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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파일:문화재청 CI_상하.svg 서울 삼전도비
서울 三田渡碑
Samjeondobi Monument in Seoul
<colbgcolor=#315288><colcolor=white> 주소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크기 높이 395cm, 너비 140cm
면적 200㎡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1639년 2월 11일(건립일)

1. 개요2. 역사
2.1. 군림과 오만의 상징
2.1.1. 비문은 너희들이 써라!2.1.2. 굴욕의 상징이 세워지다2.1.3. 청 사신의 필수 방문 코스
2.2. 수난과 오욕
2.2.1. 고종이 엎고 일제가 세우고2.2.2. 땅에 묻히고 물에 빠지고2.2.3. 치욕적 역사의 교육장으로
2.3. 2000년대 이후의 근황
2.3.1. 동네에서 저것 좀 치워주세요2.3.2. 2007년 스프레이 훼손 사건2.3.3. 돌고 돌아 고향으로 돌아오다
3. 내용4. 참고 자료5. 외부 링크6. 사적 제1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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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서울삼전도비2010이후.jpg
현재 삼전도비의 모습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비석.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식 이름은 만주어로 '대청국의 성스러운 한의 공덕비(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ᡳ᠋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ᠠᠨ ᠊ᡳ᠋ ᡤᡠᠩ ᡝᡵᡩᡝᠮᡠᡳ ᠪᡝᡳ)', 한문으로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청나라 황제가 청태종 홍타이지이므로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라고도 한다.

내용은 병자호란삼전도의 굴욕을 청나라 입장에서 미화하여 기록한 것이다. 사실상 단종실록(노산군일기)과 세조실록의 이민족 침략자 버전이자 고종실록순종실록의 청나라 버전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삼전도비의 내용에 대해서는 교차검증이 필수다. 다만 일제강점기일본 제국이 자신들의 조선 식민지배와 중국 침략 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청태종을 미화함에 따라 삼전도비의 내용을 교차검증 없이 곧이곧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되었으며, 이는 8.15 광복 이후로도 한국에서 오랫동안 청태종이 자비로운 침략자로 미화되는 원인이 되었다. 현재도 한국인들 중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광해군과 청태종에 대한 인식이 매우 긍정적인 사람들[1]은 삼전도비의 내용을 교차검증 없이 곧이곧대로 믿는 경향이 강하며[2], 심지어 삼전도비의 내용이 객관적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3]

같은 내용을 두고 앞면에는 만주 문자(좌)와 몽골 문자(우)로, 뒷면에는 한문으로 새겨놓았기에 로제타 석처럼 17세기 세 나라의 언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2. 역사

2.1. 군림과 오만의 상징

2.1.1. 비문은 너희들이 써라!

1637년, 청나라조선을 기습 공격하며, 결국 조선 왕 인조가 포위당해 전쟁은 조선의 패배로 끝났다. 자세한 전개는 병자호란 문서 참조.

1637년 2월 24일,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있던 조선 왕 인조는 청 황제 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로 항복하고 가까스로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직후 청나라는 병자호란에서 선봉으로 활약한 마푸타를 통해 인조의 항복을 받은 자리에 자신들의 승리를 기록한 비석을 세우도록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당시 경기도 광주부 중대면 송파리, 지금의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자리인 삼전도(三田渡)에 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인조부터가 자신의 굴욕이 쓰인 비석을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리에 세운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비석을 세우는 일을 보류했다가 '크게 손해보지 않고 생색은 많이 낼 수 있으니 해버리자'는 김류의 청원에 마지못해 사업이 재개되기도 했다.[A] 이로써 그해 8월 16일(음력 6/26)부터 청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은 단을 개조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홍수가 나면 침수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삼전도의 굴욕 당시보다 오히려 더 높고 크게 만들어야 했다.[B]이후 공사가 꾸준히 진척되어 12월 18일(음력 11/3)에는 기초가 완성되었고, 그 위에 정문과 담장까지 세웠다. 이제 비석과 비각만 만들면 되었다.[C]

청나라 측에서도 이 비석을 세우는 데 상당한 관심을 보여서, 이듬해 1월 8일(음력 11/24)에는 책봉사로 온 타타라 잉굴다이마푸타가 직접 현장을 확인하기도 했다. 다음날 인조가 청나라 사신들을 접견하는 과정에서 사신들이 담장과 귀부(비석의 거북이 모양 받침)에 대해 언급한 것이 확인되는데, 이 대목의 기록이 소실되는 바람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크기나 형태를 문제삼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미 만든 귀부는 버리고 더 큰 귀부를 새로 만들어 쓰게 되었고, 이때 버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귀부가 지금도 삼전도비 곁에 나란히 있다.[7]

문제는 비문의 내용이었다. 자랑스러운 승전비도 아니고 굴욕적인 항복의 내용이 담긴 비석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아무도 비문을 작성하려 하지 않았고 차일피일 시간만 소모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측은 청나라에서 비문 내용을 내려줄 것을 은근히 원했지만 청나라는 단호하게 조선에서 써낼 것을 요구했다.
사신: 비문은 우리들이 돌아가기 전에 지어서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들이 비록 문자를 알지 못하나 다른 사람에게 해석하게 하면 글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조: 비문은 당초 대국에서 지어 보내 주겠다는 영(令)이 있었으므로 이번에 대인이 올 때 반드시 가져오리라 생각하였는데, 뜻밖에 지금 이렇게 지어 보여 달라는 명이 있으니, 이것은 소국이 감당하여 할 바가 아니오.

사신: 비록 그렇기는 합니다만 지어서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인조: 대국에서 지어 보내겠다는 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방(小邦)의 사람 중에는 찬술할 만한 문장이 훌륭한 인재가 전혀 없으니, 반드시 대국에서 지어 보낸 뒤에야 될 수 있을 것이오.

사신: 이것은 우리들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고, 실은 황제의 교령(敎令)입니다. 오직 귀국이 지어서 우리들의 이번 행차 편에 부쳐서 황제께서 보시게 하기를 바라니, 전에 하던 대로 개찬하는 것은 황제께 달린 일입니다.

인조: 이것은 심상한 비문이 아니고 황제의 덕을 찬송하여 천년토록 전할 것인데, 우리나라의 문사(文詞)가 졸렬하여 찬술할 수 없소. 어렵게 여겨 주저하는 것은 이 때문이오. 그러나 이렇게까지 수고스러이 말씀하시니 감히 어기지 못하겠소. 대신에게 물어서 문예에 조금 장기가 있는 자를 택하여 지어 보도록 하겠소.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음력 11월 25일

결국 조선에서 비문 내용을 적어보내야 했다. 조정에서 급히 물망에 오른 사람은 장유 · 이경전 · 조희일 · 이경석의 네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문의 크나큰 굴욕이 될게 뻔한 데다가 개인적으로도 좋다고 나설 일이 전혀 아니었으므로 삼전도비의 비문 내용을 지어 올리려는 사람이 없었다. 장유 · 이경석 · 이경전은 '임금님 저는 글이 기억나지 않습니다'부터 시작해 온갖 핑계를 대며 못 쓴다고 상소를 올렸고, 조희일은 일부러 채택되지 않도록 거칠게 글을 써서 내는 등 그야말로 비문의 작성자가 되지 않기 위한 당시 선비들의 처절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그나마 장유와 이경석이 글을 써서 낸 덕분에 간신히 청나라 사신이 귀국하는 날짜에 맞춰 글을 보낼 수 있었다.[D]

이로써 어찌어찌 조선에서 보낸 글을 받아본 청나라 대학사 범문정[9]은 장유의 글에 '견양(牽羊)'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은 춘추시대 정나라 양공이 초나라 장왕에게 항복한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제후끼리 서로 침략한 고사이므로 인용하는 것이 온당치 않고, 이경석의 글은 쓸 만하지만[10] 내용이 소략하므로 적어준 내용을 추가하라고 회답했다. 흥미롭게도 이 당시 범문정이 적어준 당안 원본이 대만에서 발견되었는데, 실제로 거의 전부 삼전도비문에 반영되어 있다.[전문] 이에 인조는 이경석을 불러다가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E]
저들이 이 글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고자 하니, 이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다. 구천이 회계에서 신첩 노릇을 하다가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적을 이루었으니, 다른 날 힘을 기르는 것은 오직 나의 할 일이다. 오늘 할 일은 단지 문자로만 저들의 마음에 들게 지어서, 사태가 악화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난후시사


결국 이경석이 비문을 고쳐 쓰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심적으로 큰 고통을 겪어서 형 이경직에게 '문자를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는 편지를 쓰기도 하고, '부끄럽게도 오계(浯溪)의 백 길 절벽을 저버렸구나'[13]라는 시를 지어서 한탄하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어렵사리 만들어진 비문은 다시 6월에 청나라로 들어가는 사신 편에 보내져서, 그해 7월에 청나라 측의 승인을 받고 돌아올 수 있었다.[F] 그러나 삼전도비문을 쓴 것은 이경석에게 평생토록 마음의 짐으로 따라다녔고, 말년에는 이 건으로 12살 어린 후배에게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수이강 사건).

