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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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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최종건
(1953~1973)
제2대
최종현
(1973~1998)
제3대
손길승
(1998~2004)[A]
최태원
(1998~ )[A][B]
[A] 1998년, 손길승은 SK 그룹 회장, 최태원은 SK 주식회사 회장으로 공동 취임.
[B] 2004년까지 손길승(그룹), 최태원(주식) 공동 회장 체제로 운영되다가 손길승 회장이 사임하면서 최태원에게 그룹 회장직 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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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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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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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 SK 제2대 회장
최종현
崔鍾賢|Chey Jong-hyun[1]
파일:SK_최종현.jpg
<colbgcolor=#ee7609> 출생 1929년 11월 21일[2][3]
경기도 수원군 안용면 평리
(現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평동)
사망 1998년 8월 26일 (향년 68세)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수성 최씨[4]
직업 기업인
학력 수원농림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화학 / 수료)
위스콘신 대학교 (화학 / 학사)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
부모 아버지 최학배, 어머니 이동대
형제자매 누나 최양분, 최양순
최종건
여동생 최종분, 최종순
남동생 최종관, 최종욱
배우자 박계희(1935 ~ 1997)
자녀 장남 최태원
차남 최재원
장녀 최기원
신체 175cm, 80kg

1. 개요2. 생애
2.1. 기업관·국가관2.2. 인재 양성2.3. 조림 사업
3. 별세4. 일화
4.1. 어록
5. 수상경력6.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SK그룹 제2대 회장.

2. 생애

1929년, 아버지 최학배와 어머니 이동대 사이에서 4남 4녀 중 차남으로[5] 경기도 수원군(현 수원시)에서 태어났다. 수원농림중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서울대학교 농화학과 재학 중 미국 유학을 떠나 위스콘신 대학교로 편입해 1956년 졸업하였다. 3년 후인 1959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과정[6]을 마친 뒤 귀국하였다. 유학시절 자유주의 시장경제 수업을 들었으며, 그 영향으로 국내기업인 중 자유시장경제이론에 가장 밝았고, 가장 잘 실천한 것으로 평가된다.

1962년에 선경직물 이사직을 맡으면서 선경그룹 경영에 참여하였다. 형 최종건이 1973년 폐암으로 별세하자 선경그룹을 지휘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선경그룹은 잠재력은 있어도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기업이었지만, 최종현의 리더십 아래 한국 재계 5위 이내의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물론 최종건이 닦아놓은 기반이 있었지만 최종현이 창업주가 아님에도 창업주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2.1. 기업관·국가관

파일:Chey Jonghyon.jpg
최종현 회장의 기업관∙국가관은 사업보국(事業報國), 기술보국(技術報國), 자원부국(資源富國)으로 요약할 수 있다. 최 회장은 사업과 기술로 나라에 보답하고, 자원을 확보해 나라를 잘 살게 만드는 것을 소명으로 여겼다.
선경을 국제적 차원의 기업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두 가지 명제를 분명히 제시해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실천해 줄 것을 당부하고자 합니다. 첫째 명제는 석유로부터 섬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계열화를 확립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유산업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석유화학공업에의 진출이 불가피한 것이며, 더 나아가 석유정제사업까지도 성취시켜야 하겠습니다. 둘째 명제는 기업 확장과 더불어 경영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입니다. 섬유공업에서 석유정제사업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를 성취해 나가는 데에는 수억 달러에 달하는 자본력과 고도의 전문지식과 기술이 필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국제적 기업으로서 손색없는 경영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75년 선경그룹 신년사에서

특히 최 회장은 단순히 돈을 버는 사업보다 대한민국이 앞으로 먹고 살 산업을 발굴하고 키우는 데 열정을 보였다. 최 회장이 1973년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추진하겠다는 비전을 밝혔을 때 주변에서는 허황된 꿈으로 치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 회장은 1973년 선경석유를 설립한 뒤 일본 이토추상사와 함께 정유공장을 설립키로 하고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원유공급을 약속받는 등 차근차근 사업을 준비했다. 이 같은 계획은 1차 석유파동으로 무산됐고 관련 글로벌 합작사업들도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최 회장은 장기적 안목으로 중동지역 왕실 등과 석유 네트워크를 구축해갔다.

