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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제 67호 | ||
이름 | 조선어 | 안악 제 3호 무덤 | |
한자 | 安岳 3號墳 | ||
위치 |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1] | ||
규모사항 | 지름 33m, 높이 6m | ||
시대 | 고구려 4세기말 | ||
지정연도 | 1994년[2]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고구려 고분군 Complex of the Koguryo Tombs Ensemble des tombes de Koguryo | ||
<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북한| ]][[틀:국기| ]][[틀:국기| ]] 황해남도 안악군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1091 | |
등재연도 | 2004년 | |
등재기준 | (ⅰ)[3], (ⅱ)[4], (ⅲ)[5], (ⅳ)[6] | }}} |
<colbgcolor=#000,#10100f> 안악 3호분 / 安岳 3號墳 |
[clearfix]
1. 개요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 북한의 국보 제67호로 지정되었다.
인근 고분군에 비해 무덤 벽화의 내용, 표현법과 상태가 잘 보존된 덕분에 무용총과 함께 가장 유명한 고구려 벽화무덤 중 하나이다. 묵서명에 적힌 '영화 13년(永和十三年)'이라는 글자로 인해 357년(고국원왕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북한 측은 고국원왕릉으로 단정하고 있고[7] 남한에서는 전연 출신 귀화인 동수의 무덤으로 보는 학설이 지배적인 탓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광복 직후 일제 학자가 아닌 우리 민족이 스스로 유적들을 보존하자는 취지로 1949년 발굴했다고 하며, 1958년 첫 보고서가 나온 이래 꾸준히 조사·연구되고 있다. 무덤의 벽화는 초기 형태로, 이후의 고구려 고분 벽화 발전사 뿐만 아니라 당시의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사회상 연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 조사 내용
2.1. 구조
석실봉토분으로, 남쪽으로 뚫린 입구를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으며 안은 돌기둥과 석벽으로 분리된 5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전후로 크게 전실, 후실 구조에 좌우 곁방이 있는 구조는 현세에서의 가옥을 상징하는 구조로써 중국에서 유행하였던 구조다. 고구려는 같은 시기 수도였던 집안과 제2의 도시였던 평양의 묘제가 확연히 다르다. 내심 민족주의적인 경향 속에서 유사성을 도출하려고 애써 노력하지만 누가 봐도 다른 구조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무덤 자체는 중국계 석실의 영향을 짙게 받은 편이지만 벽화의 내용이나 벽화의 화풍, 묵서명의 내용 등이 고구려와 유관하기 때문에 토착 또는 중국계 고구려인의 무덤으로 비정되는 것이다. 또한 3~4세기 평양의 고분 문화에 대한 이해 자체도 완벽한 고구려인에 의해 완전히 점유된 영역 그 자체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낙랑의 유민, 낙랑에 포함되어 있던 재지토착민, 중국계 귀화인이 혼재한 양상 또는 그 영향이 희석되어 가는 과정 등 다양한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안악 3호분의 구조적인 측면을 완전히 "고구려적인 것"이나 "고구려 무덤의 전형"이라고만 표현할 수는 없다. 3세기 후반부터 쇠퇴하다가 313년에 축출된 낙랑군이 본격적인 고구려의 영역으로 포함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고분이라고 할 수 있다.
2.2. 벽화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a0053134_4f94615a98b1e.jpg이 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벽화이다. 서쪽 방에는 묘주로 보이는 인물과 그 부인의 그림이 있으며, 그 외 곳곳에 악단, 무용수, 부엌, 마구간, 푸줏간, 수레, 가마 등등 당시 생활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귀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당시 신하, 군대 등을 묘사한 출행도도 있는데, 2012년 동북아역사재단에 의해 디지털 복원되어 상세히 확인할 수 있게 됐다.
2.2.1. 묵서명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卄六日
癸丑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相昌黎玄菟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安年六十九薨官
영화 13년(서기 357년), 초하루가 무자일인 10월 26일 계축일에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도·대방태수, 도향후를 지낸 유주 요동군 평곽현 도향 경상리 출신의 자(字)는 '▨안'인 동수(冬壽)가 69세의 나이로 벼슬하다 죽었다.