한편으로 청나라에서 비석을 더 크게 만들라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주문했기 때문에, 그해 9월 23일(음력 8/16)에는 충주로 석공들을 보내 돌을 캐는 작업에 들어갔다. 문제는 충주에서 캐낸 비석을 한강으로 삼전도까지 실어와야 하는데, 돌이 워낙 큰 데다 장맛비가 내리지 않아 그만한 크기의 배가 충주까지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비석은 겨우내 충주에 방치되었다가 다시 이듬해인 1639년 봄이 되어서야 간신히 삼전도까지 실어올 수 있었다. 또한 이 비석을 강가에서 비각까지 끌고 오는 데 다시 400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동원되었는데, 그만큼 이 비석은 당시 조선에서 유례가 없던 크기였다.[G]

2.1.2. 굴욕의 상징이 세워지다

1639년 7월 25일(음력 6/25)에 청나라 사신 마푸타가 다시 한양에 들어왔다. 마푸타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삼전도비부터 찾아서, 조선 조정에서도 다시 작업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문과 비석이 모두 준비되었으니 남은 건 글꼴을 갖추어 새기는 일이었는데, 당초 비문 상단의 전액(전서체로 쓴 제목)은 동양위 신익성이 쓰고 본문은 영접사를 맡은 오준이 쓰도록 하였으나, 다음날 바로 신익성이 '오른팔이 마비되어 붓을 못 든다'는 상소를 올려버렸다. 결국 제액은 신익성 대신 예조참판 여이징이 쓰게 되었고, 7월 27일(음력 6/27) 밤을 새워가면서 간신히 완성을 볼 수 있었다.[H]
비문을 지을 자와 베낄 자 등을 일체 전교에 써넣은 대로 즉시 비석을 세울 곳에 내보내어 이대로 쓰고 즉시 새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칙사가 역관 등으로 하여금 새기는 일을 신에게 독촉하도록 하고 말하기를, '반드시 떠나기 전에 새기고 인출한 다음 세워야 하며, 세우는 날에는 국왕도 나가고 우리들도 가서 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석면을 나누어 3등분하니 쓸 곳이 지극히 좁아져서 각수(刻手)가 그 돌에 많이 오를 수 없고 불과 두세 사람이 작업을 하므로 이 때문에 새기는 공사가 더욱 늦어져서 적어도 20여 일은 걸릴 것이다. 또 이처럼 무거운 돌은 매번 세웠다 눕혔다 할 수가 없으므로 청나라 글자와 몽골 글자를 다 새긴 뒤에야 세울 수 있다'고 하였더니 비록 귀담아들었을 리는 없지만 재촉해서 서둘러 하라고만 명하였습니다.

─ 승정원일기 인조 17년 기묘(1639), 음력 6월 28일


여기에 새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최초에는 비석 앞면을 삼등분해서 만주글자 · 몽골글자 · 한문으로 나누어 쓸 예정이었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 작게 새기다보니 작업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와중에 마푸타는 기어이 세우는 꼴을 보고 떠나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조선 조정에서는 석공이 하루에 몇 자씩, 몇 사람이 동시에 작업할 수 있는지까지 파악해서 관리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마푸타가 조선 측 하소연을 받아들여 '늦더라도 제대로 새기라'는 요지로 귀국길에 올랐고, 마푸타가 떠난 지 22일 만인 8월 26일(음력 7/28)에 드디어 작업이 일단락되어 서둘러 탁본을 마푸타에게 보냈다.[I]

그런데 연말이 되자, 다시 조선에 들어온 청 사신단이 갑자기 앞면에는 만주글자 · 몽골글자만 새기고, 한문은 뒷면에 새기는 것으로 체제를 바꿔버렸다. 얼마 전까지 그렇게 독촉해서 공사를 강행한 것이 말짱 헛수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형조참판 오준이 다시 한 번 삼전도로 가서 뒷면에 가득 들어가는 크기로 글씨를 썼고, 오준이 현장을 감독하는 가운데 12월 24일(음력 11/20) 저녁부터 스물세 명의 석공들이 밤낮으로 글자를 새겨서 청 사신이 도착하는 28일 오후에 간신히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J]

이제 남은 건 한문으로 된 비문을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로 번역하여 새기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를 구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청 태종이 마푸타와 함께 차바하이(cabahai), 이서봉(李棲鳳), 비릭투(biliktu) 세 사람의 박시(baksi)[19]를 보내 삼전도비의 비문을 확인하고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로 번역하게 했다. 이들은 12월 28일(음력 11/24)에 한양에 도착하였고, 그 다음날부터 삼전도를 오가며 비문을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해 사흘 만에 번역이 모두 완료되었다.[K]
이에 앞서 상(上)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조선을 정벌하시어, 국왕 이종(李倧)을 남한산성에서 포위하고 그 처자를 사로잡으니, 군민의 위험이 박두하여 국세가 거의 망하였다. 이종이 비로소 남한산성을 나와서 군문에 이르러 복종하니, 상께서 특별히 동정하여 용서하고는 왕을 나라로 돌려보내고, 그 처자는 귀가시키고 그 국토는 회복시키고 그 인민은 안정시키고, 이종에게 왕작(王爵)을 봉한 것이 예전과 같았다. 이때에 이르러, 조선왕이 상의 공덕을 반포하여 삼전도 지방에 비를 세워 만세토록 전하여 보이고자 하니, 그 일을 주문(奏聞)하였다. 상께서 내원관(內院官) 차바하이(查布海), 이서봉(李棲鳳), 비릭투(畢禮克圖)와 함께 호부승정 마푸타(馬福塔), 예부참정 초거르(超哈爾), 형부참정 종실 오다하이(吳達海) 등을 보내서 살피게 하였다.

─ 청태종실록 숭덕 4년(1639), 음력 11월 6일


그렇게 해를 넘긴 1640년 1월 1일(음력 11/28)부터 비석 앞면에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를 새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사이에도 청 사신은 수시로 공사 현장을 확인하면서 비가 완성된 뒤에 떠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비문의 제목에 해당하는 큰 글자에는 금을 씌우고 다른 글자에는 붉은색을 입힐 것을 요구했다. 마침내 1월 8일(음력 12/5)에 세 글자로 각각 "숭덕 4년 12월 8일 세우다"라는 글씨를 새기면서 글자를 새기는 작업이 완료되었고, 1월 10일(음력 12/7)에는 청나라 사신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글자에 색을 입히고 비석을 세우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완공을 본 사신단은 다음날 드디어 귀국길에 올랐다.[L]

끝으로 4월 1일(음력 2/11)까지 비석에 비각을 씌우는 공사가 완료되면서, 삼전도비를 세우는 모든 공사가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이후 삼전도비와 그 비각은 경기감영에서 맡아 관리하면서, 죄 지은 자 3~4인을 배정하여 지키도록 했다.[M] 이로써 삼전도의 굴욕에서 장장 3년 2개월이 걸린 모든 공정이 끝났다. 청 태종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이제는 거대한 비석이 들어서서 조선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영원히 상기하도록 만든 것이다.