선경직물에서 생산하는 합성섬유들의 주 원료인 석유를 수입하면서 중동거래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았다. 이를 바탕으로 1980년 2차 석유파동으로 한국이 석유 위기에 직면했을 때 최종현 회장이 위기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에 협력하는 나라에는 석유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결정에 따라 한국이 석유수출금지국으로 분류돼 원유공급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최종현 회장을 사우디아라비아로 급파한 것이다. 최종현 회장이 사우디로부터 하루 15만 배럴의 원유를 공급받을 정도로 사우디 왕실 측근과 친분이 두텁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디에 급파된 최 회장은 사우디 왕실과 접촉하면서 야마니 석유장관을 만나 한국에 대한 OPEC의 석유수출금지 조치를 해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사우디 왕실은 그의 요구를 들어줬고, 우리나라는 에너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이후 대한석유공사(유공) 합작사인 걸프의 철수를 사전에 예상한 최 회장은 걸프 보유 지분 인수를 위해 직접 TF를 이끌었고, 1980년 지분 인수에 성공하며 유공의 1대 주주가 됐다.[7] 원유 확보와 중동 오일머니 유치 측면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이후 유공은 세계 최대의 정유공장이자 복합 석유화학 단지를 갖춘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났다.

최종현 회장은 국가 전체가 흔들렸던 석유파동을 교훈 삼아 해외유전 개발에도 적극 나섰다. 진정한 수직계열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결국 석유개발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무엇보다 최종현 회장은 1970년대 두 차례 석유파동을 경험하면서 자원이 곧 무기이고 국력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유전개발은 성공확률이 5%에 불과해 최 회장이 추진했던 석유개발은 반대가 많았다. 실제 거액이 들어갔지만 실패가 계속됐고, 헬기로만 접근할 수 있는 미얀마 밀림에서 5,600만 달러를 투자해 석유탐사를 나섰다가 빈손으로 철수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연이은 실패를 딛고 결국 SK는 1984년 북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SK는 9개국 13개 광구에서 일 평균 55,000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고 4개의 LNG 프로젝트를 일궈내며 최 회장이 품었던 ‘무자원 산유국의 꿈’을 이뤄냈다.

에너지∙화학 사업 진출 이후에도 끊임없이 미래를 준비한 최 회장은 1980년에 이미 정보통신 중심의 시대가 올 것임을 강조하는 혜안도 보였다. 유공 인수 후 임직원과의 대화에서 "조만간 무선 정보통신이 주도하는 시대가 올 테니 여러분도 거기에 대비해야 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고 한다.

선진 산업동향을 분석하기 위해 1984년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설립한 최 회장은 정보통신 분야가 핵심성장 동력이 될 것임을 파악하고, 1985년 미주경영실 산하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조직, 현지 이동통신사에 직접 투자를 하거나 이통사에 직원을 파견, 실제 근무를 하는 방식으로 시장 동향을 파악하고 정보통신 경영 노하우를 축적했다. 1990년에는 미국 IT업체와 합작, 선경텔레콤을 설립하면서 정보통신산업 진출을 위한 준비를 갖췄다.

이후 1990년 노태우 정부에서 "공기업인 한국이동통신과 경쟁할 수 있는 민간사업자(제2이동통신 사업권) 선정"을 발표하자 그동안의 준비를 바탕으로 입찰해 압도적인 점수 차로 1위에 선정됐고,[8] 1992년에 주력계열사 유공을 중심으로 미국 GTE와 영국 보다폰 등 국내외 주주들을 총망라해 '대한텔레콤'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이었기 때문에[9] 특혜 의혹이 생겼다. 14대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서 노태우와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당 대표로 있던 김영삼이 자신의 지지율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선경그룹이 사업권을 포기할 것을 강요해 최종현 회장도 정부가 먼저 사업권을 취소하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지만 김영삼이 이 말을 듣고 바로 기자들에게 선경이 제2이동통신사업권을 포기하기로 했다고 발언해 1992년 8월 27일 선경그룹이 사업권을 자진 반납하고 공식적으로 노태우 정권에서는 통신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듬해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청와대에서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선경에 주지 않기 위해서 사업자 선정을 최종현이 회장을 겸직하던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맡긴다.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민간 자율에 의한 단일 컨소시엄 방식으로 바꾸고 컨소시엄 구성을 전경련에서 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선경그룹에서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을 포기[10]하는 대신 제1이동통신을 서비스하고 있던 공기업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다. 인수 후 CDMA 상용화에 힘써 1995년 12월 31일 최종 테스트에 성공해 1996년 1월 3일부터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최종현 회장은 폐암 투병 중에도 그룹 업무보다 나라경제 걱정을 많이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최 회장은 일찍이 1970년대부터 ‘21세기 일등국가론’을 제시하며 “21세기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SK는 세계 100대 기업이 될 것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병상에서 그는 여러차례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나의 가정이나 회사는 그 나름대로 성장할 수 있는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제 여생은 국가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보람된 일에 몰두하고 싶다.”(최종현 지음,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

실제로 그는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 그룹일은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하면서도 학자들과의 토론만은 거르지 않았다. 미국 뉴욕의 슬론 케터링병원에서 폐암수술을 받고 코네티컷의 한적한 곳에 집 한채를 빌려 요양중이던 1997년 8월에는 송병락 서울대 교수,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등 학자들을 일부러 미국으로 초청해 토론을 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건강이나 챙기라고 극구 말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학자들과 토론을 하고 나면 그렇게 즐거운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는게 주변 사람들의 회상이다.

