기에 잘못된 전술로 소수의 무장병이나 용병과 맞붙었다 깨지는 일 또한 잦았기에 비숙련 징집병들에게 기대되는 역할은 전열 체우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징집병만으로 전쟁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술했듯 서유럽에서는 파이크의 미칠듯한 고인물화, 극동에서는 칼잡이의 고인물화로인해 농민 동원병이 전열 체우기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동서양 모두 농민 동원에서 전문 무장병으로 군사 동원의 대세가 옮겨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시대가 바뀌어 화약 무기가 등장하였고, 어린아이조차 평생에 걸쳐 전장에서 굴러온 베테랑을 한방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화기는 어중이떠중이 총 좀 쏜다는 농민병들이 비싼 갑옷으로 무장한 전문 용병조차 아차하면 뚝배기에 구멍이 뚫린다는 공포를 안겨준 무기였으며, 방아쇠를 당기면 발사된다는 어지간히 띨띨한 촌놈도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살상력 만큼은 훈련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무시무시한 무기로 기존의 대세를 뒤집어 엎어버렸다.[19]

화약 무기의 등장 이전이라면 장다름은 커녕 대충 깔맞춤만 된 경기병이 말 타고 달려들기만해도 아무것도 못할 촌놈들이, 총이란 무기만 들면 정예병과 어느정도 겨룰 수 있게 해 주었고 이것은 소수의 정예 청기병에게 무참히 유린당한로 전투로 알려져있었던 쌍령 전투의 전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 현상이었다. 이게 화약 무기가 가져온 엄청난 변화의 핵심 중 하나였다. 본문의 청측 기록에서 기술하였듯이 그 청나라조차도 전투 직후에는 치욕스러운 참패로 여겼다가 나중에야 실상을 이해하고 전투 중 팔기들이 보였던 추태에 대한 처벌을 매우 관대하게 감형해줬다는 점에서 총기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체감해볼 수 있다. 따지고보면, 전혀 훈련되지 않은 징집 포수들을 가지고 최정예급 충격 기병을 상대로 동수 교환이 되었다면 엄청나게 훌륭한 교환이다

그러나, 대책없는 오합지졸을 잘 부려먹는 것도 지휘관의 실력임은 자명하다. 쌍령 전투에서 유독 속오군의 처참한 훈련도로 인한 허약한 조직력이 두드러진 것은, 바로 이 오합지졸들을 통솔해야하는 장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어떤문제가 발생하는지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휘부의 분열로 인한 무질서한 행군과 병력 배치로 인해 다수의 농민병을 이끌어야 할 최정예 병력들이자 현장 지휘관들인 하급 장교들 그 자체가 고위 지휘관과 함께 최전열에서 동급 혹은 그 이상인 청나라의 정예 병력의 맹공에 정면으로 노출되면서 진형이 흔들리며 혼란이 가중되었다. 때문에 징집된 속오군 포수들의 진형과 사격통제가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했고[20][21], 적의 돌격및 진형으로의 침투가 허용되었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지휘관 조차 정면으로 나섰다가 전사하는 최악의 상황이 초래되는 바람에 속오군 전체가 붕괴되는 악순환에 빠지게되었다.

전장식 총기의 불편하기 짝이 없고 느려터진 장전 문제는 일제 사격의 중요성을 가져왔다. 스스로 알아서 사격통제가 가능할 정도로 고일대로 고인 총잡이들을 마찮가지로 고일대로 고인 창잡이와 합동시킨 파이크 앤 샷의 궁극체인 테르시오조차도 그 중의 "고참"이 나서서 전열 통제를 도와주지 않으면 하급 지휘관 혼자서 제대 하나를 통제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총기의 처돌아가는 살상력 덕분에 이렇게 전열에서 통제를 도와주는 인력은 아주 쉽게 죽어나갔다. 따라서, 마치 옆에 있던 기수가 쓰러지면 바로 군기를 주워들어 대신 기수를 하는 것 처럼, 사격 통제를 돕던 인력이 쓰러지면 바로 인계 받아서 사격 통제를 위해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이 필요해졌다.