2.1.3. 청 사신의 필수 방문 코스

삼전도비의 상징성이 상징성인지라 비석을 세운 직후부터 이미 삼전도비에 대한 수난설(?)이 돌고 있었고, 청나라는 또 이것을 조선 조정을 압박하는 빌미로 써먹었다. 비석을 세운 바로 그해 7월 5일(음력 5/21)잉굴다이정명수를 시켜 소현세자에게 '삼전도에 세운 비석을 부수었다는 말도 있던데, 조선이 군사 원조를 일부러 지체하고 있는 것 아니냐'[23]는 식으로 압력을 넣기도 했다. 연말에 새로 들어온 청 사신이 삼전도비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면서 일단 의심은 풀리게 되었지만, 그 뒤로도 청 사신들은 조선에 올 때마다 삼전도비를 찾아 상태를 확인하는 일을 반복했다.[N]

이러한 청 사신들의 지속적인 확인은 1643년(인조 21)이 되어서야 중단되었으나, 그 뒤에도 사신들은 비정기적으로 종종 삼전도비를 찾았다. 그러다 숙종 시기부터는 다시 청 사신이 올 때마다 반드시 찾는 필수코스가 되었고, 사신들은 삼전도비를 보지 못하면 탁본이라도 챙겨서 돌아가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25] 물론 현장에서 사신을 대접하는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닌데다가, 조선 조정도 근처에 있는 남한산성의 위치나 구조(엄연히 군사 기밀이다)가 노출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어찌되었든 외교적인 차원에서는 쏠쏠하게 잘 써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물론 중간에 위기도 있었는데, 1728년(영조 4)이인좌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삼전도비를 깨부순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이 소문이 청나라로 흘러들어갈 것을 걱정하기도 했고, 게다가 하필이면 이 와중에 대홍수[26]까지 터지면서 삼전도비가 물에 잠기기도 했다. 물론 지금 보기에는 쌤통이지만, 이게 또 자칫하다 외교문제로 번질 수 있는지라 조선 조정에서는 서둘러 삼전도비 주변을 정비했고, 이듬해 5월에 청 사신이 왔을 때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O]
장붕익[28]이 아뢰기를, "지난 변란이 일어났을 때, 유언비어가 퍼져 삼전도비를 깨부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신과 병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이 각각 장교를 보내 나가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헛소문이었고 조금도 손상된 부분이 없었습니다. 다만 일종의 요사하고 간악한 무리가 지어낸 망측한 말이 청나라로 흘러들어가, 저들이 혹 그 헛소문을 믿어 칙사라도 나온다면 그때를 틈타 불순한 무리가 예상치도 못하게 튀어나와 변을 일으킬 우려가 있을 듯합니다. 우환을 방비하는 도리에서 만일의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 비각을 보니, 담장도 높지 않고 문빗장도 허술하였습니다. 응당 즉시 병조 판서에게 분부하여 수직하는 사람에게 각별히 신칙하여 다시 담장을 높게 쌓고 문빗장도 쇠로 얽어 두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청나라 사람이 혹시 와서 문과 담장을 개축한 일에 대해 물으면 실상대로 대답한다고 해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뜻으로 병조에 분부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승정원일기 영조 4년 무신(1728), 음력 7월 16일


그러다 1735년(영조 11)에 새로운 문제가 생기는데, 바로 비문에 써 있는 강홍립의 이름 때문이었다. 새로 즉위한 건륭제의 이름이 훙리(弘歷)로 홍립(弘立)과 글자와 소리가 같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강홍립의 이름은 졸지에 강황래(姜黃來)로 개조되었다.[29] 이런 일도 있고, 이 즈음에 들어서 청 사신이 삼전도비를 찾을 때마다 백성들에게 상당한 민폐가 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마침내 1737년(영조 13년)부터는 청 사신이 비각을 직접 찾지 않고 탁본만 받아가는 것을 상례로 삼게 되었다. 이로부터 삼전도비에는 청 사신의 발길이 끊기게 된다.[P]
파일:겸재정선_송파진_경교명승첩.jpg
1741년, 겸재 정선의 그림. 오른쪽에 삼전도비각이 보인다.

2.2. 수난과 오욕

2.2.1. 고종이 엎고 일제가 세우고

이후로도 청나라는 중국을 기반으로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했기에, 조선에서는 삼전도비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을 계기로 사태가 뒤집어진다. 1895년(고종 32) 2월에 일본 육군이 랴오둥 반도를 장악하고 청나라 북양함대가 웨이하이에서 궤멸되면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조선도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고종은 사대관계를 상징하는 영은문과 함께 삼전도비각을 무너뜨리고, 비석은 귀부에서 뽑아서 엎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귀부의 오른쪽 일부도 파손되었는데, 이 일을 전하는 매천야록의 일화가 재미있다.[Q]
김가진김상용의 후예인데, 어깨를 들썩이면서 말하였다.
"이제 누조(累朝) 동안 피폐(皮弊)하던 치욕을 씻고, 신자(臣子)의 사사로운 원수를 갚았으니, 개화가 얼마나 좋습니까?”

─ 매천야록 고종 32년 을미(1895)

파일:삼전도비1916조사보고사진.png
1916년 방치되어 있는 삼전도비의 모습

이로부터 20년 넘게 방치되어 있던 삼전도비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다시 복구되었다. 1913년부터 한반도 각지의 고적을 파악하기 시작한 조선총독부는 1916년 7월 4일에 이르러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을 제정하고 고적조사위원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문화재의 조사 · 보존 활동에 착수했는데, 이때 삼전도비도 '삼전도 청태종공덕비'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의 조사 · 보존 대상에 오르게 된 것이다.[R]

이에 따라 8월 30일에 고적조사위원회는 삼전도비를 다시 세우고 목책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통제할 것을 의결하였고, 9월 15일에는 예산이 책정되어 토목국 영선과 기수 이지마 겐노스케(飯島源之助)가 현장 조사에 착수하였다. 위에 있는 1916년도 사진은 바로 이 과정에서 촬영된 것이다. 이후 구체적인 공사 과정에 대한 보고서는 남아 있지 않지만, 다이쇼 5년(1916) 12월 제출된 조사 보고서에 지반을 지적하는 대목이 있고, 조선총독부의 고적 및 유물 등록대장에 '다이쇼 6년(1917) 9월 고쳐 세웠다'는 부기가 있어 이 사이에 기초를 새로 다지고 비를 세우는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S]
파일:삼전도비1917재건.png
파일:삼전도비1933조선고적도보.jpg
조선총독부 고적 및 유물 등록대장 조선고적도보 13권 1938쪽의 사진

조선총독부의 이런 조치가 효과가 있었는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 전역이 초토화되는 와중에도 유독 삼전도비는 끄떡없이 남아 있었다. 위 사진에서 갑자기 주위에 있던 집들이 사라지고 허허벌판이 된 것은 바로 홍수 때문. 이후로도 고적 및 유물 제11호로 관리되던 삼전도비는 1933년 8월에 '조선보물고적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이 제정되면서 새로운 번호를 부여받게 되었다. 이에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조선보물고적보존회는 1934년 5월 1일에 삼전도비를 보물로 지정할 것을 의결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삼전도비는 바로 번호를 받지 못하고 이듬해 4월 24일이 되어서야 보물 제164호로 추가지정되었다.[T]

2.2.2. 땅에 묻히고 물에 빠지고

이렇게 보존된 삼전도비는 6.25 전쟁의 난장판 속에서도 어찌어찌 살아남아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 1955년 대한민국 정부가 일제강점기 지정한 보물을 일괄 국보로 격상[35]하면서 자연스럽게 국보 제164호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삼전도비가 김장흥 치안국장의 눈에 띄게 된 것으로, 그의 건의에 따라 이승만 정부는 그해 11월 4일에 개최된 국보고적 명승천연기념물 보존회 제2차 총회에서 삼전도비의 국보 지정을 해제하고, 이듬해 1월 5일에는 비신을 다시 뽑아서 땅 속에 묻어버렸다. 대신 그 남은 자리가 고적 제147호 '삼전도 청태종공덕비지(址)'로 새롭게 지정되었다.[U]