최 회장은 이 시절, 학자들과의 토론 내용을 빠짐없이 정리해 나갔다. 이같은 원고들을 모아 사후에 출간한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이라는 책을 보면, 최 회장의 당시 관심사는 대부분 국가경제의 장래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인재양성, 글로벌라이제이션, 국가경제의 선진화 등은 지금 곱씹어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내용들이다.

최 회장은 21세기 일등국가가 되기 위한 구체적 방향으로 글로벌리제이션과 시장경제 활성화를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를 제시했다. 최종현 회장은 1980년대 세계변화의 흐름이 민족주의(Nationalism)에서 지역주의(Regionalism)의 시대를 거쳐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최종현 회장은 세계화의 개념조차 생소했던 당시, 시장의 힘이 한 국가의 경제를 넘어 주변 지역과 세계를 통합시킬 것이라며 글로벌 시장 진출과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최 회장은 1993년 전경련 회장에 취임하며 경제5단체 공동으로 국가경쟁력 민간위원회를 발족해 ‘Mr.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해 실물경제 이론에 해박했던 최 회장은 학자, 관료들과 열띤 토론을 하며 시장경제 시스템과 질서를 강조했다. 최 회장은 세무조사 등 불이익을 겪으면서도 금리인하, 규제철폐, 쌀 시장 개방 같은 민감한 문제에 고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기 1년 전부터 아시아 경제위기를 경고하고 폐암 투병 중이던 1997년 10월에는 산소마스크를 달고 휠체어를 탄 채 청와대에 찾아가 김영삼 대통령을 독대한 자리에서 외환과 환율, 은행이자율에 관해 직언을 했다는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비상조치를 더 이상 늦췄다가는 '큰일난다'는 호소도 했지만 돌아온 김영삼 대통령의 반응은 '알아보겠다'가 끝이었다고 하며, 이에 자택으로 귀가한 최 회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1997년 IMF가 터지자 한국은 결국 경제위기를 겪게 된다.

2.2. 인재 양성

최종현 회장은 인재를 가장 중시했다. 우리나라와 같이 자원이 부족한 나라는 사람이 제일 큰 자원이고, 기업 경쟁력 역시 사람에서 비롯된다는 게 최 회장의 평소 지론이었다고 한다. 그는 여느 기업가와 달리, 최종현 회장은 기업을 뛰어넘어 사회 전체를 이끌 인재를 양성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명문대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은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1979년 SK그룹의 경영관리체계인 SKMS(Sunkyoung Management System)를 정립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국내 기업 중에 가장 체계적인 경영이념으로 평가받았다. 1990년대에는 이들을 더욱 발전시킨 SUPEX(수펙스) 경영기법을 정립했다. 이는 Super Excellent라는 최상의 목표를 세운 뒤 목표 달성을 위해 직원들의 역량을 충분히 활용, 최상의 성과를 내고 최고의 이익을 창출하는 기법이다. 인간의 성장을 신뢰하는 최종현 회장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SKMS와 SUPEX에 관해 강연 하는 최종현 회장의 동영상을 아트센터나비[11]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교육이나 연수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1975년 3월 최 회장이 워커힐 호텔 부지 내에 300평 규모로 국내 기업 최초의 연수시설인 선경연수원(현 SK아카데미)을 설립한 것만 봐도 얼마나 사람과 인재를 아꼈는지 알 수 있다.

최 회장은 인재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한다고 보고 1974년 세계적 학자 양성이라는 목표 하에 사재를 출연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일등 국가, 일류 국민 도약과 고도의 지식산업사회 건설’이라는 100년의 목표로 출발한 세계적 석학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현재까지 800여 명의 해외 명문대 박사를 비롯해 3,700 여명의 인재들을 키워냈다.