癸丑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相昌黎玄菟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安年六十九薨官
영화 13년(서기 357년), 초하루가 무자일인 10월 26일 계축일에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도·대방태수, 도향후를 지낸 유주 요동군 평곽현 도향 경상리 출신의 자(字)는 '▨안'인 동수(冬壽)가 69세의 나이로 벼슬하다 죽었다.
위는 안악 3호분의 전실에 붙은 서측실 입구의 위쪽 모서리에 쓰여진 묵서명의 내용이다.[8] 서측실은 묘주 부부의 그림이 그려진 공간이며, 전실에서 서측실로 들어가는 방향에서 볼 때 이 묵서명이 입구 좌측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묵서명의 내용 자체는 동수라는 인물의 사망과 직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특히나 동수라는 인물이 모용황의 왕위를 둘러싼 정쟁 속에서 336년 고구려에 투항하면서 이후 행방에 대한 중국 사서의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묵서명의 내용을 고려하여 동일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묵서명 자체의 내용은 동수의 것이 맞지만 그 위치 때문에 묵서명이 누구를 지시하고 있는 것인지가 논란이다. 일반적으로는 묘주라고 생각하지만 장하독(帳下督)이라는 직책명이 쓰여진 인물의 머리 위로 묵서명이 쓰여져 있어서 다소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있다.
참고로 안악 3호분에서는 장하독의 직책이 표기된 인물이 4명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중 한 명이 위의 사진에 나오는 것이다. 장하독이라는 직책명은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어 위의 사진으로는 잘 판독되지 않는다.[9]
3. 묘주는 누구인가?
3.1. 쟁점
상당한 규모의 무덤이다 보니 당연히 묘주의 정체에 대해서도 많은 추측이 있어 왔다. 크게 고구려의 고국원왕 또는 미천왕의 왕릉이라는 주장과 묵서명에 기록된 동수의 묘라는 주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쟁점은 묵서의 내용, 벽화의 제재와 내용, 무덤의 규모와 위계·계보에 대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왕릉이냐 귀화인의 무덤이냐는 것이지만, 내재된 함의로는 왕릉으로 비정될 수 있을 만큼 큰 무덤이 313년 낙랑이 축출당하고 난 뒤인 357년에 축조되었다는 점이 포인트다.
안악 3호분을 왕릉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들의 논지 전개를 살펴보면, 대체로 고구려 고분 문화의 역사고고학적인 전개 상에서 안악 3호분이 놓인 위치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낙랑은 평양에 있지 않았다."를 방증하기 위해서 안악 3호분을 왕릉으로 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왕릉설을 주장하는 문단에서 소위 "소장파"라는 학파의 호칭은 일반적 역사, 고고학계에서는 없고 보통 민족주의적 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집단에서의 사용되는 미칭(?)이기도 하다.
또 낙랑의 소재지와 관련된 논란에서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는 북한 학계 또한 김씨 일가에 의해 특정한 사관이 강제되어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의 고고학적 연구는 고대의 경우 민족적 문제가 결부되어 있지 않은 경우이거나 아예 고려, 조선 시대와 관련된 유적, 유물이라면 비교적 생산적이고 교류 가능한 견해와 주장이 개진되고 있는 반면, 고구려 고분과 같은 경우에는 평양 중심의 역사관을 펴려는 정치적인 의도로 왜곡되기도 한다.
특히나 1990년대를 기점으로 대부분이 관학자의 성격이 짙어졌으며 최근에 발굴된 락랑구역의 보성리 벽화무덤의 경우 무수한 비교자료와의 검토 속에서 명백히 5세기의 것으로 밝혀진 마구(馬具)도 7세기의 것이라고 못박는 단절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고고학적 성과를 깡그리 무시하거나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내용만큼은 북한이 고구려사를 중점으로 한 민족주의 고취를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근저에 깔려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문제는 그 저의가 어찌되었든, 주류 학설을 단순히 "식민사학"으로 매도하는 식의 단순 비난 일변도로 진행되어 토론이 불가능한 다른 논쟁들에 비해서는 구체적인 근거에 의한 주장을 펼치고, 그에 따라 논단할 수 있는 비교적 건강한 토론에 해당하는 편이다. 또한 왕릉설을 주장하더라도 위처럼 소위 낙랑 평양 부재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수 학술적 접근인 경우도 있다.
