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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보현사 전경
보현사 |
普賢寺
1. 개요
북한의 묘향산에 있는 사찰. 천주사(天柱寺), 서운사(棲雲寺)[1]와 함께 평안북도 영변군 3대 사찰로 꼽힐 정도로 유명한 대사찰이었으며, 그 중 가장 으뜸으로 꼽힌 절이다. 현지에서의 행정구역은 자강도 향산군 향암리이다.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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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묘향산의 역사유적 보현사와 팔만대장경 (2023년 6월 15일 공개분) |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지어질 당시의 이름은 안심사(安心寺)였다. 원래 황해도 황주군 출신의 탐밀(探密)이라는 승려가 연주산(묘향산)에 들어와서 수행하고자 지은 난야(蘭若, 암자)였는데, 정종 4년(1038년) 탐밀의 조카로써 제자가 된 굉곽(宏廓)이라는 승려가 숙부의 암자에 찾아왔고, 사방에서 제자들이 몰려들면서 4년 만인 정종 8년(1042) 동남쪽 100보 되는 곳에 243칸 대찰로 중창했다고 한다. '보현사'라는 이름도 이때 처음 붙여졌다. 이후 문종 21년(1067) 보현사에 전답을 기증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의 고승 나옹화상[2]이 이 절에 주석하기도 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승병장으로 유명한 휴정대사가 보현사에 머물렀다. 또한 임진왜란 때에 살아남은 전주 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해주와 강화도를 거쳐서 이곳에서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쭉 보관하기도 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31본산의 하나로서 부속건물들을 많이 거느렸다.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대부분 절 건물이 파괴되었으나, 전후에 복원하면서 가람 배치의 기본인 대웅전과 산자락에 바짝 붙어서 폭격을 피한 건물 중심으로 새단장을 하고, 부서진 건물 터에는 그냥 잔디를 심고 꽃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또한 내부 박물관이 있다. 해당 문단 참조.
보현사 경내의 주요 건물로는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 만세루, 대웅전, 관음전, 영산전, 수충사[3]이 있고, 고려 당시의 유물로는 묘향산 보현사 8각 13층탑, 묘향산 보현사 4각 9층탑이 있다.
요사채는 성속(聖俗)이 어우러진 격조 높은 공간으로 승화되어, 빈틈없고 냉랭한 신앙행태에 숨통을 열어주고 부처님과 대중의 중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4]
3. 산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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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는 북한의 불교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조선불교도련맹에서 관리한다. 물론 남한에도 성보박물관이 딸린 사찰들은 많지만, 경우가 다르다. 북한 전역의 많은 불교문화재를 보현사에 있는 불교력사박물관에 모아놓은 것이다. 향산력사박물관이라고도 불린다.[A]
절의 경내에는 금동삼존불, 석실형 청동탑 등 인근의 불교 유물을 가져다 놓기도 했으며[A], 금강산 유점사[7]의 범종 등 북한 전국의 사찰에서 나온 많은 불교 유물들을 이곳에 모아 보관, 전시해 놓았다. 1997년 기준 불상 101개, 불화 84점, 불교장식품 149점에 불경목판 원판과 남한의 해인사 팔만대장경 목판인쇄본 완질 1,159권 등 총 5,430점이 있었다고 한다.[8] 2018년 기준으로 6,793권을 소장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9]
그리고 묘향산 관광객의 관광 코스에 포함시켰다. 북한이 김씨 부자 숭배 이외의 종교에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한국사의 많은 문화재가 불교 미술품이고 특유의 민족주의 성향으로 역사는 또 매우 중시하기 때문에, 북한 땅 전체의 불교 문화재를 여기에 가득 모아 놓고 관광코스로 포함시킨 데서 보현사라는 절을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함을 알 수 있다.
4. 여담
- 보현사가 북한 정권으로서도 나름 의미가 있다면 있다. 당장 김일성이 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94년 사망하기 전까지 126회에 걸쳐 역사유적 현지지도를 했는데, 그 중 50회가 사찰 방문이었고, 그 50회 중 17회는 보현사를 찾았다고 한다. 김일성 본인의 묘향산 별장인 향산특각이 마침 보현사 옆에 있었다고. 1994년 7월 8일에 김일성이 사망한 곳도 바로 이 향산특각이다. # 향산특각은 김일성 사망 뒤인 2013년 10월 이전에 김정일이 철거하였다. #
- 역사스페셜에서 북한문화유산 특집으로 보현사가 소개되었는데, 소장 유물 가운데 북한 측이 "백제 시대 것"이라고 하면서 보여준 금동불상이 있었다. 취재진이 그 불상을 촬영해서 남한의 학자에게 보여주고 고증을 부탁했더니, "백제 때가 아니라 고려 말기나 조선시대의 작품 같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 유홍준에 따르면 북한에서 보현사는 가장 큰 절일 뿐 아니라 북한 불교의 총림(叢林)으로, 남한으로 치면 서울의 조계사에 삼보사찰인 송광사, 해인사를 합친 것과 같은 위상이라고 소개하였다. 다만 자신이 좋아하는 절[10]에서 느꼈던 한국 산사(山寺)의 그윽하고 깊은 향취를 느낄 수는 없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절의 스님들이 기거하면서 일상생활을 하는 곳인 요사채가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더라고 감상을 적었다.
