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1:45:24

모두루

고구려의 대사자
모두루
牟頭婁
파일:모두루.png
모두루묘 널방 입구 상단에 위치한 묘지명의 일부.
관등 대사자(大使者)
직위 북부여수사(北夫餘守事)
생몰년 4세기 중후반 ~ 412년 이후[1]
이름 모두루(牟頭婁)
조부 염모(冉牟)
묘소 지린성 지안시 타이왕진 샤지에팡촌 시양우투 언덕

1. 개요2. 가문 내력3. 그 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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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 관료.

할아버지인 대형(大兄) 염모의 공이 큰 덕분에 광개토대왕 시기에 북부여 수사(守事)로 임명되었다. 수사는 충주 고구려비에서도 등장하는 관직으로, 일종의 지방 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추측된다.

모두루는 왕명을 받들어 선대의 뒤를 이어서 북부여 수사가 되었으며, 이후 임지에서 광개토대왕이 붕어했을 당시에 크게 통곡하였다고 한다. 사망하였을 당시의 관등은 대사자(大使者)였다.

모두루의 묘지명에 적힌 가문 내력에 따르면 모두루 일족의 출신지가 동명성왕과 같은 북부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선조가 동명성왕이 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부터 고구려 왕실을 따랐다고 한다. 즉 전통과 뼈대가 있는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

이후 고국원왕 시기 인물인 할아버지[2] 염모로 인해 가문이 크게 번성했으며, 염모 이후로 그 선조들이 대대로 북부여 수사(守事)를 지냈다고 한다. 모두루 역시 선조들의 뒤를 이어 북부여 수사가 된 것이다. 때문에 모두루 집안이 왕권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중요 귀족층으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 귀족층으로 보기에는 염모가 지낸 대형이나 모두루가 지낸 대사자의 관등이 낮은 편이다. 따라서 대귀족이라기보다는 고구려 왕가 직속의 가신 가문으로 보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사서에는 모두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학계에서는 한동안 이런 사람이 존재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별다른 업적이 없어서 안 알려진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는 조선시대와 달리 왕을 제외하면, 이름'만'이라도 한중일 사서에 등장하는 고구려인은 200명이 안 될 정도로 매우 적다. 700년 역사인데 고작 저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이다. 간단히 비교하면, 고구려 인물들이 그나마 많이 나오는 6세기 후반. 즉, 고구려-수 전쟁부터 고구려 멸망까지 70년 동안 고구려인들 기록보다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조선인들 기록이 더 많다.[3]

사료부족으로 한국의 삼국시대 인물의 대다수는 이런 운명이다. 고구려 시대에 왕족을 제외하면, 삼국사기에 열전이 있는 사람은 8명 (을파소, 을지문덕, 창조리, 연개소문, 온달, 밀우, 유유, 명림답부) 뿐이며, 밀우, 유유 두 명은 동천왕이 도망가는 과정에서 활약한 일회성 인물들에 불과하다. 그나마 을파소와 연개소문을 제외하고는 조상조차 모르는 사람들이다. 최소한 조상이 누군지는 아는 모두루만도 알려진 게 없는 것이다. 사족으로 사마천이 위대한 것이, 그 동안은 역사에 기록될 일이 없었던 도적, 의사, 자객 이런 사람들의 사적을 가능한 한 기록한 것에 있다.

이처럼 모두루는 젼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1935년, 중국 길림성에 있는 하양어두(下羊魚頭)라는 언덕에서 모두루의 생애와 가문 내력이 기록된 모두루 묘지명이 발견되어 마침내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 가문 내력

파일:external/gsm.nricp.go.kr/history03_pic3.gif
모두루묘
파일:external/www.seoye7.com/clasic_09.jpg
모두루 묘지명. 전문과 해석은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참고

모두루의 생애와 가문의 내력은 모두루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으나, 비문의 대부분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는 상태인지라 그 내용을 자세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세로 10자, 가로 80자라 총 800자에 달하나 알아볼수 있는 글자는 250여자에 불과할 정도. 파악되는 내용은 대략 도입부와 4부분으로 나뉜다.
1부 1~2행 대사자 모두루 묘지의 제기(題記)
3~9행 모두루 집안 시조의 사적
2부 10~40행 모두루 할아버지 염모의 사적
3부 40~44행 모두루 바로 전대의 사적
4부 44~81행 모두루 본인의 사적

내용은 자신의 가문의 내력에서 조상의 치적, 마지막에 자신의 치적을 적는 전형적인 묘지명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도입부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모두루의 관등인 대사자를 표기하였으며, 1부에서는 추모성왕(동명성왕)이 북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세웠던 일을 기술하면서 같은 북부여 출신인 모두루 일족의 조상도 동명성왕을 도와 건국에 이바지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부에서는 할아버지 염모가 국강상성태왕(고국원왕) 대에 모용선비(전연)의 침입에 맞서 전공을 세우고, 반역 음모를 저지한 공으로 북부여 수사로 임명되었던 내용이 적혀 있다. 그 다음의 3부에서는 이후로 모두루보다 바로 선대의 인물이 염모의 공적을 이어 북부여 수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

마지막의 4부에서는 모두루 본인이 조부의 공적 덕분에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광개토대왕)의 교시로 북부여 수사로 임명된 일과, 광개토대왕의 승하 소식을 멀리 떨어진 임지에서 전해듣자 해와 달이 더 이상 밝지 않은 것과 같다며 크게 애통해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의 행적은 많은 부분이 결락되어 상세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대체로는 장수왕 대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비문에 막상 모두루 본인의 사적보다는 염모 이야기가 더 많이 적혀 있어서, 처음에는 무덤 주인이 염모이고 모두루는 그의 부하인 것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훗날 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아차산 일대 보루군 고구려 유물 중 염모라고 표기된 유물이 발견된 바가 있는데, 때문에 장수왕 대에 모두루의 후손이 한성백제 공략에 참여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3. 그 외에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광개토대왕 시기에 어떤 행보를 보인 관료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현전하는 사료가 소략한 관계로[4] 광개토대왕 시기 인물로 알려진 사람이 모두루를 제외하고는 장수왕이나 유주자사 이 전부일 정도로 극히 적기 때문에, 광개토대왕 관련 작품에서는 이 사람에게서 이름만 따오고 행적은 전혀 딴판인 캐릭터가 등장하곤 한다.

2012년 KBS 1TV에서 방영된 사극광개토태왕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역시 실제로 기록된 역사 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선보였다. 심지어 관미성 성주가 되었다가 백제의 관미성 탈환 시도 때문에 인질이 되어 사라진다.


[1] 모두루 묘지의 묵서명이 많이 훼손돼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의 죽음에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모두루의 사망 시기는 412년 이후일 것이다.[2] 묘지명에서 '할아버님이신 대형(大兄) 염모'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 뒤의 기록을 보면 모두루 자신은 염모의 손자뻘이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3] 뿐만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후삼국시대까지 모든 한국사 기록 자체가 적고 제대로 소상하고 많은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건 고려시대부터이다. 고려~조선대 학자들은 선대에는 기록 문화가 미비해 많은 기록이 남지 않았다고 평하기도 했는데 물론 한문 기록문화 자체가 후대에 비해 미비해 일반 사회에서는 구전으로 많은 게 전해진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나마 있던 것도 전란이나 재해 등으로도 엄청나게 소실되었던 탓도 크다.[4] 삼국사기는 물론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릉비조차 광개토대왕의 업적만을 나열할 뿐, 당시 왕을 보필했을 신하들의 이름은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