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3:44:49

광개토대왕릉비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 화이트.svg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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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광개토대왕릉비 ·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 광개토대왕(동음이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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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korean.people.com.cn/F201107210900128106700076.jpg
중국이 새단장한 현재 광개토대왕릉비의 모습. 보호각과 유리벽이 설치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의길에 위치한 디지털광개토대왕릉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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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2] ||
파일:Gwanggaeto stele.jpg
명칭 한국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간체 国冈上广开土境平安好太王碑
번체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영어 Gwanggaeto Stele
분류 고묘장
(古墓葬)
시대 고구려
일련번호 1-0168-2-007
주소 중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 태왕릉
吉林省通化市集安市太王陵
등재 1961년
차수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AAAA급

1. 개요2. 명칭3. 발견과 연구
3.1. 왕릉비 부정론3.2. 비문 조작·변조설
4. 내용
4.1. 비문 해석4.2. 광개토대왕릉비 기년 문제4.3. 신묘년 기사(신묘년조) 논쟁
4.3.1. 신묘년조는 전치문인가 대전치문인가 (한중일 학계의 견해 차이)4.3.2. 백제를 격파한 주체에 관한 논의4.3.3. 과장 또는 윤색이다
4.4. 20세기 일본의 접근
5. 여담6. 재현비7.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의 20대 태왕인 장수왕414년(장수왕 3년), 아버지이자 19대 태왕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찬양하고 추모하기 위해 능묘 곁에 세운 비석이다. 고구려 왕실의 연원에 대한 수사,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과 왕릉의 수묘인 규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중국 지린성 퉁거우에 위치한다.

조선 이전 모든 시대 한국사 왕릉 중에서 문무왕릉비와 함께, 왕릉비의 상당부분이 깨지거나 풍화되지 않아서 긴 문장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는 둘 뿐인 능비 중 하나로, 금석문 유물 중에서도 아주 희소가치가 높아 주목받았다.

2. 명칭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 및 소장품 목록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왕릉비', '광개토대왕비'가 사용되고 있으며, 세간에서도 문헌별로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태왕비', '광개토대왕비', '광개토왕릉비', '광개토왕비', '태왕비', '호태왕비'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광개토대왕의 공식 시호를 따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라고 하기도 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호태왕비' 쪽 용례의 빈도가 높다.

당연하겠지만, 당시 고구려인들이 이 비석을 어떻게 불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391년에 제조된 호태왕 방울이나 호우명 그릇 등의 유물에서 당대에도 광개토왕을 호태왕으로 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에 연유한 명칭을 사용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이 밖에 광개토대왕릉비의 명칭은 여러 출처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3. 발견과 연구

파일:1912 광개토대왕릉비 원경 1.jpg
파일:1912 광개토대왕릉비 원경 2.jpg
1912년 일제 조사단의 답사에서 촬영된 광개토대왕릉비 주변의 전경.
비석 옆에 민가가 들어서 있고, 멀리는 태왕릉이 보인다.

고구려 멸망 후 그 존재가 잊혀졌다. 이것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신라를 도와 왜를 격퇴한 사실이 누락된 유력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김부식 사대주의자설에 따라 신라에 불리한 사실이라 김부식이 알면서도 고의로 누락시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김부식 이외에도 고구려 멸망 이래 19세기까지 1,200여년 동안 이게 고구려 비석이란 것을 눈치채고 기록을 남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에서[3] 김부식도 이 사실을 접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광개토왕릉비가 고려 영토 한참 바깥쪽에 있고, 김부식도 고구려 멸망 후 수백 년 뒤 사람이라 김부식이 살던 시대에는 이미 광개토왕릉비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보는 견해가 훨씬 설득력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인 남북국시대에 이 비석을 당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4] 그리고 고려시대조선시대에는 아예 국경 바깥에 위치하게 되어 정체가 잊혔다. 그 시대 사람들도 압록강 기슭, 현대의 지안시 근처에 큰 석비가 있다는 것은 알긴 했지만, 내용은 모르고 그저 옛 금나라 황제의 비 정도로 여겼다. 현지 농민들은 한문을 해석할 지식이 없었고 지식인 계층은 조선인이든 중국인이든 이런 변방까지 올 일이 거의 없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소재한 만주 지역은 청나라 건국 이후 시조의 성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봉금되었으나, 청나라가 열강에 휘둘리던 1876년 봉금이 풀리면서 비석이 중국 금석학계에 알려졌다. 당시 만주로 한족들이 많이 이주했기 때문에 농지 개간 등 과정에서 다소 훼손되었다.
  • 고려 공민왕 19년(1370년), 당시 고려의 장군 이성계원나라 잔존세력 북원동녕부를 정벌하러 갈 때 집안(集安)을 통과했다. 고려사에서는 이곳을 '황성(皇城)'이라 하였고 조선왕조실록에는 '황성'을 '여진 황제의 성'이라고 설명했다.
  • 조선 세종 27년(1445년) 용비어천가에 '성의 북쪽 7리 떨어진 곳에 비가 있고, 또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 2기가 있다.'[5]고 언급됐지만 금나라 유적으로 오인했다.
  • 성종 18년(1487년) 평안감사 성현이 지안[集安]에 가서 지은 망황성교(望皇城郊, 황성 들판을 바라보며)에서 지안을 황성(皇城), 태왕릉을 황제릉(帝陵), 비는 천척비(千尺碑)라고 하고 주변에 강이 흘러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기에 비문을 읽을 수 없다고 하였다.
  • 중종 25년(1530년)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지안을 황성평(금나라 수도), 왕릉을 금나라 황제의 묘로 설명하고 높이가 10장이나 되는 농석이 있다고 하였다.
  • 중종 31년(1536년) 심언광(沈彦光)이 집안 주변에 몰래 거주하는 여진족에게 압록강가에서 퇴거하라고 타이르란 임무를 받고 파견되었던 때에 지은 시가 지봉유설에 전하는데, 그 시에서 집안을 황성(荒城)이라 하고 황제 유적의 큰 비(皇帝遺蹟巨碣)가 있다고 하였다.

비석이 크기 때문에 발견한 사례는 몇 번 있지만, 다들 여진족 관련 비석으로 오인했다. 조선 후기에는 추사 김정희금석문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사람도 있었으나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접근하지 못했다.[6]
파일:광개토대왕릉비 동면과 북면.png
1912년 일제 조사단의 답사에서 촬영된 광개토대왕릉비 동면과 북면의 사진.
파일:광개토대왕릉비 서면 초석.png
광개토대왕릉비 서면 초석의 사진.

본격적인 연구는 20세기 초부터 만주를 정탐하였던 일본 제국이 시작했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정탐꾼이었던 사코우 카게노부(酒匂景信)[7]가 1883년 비문의 탁본을 확보하였고, 이를 토대로 2년 뒤 참모부에서 도본을 내놓았다. 이 자료는 이후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 학자들의 연구자료의 기초가 되었다.

이후 현대에 연구가 심화됨에 따라 비슷한 시기(188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원석 탁본이 중국과 일본에서 여럿 등장했다. 대만의 역사학자 가오밍시(高明士)는 1883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가장 오래 된 탁본을 입수했다고 밝힌 바 있으며, 이들 원석 탁본을 토대로 하술할 쌍구가묵본의 변조 문제 등이 드러나게 되었다.

3.1. 왕릉비 부정론

역사학자 주보돈 등 일부 학계에서는 이 비석이 (능)묘비의 형식을 일부 갖추긴 했지만 묘비로 단정하기 힘든 요소가 많다고 주장했다.
  • (왕릉비라면) 무덤의 주인공일 광개토왕의 신상에 앞서서 시조의 출자와 함께 고구려의 건국 과정을 주로 소개한 점.
  • 이후 2대 유류왕과 3대 대주류왕까지 밝힌 뒤 일반적인 묘비의 관례로는 당연히 들어가야 할 무덤 주인공의 조부(고국원왕), 부(고국양왕) 등 직계 존속의 세계를 전혀 밝히지 않은 점.
  • 비문 안에서 '이에 비를 세워 훈적을 새김으로써 후세에 드러내어 보인다(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고 해서 비석을 세운 목적을 단순히 훈적(勳績) 기록에 무게중심을 둔다고 명시한 점.
  • 비문의 내용이 수묘연호(守墓煙戶)에 비중을 크게 두고 있는 점.
  • 파일:태왕릉과 광개토대왕릉비.jpg
    광개토왕릉을 확정짓기 힘들 정도로 주변 능묘들과 이 비석이 멀리 떨어져 있는 점.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능비/묘비는 무덤 곁에 세트로 같이 세우는 게 일반적인데 그나마 근처에 있는 태왕릉장군총도 거리도 좀 되며 배치 방향도 부자연스럽다.
  • 고구려에서 능비/묘비를 세운 다른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점. 고구려에서는 안악 3호분, 덕흥리 벽화분, 모두루묘의 사례처럼 묵서의 형식을 빌린 묘지(墓誌)의 존재는 확인되지만 묘비를 세운 사례는 이 것 외에는 흔적도 없다. 예를 들어 신라 같은 경우 내용까지 어느 정도 온전하게 남아있는 왕릉비는 문무왕릉비뿐이지만 비석이 훼손되고 남은 파편은 다른 왕릉에서도 상당히 많이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면 흥덕왕릉 문서에 있는 사진처럼 말이다. 즉 신라는 비록 지금은 세월이 흘러서 조금밖에 안 남아있어도 당시에는 대부분 왕릉에 왕릉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 비석 외에는 왕릉비를 세우는 문화가 있었다는 흔적 자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 비문에서 무덤을 뜻하는 산릉(山陵)이란 표현이 보이지만 이것이 개별 능묘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보았다.

3.2. 비문 조작·변조설

1970년대 이후 재일 사학자 이진희[8]가 '사코우 카게노부가 신묘년조 기사를 변조한 탁본을 제작하였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비석 표면에 석회를 도포하였다.'는 조작설(석회도말론)을 주장하여 반향을 일으켰다. 석회를 바른 이유가 글자가 훼손됐기 때문이라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글자를 알아볼 수 없다고 해서 아예 글자를 가려버리는 행위 자체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 육군참모본부 주도로 광개토왕릉비를 훼손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주장은 이후 일본이 직접 개입했다는 물증이 없고,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중국인 민초들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설(아래 서술한 부분 참조)이 나오며 상세한 진위를 알 수 없게 되었으나,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은 사람의 손이 닿았고 몇몇 글자가 변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진희의 석회도말론은 변조 주체를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석회를 바르기 이전에 뜬 원석탁본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는 의의를 지닌다. 실제로 이후 원석탁본들을 바탕으로 수많은 비교연구가 진행되었고, 현재 학계의 통설은 이런 추가 연구로 다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많은 사람의 오해와 다르게 뜨거운 감자인 신묘년조와 관련해서는 한중일 3국의 탁본 비교 연구에서도 별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즉, 하술할 신묘년조 논쟁과 비문 조작 논쟁은 별개의 것이다.
파일:(좌)변조 (우)왕건군,주운태.jpg
쌍구가묵본에서 변조된 문자(좌)와 80년대 주운태가 제작한 탁본의 문자(우)
쌍구가묵본의 경우 한눈에 봐도 인위적으로 윤곽을 뚜렷하게 만들었음이 드러난다. 판독이 불가능한 문자의 경우에는 아예 직사각형 형태의 문양을 넣어 가린 것을 알수 있다. 우측은 있는 그대로 탁본했기 때문에 쌍구가묵본에 비해서 윤곽이 흐리다.

가장 유력한 변조 사례는 영락 10년 기사의 왜만왜궤(倭滿倭潰) 부분이다. '왜만왜궤'는 일본 도쿄대학에서 소장하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의 글자로, 변조되기 전의 원형은 '왜구대궤(倭寇大潰)'가 유력하다. 원래 문구로 추정되는 '왜구대궤'는 '왜구를 크게 궤멸 시켰다” 해석되고, 변조 문구로 추정되는 '왜만왜궤'는 '(성에) 왜가 가득하였고 그 왜가 (성을) 무너뜨렸다'로 해석된다. #

쌍구가묵본은 비문에 종이를 대고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종이 너머로 윤곽을 가늠한 뒤 먹을 칠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모사자의 가치가 개입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므로 쌍구가묵본은 탁본이 아니다.

반면에 탁본은 있는 그대로 비석의 윤곽을 복사하는 기술로 의미불명한 문자나 흠집이 보이는 것이다. [9]이다.

여기에는 일본육군참모부에서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제작법 특성상 연구자 또는 작업자 개인이 자의적으로 수정했을 수도 있으며, 오독으로 의도치 않게 고쳐졌을 수도 있다. 1980년대에 랴오닝 성 박물관장이었던 주운태는 일본이 개입한 행위가 아니라 일반인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왕젠췬(王健群; 왕건군)은 '비석에 발린 석회는 해당 지역 주변에서 탁본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국인 초천부(初天富)・초균덕(初均德) 부자(父子)가 탁본을 더 쉽게 뜨기 위해 울퉁불퉁하거나 갈라진 곳에 채워넣은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 점은 초천부 초균덕 부자가 일개 소시민일뿐 한학이나 금석학 고문자와 아무 일가견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10]

아무리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인이어도, 역사적 배경 지식이 없이는 문구를 자의적으로 고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무엇보다 쌍구가묵본은 탁본으로 인정되지 않고, 파손된 문자를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제작된 문서다. 이는 신묘년조 기사만큼 민감한 부분은 아니지만, 그 내용과 맥락상 왜군의 세력 규모와 신라를 어느 정도 병력으로 잠식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므로, 조작된 네 글자의 가치가 가볍다고 여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각에선 초천부 부자 손으로 개찬되거나 변조되었을 가능성을 낮게 여기고, 남은 가능성을 일본 관동군 소속 종군 고고학자/사학자의 소행으로 본다.[11]

본론으로 들어와서 주운태의 탁본을 왕건군이 석문하여 倭寇大潰로 판독했다. 결국 쌍구가묵이든 혹은 광개토왕릉비의 금석문이든 자료가 어떤 식으로든 날조, 개찬되었다는 게 한중일 삼국 학자들의 결론이다. 다만 신묘년 기사는 현재까지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고, 개찬되지 않았다는 게 중론이다.
파일:다운로드 (66).jpg파일:쌍구가묵본 날조논란.png
주운태가 제작한 탁본을 기반으로 한 왕건군의 석문. 동그라미 쳐진 부분은 기존의 해석과 다른, 새롭게 판독된 문자들이다. 여러 학자들의 판독을 정리한 표.주운태의 탁본과 왕건군의 석문 이후로는 ‘왜구대궤’로 판독함이 일반적이다. [12]

괄호는 다른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된 판독이다. 이로써 쌍구가묵본을 토대로 석문[13]하여 '왜만왜궤'라고 해석한 일본 학계의 주장은 힘을 잃었다. 왜구대궤라고 풀이할 경우 해당 문장은 다음과 같이 달라진다.
(從)新羅城(宮)城倭滿倭潰城(內)□□(盡)□□□安羅人戍兵 (쌍구가묵본)
(從)新羅城(宮)城倭寇大潰城(內)□□(盡)□□□安羅人戍兵 (비교연구본)

왕건군의 석문은 노태돈·이형구[14]·손영종·임세권 등에 의해 지지를 받았지만, 일본 학계에서는[15] 이러한 왕건군의 주장을 무시한 채 아직도 왜만왜궤로 해석하는 기류가 강하다. 이 문구는 신묘년만큼 민감한 부분은 아니지만 신라를 약탈한 왜구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문장이므로, 이 날조된 (혹은 변조된) 문장의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 209p.

이 사건으로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에서 객관적인 실체를 탐구하려는 태도가 재고되었다.

4. 내용

높이 6.39m인 응회암에 정방형 예서로 각자하였는데 암석에 특별히 가공을 가하지 않았다. 각면 외곽에 윤곽선을 긋고 다시 세로선을 그어 행을 구분하였는데, 글자의 크기는 11 - 16cm로 대개는 14 ~ 15cm 정도다. 44행 1,775자 중 150여 자는 훼멸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16]

비석이 물리적으로는 4면이지만 내용상 3부로 나눈다. 제1부는 시조 추모왕의 건국 설화로 시작하여 유류왕, 대주류왕 3대까지의 고구려 왕실의 연원과 광개토대왕 업적에 대한 칭송 등, 제2부는 연대순으로 기록한 광개토대왕의 훈적, 제3부는 그 수나 출신 등 수묘인에 관한 사항과 수묘인 제도와 법의 공표 등으로 구성된다.

비문의 내용상 분명히 광개토대왕의 능 근처에 본 비석을 세웠을 테지만, 인근 왕릉은 전부 도굴된 지 오래라 정작 아직까지 어느 능을 가리키는지를 모른다. 인근에 위치한 태왕릉이나 장군총 중 한 곳이라고 추측하지만, 양쪽 모두 도굴과 훼손으로 피장자의 신원을 알 수 없다.

