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십육국시대 후진의 황족에 대한 내용은 요서(후진)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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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遼西현 중국 요하(중국명 랴오허) 강줄기 서쪽의 땅을 일컫는 역사적 지명. 요하 동쪽의 요동과 대응된다. 요하 서쪽의 해안지대(회랑)이다.
그 범위는 요동이 그렇듯 경계가 다소 애매하다. 선진시대에 설치된 행정구역 요서군(遼西郡)이 지금의 랴오닝성 서부와 허베이성 동부 지역에 있었는데, 행정구역 이외에 관습적으로는 좀 더 넓은 범위를 칭하기도 했다. 넓게 보면 산해관을 포함한 만리장성과 옌산산맥 동쪽, 시라무렌강 남단과 요하 서부지역이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2. 지리
요서의 북쪽은 대릉하와 시라무렌 강, 서요하의 수많은 강줄기가 분포한 구릉과 평야 지대이고 중부는 해발 200~800m의 산지이며 남쪽은 해안선을 따라 생긴 퇴적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발해만에 접한 남쪽은 해발고도가 낮아서 해수면이 변화하던 상고 시대에는 바다였던 지역이 많으며 갯벌과 습지가 주를 이루는 곳이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자연퇴적되기도 하고 간척되기도 하면서 습지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오늘날에도 습지는 많이 남아있다. 고대 요서의 모습을 예로 들자면 보령의 갯벌지형과 을숙도의 늪지가 혼합된 땅이었다고 보면 된다. 열대우림이란 차이만 빼면 방글라데시의 순다르반스와 같은 거대한 늪지대. 이러한 늪지대를 고대에는 요택(遙澤)이라 불렀고 간척이 많이 된 지금은 수많은 호수가 분포하고 있다.
산해관을 넘어 해안선을 따라 육로로 이동하기란 가히 헬게이트. 곳곳이 늪지와 갯벌이라 걸을때마다 다리가 푹푹 빠지는 것은 기본. 허리나 가슴높이까지 오는 수초밭을 헤쳐나가야 하고 우마나 마차를 이동시키려면 작은 배와 판자를 깔아야 하며 하천도 수십개를 도하해야 한다. 바닷물이 섞인 하천에 염분이 스며든 토양이라 제대로 된 농사는커녕 마실물조차 구하기가 힘들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에 갯벌도 넓게 분포하다보니 연안으론 큰 배가 다니기도 힘든 곳이었다. 따라서 역사적, 지정학적으로는 대체로 독자적 국가나 지방정권을 이룬 요동과는 달리 중원과 요동을 이어주는 회랑 겸 완충지로써의 가치로 존재했다.
3. 역사
요서 북쪽에는 강 상류를 따라 고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홍산 문화를 이룬 신석기 유적과 청동기 유적이 많이 출토된다. 또한 요서 지역의 청동기 문화 가운데 하나인 십이대영자 문화가 고조선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고, 후에 중심지가 요동으로 이동했다가 전국연의 습격 이후 평안도 일대로 이동하게 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고조선 최초의 수도인 아사달이 요서에 있었다는 말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인지라 한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장소임을 짐작케 할수있다. 또한 유목민족들이 이용하던 초원길의 시작점이자 끝점이기도 하였고, 동이와 고조선, 동호, 선비족(단부, 우문부, 모용부), 고구려[1][2],상술했듯 요서의 험난한 지형으로 인해 요동에서는 고구려, 북방민족 국가들 같은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 문화를 가진 국가가 형성되었다. 또한 중국의 공격으로부터 오랫동안 국가를 방어할 수 있었다.[4] 고구려-당 전쟁에서 당태종이 고구려군의 추격을 받으며 퇴각할 때 기록을 보면 이 요서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드러난다.[5]
그러나 만주와 중원을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이곳을 지배하는 자가 곧 중국의 패권을 쥐고있었다.[6] 북쪽으로도 길이 있지만 산악지대라서 사실상 이동경로는 해안가 인근 몇 km로 제한되었다. 만주의 유목민족들도 대부분 이 해안선을 따라서 침공해왔다. 중원왕조들도 이곳의 중요성을 잘 알고있어서 이곳의 끝에 산해관이라는 우주방어 요새를 세워 적의 침략에 대비했다.
거리가 먼 요동과 달리 역사적으로는 대체로 오늘날 차오양시에 속하는 대릉하 중류 일대까지를 중원 왕조가 차지하였으며 동쪽 국경의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주로 유주에 속하였다. 삼국지에서는 공손찬이 지배하는 유주가 요서 일대를 포함한다.[7] 이후 모용부 선비족의 전연과 후연, 북연이 차지하였다가[8]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개발살내고 요동을 완전히 차지한 이래로 계속 서쪽으로 세력을 팽창하였으며 고구려 말기까지 일부를 분점하는 등 고구려와 유목 및 중원 세력의 1차적인 국경지대 내지는 중간지대였다. 중원 측에서도 이에 대응하여 고구려 주변의 제종족을 통제에서 이탈시키려 노력하였고 일부는 이 일대에 배치하여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유목세력인 돌궐 또한 요서를 통해 고구려의 요동을 침략하기도 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에서는 대조영 집단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집단 및 거란, 말갈 등의 유민집단들을 모아 요서에 기미주인 영주를 설치하였고 여기서 당나라의 가혹한 대우에 거란의 이진충의 난, 고구려-말갈 유민집단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동쪽으로 탈주한 대조영 집단이 발해 건국의 기반이 되었으며 무왕 때는 역공을 가해 이곳을 거쳐 당나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유민 출신 치청 절도사 이정기의 가문도 이곳 출신이다.
이후 요, 금, 원, 청 등의 북방 유목민족과 명의 한족의 지배를 번갈아 거치다가 만주국,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하에 들어 요서성(랴오시성)이 설치되었다가 요동성(랴오둥성)과 합쳐져 랴오닝성이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다.
4. 주요 도시
5. 관련 기사
6. 관련 문서
[1] 요서의 동쪽 일부[2] 고구려 전성기 때 숙군성을 점령했었고, 후기 영류왕 때 조양성까지 점령했지만 얼마 지나지 못해서 다시 수나라 땅이 된다.[3] 중국 측 몇몇 기록에서 황해 바다를 건너 요서 지역을 잠깐 지배했다고 쓰여 있는데, 요서경략설 문서 참조.[4] 이 점이 있어서 고구려는 굳이 요서를 딱히 길게 지배하지 않거나 점령을 거의 안했다. 대신 북연처럼 친고구려 성향이 된 국가와 협력하는 방식을 선택했다.[5] 1차적으로 늪지대 요택을 넘어야 요하가 나오고 그 요하를 넘으면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천리장성이 나온다. 즉, 수십kg의 갑옷 병장기들과 군수물자를 들고 수백마리의 모기가 설쳐대는 늪지대를 씻지도 못한채 몇 날 며칠을 걸어서 통과해야 고구려의 군대와 겨우 만날 수 있다. 심지어 이렇게 만나더라도 이미 우주방어 모드에 들어가 여기저기에 있는 산성에서 대기하고 있는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6] 여기서 만리장성만 넘으면 바로 화북지방, 그것도 베이징이 코앞이다.[7] 공손도, 공손강 등의 동연이 지배하던 곳은 요동이었다.[8] 후연 말기~북연의 경우 명실상부 요서가 중심지였던 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