왕릉설과 왕릉이 아니라는 설, 즉 귀화인이라는 설 2개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3.2. 고구려의 왕릉이다
묘주를 그린 벽화. 묘주가 쓰고 있는 관은 구당서에서 오직 고구려 임금만이 쓸 수 있는 관으로 언급된 얇은 흰색 비단관인 백라관을 연상시킨다.[10]
무덤 주인의 초상 벽화는 서쪽 곁방의 정면에 그려져 있으며, 서쪽 곁방 입구 양쪽 벽에는 왕을 호위하는 무관인 장하독 2명이 서로 마주보는 자세로 그려져 있다. 좌측(남쪽)과 우측(북쪽)의 호위 무사 장하독 2명의 그림 위에는 각각 묵서가 하나씩 쓰여 있는데, 좌측 장하독의 묵서에는 상술한 동수의 묵서가 적혀 있고 우측 장하독의 묵서는 오랜 기간이 지난 무덤 특성상 자연 훼손되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학계에서는 이 무덤이 고구려의 왕의 무덤인지 좌측 장하독의 묵서에 등장하는 동수의 무덤인지 조금 더 구체적이고 치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
동수의 무덤이라는 설은 무덤 안의 묵서명에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冬壽)[11]의 생애가 적혀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1949년 고분의 발굴 당시 담당자였던 도유호가 처음 이를 보고서로 작성하면서 동수의 무덤임을 주장했고, 월북 미술사가 근원 김용준이 이 학설을 체계화했다.
하지만 동수의 이름이 적힌 문제의 묵서명이 묘주 옆이 아니라 문간에 그려진 묘주의 부하로 보이는 장하독이라는 관원 그림의 머리 위에 쓰여져 있는 데다, 이 장하독의 맞은편에 그려져 있는 다른 한 명의 장하독의 그림 머리 위에서도 묵서명이 확인되었다. 때문에 묘주가 고국원왕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소장파 학자들 및 북한 학계에서는 바로 이 관원이 동수이며, 동수가 고국원왕을 위해 어떤 공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특별히 동수의 이름을 묵서명으로 남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덤 주인이 쓰고 있는 흰색 관은 고구려 왕이 백라관을 썼다는 중국 기록과 대응되며, 묘주의 행차 장면을 묘사한 대행렬도에는 묘주가 탄 수레 위에 적힌 '성상번(聖上幡)'이라는 붉은 글씨가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성상'은 보통 왕만이 받을 수 있는 존칭이므로 그런 깃발을 자신의 수레에 달고 있는 무덤 주인은 왕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왕릉설 측의 논지이다.
안악 3호분이 정말 왕릉이라고 하면 어떤 왕의 무덤이냐는 점도 문제가 된다. 왕릉설 중에는 동수가 고구려로 망명했을 때 왕이었던 고국원왕으로 보는 설이 우세한데, 왕릉이 보통 수도 인근에 축조되긴 하지만 고국원왕이 371년에 평양을 공격한 백제군과 싸우다 죽었으므로 예외적으로 평양에 묻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편 1963년 안악 3호분이 미천왕릉이라 주장한 북한의 주영헌 등은 전연이 342년에 고구려로 쳐들어 왔다가 퇴각하면서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훔쳐가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뒤로 새로운 무덤을 건설했고, 시신을 반환받는 과정 혹은 무덤 축조 과정에서 동수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왕을 모시는 장하독의 그림 위에 그의 이름을 적어놓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학설의 문제는 미천왕의 시신이 343년에 있었고 무덤이 축조된 시기는 일러도 동수가 사망한 357년 이후의 일이므로, 시신을 찾아오고 나서 무덤 축조까지의 기간을 10년 이상으로 책정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12]
3.3. 귀화인의 무덤이다
3.3.1. 안악 3호분의 중원계 요소
결론부터 말하면 안악 3호분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요령지역에서 확인되는 중원계 석실이다. 중국은 횡혈식 장법이 일반화되면서 무덤을 집처럼 꾸미는 현상이 보편화되는데, 그러한 맥락에서 형성되는 무덤의 형태 중의 하나가 안악 3호분과 같은 사례이다.북한 평양특별시 안악군 안악 3호분 | 중국 요령성 요양시 남환가벽화분 |
중국 요령성 소재 위진남북조시대(4~5세기) 석실벽화분 |
또한 동수라는 묵서명이 석실의 안쪽 벽에 그려진 묘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묘주가 왕이라는 근거는 오로지 묘주가 쓰고 있다는 백라관과 벽화 속 성상번이라는 글자 둘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묘주가 쓰고 있는 관의 형상은 고구려보다 요령성의 유적에서 더욱 많이 발견되었다. 벽화 속의 관모는 고구려를 비롯한 한민족의 전통적인 관모인 좁은 고깔 모양의 변형모가 아니라 원통형이며, 위진남북조 시대 중국에서 무관들이 주로 쓰던 '농관(籠冠)'류의 관모에 속한다.[13]
