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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승기

리승기
李升基 | Ri Sung-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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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출생 1905년 10월 1일
전라남도 창평군 가면 장전리
(現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장전마을)
사망 1996년 2월 8일 (향년 90세)
평양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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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19대손
직업 과학자
학력 교토제국대학 (공업화학과[1])

1. 개요2. 생애3. 영향4. 장의위원회 구성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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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화학자·교육인. 합성섬유 연구로 저명한 과학자였으며, 비날론 섬유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 북한에서 주체과학 담론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양녕대군파. 북한에서는 두음법칙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승기[2]'가 아니라 '리승기'로 표기한다.

2. 생애

1905년 10월 1일,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장전마을[3]#에서 태어났으며,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1925년 마츠야마고등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교토제국대학 공학부 공업화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후 오사카의 고에이사와 도쿄의 공업시험소 연구원을 거쳐 1936년 오사카부 타카츠키시에 위치한 교토제대 부설 일본화학섬유연구소의 연구강사로 재직하였다. 이 연구소에서 리승기는 사쿠라다 이치로 교수의 지도 하에, 재학 시절에 연구 주제로 삼은 합성섬유 연구를 계속하였다.

리승기가 합성섬유 연구에 착수할 당시 일본은 마침 합성섬유 개발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1930년대에 일어난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중국 침략으로 인한 대외관계 악화로 인해 자국의 주요 수출산업이었던 비단과 면직물을 수출할 시장과 원면의 수입 통로를 상실하면서, 견직물 산업이 침체했기 때문이었다. 여담이지만, 1930년대 미국에서 최초의 합성섬유인 나일론이 개발되고 난 이후 세계적으로 합성섬유의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합성섬유 기술을 일본이 실용화함으로써 수출을 증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은 1920년대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명된 수용성고분자화합물인 폴리비닐알콜(PVA. polivinylalcohol)을 이용해 합성섬유를 만들 계획을 수립하였다. 일본에서의 PVA 섬유 연구는 거대 섬유 자본의 지원 하에 세 연구실에서 독립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세 연구실 중 하나가 리승기가 있던 일본화학섬유연구소의 사쿠라다 이치로(桜田一郎) 교수팀이었다. 1939년 교토제대의 사쿠라다 교수팀은 '합성1호'라는 이름의 새로운 합성섬유의 개발에 성공했음을 발표하였는데, 논문 '폴리비닐알콜계 합성 섬유에 관한 연구'에 사쿠라다 이치로 교수의 이름없이 오로지 리승기 한 사람의 명의로 발표되었다.

이후로도 '합성1호'의 공업화 연구의 중요 성과들은 대부분 리승기 한 사람의 명의로 발표되었는데, 이런 점등을 보면 리승기는 사쿠라다 교수팀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리승기는 1939년에 교토제국대학에서 PVA 섬유 연구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공학박사 학위를(최초의 공학박사 혹은 최초의 제국대학 박사가 아님을 주의) 취득했으며, PVA 섬유 제조법에 관한 특허 역시 취득하였다. 한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직이 어려웠던 그가 탁월한 연구 업적으로 일본에서 연구자의 입지를 확고히 한 것이었다. 그는 즉시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조선인임에도 리승기의 명망은 실로 대단해서 일본과 식민지 조선 언론은 리승기가 미국의 나일론에 대항할 수 있는 발명을 했다면서 세계적 자랑이니 선풍적 혁명이니 섬유계의 혁명아니 온갖 찬사를 퍼부었으며 경성방직의 김연수가 리승기의 연구를 위해서 거액의 연구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이후 리승기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과학자들이 뭉치기 시작하였다. 리승기와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했던 김종원, 박상현 외에도 리승기의 심복 중 심복이라 불리는 마형옥, 학생신분이지만 같은 교토제대 연구실에 소속된 리창직. 교토제대 연구실에서 리승기를 포함하여 적어도 5명의 조선인 과학자가 있었다. 당시 조선인 과학기술인력이 매우 적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본다면 상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4]

'폴리비닐알콜계 합성 섬유에 관한 연구' 발표 이후 교토제대 화학섬유연구소의 합성1호 연구팀에서는 PVA 섬유의 성질 개선과 공업화 연구가 이루어졌다. 당시 PVA 섬유는 연화점이 낮고 뜨거운 물에 닿으면 수축되는데,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열처리를 하는 경우 착색되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경제적인 생산을 하기 위해서 적은 원료로 PVA 섬유를 생산해내는 공정을 고안하는 것 역시 PVA 섬유 실용화에 있어서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1940년에 발표한 두번째 논문에서는, 앞서 말한 단점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소개되었다. 열처리를 한뒤 포르말린 처리를 하여, 착색은 되나 95도의 고온의 물에서도 2.3%밖에 수축되지 않는 우수한 섬유를 만들었다고 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합성1호-B로 명명을 하였으며, 이후 이 합성섬유를 일본에서는 비닐론(ビニロン, vinylon), 북한에서는 비날론(vinalon)으로 부르게 된다.

