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9 23:42:56

구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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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구호나무/룡악산구호나무.jpg
북한 평양시 용악산의 구호나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보존하고 있다.

파일:attachment/구호나무/구호문헌.jpg
불규칙하고 방향이 잡히지 않은 한자 필기[1]구개음화를 반영한 한자음[2]을 넣고 'ㅺ, ㅼ, ㅽ, ㅾ'과 같은 된시옷을 전혀 쓰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듯이 이는 현대의 날조물이다.


1. 개요2. 상세3. 북한 내 선전 교육4. 보존 실태5. 훼손 시 처벌6. 북한 당국의 날조

[clearfix]

1. 개요

구호나무는 북한에서 '일제강점기김일성의 휘하의 항일 유격대원들이 김일성을 칭송하며 구호를 적었다'고 주장하는 나무로, 자칭 '혁명 유산'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그 내막은 북한에서 정통성 강조를 위한 선전, 선동에 이용할 목적 및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를 신격화하기 위한 날조이다.

2. 상세

북한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 유격대원들이 나무껍질을 벗겨 칼로 새겨 놓은 뒤 천재지변에 훼손된 것을 북한 과학자가 구호나무 발굴용으로 새로 개발한 액체 시약을 통해 복원했다고 한다.

1961년 최초로 19그루의 구호나무가 발견됐다고 알려졌으나 이 당시 북한 내부에서 큰 반향은 없었다. 그 후 약 25년이 지나 김정일의 45회 생일 이후인 87년도 경부터 북한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북한의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이후 90년대 초반까지 북한 문화상이었던 장철과 조선로동당 당력사연구소장인 강석숭의 주도로 구호나무 발견사업이 대대적으로 시작된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발견 숫자가 늘어났다. 초반에는 죽은 나무와 고목들로 백두산 일대에서만 발견되었지만, 점차 개마고원 산악지대에서 나중에는 북한 내륙 전역에서 살아있는 나무까지 포함해 여기저기 발견되어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강원도에서도 발견되기도 했다.

북한 내부 선전에 의하면 남한에도 있다고 하지만 당연히 거짓이다.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6.25 전쟁 중 포화로 사라졌다던가, 과거 어려웠던 시절 땔감을 구하기 위해 베어졌다던가, 나무의 수명이 다하거나, 재개발 과정에서 산이 통째로 사라지며 벌목을 당하던가 하는 등의 사유로 더이상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거의 100%에 가깝다.

구호나무에 새겨진 구호 문구 또한 최초 발견 당시에는 독립에 대한 내용 또는 김일성 관련 내용이 주류였으나 이후 김정일김정숙을 찬양하는 내용도 늘어나고 있다. 1991년 북한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김일성과 관련된 것은 1260점이고 김정일을 대상으로 한 것 210점, 김정숙을 칭송한 것 330점 등이 존재한다.

3. 북한 내 선전 교육

파일:attachment/구호나무/구호우표.jpg
북한에서 매우 중요시하는 혁명유산인 만큼 주민들에게 널리 교육되고 있으며, 북한은 구호나무와 구호문헌을 '우리 혁명의 만년재부이며 주체조선의 국보'라고 주장하며 전체 주민들에 대한 사상교양 자료로 적극 이용하고 있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각급학교에 '구호문헌직관물실'을 설치, 구호나무 모형이나 사진자료를 전시하며, 일반 주민 대상으로는 구호문헌해설사업, 구호통달경연, 구호문헌연구토론회, 구호문헌문답식경연 등을 연다. 이와 함께 구호나무와 구호문헌을 소재로 영화, 연극, 시, 가요, 기념우표도 만들고 있다.

4. 보존 실태

사람도 못 먹는 돈을 죽은 '구호나무'가 먹으니 살아있는 우리보다 죽은 나무가 낫다.
2012년 구호나무 기록영화를 본 한 북한 주민이 한 말.

영구보존과 선전을 위한 전시를 동시에 하기 위해 나무 하나하나마다 해외에서 수입한 고가 통유리를 씌우고[3] 그 안에 순도 99% 아르곤 가스를 투입한다.