여기서도 서유럽과 동아시아의 전장환경 차이가 교리의 분화를 일으켰는데, 상대적으로 부족한 전문성을 총포의 화력으로 보충하려는 시도가 반복된 서유럽에서는 총사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파이크의 수가 감소하면서, 총사들의 진형 또한 점점 더 얇은 선형진으로 변하고, 그에 따라 총잡이의 전열 머릿수가 폭증함에 따라 총잡이의 전문성 기대치가 하락한 서유럽에서는 더 이상 어중이떠중이 총잡이들을 전문 무장병이 지도해줄 수 없을 정도로 말단 지휘력 요구량이 폭증하였다. 이제는 고참 하나가 죽으면 다른 고참이 이어받아 고래고래 소리쳐주는 것으로는 전열을 통제하는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핵심 전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 부사관들이다. 그들은 지체높은 특권계층에는 훨씬 비할바가 못되었지만 충분한 교육을 받은 준 식자층으로서, 글을 이해하고 충분한 지식을 갖춰 지휘관의 명령을 이해하고 전장에서 즉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로 더욱더 고도화된 전술의 사용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장군이 곧 장수이자 최고의 전사로써 전면에서 적과 싸우며 싸움을 이끈다는 고전전인 관념은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것으로, 이런 관념은 술판에서 "나 이런 무공을 세웠다"고 과장하는 용도로 통한 것이지, 실제로는 터부시 되었다. 삼국시대 조조조차도 하후연에게 '용맹만알고 너무 나서는건 필부나 하는 짓이라'[22] 하였듯 고대에서조차도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지휘나 사기 진작을 위해 최전열에 나섰지 연의처럼 무력을 행하지는 않았다. 지휘관의 공백은 부대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되려, 지휘관의 지휘력이 말단에 구석구석 닿기 어려웠기 때문에, 부관 계층의 부상은 필연적이었다. 또 이를 보좌하기위한 하급 무관인 종사(從士)에 해당되는 계층의 등장도 당연한 결과였다.[23]

최전선에서 함께 싸우는 지휘관이라는 감투 정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까지도 화자되는 것이며 또 용기와 명예의 추구로써 간혹 무모할 정도의 특공을 위해 희생을 자처하는 등의 모범이 되기도 했으며, 현대에와서도 고위 사령부의 뒷목을 잡게 만드는
최전선 시찰을 미덕으로 삼는 장군들이 여전히 있지만, 분명 냉병기 시대에서도 지휘관이 전열에 서는 것은 권장되지 않았다.

다만, 분명 냉병기 시절에는 지휘관이 동시에 최고의 전사였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좀 더 엄밀히는, 그 시대에는 지금의 "부사관"에 해당되는 이들이 죄다 어중이떠중이 촌놈이 아니라 최대 귀족, 최하 브루주아에 해당되는 유산 계급이었다는 차이가 있으며, 이들은 말단 평민들에 비하면 그 하나하나가 지휘관의 자질을 가진 존재로 특별 취급되는 계층이었다. 그리고, 그 특권 의식에 걸맞는 전장에서의 감투정신, 그리고 그 감투정신이 필요한 일인 치밀한 보병 방진으로의 돌파 돌격은 이런 특수 군사 계급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따라서 간간히 고위 지휘관에 해당되는 높으신 분들이 전열에 나서서 전사하는 일이 일어나왔다. 그리고, 이러한 "용감한 돌격"을 막기 위해 역으로 수비측에서 감투 정신으로 나서는 일도 분명 왕왕 일어난 일이다.

절대로 권장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허풍으로라도 이런 관념이 꽤 오래 존속한 것은 이렇게 싸워야만 하는 순간이 냉병기 시절에는 상당히 잦았으며, 조선군에서는 장교, 서유럽에서는 "종사"에 해당되는 인력조차도 준 식자층으로 말단 촌놈(?)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고급 인력으로써 소모될 경우 뼈아픔에도 불구하고, 쌍령 전투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때 불을 끌 수 있는 유일한 정예 병력으로써 소모되곤 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런 "기사도 허풍"이 동서 모두에 존재해온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념이 사그라들게 만든 것이 바로 "총"이었다.[24]

따라서, 동양 쪽에서 감투정신의 과도한 강조가 오래 존속되어서 고위 지휘부가 전열에 노출되는 일이 잦았다기 보다는, 복잡한 전장 환경 때문에 고위 지휘부를 보좌하고 있는 중하급 지휘 인력이 "정예 병력"으로써 급한 불을 끄려고 강제로 전열에 끌려나가는 일이 비교적 더 오래 지속되었다고 보는게 맞다.[25] 문제는, 이렇게 고육지책을 펼치는게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관들에게 이런 행동을 은연중에 기대하며 군사에 제대로 투자하지 않는 만행이 일어나곤 했단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냉병기 시대에도 그냥 넘어가지지 않는 심각한 문제였지만, 총기 시대에는 아예 어줍잖은 운으로 넘기는 것조차 불가능할 수준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내었다.

