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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경주 월성 慶州 月城 Wolseong Palace Site, Gyeongju | ||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87-1 |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
면적 | 201,116㎡ |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건축시기 | 신라 파사왕 22년(102년) | |
소유 | 경주시 등 | |
관리 | 경주시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경주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 ||
<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경상북도 경주시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976 | |
등재연도 | 2000년 | |
등재기준 | (ii)[1], (iii)[2] | }}} |
경주 월성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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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87-1번지에 있는 신라의 궁궐 유적으로,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불린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있던 자연 지형에 흙벽을 쌓아 보강해 만든 토성으로, 신라의 법궁으로 사용되었다.2. 명칭
기록상 반월성, 월성, 신월성 등 여러 가지 명칭들이 나온다. 이것이 모두 지금의 경주 월성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란 설도 있고, 서로 다른 성을 가리킨다고 보는 설도 있다.고려의 만월대는 고려가 멸망한 이후에 붙은 이름인 반면, 월성은 궁궐 터의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 하여 신라 때부터 신월성, 또는 월성이라고 했다. 혹은 반달 모양에 가깝다고 반월성이라고도 한다. 신라 당대에는 임금이 사는 성이라 재성(在城)이라고도 불렸다고.[3] 어쨌든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는 반월성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이 초승달 모양은 인공이 아닌 자연적 지형이다. 위 사진에선 잘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가서 보면 언덕처럼 솟은 지형이다. 비록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언덕 위로 과거에는 궁궐 건물들이 올라가 실제 건물 규모나 월성의 높이보다 더 높아 보였을 것이다.
3. 상세
성 바로 북동쪽에 동궁과 월지가 있다. 지금은 월성과 동궁 사이에 원화로라는 도로가 났지만 원래는 하나의 궁처럼 연결되었다고 추정한다. 또한 바로 남동쪽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이 있는데 여기도 1974년 건설 당시, 그리고 2000년에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어 일부 역사학자들이 동궁과 함께 남궁(南宮)이 있었는데 그 터에 박물관을 세웠다고 주장하기도 한다.<colbgcolor=#4a2d5b> 경주 월성 주변 항공 사진 |
4. 구조
월성은 하늘에서 바라보면 이름대로 초승달 내지 반달 모양 언덕 형태인데, 주변보다 높은 언덕 지역에 남쪽에는 남천이 자연해자 역할을 해서 고대에는 천혜의 요새지였을 것이다.[4] 지금은 건물이 하나도 없어서 언덕처럼 보인다. 하지만 2010년대 여러 번 탐사하여 궁궐로 사용되던 당시에는 남쪽은 남천이 자연 해자 역할을 하고 나머지 동, 서, 북쪽 방면은 인공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쌌으며 그 안에 많은 궁궐 건축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확인했다.월성 해자는 전쟁이 사라진 삼국통일 이후로는 5호 해자 동쪽에 다듬은 석재를 활용해 석축 해자를 조성했다. 이는 정세가 안정되어 더 이상 방어 시설 본연의 역할보다는 동궁과 월지 연못처럼 조경 기능을 가진 미관을 고려한 시설로 성격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쓸모없어진 해자 일부는 신라 당대에 이미 고인물이 오염되면서 메꿔 버렸다고 한다.
경주 월성 북쪽으로 넓은 주작대로가 나 있어 정북쪽 성동동 전랑지까지 이어졌다.[5] 월성의 남쪽에 남천이 흐르므로 주작대로와 연결된 정문은 북쪽에 있다.[6][7] 옛날 동아시아의 웬만한 도시들은 중국의 장안을 본떠서 비슷비슷한 계획도시를 만들었는데[8] 중국식이라면 남쪽으로 내어야 할 궁전의 정문이 북쪽이고 남쪽 중앙엔 문이 하나도 없어서[9] 서라벌은 이런 표준에서 다소 벗어난 구조였다. 당연히 중국 문화가 들어오기 전 까마득한 원시시대 사로국부터 서라벌이 수도였고 자연 지형이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중대에 들어서는 나름대로 중국의 장안을 본떠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도시를 네모 모양의 방리로 구획해 계획도시의 형태를 갖추었다. 전체는 정사각형 36방으로, 1개 방은 작은 구획 16개로 나누었는데 각 구획에는 자갈 등으로 폭 13미터 도로를 깔았다. 경주 왕경 전체는 6부 55리 36방으로 나누었다.