또한 전기장치로 통유리를 감싼 보호천이 오르고 내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참관객들이 없는 밤에는 두꺼운 휘장으로 전체를 감싼다. 여기에다 내부는 섭씨 20도의 상온을 유지하기 위해 컴퓨터 시설을 갖춘 중앙통제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부근의 나무가 쓰러져 구호나무를 훼손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목들을 철봉으로 떠받쳐 놓은 것은 물론, 벼락피해를 막기 위해 피뢰침까지 설치해 놓았다. 또한 산불 피해를 막기 위해 스프링클러 50여 개를 설치했고 전적지 주변 모든 나무를 벌채해 방화선을 쳐놓았다.

이러한 보존 비용이 나무 한 그루 당 한 해 2천만원이 들어간다.[4] 한 그루당 2천만 원이니까 지금까지 '발견'된 구호나무의 수를 생각하면 수백억원[5]이 들고, 앞으로도 계속 '발견'될 거라는 것을 감안하면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5. 훼손 시 처벌

구호나무는 북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우상화 선전물 중 하나이므로, 이를 훼손하는 것은 초헌법적 규율인 당의 유일적령도체계확립의 10대원칙에 어긋난다. 북한에서는 주민들에게 구호나무를 목숨을 바쳐 지켜야하는 것으로 세뇌하며 훼손되도록 방치한 사람 또한 엄벌에 처해진다.
  • 2007년 데일리NK는 조선릉라888무역회사 함경북도지부 외화벌이 책임자 오문혁이 통나무 밀매를 위해 구호나무를 벌채한 혐의로 공개 총살되었다고 보도하였다.
  • 2019년에는 함경남도 검덕지구에 있는 광산 노동자가 구호나무 인근의 나무를 베었다는 이유로 로동교화형 5년형을 선고받기도 했으며, 정황상 구호나무 인근 부지의 경비원과 산림감독원도 처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

파일:attachment/구호나무/무재봉구호나무.jpg
위 선전화는 1998년 3월 19일 함경북도 어랑군 무재봉[6]에서 농민의 실수로 산불이 나서, 산불로 인해 불에 타게될 위험에 처해 있는 구호나무를 지키기 위해 20명의 조선인민군 해군 병력이 구호나무 곁에서 불을 끄려다가 17명이 불에 타죽은 사건을 그린 것으로, 애초에 전용 건물 내부로 나무를 옮기면 이런 일이 거의 안 생길 터인데 여러 모로 이해가 가지 않는 개죽음이다.[7]

이 사건 이후 사망한 조선인민군 해군 하전사들에겐 공화국 영웅칭호가 추서되었고 해병들이 소속되었던 중대 이름은 사망자 중 최선임 사관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북한에서는 이것을 근 20년이 지난 지금도 영웅적인 행동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에 이례적으로 김정일이 직접 구호나무를 훼손되도록 방치해서 벌을 받게 되었으나 용서해준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이 사건으로 반대로 뒤늦게 된서리를 맞고 만다.
97년 8월경 평북 신의주 지방에 큰 비가 내려 홍수가 났는데 구호나무들이 대거 물에 휩쓸렸다. 당국은 물에 휩쓸린 주민들을 구하는 것보다 구호나무를 건져내는데 진력했다. 그리고 건져낸 구호나무들은 에서 가장 큰 목욕탕의 영업을 중지시키고 그곳에서 말리도록 지시를 내렸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밤낮으로 그 목욕탕을 지키며 나무 말리기에 여념이 없던 보일러공들과 노동자들이 밤에 술을 먹고 관리를 게을리 하는 바람에 구호나무에 불이 붙어 모두 타버린 것이다. 즉시 비상소집이 걸렸고 노동자 7명은 족쇄(수갑)를 채워 국가안전보위부에 연행됐다. 물론 김정일에게도 이 사실이 직보됐다.

간부들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저마다 목청을 높였지만 김정일은 홍수와 굶주림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는데 이들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며칠 후 평북도당 간부들은 광장에 주민들을 불러내 이 사건과 관련된 행사를 진행했다. 주민들은 다들 이들에게 틀림없이 극형이 내려지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장군님(김정일)의 친필지시는 전혀 딴판이었다.『그들을 너그럽게 용서해주라』는 것이었다.

