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3 00:55:40

단군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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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단군릉/단군릉.jpg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060930053636a000a010-001.jpg북한이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는 현 단군릉의 사진.

단군릉
1. 개요2. 역사
2.1. 능의 가치와 왜곡 문제2.2. 북한이 단군릉을 개축한 이유
3. 진위 여부4. 여담5.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단군릉(檀君陵) 또는 전단군릉(傳檀君陵)은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광복 이전 평안남도 강동군 강동면 칠포리[1]) 대박산 동남쪽[2]에 위치한 무덤으로, 역사적으로 단군의 능묘로 전해져 왔으나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는 북한이 수도 평양시와 정권의 정통성을 재고한다는 프로파간다에 이용하기 위해 확장, 개축한 뒤 단군의 릉이라 주장하고 있는 유적이다.

현재 개축된 단군릉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피라미드형 돌무덤으로, 높이는 22미터, 너비는 50평방미터쯤 된다. 북한 정부는 이를 국보 제174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2. 역사

파일:external/blogimg.hani.co.kr/71030_39514.jpg
북한이 개축하기 이전의 단군릉. 사진에서 보다시피 '단군릉' 석비를 제외하면 그 형태는 피라미드와 거리가 먼,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흙 봉분 무덤이다.[3]

본래 평양 근교에 있는 '단군릉'이란 무덤의 명칭은 역사적으로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박은식의 한국통사 등에 등장하며, 단군의 무덤으로 인식한 역사 자체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숙종(1697), 영조(1739), 정조(1786), 순종(1909) 시기 강동의 단군묘 수리 및 제사를 지시한 기사가 등장한다.[4] 하지만 이 무덤이 실제로 단군의 무덤인지는 과거에도 현재도 확인된 바 없으며, 어디까지나 당대에도 그렇게 전해져 내려올 뿐이었다.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은 이러한 단군릉의 존재에 부정적이었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유물론적 역사관 때문으로, 당시 북한에서는 실재하는 증거가 없고 어디까지나 신화와 종교의 대상에 불과한 단군의 무덤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5] 물론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처럼 단군릉을 파헤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실제 고조선의 왕릉이라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3년, 북한은 대대적인 발굴 조사를 단행했으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 무덤이 진짜 단군릉이라고 주장하며 그 가치를 드높이기 시작했다. 김일성이 대리석으로 피라미드형 무덤을 조성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자기들의 기호에 맞게 개건확장한 후, 1994년에 위와 같은 모습으로 공개한 것이다. 발굴 조사 당시 무덤에서 인골이 수습되었는데 북한 측에서는 이를 단군의 유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1. 능의 가치와 왜곡 문제



물론 이 무덤이 정말로 기원전 24세기에 살았던 단군의 무덤이 아니더라도 단군이 묻힌 곳이라고 알려져 고려시대부터 수백 년 넘게 제사를 받았고 관련 기록이 존재하기에 문화재적 가치는 충분하다. 실제로 고조선 시기 무덤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늦어도 삼국 시대 즈음으로 추정되는 오래된 무덤임은 분명하므로 '전(傳) 단군릉'으로서 역사적 가치는 분명히 있었다. 이 무덤이 남한 땅에 있었다면 사적으로 지정되기에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북한 정권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확실하지도 않은 역사를 무비판적으로 예단하고, 소위 '단군릉'을 본래 모습과는 전혀 관련 없이 개조한 데에 있다. 평이한 옛 무덤을 보고 즉흥적으로 '우리나라의 원시조'라 단정한 김일성은 이를 고구려 시조 동명왕릉보다 더 크게 '만들라' 지시했다. 무덤 자체는 장군총의 모습을 본뜨라고 김일성이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과거 남한 언론에서는 단군릉 복원이란 표현을 썼기 때문에 대중들은 그렇게 알지만, 사실 북한에서는 단군릉을 비롯한 유적들을 복원(復原)이 아니라 개건(改建, 고쳐 세우거나 지음)했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개건'된 북한의 다른 유명한 문화유적으로 동명왕릉정릉사가 있다. 그러나 단군릉의 경우에는 이를 참작하더라도 개건이라는 단어가 표현하는 일반적인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다. 어디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대리석을 씌우고, 정체불명의 조각상을 세웠으며, 원래 단군릉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만들어버렸다. 속된 표현을 사용하자면 '마개조'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2.2. 북한이 단군릉을 개축한 이유

남한이 아닌 북한을 한반도 역사의 정통계승자로 놓기 위한 정치적 계산도 포함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아직까지 왜 이렇게 해놨는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이와 관련해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장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의 장정신 관장이 대담 중에 "주체를 올바로 세우는 뜻에서 3대 시조릉에 대한 개건사업을 전개했다."고 한 말의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즉, 고조선의 단군, 고구려의 동명성왕, 고려의 왕건, 그런 식으로...
이렇듯 1993년 발굴과 1994년 개건은 학술적이기보다는 상당히 정치적이다. 지금의 북한 영역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북한으로 이어지는 역사정통론을 내세워서 사실상 '자신들의 역사적인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왜곡행위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972년까지만 해도 북한 헌법에서 서울을 수도로 명시할 정도로 적화통일에 집착하고 있었지만 점차 분단이 고착화되고 단시간내 적화통일의 희망을 잃게 되면서 한반도의 정통적 계승자로서의 북한의 입지를 공고화하기 위해 민족사에서의 평양의 입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이다.

