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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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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昌淳
1914년 5월 8일 ~ 1999년 4월 12일 (향년 84세)
나는 앞으로 이 건물이 남북의 학도가 한자리에 모여 조국의 장래를 의논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1]

1. 개요2. 생애
2.1. 학문 수학과 교수 생활2.2. 태동고전연구소와 지곡서당2.3. 이후의 태동고전연구소와 지곡서당
3. 여담4. 외부 링크

1. 개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한학자, 금석학자, 서예가. 본관은 풍천(豊川)[2], 자는 사문(士文), 호는 청명(靑溟), 충청북도 옥천군 출신.

1963년 태동고전연구소를 설립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문 원전을 강독하는 강좌를 진행하였으며, 1976년부터는 전문 연구인력을 대상으로 한학연수생을 선발해 집중적으로 한문을 연수하여 인문학 연구자를 다수 배출하였다.

2. 생애

2.1. 학문 수학과 교수 생활

1914년 5월 8일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 버구실마을에서 아버지 임원재(任元宰, 1886 ~ 1930. 7. 4)와 어머니 광산 김씨 김영례(金永禮, 1886 ~ 1970. 4. 6)[3]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유림(儒林)이었으나 뼈대있는 유학자 집안이라고 할 수는 없었고, 겨우 한자 몇 글자를 섞어 편지나 겨우 쓸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고 하며,[4] 가세 또한 풍족한 편은 아니었으며, 1924년 1월 21일 조부가 사망한 뒤에는 그나마 있던 농토도 팔아 근근히 입에 풀칠할 정도만이 남았다고 한다.

4세 때부터 조부 임경호(任敬鎬, 1852 ~ 1924. 1. 21)로부터 《천자문》을 배웠으며, 그 영향으로 정규 교육은 받지 않았다.[5][6] 조부가 사망한 뒤에는 가세가 기울어 따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14세에 이르러 충청북도 보은군에 있던 (일종의) 기숙형 서당 관선정(觀善亭)[7]에 들어가 겸산(兼山) 홍치유(洪致裕, 1879. 5. 12 ~ 1946. 12. 27)[8]의 문하에서 6년간 한학을 수학하였다.

20세 무렵에는 가세가 더욱 기울어 관선정을 나와야 했고, 그 뒤에는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에서 막노동으로 연명하였다. 8.15 광복 직후, 미군정이 교원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시행한 중등교원 자격 임용시험의 국어 교과국사 교과에 응시하여 합격했고, 경북중학교[9]대구사범학교 등지에 초빙되어 강사 생활을 하였으나 둘 다 오래가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경북여자중학교[10]에서도 교편을 잡았으나 역시 중도에 그만두었다. 6.25 전쟁 당시에는 충청북도 보은군으로 피난하였다가 1952년부터는 서울한의과대학[11]의 전임강사로 활동하였다. 1953년부터는 신석호의 추천으로 성균관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에서 시간강사로 활동하였으며, 1956년에는 조교수에 부임하였다.[12] 이 외에도 고려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등에도 출강하였는데, 당시에는 사료 강독과 한국고대사를 위주로 수업하였다고 한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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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 교수데모 당시 플래카드에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쓰고 있는 임창순.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4·25 교수데모에 앞장섰는데 당시 결의문에 '대통령 하야' 구호를 넣을 것을 주장하였고, 데모 당일에 들었던 플래카드에 "學生의 피에 報答하라."[14]라는 구호를 친필로 쓴 일은 유명하다.

이후에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에 통일방안 심의위원으로 참여[15]하였다가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3개월간 구속되었으며 석방 직후 해직[16]되었고, 1964년에는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면서 옥고를 치렀다.

학문적 성과로는 1946년 대구사범대학 재직 시절에 대구 무술명 오작비(大邱戊戌銘塢作碑)[17]를 발견했고, 1958년에는 그를 토대로 처음 연구 논문을 썼는데 그것이 「大邱(대구)에서 新發見(신발견)된 戊戌塢作碑(무술오작비) 小考(소고)」이다.

