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4:09:27

보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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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국보 제3호
<colbgcolor=#ED1C27> 보통문
普通門 | Potongmun
<colcolor=#fff> 주소 북한 평양시 중구역의 보통문동
면적 약 -㎡
건축시기 고구려 양원왕 (추정)
지정연도 1994년(추정)
관리 중앙문화유물보존지도기관
1. 개요2. 연혁3. 이름의 유래4. 통일 이후의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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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양(평양성)에 있는 성문의 하나다. 북한의 국보 제3호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1호 숭례문과 대응하는 포지션의 유적이다. 한국전쟁 당시 쑥대밭이 된 평양시내에서 기적같이 살아남은 2채의 건물중 하나이다.

위치는 북한 평양시 중구역의 보통문동[1]에 있다.

2. 연혁

건립은 6세기 고구려 때로, 평양 중성의 서문으로 건립되었다. 조선 초에 개축되어 오늘날까지 그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건축 양식은 고려 시대 양식을 따른다. 채제공이 50세 때 평안감사가 되어 보통문을 중수하고 낙성할 때 지은 보통문 중건기(普通門重建記)가 남아 있다.

평양의 국방과 교통의 관문으로 대접받았으며, 이 점에서도 숭례문과 포지션이 겹친다. 1960년대 평양시에 새로운 거리를 설계할 때 보통문을 사거리 한복판에 두고 천리마거리창광거리, 보통문 거리가 동쪽, 남쪽, 북쪽으로 뻗었으며 서쪽으로는 보통강에 있는 보통강 다리로 이어지도록 배치되었다. 평양 구시가와 신시가를 잇는 중심에 보통문이 위치하고 있는 셈. 조선 시대에는 보통송객(普通送客, 보통강 나루에서 손님을 전송하는 장면)이 평양팔경(평양의 여덟 가지 볼거리)의 하나로 유명했다. 현재는 보통문 누마루에서 보통강 너머로 마주 보이는 건물이 류경호텔이다.[2]

한국 전쟁 당시 공군은 북측의 수도인 평양을 세 차례에 걸쳐서 대공습작전을 진행하였고, 쑥을 재배한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평양은 폭격으로 쑥대밭으로 변하였다. 1952년에 진행된 1차부터 3차까지의 대공습작전 동안 저 때 멀쩡하게 서있던 건물이 단 두 채였다는데 그게 어떤 초가집이랑 저 보통문이라고 한다.[3] 이는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한다.

라이벌 도시(?)[4]의 상징적인 문인 숭례문이 안타깝게도 방화 사건으로 크게 불탄 뒤 복원되었지만,[5] 이 보통문만은 조선 초에 지어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임진왜란 때도[6] 파괴되지 않아 신문(神門)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후 6.25 전쟁 때도 미 공군이 평양에 가한 맹렬한 융단폭격에서 살아남았다. 이때 평양에서 온전하게 남은 건물은 보통문과 초가집 한채가 전부였다. 참고로 이렇게 살아남은 것이 얼마나 기적인지 와닿지 않는다면, 폭격 직후 평양의 사진을 보면된다.

3. 이름의 유래

첨언하자면, 보통문의 유래는 대동강의 지류인 보통강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는 소재지인 보통문동도 마찬가지.

4. 통일 이후의 가정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통문이 숭례문이듯 평양의 상징적인 건축물 중 하나로서 평양을 상징하는 전통문으로 자리할 가능성이 높다. 관광요소 중 필수적인 방문지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남북통일 이후 평양이 대대적인 재개발에 들어가고 지하철 노선이 여럿 건설된다면, 근처에 광화문역처럼 보통문역이 세워질 수도 있다.

또한 전쟁과 격동의 시기를 여럿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원본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통일이 되면 대한민국의 국보로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 북한측도 보통문의 가치를 모르는 건 아니라서 보통문은 북한의 국보 3호로 지정되어 있다.

[1] 동 이름을 상징적인 건축물에서 그대로 차용하였다. 광복 당시 행정구역상으로는 신양리(新陽里) 2-1[2] 출처: 유홍준 나의 북한문화유산 답사기[3]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따르면 하나는 보통문이고 다른 하나는 은행 건물이라고 한다.[4] 조선초까지만 해도 경제적으로보나 고려왕조의 수도라는 포지션으로 보나 개성이었지만 북부지방의 거점도시이자 역사적으로 고조선, 고구려의 수도였단 점, 잉류지역이란 점에서 제2도시라는 인식이 강했고 대한제국기에는 고종이 제2의 수도로 삼으려고 했다. 거기다 일제강점기때 평양이 경의선 철도가 깔리면서 조선인에게는 제2의 도시, 일본인에게는 관광도시로서 입지가 커져 개성과의 간격은 멀어졌다.[5] 그나마 다행히 1층 누각 90 퍼센트가 남아있어서 복구가 수월했다.[6] 평양성 전투 당시 불화살이 문에 어지러울 정도로 날아들었는데 용케 불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