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0년(명종 15년) ~ 1627년 9월 6일(인조 5년)(향년 67세)
1. 개요
조선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군신(君信), 호는 내촌(耐村).2. 생애
1560년 참찬(參贊:정2품)을 지낸 아버지 강신(姜紳)과 어머니 동래 정씨 정유의(鄭惟義)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문관 가문으로, 부친 강신과 조부 강사상(姜士尙) 또한 문과 출신이었다. 이에 강홍립 또한 글공부에 매진하여 1589년(선조 22) 증광시 진사시에 3등 9위로 입격한 뒤 이어 도사(都事:종5품)를 지내다가 임진왜란 기간 중이던 1597년(선조 30) 알성시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했다.#이후 선조 치세 말기 함경도 일대의 군비를 감독하고 시찰하는 등 군사 부문을 포함한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며 광해군의 눈에 들었다. 1605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명나라로부터 허락받는 데 성공하여 광해군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며, 이 와중에 선조가 사망했다. 《승정원일기》와 《청태종실록》 등에 따라서 광해군이 사르후 전투에 조선군을 파병하면서 사전 투항 지시가 있었다는 해석[1]이 일찍이 제기되었고, 전쟁 상황을 관망하고 출병의 이유가 상국의 독촉에 따른 것임을 전달하라는 2중 외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2]
반면 거의 9000명에 가까운 병사를 잃을 때까지 항전했다는 것에서 광해군의 밀지같은건 없고, 패색이 짙어 어쩔 수 없이 투항한 것이라는 연구 또한 있으며 이쪽이 현재로서는 주류에 더 가까운 해석이다. 즉, 밀지설을 부정하는 측에서는 이것은 서인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강홍립 밀지설'을 주장했을 뿐으로 실제로는 큰 의미가 없었다는 설이 있는데, 김응하 등 주요 장수들과 파병군의 절반이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했던 것을 보아[3] 서인의 밀지설은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학계내의 대표적인 전쟁사학자인 임용한 교수 또한 광해군 밀지설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었다.
강홍립 밀지론은 역사학자들까지도 속여넘겨서 1970~80년대까지도 학계에서 정설처럼 돌아다녔다. 광해군을 쫓아내기 위해 만든 루머가 거꾸로 광해군을 영웅으로 만드는 근거가 되었다는 게 다만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광해군을 영웅시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이 가짜 뉴스를 굳게 믿는다. 정치 투쟁에서 가짜 뉴스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정치인들 사이에 오가는 가짜 뉴스를 우리는 음모와 모략이라고 한다. 이건 광해군만의 비극이자 불운이었을까? 아니다. 역사상 거의 모든 군주들이 음모론의 주인공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왜 음모론에 쓰러졌을까? 그것은 그의 체제가 그만큼 불안정했고, 상대를 포용하는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 <병자호란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 (임용한-조현영 지음) - p. 53. 사르후 전투>
- <병자호란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 (임용한-조현영 지음) - p. 53. 사르후 전투>
무엇보다 이러한 밀지설은 해당 주장의 유일한 근거가 인조반정 당시 서인측의 반정 명분으로 끌어들였던것이며 편향성으로 지적받는 광해군일기조차도 항복하라는 밀지를 교서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4] 이후 일본 제국의 역사학자 다가와 고조가 주장했던 내용, 곧 식민사관이 근원으로 주류 학계에서는 사실이 아닌것으로 판단한다.# 더해 항복을 위한다면서 1만의 정예 포수를 차출한 점, 명군이 전멸한 이후에도 지속된 조선군의 항전과 강홍립의 자결시도, 조선군의 매우 큰 피해등 정황적으로도 밀지설을 사실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해당 밀지설은 근거가 매우 부족하다라고 볼 수 있겠다.