2부 훈적 부분은 모조리 굴복하지 않거나 쳐들어온 적을 쳐부순 무훈의 열거로 이뤄진 점이 특색이다. 연대순으로 나열하여 ①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한 경우와 ② 군사를 파견하여 벌한 경우로 나누어 확실하게 명시했다. 그리고 각 기사는 모두 토벌 대상 세력이 어떠어떠한 잘못을 저질러 구실을 제공하였으니 이에 벌하였다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성은 3부의 수묘인 부분과 결부하여 전체를 하나의 맥락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광개토왕 이래 수묘인을 정벌한 세력에서 끌어온 속민으로 두도록 했으므로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은 곧 수묘역 제도를 지탱하는 토대였기 때문이다.

4.1. 비문 해석

옛적에 시조(始祖)이신 추모왕(鄒牟王)께서 나라를 세우셨다. (왕께서는) 북부여에서 나오신[17] 천제(天帝)의 아드님이었고 어머니하백(河伯)의 따님이셨다. 알을 깨고 세상에 강림하였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덕(德)이 있었다. ... 수레를 타고 순행하시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께서 나룻가에서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물에 띄우라."라고 하셨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추모왕이) 세속의 왕위를 기꺼워하지 않으니, (하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18] 고명(顧命)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왕업을 계승하였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 하였다. 태왕의 은택이 황천(皇天)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에 떨쳤다. …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19]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414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여주고자 한다. 그 말씀은 아래와 같다.

영락(永樂) 5년(395년)[20] 을미에 왕은 패려(稗麗)[21]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22]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洛) 6~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襄平)으로 가는 길을 지나 동으로 후성(候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해(五備海)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옛부터 속민(屬民)으로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가 신묘년(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396년) 병신에 왕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셨다. 우리 군이 (3자 불명)[23] 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간저리성(幹氐利城), ▨▨성, 각미성(閣彌城)[24], 모로성(牟盧城), 미사성(彌沙城), ▨사조성(▨舍蔦城), 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 ▨리성(▨利城), 잡진성(雜珍城), 오리성(奧利城), 구모성(句牟城),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막▨▨▨▨성(莫▨▨▨▨城), ▨이야라성(▨而耶羅城), 전성(瑑城), 어리성(於利城), 농매성(農賣城), 두노성(豆奴城), 비▨▨리성(沸▨▨利城), 미추성(彌鄒城), 야리성(也利城), 태산한성(太山韓城), 소가성(掃加城), 돈발성(敦拔城), ▨▨성, ▨루매성(▨婁賣城), 산나성(散那城), 나단성(那旦城), 세성(細城), 모루성(牟婁城), 우루성(于婁城), 소회성(蘇灰城), 연루성(燕婁城), 석지리성(析支利城), 암문▨성(巖門▨城), 미성(味城), ▨▨▨▨▨▨▨리성, 취추성(就鄒城), ▨발성(▨拔城), 고모루성(古牟婁城), 윤노성(閏奴城), 관노성(貫奴城), 삼양성(彡穰城), 증발성(曾拔城), 유▨노성(儒▨盧城), 구천성(仇天城), ▨▨▨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 하였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싸웠다. 왕이 위엄을 갖추고 크게 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정예병을 보내 그 수도를 압박하였다. ... 중심을 공격하고 ... 나누어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25]가 곤란하고 급박해져, 남녀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무릎 꿇고, 스스로 이제부터 영구히 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이전에 미혹에 빠져 저지른 허물을 은혜로이 용서하고, 이후 순종해 온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大臣)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년) 무술에 교를 내려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해 식신(息愼)의 땅과 계곡을 살펴보게 하셨다. 이때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막▨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식신은 고구려에) 조공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했다.

영락 9년(399년) 기해에 백잔(百殘)이 맹세를 어기고 와 화통하였다.[26] (이에) 왕이 평양(平穰)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께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국경에 가득 차 성과 해자를 부수었습니다. 노객(奴客)[27]은 (대왕의) 민(民)[28][29]으로서 대왕께 귀의하여 분부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고구려의) 계책을 알리게 했다.

10년(400년) 경자에 왕이 보병기병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왜군이 가득하였지만, 관군이 막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귀순하여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30]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69개의 성을 모두 지키고 ... (이하 내용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 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 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예전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나랏일을 논의한 적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복구(僕句) ... 조공하였다.[31]

14년(404년) 갑진에 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帶方)의 경계를 침범하였다. …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연선(連船)[32] … 이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평양을 거쳐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요해처를 끊고 (적을) 소탕하니, 왜구(倭寇)가 무너져 패배하여 참살한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17년(407년) 정미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고 참살해 모두 소탕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1만여 벌이며, 군수물자와 병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누성(婁城), ▨주성(▨住城), ▨城▨▨▨▨那▨城을 파하였다.

20년(410년) 경술, 동부여(東扶餘)는 예로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 토벌하였다. 군대가 여성(餘城)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에 군대를 돌렸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격하여 깨뜨린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개였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의 출신지와 호수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 민(民)은 국연(國烟)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 동해가(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의 민은 4가가 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가. 자련(訾連)의 2가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부련(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개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1가는 국연.

새로 약취해온 한(韓)과 예(穢)(의 연호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 한(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氐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瑑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彡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看烟). 구모성(勾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오직 멀고 가까운 지역에 사는 구민(舊民)[33]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은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에게만 맡겨서 무덤을 지키고 소제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韓)과 (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예인들이 수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더 데려왔다.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이고 간연(看烟)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이다.

선조(先祖)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어긋나고 섞이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선조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셨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4.2. 광개토대왕릉비 기년 문제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392년 5월에 고국양왕이 죽고, 같은 해 광개토대왕이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광개토대왕은 삼국사기대로라면 392년에 즉위했다. 그러나 능비에는 대왕이 몇 살에 즉위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기년과 육십갑자를 토대로 역산하면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은 신묘년(391)이다. 또 대왕이 사망한 연도를 두고도 두 사료는 서로 말이 다르다.[34] 물론 고구려인들이 산수를 잘못하거나 세는 나이/만 나이의 착오로 오기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이를 두고 어느 쪽 기록이 맞는지 학계에서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또 백제삼서등 한반도계 역사서들을 대거 인용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반의 기록에 한해서는 교차검증이 되기 때문에 더욱 의문스럽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삼국사기와 백제의 실전된 사서인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는 교차검증이 가능하고 연도도 이주갑인상을 하면 서로 부합하지만 이 두 사서는 광개토대왕릉비와 기년에서 1년 차이가 나는데, 칭원법에서 기인한 오차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당대에는 두 가지 원년 계산법이 있었다. 어느 해에 선왕이 죽고 같은 해에 새로운 왕이 즉위했다고 해보자. 새 임금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아야 할까? 아니면 그 해는 선왕의 마지막 통치기간으로 보고 그 이듬해를 새 임금의 원년으로 삼아야 할까? 새 임금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는 것이 즉위년칭원법, 즉위한 이듬해(유년踰年)를 원년으로 삼는 것이 유년칭원법이다. 유교예법에서는 특별한 경우[35]가 아닌 한 유년칭원법을 올바르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고려말부터 조선시대까지 한정된 예법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유년칭원법이 없었던것도 아니고, 실제로 삼국사기에 유년칭원법을 소개하는 김부식의 사론[36]을 싣기도 하였다. 하지만 삼국사기 자체만 놓고 봤을때 유월칭원법으로 기사가 작성되었으며, 또 삼국시대애는 유월칭원법으로 기록하는 것이 대세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기년과 릉비의 기년의 차이는 이에 기반한 오차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고로, 이 기년 차이는 단지 삼국사기의 오기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37]

현대에는 고국양왕이 승하하여 광개토대왕이 왕위를 계승한 게 아니라, 고국양왕이 광개토대왕에게 선위했다는 학설도 주목받는다.[38] 이 경우, 고국양왕이 391년에 광개토대왕에게 왕위를 넘겨줬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선 391년은 고국양왕의 마지막 치세년으로 보고, 392년(유년칭원법)을 광개토왕의 원년이라고 여긴다. 릉비에서는 부왕의 공덕을 높이려고, 이를 소급 적용해서 391년(유월칭원법)을 원년이라고 칭했으며, 고국양왕은 선위한 이듬해인 392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실질적인 원년은 391년이지만 명목상 392년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39]

이러한 사정을 몰랐던 김부식은 유월칭월법으로 392년에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줄로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연호를 1년씩 밀려 썼다는 게 골자다. 이 관점에서 접근하자면, 분명히 릉비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사는 즉위년도에서 사망년도까지 계속 1년 격절이 생기지만, 재위기간을 22년으로 보는데는 서로 부합하는 면이 있는 걸 보면 단순히 삼국사기의 일괄적인 오기가 아닌가 추측된다.

또, 삼국사기와 릉비의 기년 차이 문제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의 기년를 단독표기로 기록한 반면,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육십갑자와 광개토대왕의 기년을 병기하으므로[40]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당대 고구려인들의 계산에 착오가 있었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고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1년씩 당겨야 한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연도부터 사망한 연도까지 계속 1년씩 어긋나기 때문에, 적어도 광개토대왕의 치세기에 한해서는 삼국사기가 1년씩 오류를 내었다.

혹자들은 일본서기와 삼국사기가 연대가 일치하니깐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년을 1년 뒤로 당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신묘년 호태왕이라는 문구가 기록된 청동 방울이 발굴되면서 광개토대왕의 원년은 391년임이 중론이 되었다.[41]그렇다면 삼국사기의 기록이 1년 오차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조법종 교수는 신묘년에 (예를 들자면 신라를 신민으로 만들었다거나 하는) 특별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신묘년의 주어를 고구려라고 해석했던 듯하다. # 하지만 신라와 관련된 증언이나 유물이나 이에 대한 단서가 나오지 않는 이상 지금으로서는 지나친 억측이라고 해야 한다. 광개토대왕의 즉위 원년을 기념해서 만든 방울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조법종 교수의 주장이 맞을 수 있고 또 신묘년의 주어가 고구려일 수도 있지만, 청동방울에 기록된 '신묘년' 문구 하나 가지고는 억측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다만 신묘년(391)이 이미 광개토대왕의 치세기였으므로 삼국사기의 기록이 부정확하니, 1년 당겨와야 하는 것에는 의의를 둘 수 있다.

파일:호태왕:신묘년.jpg 파일:호태왕:신묘년2.jpg

또 능비는 광개토대왕이 승하한 지 3년이 되는 해에 이장되었다고 기록했다. 능비의 기록대로라면 광개토왕은 412년에 사망했고 414년에 능을 이전했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을 3년 동안[42] 상을 치렀다고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사서에는 고구려인들은 부모가 죽었을 때 삼년상을 치렀다고 기록되었다. 삼국사기의 광개토대왕의 승하 기록을 1년 당긴다면 능비에서 능묘를 이장 했다고 명기한 시기와 딱 24개월 차이가 난다. 이를 본다면 능비의 기록이 삼국사기보다 더 정확하고 디테일하므로, 광개토대왕이 승하한 연도를 오산해서 향년을 오기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43][44] 삼국사기에는 10월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었는데, 능묘를 이전한 날짜는 3년 후(만 24개월) 9월 29일이다. [45] 이에 대해 신라사 연구자인 주보돈 교수도 부왕인 광개토대왕을 위해 장수왕이 삼년상을 치뤘으며, 능묘를 이전한 시기를 만 24개월 후인 414년 10월로 보았다. #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광개토태왕은)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39세(412년, 영락 22년)에 세상을 떠나 나라를 버리시었도다. 이후 갑인년(414년, 장수왕 3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능을 옮겨 모셨다.
〈광개토대왕릉비〉
死者,殡在屋内,经三年,择吉日而葬。居父母及夫丧,服皆三年,兄弟三月。初终哭泣,葬则鼓舞作乐以送之.埋讫,取死者生时服玩车马置墓侧,会葬者争取而去.
사람이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3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3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 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 자가 태어났을 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북사》 〈열전〉 고려
死者, 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 會葬者爭取而去.
죽은 자는 집안에서 염을 하고 3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지아비의 상에는 복을 3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을 지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슬피 우는데, 장례를 치를 때에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이를 보낸다. 이에 이르러 시신을 묻는데 모두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의 옷이나 수레 말 등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지내는 데 모였던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수서》 〈열전〉 고려
비문을 포함한 다른 기록을 종합할 때 장수왕은 즉위 당시 나이가 18세에 지나지 않아 왕으로서의 본격적인 권위를 발휘하기 대단히 힘들었다고 판단되다. 이런 그가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이 비를 세울 당시에는 21세였다. 동양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시스템에서는 선왕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이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친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본다면 장수왕은 아버지가 죽고 즉위한 바로 그때 실질적인 왕이 아니라 이 비를 세우는 그 시점에서 진정한 고구려왕으로 등극했다고 할 수 있다.
廣開土王碑, 父王의 運柩 앞에서 靑年王이 보낸 경고, 김태식[46] #

주보돈 교수 또한 장수왕이 부왕인 광개토왕이 죽고 삼년상을 치뤘다고 말했다. #

국책사업으로 편찬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석도 이러하다
능비는 광개토대왕이 죽은 뒤 만 2년째 되는 414년, 즉 장수왕 3년 9월에 대왕의 능과 함께 건립되었다.[4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
따라서 결론은 왕이 사망한 년도는 능비에 기록된 412년이 맞고, 생년은 세는 나이로 39살에 죽었다고 하니, 374년이다. 삼국사기에서 기록된 10월에 왕이 죽었다는 기사는 412년을 413년으로 오기 한것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사서의 고구려인들의 장례 풍습이 뒷받침한다. 즉위 원년은 1차사료인 릉비가 증언하는 391년이며, 다른 일차사료인 청동 방울에서도 교차 확인 가능하다. 삼국사기가 1년씩 밀려 써서 생몰년도와 치세기가 1년씩 어긋난다는 결론은 학계에서 정설로 통한다.

4.3. 신묘년 기사(신묘년조) 논쟁

파일: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조 해석.png

비문 1775자 중 이른바 '신묘년 기사' 32자를 두고 지난 1세기 동안 학자들이 집중적으로 달려들었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48]破百殘□[49]□□羅 以爲臣民. ,(탁본),
백잔[50]과 신라는 과거에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신묘년(영락 원년)에 왜가 와서 □[51]를 건너 백잔□□□[52][53]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일본은 당대부터 이 구절을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지는 일본서기의 삼한정벌 기록에 대한 증거로 쓰고자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가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해석을 꾸준히 밀었지만, 한국이나 북한 학계는 이를 부정해 왔다. 예컨대 정인보는 이 비석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찬양·미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왕의 훈적을 나열한 비에서 유독 고구려에 불리한 기사를 실을 까닭이 없다.'며 의도적인 생략이 있는 것으로 보고, 오히려 주어를 고구려에 두어 '왜가 신묘년에 와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토벌하였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맥락상 왜가 오자 박살내고 백제와 신라를 좀 더 낮은 예속 단계였던 속민에서 종속국 수준인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 듯하다.