전술했듯 총기 시대에는 이유는 상황과 시기마다 매번 달랐어도 종사나 장교에 해당되는 하급 군관들만으로 전열 통제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조금 배운 놈" 정도로는 택도 없어서 촌놈 중에서 "좀 더 잘난 촌놈"이 필요했고, 이게 바로 서구에서 등장한 "부사관"들이다. 즉 종사나 장교를 좀 더 허술하게 양산해서 전열에서 병사들을 부려먹는 도우미로 써먹은게 부사관들인데, 이 부사관이 허공에서 나올리는 없고, 당연히 그 부사관이 보좌하는 위관급들도 대량으로 양성되어 전열에서 병사들 못지 않게 갈려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총기 시대의 폭증한 말단 지휘력 수요와 말단 지휘 인력의 소모라는 변화가 전훈으로 숙달되지 않은 조선군에게 그 "부사관"에 해당되는 인원은 제대로 분화가 이루어지기는 커녕, 하급 군관과 장교들조차 임진왜란 때부터 병자호란 때까지 조선 중기 전쟁하는 내내 숫자가 부족한 인력으로써 조선군의 고질적인 문제로 적체되어있었기에 농민 징집병인 속오군 통제를 위해 적극적으로 할당될 수 있는 인력이 아니었다. 따라서, 머릿수를 체우는 징집병들이 제대로 통솔될리 만무했고, 이러한 심각한 지휘력 병목은 고위 지휘관마저도 소수의 정예 병력만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게 발목을 잡았다.

하필, 바로 그 정예 병력의 구성인원에 하급 군관과 장교들이 집중되어있었으니, 결과적으로 하급 군관과 장교들이 최전열에 끌려나가 갈려나가면서 소모되어 더욱 지휘력 공백이 악화되는 일이 반복되고, 이렇게 하급 군관과 장교들이 부족한 지휘력으로 인한 부실한 전투 지휘를 메꾸려고 그들이 지휘해야하는 정예 병력과 함께 갈려나가서 겨우 전투를 이겨놓으면, 하급 군관과 장교들의 무력에 의존해서 군대 전체의 부실을 메꾸려드는 높으신 분들의 만행이 더욱 강화되는 악순환이 끊이지를 않았다.

본래, 하급 지휘 인력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굳이 정규군이 아니더라도 수시로 병력을 모병하여 훈련시키고 해산하고, 또 수시로 실전에 투입하는 것을 반복함으로써 하급 장교와 부사관이라는 일자리가 충분히 많이 안정적으로 존재하고 또 나름대로 매력적인 밥벌이 수단으로 존속해야만 가능한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 언제든 무장만 시키면 바로 제법 훈련된 군대로 편성될 수 있는 "준 전문 회색 인력", 곧 유럽에서는 "자유 부대"라고 부른 인력에 해당되는 인력들이 사회에 항상 대량으로 존재해야한다는 조건도 있다. 그리고, 제승방략이 처참하게 실패한 것에서 보듯, 조선은 그런 인력의 존재를 절대 좋아하지 않았다. 안정된 왕정 체계에서 무력 수단을 통제하는 것이 필요했고, 이 균형을 군사력 측면으로만 맞추면 당장 반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26][27]

하다못해 청나라도 팔기라는 제도를 통해 비교적 두루뭉실하게 이러한 준 직업군인화된 인력을 유지하고 관리하였을 뿐, 나라의 녹봉을 받는 하급 장교와 부사관에 해당되는 인력을 항상 상당수 확보하고 있는 것에는 많은 무리를 겪었고, 심지어 유럽의 열강들조차도 돈이 하도 많이드니까 유력한 부호들이 자기 돈으로 군대를 만들어서 나라에 가져다 바치고 임관하는 방법을 굉장히 오래 선호했다. 때문에, 지휘부의 붕괴와 그로인한 속오군 전체의 붕괴는 어찌보면 예정된 결과나 다름없었다. 이는 부정하기 힘든 조선군의 가장 큰 취약점이었다.

현재의 관점에서 조선군은 총기를 중심으로한 대 기병 전술에 있어서는 매우 취약해 보인다. 전술했듯 테르시오와 같은 파이크-총사 합동은 고도로 훈련된[28] 준 상비병력을 요구하며, 전장환경상 이런 교리가 적절하지 않았던 동아시아에서 사격 화력의 운용은 보조적인 수준에 그칠 수 밖에 없었고[29], 총검은 서유럽에서조차 이제서야 막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에 동아시아에는 도입되려면 한참 멀었으니 징집 포수들을 더 잘 훈련시키면 기존의 정예 근접전 보병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또한 아직 존재할 수 없었으므로 총기 운용은 거의 야전 지휘관들의 재량에 달려있었다.