하지만 기껏 묻어놓은 삼전도비는 이로부터 고작 5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당시 삼전도비의 위치가 송파강 바로 옆이기 때문이었는데, 강물에 의한 침식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땅 속에 있던 비석이 도로 지표면에 노출된 것이었다. 거기다가 비석이 다 드러나고도 계속 침식이 진행되어서 급기야 비석과 귀부가 물에 잠길 지경에 이르자, 막 정권을 인수한 장면 내각에서는 삼전도비의 비석과 귀부를 건져내어 애초부터 물에 잠길 걱정이 없도록 본래 위치에서 700m 남쪽에 있는 석촌동으로 가져가 세워놓았다.
삼전도의 유명한 청태종기공비의 비신은 비문이 치욕적이라 해서 1958년 봄에 부근 지하 7척 깊이에 매몰하였던 것인데, 그 후 홍수에 의한 하안유실로 인해 비신 · 귀부가 모두 수중으로 전락하였으며 이대로 두면 강바닥에 매몰되어버릴 위험이 뚜렷하므로 문교부에서는 시급히 이를 인양하여 석촌리의 고지에 이건할 계획이다. 그런데 비신의 무게만 약 15톤, 귀부의 무게가 25톤이나 되고 현위치의 지반이 매우 약하고 함몰되기 쉽기 때문에 그 공사는 여러가지로 난공사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 한국미술사학회, 「고고미술 뉴스」, 『고고미술』 제1권 제1호, 1960년 8월

1945년 해방후 민족적 수치라 하여 또 다시 파묻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 뒤 장맛비로 인하여 흙이 흘러내려가는 바람에 비신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으로 강 언덕 비탈에 비스듬히 자빠져 있던 것을 근자에 다시 일으켜 세워서 보관하고 있다고 들었다. 필자가 연전에 사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탁본차 갔을 때는 강 언덕 비탈에 비신이 비스듬히 누워져 있어 혹시 큰물이라도 나서 밑의 흙이 파여져나가면 강 속으로 굴러떨어져 들어가지나 않을까 하고 안타깝게 여긴 바 있었는데 그 후 다시 건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하였던 것이다.

─ 김성균, 「삼전도비 수립시말」, 『향토서울』 제12호, 1961년 11월


어찌되었든 비석을 다시 세웠으므로 1962년 12월에는 문화재의 이름도 다시 '삼전도 청태종공덕비'로 복구되었지만, 일찍이 박탈된 국보 지정은 되찾지 못했기에 결과적으로 삼전도비는 국보에서 사적으로 격하되었다. 곧이어 문화재보호법이 발효되면서, 삼전도비의 지정번호는 1963년 1월 21일을 기해 사적 제101호로 재분류되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W] 국민정서도 있고 하니 삼전도비가 국보로 돌아갈 일은 없어 보인다.
파일:삼전도비1975문화재대관사적편.png
1975년, 석촌동에 다시 세워진 삼전도비의 사진

2.2.3. 치욕적 역사의 교육장으로

이후 논 가운데 처박힌 채 근근이 이어지던[38] 삼전도비의 운명은 1981년 4월 26일을 변곡점으로 또 한번 가파르게 바뀌게 된다. 1980년 9월에 새로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이 이날 남한산성을 시찰하는 과정에서 굴욕의 역사를 잊으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지시한 것 때문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 입장에서 공덕비라는 명칭이 곤란하다"는 서울시 지방문화재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문화재 지정명칭도 종래의 '삼전도 청태종공덕비'에서 오늘날과 같은 '삼전도비'로 변경되었다.[X]
전 대통령은 먼저 남한산성 관리사무소에 들러 관리소장으로부터 현황을 브리핑 받고, 성곽 복원보전 상태를 살펴보고 수어장대까지 도보로 올랐다. 전 대통령은 수어장대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점심을 들며 "역사적 사실과 유적은 영광스러운 것이든 굴욕적인 것이든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은 영광스러운 사적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얻고, 굴욕적인 사건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 유적은 어떤 것이든 소멸시켜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 대통령은 병자호란 때 인조대왕이 청장(淸將)에게 항복했던 장소인 삼전도를 훌륭하게 복원할 것을 관계관에게 지시했다.

─ 경향신문, "유적원형 잘 보존하도록… 전 대통령 남한산성 시찰", 1981년 4월 27일


전두환의 지시에 대해 문교부에서는 삼전도비는 그대로 두고 남한산성에 병자호란 기록화 전시관(現 남한산성 역사관)을 세우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타이밍 좋게도 그해 9월 30일에 올림픽의 서울 개최가 결정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서울 잠실지구 개발이 격화되면서 삼전도비 주변 정비 사업도 덩달아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에 서울시는 도시계획사업의 일환으로 7천만 원을 투입하여 삼전도비 일대 500평 규모의 사적공원 조성을 추진하였고, 이때 삼전도비 곁에는 삼전도의 굴욕을 묘사한 동판 부조가 설치되었다. 이 사업은 1982년 말에 착공하여 이듬해 5월에는 민간에 개방되었다.[Y]
파일:삼전도비2008공원전경.jpg
공원으로 조성된 삼전도비 일대
문제는 이 동판 부조를 서울시립대 산업미술과 김창희 교수가 맡았는데, 역사에 문외한이다보니 삼전도의 굴욕 당시 인조의 모습을 철릭익선관이라는 기괴한 조합으로 그리는 재현 오류를 저지르고 말았다.[41] 분명히 당시 김창희 교수의 말을 인용한 동아일보 기사에는 "인조가 임금의 옷도 입지 못한 채 다른 신하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라고 되어 있어서 역사적 정황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신하들이 사모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보이듯 이 지식을 순수하게 옷에만 적용하고 관모에는 적용하지 않아서 생긴 오류로 보인다. 1980년대의 열악한 재현 실태를 보여주는 사례인 셈이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동판은 당초의 목적과 달리 인터넷에서 혐한 세력에게 이용되면서 조선의 열등함을 조롱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동판을 조선시대 당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결국 이 동판은 2010년에 삼전도비가 석촌호수로 이전되면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철거되었다.

2.3. 2000년대 이후의 근황

2.3.1. 동네에서 저것 좀 치워주세요

찾아가기도 어렵고 잘 보이지도 않는 비석 위치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엄창섭(嚴昌燮) 송파구 문화재위원은 "원래 위치인 석촌호 주변(옛 송파나루터)으로 옮겨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치욕의 역사를 굳이 드러낼 필요가 있느냐. 게다가 석촌호 주변이 삼전도비의 원래 위치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17일 삼전도비 앞에서 한 시민은 "와서 보니 기분이 씁쓸하군요. 굳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세워 놓을 필요까지 있는지…"라고 말했다.

─ 동아일보, "[이광표의 메트로스케치] 최남선 古宅과 석촌동 '삼전도비'", 2003년 1월 17일


시간이 흐르면서 삼전도비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한 의미가 점차 퇴색되었고, 비석 자체가 역사적 치욕의 상징인지라 2003년부터 송파구의회에서는 지속적으로 문화재청에 삼전도비의 위치 이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파구 내에서는 부지 확보가 어려워 이전이 불가능하고, 다른 곳으로 보내자니 반기는 곳이 없다. 그나마 남은 방법은 삼전도비가 원래 있던 위치를 다시 찾아가는 것인데, 그 자리는 위에서 본 것처럼 1960년대에 물 속으로 잠겨버린 상태다.

이 때문에 문화재청에서는 송파구의회의 삼전도비 이전 요청을 2003년 8월과 2005년 6월에 두 차례 기각했다가, 송파구에서 아예 삼전도비 이전계획까지 세워서 들이밀자 그제서야 삼전도비의 원래 위치를 고증하는 학술적 연구용역을 실시해서 가져오도록 송파구에 회신했다. 그러나 정작 송파구에서는 돈을 들여서까지 학술적 연구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는지, 하라는 연구는 안 하고 1년 반이 넘도록 묵혀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애물단지가 되어 관리가 허술해진 와중에 기어이 사달이 나게 된다.