순간 죽는 줄만 알았던 이들 「죄수」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장군님의 「은덕」을 칭송했고, 군중들도 장군님의 「은혜」에 감동했다.

이 사건이 잊혀질 무렵인 1998년 3월이 지나 구호나무와 연관된 사건이 또 벌어졌다. 함경남도 지방에 있는 무재봉에서 대형 산불이 일어났다. 배고픈 주민들이 뙈기밭을 일구다가 실수로 산불을 낸 것이다.

이 산에 구호나무들이 많이 있었고 인근엔 군부대들이 배치돼 있었다. 산불이 워낙 크게 나 바위가 불에 그슬려 탁탁 튈 정도로 불길이 치솟았다고 한다. 구호나무를 구하기 위해 군인들이 동원됐고 20명의 군인들이 구호나무 곁에서 불을 끄다 질식해 쓰러졌다. 그중 17명은 끝내 사망했다.

인민무력부는 이 사실을 즉시 김정일에게 보고했고 김정일은 『참 훌륭한 군인들』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이봐! 군인들은 이처럼 영웅적인데 얼마 전에 술 처먹고 구호나무를 태워버린 사민놈들 있지? 』하며 그들에게 마구 욕을 퍼부었다. 김정일의 말 한마디에 사람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북한에서 살려준 줄 알고 눈물을 흘린 민간인들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렸다. 며칠 뒤 구호나무를 태워먹은 민간인들은 다시 보위부에 연행돼 종적을 감추었다.

6. 북한 당국의 날조

구호나무의 신빙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 내로 침투한 게릴라도 드물었는데 심지어 강원도에서까지 발견된다는 것과 설령 있다해도 게릴라 활동을 하면서 은신하는 항일 유격대원이 이동로가 다 드러나게끔 대놓고 흔적을 낸다는 것도 상식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조총련 계열의 조국 방문단 일원들이 수십명이 왔는데, 처녀 안내원이 구호나무에 대해서 이들에게 선전하기 시작하자 조총련 방문단원들은 구호나무를 보더니 척 봐도 2, 3년 밖에 되지 않은 글씨인데 저게 무슨 왜정 때 새긴 글씨냐고 비웃기 시작했고, 어쩔 줄 몰라하면서 자기가 배운대로 안내를 하던 안내원은 계속되는 태클과 비웃음에 결국 엉엉 울어버렸다는 얘기가 있다.[8]

황장엽 전 비서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부대원 중에 국내에 파견된 사람은 한 두 명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붓을 가지고 다니면서 나무껍질을 벗기고 먹으로 구호를 써넣었겠는가? 또 그렇게 먹으로 쓴 글씨가 어떻게 수 십 년동안 비바람을 이겨내고 그대로 보존되었겠는가? 그 무슨 특수약품을 바른다고 해서 원형처럼 그대로 복원이 되겠는가?... 김정일의 탄생을 ‘광명성의 탄생’이라고 한 것은 날 때부터 지도자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는 것인데 빨치산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영도권을 세습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고 주장했고 그외에도 황장엽이 어린시절인 일제강점기에는 그런 나무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출처:황장엽, 황장엽 회고록, 5장 p209~210)

실제로 2007년 북한을 탈북한 인민군 장교 출신 탈북자 박명호가 북한에서 직접 보고 들은 날조 과정을 쓰기도 했다.
"구호나무" 참나무도 소나무도 잣나무는 더욱 아닌 구호나무라는 것이 북한에만 있다. 북한에서는 남조선에도 많다고 하는데 여기 와서 알아보니 그런 나무 아는 사람 없다. 김일성 항일유격대 소조가 쓴 글들이 현재 발굴된 나무들이라 한다.

나는 이 구호나무 발굴에 직접 참가해 본 사람으로서 그 진상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 전부 몽땅 한대도 남김없이 모두 가짜다. 지난 1960년대 발견된 청봉숙영지 쪽에 있는 나무들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저로서 장담하기 어렵다.

