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3:16:07

최영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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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총리
최영림
崔英林 | Choe Yong-rim
파일:최영림.jpg
출생 1930년 11월 20일 ([age(1930-11-20)]세)
함경북도 경흥군
국적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학력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김일성종합대학 (학사)
모스크바 대학교 (기계공학 / 학사)
직업 관료, 정치가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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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내각 총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및 명예 부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 평양시 책임비서 등을 지냈다.

김정일 시대의 마지막 총리이자 김정은 시대의 첫 총리다.

2. 생애

1930년 11월 20일,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나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으로 입학했다. 6.25 전쟁 발발 후 혁명학원 동기들과 함께 최고사령부 호위총국 군관으로 입대하여 친위중대, 사단 문화지도원으로 복문했다. 1952년 9월, 세르고 오르조니키제 모스크바 기계공학대학에 진학하였다. 김일성이 자신의 부관으로 일했던 최영림을 꽤 아꼈는지 1953년 9월, 소련 방문 때 그를 따로 북한 대사관으로 불러 접견하기도 했다. 혁명가 유자녀 교육기관인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교육을 받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혁명 2세대 출신으로 추정된다. 김정일과 무려 2군데나 동창인 금수저 출신. 여기에 모스크바 유학 경험으로 양형섭, 김영남 등 주요 엘리트들과도 두루 인맥이 있다.

1957년에 대학을 졸업하여 귀국 후 평양의 공장에서 현장기사로 잠시 일했고, 간부양성 과정을 거쳐 1956년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에 등용됨으로 경력을 시작하였고, 1967년 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으로 승진, 갑산파 사건에 참여하여 김일성의 갑산파 숙청을 도왔다. 이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사업하였으며, 1970년 11월 중앙위원회 위원, 1971년 6월 중앙위원회 청년사업부장에 임명되는 등 전형적인 당관료의 경력을 걸었다.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5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73년 주석부 책임서기에 임명됨으로 10년 동안 김일성의 비서를 지냈다. 이때 김일성은 물론, 김정일에게 늘 보고하여 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츨되면서 주석 책임서기를 그만두었고, 1982년 2월에 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82년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 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고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다.1982년 8월, 6기 6중전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승진하였으며 1983년 4월, 최고인민회의 7기 2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어 경제업무를 보게 되었다. 일각에는 1984년 2월에 정무원 제1부총리까지 승진했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북한 보도가 없으며 북한에서 발표한 최영림의 략력에도 제1부총리는 없다. 어쨌거나 1985년 10월 1일, 정치국-중앙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정무원 부총리에서 해임되어 전하철의 후임으로 당 총무부장에 임명, 다시 김일성의 책임서기로 일하게 되었다. 이는 소련에서 광산학을 공부한 전하철이 당 제1경제부에서 독립한 채취공업부장에 임명되면서 책임서기 자리가 공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정무원 부총리에서 물러난 것에 대해 공공연히 기쁨을 드러내다가 당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1986년 2월, 6기 11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에서 소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86년과 90년에 8,9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90년 5월,6기 18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복귀하였는데, 김정일이 이후 정치국에 거의 손을 대지 않으면서 2010년 9월, 제3차 당대표자회가 열릴 때까지 20년 동안 정치국 후보위원직을 유지하게 된다. 또한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에서 선출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7월, 방학세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12월 1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국가계획위원장 자리를 김달현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부총리 겸 금속공업부장으로 이동하였다. 1994년 7월, 김일성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나,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가 개최되자 한직인 중앙검찰소장으로 이동, 법제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3년 8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나 중앙검찰소장 자리는 리길송에게 물려주고 물러났다. 2005년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1기 3차 회의에서 사망한 전임 서기장 김윤혁의 뒤를 이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에 임명되었다.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 2009년 3월, 홍성남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9년에도 12기 대의원 겸 상임위원회 서기장에 재선되었으나 8월에 평양시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지냈는데 여기선 지방당 책임비서 자격으로 위촉된 것을 서열상 확인할 수 있다. 2010년 4월, 12기 2차 최고인민회의에서 정식으로 서기장에서 해임되어 변영립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김영일 내각에서 당 계획재정부장 박남기가 주도했던 2009년 11월의 화폐개혁이 참혹한 실패로 끝나 민심 이반이 심각해지자, 김정일은 정권 안정화를 위해 박남기를 총살하고, 4월에 이미 최고인민회의가 개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개월 만인 6월에 긴급 최고인민회의를 소집하여 김영일 총리와 부총리 곽범기, 오수용, 박명선을 해임한 후 경제사정이 좋았던 김일성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정권에 안정감을 부여할 수 있는 원로이며 당료인 최영림을 내각총리 겸 비상방역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와 함께 황해남도 책임비서 김락희(1933), 평안남도 책임비서 리태남, 역시 김일성의 책임비서 출신인 중앙위원 전하철, 중앙위원회 영화부장 강능수 등이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2010년 9월에 개최된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최영림은 리영호, 김영남과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국방위원회의 장성택, 당의 최룡해, 군부의 리영호와 상호 견제하면서 새 후계자 김정은을 보좌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자 장의위원에 임명되었으며, 김정은, 김영남에 이어 서열 3위를 기록했다. 2012월 2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이 새로 김정일훈장을 제정함에 따라 김영남, 리영호, 장성택, 김옥 등 132명의 간부들과 함께 최초의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2012년 4월에 개최된 4차 당대표자회에서도 상무위원에 재선출되었다. 하지만 차차 태종수, 주규창, 최룡해, 박도춘 등의 부상에 밀려나다가 2013년 3월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소환되었다. 이는 내각 총리 해임에 앞선 인사조치로, 2013년 4월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12기 7차 회의에서 박봉주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에 임명되어 완전히 정치에서 은퇴했다. 다만 예우상 당중앙위원회 위원 자리는 유지하였다. 2013년 12월, 김국태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4년 3월,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선되었다. 2017년 10월 7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 2018년 4월 2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 참석하는 등 당중앙위원으로의 업무도 어느 정도 소화했다. 2019년 3월, 14기 대의원에서 마침내 탈락했으며 2019년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헌법 개정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자리가 폐지되면서 자동적으로 물러났다. 지금도 국가원로로서 김정은과 자주 친목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외에 자식들도 다 잘나가고 있어 최선희는 외무상, 정치국 후보위원을 맡고 있으며 아들인 최승호는 중앙통계국장, 당중앙검사위원장을 역임했다. 다만 최승호는 2019년 이후 소식이 없다.