그렇다고 조선의 포수들이 근접전 위협에 무력하지만은 않았다. 조선은 여진과 치열하게 싸워 왔기 때문에, 비록 궁기병에 의한 산병전(Skirmish) 위주 일지라도 기병의 위협에는 항시 노출되어있었다. 따라서 테르시오 같은 포수와 근접전 보병의 치밀한 합동에는 비교할 바가 아니어도, 지극히 당연히 대기병 전훈을 꾸준히 갱신해왔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새로운 보병전 전술을 일본과 명나라로부터 받아 전쟁의 전훈을 바탕으로 기존 기병 중심의 전술을 보병 중심으로 수정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군은 야전 축성술이 상당히 발달해있었고, 바로 이 야전 축성술을 통한 임기응변 방법에 대한 높은 적응 때문에 그 어중이떠중이 "총 좀 쏘는 촌놈들"을 가지고 병력을 굴릴 생각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전장 환경이 매우 흡사했던 러시아가 총사대인 스트렐치를 운용한 방식도 이와 흡사하다. 산발적으로, 그러나 언제 어디서 벌어질지 모르는 기병 습격에 대비하기위해 궁기병과 함께 야전 축성도구로 전투마차가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었고, 이 교리는 시베리아가 완전히 평정되고 포병 장비가 크게 발달하여 전투 마차 자체가 도태되기 전까지 존속되었다.

이러하듯, 적당한 수준의 정규 병력을 상대로라면 소수의 정규 병력의 적절한 운용과 야전 축성물 설치로 포수에게 가해지는 근접전 위협을 상당히 쉽게 넘길 수 있었으며, 조선에는 저렇게 두루뭉실하게 포수를 운용해도 적의 머리에 바람구멍이 송송 뚫리기로 악명 높은 "촌놈 치곤 너무 많이 고인 총잡이"들이 가득했기에 오만가지 허술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중이떠중이 총잡이의 존재만으로 적에게 압박을 주는게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쌍령 전투에서 조선군이 상대한 것은 어중이떠중이 하급 팔기 따위가 아니라, 남한산성 공성 실패를 우려해 긴급히 편성된 정예 팔기였으며, 이들을 상대로 지휘부의 추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있는 참사가 아니었다. 제 아무리 총기가 강력하다 한들, 대기병 전술이 전혀 훈련되지 않은 징집 포수들이 기병 돌격을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30] 결국 막대한 손실에도 청의 팔기가 계속 돌파를 시도하자, 포수를 보호하던 정규병과 함께 포수를 통제할 하급 군관과 장교들이 모조리 소모되면서 전열이 붕괴하였으며, 그 결과는 남한산성 함락, 곧 병자호란 패전이었다.

전투 자체는 정말로 운이 나빴던 펌블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군관들과 정규병들의 분투에 힘입어 청의 팔기의 돌파 시도를 굴복시키고 총탄의 공포와 함께 퇴각하게 할 수준의 전과를 내었지만, 이 펌블 한방도 견딜 수 없는게 조선의 내실이었던 것이다. 동수 교환에 성공한 것은 물론 잔여 병력도 건재하였고 적은 돌파를 포기하고 퇴각했건만, 이 남은 병력을 통솔한 지휘 인력은 모조리 소멸해버렸고 그 많은 후속 속오군이 남한산성을 구원하는 일은 없었다. 이는 승전이었지만 전투 한 번의 소모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광교산 전투,와 김화 전투에서도 동일했다.

5. 기타

  • 쌍령 전투의 패배 원인 중의 하나로 언급되며 경상 감사 심연(沈演)의 종사관으로서 쌍령 전투에서 살아남은 도경유는 패전의 책임으로 귀양을 가게 되나 얼마 안돼서 암살을 당한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이는 박충겸의 두 아들의 소행으로 그들은 체포되었으나 2년 후 의옥[31]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대구 병암서원에서 도경유와 그의 형 도응유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참고로 도경유의 형인 도응유는 이괄의 난 때에 의병을 일으켜 지휘했으며 정묘호란 때도 후금군에 맞서 의병과 관군을 이끌고 항전하는 등, 군 경험이 풍부한 장군인데 동생인 도경유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조급함에 일을 그르친 졸장이었다.
  • 병자호란 부분은 대략 어떤 전투들이(승전, 패전을 가리지 않고) 벌어졌는지 지도로 확실히 표기가 가능할 정도로 상세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으며, 교과서에는 대개 언급조치 되지 않는다. 심지어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승리한 승전인 김화 전투도 실려있지 않다.
  • 쌍령 전투를 비롯하여 병자호란 내내 총검이 없던 시기의 총기가 가진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 전훈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의 팔기의 돌파 시도가 사격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와해된 사례가 많은 것에서 이후 총기가 발전하면서 군사 체계가 어떻게 변하게되는지 살필 수 있는, 언급조차 제대로 안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중대한 요소들이 많은 엄청난 전훈이 잠들어있는 숨은 보물고이기도하다.

