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26년 3월 1일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태어났다. 1990년대까지는 함경북도 출신으로 오해받았으나 나중에 경상도 출신임이 확인되었다.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사실상 마지막 경상도 출신 인물일 것으로 추정.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으며 메이지대학 대학원을 1년 다녔다. 해방 이후 아이치현 조선 제4소학교 교원으로 일하다가 1957년 5월에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에 가입하여 교육부 차장, 1958년 5월 조총련 교육문화부 부부장을 지냈으며 1961년 5월 교육부장까지 올랐다. 1961년 8월 북한에서 수여하는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1965년 10월 129차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들어와 1966년 8월 내각 문화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피바다가극단 단장에 임명되어 1972년에 알제리를 다녀왔으며 이후 평양예술단장으로 파키스탄, 이집트도 다녀왔다. 1972년 12월 정무원 문화예술부 부부장이 되었고 문화대표단장으로 불가리아,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폴란드 등 서유럽 각국도 방문했다. 1974년과 1975년에 만수대예술단장 자격으로 알제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소련에서 공연을 펼쳤으며 1977년에는 평양교예단장으로 프랑스도 다녀왔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고 1986년 5월 31일,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을 잘 추진한 공로를 인정받아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리창선의 뒤를 이어 문예부장에 임명되었다. 재일교포 중에서 실무자 라인에선 가장 고위직에 오른 경우인데, 북한에선 김일성의 대범함을 선전하려는 듯 장철을 불러 김일성이 동무를 일본 간첩이라고 음해하는 자들이 있지만 나는 그런 말 믿지 않는다고 그를 문예부장에 임명하였다고 한다. 근데 고영환의 증언에 따르면 문예부장 임명 직후 문화예술부 국장 중 한 사람을 자기가 원하는 사람으로 임명하려 했다가 장철이 재일교포 출신인걸 몰랐던 문화예술부 책임비서로부터 그 사람은 째찌(재일교포의 비하어 중 하나)라서 안된다고 면전에서 제지를 당하자 표정이 굳어져서 "그럼 나도 째찌 아닌가?"라고 중얼거리더니 몸이 아프다고 회의를 중단하고 퇴장하는 수모를 겪은 일도 있다고 한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8기 1차 회의에서 문예부장에 유임되었다. 1987년 4월, 김일성 75세 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8년 3월, 조선로동당 6기 13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89년 8월에는 조평통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정무원 부총리 겸 문예부장에 임명된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아 이중수훈자가 되었고, 1992년 6월 정부 문화대표단장으로 중국을, 1993년 11월에는 태국과 방글라데시를, 1995년 1월에 문화대표단장으로 중국과 베트남을 방문했다. 1998년 2월 조선 김정일화연맹위원장이 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7월, 홍기문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3년 1월, 리계백 장의위원, 1994년 7월 김일성과 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 1996년 9월, 려연구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1998년 9월 5일, 10기 1차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될 때까지 부총리 겸 문예부장으로 재임했다.
김일성의 부총리 상당수가 김정일 집권 이후 사라졌지만 장철은 예술을 좋아하는 김정일의 취향에 맞았는지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98년 11월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장에도 임명되었다. 말년에도 IPU총회에 참석하는 등 부지런한 행보를 보였고 사망 직전에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으나 2003년 8월 30일 6기 30분에 77세를 일기로 위암으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사회주의조국에 돌아 온후 당과 수령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속에 유능한 일군으로 자라나 국가주권기관과 문화예술부문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면서 사회주의제도를 공고발전시키며 우리 당의 문예정책을 관철하기 위하여 자기의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쳤다. 동지는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당과 수령의 위대성을 높이 칭송하며 여러 나라 인민들, 예술인들과의 친선단결을 강화하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동지는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우리 당과 주체혁명위업에 끝없이 충직하였다."라고 크게 칭송하였다.
2004년 4월, 애국렬사릉에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이후 북한에서 재일교포 출신 문인으로 계속 선전자료를 만들어서 배포하고 있다.
3. 여담
김정은 시대의 국가과학원장을 지내는 장철과 동명이인이다. 이 장철도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 모양인데 대의원 명단에 장철이 둘 다 있어서 다행히 헷갈리지 않는다.1948년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이 된 장철이 있는데 90년대에는 그 장철과 이 장철이 동일인물이라고 판단했지만 사실 그 장철은 최고사령부 후방 부사령관을 역임한 고려인 장철이다.
4. 참고문헌
- 통일부 정보분석국 사회문화담당관실, 북한의 주요인물 2005(서울: 통일부,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