이후 1971년 문화부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되어 1997년 사임하기까지 두 차례에 걸쳐 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78년에는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를 판독하고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해박한 금석문 지식을 바탕으로 충주 고구려비,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판독과 해석에도 참여하는 등 고고학적인 분야에서 활약하였으며, 이 외에도 각종 서첩과 서지적 정보를 추적하는 일에도 다수 참여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규원사화》인데- 그 책의 내용이나 현재의 위상을 생각하면... 나름대로 흑역사[18]

1990년에는 지난 1980년 학회 활동이 중단된지 10년만에 한국서지학회를 재창립해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고, 이후에도 회장을 한 차례 더 맡으며 계간 《서지학보》를 발행했다. 그 밖에 세 차례 서예전시회를 가졌고, 1990년도 제2회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2.2. 태동고전연구소와 지곡서당

1963년 11월 3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동 동방연서회 사무실에 한문교육기관인 태동고전연구소(泰東古典硏究所)를 설립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문강좌를 개설했다. 임창순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교수 시절 만났던 고려대학교 출신 제자들의 권유로 시작했다고 한다.(「나의 학문 나의 인생 : 4·25 교수데모에 앞장선 한학·금석문의 대가 - 임창순」, 『역사비평』1992년 8월호, 역사비평사, 1992, 197쪽.) 초창기에는 종로 수표동 동방연서회[19] 그러나 개인의 옥고와 재정상의 어려움 때문에 수차례 자리를 옮기기도 하였다.

1976년 9월부터는 선경그룹최종현[20]이 운영하던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매년 10명씩 장학생을 선발해 3~5년간 매달 장학금을 지급하는 한학 집중연수를 시작하였다. 초창기 교육과정은 5년으로 사서삼경을 기본으로 이수하게 하였고, 동시에 모두 암송시켰다고 한다.[21]

1979년 11월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지둔리(현 남양주시 수동면 지둔리)로 옮겼는데 그곳은 원래 자신이 기거하기 위해 1974년 10월 마련한 곳으로, 새로 건물을 짓고[22] 연수생들을 뽑아 기숙생활을 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태동고전연구소 출신자들은 '태동고전연구소'라는 명칭보다도 '지곡서당'이라는 명칭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1981년 9월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지원을 중단했고, 1981년 12월 교육과정이 5년에서 3년으로 줄었는데, 이때부터 기숙사를 마련하여 연수생들로 하여금 기숙사에 살면서 연구소 공부에만 전념토록 하고 대학원 등 외부활동을 금지하였다.

여타의 한문 연수 기관과는 달리 사서삼경의 교재로는 《한문대계》[23]를 사용하는데, 그의 생전부터도 그랬다고 하며 그것을 선택한 이유는 주희의 집주(集註)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주석을 다양하게 섭렵하기 위해서라고 한다.[24]

임창순은 전통적인 한문 해석 방법이라 할 수 있는 현토(懸吐)를 반대하였다. 애초에 구결토 자제가 전통 시대에 한문을 해석하기 위한 방법에서 나온 것으로 그 자체로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토씨를 고집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구결토에 집착하다보면 한문 해석에서 방해가 된다는 것이 그 이유.[25] 그에 따라 제자들을 교육하는 데에서도 현토를 배제하였으며, 지금도 태동고전연구소에서는 현토를 가르치지 않는다.

1985년에는 연구소의 부지와 장서 일체를 한림대학교에 기증하였고, 8월 4일부로 연구소의 운영권을 학교에 위탁해 연구소를 한림대 부설로 편입하도록 했다. 임창순 자신은 1999년 4월 12일 타계할 때까지 태동고전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며 한학 연수생을 키우는데 매진하였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배출한 인재는 180여명에 달하며, 이 중 40여명이 대학교수로 활동하고 있고 80여명의 박사가 배출되어 대학 및 연구기관, 박물관 등에서 연구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1979년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했으며, 1995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98년 3월에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자신의 사재 모두를 출연하여 청명문화재단을 설립했고, 계간지인 《통일시론》을 간행하였다.[26] 이듬해인 1999년 4월 12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숙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5세. 장례는 고인의 유지에 따라 화장으로 치렀는데, 이 시기까지만 해도 노년층이나 지도층의 화장 문화가 정착된 단계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그의 화장 사례가 기사에 나기도 했다.#