渡□破를 渡海破[54]라고 해석할 경우, 고구려 주어설의 근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55]로 교차검증된다.
冬十月, 攻䧟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撃二十日, 乃拔.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어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관미성이 어디로 비정되는가는 차후의 문제이다. 하지만 최소한 관미성은 사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요새로, 수군을 이용하여 함락할 수밖에 없는 곳일 것이다. 이 기록 이외에는 삼국사기, 일본서기와 중국 사서를 통틀어 당시 왜국이 4세기 후반 (391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복속시켰음을 증언하는 사료는 없다. 즉, 시기적으로도 문맥상으로도 일치하는 기사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묘년에 실시한 백제 원정밖에 들어맞는 게 없다. 391년은 광개토대왕 즉위 원년이다. 아들 장수왕으로서는 부왕의 즉위 원년에 실행한 군사 원정을 공덕비에서 빼놓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의 백제를 격파한 기록과 신묘년의 도해파 기록은 동일한 사건일 터이니, 왜국이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도해파 (渡海破) 라고 해놓고, 딸랑 성 하나 공략했는데 이걸 전치문까지 기록하며 남길 껀덕지가 되겠냐고 반문하겠지만, 관미성은 백제에게 아주 중요한 요충지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면 백제 측에서 이 성을 빼앗긴 이후로 다시 수복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운 기록이 있다.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관미성은 우리 북방 끝의 요새이다. 오늘은 고구려의 가지고 있는 바가 되었다. 이는 과인의 슬픔이 아플 정도인 바이니, 경이 마땅히 마음을 쓰는 바로 부끄러움을 씻도록 하라."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2년(393년) 8월

애초에 이러한 학설은 김석형 등에 의해 릉비와 삼국사기의 격절문제를 기초로 하여, 관미성 함락 기사는 391년의 사건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었으며, 후술할 광개토대왕릉비의 일본측 최고 권위자라고 하는 다케다 유키오 도쿄대 동양사학과 학장에 의해서도 제기된 주장이다. [56]
즉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백제본기의 동일 기사를 비교해봐도 고구려측 기록이 더욱 자세하게 나왔으므로, 고구려측 전승일 가능성이 크며, 백제본기의 기록은 고구려 기록을 바탕으로 축약한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술 했던 광개토대왕릉비 기년 문제를 토대로 복원된 광개토왕 치세기인 영락원년 391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이 밖에도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백제를 수군으로 공격한 기록은 또 등장한다. 396년의 기사에 한강(아리수)를 건너서 위례성을 포위한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하면 개마기병만 떠올리지만 수군도 개마기병 만큼 주력부대 였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396년에 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이 밖에도 ‘파백잔□‘ (破百殘□)에서의 □에 해당하는 결자를 추론하자면, 東이라는 글자가 유력하다. 이 학설은 릉비 앞에서 탁본을 업으로 삼던 중국인 왕건군의 필사본에서 비롯된 학설이다. 왕건군이 초씨 부자에게 얻은 초기 필사본이 위조가 아니라면 신묘년의 비석의 기사가 東이 맞고, 渡□破 百殘東□가 되고 신묘년의 기사는 이렇게 재해석할 수 있다. 다만 소설가 김진명이 주장하길, 왕건군의 저서에 수록된 광개토대왕릉비 앞에서 탁본 장사를 하던 초균덕 부자가 필사한 문서로,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와 도쿄대 교수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또한 김진명이 주장한 신묘년 기사에서 파손된 문자를 東으로 해석하며, 역사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근거가 명확하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57]

그러나 다케다 유키오 또한 다른 일본사학자들과 다르지 않게 대전치문설을 지지하는 학자로, 비문에서 '왜가 백제를 도해파하여, 동쪽에서는 신라를 ○했다.'고 해석한다.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에 의하면, 초씨 부자가 만든 저본은 원래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광개토대왕릉비에 동물의 분변을 바르고 불지르기 전에 훼손될 경우를 대비하여 자신들이 보이는 대로 필사했다고 밝혔다. 이 저본은 초씨가 죽고 조카 딸에게 맡겨졌으며 왕건군은 저서를 발간할때 부록으로 첨부한 모양이다. 그의 수기에 따르면 김진명이 이를 발견하여 왕건군의 저서를 갖고 도쿄대 동양사학과 학장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 교수는 다케다 유키오인 것 같다. 다케다 유키오는 이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후로 東이라고 해석한다고 밝혔지만 진위는 알수없다. 다만 다케다 유키오[58][59]가 東으로 판독하는 것은 맞다. 안동대 임세권 교수[60]가 발간한 논문에서도 초균덕 부자의 필사본[61]을 언급하며 東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62]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참고된 논문 <廣開土王碑의 硏究 -청명본 원석탁본의 검토->는 1997년에 발간되었단 것이다. 김진명이 최초 소설에서 첨부한 사진은 1995년에 출판된 가즈오의 나라라는 책이므로 임세권 교수가 이것을 보고 논문을 집필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김진명이 첨부한 사진의 진위여부를 판단해줄 만한 자료는 아니다. 〈廣開土王碑의 硏究 -청명본 원석탁본의 검토〉 참조된 논문 273,274쪽 참고 사실 이것도 어폐가 있는게, 임세권 교수는 한학에도 조예가 깊고, 역사학을 전문적으로 배운 학자이다. 사료비판과 자신의 주장의 근거가 될 자료들을 검토하고 또 검토해서 학설을 제기해야하는 학자가 김진명의 소설을 보고 논문을 집필 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무리인 주장이긴 하다. 그러므로 임세권 교수는 다른 자료들을 근거하여 이 논지를 전개 한것으로 보인다. 북한 사학자 손영종도 2001년에 발간한 책에서 임세권 교수와 같은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사실 백잔의 다음 결자를 東으로 파악한 것은 북한학계가 제일 처음 제기했고, 북한학자 손영종이 꽤 오래 전부터 주장한 내용이다. 즉, 초천부 부자의 수초본에서는 백잔의 다음 문자로 東이라고 적혔다는 것이다. 임세권 교수의 논문 274쪽에 첨부된 내용인데 白崎昭一郞는 백잔의 다음 결자는 更로 보았다.

일본 학계에서는 갱토신라(更討新羅)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菅・三宅을 비롯하여[63] 여럿 있는데 내용은 '신라를 같이 치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백제와 연합하여 공격했거나 백제를 치는 김에 신라도 공격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更와 東는 외관상 비슷하다. 이것이 능비가 훼손되기 전의 탁본을 기초로 한 해석이라면 두 글자는 모양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단순히 초천주 초균덕 부자의 수초본에 東자가 있다더라에 입각한 결자 예측이 아니라, 실제로 東의 7, 8획에 해당하는 사선과 日자의 형태를 근거로 東나 更로 판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높다. 뒤에 나오는 기사들의 문맥을 파악 했을때, 백잔의 다음 결자가 更라면 신라를 같이 (협공하여) 치다라고 해석하는게, 문맥상 어그러짐이 없다고 본다. [64]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의 토론에서 일본 측 사학자로 참여한 하마다 고사쿠도 다케다 유키오의 연구에 주목하며 일본 사학계의 트렌드는 백제의 다음 결자는 東으로 읽는 것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 582쪽 참고.

일본 학계에서는 이렇게 해석한다고 하마다 고사쿠가 발언하였다.
왜가 백제를 무찌르고 동쪽으로 가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그러나 왜가 하필 본국에서 먼 백제를 왜 먼저 격파하고 동쪽으로 진군해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는지 동선 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어쨋든 백잔의 다음 결자를 동쪽으로 파악한다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東□新羅以爲臣民.
왜국이 신묘년에 건너왔기 (신라를 침략해왔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 (왜와 화통한) 백제를 격파하고, 군사를 동쪽으로 보내 신라를 신민[65][66]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한다.

실제로 백제의 왜국과의 공동전선을 고구려가 탐탁치 않아 했다는 근거로 광개토대왕릉비의 399년의 기사를 예시로 들 수 있다.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영락 9년 기해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차 성지(城池)를 부수었습니다. 노객(신하, 즉 신라 내물왕)은 (그 신분이 대왕의) 민(民: 백성)이니 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와서 그 충성심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

이를 미루어봐선 396년에 이미 백제의 아신왕은 비석의 기사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앞에서 스스로 노객이 되겠다고 천명했다. [67] 이때, 다시는 왜와의 공동전선을 구축해 신라와 고구려를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모양이지만, 후에 약조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고 신라를 침략하자 광개토대왕이 분노했으며 신라를 구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신묘년을 전치문으로 상정하고 이 병신년의 기사를 해석한다면, 애초에 고구려의 백제 원정 명분은 왜와 결탁한 백제를 정벌함에 있고, 화통이라는 단어를 보면 백제 왜 양국이 수직적인 관계를 내포하기 보단, 수평적인 관계임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백제가 문제의 신묘년 기사에 주동세력이 되고 왜는 단지 지원세력이라고 해석할수도 있다.

비문의 기사대로라면 391년에 고구려는 신라를 신민으로 여겼다. 삼국사기 392년 1월 신라본기의 기사로 교차검증이 된다.
三十七年, 春正月, 髙句麗遣使. 王以髙句麗強盛, 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37년(392)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냈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했으므로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 [68]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즉 요약하자면,
옛부터 백제와 신라는 우리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러나 391년 신묘년에 (백제의 요청으로) 왜국이 건너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서 백제를 격파하고 그 후에 군사를 (동쪽으로) 보내 신라를 신민으로 보호했다. 396년에는 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백제 또한 후에 신민으로 삼았다는 뜻을 내포함.)

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396년에 아신왕이 직접 항복하여 스스로 노객이 되겠다고 선언한 광개토대왕릉비의 기사와도 일맥상통하며 문맥도 어그러짐이 없다. 즉 신묘년 이전에는 조공만 바치는 속민[69][70]의 관계였지만 396년을 기점으로 백제 국왕이 직접 항복하고 노객이라고 선언했으므로, 최소한 고구려 측에서는 예속관계가 강화되었다고 여겼을 수 있다.

그러나 하마다 코사쿠 이래 이성시를 거친 ‘대’전치문설이 알려지면서 현재는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견해가 통설이다. 앞서 소개한 이진희의 비문조작설은 근거가 부실하고, 위 문단에서처럼 문장의 주체를 고구려로 보는 견해도 한문에서 주어가 지나치게 생략한 것이 되어 과하게 어색한 해석을 이끌어낸다고 하여 신뢰받지도 못한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주어가 생략된 부분은 비문 도처에서 발견된다. 예시를 들자면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백제와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쳐왔다.[71]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영락 10년 경자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에서도 주어가 생략되었다. 더구나 강력한 고구려가 남하하고 있는 시점에서 왜가 신라뿐만 아니라 동맹 관계였던 백제까지 공격해서 신민으로 삼는 것은 삼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짓이므로, 전략적으로 볼 때도 왜가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은 납득되지 않는다. 이해 이후에도 백제와 왜는 멀쩡히 협력관계를 잘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강조하기 위해 왜의 행적을 과장했다는 전치문설도 다음 기사에서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흐름이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 있다. 따라서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잔을 깨뜨렸다는 기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주된 쟁점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백제 아신왕이 스스로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칭하며 광개토대왕 앞에 무릎을 꿇어 약조하는 기사, 또 그후에 신라 내물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奴客을 자청하며 왜군으로부터 방위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기사가 연달아 나오고 있다. 상술한 고구려 주체설 해석이 맞다면 奴客이라는 단어가 고구려에선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실제로 아신왕과 내물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을 자처했든 고구려가 과장과 윤색을 덧붙였든간에 奴客이라는 단어를 프로파간다로 사용해 신묘년조의 신민이라는 단어를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선택해 백제 신라가 노객을 자청하고 그들을 굴복 시켰다는 해석이 된다면 고구려 주체설이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학계에서 노객을 당대에 사용하던 신하[72]라는 뜻으로 쓰인 단어라고 의역하는데, 백제와 신라를 신민(臣民)이라고 언급한 신묘년조 해석과도 썩 어울리는 분석이다. 고구려에서는 당대에 신하가 왕에게 고할 때 자신을 노객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로, 이 노객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부각시켰다면 왜국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은 모순이다. 광개토대왕릉비 원문에 나온 속민과 신민의 용례를 조사하자면, 속민은 형식적으로 조공을 바치는 상대국의 왕이나 백성들을 뜻하고, 신민은 신하로써 복종하여 상대국 왕 스스로가 직접 대왕께 조공을 바치거나 항복하여 정복한 주체에 마음으로 감화하여 적극적으로 협조 공조 복종하는 백성으로 해석할수 있는 것이다. 백제의 아신왕과 신라의 내물왕은 그들 스스로가 대왕을 직접 알현하고 아신왕의 경우에는 노객이 되겠다고 스스로 선언 했고, 내물왕 또한 사신을 보내어 대왕의 노객으로써 왕께 귀의한다고 말하였으며, 후에는 직접 대왕을 알현하고 조공까지 바쳤다. 반면에 속민은 소극적으로 복종하고 형식적으로나마 정복한 주체를 따르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민은 속민보다 예속성이 더 강하며 신민의 정의는 단순히 조공을 바치는 속민의 관계에서 +@로 해석 할수 있다. 특히 신라와 백제의 왕들이 대왕을 스스로 알현하는 모습을 상세히 기록한걸 봐서는, 신묘년조 논란을 떠나서[73] 신민은 말 그대로 대왕에게 절대 복종하며 대왕을 알현하고 섬기는 신하나 백성(지금으로 치자면 소시민)으로 살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단순히 조공을 바치는 속민의 관계보다는 누가봐도 종속성이 강하다.

실례로 삼국사기에서 제일 신묘년에 제일 근접한 왜국의 신라 침공 기사(393년)를 보면, 왜국이 침공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신라에게 패퇴당하는 모습이 기록되었으므로 왜국이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사는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만약 진짜로 393년에 왜국이 침입했다면 어떻게 신민으로 만든지 1~2년 만에 신라에 통제력을 잃고 재차 침공했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금적기주심입(今賊弃舟深入), 즉 배를 버리고 쳐들어왔다고 기록되었는데, 진짜 신민으로 삼았다면 배를 타고 재침공을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들이 누누히 말하던 천황의 직할지 임나와 신라는 육지로 연결되는데 무엇하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침공하겠는가. 그리고 백제와 신라를 스스로 복종시키고[74] 신하로 삼았는데 왜 저항하고 있는가. 게다가 단순 교전을 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패주까지 한다.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 "今賊弃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歩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38년(393) 여름 5월에 왜인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 하고 말하고 이내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 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4.3.1. 신묘년조는 전치문인가 대전치문인가 (한중일 학계의 견해 차이)

일본측 신묘년 해석에 대한 한국학계의 대표적인 반론은 대체적으로 이러하다
다만 요즘 학계에서 대체로 인정되는 것은 신묘년 기사가 광개토대왕의 '王躬率', 왕의 親征 이유를 설명하는 前置文이거나, 혹은 영락 6년 백제 토벌의 '전치문'일 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원정 기사의 導論(명분)이 되는 '대전치문'이며, 왜가 강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를 수 있으나 고구려는 왜를 트릭스타로 사용하였다는 등의 견해이다. 광개토왕릉비의 왜는 왜구일 뿐이나 과장되게 표현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이 견해들은 비문을 통해 (왜국의) 남한경영론 (임나경영설)을 주장할수 없다는 점에는 동의했다고 보이나, 고구려가 주목할 만한 왜의 실체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기사가 원정의 '전치문'이라면 고구려가 - 자신에게 적대행위를 한 왜가 아니라- 백제를 공격한 이유라고 보기에 합당치 못하다. 이 기사가 모든 남정의 '대전치문'이라고 한다면 그 바로 뒤에 백제를 공격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변명할 수 있어도, 이 기사가 어째서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영락 6년조 뒤에 이어 나오는 8년조는 숙신(息愼)에 대한 것으로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문의 구조상으로는 신묘년 기사를 '王躬率' 형태를 띠는 영락 6년 백제 討置文의 '전치문'으로만 보는 것이 가장 논리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문장의 뜻은 백제와 신라가 옛날부터 속민이었으나 신묘년에 왜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여 백제가 여기서 이탈하고 신라만이 그대로 신민이 되었다는 내용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辛卯年 기사의 原文을 다시 살펴보자.

B.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가장 문제되는 것은 '百殘□□新羅'가 왜의 신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문제이다. 혹은 사실 여부를 떠나 고구려가 그렇게 인정했는가의 문제도 포함된다. 그러나 비문 자체의 용례만 분석해 볼 때, 여기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면 영락 6년조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할 때 왜의 면모가 보여야 하나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백제가 항복하는 장면에서 그 타협을 왜의 총독(總督)이 아닌 백제왕이 주도하고 있으므로, 고구려가 백제를 왜의 신민이라고 인정할 여지가 없다.

둘째로 영락 9년조로 보아 왜는 백잔과 화통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이는 영락 6년에 백제왕이 고구려의 노객이 되기로 맹서한 이후의 상황이기는 하나, 만일 그 전에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거나 또는 고구려가 그렇게 인정하였다면 비문의 이 대목에서도 그 위세의 차이가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화통'이란 대등한 상대 사이의 협약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셋째로 비문에 나오는 民의 개념에는 오로지 고구려의 民만 있을 뿐이고, 다른 나라의 백성을 '民'으로 표기한 사례가 없다는 점이다. 백제왕조차도 노객일 뿐인데 왜국의 民을 奴가 아닌 신민으로 표기하였을 리가 없다. '民'의 용례는 비문에 모두 11회 나오는데, 그 중에 신민 외에 고구려의 民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는 것은 영락 9년조의 '以奴客爲民'[75]뿐이나, 그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또한 사실의 문제로서 접근해 볼 때, 백제와 신라가 옛날부터 조공해왔다는 것은 허구이다. (하략)
제1차한일역사공동연구회 4세기 한일관계사 19-21쪽, 김태식 #
그가 제기하는 문제를 이해하려면 광개토왕릉비의 정복전쟁 부문에 대한 구조를 알아야 한다. 정복전쟁 부분의 첫 번째로 등장하는 기사는 395년의 비려(稗麗) 정벌 기사이다. 그 다음에 391년 신묘년으로 돌아와 문제의 기사를 서술하는 구조이다. 즉, 신묘년 391년의 기사는 연대순서에서 열외된 기사임을 알 수 있다.그렇기 때문에 중국인 고구려사 연구자 왕건군은 정확한 의미에서 신묘년 기사는 없고, 후에 등장하는 남정 기사의 명분과 프로파간다를 기록한 이른바 '전치문'으로 봤다.

391년의 기사는 396년의 백제정벌 기사의 일부에 불과 할 뿐이다라는 뜻이다. 하술하겠지만, 한국학계에서는 후술한 대전치문설 보다 왕건군을 위시하는 중국학계의 전치문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이 설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가야사를 대표하는 두 전문가인 김태식, 이영식 교수등이 있다. 그러나 왕건군을 대표로하는 전치문설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후술한다.