그러나 1980년대~90년대 초까지 북한 전 지역에 불어친 구호나무 열풍은 조직적인 열풍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생동한 실례를 하나 들련다. 사적지를 폐쇄하다. 바로 한남 장진 속사혁명사적지라고 그렇게 신문 TV에서 떠들더니 하루아침 형체를 보기 힘들 정도로 파괴해버렸다.

"사적지를 파괴하다니, 누가?"

모두 수근거린다. 속사혁명사적지 발굴대장 김순봉을 잘 알고 있던 나로서는 곧 그의 파멸을 예고했으며 친구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연화산은 북한서 4번째로 높은 산이다. 2350 m의 높이와 함경도자강도의 경계를 이루는 이곳에서 김일성 유격대의 구호문헌이 무려 70개나 발굴됐다.그 70개 중에 40여 개를 구호발굴 대장인 순봉이 찾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산에서 살아온 그는 나이 50이 넘도록 입당을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치안대였기 때문이고 월남자 가족이기 때문이다. 신발을 타는 데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곰과 맨주먹으로 싸워 동료를 구하기도 한 그였다. 신흥, 부전, 백암 모두 연화산 주변이다. 구호문헌들을 자세히 그는 사냥을 하면서 구호나무를 찾기 시작했다. 5대를 찾자 발굴대 대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현역이던 저도 그곳에서 순봉과 함께 구호발굴에 참가하게 되었다. 20여명으로 구성된 발굴대는 한두 개 찾았고 순봉은 40여 개를 찾았고 당에 입당도 했다.

속사리 마을은 궁벽한 산골로부터 일약 온 나라의 관심이 모아지는 사적지 마을이 되었다. 도에서 동원되여 돌격대가 조직돼 도로 확장 공사를 하고 살림집들도 사적지 마을답게 새로 지워준단다. 온 마을이 사기 충전했다. 거기에 밀영 자리까지 순봉이가 찾았다.

그의 권위는 군당책임비서 만큼 높아졌다. 사흘이 멀다하게 기자들이 찾아온다. 이렇게 1년이 지나갔다.

순봉이가 찾은 구호나무 40개는 3달 전에 가짜라고 폐기했고 30개는 사흘 전에 폐기했다. 군 소재지 대형 게시판에 써있던 속사혁명사적지(소개도)도 없어졌고 200여 리에 이르는 구간에 도로 리정표보다 훤하게 세워 놓았던 ‘속사 혁명사적지 가는 길'구호판도 보이지 않는다. 순봉은 하룻밤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의 안해도 자식들도 모른다. 속사리 마을 사람들은 순봉을 욕한다. 입 건사를 잘못해 다된 사적지 마을을 놓쳐버렸다고. 그러면 자기들 살기가 좋아질 텐데 참 아쉽다고 한다. 순봉이가 술자리에서 여러 번 그 구호나무들이 모두 자기가 쓴 것이라고 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30개는 다른 사람들이 쓴 것이라고 하였다. 민심은 흉흉했다.어떻게 썼는가 하니 오래 전에 껍질 벗겨진 나무를 다듬고 먹으로 쓰고 그 위에 숫검댕이 칠을 하고 참기름을 바르고 연기를 피워 그을려 놓았다.

순봉이 2~3년 전에 연화산 주변을 몇 달간 내려와서 숙영하던 사람들에게서 배웠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나무에 글을 쓰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새하얀 화물차에 천막을 친 차 2대가 마을 곁에 와서 석 달간 머물러 있었다. 옷차림은 연락소 복장을 했고 자동차 번호도 없었다. 주민들과 절대 어울리지 않았고 그들이 뭘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약초 캐러 갔던 사람들이 여러 번 산에서 그들을 만났는데 자기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 뿐이였다.

