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2:47:11

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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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 산3번지 외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904\,500㎡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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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sd tumulis.jpg
<colbgcolor=#344c3c> 주산성 일대
1. 개요2. 구조 및 조사 내용3. 외부 링크4. 사적 제61호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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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 일대에 자리하는 반파국(대가야)의 배후 산성. 대가야 왕권의 상징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바로 인접해 있으며, 연조리 궁성지 등의 존재로 말미암아 수도의 중심 방어성곽으로 기능하였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이칭은 이산성(耳山城)이다.[1]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61호로 지정되었다.

2. 구조 및 조사 내용

주산성은 대가야읍내를 내려다보는 해발 311m의 주산의 7~8부능선부터 정상까지 넓게 형성되어 있다. 주산성은 현재 고령군을 중심으로 형성된 당시 대가야의 방어체계의 가장 중핵으로써 주산성에서 주변 권역을 감시할 수 있는 범위가 굉장히 넓다. 또 주산성을 따라서 방사상으로 크고 작은 대가야에 의해 축조된 중형의 산성들이 포진하고 있다. 그러한 주변 산성들은 잠정적으로 대가야에 의해서 축조된 것으로 추정만 되었으나 해당 성곽들이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서 대가야에 의해서 축조되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당연히 그 성곽방어체계의 첨병은 낙동강까지 형성되어 있으며 대 신라 방어 축선이 가장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2]

주산성은 이중성의 구조로 크게 외성과 내성으로 나누어진다. 외성은 7부 능선부터 정상까지 이어지며 그 둘레는 1km 가량이며, 대부분 잔존상태는 불량하다. 다만 어디까지나 발굴조사 전의 상태가 그러했던 것이고 존재 자체가 일제강점기에 알려진 것에 비해서 발굴조사는 2010년대에 접어서야 이루어졌으며 외성의 남문 일대가 가장 먼저 발굴조사되었다.
파일:ju fortress.jpg
<colbgcolor=#344c3c> 주산성 남문지 일대. 편축의 성벽으로 뒷채움들이 노출된 것을 볼 수 있다. 대략적 높이도 보이는 부분.
남문지 일대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가장 높은 구간의 성벽 자체 높이는 약 3~4m에 달하며 편축이지만 성벽의 폭도 생각보다 넓고 견고하게 축성되었다. 또한 완전한 옹성의 문 구조는 아니지만 옹성처럼 다방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안쪽으로 들여놓은 형태의 성문을 구축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뿐만아니라 대가야 특유의 성벽 축조 스타일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가야 고분을 구축하는 방법에서도 드러나는 것으로 성벽의 외면을 구성하는 부분만 간단히 면을 고르고 전체적인 돌 가공은 비교적 대충대충 마무리하였다. 방형이 아닌바 성벽을 보면 바른층쌓기가 아닌 허튼층쌓기로 구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돌 자체도 비교적 직사각형(세장방형)의 비율로 맞추어 특색을 보인다. 또 신라처럼 기단보축이라고 불리는 하부 지지시설도 확인되었다. 위의 사진에서 성벽 제일 아랫 부분에 맨들맨들한 부분이 그것.

남문지의 조사과정에서 다소 뜬금없는 것은 체성부, 정확히는 면석의 뒷채움 부분에서 신라 토기가 출토되었다. 지표상에서야 주산성에서도 신라토기가 채집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표상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유적의 대략적인 부분만 설명해줄 뿐이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체성부 내부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이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신라의 유물이 주산성에 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 토기 자체의 연대가 5세기 말경으로 편년되고 있는데 5세기 말경이면 신라와 사이가 그렇게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완연한 대가야 토기들 일색이 출토되는 가운데서 빼박 신라토기의 등장은 적잖이 충격적인 발굴성과였다.

하지만 단 한점만이 출토되었을 뿐이며 토기라는 것 자체가 "특정 국가의 상징"이 아닌 "특정 국가"에서 주로 유통되었던 것으로써 소위 "일상재(日常財)"로 구분된다.[3] 따라서 신라토기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는 연대근거로써 5세기 말 경에 이 성벽 구간이 축조 또는 수리 되었다는 증거로써 보아야한다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내성은 둘레 약 700m 가량으로써 위에서 서술한 외성 남문지의 조사 이후 문화재 및 관광사업에 탄력받은 고령군의 발주로 내성과 외성의 연결구간 및 내성 내부의 목곽고(木槨庫)가 발굴조사되기도 하였다. 내성은 주산성의 주요 시설들이 있던 곳으로써 평탄지가 정상부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편이며, 실제로 지표상에서도 대가야 토기편(片)의 출현 빈도가 굉장히 많은 곳이다. 특히 통형기대라고 하는 토기들 중에서는 그나마 위계가 높은 기종의 흔적이 많다.

축조시점은 대략 5세기 후반경에 축조되어 지속적으로 유지보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 내부 지표상에서 신라토기가 확인되는 점을 통해보면 신라에 의해서 점령되고 난 뒤에도 어느 정도 활용되었다가 그 이후에 폐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령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인접해있으면서도 주산성 성벽과 지산동 고분군 자체는 겹쳐지지 않고 명확히 구분된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주산성이 맞닿아 있는 지점의 고분들은 대부분 5세기 말, 6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분들로써 계속 주산성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형성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분군과 성벽의 구분이 명확하다는 것은 그 시점에 주산성이 축조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근거이기도 하다.[4]

주산성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길을 따라 계속 죽 올라가면 정상까지 갈 수 있다. 그 밖에도 대가야의 궁성으로 추정되는 연조리 궁성지(지금의 고령향교 뒷편)에서도 주산성 남문지를 통과하여 가볼 수 있다.

3. 외부 링크

4. 사적 제61호

고령의 서쪽 주산에 쌓은 가야의 산성이며, 이산성(耳山城)이라고도 한다. 산성의 남쪽 산등성이에는 대가야 무덤들이 분포되어 있어 산성과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산의 가장 높은 곳과 동쪽의 능선을 따라 둥글게 흙으로 쌓은 내성과, 내성의 동쪽과 서쪽 끝에서 시작하여 타원형으로 돌을 쌓은 둘레 약 700m의 외성으로 된 2중 성벽을 가지고 있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나, 계곡쪽으로는 견고하게 쌓은 성벽이 남아 있다. 현재 외성은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어 먼곳에서 전체 윤곽을 파악하기 힘들며, 성 안에 우물터와 건물터로 보이는 곳이 남아 있다. 외성의 서남쪽에 연결된 봉우리에는 또 하나의 작은 성이 딸려 있다.

성 안에서는 주변 무덤에서 출토되는 각종 가야토기 조각과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어 성이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은 옛 가야국의 중심적인 성터로 유서깊은 면모를 보여주며, 당시의 성곽 축조 방식 및 구조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5. 관련 문서


[1] 일제강점기까지는 이렇게 불렸다.[2] 한편 신라 또한 대가야 및 가야권 제 국가들을 염두에 두고 낙동강 동안(東岸)을 따라서 많은 성곽을 축조하였다.[3] 금관, 환두대도 등과 같은 위신재(威信財)와 대비되는 개념. 위신재는 일상재에 비해서 특정 국가의 정치적 심볼로써 이해할 수 있으며 정치적 해석이 충분히 동반될 수 있다.[4] 참고로 옛날에는 고분군이 성벽 내부에 조성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