    청나라의 병자년 조선 침공 내내 청의 팔기의 돌파 시도와 그에 대한 조선군 사격 화력의 저지 시도가 반복되는데, 조선군 측에서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사격 통제가 성사되기만하면, 승패와 무관하게 청의 팔기와 조선의 근왕군 양측 모두에 무지막지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전쟁 내내 청나라의 팔기는 전투 한번에 부대 전체가 해체되는 수준의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그러한 막대한 손실의 궁극적인 사례가 청과 조선 모두 야전에서 제대 전체를 지휘부까지 함께 상실한 쌍령 전투이다. 문제는 이는 조선군도 마찮가지였다는 것이며, 유능한 지휘관이 휘하 팔기와 함께 전사해버려도 한두 연대 규모의 팔기로 다른 지휘관과 함께 병력 재투입이 가능했던 청나라와 달리, 조선군은 승패와 무관하게 전투 한번에 발생한 손실을 보충병으로 체우지 못하고 부대가 해산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32][33]

    이외에도 충분히 발달한 포병 장비가 서유럽에서도 아직은 등장하지 않은 시기에서 화약 무기가 보인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나기도한다. (당장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가죽포라는 임기응변으로 포병 화력을 막말로 영끌해서 썼을 정도로 포병장비에 하자가 많던 30년 전쟁이 쌍령 전투가 일어난 시기와 동시기때 한창이었다!) 총의 화력은 어떤 전투에서든 사격통제가 되기만 하면 정예 팔기를 상대로도 동수 교환을 보장하는 위용을 자랑했지만, 그것만으로 적의 돌파 시도를 완전히 좌절시키기에는 아직 화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러한 포병 장비의 "아직 부족한 발전"은 축성 기술의 발전에도 병목이 되었고, 조선이 병자호란 내내 각 요새 지점들이 충분한 저지 기능을 내주지 못해 종심과 무관하게 사방에서 지리멸렬한 교전을 겪다 남한산성 구원 실패로 패전한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30년 전쟁에서도 포병과 요새의 제한적인 영향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무려 30년 내내 각 전쟁의 결론이 뚜렷하게 나지 않고 계속 전쟁이 일어난 여러 원인 중 하나가 아직은 부족한 포병 화력과 마찮가지로 영향력이 애매한 상태에 있던 요새화 거점들이다. 전투 한번에 생기는 막대한 손실로 인해 결국 양측 모두 더 싸울 수 없게되던 부분에서도 서로 공유하는 점이 많으며, 30년 전쟁의 경우 이런 손실의 영향이 전쟁이 불명확하게 끝난 직후 바로 다른 전쟁으로 이어지는 지리멸렬한 반복으로 드러난 점에서만 조금 다를 뿐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이 어이없게 함락되며 동아시아의 주요 화약 보병 운용국 하나가 대국에서 축출되어버렸고, 일본 또한 도쿠가와의 막부 통치가 안정됨에 따라 화약 무기를 총동원한 전면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전훈이 끊겨버려 극동에서 화약 무기에 관한 군사적 발전이 반쯤 마비되어버린다. 이는 청나라의 군사 교리 적체로 직결됨은 물론, 일본 또한 새로운 서구 세력이 상륙하여 최신 화포를 팔아치우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교리가 적체되는 원인이되었다.