2.3.2. 2007년 스프레이 훼손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삼전도비 스프레이 훼손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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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돌고 돌아 고향으로 돌아오다

기어이 이 사달이 난 뒤에야 송파구에서는 부랴부랴 삼전도비의 원래 위치를 고증하는 학술용역을 서울시립대학교 산학협력단 서울학연구소에 의뢰하였고, 배우성 교수의 주도로 이루어진 연구 끝에 비석의 정확한 원래 자리가 석촌호수 서호 동북쪽 구석(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 동쪽)으로 고증되었다. 위에서 본 것처럼 1960년대에 송파강 전체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과거 송파마을이 있던 지역 전체를 삼켜버린 것이다.

연구 결과를 접수한 송파구청에서는 2008년 3월에 용역연구 결과와 함께 추가적인 훼손 우려와 주민들의 여론까지 들어가며 문화재청을 설득했고, 앞서 삼전도비 훼손이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상황인지라 문화재청에서도 현지조사를 거쳐서 4월 18일 삼전도비의 이전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문화재 보존 작업, 보호각 설치와 공원화 작업 등을 병행한 끝에 삼전도비는 2010년 3월 19일에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의 석촌호수공원 서호 언덕으로 이전되었고, 4월 25일에는 모든 공사를 마치고 민간에 개방되었다.
파일:삼전도비2008본래위치고증.jpg
파일:삼전도비2018롯데월드앞.jpg
삼전도비의 본래 위치(원)와 현위치(네모) 현재

2011년 7월 28일에는 사적의 지정명칭에 대해 일관된 지침을 적용하면서 지역명칭이 붙은 '서울 삼전도비'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어서 문화재행정 50주년을 맞아 실시한 '사적 가치 재평가 심의'에 회부되었는데, 사적의 지정요건인 면적 개념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으나 그렇다고 국보나 보물로 변경하기에는 국민정서상 문제가 있고, 지방자치단체의 유형문화재로 격하하자니 좋든 싫든 과거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상징하는 유물로 역사적 가치는 상당하기 때문에 결국 사적의 지위를 유지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실제로 삼전도비는 2018년 기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 사실상 유일한 비석이다.[42]

삼전도비는 석촌호수 보행자 산책로와 도로 바로 옆에 있으며, 롯데월드롯데월드타워에서도 바로 옆이라 해도 무방한 위치에 있다. 매일 수많은 인파가 이 비석에서 멀지 않은 지점을 지나가지만, 정작 비석은 묘하게 오르막과 나무로 살짝 숨겨진 듯한 위치에 있어 비석 근처는 썰렁하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좋지 않은 역사적 함의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안내판도 그리 눈에 띄게는 만들어 놓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43] 찾아가는 길도 중요성이나 주변의 잠실 지역의 개발 상태에 비해서는 잘 닦여 있지 않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거의 볼 일이 없는 절묘한 자리에 사실상 위리안치된 셈이다.