물론 이 농관이 고구려에 유입된 이후 왕관으로 용도가 변경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덕흥리 벽화고분에 그려진 고구려의 신하 진의 초상화에서 비슷한 관이 나타날뿐더러 백제 정림사에서도 농관을 쓴 인물상이 출토된 것을 보면[14] 한국에서도 평범한 관모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안악 3호분의 행렬도만 보더라도 묘주와 똑같은 형태의 관모를 쓴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따라서 벽화의 모자가 흰색이기는 하나 백라관이라고 볼 수는 없다. #
심지어 행렬도조차도 중원계 석실의 벽화를 구성하는 전형적인 요소 중 하나다. 묘주가 왕이라서 행렬도가 특별히 크게 그려졌으리라는 왕릉설의 주장과 달리, 중국 귀족층의 무덤에서는 원래 이 정도 규모의 행렬도가 구성요소로써 그려져 왔던 것이다. 이 역시 안악 3호분이 왕의 무덤이 아니라 중원계의 무덤이라는 증거로 활용될 수 있다.
4세기 중엽 | → | 5세기 | ||
안악 3호분 | 태성리 2호분 | 천왕지신총 | 대안리 1호분 | |
안악 3호분 이후 석실(다실분(多室墳))의 변화 |
하지만 이러한 중원계 석실이 있다는 것이 낙랑군의 존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은 바로 이후의 변화 양상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낙랑의 쇠락에 즈음하여 낙랑은 중국 본토와의 직접적인 네트워크가 약해지기 시작하는데,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안악 3호분과 같은 다실분 유형의 무덤들이 중국의 다실분 변천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점이다.
4세기 중엽부터 평양에 소재한 낙랑의 목곽묘와 전실묘(塼室墓)는 중국 본토의 목곽묘와는 달리 재지화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낙랑의 고분 또한 전형적인 중국계 전실묘였다. 그러나 4세기 중반 낙랑 멸망 이후에는 벽돌과 평편한 돌을 섞어서 쌓는 석실묘로 변화하거나, 궁륭형의 천장이 아니라 궁륭형으로 조금만 만들고 개석을 두는 형태로 중국적인 요소가 점차 퇴락하고 재지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15] 이러한 물질 문화의 변화로 미루어 보아 4세기 중엽, 평양 지역 낙랑의 추세는 고구려의 영향으로 구 낙랑 집단이 어느 정도는 유지되어 사실상 고구려의 아래에 편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3.3.2. 전형적인 고구려 무덤과의 비교
가장 먼저 간단하게 돌로 쌓은 무덤인 적석총, 흙으로 쌓은 봉토분이라는 점에서 외형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집안 서대총 | 안악 3호분 |
고구려 4~5세기 횡혈식석실(굴식돌방무덤)의 순서와 연대, 편년은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지역(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과 낙랑군 축출 이후의 점령 지역인 평양지역 2개로 크게 구분되어진다.
▲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소재하는 고구려 유적의 분포도. 동실묘라는 특이한 묘제를 제외하면 적석총이 대부분의 점들을 구성하고 있다.
먼저 집안지역으로 구분하는 것은 졸본·국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던 고구려의 역사적 내용과 그 일대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무수한 고구려의 유적들, 특히 적석총(돌무지무덤)의 형성 과정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청동기시대 이래로 동북지역에 만연했던 적석묘 문화는 기원후부터 고구려만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독자적인 형태로 무기단식 적석총에서 기단, 계장, 계단식 적석총으로 발전해 나간다. 고구려 적석총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3세기와 그 이전 시기의 한반도 중부지역 및 그 이남은 일부 백제의 적석총을 제외하면 대부분 토광묘 문화를 채용했으며 적석총 문화와는 확연히 대비된다. 백제에서도 석촌동 고분군 및 즙석봉토분을 제외하면 적석총, 적석형태의 무덤을 축조하는 방식은 오래가지 않았고 이내 특유의 석실문화로 변화했다. 즉, 늦어도 4세기 말까지 동북아시아에서 적석총은 곧 고구려만의 양식이었다.