이밖에도 방사욕에 황산 마그네슘이나 황산 아연을 3에서 5로 통제하면 열처리를 하여도 착색이 안되는 백색 섬유를 얻을수 있다는 결과를 발표하였고, 특히 리승기 박사가 주도한 연구팀은 경화 처리에 포르말린 대신 아세트알데히드를 넣음으로 일관 공정을 만들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1942년 중간 시험장을 건설하여 중간 공정을 거친 결과, 1942년 합성 1호 중간 시험장 예비 조업 보고에서 질이 많이 좋으며 공업화가 가능하다는 시험 결과가 발표가 되었다.[5] 즉, 이미 1942년에 공업화가 이루어져도 무방한 수준의 연구 결과가 발표된 것이다. 당시 연구에 참여했던 마경석 박사는 이미 이 무렵에 비닐론 양말과 내의도 실제로 시제품을 만들어 입고 와서 보여주기도 했다고 증언을 하였다.

하지만 리승기는 태평양전쟁 중인 상황에서 본인의 연구 성과가 일본의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것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상업화를 추진하지 않았고, 결국 합성1호 섬유는 전쟁 중에 양산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 와중에 리승기는 "일본은 패망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오사카 감옥에 구금되었으며, 구속 상태에서 종전을 맞았다.

광복 후 리승기는 교토제대와의 연을 끊고 마형옥, 리창직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일본의 식민통치 시절부터 조선인 과학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인정받아 왔기에 194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제2대 학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당시 리승기와 학문적 성취나 명성이란 측면에서 그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사람은 교토제대 화학과 교수로 활동했던 이태규 정도였다.

북한 지도부에서는 이런 리승기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리승기의 높은 명성을 탐낸 것도 있었지만, 경공업이 취약했던 북한에게 합성섬유를 연구한 리승기라는 과학자는 꼭 필요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북한은 부족한 과학기술인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건국 초기부터 과학기술자들을 우대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중요시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김일성종합대학과 과학원을 설립하고, 남한의 과학기술자에 대한 적극적인 월북 공작 그리고 이들을 주축으로 한 흥남공업대학의 설립 등이 바로 그 일환이었다.

또한 북한은 식민지 시절에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에게 "식민지의 인텔리는 본질적으로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성을 가지고 있다"라며 이들의 심적인 짐을 덜어주어 해방 이후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이 부담감을 덜 가지고 월북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반면 남한에서는 북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교육과 연구여건이 부실하였는데, 이는 서울대학교에서 일어난 국대안 파동으로 잘 드러났다. 이러한 배경에서 도상록을 비롯한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월북을 선택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리승기 역시, 북한에서 파견한 산업성 대표 리종옥의 설득 끝에 1950년 7월 31일경 가족을 비롯해서 그와 친분있었던 과학자 마형옥과 리창직, 그리고 그가 서울대학교 응용화학과에서 가르쳤던 제자들과 함께 월북하였다.

월북 이후 리승기와 그의 인맥은 평안북도 청수에서 비날론 공업화 연구를 시작하였다. 청수는 평안북도 최북단에 위치한 수풍 발전소와 압록강에 인접한 지역으로, 약 40만평의 카바이드와 아세틸렌 블랙 생산 공장이 있었다. 리승기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PVA 생산 공정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 카바이드 생산 설비가 필요했으며, 또한 전시 상황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중국과 인접하면서 외진 청수에서 연구하는 것이 유리하였기에 청수는 비날론 공업화 연구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리승기 연구팀은 전쟁 중에도 연구를 계속하여 1954년 중간 공장을 시험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중간 공장은 일일 비날론 생산량 20㎏ 규모로 출발하여 1957년에는 일일 비날론 생산량이 200㎏로 확대되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석회석을 원료로 하는 비날론 생산 공정이 완성, 1961년에는 2·8 비날론연합기업소를 설립하게 된다. 1959년 8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상수여위원회 결정 제2호에 따라서 '폴리비닐 알콜계 합성섬유를 제조하기 위한 연구에서 특출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이유로 인민상을 받았다.

