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내각 부총리 전하철 全河哲 | Jon Ha Chol | |
출생 | 1928년 4월 22일 ([age(1928-04-22)]세)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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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28년 4월 22일에 태어났다. 전창철의 사촌이라는 정보가 있다. 2010년에 그가 내각 부총리에 선출되었을대 북한의 보도에 따르면,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이후 지질물리탐사전문가 자격을 취득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1985년 소련 대사에 설명한 것에 따르면 소련에서 광산학을 공부했다. 이후 과학원 연구사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과학원 실장으로 진급, 중앙위원회로 옮겨 과장으로 일하다가 내각 사무국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사무국 부국장, 제1사무장을 거쳐 1970년 내각 지질총국장으로 승진했다. 1970년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1972년 사회주의 헌법 실시 이후 정무원 광업부장, 책임참사로 일하다가 지방으로 내려가 평안남도 경제비서, 1983년 량강도 경제지도위원장을 지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유임, 1982년부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총무부장 및 김일성 비서를 지내다가 1983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8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어 당중앙위원회 제1경제부에서 분리된 채취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총무부장을 최영림에게 물려주고 경제부문에서 사업하였다. 1985년 4월 13일, 해방 40주년, 당창건 40주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이후 1990년에 다시 금수산의사당 서기실 책임서기, 즉 김일성의 비서실장에 임명되었으나 김일성이 그의 일솜씨에 만족을 못해서 또 최영림으로 교체되었다.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아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이후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10년 정도 소식이 없었다.
그러던 중 2006년 중앙위원회 계획재정부 부부장으로 발탁되면서 다시 정치 일선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2010년 6월, 최고인민회의 12기 대의원에 보선되는 한편, 최고인민회의 12기 3차 회의에서 김영일 내각이 2009년 화폐개혁의 책임을 지고 숙청당하는 와중에서 강능수, 김락희, 리태남, 조병주, 한광복과 함께 수임 내각 부총리에 선출되었으며 곽범기의 뒤를 이어 내각 부총리 겸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장에 선출되었다. 2010년 9월,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유임되었으며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을 지냈고 2012년 2월에 김정일훈장의 1차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2012년 4월, 최고인민회의 12기 5차 회의에서 부총리에 해임, 후임 부총리인 김용진에게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아마 2012년 4월의 4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 해임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내각참사 직책을 가지고 2018년에 김일성을 칭송하는 편집물 <생애 마지막 순간>에 등장하여 김일성과의 썰을 풀었다.
3. 여담
통일부 산하 북한정보포털에서는 전하철이 내각 부총리 해임 이후 사회과학원 산하 김일성-김정일주의 연구소장으로 내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 이는 황당한 오류이다. 이 전하철은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장을 지낸 동명이인으로, 내각 부총리 전하철이 부총리에서 해임되기 한참 전인 최소 1999년부터 철학연구소장을 지냈으며 뭣보다도 2012년 6월 14일자 기사에서 65세의 남성이라고 보도되었으므로 부총리 전하철과 나이가 맞지 않다. 그리고 전하철은 경제 테크노크라트 출신이데, 이 전하철은 주체사상 이론가라서 분야도 맞지 않다. 이 이론가 전하철도 늙어서 은퇴했는지 2023년 10월 시점에서 사회과학원 연구사로 내려갔다.4. 참고문헌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 2013(서울: 통일부,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