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오랫동안 재정부장을 역임한 북한의 재정 테크노크라트이지만 1980년대 초 숙청당했다.
2. 생애
과거 자료에 의하면 1925년 9월,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해방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1949년 모스크바 대학에 유학을 다녀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국 후 인민경제대학 경제학부장으로 교편을 잡았으며 1960년 5월, 내각 서기국[1] 부국장 재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1961년 국가계획위원회 설계국장 재임이 확인되었으며, 1962년 11월, 당중앙위원회 재정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1965년 11월, 내각 대외경제총국장 임명이 확인되었다. 1967년 12월,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대외경제총국이 대외경제위원회로 격상됨에 따라 대외경제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68년 7월, 경제대표단장으로 동독을 다녀왔으며 1969년 3월, 북한-소련 경제 및 문화협정 20주년 기념보고회에서 보고하였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대회대표자자격심사위원회 위원에 위촉,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는데 이미 이전에 당중앙위원회 위원이나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71년 6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공진태에게 대외경제위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재정상으로 조동되었다.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내각 재정성이 정무원 재정부로 개편됨에 따라 재정부장에 유임되었다. 1972년 12월, 리경석 장의위원,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을 지냈다.이후 매 최고인민회의 회의 때마다 재정부장으로 재정보고를 하였으며, 유엔무역개발회의 및 3세계 각국에 재정 관련 회의에 다녀왔다. 1977년 12월,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재정부장에 유임되었으며, 이후 대의원 자격으로 예산 보고도 하면서 6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980년 1월, 로태석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이 시점부터 정무원 부총리 직함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재정부장 자리는 윤기정에게 물려주었는데, 북한에서 밝힌 윤기정의 재정부장 임명 시점은 1979년 12월이니, 이때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재선되었다.
7기 대의원 재선 직후인 1982년 4월의 최현 장의위원회에서 탈락하는 등 부총리에서 해임된 정황이 보이더니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모든 직무에서 탈락했다. 이에 대해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활동하다 탈북한 조명철이 증언하였는데, 1982년에 김경련이 사석에서 개선문, 주체사상탑, 김일성경기장 등 소위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특수건설에 막대한 돈을 쓰는 것을 두고 "이런데 너무 많은 돈을 쓰면 안된다"라고 지극히 상식적인 우려를 표명했다가 반당발언을 한 것으로 체포되어 온 가족과 함께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 따라서 숙청 시점은 1982년 2월부터 4월 사이 시점으로 보인다.
3. 참고문헌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1] 원문의 표기. 내각 사무국을 의미하는 것인지 수상 서기실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명.