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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목내선 睦來善 | |
1689년 作 기로연회도에 그려진 목내선. | |
출생 | 1617년 9월 7일 (광해군 9년) |
사망 | 1704년 10월 17일 (향년 88세) (1704년, 숙종 30년) |
본관 | 사천 목씨 |
자 | 내지(來之) |
호 | 수옹(睡翁), 수헌(睡軒) |
부모 | 부친 - 목서흠(睦敍欽), 1572∼1652)[1] 모친 - 안동 권씨[2] |
형제자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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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 첫째부인 - 완양군(完陽君) 이명웅(李命雄)의 딸 전주이씨 둘째부인 - 윤창언(尹昌言)의 딸 해평 윤씨 셋째부인 - 이의근(李義根)의 딸 전주 이씨 |
자녀 | 장남 - 목임일(睦林一), 참찬(參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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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문인이며 남인(南人)의 중진으로 온건파 탁남(濁南)에 속하였다.2. 생애
1646년(인조 2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50년(효종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판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672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1675년(숙종 1)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예조,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 당시 조선은 붕당(朋黨) 정치와 당쟁이 격화된 시기인데 스승인 허목(許穆)이 남인의 영수로 활동하였기에 목내선도 자연스럽게 남인이 되었다.
이후 남인들은 1680년 경신대출척,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서인들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고 도성에서 쫓겨났지만 남인 중에서 온건파 탁남과 업무능력을 인정받은 극소수만 서인 정권에서 특별히 발탁되었다. 그 뒤 우참찬이 되고, 1689년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 해에 지금도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인 장희빈 소생의 아들 윤(昀)을 원자로 삼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고 이때 목내선은 좌의정에 올랐다.
5년의 정권을 유지하지만 1694년 남인이 몰락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 절도에 위리안치되었고, 1699년(숙종 26)에 풀려나 전리(田里)에 돌아왔고 이때 숙종 임금에게 이례적으로 말 한 필을 하사 받았다.
이후 정계에는 완전히 은퇴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힘썼다. 서예 글씨에 뛰어나 수많은 문인들이 그에게 찾아와 글을 배웠으며, 특히 해서(楷書)와 초서를 잘 썼다.
1704년(숙종 30) 10월 17일에 노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88세였다. 조선 시대 최장수를 누린 재상 중의 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