재단 설립 당시만 해도 SK는 국내 50대 기업에 겨우 포함될 정도의 중견기업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는 장학재단 설립을 두고 회사 내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최 회장은 사재를 출연하며 경영진의 불만을 잠재우고 재단 설립을 추진했다고 한다. 최종현 회장은 서울 퇴계로 요지에 위치한 5층 빌딩 한 채를 출연금으로 내놓았으며,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양성한다는 차원에서 재단명에도 회사 이름을 반영하지 않았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장학사업에는 최종현 회장 때부터 최태원 회장까지 이어져온 전통이 있다. 조건 없는 지원, 유학 전 사전교육, 유학생과의 토론 등이 그것이다. 거액의 유학비용을 지원하는 조건은 ‘국가와 사회를 위한 일꾼이 되어 달라는 것’ 단 한 가지. 절대 SK로의 입사는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장학생들에게 강조해 왔다. 해외 유수 대학의 등록금에 5년간 생활비까지 지원해준다는 파격적인 지원이었던 반면, 의무 조항은 일절 없었다.

선발된 장학생들에게 강도높게 사전교육을 시키는 것도 재단의 전통이다. 최종현 회장은 “선진국 학생들은 강의계획서와 도서목록을 미리 입수해 사전에 철저히 준비를 해 왔다”면서 “우리나라에는 아직 해외 유명대학을 졸업한 선배들이 많지 않으니 재단이 이 부분을 챙겨달라”고 당부했다. 재단은 이 때부터 미국 유명 대학을 찾아가 강의계획서를 구하고 필요한 도서를 사들였다. 또 장학생 선배들이 강의계획서와 책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동안의 노력과 정성이 쌓여 높이 5m에 이르는 재단 서고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쓰여진 전문 원서 15,000여 권이 빼곡히 꽂혀 있고, 지하 정보실에도 19,000여 권의 장서가 더 보관돼 있다고 한다.

최종현 회장의 ‘인재보국’ 기치는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발현됐다. MBC가 청소년 대상 교양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장학퀴즈가 광고주를 찾지 못해 폐지 위기에 처하자 당시 선경이 나선 것이다. 선경은 1973년 2월 18일 방영 프로그램부터 단독 광고주로 나섰다. 당시 TV 프로그램 중 단독 광고주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청소년 지식 경연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장학퀴즈’는 기록인증기관인 KRI 한국기록원에 의해 ‘국내 최장수 TV 프로그램’으로 인증 받은 바 있다. 70년이 채 되지 않은 국내 TV 방송 역사를 감안할 때 장학퀴즈 46년 방송은 유례가 없는 대기록이다. 이후 장학퀴즈는 1996년 MBC에서 EBS로 무대를 옮겼고, 총 2300회 이상 방영됐다. 전국노래자랑보다도 역사가 더 길다고 한다.

2만명이 넘는 장학퀴즈 출신들은 학계, 재계, 법조계, 의료계, 언론계 등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해 오피니언 리더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장학퀴즈는 한국을 넘어 중국에서도 방영 중으로, 2000년 중국 베이징TV(BTV)에서 SK장웬방(壯元榜)으로 시작, 2016년 중국 전역에 방송되는 CCTV로 자리를 옮겨 SK극지소년강(SK极智少年强)으로 방영되고 있다. CCTV 프로그램 중 기업체 이름이 붙은 유일한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2.3. 조림 사업

최종현 회장은 장학사업을 위해 나무를 심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벌거숭이산에 나무를 심어 30년 후 고급목재로 자라면 이를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금으로 사용하겠다"는 게 최 회장의 생각이었다.

1972년 서해개발(현 SK임업)을 세운 뒤 충남 천안 광덕산(500ha)을 시작으로 충북 충주 인등산(1,200ha), 영동 시항산(2,340ha), 경기도 오산(60ha) 등 4,100ha 황무지 임야를 사들이고 꾸준히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으로 키워냈다.

이는 ‘3000만평의 임야에 수익성 좋은 나무를 심은 뒤 30년 후부터 1년에 100만 평씩 벌목하면 회사 경영과 무관하게 장학기금을 만들 수 있다’는 최 회장의 선순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좋은 의도로 장학사업을 시작하더라도 회사 경영의 부침에 따라 중도에 흐지부지 될 수 있다고 우려한 최 회장이 수목사업을 통해 안정적인 재원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세계 경제가 어수선하고 석유사업 진출을 위해 바쁠 때에도, 최 회장은 투자기간이 너무 길어 사업화가 어렵다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산을 개간하고 나무 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한국에는 기업 조림이라는 사례도 없을 때였다.