[1] 연려실기술에서는 허완의 부장이 안동영장 선약해였다고 나와있지만, 순조 실록 32권(순조 31년 9월 1일 경술 1번째 기사)에 따르면 허완의 부장으로 참전해서 전사한 안동영장은 선세강이다. 선약해는 선세강의 11촌 조카로,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진도 군수 선의문의 아들이며 심양일기의 저자다. 경상 수군 절도사로 재직 중 병사했다.[2] 임진왜란 당시 투항한 사야가 즉, 그 김충선이 맞다. 참고로 김충선은 이 전투에서 무려 청군 500기를 사살하였다.[3] 조선군을 향해 2차 돌격을 감행하다 입은 부상으로 본진으로 겨우 돌아온 뒤 결국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낙마하여 전사하였다.[4] 1차 돌격 당시 조선군과의 전투도중 부상을 입고 본진으로 패퇴하였다.[5] 조선의 행정력이 우수한 편이었지만 임란 당시 20일에 걸쳐 동원한 4만의 병력을 고작 5일 만에 동원하기는 힘들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경상도 근왕군의 총병력이 8,000명이었고, 그 중에 2,000명의 선발대가 쌍령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이들이 전멸당하자 나머지가 조령으로 후퇴했다고 한다.[6] 『황조문헌통고』에 '(청 태종이) 숭덕 원년(1636년) 12월에 요토, 양구리 등으로 하여금 3,000명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는 기록과 이후 병력 증원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점 그리고 요토의 양홍기 병력이 1500명 정도이니 대충 그 근처일 것이다.[7] 충청도 근왕군의 총 전사자가 2,600명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쌍령 전투'에서 전사한 숫자가 아니라 험천(險川)·쌍령(雙嶺)·강도(江都)에서 전사한 자들의 숫자도합 2,600여 명이라는 기록이다. 험천과 강도에서의 전투 역시 처절했기 때문에 쌍령전투의 전사자만 특별히 수천에 달하기는 어려워보인다.충청 감사 정태화가 전사한 군사에 대한 처리를 치계하다 다만 주력이었던 경상도 근왕군의 피해는 정확히 집계된게 없으며, 나만갑의 병자록에서는 비변사에서 쌍령전투로 장사지낸이가 8천에 달한다는 서술이 있어 상당히 큰 피해를 입은것은 확실해 보인다.[8] 만주족의 귀족 작위명으로, 서열 3위에 속한다.[9] 니루는 팔기군 제도에서 400명으로 편제된 기(구사)의 하위 부대이며, 호군은 이 전투에 출진한 정예병들 중 근위병 급인 바야라를 뜻한다. 구사는 25개 니루로 구성된 상급 제대이며 호군교는 바야라 중의 장교들이다. 즉 1니루당 1명씩의 친위대급 정예병을, 25니루로 편제된 1구사에서 2명씩의 장교를 추가로 받아 부대를 차렸다는 뜻이 된다.[10] 1개 구사(기)에 병력 7500명이 아니라 성인 남성을 뜻하는 장정이 7500명 있는 것이다. 그중 반은 노예 신분이고. 그것도 홍타이지가 1개 구사에 6000명으로 줄였다. 또한 패륵(버이러)아러는 단어의 근원을 찾으면 구사 지휘관이라는 뜻인데 이시기에는 황족의 3번째 작위를 뜻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요토는 원래 황족의 1번째 작위를 뜻하는 '친왕' 신분이었는데 병자호란 4개월 전에 홍타이지 앞에서 건방지게 굴다가 패륵으로 강등된 것이다. 그리고 요토의 직위가 친왕이든 패륵이든 관계 없어 팔기군 의 8개 구사중 '양홍기'의 '주인'은 요토 집안이 대대로 물려 받게 된다. 즉 패륵 1명이 6천~7천5백명의 병력을 지휘하는게 아니라 요토 집안이 6000명의 성인 남성이 있는 집단의 지배자라는 것이다. 여담으로 요토는 병자호란 중에 또 건방지게 굴어 황족의 4번째 작위인 버이서(패자)로 또 강등된다. 그래도 양황기의 주인임.[11] 성인 남성을 뜻한다. 그중에서 반 정도는 노복이라고 불리는 노예신분이다.[12] 황제, 친왕, 보이서들을 수행하는 정예부대[13] 다이산은 둘째고 첫째는 추옝이었는데 추옝은 누르하치와 사이가 나빠져서 숙청당했다.[14] 이 오곽사는 류림이 김화 전투에서 전사시킨 장수다.[15] 난중일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본인조차 매우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이순신 장군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장수는 손에 꼽는다.[16] 조선의 교통 상태고 뭐고 철도가 없는 시대에는 동원 속도는 뭘 논해도 도토리 키재기다.[17] 괜히 이렇게 초래된 변화를 두고 사무라이의 몰락이란 말까지 하는게 아니다.