한편 하마다 고사쿠를 위시한 일본학계[76]에서는 더 나아가 이후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사들을 수식하는 '대전치문'[77]으로 해석하였다.
(하마다는) 신묘년조가 6년 병신년조뿐만 아니라, 그 후의 9, 10, 14, 17년에 걸치는 '대전치문'으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6년 병신년조 앞에 기록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게다가 신묘년조의 내용은 백제정토, 신라구원, 왜구궤멸, 패전에 이르는 대전제로서 설정된 허구이기 때문에, 광개토대왕비에 기초하여 해석된 '일본의 한반도 남부 경영'을 전제로 하여 고대한일관계를 논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학계에서의 광개토왕비 연구의 성과와 과제, 이노우에 나오키 #

이러한 논리들이 도입된 이후에 “고구려 왕의 공덕을 찬양하는 릉비에 왜 왜구가 주체가 되어 백제를 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느냐”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된 정인보의 고구려 주체설에 대한 해석은 지지를 잃었다. 즉 신묘년은 그저 전치문이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봤을때, 사건의 종결을 함의하는 문장이 아니며 [78]이 아닌 “부속성분”[79]이므로 문제의 기사의 주체를 왜로 해석해도 위화감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릉비의 원문은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강하므로, 왜의 세력을 과장했으며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서 사용 될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태식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6년조 백제 정벌 직후에 등장하는 8년조 숙신 원정은 일본이 신묘년 대전치문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이용하는 왜에 대한 내용, 혹은 백제와 신라, 가야 등 한반도 남부의 정세와 아무 관련이 없으므로 '대전치문'설에 따라 해석하려고 하면 연속성이 깨진다며, 광개토대왕 원년부터 17년 정미년[80]까지 수식한다는 '대전치문설'에 문제를 제기했다. 오직 6년 백제 원정의 명분만 프로파간다로 활용했다는 것이다.[81] 또 399년은 400년의 신라 구원을 실행하게 되는 대의명분이며, 391년은 396년의 백제 정벌에 대한 명분으로 일대일 관계로 상응 된다. 일본이 주장하는 대전치문설처럼 복수의 기사를 수식한 전치문이 전무 하다는 것이다. 그 밖의 기사들은 전부 [82]전쟁을 하게 되는 구실을 상대국이 제공하여서 (고구려 백성들을 포로로 삼음, 무도하게도 고구려의 영토를 침입, 조공을 바치는 속민 관계 였지만 바치지 않음) 얻어 맞을만 했다고 합리화 하는 것이다. 만약 391년조가 전치문이 아니라 대전치문이라면, 399년의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 읇조리는 내용의 전치문과 400년 본문의 관계, 또한 404년의 왜구가 무도하게도 고구려를 침략 했다고 적시하고 있는 전쟁명분과 중복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전치문설'이 아닌 '전치문설'이 합당하고[83], 이 전치문은 6년 병신년의 백제 원정만 수식하고 있으므로, 신묘년의 도해파 주체는 왜와는 아무 관련 없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396년의 기사 직후는 신묘년 전치문의 수식이 완결 상태이므로 전치문의 효력이 상실했다. 따라서 398년 숙신 정벌부터 시작해서 광개토왕릉비의 정벌 마지막 기사까지는 신묘년과 아무 관련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되면 또 신묘년의 주체는 왜국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이 생기고, 그것을 고구려가 실시한 원정 혹은 신라 구원으로 볼수 있는 것이다. [84]

대전치문설이 옳다면 신묘년에 왜구가 백제 신라를 굴복 시키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은 이해할수 있지만, 정작 그 직후에 나오는 기사에서는 왜 애꿎은 백제만 뚜들기고 왜구 내지 왜군은 정작 기사에서 드라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즉, 김태식 교수가 주장하는 전치문설이 왕건군을 위시한 중국학계의 해석의 결정적 차이는 김태식 교수는 신묘년 전치문은 백제 정토의 명분화를 위한 문장이며, 백제가 주도적으로 움직였다고 해석하지만, 왕건군은 신묘년 문구의 주도세력은 왜로 본다는 것이다. 다만 왕건군은 북큐슈 일대를 기반에 둔 해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국내에서 와전된것과는 다르게 임나일본부설을 재고의 가치도 없는 학설이라고 말했다는데에 한국학계와 견해가 같다.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신묘년 기사에서 고구려가 부각하려는 주동세력은 왜가 아닌 백제이고, 왜는 단순히 백제의 지원 세력이다. 신묘년에 왜가 백제나 신라를 (일본 측이 주장하는 대로) 신민으로 삼았거나 백제를 격파하고 군사를 동쪽으로 돌려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면, 직후의 병신년 기사에는 백제가 아니라 왜를 공격해서 고구려 중심 질서에서 백제를 이탈시킨 왜에게 응징하는 내용이 나와야만 의미가 통한다. 설사 고구려가 (왜가 아닌) 백제를 공격했다고 해도 백제를 신민 혹은 복종시킨 왜가 어떻게든 등장해야 하는데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85]

신묘년조에서 파손된 문자가 갱토신라(更討新羅)라고 해석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왜와 백제가 같이 신라를 침략했다고 해석해도, 398년 숙신 정벌의 기사 문제로 396년 이후의 기사들은 신묘년/병신년의 맥락과 닿있지 않는다. 그래서 신묘년은 병신년의 기사만 수식하는 '전치문'이고 병신년에 나오는 정벌의 대상은 '오직' 백제이므로, 이 경우에도 문제의 신묘년 기사에서의 주동세력은 백제이고 391년 문제의 신묘년 문구에서 등장하는 왜의 면모는 단지 백제의 지원세력이라고 해석한다. 상식적으로 전치문을 기록 할 정도로 병신년 기사는 자랑하고 싶은 훈적이며 릉비의 '하이라이트'이다. 그런데 전치문의 주어는 왜로 해석 해놓고선 정작 병신년에는 왜의 세력이 일절 나오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오기나 누락이라고 할 수 없다. 병신년에 백제에 왜의 세력이 가세하고 있었다고 하면, 고구려는 막강한 적들을 상대로 굴복 시키고, 고구려 질서에서 이탈한 백제를 훈도 시킨 존재로 인식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합당한 해석은 앞서 언급된 고구려 주체설이거나, 391년의 주동 세력은 백제이고 왜가 그 백제 세력에 합류하는 식으로 해석 할수 밖에 없다.

또한 그가 언급했듯이 능비에는 민(民)을 포함한 다양한 단어들이 등장한다. 신민(臣民), 속민(屬民), 구민(舊民), 신민(新民) , 민(民) 등 인데, 각각 속민은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치는 국가와 그 국가의 백성,구민은 원래의 고구려 백성들, 신민(新民)[86]은 정복 사업에서 새로 얻은 (약취한) 백성, 민(民)은 내물왕이 자신의 신분을 대왕의 백성이라고 규정했다. 즉, 전부 고구려를 주체로 해석해야 의미가 통한다. 고로 같은 '민(民)'자가 들어가는 신민(臣民)은 그 용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후에 제2차 한일공동역사구회에 참가한 조법종 교수 또한 신묘년 호태왕 방울이 발굴된 이후로 신묘년에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 고구려가 되어야 하지 않냐고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일부 재야학자들은 한국 주류 사학계가 일본의 신묘년 대전치문설을 비판 없이 모두 수용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일본의 해석에 문맥이나 내용상을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개찬설을 주장하다가 일부 보기 좋게 논파 당하였으니, 확실한 증거나 연구가 진전될 때까지 신중하게 접근한다는 느낌이다.

4.3.2. 백제를 격파한 주체에 관한 논의

한국학계가 백제를 격파한 주체가 고구려라고 보는 반면, 일본 학계는 당시에 실제로 왜가 강성하여 백제, 신라 등을 깨뜨릴 만했다고 주장한다. 대개 전남 광주시에 있는 장고분이나 백강 전투에 동원된 일본 수군의 존재 등이 근거로 제시되며, 송서, 수서의 기록 및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의 조공 기사・볼모 기사 등이 쓰이곤 한다. 칠지도도 백제가 왜국에 '조공'한 공물로 해석한다. 신라가 볼모를 보낸 것은 미사흔 한 명이 확인된다.

신라가 미사흔을 일본에 보낸 것을 살펴보면, 당시 신라 임금 입장에서 미사흔은 숙청하는 것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여기서 일본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삼국유사의 391년 기록인데, 여기에선 삼국사기의 논조와 달리 "미사흔이 391년에 왜국에 인질로 잡혔다"고 서술되었다. 즉, 신묘년의 신민의 기사가 이를 두고 지칭한 것이라면 일본 측 해석이 맞다. 또 신묘년 ‘도해파 백잔’의 해석을 두고선 일본서기의 392년 (이주갑인상을 고려해 120년을 더한 년도) “진사왕이 무례하게 굴어서 (왜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그를 꾸짖자, 백제인들이 왕을 죽여 사죄했다”는 기사를 두고, 이것을 지칭한게 아니냐는 해석 또한 있다. 물론 액면 그대로는 말도 안되는 윤색이지만, 어느 정도 사실을 투영한 기사라면, 재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예를 들면 아신왕이 친왜계 세력들의 지지를 얻어, 왕위를 찬탈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추측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한다고 해도 릉비의 ‘도해파’는 말 그대로 두 세력 간 물리적 ‘충돌’을 함의하는 것이므로, 고구려가 정말로 백제에서 일어난 왕위 찬탈을 군사적 충돌로 인지했느냐는 별개의 문제로 신빙성을 따져봐야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원래 아신왕에게 돌아가야 할 왕위가 진사왕이 찬탈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므로, 나중에 아신왕이 숙부인 진사왕의 왕위를 재찬탈했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는 아신왕 때 태자 전지를 왜에 인질로 보낸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 인물이 왜에 갔으나, 그 성격이 실제 인질이 아니고 일종의 외교관 같은 역할을 했으리라는 견해가 정설이다[87][88]. 특히 전지왕이 왜로 간 시점에 정작 '백제'와 '왜'라는 두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는 백제삼서의 기록과 "내조하였다."라는 일본 쪽 기록만 있을 뿐, 인질을 보냈다는 언급이 없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도 '인질'이라는 표현은 없고 한참 후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만 나올 뿐이다.[89]

또한 일본어에서 인질에 해당하는 질의 훈독은 무카하리(人力)라고 읽는데, 그 뜻은 왕의 대리인이라는 뜻이므로 일본에서 당대 받아들여지는 인질의 개념은 인신공납의 개념이 아님을 알수 있다.

백제와 왜의 관계도 왜가 백제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일본 극우식 망상이나 거꾸로 백제가 왜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식의 극단적 망상과는 달리, 군사·문화적 혈맹 관계로 보는 게 오늘날 학계의 정설이다. 어느 한쪽의 국력이 약해지고 강해지고에 따라서 서로의 발언권이 세지고 약해지고가 있었을 뿐이다. 일본 학계만 하더라도 예전처럼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식의 학설을 밀어붙이기보다는 한반도 남부에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는 정도로 가는 추세이다.[90]

한편 중국 사서 쪽의 기사들, 특히 송서 왜 5왕 기사 등은 대체로 왜국에서 나온 일방적 주장인 경우가 많아 다른 사료와의 교차검증이 더욱 필요하다. 수서만 해도 신라를 고구려 패잔병이 세웠다드니 신라 왕이 백제 출신이라는니 하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서술되었다. 즉, 수서나 기타 다른 중국 사료들에 나오는 기록들을 전부 다 사실로서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수서 왜국전과 송서 왜국전에 분명 일본 측에 유리한 내용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송서에는 433년부터 왜국의 왜5왕이라는 자들이 중국을 상대로 교류할 때 '왜·백제·임나·가라·신라·진한·모한을 지배하는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을 자칭하였다고 나온다.[91]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아니면 착각인지 허세인지는 백제나 신라에 그러한 기록이 없으니 직접적으로 알 수 없으나, 적어도 5세기 초에 왜국 스스로가 한반도를 속국으로 여겼음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저 관작명은 그냥 왜국의 허세다. 위의 관작에서 중국은 백제를 제외하고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의 통치를 인정하는 관작을 내려주었다. 어째서 백제 혼자 빠졌을까? 게다가 처음에 자칭하였고 계속 거부 당하다가 인가받은 작위다. 자칭하는 작위인데도 정작 자신은 백제왕이 하사받은 작위인 진동대장군 보다 낮은 관직을 내려 줄 것을 요청했다.

게다가 일본서기에서 임나의 용례를 살펴보면 일관되게 임나는 가야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당대 일본에서는 한국에서 사용하는 임나의 용례와 다르게 와전되어 받아들여진 것이다. 따라서 임나=가야이다. 가야와 임나를 동기시하면 6국이 아니라 5국이 되어야 한다. 일본사 연구자 김현구 교수는 임나는 가야의 구성국 중 하나라고 못박은 바 있다. 임나와 가야를 별개의 나라로 취급하자니, 일본에서 임나와 가야를 당대에 다른 개념으로 구분했다는 용례도 없고, 또 그렇게 되도 임나는 가야의 일부분이니 중복되는 개념이다. 고로 일개 국가인 임나를 연맹체의 통칭인 가야와 동렬에 배치하는 시점에서 논리파탄 이다. 또한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중국 황실은 임나 가라를 포함해 6국 제군사라는 지위를 하사했다. 일본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를 들며 한반도 남부를 일본 천황이 직할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일본 천황은 중국 황실에 정정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즉, 자신도 허울뿐인 작위라는 것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는 중국 남조와 지속적인 교류로 선진 문물을 일찍이 받아들이고 강력하게 성장한 상황이었다. 이때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수여받은 관작은 왜의 '안동대장군'[92]보다 4단계 높은 '진동대장군'으로[93][94] 이로써 당시 백제의 위상이 왜보다 더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이 백제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황당한 주장과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왜가 백제를 자신들의 속국(?)이라며 황당한 주장을 중국에 여러 차례 전하자, 이미 백제와 자주 교류하여 백제의 국력을 알았던 중국 남조는 일본이 달라고 자칭한 관작명에서 백제를 아예 제외했다. 한 마디로 일본이 요구한 관작명은 그저 허울뿐인 관작이었고, 따라서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95]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의 관작명을 보면 '진한'과 '모한'이 나온다. 그런데 진한은 당시에 이미 없어지고 신라로 대체되었으며, '모한'은 대개 마한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데 이는 문헌상으로는 온조왕 때, 현실적으로는 적어도 근초고왕 때 백제에 병합되었다.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 나라의 이름이 나온 것을 통해서도 이 관작이 허울뿐임을 다시금 알 수 있다.

추가로 《일본서기》나 《고사기》 등에서는 '삼한정벌', '임나일본부'를 말하고 있지만 대개는 신화적 서술과 '이주갑인상'을 비롯한 '왜곡'으로, 철저한 검증 없이 섣불리 믿기는 힘들다. 정리하자면, 왜국 스스로가 당시 사실과는 다르게 백제 등 한반도의 여러 나라들을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여겼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일본서기》 중 391~396년에 해당하는 기사들에서도 일본이 5만 대군의 고구려군과 싸운 전쟁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일본 학계의 해석에는 기본적으로 크나큰 약점이 있다. 한국 사서들에도 391년에 일본이 한반도를 침공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다시 말해, '왜가 백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신묘년 기사의 일본식 해석이 지니는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주장을 뒷받침할 다른 기록들이 한중일 그 어떤 사서들에서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다.