수종 선택도 미래를 보고 결정했다고 한다. 당시 국가에서는 녹화를 위해 상록수를 권장했으나, 산소 배출량이 많고 미관이 아름다우며 경제성이 뛰어난 활엽수 중심으로 선정해 자작나무, 가래나무, 흑호도나무 등 경제성이 높은 나무들을 심었다. 특히 흑호도나무는 한국에서 최종현 회장이 처음으로 수입해서 보급한 수종으로 기록돼 있다.

최 회장의 노력으로 황무지였던 4,100ha의 임야에는 현재 자작나무, 가래나무, 호두나무, 루브라참나무 등 고부가가치 조림수 40여종, 조경수 80여종 등 330만 그루가 들어섰다. 이는 여의도 면적(290ha)의 14배에 달한다. 활엽수 위주의 수종 선택에 따라 해당 조림지에서의 산소 배출량이나 이산화탄소 흡수량이 막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조림지에서 나오는 신선한 산소만도 매년 20만명이 숨쉴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12]

최종현 회장의 30여년 나무사랑과 조림을 위한 노력은 사후 재평가를 받았다.

최 회장은 지난 2006년 산림청 주관 '제1회 대한민국 녹색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최 회장은 30여년간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림 육림 사업과 산림 자원화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당시 심사위원장은 "최종현 회장은 당시 기업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장기적이고 불확실한 대규모 경제림 조성사업에 뛰어들어 기업의 장기적인 공익 활동과 사회봉사를 몸소 실천했고, 한국의 장묘 문화 개선에도 큰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밝힌 바 있다. 상은 고인을 대신하여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수여됐다.

최 회장은 조림 및 산림자원화에 노력한 공로가 인정돼 2010년 경기도 포천시 국립수목원 내 ‘숲의 명예전당’에 헌정되기도 했다. 당시 최 회장이 선정된 것은 기업인으로 최초였다. 최 회장의 '39년 조림 사업 꿈'이 임업계 최고 권위의 상을 통해 공인받은 것이다.

최 회장은 침엽수림 같은 속성수 위주의 획일적인 조림 방식을 탈피해 국내에 최초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활엽수 단지를 조성해 조림사업의 경제적 부가가치를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와 함께 임학 발전과 후학을 위해 충남대학교에 1,000ha(300만여평)의 산림을 연구림으로 무상 기증하기도 했다.

특히 최 회장은 한국의 장묘 문화로 전국의 산림이 황폐화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고민하던 중 임종을 앞두고 "내 시신은 화장하고 훌륭한 화장시설을 만들어 사회에 기증해 장묘 문화 개선에 앞장서 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에 따라 유가족들은 최 회장의 시신을 화장했으며, 500억원을 들여 세종시 은하수공원에 화장시설을 조성, 2010년 1월에 무상 기증했다.

3.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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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오른쪽에 있는 분이 바로 후계자인 최태원

1998년 8월 26일, 자택 워커힐아파트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8세. 형인 최종건 회장의 사인과 같다. 유언에 따라 벽제화장터에서 화장火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당시 서울시민이었던 최 회장의 화장비용은 무료였으며, 반려자도 개장유골이라는 이유로 7천원만 냈다고 한다. (지금은 서울시립승화원 기준 서울·고양·파주시민은 12만원을, 그 외 지역주민은 최대 1백만원을 낸다. 자녀가 서울시민인 경우 일부 감면되며, 기초생활수급자와 국가보훈기본법에 따른 해당자만 면제된다.)

특히 최종현 회장의 화장 유언은 사회적 파급효과가 컸다. 기존 장례문화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던 화장이 국내 굴지 대기업의 회장의 유언으로 본격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살아 생전에 1980년대에 비행기를 타고가던 중 묘지가 많이 눈에 띄었는데, '좁은 국토에 이렇게 묘지가 많아서야 되겠는가'라고 생각한 것에서 화장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덕분에 오늘날 화장문화가 어느 정도 대중화가 된 데에는 최종현 회장의 공이 크다는 시각이 많다. 당시 SK 그룹에서 화장장까지 만들려고 했으나, 화장장은 각 지역 시설공단에서 관리하는 게 일반적인 공공재라는 특성과 대기업이 장묘 사업까지 하려고 하냐면서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흐지부지되었고, SK그룹은 세종시로 돌려서 세종시설관리공단에 기부하는 식으로 은하수공원을 만드는 것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와는 별개로, 원래 SK그룹이 서울에 만들려고 했던 화장장은 서울특별시 지방정부에 의해 서울추모공원으로 탄생하였다.