3. 내용

한국 금석문 종합영상정보 시스템한문 표기, 한국어 번역 제공
인조실록 1638년 2월 8일한문 표기, 한국어 번역 제공
청 태종실록 1639년 12월 28일한문 표기 제공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한문 표기, 한국어 번역 제공
네이버 블로그 길공구만주 문자 표기, 한글 음차, 한국어 번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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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淸皇帝功德碑
대청 황제 공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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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淸 崇德 元年 冬十有二月,寬溫仁聖皇帝 以壞和自我, 始赫然怒 以武臨之 直擣而東, 莫敢有抗者。時我寡君 棲于南漢 凜凜若 履春氷而 待白日者 殆五旬。
대청국의 숭덕 원년 겨울 12월, 관온인성황제께서 우리가 화친을 깨뜨렸기에, 진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불꽃처럼 오시니, 누구도 두려워하여 막지 못하였다. 이때 우리 부족한 임금남한산성에 머무르면서 마치 봄날에 얼음을 딛고 햇빛을 기다리는 것처럼 두려워한 것이 거의 50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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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南諸道兵 相繼崩潰,西北帥 逗撓峽內 不能進一步,城中食且盡。當此之時 以大兵薄城如 霜風之卷秋籜 爐火之燎鴻毛。而皇帝 以不殺爲武 惟布德是先,乃降勅諭之曰:來朕全爾,否屠之有!
동남쪽 여러 도의 군대가 연거푸 무너졌고, 서북방 장군들은 산골짜기에 숨어서 멀리 뒤로 물러나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는데, 성 안의 식량도 떨어졌다. 이때 대군이 성에 다가서는 것이 마치 서리바람이 가을 풀을 휩쓸고, 화롯불에 깃털을 태우는 것처럼 사나웠다. 그러나 황제께서는 죽이지 않는 것을 무(武)로 삼고 덕을 펼치는 것을 우선하시어, 이에 칙유를 내리시길, "내게 온다면 너를 온전히 해주겠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 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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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英馬諸大將 承皇命 相屬於道, 於是我寡君 集文武諸臣 謂曰:予托和好于大邦 十年于兹矣, 由予惛惑,自速天討 萬姓魚肉,罪在予一人。皇帝猶不忍屠戮之 諭之如此,予曷敢不欽承 以上全我宗社 下保我生靈乎?
이로부터 용골대(잉울다이), 마부대(마푸타) 등의 장수들이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잇달아 오가니, 이에 우리 부족한 임금이 문무백관을 모아 이르길, "내가 대국에 의탁하여 화친을 맺은 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내가 어리석고 미혹되어, 하늘의 벌하심을 자초하여 만백성이 어육이 되었으니, 죄가 내 한 몸에 있다. 황제께서 오히려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타이르심이 이와 같으니, 내 어찌 감히 이를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생령을 보호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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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臣協贊之 遂從數十騎 詣軍前請罪,皇帝乃 優之以禮 拊之以恩,一見而推心腹,錫賚之恩,遍及從臣。禮罷卽,還我寡君于都城,立召兵之南下者 振旅而西,撫民勸農,遠近之 雉鳥散者 咸復厥居 詎非大幸歟!
여러 대신들이 모두 찬성하여 마침내 수십 기를 데리고 군문에 와서 죄를 청하니, 황제께서 예로써 대우하고 은혜로 어루만지며, 한 번 보고는 심복으로 삼아, 상을 내리시는 은혜가 따르는 신하들에게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장 우리 부족한 임금을 도성으로 돌려보내고, 곧장 남쪽으로 간 군대를 거두어 서쪽으로 물러나며, 백성을 어루만져 농사에 힘쓰게 하여, 멀고 가까운 곳의 흩어진 백성들이 모두 다시 와 살게 되었으니, 어찌 큰 은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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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邦之獲罪 上國久矣. 己未之役, 都元帥 姜弘立 助兵明朝 兵敗被擒, 太祖武皇帝 只留弘立等數人 餘悉放囘, 恩莫大焉。而小邦迷不知悟,丁卯歲 今皇帝 命將東征,本國君臣 避入海島 遣使請成。皇帝允之,視爲兄弟國 疆土復完。弘立亦還矣。
소방이 상국에게 죄를 얻은 지 오래되었다. 기미년 싸움에 도원수 강홍립을 보내 명나라에 원병하였다가 군대가 패하여 사로잡히자, 태조 무황제께서는 단지 강홍립 등 몇 사람만을 잡아두고 나머지는 모두 뒤에 돌려보내셨으니, 은혜가 이보다 클 수 없었다. 그러나 소방이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매, 정묘년에 황제께서 장군을 보내 동쪽을 정벌하시니, 우리나라의 군신이 모두 바다 섬에 들어가 피하고는 사신을 보내 화친하자고 청하였다. 황제께서 윤허하시어, 형제와 같은 나라가 되고 강토가 다시 온전해졌다. 강홍립도 다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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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兹以往 禮遇不替 冠盖交跡。不幸 浮議扇動 搆成亂梯 小邦申飭邊臣 言涉不遜,而其文爲使臣所得。皇帝猶寬貸之 不卽加兵, 乃先降明旨 諭以師期丁寧 反覆不翅 若提耳面命。而終未免焉,則小邦羣臣之罪 益無所逃矣。
이로부터 계속해서 예우가 한결같고 사신들이 서로 오갔는데, 불행히도 공허한 의론에 선동되고 난리의 씨앗이 생겨나서, 소방이 지방 수령들에게 신칙하는 말이 몹시 불손했으니, 그 글을 사신들이 얻어서 가져갔다. 황제께서는 그럼에도 너그럽게 대하시어 곧장 군대를 보내지 않고, 먼저 명지(明旨)를 내리시어 군대를 보낼 시기를 기약하며 거듭 깨우치기를 귀를 잡고 얼굴을 맞대듯 하시었다. 그럼에도 끝내 따르지 않았으니, 소방의 군신들이 지은 죄가 벗어날 수 없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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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帝旣以大兵圍南漢而 又命偏師 先陷江都, 宮嬪王子 曁卿士家小 俱被俘獲, 皇帝戒諸將不得擾害 命從官及內侍看護。旣而大霈恩典 小邦君臣及 其被獲眷屬 復歸於舊, 霜雪變爲陽春 枯旱轉爲時雨, 區宇旣亡而復存 宗社己絶而還續。環東土數千里 咸囿於生成之澤, 此實古昔簡策 所稀觀也。於戱盛哉!
황제의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는 또한 한 갈래 군대에 명하여 강화도를 먼저 함락하니, 빈궁과 왕자 및 대신의 가솔들이 모두 사로잡히자, 황제께서는 뭇 장수들을 단속하여 침해하지 못하게 하시고, 호종하던 관리와 내시들로 하여금 간호하게 하시었다. 이처럼 큰 은전을 입어, 소방의 군신과 사로잡힌 권속들이 예전처럼 돌아왔으니, 서리와 눈이 변하여 봄볕이 되고 마른 가뭄이 바뀌어 단비가 되듯, 망한 나라를 다시 세우고 끊어진 종사를 잇게 되었다. 동쪽 땅 수천 리가 모두 살게 하는 은택을 입었으니, 이는 실로 예로부터 보기 힘든 일이다. 아아 훌륭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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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水上流三田渡之南 卽皇帝駐蹕之所也,壇場在焉。我寡君爰命水部 就壇所增而高大之 又伐石以碑之 埀諸永久以彰,夫皇帝之功之德 直與造化而同流也。豈特我小邦世世而永賴抑?亦大朝之仁聲武誼 無遠不服者 未始不基于兹也。顧摹天地之大 畵日月之明 不足以彷彿其萬一,謹載大略銘曰。
한강 상류 삼전도의 남쪽은 곧 황제께서 다다르신 곳으로, 단을 세운 자리가 있다. 우리 부족한 임금이 수부(水部)에 명하여 단을 높고 크게 증축하고 또한 돌을 가지고 비를 세워서 영원히 남겨두어 드러내니, 황제의 공덕을 천지조화와 나란히 되도록 한 것이다. 어찌 우리 소방만 세세토록 영원히 믿고 살아갈 뿐이겠는가? 또 대국의 인자한 명성과 위엄찬 행실로 멀리서부터 복종해오지 않는 자 없음이 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크기를 본뜨고 해와 달의 밝기를 그리려 해보아도 그 만분의 일에 비할 수 없으니, 삼가 그 대략을 새겨서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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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降霜露 載肅載育 惟帝則之 竝布威德 皇帝東征 十萬其師 殷殷轟轟 如虎如豼 西蕃窮髮 曁夫北落 執殳前驅 厥靈赫赫 皇帝孔仁 誕降恩言 十行昭囘 旣嚴且溫 始迷不知 自貽伊感 帝有明命 如寐之覺
하늘은 서리와 이슬을 내려 마르게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데, 황제께서 이를 본받으시어 위엄과 은덕을 함께 펴셨네. 황제께서 동방을 정벌하시니 그 군세 십만이라,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호랑이 같고 표범 같았네. 서쪽 번국 불모지와 북쪽 부락 사람들도 창을 잡고 앞서가니 그 위세 혁혁하도다. 황제께서 크나큰 인자함으로 은혜로운 말씀을 내려주시니, 열 줄로 내려주신 밝은 회답이 엄하고도 또한 따뜻하였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으나, 황제의 밝은 명령 있고 나서는 마치 잠에서 깬 듯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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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后祇服 相率而歸 匪惟怛威 惟德之依 皇帝嘉之 澤洽禮優 載色載笑 爰束戈矛 何以錫之 駿馬輕裘 都人士女 乃歌乃謳 我后言旋 皇帝之賜 皇帝班師 活我赤子 哀我蕩析 勸我穡事 金甌依舊 翠壇維新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면서 서로 이끌고 귀순해오니, 위세가 두려워서만이 아니라 또한 그 덕에 의지함일세. 황제께서 이에 용서하시며 넉넉히 예로써 맞아주시니, 표정을 고치고 웃는 낯으로 온갖 무기를 거두시었네. 무엇을 주셨던고? 준마와 가벼운 갖옷, 도성의 남녀가 노래하고 칭송하네. 우리 임금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황제께서 은사를 베푸심이라. 황제께서 군사를 물려주시니 우리 백성들 살게 되었네. 흩어진 우리 백성 불쌍히 여겨 농업에 힘쓰도록 하여 주시니, 금구(金甌)의 제도 옛날과 같고 비취빛 단은 나날이 새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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枯骨再肉 塞荄復春 有石巍然 大江之頭 萬載三韓 皇帝之休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었고, 얼어붙은 뿌리가 봄을 찾았네. 커다란 강머리에 솟은 빗돌 우뚝하니, 만년토록 삼한은 황제의 은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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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德 四年 十二月 初八日 立
숭덕 4년(1639) 12월 8일 세우다

비문은 ​청태종의 행적을 미화하고 병자호란 시기 조선의 행적을 비하하고 있다.

4. 참고 자료

  • 배우성, 「서울에 온 청의 칙사 馬夫大와 삼전도비」, 『서울학연구』 제38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0년 2월, 235~271쪽.
  •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대관 사적편(上)』,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5년 12월 30일, 318~319쪽.
  • 문화재청, 「서울 삼전도비 보호각 교체(안) 검토」, 『2015년도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제5차 회의록』, 문화재청, 2015년 5월 18일, 79~82쪽.
  • 노형석, "삼전도비여, 이제 푹 쉬시라 : 문헌사료 고증 결과에 따라 원래 자리 찾아…", <한겨레 21>, 2008년 6월 5일. #