그러나 신묘년조 해석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신묘년조 이후에도 백제가 맹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했기 때문에 왕이 평양성까지 몸소 나갔다는 언급이 나오는 등 백제와 왜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고 왜도 신라를 공격하거나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기 때문에 기존의 신묘년조 해석이 문맥상 잘 맞는다는 것. 이러한 쪽에서는 신묘년조 앞부분에 백제와 신라가 원래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하는 부분에 주목하며 '신민'의 의미가 잘못 해석되었다고 본다. 백제와 신라[96]가 원래부터 고구려에 복속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중국의 고구려 연구학자[97] 왕건군도 한국의 국내 학회에 참석해, 왜왕이 자칭한 작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요구이며, 백제와 신라, 가야 등을 지배했다고 반복하는 것은 왜가 통치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또 당대에 한반도 남부에는 백제와 신라, 임나가라만 존재했는데 가야와 임나를 별개의 나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지적했고 이는 자신이 자칭해서 다스리는 나라의 실정도 제대로 모르고 요구한 것이라며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98] 조선족 연구자 박진석(朴眞奭) 또한 왜왕 무(武)가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조녜(), 즉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통일을 이룩한 것에 대해 언급하는데, 한반도까지 진출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도출된 왜구의 성격에 대한 왕건군의 학설은 대체로 이러하다. 한반도 남부를 침탈해 온 세력은 일시적으로 한반도 남부에 상륙해 인력과 식량을 약취해가는 세력이므로, 한반도 남부를 경영할 만한 능력도 없고 주체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큐슈 북부 일대를 기반으로 둔 '해적'으로 보았다. 간혹 일본인들이 왕건군이 광개토대왕릉비는 개찬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학자이므로, 일본 측 학설을 지지했다는 식의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의 학설은 임나일본부설과 완전히 배치되는 해석이다. 그의 학설이 일견 일리가 있는 점이라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왜구의 한반도 약탈의 행태는 여름에만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도 유난히 여름에 한반도 남부 국가에 사신을 파견한다든지 교섭이 활발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반면에 이들 사신이 왜국으로 돌아오는 절기는 대개 겨울이다. 즉 계절풍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인력과 식량을 약취한 뒤, 겨울에 훈풍을 타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근거를 들어 왕건군은 병신년 광개토대왕의 백제 친정 때, 백제를 침략해 약취를 일삼던 북큐슈 기반의 해적은 고구려군과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 즉 고구려군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이미 밀고 내려왔을 때는 이미 절기가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고, 왜군이 이미 철수하였기 때문에 병신년 백제 정벌에서 그 면모가 일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실성 마립간 시절, 왜인들이 대마도를 전진기지 삼아서 봄에 준비하고 있다가 여름에 신라를 약탈하려고 하자, 신라왕이 직접 대마도 원정을 계획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릉비의 신묘년 원문이 정말 이러한 사실을 반영했다고 하면, 왜구가 침몰한 시기는 391년의 여름일 개연성이 매우 크다. 광개토대왕은 신묘년 5월에 즉위했고, 7월에 백제 원정에 나섰으며 10월까지 한강 하류 일대를 수군으로 공격하여 인천-강화도 등지를 점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논리를 적용해 본다면 왜구는 그 해 여름에 약탈을 했고, 이에 고구려가 대응하기 위해 가을부터 백제 원정에 임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물론 신묘년에 왜가 백제와 신라를 쳤다는 것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신묘년은 광개토왕의 즉위 원년으로, 즉위 원년부터 당면한 고구려의 외교적/군사적 어려움을 부각시키고, 이것을 해결해 나간 영웅을 위한 헌사라는 해석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설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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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논리에도 맹점이 많은데, 왜와 4세기 후반부터 돈독한 우위를 쌓으며 국교를 다진 백제를 왜가 침략할 하등의 이유도 없으며, 이는 고구려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대에 고구려가 백제와 왜가 긴밀히 결탁하는 모습을 '화통'이라는 단어 등으로 기록 했기 때문이다. 릉비의 원문에는 396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이미 굴복 시키고 대왕이 아신왕에게, 다신 왜구와 화통하지 말라는 약조를 받아냄을 봐서는, 이미 고구려도 원정을 감행하기 이전부터 백제와 왜의 관계가 협력하는 관계이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아님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이것이 병신년에 고구려가 백제 원정을 하게 되는 명분이거나, 혹은 전쟁 명분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반도 남부를 약탈의 목적으로 침략했다면 백제가 아닌 대마도와 가까운 신라를 공격했을 것이며, 선술했듯이 릉비의 병신년에 왜의 면모가 일절 보이지 않는데도 신묘년 전치문에 굳이 왜를 강조할 필요가 있었냐는데에 있다. 고대에서 전쟁의 명분과 구실은 매우 중요한데, 이런 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명분을 릉비에 엉성하게 새겼을 리가 있겠느냐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왜가 신묘년에 백제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했다. 근데 정작 원정에 나선 때는 6년 뒤인 396년이다. 이 때까지 고구려가 왜의 세력이 백제를 통치한다고 착각할 수 있었을까? 혹은 그것을 고구려가 정세에 아둔한 자국의 백성들에게 '우리 고구려는 의로운 나라다. 우리 이웃인 백제를 괴롭히는 왜구를 내몰고 다시 고구려 중심의 질서를 백제에 확립했다.'며 합리적인 전쟁의 명분이라고 내세웠을까? 만약에 다른 사서에 391~396년까지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교류하지 않았거나 전쟁을 치루지 않았다면 납득할 수 있지만, 릉비에 써져있는 신묘년, 즉 광개토대왕의 원년에 고구려는 백제와 한강 하류 일대에서 전투까지 한다. 게다가 신라의 고구려 종속화는 391년 훨씬 이전[99]에 있었던 일로 파악되는 상황에서 왜가 391년 신라를 신민화했고 그것을 고구려 질서로 다시 되돌리기 위해 나선 것은 400년이다.

그래서 결론은 왕건군의 해석도 임나일본부설은 완전히 반박하는 주장이지만, 그의 해석에 대해서 한국 여론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 하였고, 이로 인해서 문제가 더 부각된 면도 없지 않아 보인다. 특히 릉비의 문장이 개찬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학자이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이나 재야학계에서 반발심을 샀다. 물론 100% 그의 학설이 맞는다는 것은 아니다. 선술되었듯이 신묘년조가 왜를 주체로 해석하고 병신년 백제 정벌의 전치문이라고 본다면, 왜의 면모가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긴 하지만, 왕건군의 전치문 해석은 신묘년 주체에 대한 문제와는 별개로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전치문에 비해 많은 한국 학자들에 의해 인용되었고, 지지를 얻고 있다.

앞서 언급되었던 396년 399년 400년의 왜구의 침입 기사 말고도 404년의 왜구의 대방군 침입 기사도 한일 학계에서는 뜨거운 감자다. 선술되었던 왜왕의 지칭한 "백제, 신라, 임나..."의 도독 관직을 두고, 이것과 연계해서 해석하는 경향이 많은데, 404년의 기사에는 분명히 백제와 가야의 세력이 등장하지 않고, 왜군의 단독행동을 벌여 황해도 일대까지 들어와, 전횡을 부렸던 것 같이 묘사하기 때문이다. 대방군까지 깊숙히 들어오려면 백제나 가야의 영토를 지나야 하는데, 그들의 면모가 드러나지 않고, 주도세력은 왜구처럼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역사적 사실여부로 접근할 때는 호태왕비를 세울 당시에는 신라는 고구려에 복속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영락 1년 신묘년의 시점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에 복속한 일이 없었다. 이는 단순히 《삼국사기》 등을 통한 해석이 아니고, 『광개토대왕릉비』 자체의 영략 10년(400) 경자년조에서도 "지금껏 신라 매금은 스스로 와서[100]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라고 서술했다. 조공의 기록은 없지만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 기록상 1년 차이[101]이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료를 찾아보면, 신라본기의 기사 [102]로 신라가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103]을 볼모로 보내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의 즉위 이전의 일이다.[104]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를 두고 속민이라고 칭했을 수도 있다. 또 삼국사기에 따르면 245년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측에서는 석우로를 내세워 방어했으나 패배한 기록도 나온다. 고로 고구려가 신라를 신묘년 이전부터 강하게 몰아친건 맞는다. 또한 백제의 근초고왕이 신라에게 말 두 필을 선물하며 우호를 싹트던 신라 백제의 관계도 근초고왕의 사망 전후부터 고국양왕 시절 신라가 인질을 보내기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삼국간의 역학관계에 대변혁이 있었다.

근초고왕 사망 직후와 광개토대왕 즉위 직전까지 신라는 백제와 결탁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이제는 고구려와 결속하는 모습이 나타는데, 그 근거는 377년과 382년의 신라 사신의 전진 황실 입조가 있다. 이는 고구려 사신과 같이 동행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덧붙여 흥미로운 점은 신라와 백제가 우호를 쌓고(366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말 두 필을 신라에게 선물을 보내며(368년) 친선을 도모하기 전후에는 삼국사기에는 왜국이 침입했다는 기록이 없다. 다시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때는 고구려와 결속이 강해진[105] 광개토대왕 즉위 직후이다.
하마다 고사쿠는 이를 두고 백제가 배후에서 왜국을 포섭하여 고구려와 결탁한 신라를 괴롭히라고 사주하지 않았는가 추정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혹자들은 '신민'은 '속민'보다 오히려 예속의 정도가 약하기 때문에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말도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혹은 이런 점 때문에 아예 신묘년조의 서술 전체가 역사적 사실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1974년에 일본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가 제기한 주장). 그러나 광개토대왕비석의 원문을 보면 속민이라는 단어가 한 번 더 등장하지만. [106] 용례를 따져보면 단순히 조공을 수취하는 꽤 느슨한 관계로 정의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96년이나 399년의 기사를 보면 백제의 아신왕과 신라의 내물왕이 고구려의 노객을 자칭했다. 아신왕은 스스로 무릎 꿇고 알현하며 자신의 동생을 인질로 보냈고, 내물왕은 나중에 직접 광개토대왕을 알현했거나 왕자 복호를 시켜 알현하며 조공을 바쳤다.[107] 단순히 조공을 바치는 신묘년에 등장하는 속민의 관계보다는 앞서 언급한 396년이나 399년 기사가 예속성이 더 강하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즉, 하마다 고사쿠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셈이다.

이를 두고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는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만든 왜를 공격하지 않고 왜 396년 병신년조에 애꿎은 백제를 공격하냐고 논문에서 반문한 적이 있다. 고대 전쟁에서 아주 중요하게 구실하는 명분(백제와의 전쟁)이 없다는 것이다.[108][109]

일본서기에서 이런 일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를 두고 이런 학설이 있다. 일본서기는 일본의 각 지방 호족이나 혼재하던 나라들의 구승을 일본이 통일을 이룩한 뒤 집대성하고, 이것을 마치 통일된 왕조에서 있었던 일인 양 소급적용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왜군이 실제로는 통일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이 소규모 국가들에서 파견한 용병 내지는 해적이었기 때문에 기록에서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대에 문자가 없던 일본은 구전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니 중간에 누락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간혹 일본인들 중에 중국인 학자 왕건군도 일본의 학설에 동조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왕건군은 광개토대왕릉비가 개찬되지 않았고 일본 학계의 판독을 지지할 뿐,[110] 일본의 해석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왕건군도 상기한 점에 주목했는지, 당시 한반도 남부에서 전횡을 일삼은 것처럼 묘사되는 왜구의 존재를 북큐슈 일대에 본거지를 둔 해적 수준이라고 말했다. 즉 정규군도 아니고 지방 호족이나 국가의 군대나 해적 수준으로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거나 경영할 만한 능력이 있는 주체로 본 사실이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과 배치되는 이론이다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는 제1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서 가야와 백제 왜군의 무기 수준이나 착용 갑옷 수준에 대해 심도있게 서술했다
백제나 가야에 비하여 일본 열도에서는 4세기대에 소급할 수 있는 금촉제마구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으며, 5세기가 되어서야 가야로부터 개별적으로 수용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일본 고분시대의 마구에 대한 연구로서 小野山節는 일찍이 편년 작업을 하여, "오로지 수입품에 의존한 시기"를 설정하고 발걸이 형태의 차이를 가지고 제1기를 구식과 신식으로 나누어 보았다. 이에 대하여 中村潤子는 5세기 전반의 제1차 도입기 (구식)에 전해진 한반도 낙동강 하류욕 마구는 결국 일본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끝났으며 5세기 후반의 2차 도입기 (신식)에 검릉형 또는 편원검미형 말띠드리개와 f자형 재갈멈추개로 표상되는 川脥 玉田 계통의 마구가 들어와 그것이 비로소 일본에서 계승, 발전되었다고 하였다. 즉 일본에 4세기대의 기마 문화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

또한 왜는 4세기대에 단검, 단도, 두께가 얇은 양날창과 쇠화살촉 등의 무기를 주로 사용하고 5세기에 와서야 공격구(攻擊具)의 주류로서 장검을 채택할 정도였다. 두께가 얇은 양날창과 쇠화살촉은 어느 정도의 갑옷과 방패만 있으면 치명상을 입힐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러므로 왜의 무장은 일부 射兵이 부가되어 있으나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短兵器가 주력이고, 실전적인 무기로서보다는 과시적인 威信財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인다.
출처: 제1차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1분과, "4세기의 한일관계사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왜군 문제를 중심으로 -", 김태식, 40-41쪽 #
당시에 고구려의 무장체계는 쇠투겁창 중심의 重裝騎兵과 步兵이 조화를 이루는 단계에서 밀집대형 騎兵隊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것이었다. 가야의 무장체계는 살상력이 극대화된 단면 마름모꼴 쇠투겁창과 長頸式 쇠화살촉으로 개량되어 있었고,防護具도 이에 대응하여 철제 종장판 釘結 판갑옷으로 전환되었으며, 목심철판피 발걸이와 하트 모양 말띠드리개도 보유하여 중장 기마전술의 구사가 가능한 수준의 것이었다.

반면에 왜의 무장체계는 단검, 단도, 두께가 얇은 양날창[鈹]과 쇠화살촉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양날창과 쇠화살촉은 어느 정도의 갑옷과 방패만 있으면 치명상을 입힐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서, 실전적인 무기로서보다는 과시적인 위세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또한 4세기 후반에 일부 나타나는 일본열도의 수신판 혁철 판갑옷(竪矧板革綴短甲)과 방형판 혁철 판갑옷(方形板革綴短甲)은 한반도 남부의 종장판 정결 판갑옷(縱長板釘結板甲)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나, 가야의 판갑옷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여 전체 구조나 제작 기법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미숙한 것이었다.

그 결과 가야를 매개로 하여 동원된 왜군들은 위와 같은 무장 수준의 차이로 인하여 한반도 내에서 독자적인 행위를 하기 보다는 가야군대의 하급단위로 편제되어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가야의 의도에 따라 對新羅 戰線에 투입되기도 하고 백제와 가야의 교섭에 따라 고구려와의 전쟁에 투입되기도 하였으니, 실상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倭賊’ 또는 ‘倭寇’는, 가야군을 주력으로 삼고 있으면서 왜의 원군이 일부 가세된 가야-왜 연합군이었다.
출처: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1분과, 고대왕권의 성장과 한일관계 -임나문제를 포함하여.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왜군의 성격", 김태식, 151~152쪽 #

그의 견해는 왜국의 부대는 단언코 주력부대가 아니고 소규모 부대로 가야군에 편입되어 용병으로 참가했으나, 복색이 백제나 신라, 가야와는 이질적으로 다르고 인종 구성도 다른 왜군 부대를 고구려가 크게 과장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임나일본부설을 믿는 일부 역사학자들은 '광개토대왕이 병력 5만을 보내어 싸웠을 만큼 왜국이 강력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주장대로라면 1991년 걸프 전쟁 당시 이라크를 공격하기 위해 미국은 영국, 프랑스,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터키, 이스라엘 같은 44개 나라들과 함께 다국적군을 결성하였으니 이라크는 미국을 포함한 44개 나라들이 연합해서 싸워야 했을 만큼 초강대국이었다는 황당한 결론이 나온다.[111] 미국이 일부러 다국적군을 결성해서 이라크를 공격한 이유는 이라크가 미국보다 훨씬 강력한 나라여서가 아니라, 압도적인 병력을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였다. 또한 로마 제국다키아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무려 20만 명이라는 대군을 동원한 이유도 다키아 왕국이 로마 제국과 대등한 수준의 강대국이어서가 아니라[112], 걸프 전쟁 당시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병력을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면에서, 광개토대왕이 한반도 남부로 5만 명의 군대를 보낸 이유도 걸프 전쟁 당시의 미국이나 다키아 전쟁 당시의 로마와 같은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신라를 침략해 온 왜국의 규모는 보통 천명 즈음이며, 이 마저도 훨씬 후대의 5세기 후반의 일임을 보면...