반면 평양지역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고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전형적인 중원계 목곽묘와 전실묘가 채용되었다. 나무판으로 곽을 짜서 만드는 식으로 무덤을 만들어 나가는 묘제이며, 그마저도 수혈식 장법은 존속기간이 짧고 곧 횡혈식 장법으로 변한다. 이랬던 목곽묘(귀틀묘)들이 나중에는 전실묘라는 벽돌로 만든 무덤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무령왕릉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확실한 중국계의 무덤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실묘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 일대에 넓게 분포했던 이러한 중원계 무덤에서는 3세기 말 낙랑군의 쇠퇴와 한화의 실패, 313년을 기한 고구려의 점령 등의 이유로 중원계 문물 요소와 재지계의 문물 요소들이 혼재하기 시작했다.
안악 3호분의 묵서명의 연대인 357년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일대에서는 이미 고구려 전통의 적석총으로 대표되는 고분 문화가 형성된 상태였다. 또한 묘제 역시 집안지역에서는 아직 명백히 석실이라는 횡혈식 장법이 나타나지 않았고, 학자에 따라서 그 시점은 다르지만 4세기는 분명히 횡혈식 장법이 나타나더라도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는 소위 맹아기로써 두 지역의 고분 문화 전개 양상은 확연히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4~5세기의 기간에서는 두 지역의 역사적, 역사고고학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더 큰 틀에서 "고구려 고분문화의 변천"이라는 하나의 틀에서 이야기 하지 않고 집안지역과 평양지역으로 나누어 구분하는 것이다. 이후 5세기를 즈음하여 고구려도 횡혈식 장법을 보편적으로 채용하고 적석총의 축조가 둔화되고 봉토분으로 변화하면서 평양과 국내지역의 구분이 점차 사라진다.
3.3.3. 동수의 무덤
낙랑의 설치 이후 평양지역에 중원계 물질문화가 형성되었으나, 3세기 말부터 4세기 경까지 고구려의 영향력이 증대됨에 따라 본토와의 교류가 줄어들게 되고 힘을 잃으면서 중원계의 요소가 고구려의 영향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즉 평양지역은 고구려의 입장에서 새롭게 점령한 곳[16]이기 때문에, 이미 멀쩡한 수도를 냅두고 왕이 점령지에 무덤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은 다소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장수왕 이전에도 평양 천도 시도는 있었지만 장수왕의 천도 이외에는 구체적으로 실현된 바가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릉만 따로 뚝 떨어져서 간다는 것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되기 어렵다. 귀장이라는 풍습 아래에 전통적인 묘제인 적석총만 집중적으로 축조되고 있는 통구 고분군의 성격과 분포양상, 그리고 그 속에서 배치되어 있는 왕릉의 존재를 고려하면 더더욱 평양이라는 새로 점령한 지역에 중국스러운 묘제로 나라의 왕이 묻힐 가능성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이 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안악 3호분은 왕릉이 아니라 중국계의 무덤이지만 고구려적 요소가 있는 무덤이라는 점에서 묵서명의 내용에 걸맞게 중국에서 귀화한 동수의 무덤으로 여기는 관점이 타당한 것이다.
한편 평양에 중국식 무덤이 계속 축조되었다면 낙랑군이 313년 축출되었다는 기록은 잘못된 것이냐는 식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미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바로 직접 지배를 개시한 것이 아니라 잔존한 낙랑 계열 집단을 활용한 결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는 또 한편으로 동수라는 귀화 관리가 묻히기에 평양이 적절한 장소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3.4. 소결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안악 3호분은 왕릉이다 라는 주장과 근거는
1. 벽화의 내용: 왕들만이 쓰는 백라관을 쓰고 있다. 대행렬도가 그려져있다.
2. 벽화의 묵서명: 동수라는 귀화한 관리가 보이지만, 그것은 아래의 인물이고 결국 묘주 그림엔 묵서가 없다. 묘주도와는 무관.