[18] 이것은 창잡이마저 극단적인 전문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농민 징집이 무력화되고 용병에 준하는 수준의 전문성을 가진 비용병 인력, 곧 "자유부대"에 속하는 인력들을 고인물 파이크 부대로 데려와 쓰고, 기병대는 자국의 준 상비 병력으로 극도로 전문화 시켜 운용하고, 남은 자리는 용병으로 체우며, 그러고도 부족하면 징집병을 파이크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서유럽에서도 굉장히 오래 고착화되었던 운용방식으로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징집 창잡이들이 고도로 숙련된 칼잡이, 특히 허술한 창병 방진을 돌파할 수 있는 장검으로 무장한 칼잡이들에게 처참하게 깨지는 것을 전훈으로 뼈저리게 체험한 조선에서도 아주 당연히 일어난 결과였다.[19] 전열보병 문서에서 보듯, 도저히 파이크 고인물 누적을 감당하지 못해 아예 "이 "개쩌는 신무기"로 뭐 어떻게 해볼 수 없냐?"란 발상으로 시작한게 서유럽의 화약 무기 운용 교리의 폭발적인 발전과 그에 따른 전훈 누적의 원동력이었으며, 이는 전장 환경상 영세한 병력간의 충돌에서도 비정규전의 비중보다 소위 회전의 비중이 컸던 유럽의 전장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반면, 복잡한 전장 환경으로 인해 비정규전이 매우 잦은 동아시아에서는 어줍잖게 진형 짜고 눌어앉기로만 대응했다가는 궁기병에게 쪼이고 쪼여서 갉아먹히다가, 일본이 보여준 것 처럼 소수의 정예 보병들에게 적당한 무장병들조차도 순식간에 진형이 깨져 요리당하는 사태로 이어지는 일이 많았다. 동유럽에서 동아시아와 병력 구성이 흡사했던 것도 마찮가지의 이유다. 그나마도 유럽의 동부와 극동부는 복잡한 지형이 "일관적"으로 복잡하기라도 했기 때문에 "전투마차"를 이용해서 비정규전으로 정규전 병력을 휩쓸지 못하게 방벽을 치는 것이 가능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물론, 포병이 충분히 강력해진 후에는 이 모든 차이가 아무 상관없게 되었지만, 쌍령 전투가 일어난 시기는 유럽에서조차 아직 포병이 그 정도로 전쟁의 신이 되진 않은 시기였다.[20] 물론 속오군이 전부 포수인 것은 아니다. 속오군 중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이 포수였을 뿐. 화승총으로 호랑이도 한방에 때려잡다는 포수들은 제 아무리 조선이라해도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인력은 아니었다. 그리고, 총이라는 무기는 엄연히 창보다 압도적으로 비싸다.[21] 쌍령 전투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조선군은 물론, 청군조차도 한동안은 플린트록 도입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도 총의 비싼 가격 탓이다. 플린트록을 도입해서 발생하는 사격 화력의 증대가 동아시아 교리의 입장에선 가격에 비해 매우 미미했기 때문에 포수가 많았던 청의 한인 팔기에도 도입이 늦어졌다. 야전 축성물에 의존하여 안정적으로 서서 사격하는 상황에서는 분명 플린트록이나 매치록이나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동서 전장 환경의 차이로인한 교리 분화에 "신규 포병 장비"란 절대적 변수가 도입되는 갱신이 이루어지지 않아, 보병 화기의 중요성 또한 갱신되지 못하면서 동아시아측의 교리가 적체되어 전열보병 교리가 자리잡지 못한 결과이며, 전술했듯 일본에서조차도 산업시대의 기술로 더욱 무시무시하진 대포가 서양에서 수입되고, 그 대포를 어떻게 쓰는지 친절히 가르쳐준 장사해야지 서양 교관들이 그 대포에 맞춰 전열보병 교리를 철저히 훈련시켰기 때문에 "사무라이의 몰락"이란 말이 나올 수준의 급변이 발생한 후에야 전열보병 교리가 자리잡았다. 이 대포 발전의 적체도 또 동아시아의 기묘한 전장 환경 탓이 상당한데, 이것은 공성전 쪽의 문제로 또 별도 문서가 필요할 만큼 복잡하다. (간단히 말해 대륙의 기상으로 지어진 무지막지하게 두껍고 거대한 고성들 탓이다. 이 거성들은 서구 세력들조차 후미장전식 야포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대포로 쏴서 부술 생각을 접어버리게 만들었다.)[22] "장수가 되어 마땅히 겁을 내고 나약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고 항상 용맹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오. 장수는 본래 용맹을 근본으로 삼으나 이를 실행함에는 지모와 계책을 써야 하는 법이오. 오직 용맹만을 알고 그것에만 의지한다면 일개 필부에 대적할 수 있을 뿐이오."[23] 서양의 종사에 해당되는 인력이 조선의 "장교"였다.[24] 간단히 말해 소위 "기사도 허풍"의 종말이다. 이후, 칭송 받는 감투 정신은 전열보병 기준으로 봐도 "정말 미친 것 같은" 용기가 필요한 행동, 예를들어 느릿느릿 적 코앞까지 걸어가서 5Kg이나 되는 폭탄을 던진다거나, 무너진 적 성벽에 들이박는 다거나, 성벽을 직접 기어오른다거나 하는 진짜로 칭송 받아야 마땅할 행동(...)으로 "현실화"된다.[25] 전술했듯 이는 일본에서조차도 마찮가지였고, 그 관념의 붕괴가 가져온 충격이 "사무라이의 몰락"이라고 불릴 지경으로 막대했다.