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29 01:55:44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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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충의사_1.jpg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229호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禮山 尹奉吉 義士 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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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산40-1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근대인물 / 광복운동
면적 141,007㎡
지정연도 1972년 10월 14일
제작시기 [1]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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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및 중요 문화재3. 기타4. 외부 링크5. 사적 제2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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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2]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사적지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집과 성장한 집이 따로 있는데,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라 하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집은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狙韓堂)이라 한다.

윤봉길 의사는 새로운 문화의 습득에 주력하면서 농촌 계몽과 부흥에 힘썼다. 또한, 야학회와 독서회를 조직해서 농촌의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1929년에는 농촌 발전을 위하여 월진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전투승리 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이 있었던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는데, 이것이 4·29의거였다. 윤봉길 의사는 바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2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은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2. 역사 및 중요 문화재

국가에서는 윤봉길 의사가 이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기념탑을 세우고, 1968년에는 충의사를 세웠다. 1972년에는 윤봉길 의사의 생가와 성장가, 충의사 권역 일대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973~1977년간에는 사적지를 정비하고 유물 전시관 및 관리 사무소를 건립하였으며, 1978년 4월에는 사당과 삼문을 증축하고 주변을 정화하였다.[3] 이후, 1984년에는 충의관 및 사적비, 2000년에는 윤봉길 의사 어록탑, 2001년에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건립하였다.[4]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은 舊 40번 국도(덕산온천로)를 기준으로 북쪽은 윤 의사의 영정을 봉안한 충의사 본전과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기념관 지역[5]이 있으며, 남쪽은 윤 의사가 태어나 4세 때까지 살았던 생가(광현당)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인 23세까지 살았던 성장가(저한당)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윤 의사의 생가지는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를 잇는 45번 국도와 덕산면과 홍성군 갈산면을 연결하는 40번 국도가 만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유물 전시관에는 그가 평소에 사용했던 유품들[6]이 전시되어 있는데, 윤 의사가 23세 때 중국으로 망명하기 직전에 집에 남긴 '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 장부출가생불환)는 친필 유묵상하이시 홍커우 공원 의거 직전에 김구 선생과 교환한 그 유명한 회중시계[7]와 지니고 있던 중국 화폐와 손수건, 일본에서 처형할 당시 묶었던 형틀대, 어머니와 아들에게 보낸 편지 등의 여러 유품이 전시돼 그의 비장했던 숨결을 느끼게 하고 있다.

충의관에는 윤의사의 농촌 계몽 운동과 4·29의거 장면 등 윤 의사의 생애을 그림으로 나타낸 11경도를 전시해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3. 기타

예산군은 윤 의사 의거를 추모하는 기념식인 매헌 문화재를 매년 4월 29일 충의사 본전에서 거행한다. 서거 71주년 기념 다례에는 그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졌으며, 일본에서 찾아온 방문객도 있었다고 한다.

4. 외부 링크

5. 사적 제229호

윤봉길의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사적지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집과 성장한 집이 따로 있는데,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라 하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집은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狙韓堂)이라 한다.

윤봉길 의사는 새로운 문화의 습득에 주력하면서 농촌 계몽과 부흥에 힘썼다. 또한 야학회와 독서회를 조직해서 농촌의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1929년에는 농촌발전을 위하여 월진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전투승리 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이 있었던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는데, 이것이 4·29의거였다. 윤봉길 의사는 바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2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국가에서는 윤봉길 의사가 이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기념탑을 세우고 1968년에는 충의사를 세웠다. 그 뒤를 이어 윤의사의 생가, 성장가 등이 복원되고 유물전시관과 농촌 계몽운동을 벌였던 부흥원이 세워진 것은 1970년 이후이다.

충의사는 윤봉길 의사의 사당으로서 초상을 모시고 있으며, 그가 평소에 사용했던 유품들은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어 현재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충의관을 세워 윤의사의 농촌 계몽운동과 4·29의거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11경도를 전시해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매년 4월 29일에는 윤의사를 추모하는 매헌문화제가 열린다.

※(매헌윤봉길의사사적지 →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문화재청은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의 축조 시기를 밝히지 않았다.[2] 충의사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3] 정화 사업 전까지는 저한당에서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4]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4 충남 - 매헌 윤봉길 의사 사적지, 두산백과 - 충의사[5] 사당과 기념관 사이 솔숲에는 윤 의사의 부인인 배용순 여사의 묘소가 있으니 참고하시길.[6] 윤봉길의 유품들은 보물 제568호 '윤봉길의사 유품'으로 지정되었는데, 소장처에 따라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유품(선서문, 이력서, 유서)을 1호, 예산에 소장하고 있는 유품들(후술되는 내용 참고.)을 2호(윤봉길 의사 기념관)와 3호(개인 소장)로 나눠서 지정했다. 원래는 더 있었는데, 진위 논란이 있던 연행 사진과 액자를 2008년에 문화재에서 지정해제했다.[7] 참고로 이 때 김구가 서거 전까지 간직했던 윤 의사의 회중시계 역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