광해군은 칙서의 도착으로 출병이 명확해지자 명군이 패전할 경우를 대비하여 조선군이 명나라 장수의 지휘를 받지 않도록 해 도원수 강홍립의 지휘권을 지키는 한편, 조선군을 명나라의 동로군에 예속시켜 자의에 따른 출병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했다. 동로군이 출병하기 직전에도 후금과의 초피 교역을 시행하고, 녹봉을 지급했으며 이 과정에서 회령부사 한명련으로 하여금 누르하치의 차관 쇼롱오(šolonggo)에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냈지만 명군의 진[唐陣] 뒤에 있을 것"이라 유시하였다. 한명련과 같이 광해군의 밀령을 받은 강홍립은 배동관령에 이르러 호역 하세국을 허투 아라(hetu ala)로 보내어 조선이 후금을 적대시하지 않으며 이번 출병은 상국(명나라)의 재촉을 받아 부득이하게 한 것으로 얼마 안 되는 군졸들은 명군 진영 뒤에 있었다고 전했다. 마찬가지로 사르후 전투 현장에서는 조선군 좌•우영이 전멸하자 아이신기오로 다이샨이 조선군 중영에 통사를 요구했고, 이에 강홍립은 통사 황연해로 하여금 "지금은 부득이 해서 온 것"이라 전했으며, 후금도 과거 조선의 번호들을 보내어 조선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삼사에서는 강홍립 등을 '적신'(賊臣)이라 칭하면서 처벌을 주장했으나 이들에게 밀지를 내린 광해군은 처벌 논의를 수용하지 않았다.[5]
사르후 전투에서의 투항 이후 포로 신분으로써 후금에서 어느정도 대접을 받으며 지내던 강홍립은 후금의 변발을 거부하고, 한족 여성과 결혼을 했다.[6] 거의 주후금 조선대사로서 조선의 입장을 후금에 설명하고, 후금에 적대적인 조선의 정책에 반발하는 후금을 무마했으며, 조선으로 가는 후금사신에게 딸려 공식적으로 광해군에게 장계를 올리거나, 민감한 내용은 각종 후금과 교역하는 조선 상인들을 통해 조정에 전달하여 광해군 연간에 후금이 조선을 침공하지 않도록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친명정책을 하되 후금을 자극하지 않는 다는 정책은 조선내 친명 주화파들을 자극해 인조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었으며 인조반정에 참여한 주 세력들은 강홍립은 배반자라며 배척하기 시작한데다가 친명배금 정책을 본격화 하며 강홍립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후금의 제2대 황제가 된 홍타이지는 대조선 강경파였고, 조선의 무성의한 대후금 정책에 분노하여 명나라를 치기 전에 후방을 안정화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한다. 이것이 후금의 1차 조선 침공인 정묘호란이다. 이 때 조선인이었던 강홍립은 길잡이를 강요받아 어쩔수 없이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가는 것을 도왔다.[7] 그 결과는 하루 평균 진군거리가 100km가 넘는 후금군의 경이적인 쾌속 진격이었다.
하지만 강홍립은 정묘호란 당시 여러모로 후금과 조선의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계속 조정에 후금의 사정을 알리는 등 여러모로 노력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주선으로 강홍립은 조선에 다시 귀환하게 되는데 신료들은 적에게 항복했고 정묘호란때 앞잡이를 했다는 사유로 강홍립이 도성에 오자마자 체포해 참수하라 했으나 인조는 강홍립이 여러모로 정묘호란 때 조선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잘 알고 있었고, 강홍립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청나라 측에서도 조선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는지라, 사신을 보낼때 강홍립이 무사한지를 확인하도록 했다.
귀국 얼마 후 강홍립은 병으로 사망했다. 이에 인조가 도원수 자격으로 장을 치르라고 복권을 명했으나 대신들이 충의를 지켜 죽은 이들과 비교하며 반대하여 이에 따랐다.(인조실록 16권, 인조 5년 7월 27일)
삼전도비에도 그의 이름이 실려있는데 이후 건륭제의 이름(애신각라 홍력)과 발음이 같은게 문제가 되어 비문의 이름이 강황래(姜黃來)로 적혀 있다. 묘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다.
3. 평가
정묘호란 때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 나온 소설들을 보면 "강홍립이 후금의 힘을 빌려 조선을 차지하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했다. 그러니 강홍립은 극악무도한 역적이다"라는 식의 극도로 부정적인 내용으로 서술한 작품들이 무수히 많다. <광해군일기>에서도 강홍립이 후금 군대의 힘을 빌려 임금을 몰아내고 자기가 임금이 되려고 했다는 식의 내용이 올라와 있는데 이는 강홍립에 대한 근거없는 중상모략이 조선 시대 내내 횡행했음을 보여준다.1980년대 방영된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대중문화에서는 최초로 강홍립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였으며 이후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객관적인 시각으로의 접근과 역사적 자료를 통해 "포로가 된 병사들을 살렸고, 신흥강호였던 후금과 직접적인 적대관계를 최대한 늦추었다"는 호의적인 연구들도 나오고 있다.