특히 전성기에는 바둑판식으로 된 구획 안에 기와집들이 빽빽히 차있고 거기다가 당시에는 1층이 아닌 2층 한옥들을 서로 연결했다. 현재까지 월성의 8개 층 중에서 1개 층만 발굴했는데 건물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특징
대명궁, 상경용천부, 평성궁, 경복궁처럼 커다란 정전을 중심으로 행각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두르고 주변에 소형, 중형, 대형 건물들을 규칙적이고 정렬하게 배치하며 이들을 행각으로 연결하는 통상적인 동아시아 궁궐 건축과는 다르게 대형 건물은 거의 없고 소형, 중형 건물들이 불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마다 각도가 따로 놀고 있고 위치가 자유분방하며 행각으로 보이는 흔적도 없어 궁궐보다는 마치 군사용 요새 같은 느낌을 준다.그 이유는 신라가 삼국 중 가장 늦게 중앙집권화를 이루었으므로 초기 삼국시대의 원시적인 궁궐이 먼저 이 언덕 위에 존재했을 것이고 그러고도 건국부터 망하는 그 순간까지 쭉 서라벌을 도읍으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작은 나라였던 사로국 시절부터 쭉 함께한 월성은 거대해진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나라의 시초부터 수백 년간 함께한 신성한 장소를 기와가 오래돼 교체해야 한답시고 녹유와나 황금 기와로 갈아 끼우거나 목재가 썩어간답시고 주칠단청을 칠하는 등 약간의 장식 추가와 수리가 있을지언정 마음대로 부수고 고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흥왕과 문무왕 시대를 거치며 신라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된 후 거기에 어울리게 궁궐을 크고 화려하게 짓고 싶어도, 주변에 동궁과 월지, 남궁, 북궁 같은 별궁을 더 만들어 넓이를 확장하지 기존에 있던 월성은 계속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0] 반면 옆에 있는 동궁과 월지는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만들었기 때문에 좀 더 정갈하고 세련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건물지 배치 형태를 보면 월성과는 다르게 소형, 중형 건물들이 정렬하게 같은 각도로 배치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2010년대 이후 추가 발굴된 동궁과 월지 동편 지역의 여러 유구들과 기타 여러 정황을 생각해보면 통일 이후 신라는 동궁을 단순히 동궁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닌 월성을 확장하는 개념으로서 축조한 정황들이 여럿 보인 것을 보아 월성은 확실히 건축물 자체의 수리는 있었을지언정 배치는 삼국시대 이후 크게 바뀐 부분이 없을 것으로 강하게 추정된다.
6. 역사
望楊山下瓠公宅, 以爲吉地, 設詭計, 以取而居之. 其地後爲月城.
양산(楊山) 아래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취하여 거기에 살았는데, 그 땅이 뒤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
《삼국사기》에 따르면, 월성이 세워진 곳에는 원래 초기 신라의 재상 호공의 집이 있었는데, 탈해가 그 땅이 좋음을 알고 속임수를 써서 빼앗아 살다가 뒤에 월성이 되었다고 전해진다.양산(楊山) 아래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취하여 거기에 살았는데, 그 땅이 뒤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
望城中可居之地, 見一峯如三日月勢可久之地. 乃下尋之即瓠公宅也. 乃設詭計潛埋砺炭於其側, 詰朝至門云 “此是吾祖代家屋.” 瓠公云 “否”, 爭訟不决. 乃告于官, 官曰 “以何験是汝家.” 童曰 “我夲冶匠乍岀隣郷而人取居之, 請堀地檢看.” 從之, 果得砺炭乃取而居.