그 때부터 1~2년 지나서 구호나무 바람이 불었고 순봉이 대장이 되었는데 순봉은 이들이 나무에 쓰는 것을 보고 자기도 따라 썼으며 발굴대 대장까지 된 것이다. 헌데 순봉이 쓴 것이 좀 서툰 데가 있어 여론이 너무 나빠지고 있었고 본인이 시간이 지나면서 몇 번 발설하고 가짜 구호나무 여론이 떠돌자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중앙당 력사 연구소에서 내려와 결국 순봉이 쓴 것만 폐기시키고 자기네가 쓴 30개는 남겨두었댔는데 워낙 그곳 사적지 망신을 모두 다한 터이라 함께 모두 폐기했다. 밀영자리라고 하는 동굴 앞은 6.25 때 국군이 물러가자 진달래 꽃 필 때를 기다리던 반동 놈들의 소굴이였다고 소문났다. 틀림없는 것은 구호사적지가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엔 몇 년 전에 연락소 복장의 사람들이 움직였던 곳들이다. 또한 60년대 발견된 구호나무에는 ‘조선독립’이 기본이였으나 80년대 구호문헌에는 ‘백두광명성’이 기본이라는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도 믿건 안 믿건 정부는 끈기 있게 한다.이제 태어나는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들으면 믿을 것이니까. 지금도 함경남도 장진군 속사리에는 폐기된 사적지 자리가 생생히 살아있다 폭로된 허위날조를 세상에 알려야겠으나 소문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서해 귀순용사 박명호 비망록 (4)

그러나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는 직접 취재한 것을 토대로 쓴 《곁에서 본 김정일》이라는 저서에서 중국쪽 영토내의 백두산 인근에서 구호나무가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구호나무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가짜라고는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위의 탈북자 박명호의 증언에서도 60년대 최초 발견된 것이 가짜인지는 알수 없다고 적고 있다.

60년대에 19그루가 발견되고 잊혀졌다가 갑작스레 김정일이 권력장악후 후계작업이 가속화 되던 시기인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발견사업이 대대적으로 시행되고 널리 선전되었다는 것으로 볼때 과거에 실존해 발견되었던 구호나무에서 착안해 김정일이 자신의 정치선전용으로 날조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백번 양보해서 ‘조선독립’같은 구호는 실제 독립군이 심리전 용도나 자신들의 독립의지를 고취하는 뜻에서 새겨놓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낙서로 일제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9] 하지만 나무에 글 새겨놓고 다니는게 독립군의 임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구호나무의 숫자가 극히 적은 것이 당연하다. 게다가 그 문구를 새긴 나무가 일본군에게 발각되면 자신들이 지나갔다는 흔적을 일본군에게 보여주는 것이 되므로 대단히 위험해질 수도 있다.

특히 김일성우상화하는 문구나, ‘광명성 탄생’ 같이 김정일을 기념하는 문구는 존재할 수가 없다. 애초에 김일성의 본거지는 백두산 밀영이 아니라 소련이었으며 김정일도 소련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1] 하술하겠지만 의무교육과 생업으로 20세기 초반의 문헌을 숨쉬듯이 읽던 조총련 방문단원들에게 이러한 필기체를 보여줬으니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2] 金正淑이라는 이름은 '김졍슉', 長壽라는 단어는 '댱슈'로 써야 한다. 장수를 표현하고 싶었다면 왼쪽의 '祖国'처럼 '長寿'로도 됐는데 이걸 '長________'로 써놨으니 보는 입장으로도 어이를 상실할 지경이다.[3] 북한은 유리 생산 기술이 떨어져 대부분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유리창에 기포가 있고 투명도도 매우 낮다.[4] 한국 돈으로 2천만원이면 북한의 지방에선 상류층의 1년 생활비이고 평양에서도 중산층 네 가구의 1년 생활비씩이나 되는 엄청난 액수이다.[5] 2019년 북한 정부의 1년 예산은 9조 3천억 원으로 추정되므로 수백억원 은 북한 정부에 정말 큰 돈이다.[6] 함경북도 어랑군에 있는 산. 무계 호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신포, 어대진역에서 가깝다.[7] 다만 주성하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단순 질식사로 죽은 군인들을 선전으로 써먹기 위해 뻥튀기한 것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면 마른 하늘에 날벼락 곁으로 목숨을 잃은 군인들에 대한 최악의 고인모독 + 시체팔이인 셈. 관련 RFA 기사[8] 나무에 쓴 글씨임을 감안해도 한자를 능숙하게 써온 세대의 필적과는 괴리가 크고, 제대로 모양이 잡혀있지도 않다. 萬·年·長같은 글자는 아예 붓 필기체 예시를 베낀 게 눈에 선할 정도.[9] 이는 38선 이남 지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