3. 무덤의 규모: 크고 화려한 장식들은 왕릉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2. 벽화의 묵서명: 동수라는 귀화한 관리가 보이지만, 그것은 아래의 인물이고 결국 묘주 그림엔 묵서가 없다. 묘주도와는 무관.
3. 무덤의 규모: 크고 화려한 장식들은 왕릉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로 요약될 수 있으며 고구려의 왕릉이므로 357년의 연대를 통해서 미천왕 아니면 고국원왕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라관이라는 것은 고구려 왕의 의복이며, 대행렬도와 거기에 표현된 성상(聖上)의 깃발은 무덤의 주인이 왕인 것을 방증하므로, 관리인 동수의 묵서명은 묘주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 반면 왕릉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과 근거는
1. 무덤의 구조: 요령지역에서 확인되는 전형적인 중원계 무덤, 규모도 비슷함
2. 벽화의 내용: 전형적인 중원계 무덤에 중국식 관모, 중국식 군사 행렬도 등의 동일한 벽화
3. 무덤의 위치: 당시 고구려는 수도와 왕들의 묘역이 국내성 주변으로 정해졌는데 뜬금없이 평양에 축조될 수 없음
2. 벽화의 내용: 전형적인 중원계 무덤에 중국식 관모, 중국식 군사 행렬도 등의 동일한 벽화
3. 무덤의 위치: 당시 고구려는 수도와 왕들의 묘역이 국내성 주변으로 정해졌는데 뜬금없이 평양에 축조될 수 없음
∴ 안악 3호분은 고구려 왕릉이 아니며, 동수라는 묵서명은 무덤의 주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요약될 수 있으며, 묵서명을 굳이 묘주의 것이 아니라고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주를 설명하는 묵서로 인정하고 있다.
결론에 즈음하여 사족을 덧붙이면, 안악 3호분이 고구려 왕릉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에서 고고학적인 분석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문헌자료라는 점에서 역사적 문헌적 해석이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문자자료가 기록된 곳이 바로 무덤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분석은 역사고고학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역사고고학적 관점이라 함은 최소한 해당 유적이 "특정 국가의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가진 않으며, 가급적 객관적이고 많은 자료와의 비교·검토 끝에 소기의 결론이 내려진다. 하지만 안악 3호분을 왕릉이라고 보는 견해에서 관련 고분 자료와 비교·검토하는 부분은 찾을 수 없다.
안악 3호분의 묘주가 쓰고 있는 관을 굳이 농관이 아닌 고구려 왕의 백라관으로 해석해야 하는 기준 역시 불분명하다. 대행렬도에 대한 관점, 무덤의 규모에 대한 관점도 동시기 고구려 고분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집안지역과의 비교·검토가 선행되어야 하며 왜 집안지역이 아닌 평양 인근의 안악군에 자리하였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비교·검토 끝에 논리성과 타당성이 확보된 다음에야 본격적인 역사적 해석이 가미되어야 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이러한 재야역사학계의 유적에 대한 인식의 경우 고고학적인 이해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고 역사적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문헌 자료는 읽고 이해하며 비교 검토를 해나가며 사료 비판이 이루어지고 이미 선학에 의해서 개척된 분야이기 때문에 후학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고학 자료는 끊임없이 발굴되고 나타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문헌사의 사료 비판과 같은 맥락에서의 고고학적 검토는 필수적이다. 그러한 과정 없이 단순히 "묵서명의 연대가 357년이고 위치가 평양이면 고구려니까 고구려의 무덤이겠구나"라는 대전제를 깔고 해석하면 근거적 측면에서 약점이 노출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안악 3호분이 고구려 왕릉이 아닌 것과는 별개로 고구려의 왕이나 왕족의 복식을 알 수 있는 회화자료나 조각품, 장식물 같은 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탓에 웹툰이나 사극 등의 매체에서는 안악 3호분을 참고해 고구려 왕족의 복식을 재현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동수의 무덤이라는 학설도 의문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왕릉설의 다른 근거인 소위 '백라관'이나 벽화의 규모의 경우 이미 고고학적인 근거를 통해 중국계 벽화무덤에서 얼마든지 발견되는 요소임이 검증되었으나, 행렬도에 적힌 '성상번(聖上幡)'이라는 글자만큼은 같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 후대에 추가된 명문이거나, 동수가 고국원왕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다는 표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여전히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4. 안악 1, 2, 4호분
안악 3호분 외에 1호, 2호, 4호가 있다.안악 1, 2호분은 안악 3호분으로부터 북동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1, 2호의 북쪽으로 400m 지점에 평정리 고분군(벽화분)이 위치하며 행정구역상으로도 같다. 또한 입지 상으로는 인근의 봉성리 고분군과 같은 배후산지(월암산)를 공유하고 있다. 이 고분군들은 대체로 다른 축조주체의 이견이 없는 고구려 석실들이다. 보통 고분군의 명칭은 시군단위+하위 행정단위를 같이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해방 이후 1949년에 일찍이 조사되었다 보니 그런 시스템이 없었던 탓도 있다. 그럼에도 안악 n호분 네이밍이 너무 유명해서 안악군의 이 고분들은 안악 몇 호라고 여전히 부르고 있다.[17]
안악 1, 2호분은 고임천정과 생활풍속도 제재의 벽화를 갖는 단실(單室)의 석실로 전형적인 고구려 석실이며 인근의 평정리, 봉성리 고분군 또한 비슷한 성격의 고구려 석실이다. 구조와 벽화 제재 등으로 대체로 4세기 후반~말 경으로 추정된다.