2021년 1월, 조선로동당 제8차대회가 개최된 후 기념열병식에 김영남, 양형섭, 김기남, 최태복, 김경옥, 리용무, 박봉주 등 은퇴한 영감들이랑 같이 주석단에 초청되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2021년 7월 7차 로병대회에서도 6.25 전쟁 당시의 인민군 군복을 입고 다시 등장했는데 자신보다도 어린 현철해는 치매 때문인지 휠체어에 앉아서 맛간 모습을 보였지만, 최영림은 부축도 없이 멀쩡하게 걸어다니면서 김정은과 열성적으로 악수하는 등 90의 고령임에도 매우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2022년 4월 25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열병식에서도 초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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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절 행사에서의 최영림.(리설주와 김정은 사이) 옆에 태종수, 김정은, 리설주, 리병철, 김여정이 보인다.

2022년 7월 26일, 8차 로병대회 주석단에 포함되었다. 상당히 노쇠하였는지 1년 전과 달리 휠체어를 타고 대회장에 들어왔다. 그나마 주석단에서는 스스로 일어서 박수를 치는 등 어느 정도는 양호한 모습이었다. 2022년 정권수립 74주년 기념행사에 김영남, 박봉주, 리명수, 최태복, 김경옥, 박재경, 황병서, 김정각과 함께 초대받았다. 9월 9일에 열린 경축연회에도 다른 노간부들과 함께 참석했다. 10월 13일, 만경대혁명학원 창립 75주년 체육 및 유희오락경기에 동창 자격으로 참석해서 관람했다. 많이 노쇠했는지 같이 참석한 태종수는 일어서서 박수를 치는 등 상대적으로 정정한 모습을 보였으나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만 있었다. 10월 14일, 4.25 문화회관에서 열린 만경대혁명학원과 강반석혁명학원창립 75돐기념 련환모임에 참석, "수령결사옹위는 혁명가유자녀들의 제일사명이며 혁명학원의 성스러운 전통 (...) 언제 어디서나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목숨바쳐 보위"하라고 당부하였다.

2023년 7월 27일자 조선신보에 그의 친위중대 복무시절에 관한 인터뷰가 게재되었다. 7월 27일, 노간부 자격으로 조국해방전쟁승리 70돐경축 대공연에 참석했다. 이후 열병식에서 친위중대상징종대를 이끌고 행진했다. 한달 후인 9.9절 열병식에도 노간부 자격으로 초대받았다.

3. 여담

  • 만 79세 8개월로 총리에 임명되어 만 82세로 퇴임함으로 북한 역대 내각수상, 정무원총리, 내각총리를 합쳐서 최고령 총리라는 기록을 세웠다. 최영림의 임명 자체가 2009년 화폐개혁의 실패로 끝장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이미 은퇴한 최영림을 허겁지겁 다시 데려온 것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김정일과 달리 노간부들을 죽을 때까지 부려먹지 않는 김정은 리더십의 특성상 이 기록이 경신되기는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후임 총리인 박봉주가 만 74세로 총리에 임명, 만 80세로 퇴임함으로 근소하게 2위 기록이다.
  • 태영호의 아내 오혜선의 회고에 따르면, 무역성 참사 회의 때 그를 한번 만나봤는데 김일성 시대에는 경제상황이 이렇지 않았다면서 옛날 얘기만 늘어놓으면서 넋두리를 하다가 회의가 끝날 때 총리인 자신의 주머니에 1달러조차 없다고 한탄을 했다고 한다.

4. 참고문헌

  • 강석승, 「이달의 인물초점: 최영림」『北韓』325(1999.1)
  • 김창희, 「김정은 체제 권력구조와 정치행태 분석」『통일전략』 13(1) (2013.1)
  • 박영자 외, 『김정은 시대 북한의 국가기구와 국가성』(서울: 통일연구원, 2018)
  • 북한연구소 편집부, 「이달의 북한 인물 초점: 최영림(중앙검찰소장)」『北韓』374(2003.2)
  • 이교덕 외, 『김정은 체제의 권력엘리트 연구』(서울: 통일연구원, 2012)
  • 정성장, 「김정은 시대 북한의 입법 및 국가대표 기구 연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역할과 엘리트를 중심으로」『KDI 북한 경제리뷰』(20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