성 안에 살만한 곳을 살펴보니 마치 초승달[三日月] 모양으로 된 봉우리가 하나 보이는데 지세가 오래 머물만한 땅이었다. 이내 내려와 그 곳을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지략을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고 새벽 아침에 문 앞에 가서 “이 집은 조상 때부터 우리 집입니다.”라고 말했다. 호공이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으나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 이에 관가에 고하자 관가에서 묻기를 “그 집이 너의 집임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하자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얼마 전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 집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청컨대 땅을 파서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동자의 말대로] 따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취하여 살게 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탈해왕 #
《삼국유사》에는 탈해의 속임수가 더 자세히 기록되어 숯과 부싯돌을 몰래 묻고 나서 자신이 대장장이의 후손이며 옛날에 우리 가문이 살았던 땅이라고 호공을 속여 빼앗아 살았다는 내용이 있다.성 안에 살만한 곳을 살펴보니 마치 초승달[三日月] 모양으로 된 봉우리가 하나 보이는데 지세가 오래 머물만한 땅이었다. 이내 내려와 그 곳을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지략을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고 새벽 아침에 문 앞에 가서 “이 집은 조상 때부터 우리 집입니다.”라고 말했다. 호공이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으나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 이에 관가에 고하자 관가에서 묻기를 “그 집이 너의 집임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하자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얼마 전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 집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청컨대 땅을 파서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동자의 말대로] 따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취하여 살게 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탈해왕 #
婆娑王二十二年, 於金城東南築城, 號月城, 或號在城, 周一千二十三歩.
파사왕(婆娑王) 22년[11]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불렀는데, 둘레가 1023보였다.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 #
파사왕(婆娑王) 22년[11]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불렀는데, 둘레가 1023보였다.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 #
二十二年, 春二月, 築城, 名月城.
22년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秋七月, 王移居月城.
가을 7월에 왕이 월성(月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 ##
문헌 기록들에 의하면 원래 신라 건국 이래 왕궁은 혁거세 거서간이 쌓았다는 금성[12]이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101년인 제5대 파사 이사금 22년에 월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22년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秋七月, 王移居月城.
가을 7월에 왕이 월성(月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 ##
그러나 실제 발굴 결과 3세기 후반 이상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문헌 기록과는 달리 빨라도 3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는 삼국사기 기록과 달리 신라의 건국년도가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초반으로 추정되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초기 왕들이 부의 수장으로서 동시대에 재위한 것으로 추측되기에 시대만 다를 뿐 파사 이사금 대에 축조된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와 《동경잡기》에는 유례 이사금 7년(서기 290년) 큰 홍수로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 보수했으며, 소지 마립간 9년(서기 487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다. 이외에도 중수만 29번을 거쳤다고. 동해안으로 상륙한 왜구가 월성을 포위할 정도로 위기에 빠진 적도 있었다. 전성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의 위협이 거세던 자비 마립간(475년)~소지 마립간(488년) 사이 십몇 년에 명활성에 잠깐 왕의 거처를 옮겼던 것 정도를 제외하면 신라 멸망까지 8백여 년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삼국통일 이전의 월성은 삼국사기에서 월성 주위가 보이며, 언덕 위에 반월형으로 흙과 돌을 혼용하여 쌓았고, 여기에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월성은 여러 번 수리 및 증축했는데, 특히 문무왕은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이 사라지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대대적으로 궁궐을 증축했다. 현대의 조사 결과 월성-동궁과 월지-황룡사까지 이르는 넓은 영역이 통일신라 시기 왕궁 구역이었다고 드러났다.
현대에 들어 월성에서 지표 조사, 발굴 조사, 월성 내부 지하 레이더 탐사(GPR)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성의 동, 서, 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고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 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남쪽은 강을 따라 절벽인 자연 지형을 그대로 해자 용도로 이용했다. 동쪽으로는 문무왕 이후 새롭게 왕궁 구역으로 편입된 임해전으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 있다. 지금은 안에 있던 많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조선 영조 17년(1741)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 만든 석빙고(보물 제66호)만 남았다. 지금으로서는 월성의 건물이 정확히 어떻게 배치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유구가 다 사라지진 않았고 아직 발굴이 안 된 부분이 훨씬 많다.
1955년 경주군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되자, 경주군의 잔여 지역을 이 월성의 이름을 따 '월성군(月城郡)'으로 개칭했다.[15] '월성 원자력 발전소'라는 이름 등에서 아직까지 월성군 명칭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후 1989년 다시 경주군으로 명칭을 환원했고 1995년 도농통합제 실시로 경주군이 경주시에 통합되었다.