[26] 이것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써야할 돈도 안 쓰려드니 문제는 악화만되었지 더욱 해결될 일이 없었다. 당장 북방군만해도 인조가 막무가내로 박대한 끝에 반란으로 이어져서 소멸해버린 것이다. 조선에는 단순히 군벌화 가능한 인력의 존재를 혐오하는 것 이상으로, 그런 "잠재적 반군 무리"에게 돈을 쓰는 것 자체를 혐오하는 풍조가 만연해있었고 바로 그 풍조 덕에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 임진왜란 전훈이다.[27] 조선 전기만 해도 남방 왜구와 북방의 위협이라는 양면전선에 노출되어있었기 때문에 강무란 왕의 사냥을 통해서 군대의 현실을 파악하고 훈련하면서 문제를 땜빵할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였다. 하지만 연산군이 강무를 자신의 유희로 사용하면서 조선의 왕들은 강무를 등안시 하게되었고 군대를 직접 챙기면서 문제를 해결할 여지가 차단당하게 되었다.[28] 이 "고도의 훈련"이란 제 정신이 아닌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파이크 앤 샷으로 바뀌었다고 파이크 싸움의 방식이 서로 고슴도치가되어 창에 꿰뚫려 죽어나가다가 어느 한 쪽이 무너지면서 결판이 나는 방식인게 달라진 적은 없다![29] 모순적이게도 기병 전력의 우수함이 방해가 된 경우기도한데, 러시아의 경우 궁기병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목 기병의 난입에 대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보완책으로 총기에 의존하여 스트렐치와 같은 총사대를 적극 양성한 반면, 대륙권 동아시아에서는 그냥 맞 기병으로 응수하면 그만이었으므로 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온갖 삽질을 해가며 총기 운용 교리를 발달 시킬 여지가 없었다.[30] 전열 싸움에 있어서 적의 머리에 얼마나 구멍을 잘 뚫느냐보다 근접전을 걸 수 있는 적이 얼마나 한꺼번에 다가오느냐에 더 중요하며, 아무리 많이 잘 쏴죽여도 동시에 달려오는 적의 수는 동일하다면 무용지물이다. 아무리 총을 잘 쏴도, 유사시 즉석해서 전열을 형성하여 항전하고, 전열이 감당할 수 없어보인다면 제빨리 후퇴하는 전술적 역량까지 숙달되어야 엽병 같은 정예의 칭호가 붙는 거지, 그게 안되면 총 잘 쏘는 민병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31] 유죄인지 무죄인지 뚜렷하지 않은 사건[32] 사격 보병들의 전열을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인력이 너무나 부족했고, 이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지나치게 높으신 분이 전열을 직접 통제하다시피하는 상황이니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전술했듯 조선군의 지휘 위계 질서는 전혀 정돈되어있지 않았기에 "답답해서 내가 직접 친다" 수준의 행동을 하지 않으면 서로 갑론을박만 하다가 분열되기 일쑤였고, 굉장히 권위 있고 지체높은 인물 하나가 작정하고 죽을 각오로 병력을 통솔하지 않으면, 병력이 통솔되기는 커녕 지휘부끼리 서로 싸움이 나기 일쑤였으며, 이는 심지어 승전한 사례에서도 마찮가지였다. 비단 야전 지휘부가 분열되지 않아도 그 야전 지휘부를 지원해야할 후방 당사자들이 비협조적으로 행동해서 보급이 끊기는 일도 많았고, 대표적 사례인 광교산 전투를 보면, 지휘부가 완승을 거두고 생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라감사가 전라병사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아 보급이 끊기면서 근왕병들이 모조리 탈영해버려 전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이 치졸한 정치적 알력 문제는 오히려 임진년 때보다 더 나빠진 것이다. 막말로 사방에 원균이 있는 꼴[33] 이 당시 근왕군 편성을 위해 속오군을 동원하던 체계와 좀 다른 방식으로 같은 문제를 중세 동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었고, 아주 비슷한 방식으로 파멸한 패전이 그 악명높은 만지케르트 전투이다. 여기서도 향군 테마타와 금군 타그마타 모두가 서로 협조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알력 다툼이 벌어지면서 전투가 꼬였으며, 하필 이 모든 분열을 수습해야하는 장본인인 황제 자신이 이 분열의 원흉이었기 때문에 황제가 포로로잡히거나 말거나 휘하 향군인 테마타는 멀뚱멀뚱 바라만 보다가 그냥 도망쳤다. 반대로 조선에선 근왕정신으로 향군이 충심 넘치게 모이긴 했는데 모인 향군을 지휘하는 대가리들과 밥을 줘야하는 대가리들이... 사실 군주 자체가 문제였단 점에서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