2.3. 이후의 태동고전연구소와 지곡서당

임창순은 1985년 한림대학교 재단에 태동고전연구소와 지곡서당, 부속 대지 및 건물과 장서 일체를 돈을 받지 않고 넘기면서 기존의 연구소의 운영 방식을 존중하면서 교육 활동을 지속한다는 단 한가지의 조건만 걸었다. 이후 태동고전연구소는 한림대학교 부설이 되었으며, 한학연수는 3년 연한의 석사 과정이 되었다.

그러나 한림대학교 재단은 재정 문제를 들어 2014년을 마지막으로 태동고전연구소의 연수기능을 폐지하고, 연구기관으로 존속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임창순이 최초 연구소를 넘길때 걸었던 조건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었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태동고전연구소 측은 이미 한림대학교에 내준 재산 일체를 그대로 두고 나와 2015년부터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한학연수를 재개했다. 이때 연구소와 재단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지만 학계에 자리잡은 졸업생들의 도움으로 유지되는 중이다. 다만 합숙연수의 방식을 유지할 수 없다는게 안타깝다고.

지곡서당(태동고전연구소)의 마지막 입학생 모집은 2017년도로, 이후 2021년 청명문화재단의 홈페이지가 개편되면서 한학연수에 대한 내용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연수 기능은 완전히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암기(배강)을 중심으로 하는 연수 과정 자체가 합숙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이 불가능하고, 언어학적 분석 없이 그저 외우는 것이 들이는 노력에 비해 효용이 높은 것인지 비판이 있는데다.[27][28] 그러나 청명문화재단이 공식적으로 연수과정을 중단한다고 밝힌 적은 없다. 양질의 다른 한문 연수과정도 많이 생겼기에 창시자의 뜻을 떠나 지곡서당의 연수과정이 다시 부활할 수 있을지 전망은 어두운 편이다.

3. 여담

그 자신이 행서와 초서의 대가로 손꼽힐 만큼 유명한 서예가이기도 해서, 서예가인 검여(劍如) 류희강(柳熙綱),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등과도 교분이 있었다. 때문에 검여가 만년에 쓴 관서악부(關西樂府)라는 예서 대자 글씨에 대한 발문을 임창순이 직접 짓고 쓴 적도 있으며[29] 여초는 현재 지곡서당의 한옥 당채에 딸린 건물인 청류헌(聽流軒) 현판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그의 서예 작품은 행서와 초서, 혹은 행초서에 걸쳐 두루 나타나는데, 강렬하거나 굳건하지는 않지만 자유롭고 경직되지 않은 연미함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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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를 쓰고 있는 임창순.

성품이 소탈해서 제자들과는 격의 없이 맞담배를 피우기도 하였고 바둑과 마작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30] 남양주에 위치한 지곡서당 당채 앞에 위치한 그의 추모비에도 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습이 박재동의 캐리커쳐로 담겨있고, 그 앞에는 바둑판이 조각되어 있을 정도. 또 한 서예잡지 기자가 서예와 인격수양에 대해서 질문하자 "그건 서예학원 선생들이 회원 모집하려고 하는 거짓말이고 글씨는 내가 써서 보기 좋으면 그뿐."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 또 제자들과의 맞담배 일화에서도 나타나지만 대단한 골초로도 유명한데 술은 전혀 못마셨지만 담배는 많이 태웠다고 한다. 오죽하면 그의 글씨 작품에 많이 찍힌 낙관 가운데에는 '방랑연운(放浪烟雲)'이라고 쓴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 자신이 한학자이면서도 역사학과의 전임 교수로도 활동했고, 역사학 자체에 대한 관심도 높아서인지 태동고전연구소 수료생들 대부분은 역사학자인 경우가 많고, 철학 전공자들도 많은 편이며, 묘하게 예학(禮學)에 대한 관심도도 높다. 특히 최근 출간된 《의례역주》 (세창출판사, 2015, 전8권.)의 번역진 5사람 중 4명이 태동고전연구소 출신이며, 그에게서 직접 사서삼경을 배운 인물들이기도 하다.