4.3.3. 과장 또는 윤색이다

광개토왕릉비에 쓰인 연도는 삼국사기의 연도보다 1년 빠르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이 392년(임진)에 즉위했다고 서술했는데, 능비에는 영락 원년이 신묘년(391)이라고 설명한다. 이를 두고 삼국사기가 잘못 기록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고구려의 역법이 오늘날과는 달라서 광개토왕이 즉위한 392년을 임진년이 아니라 신묘년이라고 생각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근래에는 릉비와 삼국사기의 1년 격절 문제는 선술했듯이 삼국사기의 오차라는 게 중론이고, 삼국사기 392년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서 서술한 같은 사건인 관미성 함락 기사는 실제로는 391년에 일어났던 사건이라는게 지지를 얻고 있다.[113]
八年, 夏五月丁卯朔, 日有食之. 秋七月, 髙句麗王談德帥兵四萬, 來攻北鄙䧟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徳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
8년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고구려 왕 담덕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겼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며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삼국사기》 제25권 백제본기 제3 진사왕
그런데 그 어디에도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392년에는 광개토왕의 백제 원정과 진사왕의 사망, 아신왕의 즉위밖에 기록되지 않았다.[114] 오히려 고구려가 수군으로 백제를 공격한 내용이 있어서, 신묘년의 도해파(渡海破) 주체는 고구려라는 근거로 사용될수 있는 기사가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하여 1973년 일본 학자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새로운 설을 주장했다.#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구절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고구려가 백제 침공을 위한 명분용으로 과장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소위 신묘년 기사의 바로 다음에 고구려가 백제[殘國]를 치는 내용이 이어지고, 그 뒤에도 영락 9년에 신라가 왜의 침략으로부터 구원을 요청해 이듬해 고구려가 왜를 무너뜨리는[潰] 내용, 영락 14년에 왜가 대방(帶方)의 경계를 침범해 물리치는 내용 등이 있다. 일본이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깨뜨렸다는 것은, 고구려가 백제나 왜를 물리치기 전의 상황에 대한 설명, 다시 말해 고구려에 유리한 기사를 싣기 위함이었다는 추측이다. 적대세력의 주체인 백제의 격을 의도적으로 깎을 요량으로 왜를 높인 셈이다. 다만 신묘년조를 그대로 해석하면 왜는 신묘년에 와서 신라는 물론 백제까지 속민으로 삼았다는 것인데, 바로 다음 기사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다는 점은 앞뒤가 맞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기존의 학설들은 비문의 기록이 모두 액면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서 논쟁을 벌였는데, 잘 생각해 보면 비문의 기록이 전부 사실이라는 보장이 없다. 광개토왕릉비는 선왕의 업적을 찬양할 목적으로 세운 석비이므로, 선왕이 한 일을 합리화하거나 찬양하기 위해 과장 또는 날조를 섞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115] 잘 생각해 보자.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신민으로 삼은 주체가 정말로 왜국이라면, 왜 애꿎은 백제를 공격해 굴복시키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고구려는 백제가 아니라 왜국을 타겟으로 삼아야 對백제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고 예전처럼 고구려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이것은 기존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면서도 한국 학자들이 주장했던 비문 변조설도 인정치 않는 새로운 시각이다. 종래의 여러 설이 내포하던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으므로 오늘날에는 이 주장이 크게 설득력을 얻었다. 관련하여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논문이라면 일본의 자이니치 역사학자이자 와세다대학의 교수인 이성시(​李成市)의 논문 '표상으로서의 광개토왕비문'일 것이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 바로 앞 기사를 보면, 백제와 신라는 과거에 고구려에 조공해왔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오히려 백제에게 신나게 털렸으면 털렸지, 고구려가 우위에 입던 입장이 아니었다.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 중 전사한 사실을 상기해보자.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 신묘년까지 혹은 백 번 양보해서 그 직전까지 고구려가 백제를 지배하고 조공을 받았다고 볼 만한 건덕지가 하나도 없다. 당장 광개토대왕의 부왕인 고국양왕대의 기록을 보면, 백제에게 신나게 털리는 모습이 나온다. 즉 백제를 침공한 이유는 명분 쌓기용 거짓말과 과장이라는 게 중론이다.

선술한 백제의 경우에는 현전하는 사료로 백제를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해석할 여지가 없지만, 신라의 경우에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 직전의 391년에 신라가 인질을 고구려에게 파견했는데 이를 두고 속국이라고 칭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고구려와 신라의 밀착은 377년과 382년에 정황상 드러나는데, 북조의 전진에 고구려의 사신과 함께 신라의 사신이 입조한 것이다. 그리고 조공 기록이 없다고 문제가 될 만한 소지도 없다. 삼국사기 특성상 조공을 공(貢}[116]이라고만 표현했는데, 368년 신라본기를 보면 당시 최강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의 근초고왕 시절 백제가 오히려 신라에게 貢을 한다고 썼다.[117] 즉 당대에는 貢이라고 해봤자 친선용으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순전히 일본서기의 내용을 따르자면, 근초고왕 시절 백제 장군 목라근자가 신라군을 격파하고 가야를 점령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 조공 기록이 없다고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라는 기록을 온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신라 왕이 스스로 노객이라고 칭하며 고구려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누가 봐도 복속관계임을 알 수 있는 영락 10년에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하였다고 말하는데, 정작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친 기록이 전무하다. 따라서 기사가 누락되었다고 해도 이상하다고 느낄 필요가 하등의 이유가 없긴 하다. 또 2019년 충주 고구려비의 레이더 판독 결과 397년에 건립되었다고 추정한다. 당초에 장수왕 때 세워졌다고 파악한 학계의 주류 학설을 전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즉, 신라는 능비에서 기록하는 399년 신라 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을 청하는 이 시점 훨씬 이전부터 고구려의 속국이었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118] 그러나 이는 아직 연구 중인 단계로 397년 건립설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게다가 광개토대왕비에는 경술 20년, 동부여가 고구려 추모왕의 속민이었고 동부여를 침공했다고 기록했는데, 이 또한 프로파간다용으로 거짓을 보태었다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갓 건국하여 나라의 기틀과 토대를 닦는 데 바쁠 고구려가 이미 나라의 기틀을 잡고 운영해가던 동부여를 침공할 힘은 없다. 사료의 양이 부족하므로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학계의 중론은 동부여는 3세기 즈음에 모용족의 침입에 의해 함경도 일대의 북옥저 지역으로 도망간 부여의 일족들이 세운 나라라는 설이 지지를 얻는다. 고로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할 시기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라의 이름을 가져와 기록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현대의 관념을 통해 당대 혹은 그 시기와 근접한 5세기 광개토왕릉비의 금석문의 내용을 깡그리 무시하는 행태로 비판받는다. 동부여가 추모왕 시절부터 속국이었다는 기사는 과장이나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부족한 사료와 기록을 토대로 동부여는 당대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고, 이것을 후대에 소급적용해서 마치 있었던 나라라고 꾸며낸 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학계가 이미 정설을 새운 바 있다. 위에 나온 북부여 건국설은 정설이며, 광개토대왕릉비의 동부여 기사는 삼국사기 동명왕의 북옥저 정복 기사랑 맞아 떨어진다. 우선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명왕은 북옥저를 정복하였다고 기록되었어있다. 삼국사기의 북옥저 정복 기사도 고구려 자체 전승의 기사로 보이는 이상[119]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동부여가 추모왕 시절부터 복속되었다고 기록한 것은 '북옥저 지역'이 추모왕시절부터 복속되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하며, 285년 이 지역으로 유입된 부여인들이 북부여 중앙정부와의 길이 끊기자 토착민들와 세운 것이 동부여라는 것이 통설이다. 동부여가 북옥저 지방에 있었다는걸 고려하면 딱 들어맞는다.

본론으로 돌아와, 동부여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추모왕 시절의 고구려는 다른 신생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고을에서 시작 되었다. 그런 당대에 건국된 나라가 추모왕이 권력 다툼에서 밀려 도망와서, 곧바로 자신의 출신지를 속민으로 삼았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또 몇십 년 후에는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의 유리왕에게 자신들에게 복속하라며 협박을 하자, 유리왕은 복속하겠다고 회답을 한 적도 있다. 동부여 = 부여로 상정한다면 3세기에 기록된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된 부여의 인구는 8만 호이며, 고구려의 인구는 3만 호로 건국 후 20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국력 차이가 났다. 단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삼국유사에 의히면 대무신왕 치세기에 이르러서야, 고구려가 부여와의 전쟁에서 대소왕을 죽이는 등 고구려와 부여의 국력이 대등해졌다는 점이다. 대소왕이 전사하자 부여는 망하게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120] 그러나 삼국사기에 이르면, 부여는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멸망하지 않았으므로 삼국유사와 충돌한다. 부여와 고구려 두 나라 모두 출혈이 상당한 전쟁을 치뤘고, 동부여는 전쟁 중에 대소왕이 전사하고 변혁기를 거치게 된다. 두 사서가 서로 충돌하지만, 부합하는 면에서는 고구려의 대무신왕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여 혹은 동부여로 일컬어지는 나라와 동등한 국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윤색은 당대에 흔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불을 짚힌 온조왕의 마한 복속 기사를 봐도 알 수 있다. 온조왕이 백제를 건국 하자마자 마한을 복속시켰다고 믿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사실은 근초고왕 시기에 일어났던 일을 소급시켜 적용한 문헌을 삼국사기다 인용했다는 설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을 빗대어 360년을 소급시킨 이 기사를 육주갑인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마한의 복속 시기에 대한 현재 학계의 중론은 근초고왕 시기가 아닌 훨씬 후대인 6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방후원분의 영향이다.

다만, 그 시대 고구려 사람들의 인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동으로는 동부여[121], 북으로는 숙신, 서쪽으로는 패려, 남쪽으로는 백제가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칭하며 그들을 교화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표현해준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고구려의 자의적 해석에 기반한 윤색(동부여를 추모왕 이래로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원문에서 도출되는 이들 다섯 나라들의 공통점은 원래 고구려의 속국이었는데, 고구려의 질서에 이탈해서 정벌의 대상이 되거나, 원래는 속국이 아니었으나 속국이 되었다는데 있다. [122]

그리고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광개토대왕비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광개토대왕을 미화하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선전)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물이다. 쉽게 말하자면 비문에 적혀 있다고 해서 그 내용을 곧이 곧대로 100%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가령 고대 이집트의 국왕인 람세스 2세는 아부심벨 신전에다가 자신이 카데시 전투에서 신으로 변신해 혼자서 히타이트 군대를 쳐부수고 승리했다고 기록했으나, 히타이트측의 기록들까지 교차 검증한 결과에 의하면 카데시 전투 이후에도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의 아무루는 오히려 히타이트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이집트는 더 이상 예전처럼 중동의 동쪽으로 세력을 뻗는 일이 불가능해졌으며 전략적으로는 히타이트의 승리에 가깝다고 결론이 났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전공을 과장하기 위해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 왜곡 선전을 한 것이다.[123]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광개토대왕비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삼국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과 싸워 전사시켰다고 기록했으나, 광개토대왕비문에는 고국원왕이 근초고왕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124] 이는 광개토대왕비에서 백제가 오래 전부터 고구려의 속민이라고 적었는데, 그런 속민인 백제한테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죽었다고 사실대로 적으면 고구려 왕가의 신성함이 부정되며 백제가 고구려의 속민이라는 주장에 큰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배경을 모르고서 삼국사기를 보지 않은 채, 광개토대왕비문만 본다면 백제가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어버리기 쉽다.

그런 이유에서 광개토대왕비문에서 고구려의 주적을 백제가 아니라 왜국에 촛점을 맞추는 이유도 실제로 왜국이 고구려와 동등한 입장의 강대국이어서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인식한 백제가 광개토대왕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다는 점을 그대로 적는다면 백제가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주장에 심각한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했던 진짜 이유는 그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죽임을 당한 일에 대한 복수이면서 동시에 고구려를 공격해 왕을 죽일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적수인 백제를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헌데 이런 목적을 광개토대왕비문에 그대로 적었다가는 자칫 하늘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고구려 왕실의 위신을 실추시킬 우려가 있었고[125], 아울러 백제가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선전을 스스로 부정해 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광개토대왕비문에서는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했던 목적이 복수나 예방전쟁이 아니라, 마치 속민인 백제를 바다 건너에 있는 왜국의 침략에서 지켜주려는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미화하고 과장한 것이다.

4.4. 20세기 일본의 접근

제국주의 일본은 이 비문을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써먹었다. 첫째는 신묘년 기사를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해서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는 근거로 써먹은 것이다. 그러나 위의 서술과 같이 그들이 주장하는 해석만을 놓고 봐도 어떻게 그런 주장이 가능한지 의문이 들게 할 정도로 허술하다. 설사 아무런 과장을 섞지 않았다 해도, 왜군은 신묘년(391)에 쳐들어와서 경자년(400)에 박살났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오히려 반박하는 근거가 된다. 설 자체는 1960년대 이후 일본 학계에서조차 주류에서 밀려나서 폐기되다시피 한 논의지만, 어쨌든 한반도 남부에 군사를 진출시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해석은 일본 입장에서는 의미가 크다. 야마토 정권이 체제를 굳히고 (비록 백제 및 가야의 동원에 의한 것이기는 했지만) 외부로 군사력을 투사할 정도로 기반을 마련했다는 주장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즉 야마토 정권의 초기 발전 단계상을 추측해볼 수 있는 기사가 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왜가 패했으니 일본에 불리한 기사가 되는 셈이지만.

둘째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내용 중 고구려의 대립에서 왜가 패한 점을 부각하여, 과거에는 북방 세력에게 패배했으니 이번 러일전쟁에는 북방 세력을 이겨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당시 역사학자들은 이 4-5세기의 고구려 - 왜 관계에 19세기 말 러시아 - 일본의 긴장 상태를 투영하여 '옛날 왜가 고구려에 패해 한반도 경영이 좌절되었듯 지금 전 국민이 합심하여 러시아를 물리치지 못하면 제국의 대륙 진출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경각심을 고취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노골적이고 공공연하게 목적의식을 드러냈다. 심지어 공식적으로 비석을 구입해서 일본으로 반출 하려는 계획까지 있었다.

이외에도 몇몇 제국주의 학자들은 일본제국이 만주와 한반도를 동시에 경영한 고구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작 광개토대왕은 한반도 남부 주민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했고, 일본을 불쾌하게 여기며 토벌까지 했다.

5. 여담

  • 김진명이 소설 『몽유도원(구판 : 가즈오의 나라)』에서 광개토왕릉비 조작설을 소재로 다루었다.
  • 야스히코 요시카즈 화백의 작품 하늘의 혈맥이 광개토왕릉비를 침략 정당화를 위해 이용하려는 일본 군부와 극우 세력들의 시도를 묘사했다.
  • 예술의 전당태광그룹2014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서예명적(韓國書藝名蹟) 법첩[126] 15권을 완간했는데, 이 중 첫 번째 권이 광개토대왕릉비의 글씨이다. 왕릉비가 비단 역사적 유물로서만이 아니라 서예작품으로서도 주목할 만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서체 고예와 전서체를 섞은 특유의 서체가 인상적이라 한다. 〈광개토대왕비〉 서체의 독창성과 한국서예사적 가치
  • 대한민국 국방부한글서체 디자인 업체인 한그리아가 약 1년동안 광개토대왕릉비의 글씨체를 분석하고 공동 개발하여 호국체를 만들었다. 고구려 글씨체의 전통을 후손들이 이어받아 현대화한 것이다. 어찌 보면 국가기관에서 만든 광개토대왕릉비체의 공식 한글판이다. 아쉬운 점은 이 글꼴이 한글은 지원하는데 정작 한자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27] 호국체는 상시 무료로 배포하는데 상업적인 이용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의 태자를 세자로 칭하는데, 중국과 맺은 조공 책봉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외교 자세를 취한게 아니냐는 추론이 있지만, 일본서기에도 백제삼서를 인용하여 자국의 태자를 세자라고 한 기록이 전한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자국 내에서도 태자와 세자를 혼용한 게 아닌가 하고 추론할 수 있다.
是歲, 高麗大亂. 凡鬪死者二千餘 【百濟本記云, 高麗, 以正月丙午, 立中夫人子爲王. 年八歲. 狛王有三夫人. 正夫人無子. 中夫人生世子. 其舅氏麁群也. 小夫人生子. 其舅氏細群也. 及狛王疾篤, 細群·麁群, 各欲立其夫人之子. 故細群死者, 二千餘人也.】
이 해에 고구려에 대란이 있었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백제본기》에서 "고구려에서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나이가 8살이었다. 박왕(狛王)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다. 정부인(正夫人)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중부인(中夫人)이 세자(世子)를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麁群)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박왕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부인이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세군 측에서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546년조
  • 2023년 11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새로운 탁본이 확인되어 이를 공개하게 됐다. 탁본을 뜬 사람은 아시아 불교 미술을 연구하던 프랑스인 앨리스 게티로 추정되며, 1908~13년 사이에 아시아를 답사한 자료와 1917년에 게티 여사가 기증했단 기록으로 인해 방문을 한 기간에 뜬 탁본으로 추정된다. 에두아르 샤반느가 뜬 탁본(샤반느 소장본)과 같은 곳에 보관되었다는 점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다가 뒤늦게 다른 탁본임이 확인이 됐다고 한다.#

6. 재현비

  • 광개토대왕릉비를 복원한 재현비가 충청남도 천안시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앞 <겨례의 콘마당>과 <백련연못> 사이에 좌측에 위치해 있다. 원형과 똑같이 높이 6.39m 무게38톤이다.[128]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23년 1월 24일 디지털복원한 광개토대왕릉비를 공개했다. 박물관 역사의 길 중심의 교차로에 높이 8미터, 너비 2.6미터 규모의 LED 미디어타워를 세우고 비석을 실물크기로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중국 집안지역 현지조사를 통해 구축한 3D 모델에 석회탁본이 만들어지기 전의 원석탁본인 청명본을 기반으로 음각자를 새겨넣어 19세기 당시의 비석형태를 정교하게 구현해냈다. 그동안 국내에 다양한 재현비가 만들어졌지만 도면과 사진, 육안조사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실물과 형태차이가 컸던 반면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의 디지털 광개토대왕릉비는 실물과 완벽히 동일한 형태를 가졌다고 한다.
    복원 과정을 담은 영상과, 문구 해석 영상, 비석의 생애를 담은 영상이 번갈아 상영되고 있으며 음악은 양방언이 담당했다.