안악 4호분은 장축 2m, 단축 0.6m의 소형 고분으로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안악 3호분의 바로 서쪽 5m 거리에 있는 무덤으로써 사실상 안악 3호분에 딸린 무덤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안악 3, 4호분이 위치한 곳이 안악군 오국리이기 때문에 오국리 고분군으로도 불리며, 특히 안악 4호분은 오국리무덤으로도 불린다. 안악 4호분의 구조는 T자형으로 전형적인 고구려 석실에서는 보이지 않고 안악 3호분과 마찬가지로 고구려'계' 석실 중 하나인 요동성총의 구조#와 비슷하다. 다만 요동성총은 안악4호분을 4개 붙여놓은 듯한 구조로 대형분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안악 3호, 4호, 요동성총의 공통점은 모두 구조적으로 중원계 석실에 연원을 두고 있지만 고임천장을 갖는 다는 점이다. 안악 3,4호의 위치는 낙랑군, 대방군이지만 낙랑고분 중에서는 안악3호와 요동성총과 같은 구조는 없고 요동군의 한묘에서는 확인된다. 육로상 요동군이 가까운 것은 맞으나 요동군 한묘에서는 고임천장이 그리 많지 않고[18] 되려 산동지역의 한묘에서 고임천장을 갖는 것이 많다. 그러나 산동지역은 석판묘가 아닌 전실(벽돌묘)가 많아서 완전히 어느 지역을 딱 꼽기 어렵다. 이에 관해 학계의 인식을 러프하게 요약하자면 4세기 전반~중반경 중원지역의 동란, 고구려의 낙랑군 지역 점거 등의 상황 속에서 중원계 유민이 구 낙랑군 지역에 고구려 영향 하에서 짬뽕이 된다는 정도로 볼 수 있다.[19].
안악군에는 안악 1~4호분 외에도 안악군의 구월산 남록과 남산 남록에 많은 중국계 석실들이 조사되었으며 대방군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넓은 안악군 일대에서 몇 기의 무덤을 '안악 1~4호분'으로 묶어 부르게된 것이 다소 뜬금없지만, 그러나 황해도 일원의 낙랑 멸망 이후의 고구려화 과정을
5. 기타
5.1. 드라마 근초고왕의 백라관 고증 문제
드라마 근초고왕은 안악 3호분 왕릉설에 따라 묘주도를 기반으로 백라관을 고증했다. #당시 사극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고구려 왕의 복식을 고증하여 재현하였다는 점에서 무척 고무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점차 고고학적 견해를 기반으로 한 주류 사학자들 사이에서 안악 3호분의 묘주가 '고구려의 왕'이 아닌 '전연에서 망명한 중국계 고구려인 동수'이며 쓰고 있는 관 또한 중국식 관모인 농관이라는 게 정설이 되며, 고구려 왕의 복식을 알 수 없게 됐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5.2. 드라마 연개소문의 환개머리 고증 문제
안악 3호분 묘주 부인 초상 | 연개소문 고소연(이세은 분) |
'환개머리'라 불리는 머리는 다른 벽화에서는 찾을 수 없기에 고구려의 여성이 흔하게 하던 머리모양이 아니라고 추정해 고구려의 '왕후' 혹은 '왕족/귀족의 여성'이 하는 머리모양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이 때문에 '환개머리'는 드라마 연개소문뿐 아니라 현응작가의 웹툰 왕후의 제국에 등장하는 주인공 또한 '환개머리'를 한 모습으로 등장하며[20] 고구려 왕족 여성을 표현하는 일종의 클리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상술한 결론과 같이 '묘주'의 옷과 모자가 고구려 왕의 백라관이 아닌 중국식 복식과 중국식 관모라면 '묘주 부인'이 입고 있는 옷과 환개머리 또한 중국식 복식과 헤어스타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정호섭 교수와 같은 주류 사학계 학자들의 의견이라, 고구려 왕족 여성의 복식과 머리 모양은 알 수 없게 됐으며 고증에도 문제가 되고 있다.