3. 진위 여부

상술했듯 북한은 과거에는 단군릉 등의 고대 유적에 무관심했으며, 더욱이 50년대까지는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를 회의적으로 보거나, 고대 노예제국가가 아니라 원시 공동체사회로 보기도 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성립되었음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없다는 것. 이 가운데 사료연구 및 고고학적 성과[6]가 뒷받침되자, 이후에는 7~8세기 요동~한반도 지역에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여겼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한은 학문의 자유가 나름대로 보장되었으며, 해방 전후로 유명한 학자들이 다수 월북한 터라, 남한보다도 어떻게 보면 우수한 학문적 성과가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7]

그러나 1993년 단군릉 발굴과 함께, 갑자기 "단군이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실존인물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라고 언급하면서, '종래에 신화적 전설적 인물로 간주되어 온 단군이 실존인물이며 우리 민족의 원시조'라고 주장을 바꾸었다. 그 근거로는 무덤 안에 있던 두 남녀의 유골을 전자스핀 공명법으로 측정한 결과를 들었다.

그러나 전자스핀 공명법으로 뼈나 치아를 연대측정할 수 있긴 하지만 그 편차가 너무 큰 데다 아직 신뢰성에 문제가 많다. 그래서 전자스핀 공명법은 대부분 수천만 년 전 화석의 연대측정에 이용하는 편이다. 어쨌든 북한은 이 측정법으로 다른 기관 두 곳에서 각각 24회, 33회 측정했고, 매번 5011년(오차값 ±267년) 전이라는 결과가 나왔으므로 신뢰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남한에서는 이런 발표야말로 연대측정 결과를 조작한 증거라고 본다. 편차가 크고 신뢰도가 낮은 방법으로 수십 번 측정했는데, 결과가 매번 단 1년 차이도 없이 계속 똑같은 연대가 나왔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반면 남한의 역사학계에서는 단군릉이 고구려의 전형적인 반지하 외칸 석실무덤으로, 내부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과 금동관을 고려하면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의 지방 귀족이었다고 추정한다. 또한 이 무덤을 '단군릉'이라고 칭한 기록이 남은 이유는 고구려가 망하고 수백 년이 지난 뒤, 옛 사람들이 '평양에 있는 오래된 무덤이니 혹시 단군의 무덤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으로 본다. (더욱이 과거 사서의 기록에서도 고구려 유물과 함께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즉 굳이 표현하면 전(傳) 단군릉, 즉 '단군릉이라고 전하는 무덤'에 가깝다. 구형왕릉의 북한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8]

심지어 1994년 북한에서 발행한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론문집』에서도 단군릉의 원 양식은 고구려식 무덤이 맞고, 출토된 금동관 역시 고구려 금동관이 맞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전자스핀 공명법으로 매장된 유골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그 측정치가 기원전 3000년 이상으로 나왔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북한은 고구려인들이 장수왕 시기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 자신들의 시조왕인 동명왕릉을 새 수도 평양으로 옮겨오면서, 평양에 이미 존재하던 기존 단군릉을 고구려식으로 새로이 고쳤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다. 우선 아직까지 고구려에서 고조선 시대에 이미 있던 단군릉을 새로 개축했다는 기록은 발견된 바 없다. 또한 굳이 잘 있는 무덤을 파헤쳐서 무덤을 고구려식으로 개조한 뒤 유골에 고구려식 금동관을 씌우고 다시 묻었다 함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더군다나 단군 숭배 의식이 있어서 단군릉을 다시 만들었다면서, 금관도 아닌 급이 낮은 금동관을 씌우고 고작 지방귀족 무덤 수준으로 축조했다는 말인데... 그럼 대체 원래의 단군릉은 얼마나 초라했다는 소리일까?