5. 외부 링크

6. 사적 제101호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만주글자, 오른쪽에는 몽골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2010년 3월에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에 위치하던 비석을 고증을 통해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삼전도비 → 서울 삼전도비)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1] 정작 이들은 자신들의 그런 인식이 식민사관의 영향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2] 그 중에서도 특히 심한 경우는 자신들이 병자호란과 관련해서 옹호하는 청나라 측에서 남긴 기록인 청태종실록과 만문노당의 내용을 불신하면서까지 삼전도비의 내용을 맹신한다. 청태종실록과 만문노당은 병자호란과 관련해서 청태종 정권을 삼전도비와 같은 수준으로 엄청나게 찬양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3] 청태종의 손자인 강희제가 조선의 실학자 홍대용에게 실로 영걸한 황제였다며 극찬을 받은 반면, 청태종 본인은 홍대용을 포함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조차 그런 식의 극찬을 받은 적이 없다. 청나라에 대한 인식이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인 유학자들보다 훨씬 나았을 조선 후기 실학자들조차 숭덕제에 대해 극찬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청태종에 대한 조선 후기 사람들의 인식이 최악이었다는 증거가 된다. 단지 외교 문제 탓에 대놓고 숭덕제를 비판하지 못했을 뿐이다. 실제로 강희제가 조선에 대해 유화적이었다는 내용의 당대 기록이 현재도 많이 남아있는 것과 달리, 청태종이 조선에 대해 유화적이었다는 내용의 당대 기록은 선전물이라서 교차검증이 필수인 삼전도비 정도를 제외하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오히려 청태종은 본인이 조선에 대해 유화적이었다고 보기 힘들다는 증거가 되는 당대 기록이 차고 넘친다.[A] 승정원일기 1637년 3월 12일, 3월 15일, 3월 20일 조.[B] 인조실록 1637년 6월 26일, 승정원일기 1637년 6월 26일.[C] 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3일.[7] 실제로 이 버려진 귀부는 약간 작기도 하고 상당히 귀엽게 생겼다. 다만 이 귀부가 1950년 이전의 사진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1961년에 삼전도비의 위치를 석촌동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아무 관계 없는 귀부가 세트로 묶였을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이마니시 류의 1916년도 고적조사 보고서에도 삼전도비 부근에 한 귀부가 있다고 전하고 있어서, 부근에 버려진 귀부가 하나 있었던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어쨌든 귀부에 대한 언급은 청실록 1637년 10월 26일, 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4일, 11월 25일, 1638년 8월 16일, 삼전도비 현장 설명문 "비신(碑身) 없는 귀부(龜趺)", 다이쇼 5년도 고적조사 보고서에 나타난다.[D] 인조실록 1637년 11월 25일, 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5일, 11월 26일, 11월 27일, 11월 29일.[9] 범문정(范文程, 1597 ~ 1666), 누르하치의 야율초재 같은 역할을 했다.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고 만주지역에 파견되었으나, 1618년 무순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고, 이어 누르하치에게 귀순하여 그의 군사노릇을 하게 된다. 누르하치가 죽은 이후 홍타이지의 최측근으로서 만주족을 제국 체제로 개조하는 데 주도적으로 기여했다. 뒤이은 순치제 시절에는 한족 최초로 의정대신의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10] 재미있는 것은 정작 이경석의 글에 나오는 '서리바람이 가을 풀을 휩쓸듯'이란 비유는 부견이 비수대전 직전 위세를 과시하던 말에서, '화롯불에 깃털을 태우듯'이란 비유는 사기 자객열전 중 진시황의 사나운 기세를 비유한 말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부견진시황의 최후가 어땠는지를 생각해보면 청나라는 결국 간접적으로 엿을 먹은 셈. 사기 자객열전, 진서 부견재기, 숙종실록 1713년 8월 6일.[전문] 리광타오(李光濤), 『명청당안 존진선집(明淸檔案存眞選輯)』 초집, 중화민국 18년(1930) 6월, "숭덕 2년 12월에 조선에서 황제의 공덕을 칭송한 비문으로 보이는 원고(가제)";배우성, 「서울에 온 청의 칙사 馬夫大와 삼전도비」, 『서울학연구』 제38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0년 2월, 245~247쪽에서 재인용 및 일부 윤문.
기미년에 우리 조선이 강홍례(姜弘禮)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명을 돕게 하였는데, 장병들이 대패하여 피살된 자도 있고 사로잡힌 자도 있었다. 우리 태조황제께서 화호를 중요하게 여기시어 사로잡힌 장병들을 모두 놓아 주었다. 그런데도 우리 조선이 여전히 명나라를 돕다가 다시 대청에 죄를 얻게 되었다. 이에 정묘년에 황제께서 대군에게 정벌을 명하셨다. 우리나라 군신들이 그 예봉을 당하지 못하고 마침내 강화도에 숨었다가 화친을 청하자, 황제께서 윤허하고 오히려 형제국으로 여겼으며, 빼앗은 토지를 모두 돌려주고 강홍례도 또한 환국하게 했다.
② (정묘년 이후) 10년 동안 황제께서는 형제의 예를 다하셨으나, 우리 조선국이 깨닫지 못하고 미혹되어, 여전히 명을 돕고 대청을 형으로 여기지 않더니, 먼저 병화의 단서를 스스로 일으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기를 '충의지사로 하여금 각기 책략을 바치게 하고, 용맹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원하여 종군토록 하라'고 하였다. 대청국의 사신이 이 문서를 얻어 황제에게 보였다. 황제가 우리 조선이 화평을 무너뜨렸음을 밝혀 아시면서도 오히려 호생(好生)의 마음으로 그 죄를 밝히면서 '모년 모월 모일에 정토하리라'고 하시고, 우리에게 정토의 시비를 밝혀 가르쳐 주시기를 하늘이 재이로써 사람에게 보여주듯,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듯, 형이 동생을 가르치듯 하시었다. 만일 진실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살해하려는 마음이 있으셨다면 반드시 불시에 군사를 내시어 그 방비 없을 때 공격하셨으리니, 어찌 기꺼이 밝게 우리를 가르치셨겠는가. 그런데도 국왕이 깨닫지 못한 고로 황제가 대군을 친히 이끌고 우리 조선을 정벌하신 것이다.
③ (조선이) 감히 맞서지 못하여 군신의 처자들은 모두 강화도에 숨고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동남도의 병장들이 서로 이어져 무너졌고 서북도에서는 협곡에 둘러싸여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우리 조선국왕은 안으로 군량이 없고 밖으로 원병이 없었으며 형세는 궁하고 힘은 다하였다. 강화도에 있던 우리 군신의 처자들은 모두 황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황제께서 만물을 포용하는 마음가짐으로 우리 군신 처자에 대해 장병들이 침해하지 못하게 하시고, 조선 관원으로 하여금 태감과 더불어 간수하게 하였다. 황제께서 칙서를 내려 죄를 사하여 주시니, 우리 조선의 군신과 백성들이 큰 가뭄에 비를 만난 듯, 물에 빠졌다가 구해진 듯하며, 기뻐하고 두려워하여 황제의 군대 앞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은상이 우리 군신에게 두루 미쳤으며, 붙잡힌 처자들은 모두 도성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시었으니, 이미 끊어진 종사가 다시 이어지고 이미 무너진 조선이 50일만에 다시 서게 되었다.
④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군신과 만민들이 황제의 공덕과 은택을 칭송하여 머리 위에 이고자 하였다. 황제의 공덕은 천지와 더불어 오래가리니, 우리나라가 태평을 누리게 된 것은 모두 황제께서 여기에 와 정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황제께서 머무르신 단장(壇場)에 돌을 깎아 비석을 세워 (그 공덕을) 드러내었다.
⑤ (숭덕) 2년 12월에 처음 쓴 글. 이 글은 칙지를 받들어서 저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니, 단지 베껴서 그 배신(陪臣)에게 내어주어 보고 기록해 가게 하라. 이 문서는 문서대장에 기록해 두어 후일에 참고하게 하라.
