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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적 제234호 | ||
아차산성 阿且山城 Achasanseong Fortres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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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
면적 | 112\,219㎡ | |
지정연도 | 1973년 5월 25일 | |
제작시기 | 삼국시대 | |
위치 |
<colbgcolor=#344c3c> 아차산성 지도[1] |
[clearfix]
1. 개요
아차산에 위치한 산성 유적. '阿且山城' 또는 '峨嵯山城'으로 쓰며, 본래 이름인 '아단'은 고유어를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성은 현재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구의동에 걸쳐 있으며, 1973년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었다.2. 역사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의 표기대로 본래 명칭은 '아단성(阿旦城)'이었으나 자형이 비슷한 '아차성(阿且城)'으로 잘못 표기되기도 했는데[2],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면서 이름을 '단(旦)'으로 바꾼 이후 피휘를 위해 후자가 정식 명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설대로 역사 속의 아단성을 현재의 아차산성과 동일시할 수 있다면 아차산성이 새워진 시기는 백제 책계왕 1년(286)이다. 당시 고구려의 침공에 어려움에 있던 대방군을 백제가 구원하자, 고구려의 서천왕이 분노하여 백제의 북쪽 변경을 위협하였고, 이에 책계왕은 수도인 위례성 북방을 수호하는 요새인 아차산성과 주변의 사성(蛇城)을 축성, 보수하였다.[3]396년에 광개토대왕이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면서 수군력으로 서해를 통하여 위례성의 서쪽을 옥죄고, 육상군은 아차산성을 점령, 위례성 공략 거점으로 삼아 서쪽과 북쪽에서 백제를 압박하여 결국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아차산성이 고구려의 손에 떨어진 것은 백제에게는 수도의 북부 방어거점이 무너짐과 동시에 한강만 건너면 바로 수도가 적의 공격에 노출되는, 그야말로 수도가 최전방이 되어버린 순망치한과 같은 상황이었다. 결국 장수왕이 한성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위례성)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개로왕이 이곳에서 백제의 신하였다가 고구려에 투항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게 살해당했다. 그 뒤 아차산성은 고구려의 남진 기지가 되어 남방의 백제, 신라를 압박하게 된다.
그러다가 6세기에 이르러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손에 넣으면서 아차산성도 신라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590년(영양왕 시기) 고구려에서 온달이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 땅을 되찾기 전엔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선언하고 아단성을 공격하였으나 결국 이곳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다만 아단성의 위치를 옛 이름이 을아단현이었던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비정하는 설도 제기된 바 있다. 단양 일대에 온달에 대한 전승이 훨씬 더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 주된 논거인데, # 어느 쪽이든 결정적인 사실은 알기 어렵다.
2.1. 신라 산성설
이 산 이름이 지금도 아차산이고 초기 백제 기록상 아차산성이 나오기 때문에, 고문헌 속 아차산성이 지금의 아차산에 있는 이 산성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2000년대에 고고학 발굴조사를 한 뒤에는, 아차산성으로 알려진 현 산성이 실제로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새로 쌓은 곳이고, 백제 초기 기록에 나오는 '아차산성'은 지금의 아차산성이 아니라 다른 곳이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아차산성은 발굴조사 결과 해발 203 m 언덕을 감싸고 축조된 둘레 1038 m인 포곡식 대성으로, 내부에서는 6-9세기 신라계 유물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과거에 생각한 것처럼 백제나 고구려에 의해 축조된 것이 아니라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유한 550년대 이후에 새로 축조한 성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신라가 쌓은 성벽 아래 땅 속에 백제시대 성벽이 묻히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했지만, 현재 아차산성 성벽의 석축을 제거한다고 해도 그 아래에 또다른 성벽이 있을 만한 공간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근처에 고구려계 보루가 20여 곳 넘게 있으므로 군사적으로 아차산이 고구려와 백제에 있어서도 역시 중요한 지역이었음은 자명하다. 삼국이 서로 다른 지형을 선호해서 서로 다른 방어시설을 축조하고 이름만 물려받아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지금의 아차산성이 아니라면 도대체 초기 백제 기록상 등장하는 아차산성은 지금의 어디인지 비정한 후보지도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아차산 다른 곳 어딘가라고 추측하는 입장부터 임진강 유역이나 현 북한 치하인 이천군 안협면설도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의 아차산성은 삼국사기 기록상 북한산성 전투 등의 배경이 된 신라의 북한산성일 것이 유력하다고 한다. 2016년 발굴에서 '北, 漢, 山' 등이 새겨진 신라 기와가 나왔기 때문.