비날론의 생산 공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석회석에서 카바이드를 얻고, 이를 물과 반응시킴으로써 아세틸렌을 만든다.[6] 그리고 이 아세틸렌의 일부를 아세트알데히드를 통해 아세트산으로 변환, 그리고 아세트산과 아세틸렌을 합성하여 아세트산비닐을 만든다.[7] 그런 다음 아세트산비닐을 중합하여 폴리아세트산비닐을 만들고[8], 이 폴리아세트산비닐을 비누화시켜 폴리비닐알콜[9]을 얻는다. 이렇게 합성한 폴리비닐알콜 사슬을 연장하여 폴리비닐알콜 사슬을 만들고 포름알데하이드를 반응시켜 폴리비닐알콜 사슬을 연결하여 섬유로 만들면 비날론이 완성된다. 실제 공업화 과정에서는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이밖의 다른 공정이 추가되기도.

북한에서 비날론 공업화가 결정되면서 비날론은 면 대용품으로 사용할 것을 분명히 밝혔는데, PVA 섬유가 리승기가 일본에서 연구할 당시와는 다르게 면 대용품이라는 용도로 쓰이게 된 데에는 PVA 섬유가 흡습성이 뛰어나다는 것 때문이긴 하지만, 그런 기술적 이유보다는 북한의 정치와 사회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크다. 면직물 공업과 관련 산업이 성숙했던 일본은 PVA 섬유를 면 대용품으로 사용할 필요가 적었던 반면에[10], 북한에서는 식민지시기부터 남한에 비하여 섬유사업이 취약하였으며, 기존에 있던 섬유 생산시설 역시 한국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북한은 면직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면화 영농법을 보급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북한의 한랭한 기후에서 면화 생산량을 늘리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비날론을 면직물 대체품으로 사용하려한 것이다.

또한 북한 지도부는 소련 중심의 국제분업체계에서 벗어나 자립적 공업화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북한에 풍부한 석회석을 원료로 여러 유기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비날론 공장을 통해 화학공업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 즉 중공업 설비를 건설하면서도 섬유를 얻을 수 있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리승기 박사 본인은 당시에 무리하게 신기술을 적용시켜 건설하려는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의 건설을 중간 공정을 거친 뒤 하자는 입장이었고, 석탄 화학 못지 않게 석유 화학도 중요하다는 사실까지 통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라는 사회의 특성상 수령이 까라면 까야하는 입장이었고, 현실적으로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이 한창 사회에 진입할때라 직물 생산도 빨리 늘려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11] 무리하게 목표에 직잡하여 그의 고견이 묻힌 것이다.

3. 영향

비날론으로 섬유부족 문제를 해결 하였고, 북한 주민들도 비날론으로 만들어진 옷에 대해 좋은 반응을 내놓았지만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를 건설하려 할때 리승기 박사와 우수한 박사의 중간 공정을 거치자는 충언을 무시한채 무리하게 신기술을 적용하겠다며 공사비를 필요이상으로 늘려놓았고 결국 만들려는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는 가동도 못한채 고철덩어리가 되었으며 비날론도 고난의 행군으로 제대로 만들지 못하게 되며 북한내에서 점차 쓰이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북한 정권이 순순히 실패를 인정할 리도 없고 주체과학이란 얼토당토 않은 담론을 들고나왔기에 그 핵심인 리승기의 지위는 굳건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김일성이 장수를 빌며 산삼을 보낸바 있으며 그의 90살 생일에는 김정일이 직접 생일상을 가지고 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북한 국민들에게도 매우 큰 존경을 받는 인물들 중 한명이다. 비날론은 비록 일반 합성 섬유에 불과 하지만[12] 북한 정부에선 주체 섬유라고 거창하게 선전을 했으며 북한에선 가장 뛰어난 과학자 중 하나로 높은 지위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린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북한 이공계 학생들에게는 최고의 워너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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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신미리 애국렬사릉의 리승기 박사의 묘.
이후 1996년에 향년 90세로 사망하여 국장이 거행되었고 평양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4. 장의위원회 구성

5. 여담

저서로 자서전인 《어느 조선 과학자의 수기》가 있다.

전두환 정부에서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이한기서울대학교 교수와 6촌형제이다.