7. 같이보기


[1] 현지 조사를 통해 구축한 3차원 모델 위에 원석탁본의 글자를 정확한 위치에 새겨 넣어서 19세기 재발견 당시의 광개토대왕릉비를 재현했다. 양방언이 '거석의 기억' 이라는 곡을 제작했다.[2] 중국에서의 국가중점문물단위의 공식적인 등재는 통구 고분군에 포함되어 '통구고분군'으로 등재됨.[3] 한국·중국·만주족·몽골 계통 사서, 지리지를 통틀어서 이 비석이 고구려의 것임을 기록한 사례는 전무하다.[4] 사실 지안에 고구려 유적은 많아도 발해 유물이나 흔적은 별로 안 나오기 때문에, 일단 발해에서도 세심하게 관리되는 지방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같은 만주라고 비슷하게 느낄 수 있지만 발해의 중심지는 지안에서 400km 이상 떨어진 곳이고, 서경압록부도 여기보다 좀 더 상류 지역으로 유력시되고 있다.[5] 아마도 장군총이나 태왕릉 또는 기타 고구려 능원으로 보인다.[6] 비슷하게 그 정체가 잘못 알려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의 정체를 고증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희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는 존재는 알았어도 직접 보러 가기는 너무 멀어서 마침 근처에 부임하는 지인들에게 여러 번 부탁했는데 하물며 이 곳 집안은 한양 기준으로 황초령보다 더 먼데다가 그래도 황초령은 조선 땅이었지 집안은 후술된 내용처럼 청의 영역인데다가 봉금된 지역이었다.[7] 휘명은 사코우 카게아키(酒匂景明).[8] 그의 아들과 함께 1996년 페루 주재 일본대사관 인질사건 당시 인질로 잡혔다가 풀려났다.[9] 즉 자신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확증편향으로 글자 윤곽을 만들 가능성이 있는 쌍구가묵본에 비해 자신의 주관이나 선입견을 배제하기에 더욱 객관적인 방법이다.[10] 그도 그럴것이 고구려의 능비는 문법도 정통 한문과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간간이 초기 형태의 이두도 있는 등 중국 소시민이 이해하기 어렵다.[11] 그러나 선술한 쌍구가묵본이 위조된 것인지, 아니면 릉비에 석회를 발라서 위조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왕건군은 초천부 초균덕 부자의 소행으로 보기 때문에 그는 쌍구가묵본이 아닌 릉비가 훼손 날조되었다고 짐작하는 것 같다.[12] 출처: 제1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 김태식 18쪽#[13] 탁본이나 그와 비슷한 작업으로 복사된 글자를 보고 학자 각자가 의견을 내놓으며 해석하는 작업.[14] 특히 이형구는 이런 변조 행위가 일본군에 의한 소행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학자이며, 2014년에도 주장했다[15]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2009)에도 이러한 인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16] 1000년 넘게 야외에 방치되어 있었던지라 풍화 작용의 영향을 받은 것.[17] "북부여에서 출생하셨으며"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삼국사기 등에는 금와가 유화를 만난 곳이 금와가 왕인 동부여의 영역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후 기록에서는 북부여로 나오며 동부여가 기원전 1세기 당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되므로 학계에서는 북부여가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18] 이 설화는 훗날 장수왕 대에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그대로 옮겨간 듯한데, 황룡기린으로 바뀌는 등 과정을 거쳤다. 부벽루 참조.[19] 원문은 '호천부조(昊天不弔)'로, '부조호천'이라고도 하며 《시경》, 《진서》 등 한문 고전에서 죽은 이를 애도할 때 쓰인 표현이다. 광개토대왕 시절 북부여 수사에 임명됐던 모두루의 묘지명에서도 광개토대왕의 사망을 언급할 때 호천부조라고 했다.[20] 일각에서는 삼국사기 광개토왕 원년의 거란 정벌과 같은 기사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문제는 이 기사에서는 왕이 거란까지 친정을 했다고 기록 되어있는데 몇 달 후에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까지 또? 친정에 나서서 한강 일대의 관미성까지 함락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시공간적으로 무리인 해석이 아닌가 싶다.[21] 또는 비려(碑麗).[22] 오늘날 요하의 지류인 내몽골의 시라무렌강.[23] 일본 학계에서는 3자 중 첫 글자를 東으로 파악하여 '동진하였다'라고 풀이한다. 왜가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 쪽으로 동진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하마다 고사쿠가 제2차 한일 공동역사연구회에서 투고한 논문에 해당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24] 삼국사기에서 관미성을 함락한 시기는 신묘년(391년)의 일이지만, 391년은 전치문이므로 396년에 끼어넣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따라서 릉비에 나온 다른 기사의 훈적의 연도 또한 조금씩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25] 백잔의 주인. 곧 백제의 왕을 지칭한 것인데, 비문은 백제를 철저히 하대하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에 의해 이 피살되는 치욕을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26] 아마 397년 5월 백제가 태자 전지를 파견하여 군사 원조를 받은 것에 대해 서술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통은 양자가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는 관계이므로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이다.[27] 간혹 왜가 '(신라왕 자신을) 노객으로 삼으려고 합니다.'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한일공동역사연구위원회는 노객을 신라왕 자신이 광개토왕에게 자칭하는 명칭으로 결론 내렸다. 한국 사학자 김태식 교수와 일본 교수 하마다 고사쿠 또한 각자 투고한 논문에서 동일한 의견을 피력하였다.[28] 간혹 '(고구려 혹은 대왕의) 노객을 왜가 민(民)으로 삼으려고 합니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본학계에서도 주장하지 않는 해석이다. 하마다 고사쿠는 제2차 한일 공동역사연구회에서 투고한 논문에서 '(대왕의 혹은 고구려의) 노객(奴客)이란 (그 신분이란, 대왕의) 민(民)이니 왕께 귀의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별거 아닌 차이 같지만 신묘년 기사에 나온 신민의 성격과 어느 쪽이 주체인지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단서이다. '민(民)으로 삼으려고 하니 귀의한다'는 문맥상 말이 되지만, 이미 왜가 노객(신라왕)을 민(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모순된 말이다. 이미 왜의 민(民)이 되었다면 광개토왕한테 사신을 보낼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이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투고한 내용이다.[29] 앞서 병신년에 아신왕이 대왕의 노객이 되겠다며 항복하는 모습을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보아, 프로파간다 성격이 매우 짙은 능비 원문의 특성상, 내물왕이 말한 노객 또한 고구려의 노객임을 뜻할 가능성이 크다.[30] 이 부분은 '안라국 사람 수비병'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며, '나인(羅人)을 수비병으로 두었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후자의 설을 따를 경우, '라(羅)'로 끝나는 고대 한반도의 국명이 한둘이 아닌지라 나인(羅人)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 편이다.[31] 이에 대해서는 한일 양국 학자들 간의 의견 차가 있다. 한국 학계에서는 복구(僕句)를 동사로 보고 '알현하다'로 의역하여 '신라 매금이 직접 조공을 하였다'라고 해석하는데, 일본 학계에서는 복구(僕句)를 인명으로 보고 후에 고구려로 볼모로 보내지는 복호를 음차한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의 고구려 종속 수준에 있어 의견 차를 보이는 것이다.[32] 수군(水軍)을 동원하였다는 뜻인 듯하다.[33] 기존 고구려인들을 지칭한다.[34] 정확히 말하면 광개토대왕이 몇 년에 죽었다는 내용은 능비에 없다. 다만 사망 당시의 나이는 능비에 적혀 있었고, 이를 통해 역산한 것이다.[35] 선왕이 폭정으로 쫒겨나고, 새로운 왕이 정권을 잡으면 정당성 부여 차원에서 유월칭원법을 사용했다[36] 남해 차차웅 기사에 써 있다.[37] 이 경우 고국양왕의 승하를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392년이 아니라 1년 당겨서 391년으로 본다.[38] 선왕이 생전에 양위하면, 유교 예법에 따라서 유년칭원법으로 선위한 해까지를 선왕의 치세기로 보기 때문이다.[39] 이러한 비슷한 경우는 꽤 흔하다. 예를 들면 건국 시조의 위엄을 높이려고 후대에 있었던 일을 시조의 업적으로 윤색하기도 한다. 당장 릉비의 동부여 속민의 기록만 봐도 추모왕 시절에 동부여를 복속시켰다고 씐 내용을 믿는 사학자는 거의 없다. 어지간해서는 그 후대인 대무신왕 시절의 업적으로 본다. 또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불을 짚힌 온조왕마한 복속 시기도 사실은 근초고왕 시절에 이룩한 일을 360년 소급 시켜서 (육주갑인상이다..) 온조왕의 업적으로 윤색한 문헌을 김부식이 그대로 받아적었을 공산이 크다. 물론 마한 복속 시기는 근초고왕 시기가 아닌 6세기라는 것이 전방후원분 등을 근거로 지지를 얻었다.[40] 예를 들어 영락5년 병신년(396) / 영락8년 무술(398) 등등[41] 왕의 즉위 원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 해에 제작됐을 공산이 매우 크다. 즉, 1차 사료로 아주 의미가 크고, 능비가 오기되었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42] 말만 3년이지 실제로는 24개월이다. 동양에서는 고대에 0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만'으로 세지 않았다.[43] 고구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곧 무덤을 만들고, 집안에 빈소를 만들어 시신을 모시고 삼년상(혹은 24개월)을 지낸 뒤 좋은 날을 잡아 장사를 지내고 그 후에 시신을 무덤에 안치한다고 기록했다.[44] 중국 후한,위촉오 시대에 편찬된 위략(魏略)에서는 고구려인들이 사람이 죽으면 100일 동안(停喪百日) 장례를 치뤘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광개토왕의 치세기인 5세기보다 훨씬 이전 세대의 기록으로, 2-3세기경의 고구려 풍습으로 볼수 있다. 이후에 삼년상 풍습이 정착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고국천왕항목을 참조.[45] 무령왕과 그의 왕비도 승하한지 27개월 후에 장사를 치룬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46] 홍익대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과 동명이인의 역사 전문 기자이다.[47] 종래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년에 따라 414년을 장수왕 2년으로 보았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유월칭원법을 사용하였던 까닭에 광개토대왕이 죽은 412년은 곧 장수왕 원년이 된다. 따라서 비가 건립된 414년은 장수왕 3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48] 대개 海로 판독된다.[49] 이 □는 광개토왕비으로 탁본업을 했던 초균덕이 남긴 수초본과 조선유적유물도감 등에서 이미 東으로 판독했고, 국어사학자 권인한이 중연본에서 東의 7, 8획에 해당하는 사선의 흔적을 근거로 東으로 판독했다.[50] 여기서 잔은 殘(남을 잔) 자로, 먹고 남은 밥을 의미하는 '잔반(殘飯)'의 잔 자와 같다. 즉 '백제 찌끄러기'라는 멸칭이다. 반대로 백제에선 고구려를 박적(狛賊)이라고 불렀다. 박적(狛賊)의 박(狛)은, 외관상에서도 알수 있듯이, 곰을 뜻하는 맥(貊)과 닮아있다. 짐승이라는 표현으로 해석 할수 있다. 아마 맥족인 고구려가 곰을 숭상하는 것을 빗대어, 비하한게 아닌가 싶다. 일본어에서도 고구려 =고려는 Koma라고 읽는데, 이것은 곰의 貊 일본어 훈독인 Kuma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狛의 일본어 훈독 또한 koma이며, 안장왕의 후손들은 일본으로 망명 했는데, 성씨로 狛를 사용했으며, 이 또한 koma라고 부른다. 다만, 웅진을 백제 훈독으로 Komanari라고 부른 경우에서 알수 있듯이, 백제에서 유래한 훈독일 가능성도 크다. 웅진에서 웅(熊)에 해당하는 문자는 곰을 뜻하며,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koma라고 불렀나보다.[51] '海'일 경우 '바다'.[52] 이 부분은 훼손되었는데, 여기에 '가야신'을 넣어서 '백제 가야 신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묵본에는 羅 바로 앞 글자의 오른쪽에 斤부가 확인된다.[53] 한편 앞의 두 칸을 '...와 함께'로 보고 마지막 칸이 '신'이라고 본다면 '신묘년에 왜가 (백제의 요청으로) 와서 바다를 건너 백제와 함께 신라를 깨뜨렸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백제-일본 연합군이 신라를 이긴 것을, 일본 단독으로 신라는 물론 백제까지 이긴 것으로 왜곡한 게 된다.[54] 도해파, 즉 바다를 건너 격파하다[55] 혹은 백제 본기 392년[56] 겨울 10월에 … 빼앗았다 :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즉위년(391)조에는 고구려군이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켰다고 하여 보다 상세하게 나온다. 관미성이 함락된 시기는 본 기사에 진사왕 8년(392)으로 나오나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대왕 원년(391)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난다. 이는 즉위년 칭원법과 유년칭원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동일한 기사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관미성이 광개토대왕이 영락(永樂) 6년(396)에 백제를 쳐서 함락시킨 58성 중의 하나로 나와 본 기사와 5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복을 영락 6년(396)조에 일괄적으로 기록한 것에서 빚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광개토대왕의 정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즉위년인 신묘년(391) 기사가 전치구로 강조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武田幸男, 271~273쪽; 李基東, 49~52쪽).[57] #1, #2(289쪽 참조), #3(230쪽 참조), #4(115쪽 참조)[58] 제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일본 학자가 주목한 학설이다. 아마 다케다 유키오가 東으로 판독한다는 사실을 알고 김진명이 자신의 소설에서 각색한 듯하다. #[59] 석회가 발라지기 전 원석 탁본 여러 개를 연구하여 내린 결론이다.[60] 그의 부친 임창순 선생이 소장한 원석탁본을 기초로 한 논문이다. 원석탁본, 즉 석회가 발라지기 이전의 탁본이다.[61] 보통 자신이 본 문자를 자의적으로 판독하여 해석하는 것을 석문이라고 하지만, 논문에 언급했둣아 초천부 초균덕 부자는 고문서에 일가견이 없는 소시민으로, 그들의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낮다고 판단하여, 필사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62] 왕건군 또한 결자를 東으로 해석한다는 풍문도 있지만, 진실은 알수 없다. 그는 자신이 확인 할수 있는 글자에 한해서 해석을 내놓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로 파손된 문자에 대해 필사본을 근거로 주장을 하는 것을 꺼려 하는것이다.[63] #[64] 예를 들어 화통이라는 표현은 양자가 상호 동등한 입장에서 맺는 협약이라고 할수 있다. 즉 399년의 화통이라는 표현은 백제의 왕이 대왕 앞에서 다시는 왜의 세력을 끌여들여 신라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맹서한 모양이지만, 이를 깼다고 해석할수 있다. 또 하술 하겠지만, 이런식으로 왜를 백제의 단순 지원 세력으로 보고, 391년 신묘년 기사를 396년 병신년 기사의 전치문으로 본다면, 왜의 면모가 백제 정벌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설명 할수 있다.[65] 고구려가 신라를 속민에서 신민으로 예속관계를 강화하여, 왜와 백제로부터 구해주고 보호해줬다는 뜻이다.[66] 광개토대왕릉비 10년 경자년 기사에 고구려가 신라를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신라에는 5세기 중반 나제 동맹 이전까지 고구려군이 주둔했다. 일본서기 464년 2월의 기사를 참조하자. 지금으로 따지면 한미 상호 보호조약에 따른, 주한미군의 주둔과 비교할 수 있다.[67]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68] 402년에 신라왕이 되는 실성마립간이다.[69] 조공을 바치고 받는 관계가 속민의 관계임은 용례로써 알수 있다. 廣開土王陵碑의 다른 기사에 의하면 東夫餘는 '鄒牟王의 屬民이었는데 중간에 조공하지 않으므로' 廣開土王 20년에 고구려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한다. 즉 속민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조공을 바치냐 안바치냐의 상대적으로 느슨한 개념이었을 수도 있다.[70] 광개토대왕릉비 영락 10년에 신라가 조공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전해지지 않는다.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71] 명백히 말하자면 고구려에게는 문장의 주어가 아니지만, 고구려측 기록이므로 누구의 속민인지는 서술할 필요가 없다[72] 같은 용례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광개토대왕비릉 말고도,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에서도 등장한다. 참고: 〈고대의 奴 관념〉, 이영훈[73] 신묘년조를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해도, 릉비는 고구려의 질서에서 이탈한 백제와 신라를 다시 고구려의 질서로 편입 시킨 영웅에 대한 헌사이므로, 노객에 대한 해석은 신묘년조 논란과는 별개로 백제와 신라를 다시 고구려의 질서로 훈도 시켰다는 논거임에는 한일 사학자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다.[74] 신민의 뜻[75] 이에 대해서는 김태식 교수가 후술하였는데 신라 내물왕이 광개토왕에게 사신을 보내 (신라왕 자신을 ) 고구려의 노객이라고 칭하며 "(고구려의)노객은 (그 신분이 대왕의)民(백성이니) 귀의하여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해석하였다. 