《일본서기》기록에 따르면 554년 관산성 전투 후에 신라군은 백제 성왕의 목을 잘라 신라 왕궁의 북청 계단 밑에 묻었다고 한다. 다만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 그대로 라기보다는 당시에 떠돌았던 한 가지 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일본서기의 해당 구절에서도 본문에선 성왕을 처형하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쓴 뒤 그 뒤에 '이렇게 말하는 책도 있더라.' 정도로 언급했다. 성왕, 진흥왕 문서 참조.
7. 주요 건축
<colbgcolor=#4a2d5b> 신라시대 서라벌 시가지의 모형 |
오른쪽 중간쯤에 황룡사가 보인다. 월정교와 일정교, 안압지 호수 등은 남북국시대가 돼야 생겨서 여기에는 없다.[16] 참고로 월성 남쪽에 있는 절은 인용사다. 신라왕궁 바로 남쪽에 자리한 전傳 인용사 옛터(경주 인왕동 절터) 월성 북쪽으로 큰 도로가 있고, 그 끝에 보이는 건물은 또 다른 신라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전랑지(대궁지)다. 정확한 이름은 불명.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북궁이 전랑지라는 설도 있고 성덕왕대 창건된 신궁 터, 국가의 중요한 제례를 행하는 건물인 명당 등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2023년 현재 아직 전랑지 전체를 제대로 발굴 조사 한 적이 없어서 정확히 어떤 건물이었는지 추정하기 힘들다. 전랑지는 개발만 막고 그냥 공터로 남겨두었다.
삼국사기 등 사서에는 왕궁 내 각 건축물의 이름들이 전한다. 숭례전ㆍ강무전ㆍ명학루ㆍ월정당ㆍ월상루ㆍ망은루 등 건물과 임해문ㆍ인화문ㆍ무평문ㆍ현덕문ㆍ귀정문ㆍ준례문ㆍ적문 등 출입문이 있었다. 이 중 중심이 되는 정전의 이름은 삼국유사에서 법흥왕이 즉위했다는 자극지전(紫極之殿)이나, 여러 기사에서 이름이 나오는 조원전(朝元殿)이라고 추정한다. 숭례전은 중국, 일본 등 외국 사신을 접견하고 연회를 여는 장소로 썼다. 그 외 요석궁, 고루 등 명칭이 사서에 나온다.
2000년대 후반 들어서 진보한 레이더 관측으로 지하에 묻힌 유적을 탐사했는데, 위 상상도 같은 당초의 예상과 달리 월성 위 각 건물의 배치가 그리 바둑판식으로 반듯하지는 않았다. 남북 방향을 기본으로 하지만 둥글게 기울어진 초승달 모양인 월성 언덕 자연 지세에 맞춰서 전각을 배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상 외로 건물들이 촘촘하고 정렬하게 배치되었다.
성 북쪽 남북대로와 바로 연결되는 북3문과 임해전으로 연결되는 동1문 사이에 대형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정무와 관련된 중심 건축물, 위에서 언급한 조원전이라고 추정하였으나 사실은 대형 건물이 아니라 여러 작은 건물들이 모인 건물지였고 이 건물지의 중심 건물은 크기가 세로 2칸, 가로 28미터로 조선/대한제국의 덕수궁 중화전보다도 작았다. 그리고 여기는 생뚱맞게도 정사각형 건물 2채가 서로 같은 각도로 삐뚤어졌는데 이 중 하나는 28미터 건물을 둘러싼 담장 동쪽을 잡아먹는 위치에 배치되었다.
서남쪽 끝에는 대형 건물들이 'ㅁ'자 모양으로 배치되었고 이 건물들이 월성에서 가장 커다란 건물을 둘러싸는데, 사기 천궁서(天宮書)에 나타나는 궁궐 배치 원리 오성좌를 감안하면 이 곳이 신라 임금이 지내는 침전 혹은 내전이라고 추측한다. 혹은 왕궁 내 사찰 건축물일 가능성도 있다.
중앙에서 약간 서쪽의 북1문과 북2문 사이에는 작은 인공 연못과 여러 중간 규모의 전각이 있어 궁내 의식이나 연회와 관련 있는 장소인 듯하다.
동남쪽 끝부분을 월성의 중심부라고 추정하는데 이곳의 중심 건물 역시 세로 23미터, 가로 15미터로 굉장히 작았다.