- 북한 조선불교도련맹 승려들은 전부 대처승이고 삭발조차 하지 않은 일종의 불교 관련 문화재 관리 공무원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보현사 승려들은 다른 조선불교도련맹 승려들과 달리 2000년대 중반 들어 삭발을 하는 등 불교 색채를 드러내려 나름 노력하는 편이다.
- 팔만대장경 번역본 또한 보현사 경내에 보관 중이다. 보현사를 포함한 일부 북한 사찰 승려들은 외부 방문객이 요청하면 불경을 독송하곤 하는데, 불교 지식 공부를 어느 정도나마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조선불교도련맹 자체가 어용 관제 단체이지만 그 대표적 간부들은 박태화 대선사나 홍화두 대선사 등 일제강점기·한국전쟁 전 승려들이었기 때문에 불교 관련 지식 전수가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 보현사에서 팔만대장경 영인판을 봉안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만주국과 관련이 있다. 1935년 만주국의 괴뢰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강덕제)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거기서 일본 궁내성 도서료와 제실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일본과 중국, 그리고 조선의 고서화를 보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조선의 고려대장경과 일본의 황벽판 대장경[11]에 관심을 갖게 되어[12] 귀국하고 이듬해 고려대장경을 인경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총독부에서 당시 경성제국대학(이후의 서울대학교) 교수 타카하시 토오루(高橋亨)의 주관으로 고려대장경을 인경하고 거기에 중앙불교전문학교(이후의 동국대학교)분을 추가해서 2세트를 1937년 9월 2일부터 12월까지 작업을 거쳐 철본으로 제작했고[13] 그 가운데 한 세트를 1938년 1월 만주국으로 보냈다(만주국 봉정본). 대장경 1부 인쇄에 들어간 예산은 당시 금액으로 15,000원이었다. 이때 인출된 고려대장경은 대장경본 1,163책, 목록 3책, 경함 48개 외에 해인사 소장 대각국사문집이 2책, 해인사사진장 1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만주국에 보내고 나머지 한 세트가 보현사에 소장되게 된 것으로(보현사 소장본)[14] 만주국에 보낸 것은 소재를 알 수 없다. 그리고 보현사 소장본은 만주국 봉정본과 목록상 4책 정도 차이가 난다. 조선일보 1927년 9월 4일자 신문 기사에는 보현사를 소개하면서 팔만대장경이 소장되어 있다고 하고 있어서 그 이전에 팔만대장경의 인쇄본이 보현사로 유입되었거나 보현사에서 자체적으로 경판을 제작해서 불경을 찍어냈던 적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 다만 팔만대장경의 장경판전이 전통 건축물 형태를 유지하는 데 반해, 보현사의 전질 보존고는 현대에 건축된 건물이다. 원래는 묘향산 중턱의 천연 암반 동굴에 암자를 짓고 그 내부에 보관해 왔는데, 김일성이 이를 보고 이런 중요한 기록물은 허술한 건물에 함부로 보관하면 안 된다며[15]' 북한 정부이 묘향산에 국제친선전람관을 건설할 때, 비슷한 설계로 보현사의 팔만대장경 인쇄본 보존고를 건설했다. 팔만대장경 전질은 1970년대 후반 시작된 북한 정부의 고서 번역 사업 대상에 포함되면서 1980년대 말 영인본과 해제, 1990년대 중반 완역본이 출간되었다.[16]
- 2013년 북한에서는 미국 CNN에 보현사 취재를 허용했다. 북한 입장으로서는 체재 건재를 선전하고 싶었겠지만, 정작 기자들이 취재한 영상에는 폭우로 지반이 무너지거나 도로가 아주 폭삭 내려앉은 꼴이며,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빨래하고 머리 감는 주민들의 모습까지 그대로 드러나 버렸다. 그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보현사의 모습이 차라리 이질적으로 느껴지면서, 누가 봐도 연출된 것임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결과가 되었다.#