사망 20주기가 되는 2018년 8월 14일부터 24일까지 열흘간 SK그룹이 기념 사진전과 추모식 '최종현 회장, 그를 다시 만나다'를 개최했다. 특히 24일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SK텔레콤이 인공지능 AI기술 홀로그램을 활용해 최종현 회장을 재현해 주목 받았다. 이날 행사에서 최태원 회장은 대한민국 국가 경제와 SK그룹을 위해 헌신하고 한국고등교육재단을 통해 인재를 양성한 선친을 기리는 최종현학술원'의 설립 계획을 발표했고, 그해 중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최종현 회장은 사망 당시 경영권에 관해서는 별다른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여차하면 후계자 다툼이 벌어질 수도 있었으나 형 최종건 회장의 장남이자 장조카인 최윤원 SK케미칼 회장이 최태원에게 승계권을 양보하고 지지하는 의사를 밝혔기에 별다른 잡음 없이 최태원이 그룹을 승계할 수 있었다.[13]

4. 일화

  • SK 직원들 사이에서는 인간적인 평판이 매우 좋았다고 하는데, 한 성질 할 것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직원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했으며, 아들인 최태원 역시 SK 직원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다고 한다.
  • 본인에게 조카가 되는 형 최종건 회장의 세 아들들(최윤원, 최신원, 최창원)도 친자식처럼 아꼈다고 한다. 공식 석상에서도 "내 아들은 다섯명이다." 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 자신이 암 투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회사인 SK케미칼을 통해 신약 개발을 적극 독려했는데, 임원들과 함께 출석한 보고 자리에서 당시 SK케미칼 연구원이던 김대기 박사(현 이화여자대학교 약학대학 교수)가 개발 중이던 신약에서 부작용이 발견되어 상용화에 실패했다는 발언을 하고 분위기가 매우 어두워졌다. 그런데 최 회장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드디어 입을 열고는 "김 박사, 그렇다면 반은 성공한 것 아닌가?"라는 뜻밖의 발언을 한다. 주변의 임원들은 물론 김 박사 본인도 당황했는데, 그 다음에 내던진 말이 압권. "부작용을 미리 발견해서 그것까지 해결하면 더 완벽한 신약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앞으로 더 노력하시오." 참고로 이 일화는 1999년 10월 10일 MBC에서 방영된 성공시대에서 다뤄진 바 있다.
  • 특히 이 당시 연구원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연구에 나서도록 독려한 에피소드도 있는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대유행 이후 SK바이오사이언스의 백신 개발 성과가 부각되자 과거 최종현 회장의 격려와 바이오 산업을 향한 의지가 재평가되기도 했다. (빌 게이츠문재인 대통령에게 한국의 코로나 백신 개발 성과를 극찬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이 서신에 등장한 업체가 SK바이오사이언스였다.) 당시 김대기 박사가 "신약이 나오려면 최소 10년은 물론이고 20년도 기다려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최 회장은 "개발 과정이 그렇다면 20년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라면서 "연구에 실패를 한다고 하더라도 실패를 통해 얻는 것이 더 많으니 그 실패를 바탕으로 더 연구에 매진해보시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 결과 SK는 1호 항암 신약인 '선플라'를 개발할 수 있게 됐다.
  •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SK그룹의 회장이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었는데도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구멍난 양말을 신고 다녀서 회의 중에 임원들이 그걸 목격하고 민망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식사는 항상 구내식당에서 했다. 실제로 전경련 회장 재임 당시 한국경제연구원에서 연구위원으로 근무한 경제학자의 증언에 따르면 최 회장이 경제학자들과 한경연 연구위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서 점심식사를 할 때마다 어김없이 육개장이나 설렁탕 같은 국물요리에 반찬 몇 가지만 두고 식사했다고 한다. 역시 국밥! 처음에는 재벌 회장과의 식사라서 엄청 기대했다가 막상 식사 메뉴를 보고 내심 실망했다고..