태동고전연구소의 한학 연수생 선발은 1976년부터 있었으나, 그 이전에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문강좌를 진행하거나 각 대학에 강사로 출강한 바 있어 많은 학자들이 그에게서 한학을 배운 바 있다. 정옥자나 강만길 같은 이들은 한학 연수생 선발 이전에 그에게서 배었던 인물들이며, 한학 연수생 선발 이후로는 박한제, 김영하 같은 이들이 그에게서 배웠다. 학계에 송시열 재평가론을 앞서서 설파하고 있는 지두환이나 대중적으로 송시열 재평가 붐을 일으킨 오항녕 역시 한학 연수원 선발 이후 배운 인물. 임창순의 학문적 계보가 퇴계학파에 닿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묘한 인연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 뉴라이트 계열의 대표적인 인사로 꼽히는 이영훈 역시 그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운 적이 있는데 이것도 상당히 묘한 인연.

또한 태동고전연구소의 아이덴티티라 할 수 있는 '암송'과 '초서' 역시 임창순 개인의 고집이었다. 특히 암송의 경우 과거 자신이 수학했던 관선정에서의 평가 방식이었다고 하며,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것 또한 관선정에서의 방식이었다고 한다.

국내에서 아주 귀하게 활용 되는 광개토왕릉비 원석탁본을 소장하고 있고, 그의 아들인 임세권 교수가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결자 추론과 학자들의 동향을 망라하여 정리한 논문을 발표 했다. 원석탁본은 주로 대부분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이나 대학에 소장되어 있어서, 국내에서 아주 값진 자료이다. 다음은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그의 아들 임세권(任世權, 1948. 4. 9 ~ )[31]이 원석탁본에 대해 연구한 뒤 작성한 논문이다. 廣開土王碑(광개토왕비)의 硏究(연구) -청명본 원석탁본의 검토-

