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C001B, #BC0021 20%, #BC0021 80%, #9C001B); color:#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003478,#C39335> 정무원 제1부총리 1982년 8월 31일 직함 신설 | |
강성산1982-1984 →[1] 연형묵 1985-1986 → 김윤혁 1986-1986 → 홍성남 1986-1987 1987년 10월 14일 직함 폐지,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으로 대체 | ||
[1] 1984-1985년 사이 남한 언론에서는 최영림이 제1부총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북한 문헌에선 당시 제1부총리 직함을 사용하지 않았음. | ||
<rowcolor=#003478,#C39335> 정무원 부총리 | ||
5기 1972-1977 | 정준택·박성철·김만금·홍원길·최재우·남일(1972) 리근모·정준기·홍성남·허담(1973) 김영주(1974) 공진태·연형묵(1975) 리종옥·계응태(1976) | |
6기 1977-1982 | 계응태·허담·정준기·강성산·공진태·김두영(1977) 강희원·로태석(1978) 김경련(1979) 조세웅·서관히(1980) 홍시학·김회일·홍성룡·최광·리근모재임명(1981) | |
7기 1982-1986 | 강성산·계응태·허담·홍성룡·홍시학·최재우·공진태·최광·김창주·김회일·김두영·김복신·정준기(1982) 김환·김영남(1983) 최영림·조세웅재임명·김복신재임명·김창주재임명(1984) 연형묵·안승학·현무광(1985) 홍성남재임명(1986) | |
8기 1986-1990 | 홍성남·김영남·김복신·정준기·김창주·김윤혁·최광·정준기(1986) 조세웅재임명(1988) 강희원재임명(1989) | |
9기 1990-1998 | 홍성남·강희원·김윤혁·김창주·장철·김영남·최영림·김복신·김환·김달현(1990.5) 홍시학재임명(1990.10) 공진태재임명(199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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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3478,#C39335> 제1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정준택 | 박창옥 | 리종옥 | 림계철 | ||
<rowcolor=#003478,#C39335>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정준택 | 윤기복 | 최재우 | |||
<rowcolor=#003478,#C39335>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홍성남 | 홍성룡 | 로태석 | 공진태 | 홍성룡 | |
<rowcolor=#003478,#C39335>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홍성남 | 박남기 | 홍성남 | 김달현 | 홍성남 | |
<rowcolor=#003478,#C39335>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
최영림 | 김달현 | 홍석형 | 박남기 | 김광린 | |
<rowcolor=#003478,#C39335>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
로두철 | 김일철 | 박정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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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1979년 (향년 60세)
1. 개요
북한의 정치인이다. 흔치 않게도 경상도 출신으로 북한의 고위직에 오른 공업 테크노크라트.2. 생애
1919년 8월 25일 경상남도 밀양군[1]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2], 대구공립상업학교[3] 졸업 후 경상북도 영일군에서 청하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했다. 1940년 4월에 유학을 다녀왔으며 변호사가 되어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고 한다.해방 이후 월북하여 흥남지구인민공장, 흥남비료공장에서 일했다. 남한으로 밀항하여 강영창 등 여러 과학자들을 북한에 월북시킨 것이 바로 그라고 한다. 1953년 8월, 함흥시 화학공장 건설장 기사장으로 일하다가 1954년 내각 사무국 참사 겸 인민경제대학 교수를 지냈다. 이후 1955년 11월 국가계획위원회 화학건재국장에 임명, 1957년에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승진하여 내각 물자총국 총국장, 금속공업성 제1부상을 지냈다. 1960년 1월에 조선로동당 경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1년 11월 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중공업위원회 제1부위원장, 내각 성원에 임명되었다. 남한 출신에 해방 이전 고등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낡은 인테리 분자가 요직에 등용될 수는 없다는 공격도 당했으나 김일성이 로태석을 총애하여 계속 중용하였다고 한다.
1964년 1월,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71년 3월 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식료및일용품공업성이 폐지되고 지방공업성이 새로 설치되자 실업자가 된 식료및일요품공업상 리호혁을 대신하여 지방공업상에 임명되었으며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정무원 지방공업위원장에 유임되었다. 이후 지방공업위원회가 경공업위원회 지방공업총국으로 개편되면서 지방공업총국장에 유임되었다.
1976년 11월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으며,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78년 8월,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 1978년 11월 중앙위원회 5기 17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79년 11월, 홍성롱의 후임으로 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영광을 얼마 누리지도 못하고 1979년 12월 31일, 60세를 일기로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아들 로두철의 회고에 따르면 김일성이 "아니요. 그 동무가 죽다니, 그렇게 죽을 수 없소. 정말 아까운 사람을 잃었소. 아까운 간부를 너무도 일찍 잃었소."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멸의 주체사상을 높이 받들고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하여, 나라의 인민경제발전을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실로 로태석동지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그 어떤 어렵고 복잡한 환경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끝없이 충직하였으며 당과 혁명을 위하여, 조국의 부강발전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정책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라고 후하게 칭송했다.
애국렬사릉 조성 이후 그곳에 안장되었다.
3. 여담
로두철을 포함하여 아들 셋, 딸 셋 등 무려 여섯 자식을 거느렸다.4. 장의위원회 구성
위원장 | 리종옥 | 위원 | 김윤혁 | 위원 | 김태극 |
위원 | 계응태 | 리지찬 | 김종성 | ||
김만금 | 윤호석 | 정동익 | |||
강성산 | 김경명 | 리동협 | |||
정준기 | 림계철 | 박남기 | |||
윤기복 | 고정식 | 박원표 | |||
최재우 | 림형구 | 주병찬 | |||
조세웅 | 홍성남 | 안봉기 | |||
공진태 | 허순 | 조영남 | |||
김두영 | 태종수 | 정원국 | |||
김경련 | 방철갑 | 주인현 | |||
조창덕 | 동민광 |
5. 수훈
- 공화국창건 20주년훈장
- 로력훈장
- 국기훈장
6. 여담
그의 아들이 역시나 부총리, 국가계획위원장을 지낸 로두철이다.7.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조선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