  • 고려대학교 총장 염재호와 연세대학교 총장 김용학이 한국고등교육재단의 도움으로 미국유학을 다녀왔다. 염재호 총장은 당시를 회고하며 “말도 안되는 공고였다. 미국에 유학을 가는데, 학업 외 아무 조건 없이 엄청난 등록금과 5년 동안의 생활비까지 보장해 준다고 했다. 혹시 이상한 종교단체나 중앙정보부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막대한 지원금 대비 으레 있을 법한 ‘의무, 근무’ 관련 조건이 단 한 줄도 없었기 때문에 재단을 의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최종현 회장이 장학생들에게서 받은 가장 많은 질문 중 하나가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한다는 것은 많은 재원을 필요로 하는데,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는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재 SKY 대학 총장 셋 중에 무려 두 명! 염재호는 최종현 회장의 영결식에서 고등교육재단 장학생 대표 자격으로 추도사를 낭독했다. 퇴임 후에는 SK의 이사회 회장으로 돌아온 것은 덤.
  • 장학퀴즈를 후원하는 과정에서도 에피소드가 있다. 최 회장은 장학퀴즈 장원에 오른 학생들을 데리고 주기적으로 식사를 했다. 그럴 때마다 최 회장은 "나중에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고 학생들은 각자 자신의 꿈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다. 그러던 최 회장은 대뜸 학생들에게 "여러분은 대학 졸업하고 우리 회사에 오면 안돼! 우리 회사 오지 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분 같은 인재들은 머리가 좋으니까 더 좋은 회사로 가서 나라를 위해 일해야 돼."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라를 위한 인재 양성에 대한 최 회장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부분. 실제 장학퀴즈 출연자 중 SK 직원은 드물긴 했다.
  • 1980년대 초반 장학퀴즈 500회 특집이 방영될 무렵 최종현 회장은 선경그룹 임원 및 장학퀴즈 제작진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간 장학퀴즈에 투자한 돈이 얼마냐”고 물었다. 배석한 임원이 “150억~160억원 가량 된다”고 답하자 최 회장은 “그럼 선경이 장학퀴즈로 번 돈이 얼마나 되냐”고 되물었다. 임원들이 답을 머뭇거리자 회장은 “7조원쯤 된다. 기업 홍보 효과가 1조~2조원쯤 되고 5조~6조원이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 교육시킨 효과”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 조림사업을 위해 임야를 매입하다 보니 부동산 장사를 한다는 괜한 오해도 받았고, 그룹 내부에서는 부지를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초반 한 임원이 “이왕이면 경기도 수도권 근처의 산에 투자하는 것이 산간 오지의 땅을 사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했다가 최종현 회장이 “내가 땅장수인 줄 아느냐”며 혼쭐을 났다는 일화가 있다.
  • 서해개발을 설립했을 때 초대 사장으로 중학교 때 담임 선생을 앉혔다.재미있는 점은 최 회장이 그 선생을 좋지 않게 여겼던 사람 중 하나였던 것.그럼에도 왜 그 선생을 서해개발 초대 사장으로 앉혔냐고 40년 지기 친구 홍사중이 묻자 최 회장 曰.'내 선생이었잖아.'[14]
  • 최 회장은 평소 “우리는 사회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며, 기업의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었다”고 언급했다. ‘돈 버는 것만이 기업의 목적이 아니다’는 철학이 확고했으며, 국가나 사회가 갖고 있는 고충을 해결해 함께 발전하는 것을 기업과 기업인의 진정한 책무라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이 같은 경영철학에 맞춰 국가 및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공헌 활동을 펼쳤다. 1995년 수원시에 선경도서관을 만들어 기부했다. 당시 이 도서관은 수원 소재 3개 시립도서관 중 최대 규모였으며, 국내 전체적으로도 톱10에 드는 규모였다고 한다. 최 회장은 SK 성장의 터전이 된 울산 지역에 녹지 공간 110만평을 확보해 울산대공원을 조성, 기부하기도 했다.