[E] 심양장계 1638년 1월 26일, 동문휘고 1639년 청택정삼전도비문자, 1640년 1월 26일 예부회자, 인조실록 1638년 2월 8일,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난후시사, 서계집 영의정 백헌 이공 신도비명.[13] 임금의 공덕을 찬양해 오계(浯溪)의 바위에 새겼던 원결(元結)처럼 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한 사실을 비문으로 짓게 된 것이 부끄럽다는 말이다.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평정된 뒤에 원결이 '대당중흥송'을 짓고 안진경이 글씨를 써서 오계의 절벽에 새겨 당 숙종의 공덕을 찬양한 바 있다. 흔히 알려진 '오계의 백 길 절벽에 몸을 던지고 싶다'는 표현은 이덕일에게서 비롯된 명백한 오역이다.[F] 서계집 영의정 백헌 이공 신도비명, 승정원일기 1638년 2월 19일, 2월 24일, 11월 23일, 인조실록 1638년 7월 2일, 7월 24일.[G] 승정원일기 1638년 7월 26일, 8월 16일, 11월 23일, 1639년 3월 25일.[H] 인조실록 1639년 6월 25일, 승정원일기 1639년 6월 25일, 6월 26일, 6월 28일.[I] 승정원일기 1639년 6월 27일, 6월 28일, 6월 29일, 7월 2일, 7월 28일, 인조실록 1639년 7월 28일.[J] 인조실록 1639년 11월 15일, 승정원일기 1639년 11월 16일, 11월 17일, 11월 22일, 11월 24일.[19] 청나라에서 문관을 부르던 칭호. 어원은 그냥 '박사(博士)'다. # 승정원일기에는 박씨(博氏), 청실록에는 파극십(巴克什)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외에도 파십(把什) · 방십(榜什) · 방식(榜式) 등으로 음차되었다.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만주글자를 만든 어르더니 박시(erdeni baksi/額爾德尼 巴克什)가 있고, 상술한 범문정도 박시로 호칭되었다.[K] 청실록 1639년 11월 6일, 승정원일기 1639년 11월 24일, 11월 25일, 11월 26일, 11월 27일, 동문휘고 1639년 5월 13일 반제남전첩칙일도.[L] 승정원일기 1639년 11월 28일, 11월 29일, 11월 30일, 12월 1일, 12월 2일, 12월 4일, 12월 5일, 12월 7일, 12월 8일.[M] 승정원일기 1639년 12월 20일, 인조실록 1640년 2월 11일.[23] 이해 청나라는 명나라의 금주위(錦州衛)를 공격하면서 참전을 강하게 요구하였고, 조선에서는 임경업과 전선 120척과 군량 1만 석을 청나라로 보냈다. 물론 청나라의 의심도 완전히 근거 없는 건 아니라서 임경업은 최명길을 통해 명나라와 짜고 치는 싸움을 벌인데다 청나라에 군량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결국 금주위가 함락된 다음에 이게 들통나서 임경업은 명나라로 망명하게 된다.[N] 심양장계 1640년 5월 22일, 인조실록 1640년 5월 17일, 10월 30일, 1641년 11월 8일, 1642년 12월 16일, 승정원일기 1641년 11월 7일, 1641년 11월 8일, 11월 11일, 1642년 12월 15일, 12월 16일.[25] 승정원일기를 통해 1662년(강희 1) · 1672년(강희 11) · 1676년(강희 15) · 1677년(강희 16) · 1679년(강희 18) · 1680년(강희 19) · 1681년(강희 20) · 1682년(강희 21) · 1684년(강희 23) · 1687년(강희 26) · 1688년(강희 27) · 1689년(강희 28) · 1690년(강희 29) · 1697년(강희 36) · 1709년(강희 48) · 1717년(강희 56) · 1719년(강희 58) · 1720년(강희 59) · 1721년(강희 60) · 1722년(강희 61) · 1723년(옹정 1) · 1724년(옹정 2) · 1729년(옹정 7) · 1731년(옹정 9) · 1736년(건륭 1)에 삼전도비를 찾은 것이 확인된다. 아놔 작작 와라 좀 승정원일기 1643년 3월 27일, 1649년 1월 20일, 1662년 12월 7일, 1672년 1월 11일, 1676년 3월 20일, 1677년 11월 5일, 1679년 2월 17일, 1680년 9월 26일, 1681년 4월 8일, 1682년 2월 24일, 7월 8일, 7월 10일, 1684년 7월 9일, 12월 16일, 1687년 7월 16일, 1688년 12월 24일, 1689년 2월 22일, 1689년 11월 28일, 1690년 1월 24일, 1697년 10월 4일, 1709년 5월 12일, 1717년 10월 30일, 1719년 2월 29일, 3월 1일, 1720년 11월 29일, 1721년 2월 13일, 1722년 5월 29일, 12월 17일, 1723년 2월 2일, 7월 7일, 11월 7일, 1724년 2월 14일, 3월 20일, 1729년 5월 23일, 1731년 11월 7일, 1736년 3월 7일.[26] 김시형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하중도였던 잠실 전체가 물에 잠기고, 송파에서 민가의 3분의 1이 떠내려가고, 상류에 있는 궁촌(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고골초등학교 일대) 앞까지 물이 들어왔을 정도였다. 승정원일기 1728년 8월 2일.[O] 승정원일기 1728년 7월 16일, 8월 2일, 1729년 5월 23일.[28] 포도대장, 훈련대장, 형조판서 등을 역임.[29] 참고로 고종 때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홍례문(弘禮門)도 같은 이유로 흥례문(興禮門)으로 피휘되었다. 승정원일기 1735년 11월 14일, 1866년 12월 15일.[P] 승정원일기 1737년 6월 10일.[Q] 매천야록 1895년, 경난록 1895년, 대한계년사 1895년 2월.[R] 조선총독부관보 1913년 1월 25일, 매일신보 1913년 6월 7일, 조선총독부령 제52호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 조선총독부훈령 제29호 고적조사위원회 규정, 제2회 고적조사위원회 의안, 다이쇼 5년 8월 18일 고적 및 유물 등록안.[S] 제3회 고적조사위원회 의안 결의, 다이쇼 5년 9월 15일 고적보존공사 서류, 이지마 모모노스케(飯島源之助) 진흥왕순수비 · 청태종공덕비 조사 복명서, 조선총독부 고적 및 유물 등록대장.[T] 동아일보 1934년 5월 4일, 조선총독부 제1회 보존총회 자문 물건 제2회 고시.[35] 당초 일본 제국은 내지(일본 열도)의 문화재는 '국보'로 지정하고, 조선총독부의 문화재는 '보물'로 지정하여 격을 낮추어 대우했다. 이 때문에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던 419건을 1955년에 모두 국보로 바꾸었고,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1963년부터는 국보 · 보물 · 사적으로 재분류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기본적으로 국보가 보물보다 더 가치가 큰 문화재다. 덧붙여 이 과정에서 삼전도비는 국보에서 사적으로 굴러떨어지게 되는데, 자세한 것은 후술.[U] 경향신문 1955년 11월 6일 "국보로부터 제외 「청태종」 공덕비", 경향신문 1956년 1월 7일 "청태종공덕비 매몰".[W] 고고미술 제4권 제1호 1963년 1월 "고고미술 뉴스", 서울의 문화재 제3권 "서울 삼전도비".[38] 1970년대 잠실과 송파가 연결되고 도로 · 지하철 · 아파트 등 기간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이는 지금의 잠실동 지역에 국한되었고 석촌동 지역은 여전히 허허벌판이었다. 잠실주공아파트 문서 상단의 흑백 항공사진(잘 찾아보면 삼전도비도 있다)이 이 당시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X] 고고미술 제151호 1981년 9월 "고고미술 뉴스".[Y] 고고미술 제156호 1982년 12월 "고고미술 뉴스", 경향신문 1982년 10월 18일 "암사유적지 등 5개소 복원", 동아일보 1983년 1월 18일 "「치욕의 장(場)」을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경향신문 1983년 1월 19일 "백제유적지 등 문화재 6군데 복원".[41] 당시 청나라에서 조선 왕은 죄인이므로 임금의 옷을 입을 수 없다고 하여, 인조는 신하들과 같은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성을 나왔다. 물론 머리에 무엇을 썼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신하의 옷에 임금의 관을 썼다면 그 또한 청나라가 가만히 보았을 리가 없다. 승정원일기 1637년 1월 28일, 인조실록 1637년 1월 28일, 1월 30일.[42] 다른 비석으로는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사적 제171호)가 있으나, 이쪽은 사실상 비각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라 삼전도비와는 단순 비교가 어렵다. 또한 황산대첩비지(사적 제104호)는 비석이 근현대에 박살난 것을 1957년에 다시 만든 것이라서 비석 자체는 문화재적 가치가 없어 그 자리만 사적으로 지정된 것이고,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지(사적 제228호)는 비'지'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비석에 있는 자리가 사적으로 지정된 경우이며 진흥왕 순수비 비석 자체는 국보 제 3호이다.[43] 찾아보면 삼전도비라는 화살표 안내판이 없지는 않지만 그리 친절하게 표시된 배치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