4. 외부 링크

- 태동고전연구소


[1] 1979년 지곡서당의 당채를 지을 때 임창순이 직접 지은 상량문의 일부. 젊은 시절의 통일 운동 활동과 후진 양성에 대한 그의 열망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임창순을 소개할 때 반드시 나오는 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이후에 건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면...[2] #. 목사공파(牧使公派) 28세 순(淳) 항렬.[3] 김성현(金成鉉)의 딸이다.[4] 심지어 임창순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부친 임원재는 기회만 있으면 출세하려고 했다고 한다.(「나의 학문 나의 인생 : 4·25 교수데모에 앞장선 한학·금석문의 대가 - 임창순」, 『역사비평』1992년 8월호, 역사비평사, 1992, 182~183쪽.)[5] 조부는 학교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곳이라며 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나의 학문 나의 인생 : 4·25 교수데모에 앞장선 한학·금석문의 대가 - 임창순」, 『역사비평』1992년 8월호, 역사비평사, 1992, 182~183쪽.)[6] 임창순과 같은 세대를 비롯해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한학자들의 경우, 유사한 사례를 경험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보이는데, 유림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간직한 경우에는 이러한 보수적 관점을 배경에 둔 조치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7] 보은군 보성 선씨 집안의 선정훈(宣政薰)이 1926년에 설립한 서당으로 인재를 선발해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며 학문을 가르쳤다. 관선정 출신으로 역사학자 신석호(申奭鎬), 한학자 변시연(邊時淵) 등이 있다. 관선정 출신의 한학자 정기형에 의하면 관선정은 1944년까지 보은군 외속리면(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하개마을 선병국 고가(宣炳國古家) 맞은편에 있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철거된 후에는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서령마을,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 등으로 옮겨가며 1951년까지 존속했다 한다.[8] 성리학자, 자(字)는 응원(應遠). 퇴계학파 권상익의 문인이다. 을사의병 당시 의병장 이강년의 휘하에서 종사관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남양홍씨(토홍계)세보 2권 287쪽 참조.[9]경북고등학교[10]경북여자고등학교[11]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전신. 본래 1948년 설립된 동양대학관(東洋大學館)의 후신으로 부산 피난 시절에 서울한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1955년에는 동양의약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다. 1965년 경희대학교에 인수되었다. 참고자료[12] 임창순, 「나의 성균관대학 시절」, 『사림』12·13, 수선사학회, 1997, 808~809쪽.[13] 임창순, 「나의 성균관대학 시절」, 『사림』12·13, 수선사학회, 1997, 808~809쪽.[14] 구호는 국문학자로 당시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조윤제가 제시하였다.[15] 이러한 활동은 민자통에서 활동하던 성대의 동료 교수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이종률과의 인연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종률과는 일제강점기부터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나의 학문 나의 인생 : 4·25 교수데모에 앞장선 한학·금석문의 대가 - 임창순」, 『역사비평』1992년 8월호, 역사비평사, 1992, 188쪽.)[16] 임창순의 회고에 의하면 권고사직이라고 한다.(임창순, 「나의 성균관대학 시절」, 『사림』12·13, 수선사학회, 1997, 813쪽.)[17] 보물 제516호. 신라시대의 비석으로 저수지 축조 과정을 밝힌 내용이다. 현재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18] 사실 이때 규원사화의 서지를 감정한 인물 가운데에는 손보기, 이가원도 포함되어 있다.[19] 서예가 김용진, 김응현 등이 창설한 서예 단체.[20] 바로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부친이다.[21] 태동고전연구소의 '시험'이라 할 수 있는 '암송'은 현재도 시행되고 있는데, 지금은 사서만을 외운다. 이 외의 과목은 따로 시험을 본다.[22] 이때 들어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글씨를 써서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정일균 증언)[23] 1909년 일본에서 발간된 총서로 1973년 증보되었다.[24] 일반적으로 다른 한문 연수기관에서는 내각본(內閣本)으로 불리는 사서대전 판본을 쓴다. 현재는 학민문화사에서 영인해 팔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판본. 하지만 한문대계 판본은 오탈자가 많기로 악명이 높다. 반면 내각본의 경우 오탈자가 적은 편이다.[25] 「나의 학문 나의 인생 : 4·25 교수데모에 앞장선 한학·금석문의 대가 - 임창순」, 『역사비평』1992년 8월호, 역사비평사, 1992, 201쪽.[26] 임창순은 민자통 활동이나 이종률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듯 오래전부터 통일운동에도 관여한 바 있다. 때문에 1979년 지곡서당 상량문에서 "나는 앞으로 이 건물이 남북의 학도가 한자리에 모여 조국의 장래를 의논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라는 언급도 한 바 있다.[27] 지곡서당의 연수 방법은 영어나 다른 언어에도 적용은 가능하다. 일례로 오스트리아 출신 물리학자 존 폰 노이만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이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통째로 외운 것. 하지만 영어를 그렇게 배우는 방식이 보편적이지 않은 것은 들여야 하는 노력이 어마어마한데 비해 효용이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이다.[28] 지곡서당에서 사서를 암기하는 것은 단순히 한문이라는 어학을 익히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서는 동아시아의 고전 텍스트로서 각종 문헌의 전거로서 다양하게 활용되기 때문에 이를 암기하면 문헌의 맥락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매우 용이하기 때문이다. 지곡서당에서 암송과정은 1학년 과정에만 해당하며 종로에서 3년 과정을 수료한 졸업생 역시 사서 암송과정을 통과했으므로 합숙이 지곡서당 교육과정의 전제는 아니다.[29] 정확히는 류희강이 임창순에게 발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고, 임창순이 지어준 발문을 미처 다 글씨로 옮기지 못하고 죽었는데, 임창순이 그 나머지를 이어 쓴 것이다.[30] 한학자 가운데 바둑을 좋아했던 인물로는 실제 단까지 취득했던 신호열이 있다.[31]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1975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 석사 학위(석사 학위 논문 : 한반도 고인돌에 대한 일고찰), 1994년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사학 박사 학위(박사 학위 논문 : 韓國 先史時代 岩刻畵의 性格(한국 선사시대 암각화의 성격)를 각각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