4.1. 어록

섬유업체 경쟁자들이 줄곧 섬유에만 매달릴 때 나는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완성을 위해 줄곧 노력했다. 주변에서조차 믿지 않았던 것을 15년 노력 끝에 해 냈다. 플랜을 갖고 경쟁하는 것과 안 한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1991년, 울산 CLX 완공 이후)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유공 인수, 정보통신산업 진출 등 남들은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절대 운만으로 큰 사업을 할 수 없다. 새로운 성장동력원 확보를 위해 10년 이상 준비한 결과다. (1997년 12월 주간지와의 인터뷰)
석유개발은 한 두 해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한 두 번 실패했다고 중단하면 아무 성과가 없다. 실패에 관해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 (1984년, 아프리카 유전개발 실패 이후)
지금 2000억원을 더 주고 사지만 나중 일을 생각하면 더 싸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준비했으니 10년 이내에 1조~2조원의 이익을 낼 수 있다. (1994년, 한국이동통신 인수비용이 치솟자 반대하는 임원들에게)
노사는 한솥밥을 먹는 한 식구다. 식구끼리 싸우면 집안이 어찌 되겠는가? 싸움은 밖에서 다른 경쟁업체와 해야 한다. (1980년 7월, 전경련 강연 중)
우리나라 시장경제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을 필수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공존관계다. 중소기업 도움 없이는 대기업이 성장할 수 없다. (1993년, 전경련 회장 취임 후 대중소기업협력위원회 구성에 나서며)
국가경쟁력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며 국민과 정부, 기업의 총체적 역량에 의해 좌우된다. 경제를 지배하는 정치논리가 아니라 경제를 도우려는 정치논리를 재정립하는 것이 국제화, 개방화를 앞둔 우리나라에 필요한 국가과제다. (1993년, 이코노미스트클럽에서 ‘국가경제력 강화를 위한 제언’ 강연 중)
향후 국제관계는 글로벌리제이션으로 갈 것이 분명하다. 진행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빠를 것이다.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제무대에서 비교우위에 설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1991년, 아시아소사이어티 초청 연설 중)
21세기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되고 SK는 세계 100대 기업 안에 들어갈 것이다. 지금은 변방의 후진국이지만 인재양성 100년 계획을 세워 지식산업사회를 구축해 일등국가로 발전해야 한다. (1978년,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과의 대화 중)
우리는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었다. (1995년, 울산대공원 조성을 약속하며)
인간은 석유와 비교도 되지 않는 중요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자원이다. 석유는 한 번 쓰면 없어지지만 인간의 능력은 사용할수록 향상되고 가치가 커진다. (조동성 전 서울대 교수와의 대화 중)
회사 임원 일부가 “해외 유학생 장학금으로 연간 4만~5만 달러는 너무 많다”는 의견을 내 놓자 최종현 회장은 “이왕이면 최고 수준의 장학금으로 합시다. 돈 좀 아낀다고 뭘 하겠소. 그리고 돈 걱정 없어야 24시간 공부에 전념할 수 있지 않겠소”라고 답하더라. (고등교육재단 이사들과 장학금 관련 대화 중, 정범모 전 서울대 교수 회고)
“청소년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이라면 열 사람 중 한 사람만 봐도 조건 없이 지원하겠다” (1973년, 광고주를 구하지 못한 장학퀴즈 후원을 결정하면서)

5. 수상경력

  • 은탑산업훈장 (1972)
  • 금탑산업훈장 (1973)
  • 국제경영인상 (1995)
  • 금탑산업훈장 (1997)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
  • 산림청 주관 '제1회 대한민국 녹색 대상' (2006)
  • 국립수목원 내 ‘숲의 명예전당’ 헌정 (2010)

6.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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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은 최씨를 Choi로 많이 표기하지만, 직접 미국인에게 물어보고 최와 발음이 가장 유사한 Chey를 썼다.[2] 조선일보, 연합뉴스에는 1930년생으로 표기되어 있다.[3] 주민등록상으로 1930년 4월 20일생이다.[4] 개령공파(開寧公派)-매곡문중 24세 ○용(鎔) 항렬. 족보명 최현용(崔賢鎔). 본명인 최종현은 자(字)로 되어있다. 족보[5] 아버지 최학배는 굉장히 곧은 성격의 소유자로, 어렸을 적 아들인 최종현이 엿을 먹고 싶어서 친구들과 함께 단체로 교과서를 엿과 바꿔 먹은 적이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되자 최종현을 불러 크게 혼낸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때 최종현이 얻게 된 교훈이 '나보다 불쌍한 사람들은 괴롭히지 말고 도와주어야 한다.'였다.갑자기?[6] 재학 당시 밀턴 프리드먼의 강의를 수강 했다.[7] 인수전 당시 재계 1위 삼성과의 경쟁에서 이겼으며, 당시 삼성도 이병철 회장이 3남 이건희를 후계자로 공식 선언한 후 첫 책임과제로 석유공사 인수전을 맡겼을 정도로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8] 1위 선경그룹 8,127점, 2위 코오롱그룹 7,783점, 3위 포항제철 7,711점[9] 노태우의 장녀 노소영과 최종현 회장의 장남 최태원이 결혼[10] 이때 포항제철과 코오롱에 제2이통 사업자 권한이 낙찰돼 신세기통신이 설립된다. 그러나 훗날 신세기통신도 SK텔레콤이 인수하게 된다.[11] 최종현 회장의 아내 박계희 관장이 경영하던 워커힐미술관을 며느리 노소영 관장이 미디어아트 전문관으로 리모델링 해 운영하고 있다.[12] 1ha가 8.1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것을 감안하면 매년 33,000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산소로 바꿔놓고 있는 셈이다. 33,000톤의 이산화탄소는 자동차 4,000대가 1년 동안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와 맞먹는 규모다.[13] 그 뒤 최윤원 또한 불과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폐암으로 요절하고 만다.[14] 한국최고경영자 9인,그들에게 배워라 2장 56쪽 '내 선생이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