일각이나 일본 측에서는 "(고구려의) 노객을 (내물왕) 왜가 (그들의) 民으로 삼았다." 혹은 "삼으려고 한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 경우에는 내물왕 스스로가 사신을 보내어 구원조차 요청하지 못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고 발언하였다. 같은 학회에서 4세기를 당담한 하마다 고사쿠 역시 개인이 투고한 논문에서 같은 근거를 들어, 김태식 교수와 의견을 같이 했다.[76] 그러나 하마다 고사쿠 또한 릉비는 아주 잘 짜여진 각본이므로, 신묘년은 그저 프로파간다며, 왜의 세력이 과장 되었다고 하였다. 나머지 일본 학자들은 하마다 고사쿠의 대전치문설을 지지하면서도 왜의 세력 의 강함에 대한 기준이 제각기 다르다.[77] 396년, 399년, 400년, 404년, 407년 기사들은 모두 백제, 왜, 신라, 가야에 관한 기사이다. 그러나 407년의 정미년 기사은 정황상 후연으로 보인다는 견해도 있다. 후연은 407년에 멸망했은데, 5만명의 대규모 군대가 살획하고 노획한 갑옷만 1만벌 이었다고 했으므로, 후연의 멸망에 결정타를 날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78] 영어로 치면 주절(主節)[79] 영어로 치자면 종속절이다. 수식어 거품절이라고 볼수 있다. 즉, 생략이 되어도 해석에 문제가 없는 문장이라는 것이고 단지 강조하기 위해 쓰여진 문장이라는 것이다.[80] 이 해의 정복 기사는 정확히 무슨 세력을 정복했는지는 문자 파손이 너무 심해서 알 수 없지만 지명으로 보아 백제라고 추정한다. 즉, 일본학자들은 신묘년조가 407년까지 수식한다고 본다. 그중에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신묘년 기사를 활용하여 407년까지 왜구의 세력이 어떤 방식으로든 주도적으로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백제라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반대편에서는 후연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으며, 논쟁은 팽팽하다.[81] 일본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신묘년 기사가 396년, 399년, 400년, 404년, 407년 기사들을 모두 수식한다면, 395년 비려(稗麗)을 정벌한 기사처럼 따로 앞으로 빼내서 서술해야 한다. 그런데 8년조 숙신 기사의 앞뒤는 396년 백제 정벌과 399년 신라의 내물왕이 노객을 자청하며 성지에 가득찬 왜군을 격퇴해 달라고 요청하는 기사다. 391년 기사와 396년 백제 정벌 기사만 그 맥락이 닿고, 후에 등장하는 399년, 400년, 404년은 맥락상 다른 결이라는 것이다.[82] 407년의 기사는 비문 파손이 심해서 명분이 기록되었는지 기록 되지 않았는지는 알수 없기 때문에 예외다.[83] 여기까지는 왕건군의 해석과 동일하다. 왕건군도 신묘년 기사는 오직 396년 백제 원정만 수식하는 전치문으로 봤다.[84] 2019년 연구에 따르면 충주 고구려비는 당초 알려진 것과 다르게 광개토대왕 치세기인 영락 7년 정유(정유년)라는 문자가 쓰였음을, 3D 스케닝으로 동북아역사재단이 밝혀냈다. 고로, 학계의 기존 정설이던 광개토대왕의 치세기 이후에 신라가 속민화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신민화되었다는 주장과 전면 대치된다. 신라의 신민화나 종속화가 된 시점은 영락 7년보다 더 전일 수도 있다. 다만 아직 연구 중인 사안이니 더 기다려봐야 한다.[85] 왕건군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왜라는 세력은 한반도를 여름에만 나타나서 사람과 식량을 약탈해 돌아가는 해적의 속성을 띈 세력으로 통치을 할수 있는 세력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이미 왜의 세력을 응징하려고 백제에 당도 했을때는 이미 왜의 세력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난 후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대의 사료들을 보면 여름에 계절풍을 이용해 한반도 남부에 상륙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가지 가설은 여름에 상륙하여 노략질하다가, 겨울에 훈풍이 불때 전초기지인 대마도로 도망 갔다고 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임나일본부설 당대 항해력 항목을 참고하자. 이러한 관념에서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조 했을때, 광개토대왕은 391년 5월에 즉위 했고, 7월에 백제 원정을 나섰고 10월까지 전선을 밀고 내려와 지금의 인천-강화도 일대까지 백제의 영토를 빼앗은 것으로 되어있다. 만약 진짜 391년에 왜의 세력이 출몰 했다면, 그 해 여름일 개연성이 매우 크고, 이에 고구려가 대응하러 출전한 것이다. 고로 왕건군은 임나일본부설을 완전히 부정하는 학설을 지지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왕건군의 논리는 왜의 면모가 전혀 도출되지도 않았는데, 신묘년 바다를 건너 온 왜의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프로파간다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너무 억어지스러운 면이 있다.[86] 직접적으로 신민이라고 씌여져 있지는 않다[87] 전근대 시대에 이런 경향은 매우 흔했다. 유럽에도 이런 식으로 인질외교관으로 간 사람들은 매우 흔했다. 로마 제국 시기에 로마에 칭신하던 여러 게르만 부족들이 귀족의 자제들을 인질 겸 유학생으로 파견하여 로마식 교육을 받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자란 게르만 귀족들은 자라서 대(對) 로마 외교의 선봉장이 되어 부족에 크게 기여했다. 동고트 왕국의 성군 테오도리크 대왕도 이런 경우이다. 따라서 전근대 시대에 보내어지는 인질들은 전쟁 포로와 같은 진짜배기 인질들과는 달리, 그 나라 정부나 왕실로부터 우대를 받았고, 가끔씩 볼모의 모국과의 외교를 위한 창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런 제도가 오늘날에는 다른 나라에 외교공관을 설치하고 외교관을 상주시키는 제도로 발전한 것이다.[88] 또한 인질을 보낸 나라가 인질을 받은 나라보다 힘이 약하다고 해석하기도 어려운 것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진나라의 왕족이자 나중에 진시황의 아버지가 되는 자초는 이웃나라인 조나라에 인질로 보내졌지만, 그렇다고 이 내용을 가지고서 진나라가 조나라의 속국이었다거나 혹은 조나라가 진나라보다 더 강대국이었다고 해석하는 사람은 없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진나라는 조나라와 초나라 같은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강력한 나라였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자의적인 해석이며 특수한 경우이므로 모든 인질이 외교관적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해석하기 어렵다. 선술된 자초의 경우에도 차기 권력 다툼에서 멀어져 정치적 숙청이 되는 경우였으며, 인질의 ‘질(質)’의 뜻은 담보, 저당이라는 뜻이다. 즉 아쉬운 쪽에서 먼저 내미는 카드이지, 진나라의 특수한 경우를 빗대어 양극단의 해석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선술 되었지만, 거의 동시대에 신라가 실성 마립간김복호를 보낸 경우도 신라측에서 아쉬우니깐 외교적 카드로 먼저 내민 것이다. 다만 일본 주장대로 왜가 강대해서 백제 신라가 인질을 내민 것이며 , 도해파의 근거가 된다는 극단적인 주장과 한국측 주장대로 단지 외교관일 뿐이라는 해석은 모두 통용되기 어렵다는 것을 주지 시키려고 사례를 들었을 뿐이다. 백제의 동성왕 같은 경우를 빗대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기에 인질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質은 말 그대로 저당이다. 저당잡은 물건은 언제든지 돌려줘야 할 수 있기 때문에 손상이 가지 않게 각별히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하다. 멀리 가지 않아도 박제상과 미사흔의 일화만 봐도 자초의 경우를 빗대어 인질을 무조건 외교적인 성격을 띈 특사나 외교관으로만 보는 것도 무리이다.[89] 일본서기에 백제의 왕세자나 왕자 중에 인질이라고 서술된 사람은 부여풍뿐이다.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에서 부여풍은 인질로 나온다.[90] 임나일본부설의 현 주소는 백제의 요서경략설과 비슷한 면이 있다. 요서경략설은 사실 뒷받침하는 사서도 의외로 꽤 있고 학계에서도 꽤 진지하게 연구한다. 하지만 사료 비교검증으로 점점 힘을 잃었고, 한국 학계의 정설은 '잘해봐야 백제인 집단 거주지 정도'로 굳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고 믿고, 심지어 국정 국사 교과서에서도 '백제요서에 진출했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소개되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식인 것이다.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경영설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뒷받침하는 사서는 있는데 교차검증상 근거가 희박하고 일본 학계에서도 인정 안 하는 분위기인데, 학계가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고 대중들 중에서도 믿는 사람이 아직 많다.[91] 원래는 '사지절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였는데 모두 거부당하고 안동장군을 하사 받는다. 후에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가야 육국제군사를 하사받았다. 또 그 후에 왜왕 興이 이번에 또 '백제'를 끼어넣어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가야 칠국제군사'를 자칭하자 이번에도 중국에선 백제를 누락하고 육국제군사로 임명했다.[92] 처음에는 안동대장군이 아닌 안동장군이었다. 안동장군과 안동대장군은 1~2단계 차이가 난다[93] 고구려는 이보다 두 단계 더 높은 '정동대장군'이라는 직위를 받기도 했다.[94] 鎭東將軍 中軍將軍 鎭軍將軍 撫軍將軍 安東將軍 순서다.[95] 비슷한 예가 중국의 책봉 사례에서 수도 없이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진덕여왕은 '신라낙랑군왕'으로 책봉되었는데, 낙랑은 정작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에 있었다. 백제위덕왕 또한 '동청주지사'라는 책봉명을 받았는데, 동청주는 중국 산둥지방이다. 이처럼 남의 영토 이름을 책봉명으로 하사받는 일은 당시에 매우 흔했다.[96] 신라는 후술하겠지만 오래 전부터 속민이었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 누락된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니깐 조공 기록이 누락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당장 능비에 나오는 400년의 매금(신라왕)이 직접 알현하여 조공하였다는 기사도 삼국사기에는 없다.[97] 단순히 개찬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학자라서 일본인들이 호의를 보내는 편이다.[98] 임나일본부설 문서에 첨부된 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5세기 노중국 교수의 논문 내용이다.[99] 이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은 조금씩 다르지만, 백제 근초고왕이 죽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결탁은 균열이 갔고, 370년 즈음에는 신라 사신 위두가 고구려와 함께 전진에 조공하러 가는 시기에는 신라의 고구려 종속화가 심화되었리라 본다.[100] 다만 스스로 와서 즉, 입조해서 조공하지 않았다는 거지, 조공을 아예 안 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억측이다.[101] 현재로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가 아니라 삼국사기 쪽이 1년 오기했다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광개토왕 치세기에만 국한된 것으로 여긴다. 백제의 소실된 역사책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에도 삼국사기에서 기록된 백제 측 기록은 상호 교차검증되고 기년이 같기 때문이다.[102] 392년 1월 기사[103] 401년에 귀국하여 이듬해 402년에 왕위를 이어받은 실성 마립간이다. 정치적 입지도 변변치 않았고 직계도 아니었던 그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구려가 친고구려파의 수장 격인 실성마립간을 후원했으리라는 의견이 대세다.[104] 삼국사기에 따르면 같은 해 5월에 즉위했다.[105] 고국양왕 치세기로 볼 수도 있다. 고국양왕이 죽기 직전에 신라는 고구려에 인질을 보냈기 때문이다.[106] 410년 기사: 영락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107] 이에 대해서는 한국 학계에서는 내물왕이 직접 알현하며 조공을 바쳤다고 해석하지만, 일본 학계에서는 나중에 고구려로 인질로 파견되는 복호를 시켜 알현하며 조공했다고 주장한다.[108] 중국 집안에서 발견된 청동거울과 신묘년이라고 적힌 기록을 두고, 토론회에 참석한 조법종 교수도 왜국 주체설에 회의감을 드러내었다. 언론보도 고로 한국 주류사학계에서도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 왜국 주체설에 의구심이 있음은 확실하다. 다만 확실히 논박할 만한 근거가 아직 빈약하기에 아직 조사나 연구가 진행되거나 확실한 근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다.[109] 개찬설을 주장했다가 이미 일부 보기 좋게 논파당했으니 신중하게 접근하려는 한국 학계의 태도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국 학계가 광개토대왕릉비에 관심을 둔 지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이전에는 전쟁의 풍파와 급속한 변혁기 등을 거치면서 전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를 조사한 지 100년이 넘었으니, 지금까지는 수세에 몰렸던 게 당연하다. 한국 학계가 광개토왕릉비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지는 길어봤자 3~40년 정도이다.[110] 물론 근래에 들어와서는 한국 사학자들도 능비의 글은 개찬되지 않았다고 여기고 일본의 판독과 같이하지만, 해석이 다른 것뿐이다. 한자는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함축된 의미가 많으므로 당연히 판독이 같아도 해석은 가지각색이다.[111] 걸프 전쟁 이전에 벌어진 8년 동안 이란 이라크 전쟁을 치르면서 이미 이라크는 경제적으로 파탄이 난 상태였고, 도저히 미군한테 저항할 수 있는 수준이 못 되었다.[112] 로마가 이렇게 전력을 다해 공격하자 다키아 왕국은 6년 만에 완전히 멸망해 버렸다. 사실 다키아 왕국은 부족국가 수준이지, 결코 로마와 견줄 수 있는 강대국이 아니었다.[113]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 기록된 동일 사건은, 고구려본기의 기록이 더 상세하므로, 고구려 측 전승을 기록했고, 백제본기에서 상호 교차 검증 가능하도록 기사를 수록했을 가능성이 크다.[114] 물론 일본서기에는 '일본서기'답게 백제를 능욕하듯이 쓰여있는데 왜의 응신천황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아화왕)을 왕위에 앉히고 직지왕의 누이 등 백제 여자들을 조공하게 한 것으로 쓰여 있으나 이는 사실을 과장·윤색한 것이다.[115] 사실 이는 교차검증이 불가능한 모든 사료들의 함정이기도 하다.[116] 보통 삼국사기에서는 貢과 조공을 혼용하는 편이다[117] 十三年, 春, 百濟遣使, 進良馬二匹. 백제왕이 좋은 말을 바치다(貢하다).[118] 고구려의 신라 종속화는 따라서 신묘년이나 그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119] 왜냐면 김부식은 대체로 고구려 자체 기록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초기 한정이지만[120] 삼국사기에서 부여를 정벌하는 기사에는 상당히 괴기스러운 설화가 많이 차용되었다.[121] 혹은 신라라는 견해도 있다. 중원 고구려비에서 도출된 당대의 고구려인들의 인식에서 신라는 그들의 東夷(동이), 즉 동쪽의 오랑캐였다.[122] 다만 패려는 이전에 조공을 바쳐왔다 혹은 이전부터 고구려에 복속해왔다라는 식의 서술은 없다.[123] 하지만 람세스 2세가 특별히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상에 어느 왕이 백성들한테 자기가 전쟁터에서 패배했다고 요란하게 떠들고 다니겠는가? 심지어 람세스 2세로부터 먼 훗날의 이집트 국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 7세도 자신이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고 도망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민심이 흔들릴까봐 악티움 해전에서 마치 이기고 돌아온 것처럼 요란하게 거짓으로 개선식을 벌였다.[124]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 중의 하나가 어느 사건으로부터 가까운 기록일수록 신빙성이 크고 반대로 먼 기록일수록 신빙성이 적다는 것인데, 당장 광개토대왕비문과 삼국사기에서 고국원왕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 지를 본다면 그러한 법칙이 반드시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고국원왕의 죽음으로부터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진 광개토대왕비문에서는 고국원왕의 죽음에 대해 침묵하는데, 고국원왕의 죽음으로부터 먼 시기에 만들어진 삼국사기에서는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에게 패배해 죽었다고 사실대로 기록하고 있다.[125] 광개토대왕비문에서 고구려 왕실은 하늘의 후손이니 곧 신에 가까운 존재인데, 그런 신성한 존재인 고구려의 왕이 속민이라는 백제한테 공격당해 죽었다고 인정해 버리면 그건 고구려 왕실에 대한 신성모독이다.[126] 法帖. 서예가들이 옛날의 잘 쓴 글씨들을 감상하고 따라 쓰기 위해 글씨들을 수집한 모음집. 원래는 일일이 탁본하여 모으거나 탁본한 글을 다시 목판으로 찍어 만들었지만 지금은 당연히 평범하게 인쇄한다.[127] 위에서 다루었듯이 광개토대왕릉비의 한자 서체는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정작 호국체에서 한자 지원이 안 되는 것은 팥빵을 만들 때 팥을 넣지 않는 격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수만 자에 달하는 한자를 디자인하기 위해 글꼴 제작 비용이 수 배로 상승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안 그래도 돈 부족하다는 국군 입장에는 한글만 만든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인명용 한자 등 자주 쓰는 한자만 만든다고 하더라도 글꼴 제작 비용이 갑절은 상승한다.[128] 천안 독립기념관 광개토대왕릉비https://maps.app.goo.gl/Djrz4kmrFoAF3KQW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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