물론 8개 층 중에서 이제야 1개 층을 조사했을 뿐이니 앞으로도 20~30년은 발굴 조사를 해야 한다. 월성 안에는 여러 건물들의 초석 외에도 지름 40 m 안팎인 호수와 가마터, 공방, 우물 등 여러 가지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초석이 땅 위로 돌출된 건물이 발굴됐다.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아직 완전히 묻히지 않아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국립문화재연구원
8. 발굴과 복원
<colbgcolor=#4a2d5b> 월성 복원 상상도 |
<colbgcolor=#4a2d5b> 월성 대전 상상 복원도 |
경주시 땅에 수많은 신라 관련 유적이 있지만 월성은 신라 국왕이 천 년 동안 살았고 정치의 중심이 되는 왕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일개 무덤이나 사찰터 정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귀중한 고고학적 비밀이 묻혔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장 궁전의 일부였던 안압지에서 나온 발굴 결과를 보더라도 월성 발굴에 큰 기대를 걸 만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시험 발굴에 나섰다가 지하에 너무 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당시 기술로는 도저히 발굴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대로 덮어버렸다고 한다.
당시 발굴팀장의 말에 따르면 발굴 기점을 잡고서 불과 10미터 길이밖에 파지 않았는데도 기와 더미가 줄줄이 나와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발굴을 중단했다고 한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레이더 탐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학술 조사를 시행하여 예상대로 놀라울 정도로 많은 유구가 잘 남았음을 확인했다. 각종 건축물의 유구가 초승달 모양인 월성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빼곡하게 들어찼고, 그 초석이나 기타 유물이 온전하게 묻혔다.
그러나 이런 결과가 알려지자 고고학계로서는 희망인 동시에 큰 과제가 되었다. 제대로 발굴하려면 20~30년은 걸린다고 할 만큼 거대한 규모이고, 그만큼 돈과 시간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천 년 세월 동안 건물을 세웠다 허물었다를 반복했고 월성 지하에는 여러 시대의 흔적이 수직으로 겹쳐 섞여 발굴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당장 좀만 더 걸어가면 경주 향교를 비롯한 최부자 종가가 있고 또 당장 월성 북쪽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선덕여중이 있는 등 월성 주변은 변화를 많이 거쳤다. 또 최부자 종가 작은 사랑채 터에 남은 주춧돌이 월성에서 빼내온 주춧돌이다. 이처럼 당시 만든 석재는 이리저리 반출되었으니 발굴은 더 어려울 수밖에. 섣부르게 발굴하다가 오히려 유적을 훼손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시선이 대다수이다. 당장 무령왕릉에서도 워낙 졸속으로 발굴한 탓에 알아내지 못한 정보가 많았었다. 바로 옆 안압지 발굴도 예상하고 시작한 작업이 아니라서 과정이 비교적 부실했다.
뜬금없다면 뜬금없지만 월성 신라 왕궁을 원래 있던 그 자리에 복원해야 한다는 얘기가 간간이 흘러나오는 모양이다. 이유인 즉슨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신라 궁궐이 어디 있고 어떻게 생겼냐고 물어볼 때 난처하다는 것과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군은 연간 600만 명 국내외 관광객 유치 목표로 6904억 원을 투입해 백제문화단지를 만들어 백제문화역사관, 사비 궁, 능사(왕국 내 사찰), 5층 목탑, 생활 문화 마을, 관광 리조트 등을 조성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일본도 역사적 근거가 상당히 부족한 가운데 많은 부분을 상상에 근거해 헤이조궁을 복원해서 관광객을 유치하는 실정이다.[17]
어쨌든 왕궁인 월성과 경주 남쪽을 연결하는 주 통로로 사용된 대규모 교량인 월정교는 일단 복원이랍시고 만들어졌으나#, 역사적인 고증이 부족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거라 많은 논란을 낳았다. # 그리고 고증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월성 북쪽을 두르는 석축 해자도 2021년 기준으로 복원의 마무리 단계다.
