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c0021><colcolor=#fff> 前 내각 부총리 리태남 李泰男 | Ri Tae-nam | |
출생 | 1938년 3월 26일 평안북도 염주군 |
사망 | 2014년 1월 2일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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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38년 3월 26일에[1] 평북 염주군에서 태어났다. 평양기계대학 졸업 이후 금속가공기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라남탄광기계공장 직장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중앙위원회 지도원, 부과장, 과장을 거쳐 1982년 강선제강련합기업소 당책임비서로 부임했다. 이후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남포시 행정경제위원장을 지냈으며 황해제철연합기업소 책임비서를 지냈다. 초기에는 리태연이라는 이름을 썼다. 이후 천리마 강선제강련합기업소 책임비서로 사업하였다.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96년 함경남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 현철규가 아들 현성일의 남한 망명으로 인해 숙청당하자 후임 함경남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에 부임했다. 1996년 2월, 리태연의 명의로 리승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고 김정일 체제가 자리잡히는 와중에 책임비서와 인민위원장을 분리하는 조치가 취해짐에 따라 함경남도 인민위원장 자리를 김풍기에게 물려주었다. 최고인민회의 예산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2003년 전 내각총리 홍성남이 퇴임함에 따라 함경남도 책임비서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고 평안남도 책임비서 리길송의 뒤를 이어 신임 평안남도 책임비서로 이동했다.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 2007년 6월, 리인모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2009년, 승리자동차연합기업소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 이것이 겸임이 아니라 이동이었는지, 북한이 2010년에 발표한 약력에는 분명히 2003년부터 비서를 지낸 리태남을 2009년부터 평안남도 비서를 지냈다고 하고 있다. 2009년 3월,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도 탈락하는 등 잠시 경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2009년 어느 시점부터 다시 평안남도 책임비서로 임명된 것으로 보이며, 2010년 6월 7일, 최고인민회의 12기 3차 회의에서 내각 부총리로 임명되면서 홍인범에게 책임비서 자리를 물려주고 퇴임했다. 2009년 사망한 홍성남 장의위원 명단에도 리태남만 빠져 있어 당시에도 교체설이 제기된 바가 있다.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0년 6월, 김영일 내각이 2009년 화폐개혁의 희생양으로 숙청당하고 최영림 내각이 출범함에 따라 강능수, 김락희, 전하철, 조병주, 한광복과 함께 최고인민회의 12기 3차 회의에서 신임 내각 부총리로 선출되었다.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월, 박정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1년 4월 7일, 건강상의 이유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내각 부총리에서 해임되었으며 같은날 열린 12기 4차 회의에서 해임이 추인되었다. 하지만 숙청이 아니라 정말로 건강 문제였는지 12월에 김정일 사망 이후 장의위원에 위촉, 2012년 2월 김정일훈장의 1차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소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2014년 9월, 애국렬사릉에 시신이 안장되었다. 내각 부총리 해임 이후에는 평안남도당위원회 제2비서를 지냈는지 그 직함으로 묻혔다. 기일은 2014년 1월 2일이다.
3. 여담
그의 장례식날 나온 가족들을 보면 자식으로 4형제를 두었다. 또한, 농업과학원의 교수박사 리태남이라는 동명이인 농학자가 있는데, 통일부에서는 그 리태남과 이미 죽은 이 리태남이 동일인물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4. 참고문헌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 2017 (서울: 통일부, 2016)
[1] 2010년 3차 당대표자회에서 북한에서 발표한 생일. 그런데 애국렬사릉에는 6월 25일 출생으로 생일을 바꾸어서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