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東京雜記. 조선 헌종 11년, 1845년에 성원묵(成原默)이 기존의 동경잡기를 최종 증보하여 간행한 경상북도 경주시 지역의 민속 향토 지리지. 규장각에 원본이 소장되어 있고, 국립중앙도서관, 장서각,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목판본이 소장되어 있다.1933년에는 최준이 동경잡기를 수정, 보완하여 동경통지(東京通志)를 간행했다.
2. 내용
경주 지역은 우리 나라 상고 시대부터 번영한 역사가 깊은 도시였다. 기원전 진한이나 천 년 가까이 수도 서라벌이었던 신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 시대에도 수도 지위는 잃었다지만 동경(東京)이라 불리며 서경(西京)과 함께 국가의 최중요 도시 중 하나로 여겨졌다. 동경민란과 여몽전쟁, 임진왜란으로 크게 파괴되어 조선 시대에는 비교적 쇠락했지만, 그럼에도 지역 중심지로서는 물론[1]이고 전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2]였다. 상당한 상징적 의미가 남아있어 동경잡기가 최종 저술되는 19세기에 이를때까지 2천여년 이상 한반도 민족의 최고 영지이자 성지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당연히 경주 지역 전용 지리서의 편찬은 19세기가 최초가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동경지(東京誌)라는 이름으로 작자, 연대 미상의 경주 지역 지리지가 전해져 왔다. 이것을 1669년에 민주면(閔周冕), 이채(李採) 등이 편집, 보완하여 동경잡기라 이름붙였다. 이후 1711년에 남지훈(南至熏)이 내용을 증보했고, 1845년에 성원묵이 최종 중간한 것이 이 책이다.
다른 읍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하고 개별적인 역사적인 항목, 특히 진한과 신라 등 역대 왕조의 역사를 한 지역을 중점으로 정리했다는 점, 한 읍지임에도 경제나 정치, 군사 관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인물 관련 항목에 대한 구체적인 분류는 물론 서술 내용 비중이 다른 읍지보다 훨씬 높고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현재는 사라진 경주 지역에 과거 존재했던 여러 문화 유적의 현황과 위치가 생생하게 남아 있으며, 회소곡(會蘇曲) 같은 신라의 가곡이나 연오랑과 세오녀(延烏郎細烏女)와 같은 신라의 수많은 설화, 전설, 기담 등도 생생히 실려 있다.
3. 구성
3.1. 동경잡기 제1권
- 진한기(辰韓紀)
동국통감에서 발췌한 진한에 대한 설명. - 신라기(新羅紀)
시조 박혁거세 부터 경순왕까지 역대 왕의 즉위와 사망에 대한 내용. 유리 이사금 대의 도솔가(兜率歌), 아달라 이사금 대의 죽령과 계립령 길의 개통, 소지왕 대의 우리 나라 최초의 시장인 경시의 설치, 지증왕 대 한반도 최초로 순장의 금지와 우경(牛耕)의 보급, 상복법(喪服法)의 제정, 무열왕의 백제 멸망, 문무왕의 고구려 멸망과 신역법(新曆法)의 도입, 애장왕의 가야산 해인사 창건, 진성여왕의 폭정(暴政) 등등 신라 왕들의 기사가 모두 적혀있다. - 경주지계(慶州地界) :
- 건치연혁(建置沿革)
- 관호연혁(官號沿革)
- 속현(屬縣)
- 진관(鎭管)
- 속임(屬任)
- 인리노비(人吏奴婢)
- 읍명(邑名)
- 성씨(姓氏)
- 풍속(風俗)
- 산천(山川)
- 승지(勝地)
- 토산(土産)
- 성곽(城郭)
- 관방(關防)
- 봉수(烽燧)
- 궁실(宮室)
- 창고(倉庫)
- 학교(學校)
경주 지역 향교(경주 향교 등), 서원(서악 서원, 옥산서원 등)과 소학당에 대해 모두 기술하였다. 경주 지역 향교, 서원에 부속된 건물, 대성전(大成殿)에 배향된 인물(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이언적), 건물의 중건과 관련된 내용 등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 역원(驛院)
- 교량(橋梁)
- 사묘(祠廟)
- 능묘(陵墓)
- 기우소(祈雨所)
시조묘(始祖廟)를 비롯하여 경주시 외곽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8곳을 소개하고 있다.
3.2. 동경잡기 제2권
- 불우(佛宇)
- 고적(古蹟)
- 수(藪)
- 호구(戶口)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전성기 때의 인구수를 기술한 후 1669년의 경주 지역 인구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 군액(軍額)
- 전결(田結)
- 제언(堤堰)
- 각방(各坊)
- 각동(各同)
경주를 모두 33동(同)으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는데 서원을 기준으로 범위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 명환(名宦)
- 인물(人物)
3.3. 동경잡기 제3권
- 우거(寓居)
- 과목(科目)
- 음사(蔭仕)
- 효행(孝行)
경주 지역 효자 54명, 효녀 5명, 효부 4명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 우애(友愛)
- 충의(忠義)
대부분 임진왜란 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경주 지역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다. - 정렬(貞烈)
- 기예(伎藝)
- 서적(書籍)
- 제영(題詠)
- 잡저보유(雜著補遺)
- 이문(異聞)
- 남지훈(南至薰)의 발문
- 성원묵(成原熱)의 발문
[1] 조선 초기에는 경상감영이 있었던 상주시와 옆동네인 성주군이 경상도 최대 도시였다. 경주는 그 다음이었으나, 경상감영이 대구광역시로 이전하고 난 조선 중후기에는 경상도 최대 도시였다. 일제강점기까지도 옆동네 포항이나 울산에서 경주에 장을 보고 문화 생활을 하러 갈 정도였다. 지금은 그 관계가 역전되어 경주보다 포항과 울산이 각각 2배, 4배로 인구가 많아진 상태.[2] 경상도 자체가 인구가 많다 보니 경상도 대도시는 사실상 전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일례로 1789년 호구 조사에서 경주는 서울, 평양, 충주와 더불어 조선 내의 5손가락 안의 인구 밀집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