4. 여담

  • 이 단군릉으로 인한 북한 학계의 변화를 살피면, 북한 학계가 이미 학자로서 비판의식과 객관성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였는가 하는 문제는 남한 역사학계의 오랜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북한 학계에서는 한반도 중심설, 요동 중심설, 이동설(요동→한반도)을 모두 제기하였고 활발히 연구하였다. 그러던 중 60년대 초에 학술토론과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9]에 힘입어 요동 중심설이 정설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중국과 함께 요하일대를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하여 요동 중심설은 공고화되었다.[10] 더군다나 이 시기 북한이 보았던 고조선 국가성립시기는 기원전 7~8세기였다. 그런데 저렇게 단군릉이 진짜 '단군'의 릉이라고 선전되자 평양 중심설이 정설이 되었다. 1990년대 초에 북한에서 나름대로 학술대회와 토론회를 열었으나, 결과는 이러하니깐 너는 거기에 뒷받침할 것만 만들라는 결론이었다. 거기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에서는 세계 5대문명설을 주장하며 대동강 문명을 끼워넣기도 했다(...) 여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가면, 평양이 세계문화의 발상지가 될 기세... 한편 북한은 1995년 단군릉 개건 기념 어천절 행사[11]를 홍보하면서, 대종교 교주이자 통일운동본부를 이끌었던 안호상[12]이 방북을 적극 추진했다. 당연히 당시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당시 통일원은 방북을 불허하자[13] 굴하지 않고 밀입북했다.[14] 안호상이 초대 문교부 장관이었던 데다가 고령이고 별다른 대공혐의점이 없어서 조사 후 방면했다.
  • 북한의 자국사 교과서인 조선력사의 표지가 단군릉이다.
  • '' 모양 탁자식 고인돌(일명 북방식 고인돌)의 전형적인 모습이자 걸작으로 꼽히는 문흥리 고인돌이 단군릉 바로 옆에 있다. '저게 여기에 있어?'라고 생각할 정도로 위치가 가까워서, 위 사진상의 거대한 계단 위에 올라가면 문흥리 고분군이 잘 내려다보인다.
  • 북한이 유치하는 외국인 대상 관광여행에 꼭 포함되는 목적지이다
  •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평양편에서도 소개된다.
  • 이 외에도 기자릉과 환웅릉이 적어도 조선시대까진 현존했던 것으로 보이나 기자릉은 김일성이 철거하였고 환웅릉은 전쟁으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5. 같이보기



[1] #[2] 8번 국도가 근처를 통과한다.[3] 사진에 보이는 단군릉 비석은 일제강점기1936년에 세웠다고 한다. 단군릉(檀君陵)이란 명칭을 앞면에는 한자로, 뒷면에는 한글로 새겼다.[4] 일부 민족주의 계열 유사역사학자들의 경우 실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고고학적인 접근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위 역사서에 나온 피상적인 기록만으로 '북한에 있는 것은 단군릉이 맞다. 사료에 있지 않느냐. 이를 부정하는 것은 식민사학이다'라고 성급히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5] 김일성이 본격적으로 신처럼 우상화되고 주체 사상이 확립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은 일단은 유물론에 입각한 사회주의 국가답게 "봉건 사가나 부르주아 민족주의 사가에 의해 실재한 고대국가나 인물인 것처럼 과장되었다."하면서 단군이라는 인물 자체를 부정하거나,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그 시대에 군주를 가리키는 명칭 정도로만 보았다.[6] 특히 요하 지역에서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을 비롯한 순장무덤이 발굴되면서, 이런 순장무덤을 만들 정도면 이 시기에 고대국가가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과거 80년대 남한 학계는 북한의 이러한 연구를 수용하기도 하였다. 현재에는 순장무덤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집단매장된 공동무덤으로 본다.[7] 물론 이러한 자유는 그 당시에도 어디까지나 비정치적인 분야에 한했으며, 이후 제정일치국가(...)로 나아가면서 사라졌다.[8] 단 구형왕릉은 애당초 무덤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는 만큼, 일단 고대의 무덤임이 확실한 원래 단군릉과도 좀 다르긴 하다.[9] 지나치게 고조선 영역을 넓게 잡았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현존하는 기록 대부분을 집약해서 분석하였다. 80년대 남한의 고조선 연구 열풍에 기여하기도 했다.[10] 이전의 서술에는 김일성의 입장어명으로 요동 중심설이 정설이 되었다고 서술하였지만, 김일성의 말은 학술평가가 끝나 공식화된 결론에 동의한다고 승인한 것에 가깝다. 물론 이러한 공식입장에 끝까지 반대한 이들은 60년대 후반 무렵 소식이 끊겼다.[11] 御天節. 대종교의 경축일로, 단군이 치화를 끝내고 하늘로 올라감을 기념한다. 날짜는 음력 3월 15일. 1995년 어천절은 양력 4월 14일이었다.[12]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대종교 16대 교주로 소개하나, 대종교 자료를 보면 14대 '총전교'라고 쓴다. 대종교 교주 호칭이 원래는 '도사교'였는데, 3대 도사교 윤세복 시절에 호칭을 '총전교'로 바꾸었다. 따라서 3대 도사교가 1대 총전교인 것. 여기서 대수 계산의 차이가 생겼다.[13] 1994년 김일성이 죽은 뒤로 남북정상회담이 파토나는 등 남북관계는 경색된 데다, 김일성 생일과 가까운 날짜였다.[14] 안호상 방북은 종교적 행동으로 볼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벌이던 통일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홍익인간 이념'으로 하나되어 민족통일을 이루자 주장하며, 통일운동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에서 민족주의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하니 '민족통일의 공통분모'라면서 참가한 것. 그에 따라서 남북이 함께 어천절 행사를 하자고 주장했다.[15] 또 다른 체제선전용 피라미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