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9:47:58

부여 가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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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가림성
扶餘 加林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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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성흥로97번길 167 (군사리)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309,739㎡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동성왕 23년(501)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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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부여 가림성.jpg
파일:부여성흥산성.jpg
<colbgcolor=#344c3c> 부여 가림성[1]
1. 개요2. 역사3. 구조4. 임천 충혼제(林川 忠魂祭)
4.1. 내용4.2. 진행
5. 기타6. 외부 링크7. 사적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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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사비성을 방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산성이다.

성이 위치한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인근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서 방비용 성으로서의 그 입지가 상당히 훌륭하다. 전해지는 바로는 백제 동성왕 23년(501년)에 위사좌평 백가(苩加)가 쌓았다 한다. 가림성은 백제의 성 가운데 기록에 의해 축조 연대가 전해지는 유일한 성이고, 부여군의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이기도 하다.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2] 지정될 당시 부여 성흥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07월 28일 부여 가림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 역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령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현대로 치면 국왕의 경호대장급의 직급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11월에 왕이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馬浦村)에서 묵었다. 이전에 왕이 백가로 하여금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퇴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백가는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러서 12월에 이르러 왕이 사망하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제4(百濟本紀 第四) 동성왕(東城王) 23년 겨울 11월(二十三年冬十一月) 中

이 성은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는데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이 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기 어렵다고 한 것에서 난공불락의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복신은 이미 권력을 독차지하여 부여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게 되었다.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구실로 굴 속에 누워서 풍이 문병하러 오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이고, 고구려국에 사람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았는데, 손인사가 중도에서 이들을 맞아 쳐부수고, 마침내 인원의 군사와 합세하니 군사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공격의 방향을 의논하는데 어떤 자가 “가림성(加林城)이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쳐버려야 한다.”고 말하니, 인궤가 대답하였다. “병법(兵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할 것이요, 밖에서 지키자면 날짜가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들이 모여 있으니, 만일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인사, 인원과 신라 왕 김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別帥) 두상(杜爽)과 부여융은 수군과 군량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6(百濟本紀 第六) 의자왕(義慈王) 당 고종 용삭[3]2년 가을 7월 (唐 高宗 龍朔二年秋七月) 中

3. 구조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는데 둘레는 약 1350m 이고, 높이는 3~4m 이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고려 태조를 만나러 가는 길에 임천에 들렀다가 패잔병의 노략질과 전염병, 흉년에 시달리던 빈민들을 위해 군량을 풀고 둔전을 운영하는 등 선정을 베푼 공덕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과 나당연합군에 맞서다 순국한 백제의 군인들을 위령하기 위해 1985년에 건립된 충혼사(忠魂祠)가 있다.

4. 임천 충혼제(林川 忠魂祭)

4.1. 내용

임천 충혼제는 매년 4월 가림성 내에 위치한 충혼사에서 나당연합군에 항전하다가 순국한 무명 장졸들의 넋을 달래고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개최하는 제례행사이다. 충혼사에는 마지막까지 백제의 수도를 수호하던 장졸들의 신주(神主)에 해당하는 수성장졸제신위(守城將卒諸神位)라고 적힌 위패들이 모셔져 있다. 1979년에 거행한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4.2. 진행

이틀에 걸쳐서 진행되며 충혼제에 앞서 먼저 전야제가 이루어진다. 전야제에서는 임천면사무소에서 가림성까지 연등행렬을 한 후 봉화제를 올린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에는 산신제 및 충혼제를 거행한다. 산신제는 충혼제에 앞서 개막을 신고하는 의례이다. 산신제는 충혼사 뒤편에 조금 높은 단을 설치하고 제물을 진설한 뒤 제관과 헌관 두 분이 간소하게 치른다. 충혼제는 악단의 백제제례악 연주와 함께 충혼사에서 유교식으로 거행한다. 제례가 끝나면 국악공연, 줄다리기, 게이트볼 대회, 노래자랑 등이 펼쳐진다.

5. 기타

  • 1996년부터 총 6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동‧남문지 축조 형태, 백제 시대 성벽의 축성법, 백제~조선 시대 개축한 성벽의 흔적, 정상부의 평탄지에 자리한 건물지 등을 확인한 바 있다.
  • 2019년 9월부터 7차 발굴조사로 북성벽 내측부에 대한 수구(水口)[5]와 집수 시설을 조사하여, 조선 시대에 사용한 사각형 집수정(우물)과 통일신라 시대에 사용한 원형 집수정이 확인되었다.

6. 외부 링크

7. 사적 제4호

부여 가림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石城)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苩加)가 쌓았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부여성흥산성 → 부여 가림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3] 당 고종의 3번째 연호이다.[4] 성흥산 사랑나무라고도 불리며 나무의 가지 모양이 반쪽 하트모양을 하고 있어 촬영한 사진의 좌우 반전으로 하트모양을 만들 수 있다. 2007년 10월 1일 부여군의 향토문화유산 제88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로 승격 지정되었다.[5] 물을 끌어들이거나 흘려 내보내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