2025년까지 복원을 위해 국비 1890억 원, 지방비 810억 원 등 2700억 원을 투입한다. 우선 2017년까지 140억 원을 투입해 월성 발굴 조사 및 기초 학술 연구를 진행하고 궁궐 핵심의 복원에 착수한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발굴 조사 성과를 토대로 복원 가능한 유구(옛 물건) 등의 복원을 추진할 예정이다.# 그리고 2014년 12월 12일 드디어 월성을 처음으로 제대로 발굴하여 조사를 시작했다.# 일단 남아 있는 건축물의 흔적을 확인하여 복원까지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다음과 같이 2023년까지 발굴을 진행할 계획이다.
- 1단계(2014∼2018년/5개년): 월성 중앙부 시굴 조사와 정문으로 추정되는 북문지와 동문지, 남문지, 서문지를 발굴 조사
- 2단계(2019∼2023년/5개년): 원지와 기타 유구 확인 지역을 발굴하며, 학술 대회 개최 및 발굴 종합 보고서를 발간
월성을 제대로 발굴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성벽이나 해자 발굴만 진행했을 뿐 월성 내부는 손대지 않았다. 그래서 학계는 이번 발굴에 거는 기대가 크다.
월성 주변 발굴 현황은 다음과 같다.
- 1915년: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처음으로 월성 주변 발굴 조사를 함. 월성 서쪽의 남쪽 성벽 일대
(골촉, 골침, 멧돼지 이빨, 사슴뿔, 동물 뼈, 탄화곡물, 토기편 등 발굴) - 1979~1980년: 동문지 발굴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 문 터를 확인, 성벽의 대략적인 토층 상황과 석축 해자 유구를 확인) - 1984~1985년: 성벽 바깥에서 해자 발굴
(해자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 해자가 기능을 상실한 후 통일신라 시대에는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을 확인) - 1985~2014년: 1~5호 해자와 계림 북편 건물터, 첨성대 남편 적심(積心) 건물지, 월성 북서편 건물지 등 확인
2007년 실시한 지하 레이더 탐사와 이후의 시굴 조사에서 많은 건물 터가 나타났다.# 3D 영상 복원도와는 굉장히 다른 모습이다.
2013년에 해자 근처 건물지 발굴 조사가 있었다.#
2017년 5월 국내 최초로 월성 서쪽 성벽의 기초 층에서 50대 남녀 인골 2구가 발굴됐다. 학계에서는 성벽 아래층에 인위적으로 묻은 듯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인신공양, 그중에서도 건물의 붕괴를 막고자 행하는 인주의 제물로 희생된 이들로 추측했다. 이전에도 인신공양인 듯한 흔적이 발견된 사례는 있었으나, 단순 사고 또는 범죄의 흔적이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이번 성벽 아래에서 발견된 인골은 정말로 인신공양의 흔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 의심하기가 어려운 첫 사례이다. 6세기 지증왕 시기까지 순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인신공양 문화 자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실제 사례가 나타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2021년 9월 7일 20대 여자의 인골 1구가 추가로 발견됐다. 2017년 남녀 인골이 발견된 곳에서 불과 50cm 떨어진 자리였다. 인골 주위에서 말, 소, 사슴 따위의 늑골과 토기가 함께 출토되었고 인골들이 모두 성벽 중심 골조를 따라 규칙적으로 나란히 발견되었기 때문에 성벽 축조 당시 인신공양 제사를 행했다고 추정했다. 또한 조사 결과 삼국사기에 기록된 101년이 아닌 4세기 중반부터 축성되어 5세기 초반에 완공되었다고 드러났다. 삼국사기 기록상으로 흘해 이사금에서 실성 마립간 시기이다.
2022년 2월 9일 복원 사업에 탄력이 붙었다. 월성 전체를 복원하는 건 확정인 듯하다.#
2022년 3월 31일 신라 왕궁인 경북 경주 월성을 둘러싼 방어 시설 해자(垓子) 복원·정비 작업이 마무리됐다.#
2022년 12월, 신라 왕궁 월성과 당시 도심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큰 도로가 확인되었다.#
2024년 10월 2일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경주 월성 안에서 신라의 모체가 된 사로국 시대 거주 흔적을 확인했다.#
9. 시설
- 조원전(朝元殿): 정전이다. 왕이 신하들과 국정을 의논했다.
- 평의전(平議殿): 이곳에서도 왕이 신하들과 국정을 의논했다. 조선시대 경복궁에도 근정전뿐만 아니라 국정 회의 하는 곳이 많았다.