[1] 이 두 절은 묘향산에 있는 보현사와 다르게 약산에 있다.[2]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의 스승이다.[3] 유정대사와 휴정대사, 처영대사의 영정을 모신 전각이다.[4] 그런데 북한에서는 승려들은 전부 대처승이고, 사찰에서 기거하는 일 없이 따로 사하촌(寺下村) 격인 아랫마을에 살면서 출퇴근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보니 요사채가 복원될 겨를이 없었다.[A] 문화재재단이 동일한 전시물이 소개되고 있어 확실히 맞는 듯. 해당 링크에서 주요 유물도 소개하고 있다. #[A] [7]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불타 없어졌다.[8] 유홍준이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를 쓰던 1997년 당시[9]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018년 9월 20일 방송분 참고[10] 전라남도 순천시 선암사, 충청남도 서산시 개심사, 전남 강진군 무위사 혹은 경상북도 안동시 봉정사 등등.[11] 일본 황벽종(黃檗宗)의 승려 데쓰겐 도코(鐵眼道光)가 주관하여 1669년∼1681년 명나라에서 가져온 만력판 대장경을 번각한 것이다. 이전에 일본에서는 고려나 송에서 가져온 대장경 외에 일본 안에서 자체적으로 번각한 대장경은 난코보 텐카이가 쇼군 이에미쓰(家光)의 후원을 받아 간에이지에서 남송의 자복사판(資福寺版)을 저본으로 1637년∼1648년에 간행한 '텐카이판(天海版)'이 있었고, 황벽판의 경우는 목활자로 일본 전역에 염가로 널리 보급되었다. 내용에 오류가 많아 학술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정토종 승려 인테쓰(忍徵)가 1706년부터 1710년까지 교토의 겐린지(建仁寺)에 소장되어 있던 고려대장경과 내용대교를 행했고, 이 기록이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이다. 고려대장경이 일본에서 중국의 대장경보다 중시되었던 것은 중국 대장경에 오탈자가 많은 것에 더해서 명장(明藏) 즉 중국에서 온 대장경에 포함되지 않은 이본이 고려대장경에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2] 원래 청 왕조는 전통적으로 샤머니즘 신앙에 더해 입관 이후부터 불교(티베트 불교+중국 선불교)를 독실하게 믿었고, 아이신기오로 푸이 본인도 불교에 심취해 궁내에서 자주 염불을 외거나 명상을 하기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13] 다만 인경에 소요되는 물품들이나, 인출 및 제본은 모두 조선식으로 이루어졌다. 용지는 함양의 산업조합에서 제작하였으며, 먹은 경성과 영양에서, 제본은 조선인쇄회사 제본소가 맡아서 재교정 및 결자 보충 인쇄를 맡았고, 경본을 담을 경함은 경성 문화목공소에서 맡았다고 한다.[14] 이것도 원래는 경성불교전문학교로 보내질 예정이었는데 어떤 이유로 보현사에 보내지게 되었다. 때문에 인쇄하는 용지도 만주국 봉정본에 쓰이는 특별 제작한 황색 종이가 아니라 산업조합에서 제작한 재고 염가품 흰색 종이가 쓰였다. 다만 인쇄는 보현사 소장본을 먼저 인쇄하고 나서 만주국 봉정본이 인쇄되었는데, 제2차로 인쇄할 때가 제1차로 인쇄할 때부터 판목이 먹을 잘 머금어서 먹색이 더 윤택하게 뽑혀 나오기 때문이었다고.[15] 당시에는 남한이든 북한이든 전통 건축물의 기능과 가치에 대해 연구되지 못하였기에 이런 소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도 박정희 정부 시절 광화문이나 석굴암 복원 및 현충사 건축을 콘크리트로 하는가 하면, 1972년 나무로 된 장경판전을 헐고 콘크리트로 된 장경판전을 지어 그곳에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려다 도리어 콘크리트 보존고에 들어간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뒤틀리는 등 문제가 생기면서 다시 나무로 된 기존의 장경판전에 모셨다.## 장경판전도 제1공화국 시절이던 1955년에 기존의 기와가 너무 보잘것없다는 이유로 전부 구리 기와로 바꿨다가 오히려 경판에 이슬이 맺히고 썩는 문제가 발생해 다시 구리 기와를 빼고 기존의 진흙 기와로 되돌려야 했다. #[16] 사실 이 영인본과 완역본이 출간되기 전까지, 국내에선 북한의 '팔만대장경 전질 보유'가 '주장'에 불과하다는 학설이 우세했다. 왜냐하면 거의 3백 년 가까이 공식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가 20세기에 들어서 갑자기 기록에 등장하였고, 그 사이의 행방이 묘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에서 영인본이 나오면서 진본이고 완전한 전질임을 확인하였다. 특히 경판 전체가 대중에게 완전히 공개된 바는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에, 북한이 온전한 진본의 전질을 소장하지 못했다면 영인본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