4. 대중매체에서
- <강로전>이라는 소설에도 강홍립이 등장한다.
- 1986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남한산성에서는 배우 오지명이 연기했다. 강홍립을 가여운 장군으로 묘사했는데 광해군의 명으로 전쟁을 치르지 않고 항복했으며 이괄의 난 때 달아난 한윤이 청나라로 달아나서 강홍립에게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왕이 바뀌자 조정에서 강장군 및 부관들의 식솔 3대를 몰살시켰다고 거짓말을 하는 통에 경악한다. 부장인 김경서가 피를 토하고 분통터져 하다가 분사하고 강홍립의 꿈에 나와서 "왜 우리들 식솔이 억울하게 죽어야 하냐"며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제 조국도 아니라"고 하소연하며 "청군을 도와 조선을 뭉개시오!"라고 피를 토하며 애통해하는 꿈에 괴로워한다. 결국 청나라군이 조선으로 쳐들어올 때 도우며 비로소 한윤이 거짓말을 한 걸 알고 조선에 남는데 그의 처형을 주장하던 대신들에게 인조가 거부하고 조선에 살게 한다. 강홍립은 유배되어 있던 광해군에게 찾아가서 "전하의 생각이 맞았사옵니다. 그저 전하를 몰아내고 쓸데없이 명나라나 찾다가 결국 청나라에게 이렇게 시달리는거 아니겠습니까?"라며 아쉬워한다.
- 2021년 MBN 드라마 <보쌈-운명을 훔치다>에서는 배우 홍승모가 연기했다.
- 네이버 웹툰 <칼부림>에서는 사르후 전투 후 후금에 억류되는 신세가 되었다. 강직한 김경서와는 달리 후금 고위층들에게 유연하게 대처하며 호감을 산다. 이후 정묘호란 때 청 침공군을 따라 조선으로 귀국하게 되지만, 지난 패전과 항복의 책임을 물어 그를 처형해야한다는 주장이 거세게 제기되었다.
[1] 강홍립이 광해군의 밀지를 받아서 고의적으로 항복했다는 것은 당시 야당이던 서인들의 주장이었고 1980년대까지는 거의 지배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대한 반론도 나오긴 하지만 강홍립이 사르후 전투 당시에도 후금측과 계속 접촉을 시도한 것으로 보아서, 조선왕조의 특성상 이런 일은 광해군의 묵인 없이는 시도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를 신빙성 있게 받아들이고 있다.[2] 한성주(2018), 《조선시대 藩胡 연구》, p. 334~337;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3] 원정군 1만 3천명은 명의 반복되는 요구에 따라 대부분 조총병 편제로 이루어졌는데 사르허 전투 당시 앞서가던 명군은 후금 기병대에 포위 섬멸당하고 뒤이어 가던 조선군은 대 기병전을 위해 언덕에서 야전 축성을 하려고 했으나 그 전에 청군이 양쪽에서 들이닥쳤다. 때마침 불어닥친 모래 바람으로 시계마저 최악인 상태에서 맨몸으로 기병 돌격을 받은 조선군 좌영, 우영의 조총병들은 괴멸되었고 핵심 지휘관들도 모두 전사했다. 이미 명군의 홀대와 시원찮은 보급으로 사기가 떨어져있던 강홍립의 중군은 결국 투항했다. 이 당시 강홍립은 최선을 다해 싸웠으며 일부러 투항했다고 보기는 힘들다.[4] 간혹이를 ‘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에 힘을 쓰라.‘라는 광해 11년 2월 3일 정사 2번째기사를 들어 실록의 내용이라는 식으로 호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기라는 정 반대의 내용이다.[5]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p. 184~196.[6] 다만 이 때 강홍립은 결혼하여 조선에 아내와 자식 6명이 있었던터라 한족 여성은 첩이었다. 이 여성은 강홍립이 조선으로 갈 때 따라가서 그의 집에 같이 살다가 강홍립 사후 청나라로 돌아갔다.[7] 당시 강홍립은 원정군에 차출된 후 봉황성에 이르러서야 조선 정벌길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8] 태조왕건에서 죽주 도적 기훤, 야인시대 2부에서는 몽양 여운형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