그의 아내 황의분은 오빠가 이남에 있는 이산가족으로 2000년 8월 15일 이산가족 상봉 때 올케와 만나서 약간이나 한을 풀었다.

납북된 신상옥과 만난 적이 있는데, 신상옥이 북한 정권 수립 기념일에 끌려가서 웬 테이블에 앉으라고 해서 앉았는데, 맞은편에 앉은 노신사가 대체 신상옥이 누군가 싶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고 한다. 나중에 연회가 끝난 후에 신상옥의 안내인인 김주영 부부장이 그 노신사가 다름아닌 리승기고 리승기와 얘기를 나누던 것이 홍기문이라고 귀뜸해주었다고 한다.

월북자이지만 한민족 최초의 공학박사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고 본인이 정치적인 면을 크게 내비치지 않고 본연의 업무인 과학연구에 몰두했으며[13] 과학자들을 제대로 챙겨줄 여력이 없었던 8.15 광복 직후 한국의 열악한 사정이 참작되어 한국에서도 평가가 크게 나쁘진 않다.

이태규 박사와 함께 1930년대 당시 양대 교토제국대학 조선인 석학이었는데, 명성도 명성이지만 두 사람 모두 유학생들의 대부격인 인물이었던 듯하다. 장경학 교수라든가 당시 교토제대에 유학하던 조선 학생들이 '리승기 박사의 집에 놀러가서 그 집 사모님(위에 기재되어 있는 황의분)께 불고기를 얻어먹었다'는 증언들이 남아 있다. 양택식 서울시장 등 나중에 거물급 인사가 된 사람들도 리승기의 덕을 보았다고.


[1] 박사학위논문 : 繊維素誘導体溶液ノ透電的研究 (1939)[2] 하필 그 동명이인 가수 이승기도 같은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다.[3]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4] 일제강점기 통틀어 조선인 출신 공학박사는 불과 10여 명에 불과했으며,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에서 조선인 출신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리승기가 유일하다. 다만 조선인 최초의 공학박사는 아니다. 1934년에 최황이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조선인 최초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다. 그 외에 조선인 출신의 본토 제국대학 박사로는 우장춘(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 윤일선(교토제국대학 의학박사), 이태규(교토제국대학 이학박사), 윤치형(규슈제국대학 의학박사), 장기려공병우(나고야제국대학 의학박사), 계응상(도호쿠제국대학 농학박사) 등이 있다.[5] 논문에 '이상의 시험 결과에 의하여 이섬유 제품의 질이 상당히 우수하며 능히 공업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라고 되어있다.[6] CaC2+H2O → C2H2+CaOH[7] CH3COOH+C2H2 → CH2CHOCOCH3[8] nCH2CHOCOCH3 →(CH2CHOCOCH3)n[9] (CH2CHOCOCH3)n + nNaOH → nCH3COONa+nCH3OH[10] 앞서 언급한 1945년 막바지에 육군성이 PVA 섬유 생산을 지시한 것은 전쟁으로 인한 원면공급의 절대적 부족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고, 일본이 항복한 후 미국과의 관계가 호전됨에 따라 PVA 섬유를 면 대용품으로 쓸 필요가 없었다.[11] 이 당시 북한에서 옷도 북한에서 배급하는 물품이었는데(물론 이때도 모자라는 여분의 옷은 장마당이나 백화점같은곳에서 구매하기는 했다.) 옷생산을 늘리려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비날론 공장을 늘리는것이 필수였기는 했다. 문제는 정상적으로 만들었어도 괜찮을 것을 무리하게 신기술 적용시키겠다며 예산을 날려먹은것이지만.[12] 밧줄 등 산업용 섬유 용도로 쓸만한 기계적, 화학적 특성을 지녔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의복 용도로는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너무 번들거리고 주름이 쉽게 지고 보온성도 없고 수용성이라 물에 한번 빨면 확 줄어들어버리는지라 작업할때 막 입는 용도로 쓴다던가 걸레짝으로 쓴다고 한다.[13] 당연하겠지만 이랬으니 숙청이니 뭐니 단 한 번도 당하지 않고 사망할 때까지 김씨 일가에서도 학계 큰어르신으로 모셨다. 실제로 이 사람 뿐만 아니라 이공계 교수, 연구원들은 월북한 후에도 정치적인 행동만 안 하면 숙청 없이 평생 본업에 종사하면서 나름 편안히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