5.3. 실물 모형
평양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안에 안악 3호분의 실물대 모형이 존재한다. 그야말로 실물 크기로 안악 3호분을 그대로 재현해 놨다고. 부산 복천박물관 고구려 고분벽화 특별전 때도 안악 3호분 내부를 실물 크기로 재현하기도 했지만 특별전이 끝나고 사라졌다. 롯데월드 민속박물관에 안악 3호분 모형이 있다.6. 같이보기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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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 | 천리장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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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북 5도 기준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2] 1993년 12월 북한최고인민회의의 「민족문화유산을 옳게 계승발전 시키기 위한 사업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결정을 통해 1994년 문화유물보호법을 제정·공포하였으며 기존에 사용되던 국보, 보물 등의 지정번호를 일괄적으로 갱신하여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3]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4]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5]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6]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7] 위 사진의 무덤 앞 안내판을 더 가까이서 찍은 사진을보면 그냥 '고국원왕무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8] 참고로 4세기 초의 와당 명문 몇 개를 제외하면 현재까지 발견된 고구려 금석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고구려가 언급된 최초의 금석문은 3세기 중엽의 관구검 기공비이지만 이 비석은 위나라에서 작성한 것이다.[9] 다만 다른 부분의 벽화에서는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표시된 것이 확인되기도 한다.[10] 그러나 귀화인설 문단에도 후술하겠지만 묘주가 쓰고 있는 관은 4세기 당시 중국에서 유행한 관모인 농관과 형태가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백라관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11] 중국 사서인 자치통감에 따르면 336년 전연 모용황의 동생 모용인의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실패해, 모용인이 죽자 고구려로 도망가서 투항했다.[12] 이덕일은 미천왕의 부인으로 고국원왕의 모후였던 주씨가 사망한 즈음에 미천왕의 무덤에 합장하기 위해 무덤을 다시 열었고, 그 기간 사이에 동수가 사망한 사실이 무덤 안에 특기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는 했다.[13] 중국에는 고개지의 낙신부도, 각종 고분벽화와 영녕사지 출토 소조상을 비롯해 농관을 쓴 관리를 묘사한 자료가 꽤 많이 남아있고, 감숙성 마저자(馬咀子) 62호묘에서는 실제 유물도 출토되었다.[14] 동아일보: 미소띤 얼굴, 네모난 모자 “꼭 닮았다”… ‘백제 정림사와 북위 영녕사’ 유물전[15] 심지어 토기 제작에 있어서도 점차 재지적인 요소가 강해지는 것이 확인된다.[16] 예맥족 전체의 관점에서는 고토 수복에 해당한다.[17] 물론 북한의 새로운 고분군 편호나 관리 정황이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로는 여전히 북한도 안악 1호, 2호라고 부르고 있다.[18] 위 도면중 랴오양시 소재 상왕가촌 서진묘 정도 밖엔 없다[19] 첨언으로 4세기대 고구려는 적석총, 목실묘 중심의 고분문화였으며, 평양-황해도 일대에서는 평양의 동쪽 대성산 남록과 승호군 만달산 일대에서 확인되어 구 낙랑·대방의 중심지를 빗겨나 있다. 고분문화가 완전한 고구려식으로 바뀌기 시작하는건 4세기 후반으로 대체로 이해하고 있다.[20]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