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대사자 모두루 牟頭婁 | |
모두루묘 널방 입구 상단에 위치한 묘지명의 일부. | |
관등 | 대사자(大使者) |
직위 | 북부여수사(北夫餘守事) |
생몰년 | 4세기 중후반 ~ 412년 이후[1] |
이름 | 모두루(牟頭婁) |
조부 | 염모(冉牟) |
묘소 | 지린성 지안시 타이왕진 샤지에팡촌 시양우투 언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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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 관료. 현존하는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20세기 모두루 묘지명이 발굴되면서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2. 생애와 집안 내력
할아버지인 대형(大兄) 염모의 공이 큰 덕분에 광개토대왕 시기에 북부여 수사(守事)로 임명되었다. 수사는 충주 고구려비에서도 등장하는 관직으로, 일종의 지방 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추측된다.모두루는 왕명을 받들어 선대의 뒤를 이어서 북부여 수사가 되었으며, 이후 임지에서 광개토대왕이 붕어했을 당시에 크게 통곡하였다고 한다. 사망하였을 당시의 관등은 대사자(大使者)였다.
모두루의 묘지명에 적힌 가문 내력에 따르면 모두루 일족의 출신지가 동명성왕과 같은 북부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선조가 동명성왕이 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부터 고구려 왕실을 따랐다고 한다. 즉 나름 전통과 뼈대가 있는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고국원왕 시기 인물인 할아버지[2] 염모로 인해 가문이 크게 번성했으며, 염모 이후로 그 선조들이 대대로 북부여 수사(守事)를 지냈다고 한다. 모두루 역시 선조들의 뒤를 이어 북부여 수사가 된 것이다. 때문에 모두루 집안이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주요 귀족층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주요 귀족층으로 보기에는 염모가 지낸 대형이나 모두루가 지낸 대사자의 관등이 낮은 편이다. 따라서 대귀족이라기보다는 고구려 왕가 직속의 가신 가문으로 보는 것이 주류 학설이다.
3. 모두루 묘지명
모두루묘 |
모두루 묘지명. 전문과 해석은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참고 |
모두루는 현존하는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인물이라[3], 모두루 묘지명이 발견되기 전까지 학계에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1935년, 중국 길림성에 있는 하양어두(下羊魚頭)라는 언덕에서 모두루의 생애와 가문 내력이 기록된 모두루 묘지명이 발견되어 마침내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모두루의 생애와 가문의 내력은 모두루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으나, 세월의 풍파 속에 비문의 대부분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는 상태인지라 그 내용을 자세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전문은 세로 10자, 가로 80자라 총 800자에 달하나,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250여 자에 불과할 정도. 파악되는 내용은 대략 도입부와 네 부분으로 나뉜다.
1부 | 1~2행 | 대사자 모두루 묘지의 제기(題記) |
3~9행 | 모두루 집안 시조의 사적 | |
2부 | 10~40행 | 모두루 할아버지 염모의 사적 |
3부 | 40~44행 | 모두루 바로 전대의 사적 |
4부 | 44~81행 | 모두루 본인의 사적 |
내용은 자신의 가문의 내력에서 조상의 치적, 마지막에 자신의 치적을 적는 전형적인 묘지명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도입부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모두루의 관등인 대사자를 표기하였으며, 1부에서는 추모성왕(동명성왕)이 북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세웠던 일을 기술하면서 같은 북부여 출신인 모두루 일족의 조상도 동명성왕을 도와 건국에 이바지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부에서는 할아버지 염모가 국강상성태왕(고국원왕) 대에 모용선비(전연)의 침입에 맞서 전공을 세우고, 반역 음모를 저지한 공으로 북부여 수사로 임명되었던 내용이 적혀 있다. 그 다음의 3부에서는 이후로 모두루보다 바로 선대의 인물이 염모의 공적을 이어 북부여 수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
마지막의 4부에서는 모두루 본인이 조부의 공적 덕분에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광개토대왕)의 교시로 북부여 수사로 임명된 일과, 광개토대왕의 승하 소식을 멀리 떨어진 임지에서 전해듣자 해와 달이 더 이상 밝지 않은 것과 같다며 크게 애통해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의 행적은 많은 부분이 결락되어 상세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대체로는 장수왕 대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비문을 발견했을 당시만 해도 모두루 본인의 사적보다는 할아버지인 염모 이야기가 더 많이 적혀 있어서, 처음에는 무덤 주인이 염모이고 모두루는 그의 부하인 것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실제 남아있는 기록만으로는 모두루가 광개토대왕 시기 어떤 행보를 보인 관료였는지 자세히 알긴 어렵다.
훗날 한강 유역의 아차산 일대 보루군 고구려 유물 중 염모형(冉牟兄)[4]이라고 표기된 접시가 발견된 바 있다. 때문에 장수왕 대에 모두루의 후손이 한성백제 공략에 참여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순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4. 기타
광개토대왕 관련 작품에서는 이 사람에게서 이름만 따오고 행적은 사실상 창작된 가공 캐릭터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이는 현전하는 사료가 소략한 관계로[5] 광개토대왕 시기 인물로 알려진 사람이 모두루를 제외하고는 장수왕이나 유주자사 진 정도가 전부일 정도로 극히 적기 때문인 점이 커보인다.2012년 KBS 1TV에서 방영된 사극인 광개토태왕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역시 실제로 기록된 역사 상의 모습과는 다른 행보를 선보였다. 심지어 관미성 성주가 되었다가 백제의 관미성 탈환 시도 때문에 인질이 되어 사라진다.
[1] 모두루 묘지의 묵서명이 많이 훼손돼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의 죽음에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모두루의 사망 시기는 412년 이후일 것이다.[2] 묘지명에서 '할아버님이신 대형(大兄) 염모'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 뒤의 기록을 보면 모두루 자신은 염모의 손자뻘이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3] 사료 부족으로 한반도 삼국시대 인물의 대다수는 이런 운명이다. 삼국시대는 왕족을 제외하면 이름'만'이라도 한중일 사서에 등장하는 고구려인이 200명 안팎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적다. 심지어 삼국사기에 열전이 있는 비왕족 고구려인은 고작 8명(을파소, 을지문덕, 창조리, 연개소문, 온달, 밀우, 유유, 명림답부)뿐이다. 700년 역사인데 고작 저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오죽하면 고려/조선 시대 학자들도 이를 개탄했는데, 이는 한문 기록 문화 자체가 한반도에 비교적 늦게 들어와 많은 부분을 구전에 의존해야 했던 점도 있고, 그나마 남아 있던 것도 전란이나 재해 등으로 소실되었던 탓이 크다. 실제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인 신라 기록이 오늘날 가장 많이 전해지는 것도 이런 덕분이다.[4] '형' 부분은 관등 혹은 직책으로 보인다. 마침 모두루 묘지명에 나오는 염모의 관등이 대형이다.[5] 삼국사기는 물론 유명한 광개토대왕릉비조차 광개토대왕의 업적만을 나열할 뿐, 당시 왕을 보필했을 신하들의 이름은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