- 내황전(內黃殿): 왕실 물품들을 보관하는 창고다. 만파식적이 여기에 보관됐다.
- 숭례전(崇禮殿):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곳이다.
- 좌사록관(左司祿館): 관리 녹봉을 지급하던 건물이다.
- 우사록관(右司祿館): 관리 녹봉을 지급하던 건물이다.
- 영각성(玲閣省)
- 월정당(月正堂)
- 남당(南堂)
- 월상루(月上樓)
- 망덕루(望德樓)
- 명학루(鳴鶴樓)
- 고루(鼓樓)
- 남문(南門)
- 귀정문(歸正門)
- 북문(北門)
- 인화문(仁化門)
- 현덕문(玄德門)
- 무평문(武平門)
- 준례문(遵禮門)
위 시설들은 월성에 있던 게 확실하지만 정확히 월성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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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월성 발굴 때 재성이라고 적힌 기와가 무더기로 발굴되었다.[4] 실제로 경주에 가서 남천을 보면 이런 개울물 정도로 과연 적이 못 넘어오게 막는 해자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 법도 하지만 지금 남천이 예전보다 많이 말라붙은 것이지 과거에는 월성보다 상류인 배반동 갯마을까지 배가 다닐 정도였으므로 지금보다 훨씬 수량이 풍부했을 것이다.[5] 이 때문에 성동동 전랑지가 북궁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6] 다만 거득공이 안길을 초대하는 기록에 따라 문무왕 시대, 즉 삼국통일 이전 삼국시대 신라 시절까지는 서문인 '귀정문'이 정문이었다가 통일 직후인 신문왕 시기를 전후해 정문을 북문으로 바꿨다는 설도 있다.[7] 신문왕 시대부터는 정문이 북문임이 확실한데,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기록이나 왕이 문무백관을 소환하는 기록 등 상징적이고 중요한 상황들에서 북문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도시구조 유구를 봐도 북쪽이 가장 넓은 도로도 뻥 뚫려있고 척 봐도 외관상 정문이라 할 만하다.[8] 발해의 상경용천부, 일본의 나라, 교토 등도 똑같이 장안을 본떠서 정궁과 주작대로를 두고 구획을 지었다.[9] 중국식 정석에 가까운 구조는 경복궁이나 자금성을 떠올리면 된다. 경복궁의 경우 광화문이 정문이고 세종로 쪽이 주작대로.[10] 신문왕시절 대구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강력하게 반발해서 무산되고 9주 5소경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만약에 진짜로 대구로 천도했다면 자금성 같은 정갈한 궁궐이 지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11] 서기 101년[12] 금성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위 기록을 역으로 읽으면 월성 서북쪽에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경주 서남쪽 창림사 자리가 신라 초기의 궁(금성)이라고 적혀 있다. 나정이나 오릉과도 가까운 곳이다. 이곳도 여러 번 조사했는데, 2018년까지 사찰의 흔적은 나왔지만 왕궁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은 출토되지 않았다. 금성의 위치를 두고 이와 같이 여러 설이 있는데 더 자세한 내용은 금성 문서 참조.[13] 서기 290년[14] 서기 488년[15] 같은 예로 수원시와 화성군(현 화성시)이 있다.[16] 단, 안압지와 붙어 있던 임해전 건물은 보인다.[17] 다만 헤이조궁은 대극전(大極殿) 복원에 필요한 자료가 어느 정도 있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 고시라카와 덴노가 만들게 한『연중행사 에마키(年中行事絵巻)』라는 문헌에 고시라카와 덴노 당시의 대극전 모습이 그림으로 수록되었는데, 이 그림은 대극전 복원의 기본 자료로 쓰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이 헤이조쿄를 발굴하고 대극전 복원을 완료하기까지는 60년이 걸렸다. 현지에서는 "1300년을 기다렸는데 10년 정도 못 기다리겠냐"라는 반응이었다고.나라현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한겨레21) 그러나 《연중행사 에마키》에 수록된 회화는 '헤이조쿄'와는 다른 '헤이안쿄 정전의 1층의 일부 기둥만 묘사한 수준이라, 전체적인 모습은 야쿠사지 등을 통해 추측해서 만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