3. 기타
<colbgcolor=#344c3c> 아차산성 제 3보루 복원도[4] |
고려 말부터 등장한 '아차산(峨嵯山)'이라는 표기는 '아차(阿且)'에 그럴듯한 뜻을 부여한 것으로, '아(峨)'는 산이 높다, '차(嵯)'는 '우뚝 솟다'라는 뜻이다. 문화재청이 1973년 사적 제234호로 지정·고시할 때 삼국사기를 근거로 원래 명칭에 가까운 '아차산성(阿且山城)'으로 표기하면서 공식 문화재 안내문 등에는 이를 따르고 있다.
4.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아차산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차산성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차산성
- 고고학사전: 아차산성
- 한국고중세사사전: 아차산성
- 문화원형백과: 아차산성
- 문화원형백과: 아차산성
- 문화원형백과: 서울 아차산성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아차산성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아차산성
- 대한민국 구석구석: 아차산성
- 두산백과: 아차산성
5. 사적 제234호
문화재청 소개글 |
서울시 광진구 아차산(해발 285m)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다. 성 전체 길이는 1,125m이며, 성벽의 높이는 평균 10m 정도이다. 동·서·남쪽에 문이 있던 흔적과 물길이 남아있고, 문 앞을 가려 보호하는 곡성이 남아있다. 그 밖에 여러 건물터가 남아있는데, 많은 토기와 기와조각이 수습되었다. 아차산성에는 2가지 슬픈 역사가 전해온다. 하나는 백제의 수도 한산이 고구려에 함락되었을 때 개로왕이 성 아래에서 죽임을 당했으며, 다른 하나는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장군이 죽령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하여 신라군과 싸우다가 이 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것으로,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온달샘이 성안에 있다. 1997년 아차산성 보루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100여점의 토기류와 30여점의 철기류, 100여점의 철제 무기류를 비롯한 수 많은 유물들이 나왔는데, 주로 고구려 계통의 토기들이 보이고 있어 고구려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백제의 옛 도읍지에 있는 아차산성은 누가 쌓았는지에 대해 아직 논란이 있지만 삼국이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으로 그 의의가 있다. |
[1] 사진 출처.[2] 이는 삼국시대의 다른 지명에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가령 경주 남산 신성비 제2비에 나오는 '아차혜촌(阿且兮村)'은 같은 비문의 '아대혜촌(阿大兮村)' 및 삼국사기의 '아동혜현(阿冬兮縣)'과 비교하여 '아단혜촌(阿旦兮村)'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3] 단, 이 기록은 백제본기 책계왕 대 기사에는 있지만, 같은 해 고구려본기 서천왕 대에는 없다. 당시 고구려는 일우와 소발의 모반 사건으로 떠들썩했기에 백제를 위협할 여유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이를 두고 이병도는 당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낙랑이 위치했으므로 이는 불가능하다고 하였고, 미천왕 15년(314)에 대방군을 공격하였으므로 백제 비류왕 11년(314)의 일이 옳은 이치라 보았다. 그 외에 타국의 군사를 고구려의 군사로 착각하였다거나 마한 소국의 군사를 고구려로 소급하여 기록했다는 의견도 있다.[4] 사진 출처.[5] 역사적 기록으로나 고고학적 기록으로나 서울을 비롯한 경기, 충청 지역의 점령 주체가 선명하지 않고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다만 확실히 고구려도 475년에만 등장한 것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